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간택 : 반말한 망나니
뱀파이어가 된 레베카 왕녀.
그녀는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매일 방안에 틀어박힌 평범한 여인네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캬학!!”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콰지직!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오른 레베카가 피를 흘리던 내 팔뚝을 물어뜯었다.
일부러 물려준 거다.
도서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정량 이상의 피를 마시지 못하면 광란 상태가 오래간다고 적혀있었다.
물린 부위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통증.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체내에 돌연변이성 바이러스가 침투했습니다.]
[바이러스가 체내의 유전자 형질 변화를 시도합니다.]
[스킬 자정작용 발동]
[모든 상태이상 면역입니다]
[형질 변화가 무효화됩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아무리 레베카 왕녀가 알파뱀파이어였어도 나를 변화시킬 순 없었다.
그만큼 드루이드 스킬은 사기급이었다.
“이만큼 빨았으면 충분하다.”
팔을 가볍게 떨치자 광견병 걸린 개처럼 내 팔뚝을 물고 안 놔주는 레베카 왕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금세 일어난 그녀가 맛탱이 간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워우! 살벌하구먼. 부단장, 괜찮아?”
“문제없다.”
한 번 피맛을 본 레베카 왕녀는 더 많은 피를 원했는지 재차 달려들었다.
물론 지금부터는 쉽게 당해주지 않는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
땅밑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가 레베카 왕녀를 꽁꽁 묶었다.
중상급 드루이드가 되면서 업그레이드된 나무뿌리로는 단순히 묶는 수준이 아니라 뿌리에 돋아난 가시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목적은 사냥이 아니라 제압이기 때문에 한 단계 약한 바인드로 속박만 해두었다.
“캬하아아악!!”
뿌리에 묶여 몸부림치던 레베카의 손톱이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빨간 손톱을 마구 휘두르자 견고하던 나무뿌리가 종잇조각처럼 잘려나갔다.
“대단하군.”
순수한 감탄이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아무런 힘조차 없는 소녀였건만.
뱀파이어가 된 것만으로 거의 소드 유저 최상위급 실력을 내고 있다.
속박을 푼 레베카가 약이 올랐는지 새된 고음을 지르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서걱!!
그녀가 수직으로 내려그은 손톱이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도양단했다.
반으로 갈린 내 모습이 흔들리다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이미 나는 보법을 밟고 그녀의 뒤에 위치한지 오래였다.
알파뱀파이어는 제법 강한 축에 속했지만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어온 나에 비해서는 많이 부족했다.
뒷목을 잡고 가볍게 날리자 공중을 훨훨 날아간 레베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캬하아아···”
다시 일어선 레베카는 이번엔 선뜻 달려들지 않았다.
광란 상태라 제정신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상당한 강자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그러자 목표가 바뀌었다.
본능적으로 무리 중 가장 약한 사람인 안드레에게 그녀의 시선이 고정됐다.
“왕녀님, 왜 저를 쳐다보세요. 저 맛없어요. 으아아악!!”
레베카가 이번에는 안드레를 덮친다.
가만히 두고 볼 시온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왕녀님.”
시온은 레베카의 툭 튀어나온 송곳니를 단검으로 차단하고 훤히 드러난 하복부에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시온! 살살!”
“죄송합니다.”
명치를 세게 얻어맞고 비틀대는 레베카.
그런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음영이 드리운다.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덩치의 사나이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쯤 되니 알파뱀파이어가 불쌍해질 지경이다.
“살면서 언제 왕녀님을 때려보나. 역시 부단장을 따라오길 잘했어.”
양손으로 야구배트 잡듯이 바스타드 소드를 잡은 캠벨이 넓은 검면으로 레베카를 후려쳤다.
쩌엉—!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광란 상태의 레베카의 눈이 풀렸다.
한참을 날아간 그녀는 정원에 있던 나무 하나를 우지끈 부숴버리고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셌다.
시온이 캠벨에게 한소리 했다.
“무식하기가 이를 데 없군요. 힘자랑 할 데가 없어서 한 나라의 왕녀님한테 합니까?”
“헤헤, 미안. 그런데 하녀도 강하게 때렸잖아? 나와는 달리 감정도 실린 것 같던데. 내 착각인가?”
“착각입니다.”
태평한 우리와 달리 안드레는 안절부절못했다.
“큰일 났습니다. 왕녀님을 이렇게 패다뇨. 간택식을 코앞에 두고 얼굴에 흉이라도 지면 어떻게 합니까?”
“뱀파이어의 회복력을 얕보는군. 이 정도로는 그녀에게 생채기 하나 못 낸다.”
과연 내 말대로였다.
땅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레베카 왕녀는 옷은 엉망일지언정 몸은 멀쩡했다.
대신에 아까와 달리 눈동자가 또렷했다.
여전히 붉은 귀기는 흘러도 초점이 제대로 잡혀있었다.
광란이 종료된 것이다.
“세상에! 진짜로 저는 뱀파이어였군요. 각성까지 해놓고도 믿기지 않아요.”
주먹을 움츠렸다 펴기를 반복하던 그녀가 자신의 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정신이 드나?”
“네.”
“광란 상태에서의 기억은?”
“드문드문해요. 마치 술을 진탕 마시고 기억이 사라졌을 때와 비슷하달까요?”
“열일곱이라 하지 않았나? 그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다고?”
“호기심에 예전에 혼자 마셔봤어요.”
아무튼 그렇단다.
광란 상태의 그녀는 필름이 사라졌다.
그러나 마지막만큼은 똑똑히 기억했다.
“당신.”
캠벨을 보며 분개하는 레베카.
“저 커다란 검으로 저를 무식하게 쳤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어···어?”
“제가 힘없는 왕녀라고 만만해 보였나 보져?”
“아니. 그게 아니라···나만 그런 게 아닌데···”
“두고 봐요. 이름 기억해뒀어요.”
아이고.
캠벨이가 시온에 이어서 레베카에게도 미운털이 박혀버렸다.
그러고 보니 코코도 캠벨을 싫어하지.
언제쯤 캠벨을 좋아하는 상대가 나타날까.
내심 궁금해진다.
어쨌든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녀의 상태를 체크했다.
“이제 피는 안 마셔도 되는 거야?”
“아뇨. 오히려 주식이 됐어요. 일반적인 식사는 가능하지만 역시 피를 마셔야 힘이 날 것 같아요.”
“피에 굶주리면 방금 전과 같은 광란 상태가 되는 건가?”
“그건 선택에 달렸어요.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할 수도 있는데 대신에 천천히 말라가겠죠.”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부터 레베카 왕녀는 주기적으로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하는 뱀파이어가 되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레베카는 각성할 텐데 그때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옆에 있다면 대참사가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좀 배고프네요.”
레베카가 손가락을 고운 입술에 댔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시온이 칼 같이 나섰다.
“왕녀님, 제 피를 뽑아서 드리겠습니다.”
“음···괜찮아.”
“아닙니다. 도련님은 오늘 충분히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제 피를 드리지요.”
시온은 레베카 왕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유리잔을 가져온 다음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금세 유리잔 하나에 피가 모였다.
“한 번 마셔보시지요.”
“사양하지 않을께.”
레베카가 피로 물든 와인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입맛을 쩝쩝 다시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달콤하긴 한데···뭔가 부족해.”
“사람마다 피맛이 다른가 보지?”
“그럼요. 아예 다른 음식이라 봐도 될 정도에요.”
그 말에 호기심을 느낀 캠벨과 안드레도 각각 자신의 피를 레베카에게 줘보았다.
그녀의 감상평은 이러했다.
먼저 안드레부터.
“안드레 공자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너무 밋밋해요. 미지근하게 식은 스튜를 마신 느낌이랄까요?”
안드레가 OTL자세로 좌절한다.
뒤이어 캠벨의 차례.
솔직히 캠벨이 레베카에게 한 짓이 있으니 맛없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떴다.
“생각보다 괜찮네요. 물론 하녀의 피만큼 달콤하진 않지만···피가 진해요. 농도도 짙고 에너지가 넘쳐나네요.”
단순히 외형으로만 피맛이 결정되는 건 아닌가 보다.
외형은 물론이거니와 해당 개체의 성별, 나이, 특이성질, 내포된 에너지 등등 많은 요소가 피맛에 영향을 끼치는 모양.
“하지만 역시나 로이드 자작님 피만큼 맛있는 피는 없어요. 저는 처음부터 최고급 피를 마셔버렸어요.”
“내 피에서는 어떤 맛이 나는데?”
“뭐랄까. 청량하다고 해야하나요. 깨끗하고 맑아요. 그런데 에너지도 넘쳐요. 첫맛은 시원한데 끝맛은 달달한···아! 생각만해도 좋아.”
레베카 왕녀는 실제로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턱을 타고 침이 선이 되어 흘러내렸다.
“츄릅! 내가 무슨 추태를.”
“괜찮다. 그럴 수 있지.”
아무래도 알파뱀파이어인 레베카는 내 핏속에 들어있는 드루이드 인자를 느끼는 듯했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하이엘프였던 사샤도 드루이드 냄새가 나는 나에게 무한 신뢰를 보였으니까.
“내가 피를 더 주겠다.”
“고마워요.”
“도련님!”
“괜찮아. 시온. 걱정하지 마.”
[끈질긴 생명력 발동]
[체력 회복량 증가]
패시브 스킬이 발동하면서 이미 몸속의 혈액량은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드루이드인 나는 무한으로 공급이 가능한 혈액저장고인 셈이다.
혈액 공급 문제는 해결됐고.
이제 그녀를 뱀파이어로 각성시킨 궁극적인 목적을 확인해 볼 차례다.
도서관에서 찾아본 자료에 따르면 알파뱀파이어는 피를 빨면서 상대를 감염시킬 수 있었다.
감염된 뱀파이어는 베타라고 불리우며 알파에게 절대 거역할 수 없다 적혀있었다.
이에 대해 레베카에게 물으니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왠지 가능할 것 같아요.”
“본능에 따른 행동이라는 거지?”
“맞아요.”
혹시 모르니 간단한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정말로 베타뱀파이어가 알파뱀파이어인 레베카에게 충성하는지 말이다.
이에 대해 동료들에게 의견을 말했더니 레베카 왕녀를 포함한 모두가 동의했다.
“어디 적당한 실험체 없나.”
“글쎄. 자진해서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 미친놈이 있을까? 평생 피를 마셔야 하는데.”
“그래도 뱀파이어가 되면 강해질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생활이 편리해지겠지요.”
“어차피 나나 하녀나 그런 도움 없어도 강하잖아? 부단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역시나 찾기 힘들 것 같아.”
모두가 고심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의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제가 뱀파이어가 되도 괜찮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 몰린다.
손을 든 사람은 안드레였다.
“뭐야. 진심이야?”
“네. 방금 강해진 왕녀님을 보니까 제 내면의 무언가가 저를 움직였습니다.”
“안드레,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충분히 숙고하고 말한 겁니다.”
안드레의 눈빛에 굳은 결의가 보였다.
“사실 저는 뭣도 없는 평범한 귀족가 아들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로이드 자작님을 만나서 여기까지 왔죠.”
“안드레···”
“기왕지사 끝까지 가보렵니다. 레베카 왕녀님을 따라 뱀파이어가 되어 마지막까지 왕녀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안드레는 수다스러운 성격이라서 술이라도 먹고 비밀을 누설할까 걱정된 게 사실.
만약 그가 뱀파이어가 된다면 운명공동체로 묶이게 된 셈이니 알아서 입에 지퍼를 채우리라.
레베카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알아들은 그녀가 안드레 앞에 섰다.
“금방 끝날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그작!
레이첼 왕녀가 안드레의 목을 물었고.
안드레의 눈에도 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레이첼에 비해 안드레의 광란은 그리 강하지 않았는데, 광란 시간은 오히려 더 길었다.
확실히 알파에 비해 베타가 더 여러 방면에서 하위호환의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상당히 강해졌다.
단전에 마나 한 톨 없던 귀족 자제가 순식간에 소드 유저 하위급의 실력을 보였으니 말이다.
“안드레, 기분이 어떻지?”
뱀파이어가 된 안드레에게 물었다.
꿈꾸는 듯한 몽롱한 시선을 보내던 안드레가 나에게 대답했다.
“왕녀님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목이 마르군요. 그렇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레베카 왕녀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나?”
안드레의 회색 눈동자에서 순간 붉은빛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아무래도···힘들 것 같습니다. 이게 어떤 기분이냐면···왕녀님을 거부하는 순간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느낌입니다.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진다고나 할까.”
역시 기록대로 권속이 된 뱀파이어는 숙주 뱀파이어를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모양이다.
레베카 왕녀가 나섰다.
“농담이긴 한데, 만약 지금 당장 칼을 들고 돌아가서 네 가문의 일원을 죽이라고 하면 그렇게 할 거야?”
안드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이 정녕 왕녀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베카 왕녀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딱딱히 굳었다.
안드레를 보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절대 그런 짓은 하지 마요. 아시겠죠?”
“명심하겠습니다. 왕녀님.”
몸을 부르르 떠는 레베카에게 말을 걸었다.
“네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나? 잘 써야 한다. 넌 똑똑하니 알아서 하겠지만.”
안드레가 뱀파이어가 되면서 필요한 데이터는 얼추 다 얻었다.
이제는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일 때였다.
“레베카, 사전에 계획한 대로 잘 움직여라. 알겠지?
“물론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돌아서려다가 멈칫한다.
“잠깐만요. 로이드 자작님.”
“무슨 용건이 남았나?”
“아뇨. 용건은 아니고···아까부터 이상한 점이 있어서요.”
“말해라.”
“왜 자꾸 저한테 반말하세요?”
그러게.
나는 왜 레베카 왕녀에게 반말하고 있었을까.
무려 한 나라의 왕녀님이신데.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이 너무 높았나 보다.
“죄송합니다.”
“푸합! 장난이에요. 격식 없이 대해주셔서 더 편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세요. 친구 생긴 것 같고 좋네요.”
확실히 왕족은 왕족이다.
사람을 들었다 놓을 줄 안다.
“그러면 편하게 대하마. 레베카.”
“좋아요. 잘 부탁합니다. 로이드 자작님.”
“헤논이라고 불러라.”
“좋아요. 헤논.”
레베카와 살짝 포옹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온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긴 듯 했지만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분명 착각이 맞다.
* * *
레베카 왕녀의 생일파티 다음날.
왕실 종친들은 호출을 받고 왕궁으로 입궁했다.
전원 어제 간택식을 실시간으로 관람했던 사람들이었다.
종친들이 왕궁으로 모이는 이유는 부마 후보 중 최종 부마가 될 자를 뽑기 위해서였다.
원칙적으로 국왕과 종친들, 그리고 레베카 왕녀의 상의하에 최종 부마를 결정하게 된다.
종친 중에는 국왕의 친동생이자 레베카 왕녀의 숙부인 아놀드 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움직이는 마차에 탑승한 아놀드 공작은 자신의 심복이 가져온 의외의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게 사실인가?”
“예. 지난 새벽 레베카 왕녀가 안드레 공자의 집을 잠시 방문했습니다.”
“잘못 본 건 아니고?”
“확실히 목격했습니다.”
아놀드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머리를 굴리던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안드레라···반귀족파긴 한데 별볼일 없는 쭉정이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안드레 공자는 신경 쓸 필요 없지만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말해라.”
“현재 헤논 로이드 자작이 안드레 공자의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놀드 공작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안드레와 달리 헤논 로이드는 가볍게 여길 자가 아니었다.
특히나 저번 연회장에서 보여준 언행과 실력은 충격 그 자체였다.
‘출신이 서출이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친제국파를 위협할 뻔했다.’
중립을 지켰다면 모를까.
아놀드 공작은 이미 힐튼 백작과 커다란 이권이 달린 뒷거래를 마친 상태였다.
‘어차피 알폰소 형님과 레베카가 존재하는 한 내가 국왕이 될 여지는 없어.’
물론 독살이라든지 쿠데타라든지 방법이 아예 없진 않지만 이미 늙고 소심해진 아놀드에게 그런 극단적인 수단은 심한 부담이었다.
게다가 현재의 왕실은 먹어봐야 의미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닌가.
그저 왕실을 통째로 제국에 넘기고 그 공로로 한몫 거하게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부마 간택식이 무척이나 중요했는데.
솔직히 무난하게 찰리 힐튼 공자가 부마가 되는 상황이었다.
단 한 명의 난입만 제외하면 말이다.
“헤논 로이드 자작. 레베카 왕녀와 무슨 일을 꾸몄을까. 혹시 대화를 엿들었는가?”
“저택의 경비가 삼엄하고 호넷 백작까지 근처에 있어서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에잉~! 쓸모없는 것.”
“죄송합니다. 공작님.”
잠시 고심하던 아놀드 공작이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원참. 내가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건지.”
헤논 로이드가 연회장을 휘어잡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건 국왕과 레베카 왕녀,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종친들이었고 이미 종친 전원을 포섭해두었다.
설사 폐병으로 다 죽어가는 국왕과 레베카 왕녀가 반대하더라도 소용없다.
종친들이 이구동성으로 밀어붙이면 두 부녀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오늘 찰리 힐튼 공자를 레베카 왕녀의 부마로 확정 짓고 이 일에서 손을 뗀다.’
마차가 왕궁에 들어섰다.
회의장에 들어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종친들이 우르르 일어나 아놀드 공작을 반겨준다.
“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오늘따라 신수가 훤하십니다.”
“역시 공작님 덕분에 왕실의 권위가 세워집니다.”
힐튼 백작과 아놀드 공작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공작을 향한 종친들의 라인 타기는 노골적이었다.
“허허, 왜들 이러시나. 국왕 전하 앞에서는 감히 그러지 말게나.”
“레베카 왕녀님 드십니다!!”
모두가 일어나 왕녀를 환영했고.
부마 간택 회의가 시작되었다.
한 자리가 비어있는 채로.
“오늘 전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불참하신답니다. 간택 결과는 여기 계신 왕녀님과 종친분들께 맡기신다는 어명이십니다.”
아놀드 공작은 상황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이 자리에서 그나마 자신에게 태클을 걸만한 사람은 국왕뿐인데 국왕마저 불참했단다.
이러면 혼자서 회의장 전체를 주무르고 결과까지 조작해서 내놔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어차피 레베카 왕녀야 스무살도 안 된 애송이고 한낱 여인네일 뿐이니 몇 번 구슬려서 휘두르면 끝이다.
계산이 끝난 아놀드 공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비볐다.
“자···그러면···”
“숙부님.”
레베카 왕녀가 갑자기 끼어든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녀님.”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잠시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요.”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럴까.
솔직히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대로 기울어버린 것을.
“좋습니다. 왕녀님.”
“왕실 정원으로 안내할게요. 거기서 가볍게 차 한잔해요.”
“왕녀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정원에 도착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자신의 환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했다.
앞장서서 한참을 걷던 레베카 왕녀가 우뚝 멈춰 섰다.
“왕녀님, 이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털어놓으시지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 오랜 시간 있기엔 피로하니 빨리 끝내주셨으면 합니다.”
왕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하나만 물을게요.”
“말씀하십시오.”
“어째서 왕실을 제국에 넘기려고 하는 건가요?”
생각보다 단도직입적이다.
아놀드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는 듯한데. 세상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제 숙부이자 같은 왕실의 일원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특권층이면서 무슨 욕심을 더 부리겠다고 힐튼과 손을 잡으셨죠?”
방 안에만 박혀있다 들었는데.
완전 바보는 아니었구나.
돌아가는 상황은 아는 여자였다.
그래 봤자 여자지만.
“왕녀님, 간택식도 진행된 마당에 지금 와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뇨. 지금 묻고 있잖아요. 당신이 정말 왕실의 일원이 맞는지.”
“저는 왕녀님의 숙부이자 전하의 동생이죠. 왕녀님이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죠. 시간이 지나면 다 이해하게 될 겁니다.”
레베카 왕녀는 사뭇 슬픈 반응을 보였다.
이를 포기했다고 여긴 아놀드 공작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왕녀께서는 이런 복잡한 고민일랑 관두고 부마에게 사랑받으며 후사를 이어가시면 될 일입니다.”
레베카 왕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동시에 등 뒤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말했잖아. 이미 눈과 귀를 닫아버린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다고.”
깜짝 놀란 아놀드 공작이 몸을 홱 돌렸다.
바로 지척에는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삐딱한 자세로 벽에 기대있었다.
사내가 누구인지 파악한 공작은 등줄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빨려들 듯한 요요한 눈빛을 뿌리는 흑발녹안의 장신 사내.
반제국파의 차기 수장.
헤논 로이드 자작.
가장 여기 있으면 안 될 자가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여기 어떻게!!”
“욕심쟁이 영감. 금방 끝날 거야. 별로 안 아프니까 양 백마리 세고 있어.”
“그게 무슨 말···”
“죄송해요! 숙부!”
갑자기 강한 충격이 닥치며 아놀드 공작이 쓰러졌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은 레베카 왕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뾰족한 송곳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