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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12화 (112/200)

14장 간택 : 속삭인 망나니

오전 10시.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때마침 부는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문지른다.

중천에 뜬 해가 밤새 물러앉은 어둠을 걷어낼 때, 폰타노에 머물던 귀족들은 하나둘씩 왕궁으로 입궁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지난번 레베카 왕녀의 생일파티와 간택식이 거행된 직후 왕족들은 회의 끝에 최종 부마를 선택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들이 선택한 부마가 누군지 밝혀지는 날이었다.

미리 모인 중소 영지의 귀족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며 누가 부마가 될 건지 예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래도 찰리 힐튼 공자가 되겠지요.”

“당연합니다. 인성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다방면에서 으뜸이었으니까요.”

“저도 이건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힐튼 가가 이미 왕실 종친 대다수를 포섭해두었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결과가 뒤집어질 확률은 드래곤이 인간에게 애교를 부리는 일만큼이나 희박하겠군요.”

모두가 찰리 힐튼의 부마 간택을 낙점하는 가운데, 구석에 박혀있던 귀족 하나가 조심스럽게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저는 의견이 조금 다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귀족이다.

어렸을 적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지식인들.

소수 의견을 경청하는 행동을 기본 소양으로 여긴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귀족이 가능성이 있다 봅니까?”

“혹시 도도 에브넬을 염두에 두십니까? 확실히 재미있는 사내이긴 했지요.”

“아니면 루티오 홀딩스에 걸었을 수도 있겠죠. 소심하긴 하지만 자상하지 않았습니까?”

“호보 하룬은 어떻습니까? 힘 하나는 무식하게 세던데요. 물론 찰리 남작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였습니다만.”

여러 예측이 난무했다.

반대의견을 제시한 귀족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아무래도···헤논 로이드 자작이 새로운 부마 후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내가 썰렁해졌다.

여태껏 귀족들이 화제에 올린 인물들은 모두 친제국파 후보였다.

그런데 감히 반제국파 후보가 최종 부마가 될 거라 말하다니.

모두가 그 귀족을 미친놈 바라보듯 바라본다.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헤논은 아니지요.”

“맞습니다. 일단 출신부터가···크흠!!”

“재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성부터 시작해서 예의범절까지 완전히 낙제점이지요.”

“연회장에서 저지른 무례한 행동을 보셨잖습니까? 별명인 ‘망나니’가 딱 어울리더군요.”

그렇게 헤논에게 한표를 던진 귀족은 몰매를 맞고 물러났다.

이윽고 부마 후보들도 왕궁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다를 떨던 귀족들은 다른 부마 후보가 들어올 때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다가 찰리 힐튼이 모습을 보이자 연예인을 목격한 팬처럼 우르르 모여들었다.

“하하하! 이게 누구십니까?”

“남작님, 저 론도 남작입니다. 이름 좀 기억해주십쇼.”

“미리 축하드립니다.”

“이거 볼 때마다 신수가 훤해지십니다. 왕국의 미래가 밝아지는 듯합니다. 제국의 미래라 해야 할까요? 핫하하하!!”

호들갑을 떠는 귀족들 사이에서 찰리 힐튼이 손을 내저으며 겸양을 떤다.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겸손하기도 하시지.”

“남작님이 출중하셔서지요.”

“맞아요. 저희는 지켜봤을 뿐입니다.”

벌써 이쪽은 축제 분위기다.

친제국파 귀족들에 이어 반제국파 귀족들도 속속 입궁했다.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으며 서로 간에 별다른 말도 없었다.

그야말로 초상집이 따로 없었다.

그들을 흘낏 바라본 찰리는 반제국파의 차기 수장으로 불리는 헤논이 없음을 확인하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연회장에서 돌발 행동을 벌였을 때만 해도 조금 놀랐고 한편으로는 경계심도 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미 대세는 완벽히 기울었는데 이제 와서 날뛴다고 뒤집어질 결과가 아니었다.

찰리는 오히려 헤논이 결과에 불복하며 스스로 무너지는 꼴을 기대했다.

“헤논 로이드 자작이다!”

“드디어 납셨군.”

“외모는 봐줄 만한데, 그뿐이지.”

드디어 뜨거운 감자가 입장하셨다.

헤논 로이드는 저번과 달리 얌전했다.

안드레 뒤퐁과 함께 들어온 그에게 몇몇 반제국파 귀족이 인사하긴 했으나 성의가 담겨있진 않았다.

찰리 힐튼은 헤논 쪽으로 향했다.

“이게 누구십니까? 부마가 되실 마음도 없으면서 부마로 등록하신 헤논 자작 아니십니까?”

친제국파의 차기 수장과 반제국파의 차기 수장의 만남에 주변 잡음이 일제히 사라지며 모두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었다.

찰리 힐튼의 말투는 누가 봐도 조롱 투가 섞여 있었다.

그동안 보여준 헤논의 성정으로 보면 발끈할만도 한데 의외로 그는 침착했다.

“찰리 남작, 뭔가 착각하고 있군.”

“무엇을요?”

“오늘은 경삿날이다. 내가 부마가 되는 날이니까.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주마.”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

찰리 힡튼을 포함한 모든 귀족이 벙 찐 표정을 짓는다.

결국 장내의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으핫하하하!!”

“혼자 다른 세상에서 왔나?”

“꿈이라도 꿨나 봅니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면 눈치라도 빨라야 할 텐데 둘 다 부족하다니. 쯧쯧!”

귀족들의 비웃음.

찰리 힐튼도 어깨를 으쓱인다.

“뭐랄까, 당신의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만큼은 존중합니다. 사내가 당찬 맛이 있어야죠.”

그러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 찰리가 헤논에게 제안한다.

“로이드 자작, 이건 어떻습니까? 결과가 공표되면 새롭게 부마가 된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축하해주는 겁니다.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니 이 정도 예는 마땅히 보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찰리의 속셈은 뻔했다.

그가 부마가 될 가능성이 100%니까 이참에 뻣뻣한 헤논 놈이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은 남작인데 헤논이 그보다 작위가 높은 자작인 것에 대한 불만의 발로이기도 했다.

“마음대로. 난 상관없다. 네가 할 말이니 꼭 지켜라.”

예상 외로 선선히 허락하는 헤논.

찰리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물론이지요.”

둘 간의 신경전이 끝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찾아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왕궁의 내문이 열리며 알폰소 국왕이 등장했다.

“국왕 전하 납시오!!”

모두가 부복하며 국왕께 경의를 보였다.

오늘도 안색이 별로인 알폰소 국왕은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말문을 열었다.

“쿨럭! 왕국을 지탱하는 늠름한 기둥들을 보니 과인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속이 든든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자리가 마련된 이유는 다들 짐작하겠지. 쓸데없이 시간 끄는 행위는 과인의 성미에 맞지 않으니 즉시 부마를 발표하겠다.”

옆에 있던 호넷 백작이 국왕에게 결과가 적힌 두루마기를 보여주었고 국왕이 천천히 또박또박 글자를 읽었다.

“향후 레베카 왕녀의 옆자리에서 엘든 왕국의 찬란한 미래를 이끌 부마는···”

국왕이 살짝 말을 끌었고.

모두가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호명될 이름에 집중한다.

“···바로 헤논 로이드 자작. 앞으로 레베카를 잘 부탁하네.”

* * *

레베카를 뱀파이어로 각성시킨 후.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개구멍을 통해 왕궁에 숨어들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녀들이 자주 사용하는 개구멍이란다.

연애가 제한된 그녀들이 밤마다 몰래 남자를 만나기 위한 구멍이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잠입한 후로는 다음날 아침까지 정원에 숨어있었다.

익스퍼트 상급에 드루이드인 나는 바인드 스킬로 온몸을 나무줄기로 감싸버렸다.

호넷 백작 정도가 아니고서야 나와 견줄 고수가 없는 왕궁이었으니 완벽하게 기척을 지울 수 있었다.

계획은 미리 짜여있었다.

종친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레베카는 종친들의 수장인 아놀드 공작을 정원으로 데리고 나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말로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레베카 왕녀는 자신의 숙부에 해당하는 아놀드 공작을 권속으로 만드는데 거부감을 느끼고 말로 설득하겠다고 했다.

나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생각을 존중하겠다고 했다.

“어째서 제국에 붙으신 거죠? 힐튼 가문과 손을 잡고 왕실을 갖다 바치셔야만 했나요?”

“왕녀님은 어리셔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부마 말 잘 듣고 후사를 잇는데 전념하시지요.”

예상대로 탐욕에 삼켜진 아놀드 공작은 레베카 왕녀를 애송이 취급하며 도구로 봤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녀도 별수 없었다.

두 번째 방법인 아놀드 공작의 권속화를 진행했다.

“죄송해요!!”

아그작!!

알파뱀파이어가 달려드는데 늙은 아놀드 공작은 반응조차 못하고 목을 내주었다.

금세 감염이 진행되면서 아놀드 공작의 눈동자에도 귀기가 서렸다.

곧이어 피를 탐하는 광란 상태가 찾아왔는데 이건 내가 맡아주었다.

[바인드]

알파뱀파이어 제압도 쉬운 판에 베타뱀파이어 제압은 그야말로 식은 스튜 먹기였다.

흙바닥에서 솟은 굵은 나무뿌리가 아놀드 공작을 속박하자 그는 광란 상태가 끝날 때까지 옴짝달싹 못했다.

“으음···”

눈빛이 돌아온 아놀드 공작이 가장 먼저 원한 건 인간의 피였다.

미리 준비한 피를 좀 먹이고 대화를 시도했다.

“숙부, 정신이 좀 드세요?”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숙부는 지금부터 뱀파이어입니다.”

뱀파이어가 어떤 종족이며 무슨 특징을 가졌는지 설명했다.

인간에서 벗어났다는 말에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그동안 방 안에 박혀있어서 무슨 짓을 하나 했더나 이런 소름 끼치는 짓을 계획하고 있었나? 안 되겠다. 지금 당장 벨라누스 교국에 연락해서 너를 구제하마.”

광분하는 아놀드 공작을 올려다보는 레베카 왕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러지 마세요. 명령입니다.”

“감히! 아무리 네가 왕녀라도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격렬하게 거부하던 아놀드 공작은 내면에서 반대의지와 부딪친 듯 양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으으윽!!!”

한참을 갈등하던 그가 결국 승복한다.

“알겠다. 교국에 알리지 않겠다.”

과연 뱀파이어인가.

감염된 뱀파이어는 숙주 뱀파이어에게 꼼짝도 못 했다.

안드레 공자를 통해 이미 확인한 사항이다.

이를 이용해서 레베카는 아놀드에게 추가적인 지시사항을 전했다.

우선은 종친들을 설득해서 나를 최종 부마로 선정하라고 명했고 목이 마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당부했다.

아놀드 공작은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레베카가 강하게 말하자 이내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구나. 분명 머릿속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영혼이 너를 따르라고 시킨다.”

아놀드 공작가 레베카 왕녀가 회의장으로 복귀했다.

저 둘이 뭉쳤으니 회의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 * *

다시 엘든 왕궁으로 돌아와서.

국왕이 부마 간택인을 밝힌다.

“헤논 로이드 자작은 레베카의 반려가 되어 장차 나라를 잘 이끌고 가정의 안녕을 가져다주길 바라겠노라.”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응당 나와야 할 박수와 환호가 없었다.

그저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결과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으로 적막이 깨진 건 찰리의 고성이 울리면서부터였다.

“말도 안 돼! 이건 뭔가 잘못됐습니다!”

시뻘게진 얼굴로 콧김을 뿜으며 나온 찰리 힐튼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삿대질을 했다.

“어째서 로이드 자작이 부마란 말씀입니까? 결과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확인해주십시오!”

호넷 백작이 나선다.

“모든 절차는 철저한 준비 아래 이루어졌고 어떠한 실수도 없었다. 자네는 전하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겐가?”

“그건 아닙니다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생아 출신에 성질 더러운 망나니가 레베카 왕녀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까?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을 일입니다.”

워딩이 상당히 저렴한데.

아무래도 위아래를 각인해줘야겠다.

찰리 힐튼에게 다가갔다.

기운을 줄기줄기 내뿜으며 다가가자 위협감을 느낀 그가 순간 주춤한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나에게 물러섰다는 사실이 창피한 듯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왈왈 짖어댔다.

“뒤에서 무슨 치졸한 수를 부렸느냐? 당장 밝혀라. 너 같은 놈은 부마에 어울리지 않는다. 레베카는 응당 내가 취해야 할 여자···커헉!!”

놈의 목젖을 움켜진 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콰아앙!!

어찌나 강하게 충돌했는지 힐튼 남작의 등이 벽에 부딪치는 순간 굉음이 터지며 벽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으윽! 윽!”

숨이 막힌 그가 내 굵은 팔뚝을 양손으로 잡고 떼어내려고 했다.

물론 어림도 없는 짓이다.

나는 팔에 마나를 흘리고 있었고 영약빨로 익스퍼트에 오른 찰리보다도 내 마나량이 몇 배는 더 많았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아무리 버둥거려도 기도가 뚫리지 않자 찰리 힐튼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숨이 막혀오며 죽음의 공포가 물밀 듯이 몰려든다.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가 캑캑대며 목숨을 구걸했다.

“컥···살려···커컥···주십쇼···컥!!”

아까 전에 기세 좋게 나를 서출에 망나니라 매도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손을 놓아줬더니 간신히 자유를 찾은 힐튼 남작이 털썩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허리를 구부려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줬다.

“지금 나에게 무릎 꿇고 있으니 부마에 대한 예의는 차렸다고 여기고 넘어가주마. 그러나 또 귀찮게 하면···다음은 없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찰리에게서 떨어진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숙였다.

“우선 전하와 많은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단 말씀을 전합니다.”

미안하다 말하긴 했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과 기세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눈알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방금 나와 찰리 중 누가 더 강했는지는 모를 수가 없을 터.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도 다들 왕실이 어째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조금씩 납득하기 시작했다.

알폰소 국왕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정리했다.

“크흠흠, 로이드 자작, 그러면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자리를 파한다. 다들 조심히 돌아가도록.”

귀족들이 하나둘씩 퇴장했다.

이후 결과에 대한 소식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수도 폰타노는 물론이고 왕국 전역이 들썩이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 * *

수도 폰타노.

힐튼 가문의 저택.

수정구슬을 앞에 둔 찰리 힐튼이 패배한 개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너머로는 중후한 중년 신사의 모습이 비쳤는데, 바로 찰리 힐튼의 친부이자 왕국의 실권자라 불리는 데이비드 힐튼 백작이었다.

-그래서···부마 간택을 받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완전히 방심하다 당했습니다.”

-아놀드 공작은 뭘 하고 있었지? 우리를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나?

“그 아놀드가 우리를 배반했습니다. 종친들을 움직여 헤논을 밀어줬답니다. 심지어 제 연락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힐튼은 턱에 짧게 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심에 잠겼다.

-아놀드의 행동이 난해하군. 그가 한 행동은 자폭이나 매한가지다. 현재 아놀드 공작가는 우리 힐튼 가문과 깊게 엮여있는 몸. 함부로 뒤통수를 쳤다가는 공작가 전체가 불타버린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찰리 힐튼의 대답.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숙고했고, 한 가지 결론을 냈습니다.”

-말해라.

“헤논 로이드가 아놀드 공작의 커다란 약점을 쥔 게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공작이 이렇게 동전 뒤집듯 편을 바꾸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일리 있는 가설이다. 허나 그 욕심 많은 노인네가 멸문을 감수하고도 지켜야 할 약점이 무엇인지, 또한 헤논이 어떤 방법으로 이를 발견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로군.

중얼거리던 힐튼 백작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놀드 공작은 라인을 잘못 섰다. 장담하건대, 왕국이 제국으로 넘어가는 순간 공작가는 로이드 후작가보다도 먼저 멸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우리 힐튼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

힐튼 백작가는 엘든 왕국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재력, 무력, 그리고 정치력을 가지고 있으니 데이비드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버지, 그 빌어먹을 사생아가 부마로 결정되었는데 이제 어찌합니까?”

찰리의 걱정에도 데이비드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원래 진정한 권력자는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보험을 만들어두는 법이다. 혹시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봐 손을 써두었다.

“혹시 저번에 언질을 주셨던 비장의 무기와 관련된 겁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데이비드 힐튼이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벨라누스 신성국의 주교와 이단심문관이 수도로 향할 테니 너는 그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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