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106화 (106/200)

14장 간택 : 벼락친 망나니

공주의 생일파티가 있기 아흐레 전.

국왕과의 대면 이후 안드레의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시온과 캠벨을 만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말했다.

부마 간택식의 결과와 관계없이 레베카 왕녀의 행복을 지켜달란 알폰소 국왕의 전언을 전해 들은 시온의 표정에서 난감함이 엿보였다.

“전하께서 어려운 부탁을 하셨군요.”

역시나 똑똑한 시온은 이게 얼마나 난이도 높은 요구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시온의 설명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캠벨 또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부단장 말대로라면 가장 유력한 부마 후보인 찰리에게 몰래 독이라도 타야하는 거 아녀?”

평상시라면 멍청한 소리하지 말라며 타박하던 시온도 이번만큼은 캠벨을 욕하지 못했다.

그녀 또한 암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지 말고는 탈출구가 없다고 여기는 거겠지.

분위기가 축 처지자 이를 불만스럽게 여긴 캠벨이 팔짱을 끼며 투덜댔다.

“잘못 걸렸구먼. 이쯤 되니까 그놈의 왕녀 면상이나 좀 보고 싶네. 궁금하다야.”

“말 좀 조심하시죠.”

“뭐 어때? 여기 왕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소싯적 북부에서 근무할 때는 블랙허니에 죽치고 앉아서 윗사람 욕 많이 했잖아?”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요.”

“뭐가 달라? 똑같구먼.”

둘이 또 티격태격하려는 낌새를 보인다.

그 와중에 나는 캠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캠벨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야.”

“거 봐라. 부단장도 내 편 들어주잖아.”

“아니. 너 말 가려서 하긴 해야 해. 난 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왕녀님을 알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고 보니 국왕에게 임무만 받았을 뿐, 정작 임무와 관련된 레베카 왕녀에 대해서는 조그만 단서도 없었다.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즉시 안드레를 불러서 국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빼놓고 레베카 왕녀를 만나고 싶다고만 이야기했다.

그러자 회의적인 표정으로 손을 내젓는 안드레.

“간택식 즈음입니다. 부마가 되길 원하든 아니든 간에 왕녀님을 만나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있지요.”

“부당한 청탁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인가?”

“그도 그렇습니다만. 사실 제일 중요한 건 왕녀님의 성정입니다. 낯선 이들을 만나는 자리를 부담스러워하신답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

하긴 생각해보면 레베카 왕녀와 차 한잔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런 요구에 일일이 응해주다 보면 한도 끝도 없고 가려 뽑은 몇 명만 만나기에도 애매하다.

나 같아도 머리 아플 것 같았다.

캠벨이 옆에서 툴툴댔다.

“그러면 왕녀님이 어떤 찻잎을 좋아하는지, 어떤 동물을 좋아하는지, 취미가 뭔지도 모르는데 냅다 부마가 되겠다고 어필해야 하는 건가? 웃기는 제도군.”

“하하, 그런 셈일세.”

안드레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반면에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시온이 이를 감지하고 물었다.

“도련님,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불편한 게 아니라 방금 캠벨의 말을 듣고 번뜩 영감이 떠올랐다.

안드레의 말대로 현재 어떠한 귀족도 레베카 왕녀를 뵐 수 없고 그녀의 성격이나 호불호를 알만한 뾰족한 방도가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가능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정보를 수집하는데 최적화된 드루이드 스킬이 있잖는가.

아직 써본 적은 없지만 이참에 활용하는 것도 밑져야 본전이니 괜찮을 듯 싶었다.

* * *

다음날.

나는 시온과 캠벨을 데리고 도시 외곽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명령을 하나 내렸다.

“쥐를 잡아라.”

“···네?”

“쥐 한 마리 좀 잡아봐.”

난데없는 지시였지만 뭐 이런 적이 한두 번이랴.

시온과 캠벨은 내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음을 직감하고 군말 없이 쥐를 잡으려 다녔다.

둘 다 익스퍼트의 고수라서 그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찍찍대는 쥐 두세 마리가 금세 앞에 놓였다.

“부단장 말대로 잡아왔어. 이제 어떡해?”

“가만히 붙잡고 있어.”

일단 쥐 한 마리의 몸통을 덥석 잡고 들어 올리자 녀석은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온몸을 버둥거린다.

그런 쥐에게 드루이드 스킬을 시전했다.

[라이프컨트롤]

[시야공유]

[테이밍]

테이밍이 성공하자 쥐가 얌전해졌다.

또한 시야공유를 통해 현재 쥐가 보고 듣고 느끼는 정보가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시야공유의 방식은 마치 지구에서 CCTV를 보는 느낌이었다.

대뇌 피질 한쪽 구석에 따로 보안실 같은 공간이 생겨서 쥐가 습득하는 정보를 챙겼다.

“엥? 쥐가 얌전해졌는데?”

캠벨과 시온이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테이밍된 쥐를 데리고 이리저리 굴리며 실험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범위는 나를 중심으로 반경 2Km~3km로 예상보다 넓었고 제법 쏠쏠한 정찰을 할 수 있었다.

쥐는 몸통이 작아서인지 집안 바닥이나 천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냈다.

만약에 쥐보다 몸통이 크거나 기운이 강한 생명체를 테이밍하면 정찰 범위가 줄어들거나 얻는 정보의 화질이나 음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간에, 스토킹 수준의 사생활 침해 스킬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테이밍+시야공유 콤보로 레베카 왕녀를 관찰하기로 했다.

“왕궁으로 간다.”

테이밍 된 쥐를 데리고 엘든 왕궁 뒤편 풀숲에 숨었다.

보통 여인들이 기거하는 내궁은 뒤편에 있어서 이쪽에 위치를 잡은 것이다.

테이밍에는 범위가 있어서 최대한 붙어서 쓰는 게 정보를 얻기에 유리했다.

[시야공유]

[테이밍]

과연 왕궁이라서 그런가.

뒤편임에도 보초가 잔뜩이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낯선 ‘인간’을 경계하는 것이지, 낯선 ‘쥐’를 경계하진 않았다.

찍찍!!

중대 임무를 받은 쥐가 비장한 기세로 왕궁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왕궁이 넓어서 길을 익히는데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부단장, 좀 지루한데.”

“뭐라고 먹고 있어.”

투덜대는 캠벨의 입에 빵을 하나 물려주고 계속 관찰을 지속했다.

두 시간 경과.

드디어 레베카 왕녀의 방을 찾았다.

그것도 시녀들의 대화를 통해 겨우 알아냈다.

“오늘도 혼자 드신대?”

“응. 내가 들어가지도 못하게 해.”

“레베카 왕녀님은 심심하지도 않으신가 봐.”

“맨날 방 안에 콕 박혀서 뭘 하신대?”

“나도 몰라. 청소도 본인이 직접 하시겠다는데 도무지 알 방법이 있어야지.”

시녀들을 따라서 레베카 왕녀의 방에 도착했다.

굳게 닫힌 방문.

문 앞에서 시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왕녀를 애타게 부른다.

“왕녀님! 감자 하나 쪄왔어요. 이거라도 좀 드세요!”

“밤에 산책은 나오실 거죠? 너무 운동을 안 하시면 몸 축나요! 아무리 젊으셔도 지금부터 관리하셔야죠.”

“빨래는 하시는 건가요? 옷 좀 내놔주세요. 새 옷 넣어드릴게요.”

세상에.

이 정도면 거의 방구석 히키코모리 수준인데.

실제로 보니까 시녀들의 이야기하는 수준보다 레베카 왕녀가 훨씬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응.”

간단한 대답과 함께 방문이 빼꼼 열렸다.

헌 옷과 다 먹은 빈 그릇이 나왔고.

대신에 새 옷과 감자가 들어갔다.

빼꼼 열린 틈이 기회다.

나는 테이밍한 쥐를 돌진시켰다.

“꺄아아악!!!”

“에그머니나!”

“쥐가 들어왔네.”

깜짝 놀란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레베카 왕녀도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 떴다.

“왕녀님, 방문 좀 열어보세요. 제가 들어갈게요.”

“아냐! 들어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왕녀가 방문을 쾅 닫았다.

드디어 레베카 왕녀와 단둘이 있게 되었다.

우선 왕녀가 쥐를 잡아낼 우려가 있으니 재빨리 침대 밑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겼다.

처음에 레베카 왕녀는 숨어버린 쥐가 신경 쓰였는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내 뭔가에 몰두했는지 신경도 안 썼다.

꼬르르륵

쥐가 배고프다는 게 느껴졌다.

뭐라도 좀 먹여야 했다.

쥐의 눈에 시녀가 넣어준 찐 감자가 들어왔다.

‘하는 수 없지.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조심스럽게 침대 바닥에서 나와 감자 쪽으로 향했다.

눈은 레베카 왕녀에게 고정한 채였다.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앉은 레베카 왕녀는 깃털 펜을 사각거리며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방 안이 난장판이다.

반쯤 펼쳐진 책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심지어 침대 위에도 글씨가 가득 적힌 깜지 양피지가 두루마기 휴지처럼 쭉 늘어져 있었고 반쯤 쏟은 잉크통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원래 여자애들 방이 산만하긴 하다.

보통은 벗어놓은 드레스와 양말, 머리빗이나 화장품 때문에 어지러운데.

이곳은 책이나 깃펜 때문에 어지러우니 여기가 한창때의 소녀 방인지 방 정리를 극도로 귀찮아하는 괴짜 학자 연구실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우선 바닥에 어질러져 있는 책의 제목부터 확인했다.

[칼론 제국 행정고급학]

[아르니아 대륙 연대기]

[나는 이렇게 나라를 가꿨다]

[왕국 200년 재무재표 정리본]

‘뭐여? 이게?’

[농가수취가격 변화에 근거한 이상적인 감가상각비 도출안]

[국가 간 무역량 증감 결정요인 분석]

[도시발전계획에 따른 멤브레인 정수 시스템 도입 시뮬레이션]

할 말이 없어졌다.

이 시대로 따지면 네이처지에 실려도 이상하지 않을 논문들이 방구석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다.

놀라운 점은 논문에는 하나같이 빼곡히 밑줄이 그어져 있고 귀여운 글씨체로 메모도 되어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계산이 필요한 논문 옆에는 양피지에 복잡한 수식과 함께 공식 유도와 결과값 도출 시도 흔적이 어김없이 적혀있었다.

‘미친···’

“찍찍!”

아차.

나도 모르게 쥐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서 레베카 왕녀의 눈치를 봤는데 쥐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본인이 울고 있어서 못 들은 거였다.

“흑···흐흑···흑···”

긴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닭똥 같은 눈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저절로 아리게 했다.

왜 갑자기 혼자 우나 싶어서 책상 위로 슬쩍 올라갔다.

거기에도 책은 가득 쌓여있었는데 주로 이런 종류의 교양서적이었다.

[대륙을 빛낸 여인들]

[여성도 상단주가 될 수 있을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한 그녀의 일천 가지 노력]

[성별이 문제가 아니다. 마음가짐이 문제다.]

레베카 왕녀가 고운 손으로 쥔 깃펜은 교양 서적 한 줄 문구에 멈춰있었다.

울고 있었기에 깃펜 끝단이 파르르 떨렸다.

― 아르니아 대륙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여성의 사회진출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른 자리는 몰라도 군주가 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택한 방식이 혼인을 통한 나라 운영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인류학자로서 논하자면 아르니아 대륙에서 여성이 ‘진짜’ 군주가 되려면 최소 이천 년을 지나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

“흑···흐흑···”

레베카 왕녀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방구석에서 혼자 콕 박혀서 뭘 했는지 확인하고 나니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레베카 드 아리안느 엘폰.

그녀는 이미 준비된 지도자이자 군주였다.

여성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찍찍찍!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울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꺄악!!”

아 맞다.

나 쥐였지.

깜짝 놀라 양팔을 버둥대는 레베카 왕녀의 손짓을 피해 슬쩍 바닥에 안착했다.

그녀의 비명을 들었는지 바깥에서 시녀의 소리를 들었다.

“레베카님? 무슨 일 있으세요?”

“으응. 난 괜찮아!”

레베카는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기서 다행인 건 내가 테이밍한 쥐가 징그러운 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햄스터처럼 조그맣게 생겨서 털도 복슬복슬했다.

“찍찍?”

앞발을 번쩍 쳐들고 고개를 기울이며 최대한 귀여운 척을 했더니 레베카 왕녀의 경계심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역시 이 나이대 소녀에게 귀여운 건 무적인가.

생각보다 내가 얌전하고 말귀를 잘 알아듣자 이내 눈물 젖은 얼굴로 찐 감자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코맹맹이 소리로 감자를 권하는 모습이 귀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마침 테이밍한 햄스터도 배고파하길래 찍찍 울어주고는 감자에 입을 파묻었다.

“잘 먹네. 많이 먹고 쑥쑥 크렴.”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는데 굳이 도망가지 않고 꿋꿋하게 감자를 다 먹어치웠다.

그래도 쥐를 보면 무서워할 법도 한데 오히려 자기가 먹어야 할 음식을 먹인 걸 보면 어느 정도 자비심도 있고 순진무구한 구석도 있는 듯했다.

감자 먹방이 끝났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레베카 왕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데다가 화장기 하나 없는 생얼이었는데도 미녀 그 자체였다.

오히려 아까 울었던 모습이 가냘픔과 유약함을 더해서 청초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보다도 레베카 왕녀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응?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레베카 왕녀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봤는지를 모르겠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헤헤, 이상한 쥐네.”

그런 내 모습이 웃겼는지 왕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 갑자기 의식 속에 벼락이 치며 불이 번쩍 들어왔다.

‘아! 떠올랐다.’

이 여자가 누군지 확실해졌다.

<시온 라이크>의 주인공 시온이 게임 진행 중반부에 만날 보스.

멸국의 왕녀 뱀파이어 레베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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