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간택 : 경청한 망나니
힐튼 가의 호위기사는 대략 소드 유저 상위에 해당하는 무인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일전에 만났던 가죽수집가 게빈 정도로 보면 될까.
어쨌든 익스퍼트급 검사도 아니었기에 내가 휘두른 손바닥에 반응조차 못하고 얻어터지는 모습이었다.
“이런 썅!!”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씩씩대던 놈이 검집에 손을 댄다.
“검을 뽑는다라···지금 네 행동의 의미가 뭔지 똑똑히 알고 실천해라.”
“사생아 놈. 단숨에 썰어주마.”
아무래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이다.
뺨 한 대 맞고 날아가는 놈과 굳이 손을 섞어야 하나 싶었다.
이런 귀찮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동료 찬스가 존재하는 법.
살짝 눈짓했더니 진작 나서고 싶어했던 캠벨이 껑충 뛰어 움직였다.
“이봐. 기사면 기사답게 행동해.”
우드득!!
호위기사는 키가 컸지만 캠벨은 그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이 무지막지한 녀석은 호위기사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더니 쇄골을 악력만으로 으스러트렸다.
“으아아악!!”
캠벨을 만난지도 꽤 오래됐지만 정말이지 저 비상식적인 근력 하나만큼은 봐도봐도 낯설다.
마나를 쓰지 않은 순수 근력인데도 웬만한 마나 기사와 동급의 완력을 갖고 있으니 오우거란 별명이 나올 만하다.
“감히!”
“해보자는 거냐?”
쓰러진 동료를 본 다른 호위기사들이 발끈했는지 우리를 둘러싸며 살기를 뿌렸다.
그리고 그때.
가만히 뒤에서 지켜만 보던 찰리 힐튼이 앞으로 나서며 과장된 포즈로 부하들을 윽박지른다.
“모두 자중하도록. 대 로이드 자작님에게 이 무슨 실례냐?”
뱀 같은 인상.
간교한 혀.
내가 딱 싫어하는 타입이다.
놈이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인사가 늦었군요. 찰리 힐튼 남작입니다. 악마살해자의 위명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만나서 영광이군요.”
차라리 대놓고 부딪치면 모르겠는데.
방금까지 호위기사가 나에게 시비 건 행동을 보고도 모른 척 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행동한다.
저번 엘프전에서도 피엔토 자작이 비슷하게 뒤에서 살살 나를 긁다가 제대로 큰코다쳤지.
그러나 찰리 힐튼은 경우가 다르다.
피엔토 자작은 어쨌든 같은 후작령 내 산하 가문 소속이었고 나에 대한 존경심은 없을지언정 로이드 가문에 대한 존경심은 있었다.
반면에 힐튼 가문은 로이드 가문을 공중분해 시키려 했으니 저렇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어떻게 뒤에서 공격할까만 고민하고 있을 거다.
나 또한 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내가 악수를 받을 거라 착각한 찰리.
자연스레 내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슬쩍 피하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난데없는 내 행동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쪽에 뭐라도 있습니까?”
“아니. 줄 서라고.”
어안이 벙벙했는지 놈이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빵 먹고 싶어서 온 거 아니었어? 줄 서라. 몇 번을 얘기하냐? 머리통이 장식이 아니면 좀 알아들어.”
창피를 당한 녀석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진다.
내심 녀석이 못 참고 칼을 뽑길 바랬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놈은 나한테 바짝 붙더니 귓속말로 속삭인다.
“부마 자리를 원하지도 않으면서 얼쩡대는군. 구경꾼이면 조용히 구경만 하다 가라. 아니면 발버둥쳐보던가.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으니.”
아주 귀여운 도발을 하던 그가 다시 거리를 벌리더니 미소를 활짝 짓는다.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빵은 다음 기회에 먹어야 할 것 같군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뒤돌아서 자기 마차로 돌아간다.
이대로 보낼 순 없지.
아주 간단한 작업을 좀 쳐줬다.
[바인드]
중상급 드루이드로 승급하면서 향상된 바인드 스킬은 맹수도 찢어 죽일 정도로 강력하지만 대도시 한복판에서 그럴 순 없다.
살짝만 조종해서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찰리의 발목을 휘감았다.
“으헉!”
오만한 놈일수록 발밑을 안 본다.
갑자기 발목이 잡힌 그가 콰당 넘어지며 바닥을 볼썽사납게 굴렀다.
그 사이에 은밀하게 목적을 달성한 나무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땅속으로 들어갔다.
“이것 참. 바닥을 잘 보셨어야죠. 아니면 하체가 부실하신가? 나중에 절 찾아오시면 운동법이라도 몇 개 가르쳐 드리죠.”
친절하게 조언해줬다.
비록 팔짱 끼고 짝다리를 짚긴 했지만.
내가 봐도 내가 좀 얄미워 보였다.
의도치 않게 창피한 모습을 보인 찰리가 씩씩대며 자기 혼자 일어났다.
놈은 시뻘게진 얼굴로 아까의 여유로운 태도는 어디에 갖다버렸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도대체가 도로 정비하는 놈들은 일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괜히 애꿎은 남 탓만 하던 찰리 놈이 바닥을 발로 쿵쿵 찧더니 마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빵집에 한바탕 폭풍이 불었다.
사장님이 싸주신 소금빵을 봉투에 담아온 시온이 말했다.
“도련님, 저 건방진 놈 죽여도 됩니까?”
“보는 눈이 조금 많아서.”
“하긴 그랬습니다.”
시온이 끄덕거리며 납득한다.
한편 이 모든 광경을 같이 구경한 안드레를 불러서 말했다.
참고로 안드레는 반제국파 가문이다.
비록 가문의 크기는 작지만 말이다.
“안드레.”
“네. 자작님.”
“지금 수도에 머무는 반제국파 부마 희망자들과 연락이 닿는가?”
“대부분 예전에 안면을 텄던 사람들이라 알고는 있습니다.”
수다스러운 성격이라서인지 안드레는 인간관계가 넓었고 제법 마당발이다.
잘 된 일이라 여기며 명령했다.
“지금 너와 연락되는 모든 반제국파 부마 희망자를 소집해라. 내가 불렀다고 해. 너가 모르는 애들도 건너건너 다 부르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찰리 힐튼이 부마로 간택되는 불상사를 막으려면 반제국파에도 어떤 후보가 있는지 알아봐야 했다.
그래야 깜냥이 될만한 애를 파격 지원해줘서 양강구도라도 만들 수 있으니까.
일단은 반제국파 부마 희망자들을 보며 인간 됨됨이와 능력을 파악하기로 했다.
* * *
늦은 저녁 8시.
안드레의 저택.
시계 태엽 감는 소리만 째깍째깍 울린다.
식사장에는 음식이 제법 많이 차려져 있었는데 딱딱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적어도 서른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에 자리한 건 나와 안드레를 포함한 다섯뿐이었다.
캠벨은 따로 밥 먹으러 갔고 시온은 내 뒤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
“겨우 이게 단가?”
내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안드레를 제외하면 그의 초대에 응해서 참석한 반제국파 부마 희망자는 겨우 세 명이었다.
“그게···답장이 오긴 왔습니다.”
“뭐라고?”
“몸이 편찮으신 분도 있고 선약이 있으신 분도 있고 부마 자리를 포기한다면서 불참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상황이 아주 요지경이다.
간택식을 눈앞에 둔 마당에 반제국파 수장이라고 불리는 로이드 가문의 후계자가 소집 명령을 내렸는데 안 온다라.
이건 우리 쪽에 줄을 서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의사전달이었다.
우선 참석한 사람이라도 살폈다.
냉정하게 말해서 외모부터가 애매하다.
아무리 그래도 신랑감을 고르는 자리다.
다른 자리면 몰라도 외모와 키는 필수.
어쨌든 부마가 왕녀님 옆에 서는 장면을 모든 왕국 국민이 볼 테고 그럴싸한 그림이 나와야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음···”
솔직히 말해서 셋 다 마음에 차지 않았다.
오늘 빵집에서 만났던 찰리 힐튼을 생각해보았다.
생긴 건 얍삽하게 생겼어도 피지컬 자체는 준수했고 얼굴도 그 정도면 무난한 편이다.
무엇보다 찰리 힐튼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그의 대항마가 되려면 최소한 외모라도 앞서야 하는데, 세 명 다 찰리 옆에 붙여놓으면 그대로 오징어행이다.
‘아직 실망하긴 이르다. 남자는 외모보다 능력이야.’
혹시 능력자가 있을지 기대했다.
성격이 좋거나 재력이 있거나 본신의 무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삼국지 제갈공명처럼 전설적인 지략가라든가.
이것저것 질문해봤더니···
“어차피 반제국파는 끝난 것 아닙니까? 저도 의리를 지키고자 왔지만 솔직히 안 될 것 알고 있습니다.”
부정형 인간 아웃.
“크하하하! 제가 어디 가서 외모적으로 꿀린다는 소리 안 들었습니다. 몸도 보십시오. 이 정도면 왕녀님도 저한테 반하실 겁니다.”
자의식 과잉 아웃.
“식사가 식어서 맛이 없군요. 다른 참석자들을 기다릴 시간에 바로 먹었으면 훨씬 맛이 괜찮았을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다들 조금씩 아쉬우시네요. 이번 간택식의 격이 떨어질까 염려됩니다.”
넌 그냥 아웃.
“하아···진짜.”
안드레가 제일 정상이었구나.
힘없는 중소 가문 출신에 좀 수다스럽긴 해도 애는 착하고 군더더기 없다.
나머지는 장차 왕국 전체를 통치하게 될 부마 희망자가 모인 건지 정상인인지를 감별 받자고 모인 건지 구별이 안 된다.
“식사는 여기까지 하지요. 다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간신히 삼키고 축객령을 내렸다.
텅 빈 식사장에서 안드레에게 물었다.
“이번 부마 간택식에 후보가 몇 명이나 나올 것 같나?”
“제가 듣기로는 약 서른 정도라는군요. 친제국파가 대략 스물셋, 반제국파가 오늘 보신 분들 포함해서 일곱입니다.”
23대 7.
과반을 한참 넘었다.
심지어 일곱 명 중 셋은 오늘 참석조차 안 했으니 나가리고.
나머지 셋도 방금 이상한 놈들인 거 확인했고.
저쪽은 22명이 똘똘 뭉쳐서 알게 모르게 찰리 힐튼을 지지하겠지.
이래서 빵집에서 만났을 때 그 얄미운 놈이 그렇게 여유만만했던 걸까.
“시온.”
“네.”
“찰리 암살해버릴까?”
“바로 출발할까요?”
“아냐. 넣어둬.”
암살은 최후의 수단이다.
별로 뒷맛이 좋은 방법도 아니고.
만약 들킬 경우에는 간택식이고 뭐고 왕국이 절반으로 쪼개진다.
무엇보다 안드레에게 듣기로 찰리 녀석은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익스퍼트에 올랐단다.
그런 놈이 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말이다.
-보나마나 영약빨로 올라간 놈이겠지. 내가 있던 곳에서도 그런 놈 꽤 있었다. 달마다 종류가 다른 영약을 먹어대며 내공빨로 올라간 놈들.
“그래도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건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게다가 나이도 저와 엇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단한 재능이긴 하군요.”
-예끼! 비교할 걸 비교해라! 그놈은 걸음마를 뗄 때부터 모든 지원을 받았고 너는 검 잡은 지 이 년도 안 됐잖느냐. 그런데 너는 익스퍼트 상급이고 그놈은 이제 초입이다.
확실히 천마가 이렇게 말하니까 확연히 실감 났다.
-허심탄회하게 말하자면 본좌도 너보다 빠르진 않았다. 이게 다 스승이 나였기 때문···
“네! 잘 들었습니다!”
좋은 지점에서 끊었고.
이제는 방법을 강구할 차례였는데.
무언가를 떠올리기도 전에 대문에서 소음이 들렸다.
콰앙!!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집주인 나와라.”
초대받지도 않았으면서 대놓고 집주인을 부르는 무례함이라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인가 싶어 안드레 대신 내가 나갔다.
기분이 안 좋은 상태라 일전에 만났던 도적처럼 초특급 마사지 코스를 들어갈 예정이었다.
“어떤 새···”
말이 끊겼다.
눈앞에 있는 중년 사내는 화려한 황금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전신에 풍기는 칼날 같은 기세에 몸이 저절로 경직됐다.
-고수다. 너보다 반수 윗줄.
천마의 심플한 감상평.
나도 모르게 천마검에 손이 올라갔다.
아직 영역은 연구중이지만 어떻게든 기운을 내뿜어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고 했다.
여차하면 드루이드 스킬까지 써가며 교전하려 했는데, 북풍한설 같은 기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소문이 허명이 아니었군. 헤논 로이드 자작.”
상대도 내 경지를 얼핏 느끼긴 했나 보다.
“누구시죠?”
“왕성의 수비를 책임지는 호넷이라 한다. 백작 위를 받긴 했는데, 말 편하게 해도 되겠지?”
호넷 백작, 즉 왕성 수비대장.
이 사람이 누군지 안다.
국왕 전하의 최심복이자 여태껏 왕실이 유지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이 사람이 기사단장으로 있는 왕성 기사단은 왕가에 대한 뼛속 깊은 충성심과 그와 어울리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물론입니다.”
“부전자전인가. 로이드 후작님도 보자마자 엄청난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도 마찬가지군.”
“과찬이십니다. 혹시 안드레 공자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아니, 용건은 너에게 있다.”
잠시 호흡을 고른 그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헤논 로이드 자작, 지엄하신 국왕 전하께서 자네를 궁으로 부르셨네. 지금 당장 알현하도록.”
VIP의 호출이 떨어졌다.
딱 봐도 거부권은 없었다.
* * *
왕궁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스테인글라스로 만든 유리창이었는데, 로이드 후작성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깔과 모양이 많아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리앙에서처럼 비싼 발광석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어서 밤에도 대낮처럼 환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이곳에 암살 임무를 맡는다면 그 임무는 포기하는 게 맞을 듯했다.
특히나 바로 옆에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는 호넷 대장이 있는 한은 말이다.
“무기를 맡아두겠다.”
순순히 천마검을 건넸다.
현재 시각은 밤 10시로 상당히 늦었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국왕과 독대라니.
왕실에서 로이드 가문을 신경 써준다는 방증일까.
어쨌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가면서도 귓가에 호넷 대장의 당부가 맴돌았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은 절대 바깥으로 퍼져선 안 된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안쪽 침실.
킹사이즈 침대가 커튼에 가려져 있다.
아무도 없었고 오직 노쇠한 늙은이 한 명이 상체만 세운 채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엘든 왕국의 국왕 알폰소였다.
“쿨럭! 쿨럭! 어서 오게. 쿨럭!”
황급히 손수건을 집어서 입에 댄다.
손수건에 붉은 혈흔이 묻어나왔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국왕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혹시 생명수라면···?’
잠시 사샤가 관리하는 생명수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명수로 치료하기엔 이미 너무 갔다.
당장 내일 타계하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헤논 로이드 자작.”
“과분한 작위입니다.”
“난 고든을 잘 알아. 쿨럭! 녀석은 깐깐한 동생이었지. 함부로 작위를 내려주는 짓 따위는 안 해. 그만큼 네가 스스로를 증명했다는 말이겠지.”
로이드 후작과 국왕 전하 사이의 일은 모르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밑바닥부터 올라왔으니 자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 내가 왜 불렀는지 진작에 눈치챘겠지.”
“그렇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나?”
상당히 포괄적인 질문이었으나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죄송합니다. 힘들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부마는 찰리 공자로 정해지고 왕실은 제국에 편입되겠지요.”
다소 냉정했으나 국왕의 성격을 보아하니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오히려 빠를 듯했다.
역시나 알폰소 국왕은 듣기 싫은 말이라고 걸러 듣는 타입은 아니었다.
예상했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쿨럭! 나의 대에 이르러 왕실의 역사가 저무니 선대왕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송구합니다.”
“네 잘못은 아니지. 다 내 업보에서 비롯된 결과이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내가 알폰소 국왕이었어도 할 일이 있었나 싶기는 했다.
나날이 제국은 강성해지고 왕실의 영향력은 약해지고 귀족들은 분산돼서 자기 가문 이득만 챙기니 말이다.
“쿨럭···자네는···똑똑해.”
“아닙니다.”
“사람 보는 일만 평생을 했어. 국왕을 앞에 두고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있어. 자신감이 넘쳐흐르지. 과하게 넘쳐흘러서 오만으로 변질된 자신감도 아니야.
사실 왕정 국가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왕에 대한 로망이나 환상이 없다.
지구에서 내가 살던 나라는 대통령 직선제였다.
이게 알게 모르게 티가 났나 보다.
“그런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들어보겠습니다.”
“쿨럭! 쿨럭!”
잠시 손수건에 피를 한바탕 쏟은 국왕이 가쁜 숨을 진정시킨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왕국의 운명과 관계없이 레베카가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게. 그것만이 내 마지막 소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