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33화 (133/200)

17장 가짜 : 큰일난 망나니

칼론 제국.

갈라나흐.

브론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일어났다.

숙소는 온통 난장판.

칸 일행과 작별하기 전 마지막으로 벌인 술 파티의 흔적이었다.

“아으, 머리야.”

비틀대며 수통에 담긴 물을 마셨다.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평소보다 두 시간은 늦게 일어났다.

서둘러 옷을 걸치려다가 멈칫했다.

“일찍 갈 필요가 없어졌구나.”

지난 몇 달 동안 꿈을 꾼 듯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외지 모험가인 줄 알았다.

원래 가르치기 좋아하던 그의 성격대로 선배 행세 좀 했다.

이전에도 이런 경우는 늘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가지였는데, 대부분 무시와 경멸이었다.

가끔 순진한 후배들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 밑천이 드러나면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곤 떠났었다.

‘하지만 칸은 달랐지.’

그는 이미 완성체였다.

자신이 건드릴 필요 없는.

사냥터에서 트롤을 단칼에 베어버린 장면은 꿈에 나올 정도로 충격이었다.

15년 동안 실버로 살면서 온갖 인간 군상을 봤었다.

그런 브론에게도 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돌연변이였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과 더 해보고 싶다.

그리고 브론은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평생 갈 일 없을 거라고 여겼던 마수의 숲에 들어갔다. 그것도 가장 최심부로.

그곳에서 만난 마수의 숲지기.

중간에 우리를 죽이려고 뒤를 급습한 아쉘 패거리.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떨리는 적을 칸은 대수롭지 않게 처치했다.

이쯤 되니 그가 힘들어할 만한 상대가 아르니아 대륙에 있을지나 궁금했다.

결국 브론은 사람을 잘 만난 덕에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무려 1천 골드라는 종잣돈을 얻었다.

등급도 플레티넘이 되었으니 앞으로 의뢰를 받기도 수월해졌다.

전부 칸과 인연이 닿은 덕분이었다.

‘고마운 녀석.’

이제는 헤어졌으나 브론은 그를 평생 잊지 않기로 했다.

모험가 길드에 출근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확실히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하! 브론 아재. 잘 지냈수?”

“우린 골드 등급 파티인데, 플레 등급 의뢰를 받고 싶어서 말이지.”

“브론 선배, 마수의 숲지기를 실제로 봤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바빴지만 알찬 하루.

브론은 오늘이 생일이 아닌가 싶었다.

일전에 자신을 무시했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다가온다.

걸핏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아론 패거리까지 사라졌으니 심리적으로 부담될 일도 없었다.

“퇴근하고 시간 남아요?”

심지어 데이트 신청까지 받았다.

여자는 갈라나흐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리아.

꿈만 꾸던 일들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다.

데이트 약속까지 잡고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딱 닫자마자 브론이 느낀 감정은 기쁨도, 설렘도 아닌 허전함이었다.

“나도 가자고 할 걸 그랬나···”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겉만 번지르르한 쭉정이임을 알면서도, 그는 칸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었다.

아마도 자기가 간다고 하면 칸은 흔쾌히 승낙했겠지.

그래서 간다고 하지 못했다.

선배 노릇도 못하는 선배는 선배가 아니니까.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진짜 선배이고 싶었다.

“응?”

난장판을 정리하던 브론의 눈에 낯선 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침대 밑에 숨겨져 있었다.

혹시 칸 일행이 까먹고 간 걸까.

‘난리 났군.’

지금이라도 뛰어가면 전달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일단 내용물이라도 확인해보자.

주머니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펼쳐지는 금빛 물결.

“우왓!!”

안쪽에 있는 건 황금 덩어리였다.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었다.

맨 위에는 쪽지가 놓여있었다.

반사적으로 집어들고 읽었다.

[브론 선배의 행복을 빕니다. 아마도 결혼식은 못 갈 것 같군요. 대신에 축의금 두둑이 내겠습니다. 갈라나흐에서 재회하길 바라며. -칸-]

주머니에 든 건 5천 골드.

이 정도면 평생 놀고먹어도 된다.

브론의 눈앞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하아, 선배 체면이 끝까지 말이 아니구먼.”

그때 브론은 결심했다.

어떤 식으로든 후배님의 도움이 되기로.

예전에 어떤 동료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그때는 속으로 비웃었다.

하나뿐인 목숨을 가족도 아닌 남을 위해 버리는 바보냐고.

하지만 지금은 이해가 갔다.

자신은 칸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었다.

‘후배님, 언젠가 반드시 다시 보길 바라네. 그때를 위해 나 또한 진짜 선배가 되어있겠네.’

* * *

다시 돌아와서.

벨라누스 신성국.

입국 심사장.

성문 앞은 난리가 났다.

솔직히 이렇게 눈에 띄는 사고를 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뇌물을 갈취하다 못해 성희롱까지 하는 대머리 사제가 눈앞에 있는데 이걸 어떻게 참나.

바로 가서 죽탱이를 날려버렸다.

“커헉! 컥! 잘모해습니다···”

“아냐. 내가 너 같은 놈들을 많이 만나봐서 알아. 지금이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뒤돌아서면 까먹는 금붕어야.”

“아입니다···”

강냉이가 털려서 발음이 새는 사제를 몇 번이나 더 때렸다.

비기 때린데 또 때리기를 사용해서.

어느새 성문 안쪽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늙은이가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뒤에는 병사 일백과 기사 스물이 따라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은 누군데 신성국 사제를 입국심사장에서 폭행하고 있습니까?”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우리에게 겨누었다.

기사들도 검을 빼들었다.

늙은 주교가 손만 내리면 바로 공격할 기세였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만.”

화려한 오리하르콘 등급패를 흔들었더니 조금 전만 해도 적개심을 불태우던 주교의 눈빛이 격하게 떨린다.

“모, 모두 칼을 넣어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래서 계급장이 깡패라는 건가.

말투도 아까보다 사뭇 공손해졌다.

“정말 오리할콘 모험가십니까?”

“!!!”

주교의 입에서 나온 오리하르콘이란 단어에 입국심사장에서 구경하던 인파가 일제히 수군댔다.

이들은 모험가가 아니라서 등급패를 보고도 누군지 몰랐는데 주교가 직접 말로 확인시켜준 것이다.

“나 오리할콘 모험가 처음 봐.”

“신기하다. 엄청나게 강하겠지?”

“당연하지. 다이아 모험가만 해도 찾아보기 힘든데 오리하르콘은 진짜···국가급 전력이라 봐야겠지.”

군중의 분위기가 신성국 주교를 더욱 압박했다.

“크흠흠! 오리할콘이라니. 너무 의외로군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제가 아는 분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칸이다.”

“!!!”

칸.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최근에 갈라나흐에서 마수의 숲지기를 토벌하고 오리하르콘 등급패를 받은 모험가가 아닌가.

워낙에 유명한 사건이라 칼론 제국은 물론이고 신성국의 주교와 사제들도 한 번씩은 들어봤었다.

“정말로 칸님이십니까?”

“속고만 살았나. 물론이다.”

“귀하신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어찌하여 저희나라 사제에게 손찌검하셨는지···”

“저 사제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추행했다.”

주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칸의 엉덩이는 육안으로 봐도 지나치게 딱딱한 근육 덩어리였기에.

반면에 얻어맞은 대머리 사제는 기가 막혔다.

추행을 했다니.

강제로 손목을 잡고 엉덩이를 만지게 했지 않던가.

억울한 마음에 입을 열려는 찰나,

“그렇지 않은가?”

내 눈빛이 정면으로 박혔다.

요요한 기운이 흩뿌려졌다.

심장이 옥죄어지는 기분에 대머리 사제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게···”

“왜? 부정하고 싶나? 너 내 엉덩이 만졌잖아. 안 그래?”

“그게···만지긴 했는데.”

“본인 입으로 인정했네.”

인정하면 끝이지.

주교도 한숨을 쉬고 손을 내젓는다.

“형제여, 그대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네.”

“아닙니다! 저는 결코!”

“더 들을 것도 없지. 당장 끌어내서 참회실에 구금하라.”

“으아아아아!!!”

변태 뇌물 사제가 체포되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늙은 주교가 손을 비비며 사업용 미소를 지었다.

“칸님, 신성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울러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죄드리지요.”

“나도 원래 이리 속 좁은 사람은 아닌데, 조금 흥분했소. 벨라누스님을 봐서 너그럽게 넘어가리다.”

“역시 통이 크십니다. 오리하르콘 등급은 아무나 받는 게 아니군요.”

이어서 주교는 나에게 신성국을 구경시켜주겠다며 가이드를 자청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모험가의 근본은 떠돌이요. 그런 대접은 귀족이나 받는 거지. 날 신경 쓰지 않는 게 날 도와주는 거요.”

“하지만···”

“난 괜찮소. 그러면 들어가겠소이다.”

나를 포함한 일행이 쌩하니 들어갔다.

워낙 크게 사고를 친 덕분에 메리안은 검사조차 안 하고 자연스럽게 신성국으로 들어왔다.

“메리안, 집으로 안내해라.”

“네.”

메리안의 집은 신성국에서도 후미진 달동네였다.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한참은 돌며 올라가니 집시들이나 머물 천막들이 즐비했다.

그중 한 천막에 선 메리안은 잠시 그곳을 바라보다가 크게 외쳤다.

“엄마! 저 메리에요!”

안에서 늙은 여자 하나가 나왔다.

메리안과 똑닮은 것이 누가 봐도 친모였다.

그녀를 본 어머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메리안의 얇은 손목을 확 채서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널 어떻게 보냈는데 여길 돌아오니? 여긴 위험해. 지금이라도 다시 나가렴.”

어머니에게 상황을 설명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오리하르콘 모험가와 함께 왔다는 말에 어머니는 계속 믿지 않다가 이웃사람에게 입국심사장에 있었던 소동을 전해 듣고 나서야 겨우 믿는 눈치였다.

“귀하신 분이 어째서 저희 메리와 다니시는 거죠?”

“오리하르콘 모험가가 희귀하다지만 전대륙을 뒤지면 몇 명은 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오직 한 명입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메리안이 성녀라고 말했다.

역시나 기절초풍하는 반응.

하지만 메리안과 달리 어머니는 빠르게 믿는 기색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남다르긴 했어요. 신성력도 신성력이지만 무엇보다 태몽이 있었죠.”

“태몽이요?”

“네. 메리를 낳기 전에 벨라누스님이 직접 저를 찾아오셨어요. 귀한 아이니 잘 기르라고요. 그때만 해도 지나가는 꿈인 줄 알았는데 모험가님의 말을 들으니 확신이 드는군요.”

메리안도 태몽 이야기는 처음 들었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동안 자신은 계속 성녀가 아니라고 부정했는데 이제야 조금 믿으려나.

“모험가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디든 좋으니 메리를 데리고 신성국을 나가주세요. 이곳은 메리에게 너무 위험합니다.”

“성녀는 벨라누스의 상징이죠. 지금의 성녀는 가짜입니다. 메리는 자신의 자리를 뺏긴 셈입니다.”

“어쩔 수 없죠. 저에게는 딸아이의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괜히 성녀라고 주장했다가 마녀로 몰리는 꼴은 죽어도 못 봅니다.”

어머니와의 대화는 평행선을 그렸다.

사실 나도 그녀의 감정을 십분 이해하기에 강하게 어필하지 못했다.

어쨌든 두 모녀에게는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

반면에 내 주장의 근거는 오로지 드루이드의 직감이었으니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인진 잘 알겠습니다. 일단 따님과 시간 좀 보내시고 다시 숙고해보시죠.”

밖으로 나와서 달동네를 구경했다.

물론 대놓고 돌아다니진 않았다.

신성국은 눈과 귀가 많은 곳이었고 오리하르콘 모험가는 존재 자체로 눈에 띄었다.

우리가 메리안의 집에 머문다는 소식이 성당에 들어가면 괜히 피해를 줄 수 있기에 후드를 뒤집어쓴 채 움직였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대충 어떤 동네인지 확인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천마의 목소리가 퍼졌다.

-애송아.

“무슨 일입니까?”

-황금가지의 기운이 느껴진다.

드디어 찾아냈구나.

시온이 전해준 정보는 진짜였다.

네 번째 황금가지는 신성국에 있었다.

“어디쯤인지 알 수 있습니까?”

-조금 멀긴 한데, 이 정도 거리면 방향은 특정할 수 있겠구나.

“바로 가시죠.”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다.

달동네를 빠져나왔다.

천마가 안내한 곳으로 가자 점점 인파가 많아졌다.

집도 좋아지고 도로도 깨끗했다.

신성국의 중심가로 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붐비는 장소에 황금가지가 있다고?’

황금가지의 외견은 평범한 나뭇가지나 풍기는 기운은 범상치 않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 있다면 진작에 누가 팔거나 가져갔을 텐데.

의문점 해결은 나중에.

우선은 천마의 인도대로 계속 이동했다.

-이곳이다. 황금가지의 기운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구나. 이 안에 있는 게 확실해.

천마가 안내한 장소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햇빛에 비친 정갈한 백색 석조건물.

축구장 여러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방대한 넓이.

고개를 한참 들어야 간신히 지붕이 보이는 드높은 첨탑.

그 꼭대기에서 맑게 울리는 종소리.

뎅! 데엥! 뎅! 뎅!!

종이 울리자 근처를 거닐던 주민 모두가 일제히 행동을 멈추고 건물을 향해 엎드린다.

벨라누스님께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다.

일단은 튀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을 따라 엎드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천마와 대화를 나누었다.

“천마님, 정말 여기에 있습니까?”

-확실하다.

“이거 일 났군요.”

천마가 가리킨 건물.

교황과 성녀가 기거하는 곳.

홀로니움 대성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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