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엘프 : 기다린 망나니
피엔토 자작은 헤논을 자기 아래 두고 입맛대로 조종할 자신이 있었다.
최근에 헤논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지만 원래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부풀려지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소문이 어느 정도 그럴듯해야 믿지, 얼토당토않은 경우가 너무 많았다.
북부에서 성공적으로 군복무를 한 건 그렇다 치자.
같은 세븐 스타인 카리나 변경백이 로이드 후작을 신경 쓰느라 헤논을 후방에만 박아두면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악마살해자라느니, 단기필마로 알버스 성을 함락시켰다느니, 이런 허무맹랑한 소문은 믿기가 힘들었다.
피엔토 자작은 이를 영웅에 목말라하는 무지렁이들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헛소문이라 치부했다.
그래서 피엔토 자작은 헤논을 긁어보았다.
헤논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일백 이상 군사를 끌고 온 영주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역시나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영주들이 많은지, 아니면 피엔토 가문의 위세를 의식했는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
서신을 받은 영주 전원이 진로를 선회해서 그의 깃발 아래로 집결했다.
오천의 군세가 피엔토의 깃발 아래 모이자 사내인 이상 헛바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이지만 로이드 가문을 제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차피 몰티령이 무너지고 필립 공자도 행방불명된 상황. 여기서 헤논까지 허수아비로 만들면 장차 로이드 가문 전체를 내 손아귀에 넣을지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헤논이란 사생아가 어떤 됨됨이를 지녔는지 파악해야 했다.
소환장을 써서 이쪽으로 오라고 파발을 띄웠다.
봉신이 군주를 소환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지만 피엔토 자작은 일부러 이런 무례를 저질렀다.
‘자존심을 세우며 오지 않아도 좋고, 나한테 화를 내면서 역으로 소환장을 보내도 괜찮고, 질질 짜면서 후작에게 일러바치면 그야말로 최상이다.’
어떤 방면으로 상황이 전개되어도 헤논은 밑바닥을 드러내는 셈이고 자신은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그렇게 피엔토 자작은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헌데 여기서 이변이 일어났다.
헤논이 순순히 병사를 이끌고 소환에 응해버린 것이다.
당황스럽고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으나 이내 헤논이 끌고 온 군사의 숫자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겨우 사백 명이라...심지어 순수 로이드 후작가 병력은 고작 백 명이군.’
오천 군세에 비하면 명백히 초라하다.
피엔토 자작이 알기로 현재 로이드 후작가는 힐튼 백작가와 대치하느라 군사를 빼낼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극한으로 쥐어짜낸다면 중소 영주들과 합해서 총 팔백은 데리고 오지 않을까 싶었다.
‘팔백을 데려와도 꿀리는 마당에 그 절반인 사백만 데리고 오다니, 사생아의 한계인가.’
자기 딴에는 영지민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배려해주겠답시고 최소한의 인원만 차출한 모양이다.
피엔토 자작은 착한 영주인 척하려는 헤논의 같잖은 마음이 아니꼬웠다.
저런식으로 행동하면 영지민의 환심이야 살 수 있겠으나 귀족끼리 기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야 한다.
어쨌든 귀족들의 발언권과 영향력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사의 숫자로 정해지니까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 헤논 로이드 자작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평균 신장을 훌쩍 뛰어넘는 키.
윤기 넘치는 흑발 머리.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요요한 녹안.
한눈에 보기에도 다부진 몸.
동화책을 뚫고 나온 영웅의 상이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무거운 책임이 오가는 살벌한 귀족 무대에서 외모는 부차적인 사안일 뿐이다.
오히려 외모보다도 어떤 피가 섞였느냐, 즉 혈통과 개인 능력이 얼마나 출중하냐가 귀족의 지위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헤논은 명백한 결격사유를 보였다고 피엔토 자작은 확신했다.
‘한 번 건드려 보아라.’
사전에 계획한 대로 눈짓을 보내자 캉테 남작이 헤논을 살살 도발하기 시작했다.
“밑바닥 출신이라 어쩔 수 없나···”
“방금 뭐라고 했지?”
헤논이 발끈하여 미끼를 물어버리자 피엔토 자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유난이시군요.”
“젊으신데 벌써부터 귀가 어두워서야.”
예로부터 사람 셋이 모이면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식은 스튜 먹기라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셋도 아니라 수십 명이 모여있다.
꼬투리가 잡고 사정없이 물어뜯어서 헤논에게 안 좋은 여론을 형성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난데없이 캉테가 앉아있는 의자가 부서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끄아아아악!!!!”
저런.
하필 또 뾰족한 돌이 캉테를 치질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연회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엉덩이를 감싸 안고 꼴사납게 구르는 캉테 남작과 하필 날아간 의자 다리에 얻어맞은 노른 남작.
그 밖에도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떨거지 영주들.
유일하게 헤논만이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태도로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피엔토 자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이 모든 걸 의도했나?’
그랬을 리 없지.
피엔토 자작은 부정했다.
그가 아는 어떠한 스킬도 저절로 의자를 부수고 의자 다리를 정확히 목표한 곳에 보낼 수 없었다.
심지어 헤논은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자리에 앉아있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헤논을 놀리는데 앞장선 캉테 남작의 의자가 부서지다니.
게다가 의자 다리는 대놓고 헤논을 빈정거렸던 노른 남작을 정확하게 타격했고 마지막 의자 다리는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어왔다.
물론 익스퍼트의 고수인 피엔토 자작은 눈먼 공격을 가뿐히 피했으나 우연히 여러 번 겹친 이 상황이 찝찝하기만 하였다.
‘흐름이 바뀌었다.’
그가 원한 건 헤논을 공개적으로 두들겨 패는 분위기였는데 정작 선봉에 선 놈들은 창피한 꼴을 보여줬고 반대로 헤논이 이들을 걱정해준다.
‘좋지 않다.’
현재 영주들은 자신을 따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헤논이 미숙한 사생아라 못 미더워서 따르는 것이지, 개중에는 능력만 준수하다면 헤논에게 붙을 영주도 존재했다.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그러려면 헤논의 밑바닥을 드러내야지.
애초에 똥침이나 당하고 쓰러진 캉테 남작이나 의자에 얻어맞고 질질 짜는 노른 남작 같은 떨거지를 믿진 않았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수를 쓰기로 결정했다.
* * *
한바탕 소동이 정리되었다.
아래쪽에 터널이 개통된 캉테 남작은 들것에 실려나갔다.
노른 남작이란 사람도 얼굴에 붕대를 감겠다고 호들갑을 떨며 나가자 공기가 썰렁해졌다.
“허허···이것참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많은 날이군요.”
“곧 엘프와의 결전에서 있을 부정한 기운을 털어내는 액땜이라 봐야겠지요.”
피엔토 자작의 말을 부드럽게 넘겼다.
몇몇 영주가 내가 망나니란 소문과는 달리 멀쩡해 보이자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자! 자! 큰일을 앞두지 않았습니까? 든든히 먹어둡시다.”
연회를 재개하는 피엔토 자작.
다시 식사가 시작된다.
식탁에 오르는 화제 중에 엘프란 단어는 나오지도 않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자기 영지에 일어난 특이한 일을 언급하거나 제국과 왕국 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중에는 현재 칼론 제국에서 유행하는 담배 열풍을 토론하는 자도 있었다.
‘정말 요지경이로군.’
여기 있는 귀족들의 한계겠지.
엘프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그 누구도 긴장한 기색을 보이거나 전략전술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승리를 이미 확정 지은 듯이 행동하길래 어이가 없었다.
받아먹는데 익숙한 이놈들은 당장 눈앞에서 적이 칼로 위협해도 목이 마르니 포도주를 갖다달라 할 녀석들이다.
그렇다면 피엔토 자작은 뭐 하는지 볼까.
그는 조용히 포도주를 마시다가 옆에 있던 부관을 부른 다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명령을 전달받은 부관이 천막 바깥으로 나갔고, 나와 눈이 딱 마주친 피엔토 자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둘러댔다.
“포도주가 맛없어서 바꿔달라 했습니다.”
음흉한 사내다.
저렇게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나를 어떻게 담글까만 고민하고 있겠지.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감히! 천한 것이 누구 몸에 손을 대느냐!”
고래고래 고함을 쳐서 천막 안까지 소리가 들렸다.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귀족들이 포크질과 나이프질이 멈추었다.
곧이어 부관 한 명이 들어와서 부복한 채 피엔토 자작에게 말했다.
“영주님, 잠시 나와보셔야 할듯합니다.”
“무슨 일이지?”
“로이드 자작님의 하녀가 프랭키 공자님을 폭행했습니다.”
왠지 그 하녀가 누군지 알 것 같다.
보고하던 부관은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서 장내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영주들이 술렁댔다.
피엔토 자작이 불쾌한 기색을 띄우며 말했다.
“뭐라? 조카가 하녀에게 맞았다고?”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일단 안내해라.”
부관과 대화하는 사이에도 바깥의 소란은 점점 커졌고 욕설의 수위도 올라갔다.
나와 피엔토 자작을 위시한 영주들이 우르르 나와서 무슨 상황인지 확인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
“여인의 몸에 함부로 손대려 하는 무뢰배의 이름을 굳이 알고 싶진 않군요.”
“감히! 하녀 주제에!”
“당신과 제가 섬기는 주군이 다른 걸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그 더러운 손을 자르려다가 참았으니까.”
역시나 부관이 지칭하던 하녀는 시온이었다.
그녀는 보라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피엔토 자작의 조카인 프랭키를 노려보았다.
프랭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고작 여인네, 그것도 하녀에게 기가 죽는 모습을 보이는 건 창피하다 생각했는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조용!!”
피엔토 자작이 장내를 진정시켰다.
프랭키는 피엔토 자작을 보더니 주인을 본 개처럼 후다닥 달려와서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삼촌, 로이드 자작의 하녀가 미쳤습니다! 이거 보이십니까?”
한쪽 뺨에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보인다.
이미 시온에게 한 대 맞았구나.
나는 시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몸은 괜찮으냐?”
“별일 없습니다. 그보다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버렸습니다.”
“괜찮다. 저쪽이 먼저 시작했느냐?”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어색하게 대놓고 수작질을 벌이더군요.”
여기서 가능성은 두 가지다.
프랭키란 놈이 이런 자리에서도 여인에게 손댈 정도로 경우가 없는 놈이거나.
사전에 피엔토 자작에게 언질을 받고 일부러 저질렀거나.
나는 후자의 경우에 무게를 실었다.
아마 피엔토 자작이 연회에서 부관에게 한 귓속말이 신호를 준 행동이었겠지.
“하하! 난감하게 되었군요.”
프랭키에게 설명을 들은 피엔토 자작이 뒤통수를 긁으며 다가왔다.
“전쟁을 앞두고 이런 일이 발생해서 유감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같은 편끼리 굳이 얼굴 붉힐 필요 없겠지요. 하녀를 저희 쪽으로 넘겨주시면 이번 일은 깔끔하게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역시나 입에서 똥 같은 소리만 내뱉는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하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작님의 조카분이 먼저 제 여인에게 손을 대려 했더군요. 저는 오히려 프랭키 공자의 정식 사과를 바랍니다.”
내 말을 들은 피엔토 자작이 걸려들었다는 듯이 히죽댄다.
“조카의 말에 따르면 손을 댄 적도 없는데 하녀가 먼저 손찌검을 했다는데요.”
“말은 바로 하셔야죠. 정확히 말하자면 손을 대려 했다가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프랭키는 피엔토의 귀한 피가 흐르는 귀족입니다. 설마 자작님은 귀족의 말보다 천한 하녀의 말을 믿겠다는 겁니까?”
이쯤 되니까 피엔토 자작의 모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 프랭키의 말이 맞는데 내가 시온을 끝까지 보호하려 들면 하녀의 말에 놀아나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우매한 자가 되어버린다.
반면에 순순히 시온을 포기한다면 아랫사람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상관으로 낙인 찍히고 부하에게까지 신뢰를 잃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 이미지는 안 좋게 비칠 테고 피엔토 자작은 이를 바탕으로 주도권을 잡겠다는 심산이다.
여기서 내가 빠져나갈 구멍은 단 하나.
프랭키의 주장이 틀리고 시온이 옳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시온이 나서서 말했다.
“프랭키 공자님이 저에게 치근댄 장면을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봤습니다.”
시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피엔토 자작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으며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자들에게 묻겠다. 정말로 내 조카가 하녀를 희롱했는가?”
그러자 후작성 경비대 출신 병사가 몇 명 나와서 증언한다.
“제가 봤습니다. 시온은 가만히 있었는데 공자님이 갑자기 다가왔습니다.”
“맞습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끈질기게 접근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피엔토 쪽에서도 병사와 기사들이 나서서 목격담을 진술했다.
“아닙니다. 저 하녀가 먼저 프랭키 공자를 유혹했습니다.”
“오히려 피해자는 프랭키 공자님입니다. 공자님이 몇 번 거절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감히 공자님을 손찌검했습니다.”
“아주 요망한 년입니다. 지금도 저렇게 얌전한 척 내숭을 떨고 있으니 소름이 돋는군요.”
이후에도 피엔토 쪽에서 프랭키의 결백을 주장하는 증언들이 연달아 쏟아졌다.
내 편을 들어주는 후작성의 경비대는 고작 일백이고 피엔토 자작이 끌고 온 병사는 이천이다.
머릿수 차이로 밀어붙인다.
의기양양해진 피엔토 자작이 내게 말했다.
“이제 좀 믿으시겠습니까?”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지는군요. 여기 없던 사람도 무작정 우기고 있습니다만.”
“로이드 자작님, 젊으신 분이 벌써부터 그렇게 꽉 막히시면 곤란합니다.”
“허면 자작님 말씀은 여기 있는 이천 명이 전부 프랭키 공자가 제 하녀를 가해자라 증언하는 겁니까?”
피엔토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안 그러냐, 이놈들아?”
“““맞습니다!!!!”””
피엔토 가문에서 온 병사들이 충성심을 보여주려는 듯 일제히 대답했다.
현재 여기 모인 병력은 총 오천.
그중에서 이천이면 거진 절반에 해당하는 수였으니 그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피엔토가 아닌 기사와 병사에게도 물어보고 싶군요. 그들 또한 여기서 벌어진 소란을 봤을 테니까요.”
내 말을 들은 타가문 출신 군사들이 진땀을 흘리며 난색을 표했다.
“그, 글쎄요?”
“사주 경계를 하느라 못 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어···음···그게 참···커허험.”
애초에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피엔토 자작은 자신에게 거짓조차 진실로 만드는 영향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런 억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천 명에 달하는 엄청난 머릿수였다.
“로이드 자작님, 더 고집을 부리시면 곤란합니다. 고작 이런 사소한 일로 저희끼리 감정 상하면 되겠습니까? 하녀만 넘겨주시면 이번 일은 특별히 덮어 드리겠습니다.”
간교한 그가 뱀의 혀를 날름대고 승리감에 도취된 듯 눈알을 번들거린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응시했다.
이를 고민하는 걸로 여긴 피엔토 자작이 피식였다.
“뭘 그렇게 고심하십니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 때가 됐거든요.”
“무엇을요?”
“진실이 거짓을 이기는 순간을요.”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들은 피엔토 자작이 미간이 찡그려졌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아,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뿌우우우우!!!!!
멀리서 뿔나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언덕 너머로 수많은 군세가 모습을 보였다.
얼핏 봐도 수천에 달하는 숫자.
정체불명 군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부대 전체에 혼란이 왔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섰다.
“전원 대응을 멈춰라! 아군이다!”
말을 타고 선두로 나섰다.
햇빛에 비친 병사들의 무구가 번쩍였고,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에는 푸른 매가 비상하고 있었다.
선두에 선 용병대장 라칸이 나를 보더니 말에 내려와 부복한다.
“주군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본 라칸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원래도 다부졌던 몸은 훨씬 단단해졌으며 병사들을 훈련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한 듯 피부가 그을렸다.
거느리고 온 용병부대 또한 알버스 성에서 봤을 때와 비교하기 미안할 수준의 강병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때는 격식 없이 자유로운 용병의 느낌이 강했다면은 지금은 규격과 체계를 갖춘 영락없는 정규군이었다.
“많이 훈련했군요.”
“주군 덕분입니다. 돈이 꽂히는데 어떻게 애들을 놀리겠습니까?”
“머릿수도 조금 늘어난 것 같은데?”
저번에 봤을 때 푸른매 용병단은 총 이천 명이었는데 지금은 일천명이 늘은 삼천 명이 되었다.
“요새 저희 용병단이 복지가 좋단 얘기를 듣고 지원자들이 줄을 서서 가려 뽑는 실정입니다.”
라칸의 옆에 빡빡이 머리를 한 무표정한 사내가 낯이 익었다. 등 뒤에 도끼를 교차시켜 맨 녀석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숙인다.
“은인을 뵙습니다.”
“너는 분명···리앙 레스토랑에서 구해줬던 그 노예로군.”
“맞습니다. 유칼입니다.”
용병대장 라칸이 유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놈 아주 물건입니다. 도끼 배운지 반년도 안 돼서 유저에 올랐습니다.”
저번에 봤을 때부터 눈빛이 살아있다 느끼긴 했는데 과연 될성부른 떡잎이었나 보다.
“모든 게 은인 덕분입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불구덩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나에 대한 충성심이 과하게 패치된 듯 싶었으나 뭐 나쁘진 않았다.
앞으로의 성장도 기대되었다.
찾아온 방문객은 푸른매 용병단 뿐만이 아니었다.
리앙의 경비대장 에이든이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내 앞에 섰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뵙는군요. 수호군 총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에이든? 제가 부른 기억은 없는데요.”
“리앙은 모든 소식이 다 들려오는 곳입니다. 유론 시장님이 자작님이 도움이 필요하시다 판단하시고 급한 대로 수호군 삼천을 보내주셨습니다.”
유론 시장님의 안배였구나.
여러모로 고마우신 분이다.
그렇게 내 아래에는 라칸과 에이든을 위시한 육천 군대가 생겼다.
“아참,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게 있군요.”
현재 연합군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피엔토 자작을 위시한 몇몇 영주들이 분위기를 주도하여 나를 물어뜯고 있다 설명했고.
심지어 시온을 일개 하녀로 취급하며 몰아세웠다는 말에 에이든과 라칸이 길길이 날뛰었다.
“시온이라면 황혼의 대간부와도 싸웠던 강단 있는 여인 아닙니까? 말도 안 됩니다.”
“명령만 내려주시지요. 당장 저 배때기에 기름만 찬 돼지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하하, 고마운 말이나 저들 또한 제가 지휘해야 할 병사들입니다. 엘프와의 전투를 앞두고 쓸데없는 피를 흘릴 필요는 없으니 장단만 맞춰주시면 됩니다.”
우 라칸 좌 에이든을 이끌고 뒤에 육천 군세와 함께 위풍당당 진지로 돌아왔다.
사전에 언질을 받은 리앙의 수호군과 푸른매 용병단은 마치 전쟁이라도 벌일 것처럼 살기를 줄기줄기 뿌리며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몇몇 병사는 활시위에 화살을 올려놓거나 대놓고 검을 뽑아서 혀로 할짝였다
“저들은 누구시오?”
갑작스러운 무장 세력의 등장에 잔뜩 긴장한 피엔토 자작이 잠긴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소개하지요. 이쪽은 푸른매 용병단장 라칸입니다.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현재는 로이드 자작님을 주군으로 섬기는 라칸이오.”
“그리고 이쪽은 리앙의 경비대장이자 수호군 부사령관 에이든입니다.”
“리앙의 영웅을 도우러 왔습니다.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푸른매 용병단은 엘든 왕국 영지전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단으로 유명해서 적어도 여기 있는 귀족들은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뒤에 있는 에이든은 또 어떠한가. 그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자유도시 리앙 출신에 유론 시장을 뒤에 업고 있다.
특히나 귀족들은 에이든과 라칸이 나를 주군 내지는 영웅이라 부르며 우대하는 태도에 집중했다.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아까 못했던 얘기를 다시 해보지요. 어디까지 했더라?”
피엔토 자작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딱딱히 굳는다.
“아참, 자작님의 조카가 제 하녀를 희롱한 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죠.”
“말은 바로 하시오. 그쪽 하녀가 내 조카를 때린 거지.”
지기 싫어서 더 뻗대는 스타일인가.
이때다 싶어서 라칸과 에이든이 나선다.
“내가 봤는데 자작님 조카가 시온을 희롱하더군요.”
“나도 봤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타가문의 여인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이 말을 들은 피엔토 자작이 입에 거품을 물며 광분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기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뭘 봤다고 증언을 하시오!”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가 필수다.
똑같이 당해봐야 어떤 기분인지 진정으로 느낀다.
“멀리서 봤소.”
“나도요.”
“거짓말하지 마시오!”
“피엔토 자작.”
마나를 실어서 말하자 주변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피엔토 자작에게 처음으로 내 기운을 쏘아 보냈다.
“잘 생각해보세요. 라칸과 에이든을 포함해서 내 육천 군사 전원이 자작님의 조카가 내 하녀를 희롱한 걸 봤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피엔토 자작.”
그의 말을 끊었다.
“마지막 기회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피엔토 자작이 주변을 둘러본다.
검이 뽑히고 화살이 매겨진다.
싸늘한 공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눈치 빠른 놈이니 알 거다.
여기서 잘못 대답하는 즉시 평원에는 피바다가 펼쳐질 거라는 것을.
만약 이 상황에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다면 진심으로 아르니아 대륙에서 피엔토란 세글자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충분히 그럴 능력도, 세력도 있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늘한 내 시선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뻘뻘 흘리던 피엔토 자작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내 조카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이제야 꼬리를 내린다.
대충 우열이 가려졌으니 그동안 나를 두고 수작질한 대가를 받아야겠지.
천마검을 뽑아서 피엔토 자작에게 건넸다.
내가 갑자기 검을 건네자 무슨 의도인지 몰라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피엔토 자작에게 엄숙하게 선언했다.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겠지.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첫 명령을 내린다. 피엔토 자작은 전시상황에 군기를 흐트러트린 죄인 프랭키를 즉결 처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