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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75화 (75/200)

10장 부화 : 으쓱한 망나니

시청사 싸움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탐욕을 여태까지 상대한 적 중에서 가장 강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더러운 놈은 맞았다.

전투 자체가 깔끔과는 거리가 멀었고 끈적거리고 질척이고 계속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느낌이었다.

지하에 들어오자마자 제물로 바쳐질 노예를 인질 삼아서 협박을 하지 않나.

싸움 내내 괴물 알이 깨어날 거라 으름장을 놓으면서 타임어택을 강요하질 않나.

근접전은 절대 안 하면서 멀리서 온갖 장난감으로 상대를 괴롭히질 않나.

그중에서 벗은 가면 속에 드러난 환상안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다른 기술은 몰라도 환영술만큼은 탐욕이 어째서 황혼의 대간부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죽을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놈은 죽고 나서도 자신의 시체를 양분 삼아서 고대의 저주를 완성시켰다.

온갖 디버프를 흩뿌리는 저주 괴물은 나오자마자 일행을 무력화시켰기에 하는 수 없이 나 혼자 일대일을 했다.

만약 톰이 준 오러블렛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살았을지 몰라도 동료들은 죽고 리앙의 모든 생존자는 탐욕이 말한 희생제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한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전투 데이터까지 학습한 괴물은 인근 영지까지 파괴하며 더욱 강해졌을 것이고.

마침내 대륙 공적이 되어서 마왕 바알 못지않은 악영향을 끼쳤을 게 자명했으니.

한마디로 이번 일은 그저 시청사 지하에서 일어난 하나의 전투로만 볼 게 아니라 전 대륙에 닥칠뻔한 위기를 극복한 사건이라 봐야 했다.

“수고했다.”

톰이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에서 느껴지는 잔떨림.

떨리는 와중에도 내 어깨를 꽉 잡고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그가 시청사 전투 내내 얼마나 긴장했고 또 안도했는지 보여줬다

디버프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자유를 찾은 캠벨도 다친 몸을 이끌고 어기적 다가와서 나를 꽉 껴안았다.

“난 부단장이 해낼 줄 알았어! 솔직히 저 괴물이 날 바보로 만들었을 때 여기가 무덤이겠구나 싶었거든. 그런데 그걸 물리치다니! 진짜 대단해.”

“숨 막히니까 이만 놔라. 그리고 내가 아니라 톰님이 준 유물로 처리했어.”

“아닐세. 오러불렛이 있었어도 나는 사용할 여건이 안 되었네. 자네가 직접 그 무기를 들고 저 악마를 해치운 거야.”

톰에게 공을 돌리려고 했더니 그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한다.

캠벨에 이어서는 시온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우는 건가?”

솔직히 놀랐다.

시온이 눈물을 보이는 건 거의 처음이었기에.

그녀는 연기할 때가 아니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행복할 때도 비통할 때도 무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암살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었고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 세바스찬에게 철저히 교육받았다.

그런 그녀가 기쁨과 안도의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는 힘들게 받은 훈련을 넘어설 정도로 감동의 파도가 격렬했다는 뜻이다.

“도련님!”

시온이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내 목을 껴안은 그녀.

그녀의 가슴팍에서 내가 선물한 목걸이 감촉이 느껴졌다.

“아···”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잠시 후에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서 내게서 거리를 두었다.

물결처럼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목부터 귀끝까지 새빨간 홍시처럼 달아오른 그녀가 안절부절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비록 말주변이 없어서 그럴싸한 멘트는 없었으나 행동만으로도 날 위하는 진심이 충분히 전해졌으니 말이다.

“세상에, 결국 해냈구먼!”

마침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사람도 등장하셨다.

지하실 입구 쪽에서 등장한 유론 시장이 지하에서 벌어진 난장판을 보며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들어왔네. 현장만 봐도 정말이지 엄청난 혈투였군.”

유론 시장 또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할 말은 많은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는지 호흡을 몇 번 고른 다음에 입을 열었다.

“잠깐이지만 전투의 끄트머리를 봤네. 자네가 꿈에서라도 나올까 두려운 괴물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장면은 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걸세.”

시장이 나를 보는 눈빛에는 존경과 경외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영웅을 보는 눈빛이었다.

“공치사는 감사합니다. 허나 지금은 일단 이곳을 정리해야 할 듯합니다. 저희 일행도 휴식을 취하며 부상을 돌봐야 하고요.”

“내 정신 좀 보게. 자네 말이 맞네. 여기는 내게 맡기고 일단은 밖으로 나가지.”

서로를 부축해주며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갈 때는 짧았던 계단이 올라갈 때는 왜 이리 긴지. 대신에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마침내 지하를 벗어나서 시청사 정문으로 나왔다. 환한 햇살이 피부에 스며들며 생기를 북돋웠다.

아침을 알리는 수탉 소리. 짹짹대며 날아가는 참새. 코를 간질이는 구수한 빵 내음. 수평선에 떠오르는 무역선 행렬.

이제야 리앙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음을 실감했다.

“시장님, 저희는 물러나 보겠습니다.”

“물러나다니? 내 집을 비워줄 테니 머물고 가게나.”

“아닙니다. 그리고 시장님 자택도 현재 어떤 상황일지 모르잖습니까?”

내 말에 유론 시장의 입이 닫혔다.

탐욕은 꽤 오랜 기간을 시장 행세를 했으니 그의 집안에도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몰랐다.

유론은 본인 가족의 안위부터 파악해야 했고, 그 밖에도 자신이 없을 때 탐욕이 벌인 수많은 사안을 되돌려야 했다.

“일이 해결되면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저희는 시청 근처 여관에 묵고 있겠습니다.”

“알았네.”

“그리고 오늘 시청사 지하에서 벌어진 일은 최대한 비밀에 부쳐주십시오.”

질투에 이어서 또 다른 황혼의 대간부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아르니아 대륙에 퍼지면 보통의 인간에게는 경사겠지만 지금 내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내가 탐욕의 사냥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밝혀지면 이번에야말로 황혼은 전력을 총동원해 로이드 가문을 박살 내려 할 터.

적절한 무력을 갖춘 상태에서 황혼이 건드린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으나 지금은 마스터에도 이르지 못했으니 시기상조였다.

“물론이네. 오히려 그건 내가 부탁하고 싶군. 황혼교의 간부가 리앙의 시장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사실이 퍼지면 나라고 목이 온전할 것 같은가?”

다행히도 유론 시장과 내 처지가 비슷해서 그쪽 방면으로는 걱정할 필요 없을 듯했다.

“뒷일은 나에게 맡기고 푹 쉬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닐세. 나야말로 고맙네.”

유론 시장과 헤어지고 톰도 잠시 갈 곳이 있다고 잠시 헤어지자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배반자 마일로를 잡지 않았나. 순례자 모임에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가야지.”

“그렇군요.”

“엄청난 대사건이야. 아마 소식을 전하면 이쪽 사회도 들썩할 걸세.”

가기 전에 톰은 우리가 머물 여관을 추천해주고 갔다.

듣기로는 자신이 리앙에 거주할 동안 머물렀던 여관인데 가성비가 좋다나 뭐라나.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여관이든 침대에 머리를 대고 싶었기에 냉큼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푹 쉬고 있게. 내일 찾아오겠네.”

“살펴가십시오.”

톰과 헤어지고 여관에 들어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주머니가 인심 좋은 미소로 맞이한다.

“어서 오세요.”

침대가 급하다.

아공간에서 금화를 꺼내 던졌다.

“꺄악! 손님? 이거 금화예요!”

“금화 맞으니까 방 좀 안내해주시죠.”

“네넵!!”

아주머니가 황급히 방문을 열어줬고.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뛰어들었다.

이후엔 시커먼 먹구름이 의식을 뒤덮으며 기억이 사라졌다.

* * *

번뜩!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주위를 살폈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한시도 마음 놓고 자본 적이 없었다.

로이드 후작령에서는 필립과 로잘린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며 북부에서는 혹독한 환경 때문에 선잠을 잤다.

리앙에서야 당연히 작전지역이라 긴장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숙면을 제대로 취했다.

굳이 따지자면 숙면보다는 기절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끈질긴 생명력 발동]

[체력 완전 회복]

드루이드가 처음 되었을 때 얻었던 패시브 스킬인 끈질긴 생명력으로 육체의 피로는 완벽히 풀었으나 정신적인 피로까지는 해결이 안 되었나 보다.

특히 이번 전투는 환상 속 세계에 빠져나오느라 의식 소비가 심했기에 훨씬 피로감이 느껴졌겠지.

창밖에 비치는 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분명히 해가 떠있을 때 잠들었는데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아침이다.

침대 옆에 놓여있는 천마검을 잡으니 머릿속으로 꼬장한 노인네 목소리가 울린다.

-이 잠탱이 녀석! 드디어 일어났구나!

“제가 얼마나 잔 겁니까?”

-무려 사흘을 내리 잤다. 뒤통수에 잠귀라도 붙은 게냐.

하루인 줄 알았는데 사흘이라니.

엄청 오래 자긴 했구나.

정신적 피로가 상당했었나 보다.

-그건 그렇고. 네 옆에 있는 하녀도 좀 깨워라. 아랫사람은 윗사람 따라간다고. 너를 닮아서 그런지 죽어도 안 일어나더구나. 친우가 있었다면 둘 중 누가 먼저 일어나는지 내기라도 했을 게다.

침대를 보니 내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시온이 세상 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도 나와 똑같은 환경에서 더욱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심지어 체력 회복 스킬도 없어서 날마다 두세 시간만 자며 억지로 버텼을 테니까.

깨우기 미안해서 침대를 벗어나려는데 인기척을 듣고 시온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났나?”

반쯤 감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벌떡 침대에서 내려온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알면 됐다. 짐부터 챙겨라. 사흘이나 지났으니 톰이 찾아올 거다.”

“···네?”

“잘 안 들리나? 톰이 온다고.”

시온은 자신이 모시던 도련님 옆에서 며칠을 무방비로 잤다는 사실을 부정이라도 하듯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뒤늦게 몰려오는 수치심 때문인지 보라색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짐을 품에 끌어온다.

당황하는 시온을 놀리는 것도 나름 소소한 재미겠지만 아쉽게도 기회는 다음으로 미뤘다.

당장 식당이 위치한 1층에서 고함이 들려왔으니 말이다.

“이제 그만 좀 드세요!”

“부단장이 금화 던져주고 갔잖아.”

“이미 금화보다 훨씬 더 드셨습니다. 그것도 전부 외상으로요. 이러면 식재료 떨어져서 오늘 장사 못해요.”

“무슨 주점에 음식이 없어?”

“없는 게 아니라 그 많은 걸 당신이 다 먹었다고!!”

대충 들어보니 누가 문제인지 알 것 같다.

시온을 대동하고 1층을 내려가보니 저번에 봤던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캠벨 앞에서 화내고 있다.

주점의 손님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났는지 지켜보며 맥주를 홀짝댔고 캠벨은 무안했는지 뒤통수를 긁적이면서도 포크질은 멈추지 않았다.

일행이라고 하기 창피한데 모르는 척하고 여관을 나갈까. 슬쩍 시온을 봤는데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심전심이라고, 굳이 말이 오가지 않아도 동일한 생각인 게 분명했다.

“여~부단장! 일어났어? 난 하도 안 내려오길래 자다 죽은 줄 알았지 뭐야.”

아쉽게도 타이밍을 놓쳤다.

테이블에 그릇을 산처럼 쌓아놓고 입에 음식을 구겨 넣던 캠벨은 나와 시온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주점 내 모든 이목이 우리에게 쏠리자 한숨을 쉬고 캠벨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밥 먹고 있었지.”

“외상으로?”

캠벨도 태산처럼 높게 쌓인 그릇의 높이가 민망했던지 뒤통수를 긁적인다.

뭐라 한마디 할까 싶다가도 괴물로부터 리앙을 구했는데 먹는 것 가지고 구박하기도 좀 그렇다.

대신에 주인아주머니에게 금화 다섯 개를 튕겨줬다.

“오매나! 이게 다 뭐시여!?”

“며칠 간 밀린 외상값 숙박비입니다. 남는 건 팁 하시고요.”

“아이고! 손님! 얼마든지 드세요. 아예 시장가서 장 보고 문 닫을 테니 배 터지도록 드세요.”

금화가 주입된 주인 아주머니의 태세전환은 화살보다 빨랐다.

그러나 캠벨은 오늘 영 먹을 운이 없나 보다.

바깥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린다.

누가 봐도 고의적으로 세게 열자 주점에서 죽치고 있던 덩어리들이 어깨를 부풀리며 일어난다.

“어이, 미쳤어?”

“누가 이렇게 예의를 밥 말아 먹고 들어오시나.”

“발가락을 뽑아서 콧구멍에 처넣어줘야 정신을 차리···”

덩어리들이 들어온 자들의 복장을 보고 일제히 합죽이가 되었다.

흰색 군복을 맞춰 입은 자들은 리앙 시청 소속 경비대였으니까.

공권력을 마주한 이들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서 언제 자신이 소리쳤나는 듯이 접시에 코 박고 식사에 열중했다.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콧수염 남자가 실내를 스윽 한번 훑더니 이내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헤논 자작님이십니까?”

경비대장의 말에 술집이 술렁였다.

리앙의 위치가 로이드 후작령과 힐튼 백작령과 가까워서 최근 내 소문도 리앙에 제법 퍼진 상태였다.

술꾼들이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를 귀 기울여 보니 망나니라든지, 악마살해자라든지, 허풍쟁이라든지, 여러 단어가 중구난방으로 뒤엉켰다.

“그렇다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일제히 나를 중심으로 좌우로 도열했는데, 그 대열이 주점에서부터 바깥까지 이어졌다.

“받들어 창!!”

양쪽에 선 경비대들이 일제히 창을 들어 올렸고, 어디서 악공이라도 불러왔는지 북까지 쳐서 분위기를 띄운다.

내가 걸어갈 길에 급하게 깔린 레드 카펫은 미리 대기해있던 최고급 8두 마차까지 이어졌다.

경비병들이 표한 극상의 예에 지켜보던 모든 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고 주인아주머니도 괜히 캠벨에게 음식을 더 갖다 주었다.

반면에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경비대장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현 시각으로부터 헤논 로이드 자작님께서는 리앙의 최고 귀빈이십니다. 시장께서 만나뵙기를 청하십니다. 부디 귀중한 시간 내주시길.”

아무래도 유론 시장님이 나한테 많이 고마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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