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부화 : 겨냥한 망나니
작전이 지나치게 수월하다고는 느꼈다.
변변찮은 저항세력 하나 없었고 익스퍼트는커녕 유저급 무인조차 없었잖는가.
한 번쯤은 의심하고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정말 황혼의 대간부가 이런 상황을 전혀 대비해놓지 않았는지 말이다.
“톰 형, 이게 얼마만입니까? 정말 반갑군요.”
역시나 순례자 톰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한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톰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일로! 네놈이군!”
“예, 예, 접니다.”
“그러면 아이언 메이든에 들어가있는 놈은 누구지?”
“누구긴요. 저와 체형과 목소리가 비슷한 녀석을 뽑아서 광대 노릇을 시켰지요. 톰 형처럼 절 노리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요.”
황혼의 대간부 탐욕의 본명은 마일로였나 보다.
어쨌든 아이언 메이든은 꽤나 귀한 유물 같아 보였는데 탐욕이 아닌 엄한 놈을 잡아놨으니 노림수가 낭비된 셈이다.
공중에 떠있는 아이언 메이든을 흘낏 쳐다본 탐욕이 피식했다.
“아이언 메이든은 여전히 건재하군요. 어렸을 적에 저런 절대봉인 유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제게는 참 충격이었거든요. 도대체 어떤 유물이길래 세상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일시적으로 존재를 묶어둘 수 있는 걸까?”
“닥쳐라.”
“하지만 봉인의 힘이 강력한 만큼 그 단점 또한 명확하다고 형님께서 알려주셨지요. 한 번 유물을 발동시키면 다음 발동까지 적어도 한 달은 걸린다고요.”
봉인된 가짜 탐욕과 달리 진짜 탐욕은 톰이 가지고 있는 유물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상관없다. 아이언 메이든 따위 없어도 널 잡는 건 어렵지 않으니.”
“과연 그럴까요?”
여유를 부리던 탐욕이 허공에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그러자 발광석이 비치지 않던 어둠 속을 뚫고 나온 촉수가 톰을 향해 쇄도했다.
“톰!”
순보를 써서 구하려고 했지만 캠벨을 구하느라 톰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촉수들은 톰을 둘러싸더니 물샐틈없는 검은 구체를 형성했다.
톰은 완벽히 감금된 것이다.
안쪽에서 굉음이 터지긴 했는데 견고한 검은 구체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속박 수단을 당신만 가지고 있다고 여기면 오산입니다. 피의 성배로 갈취한 생명력을 가득 머금은 마계의 식물이니 아무리 톰형이라도 탈출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요.”
이어서 탐욕은 눈을 돌려 시선을 내 쪽으로 향했다.
“흐음···후작가의 망나니가 여기까지 어인 일이실까.”
가면과 후드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단번에 정체가 탄로 났다.
“내가 누군지 아나?”
“모를 수가 없지. 최근에 나를 그렇게 엿먹인 놈인데 말이야.”
뿌드드득!
가면 속 숨겨진 탐욕의 이빨이 갈린다.
“진작부터 네놈을 보고 싶었다. 망나니면 망나니답게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왜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느냐?”
탐욕이 나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나를 우선 타겟을 삼고 있다는 말이니까.
내가 눈짓하자 알아들은 시온과 캠벨이 서둘러 사샤를 후방으로 보내고 구출한 노예들과 보름달 시장 노예들을 최대한 탐욕과 먼 곳으로 위치시켰다.
곧이어 전투가 벌어질 때 휘말리지 않게 하려는 내 안배였다.
물론 아직도 마법진에는 훨씬 더 많은 인간이 촉수에 연결된 채 생기를 빨리고 있었으나 거기까지 구출하기엔 무리였다.
“네가 로이드 영지에 저지른 똥은 잘 받았다. 정말이지 뒤통수치기 전문이더군. 톰형도 그렇고 로잘린도 그렇고. 배신을 안 하면 어디가 간지럽기라도 하나?”
탐욕을 도발하면서도 눈과 귀는 활짝 열어서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가장 문제는 내가 탐욕의 전투 스타일을 전혀 모른다는 데 있었다.
북부에서 만났던 대간부 니플헤임의 경우 개성이 강한 능력자였다. 사방으로 얼음을 뿌려댔고 몬스터들을 제 수족처럼 부렸다.
과연 탐욕은 어떤 식의 전투를 즐길까. 겉으로 보이는 외형만 봐서는 근접전 스타일은 아니었다. 몸도 깡말라 보였고 검을 차고 있지도 않았다.
짐작 가는 바로는 순례자 톰처럼 기물을 사용한 전투를 즐기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유틸적인 부분이 뛰어난 전사라는 이야기인데, 이러면 정석적인 대응법이 소용이 없어서 내 입장에선 골치 아팠다.
내 도발적인 언사에도 탐욕은 큰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가면 아래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돌려 마법진 한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었다.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맥동하는 알의 표면을 마치 신생아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만지던 탐욕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태어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지 고생해서 왔으니 너희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마.”
그리고는 허공에서 피가 가득 담긴 성배를 꺼내 알의 앞에 놓았다.
정체불명의 알은 성배가 눈앞에 놓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촉수를 발해서 성배의 아랫부분을 쥐고 들어 올렸다.
성배와 알이 맞물리는 순간 시청사 지하공간 전체가 격렬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천장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마법진이 발동되며 혈향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피안개를 형성했다.
피안개가 몸에 닿는 순간 따끔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자정작용이 발동합니다.]
[상태이상의 면역입니다.]
당연하게도 나는 금세 회복했다.
시온과 캠벨도 각자 기운을 돌려서 피안개가 몸속에 침투하는 걸 막은 듯했다.
문제는 노예들이었다.
평범한 일반인들은 피안개가 콧속으로 스며들자 눈가가 충혈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미치겠군.”
다음에 일어날 일은 뻔했다.
피안개에 정신이 잠식된 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옆사람에게 덤벼들었다.
“크아아아!!!!”
좀비와 비슷한 상태랄까.
물론 물린다고 해서 좀비가 되진 않는다.
죽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좀비와 다르게 노예들은 사람이었고 나를 도와주러 온 지원자들이라 무턱대고 해치울 수도 없고 애매했다.
“시온!”
시온이 황급하게 물도마뱀 발걸음을 발휘하여 이성을 잃은 생존자들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나마 생존자들의 능력치가 높지 않아서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바로 그때,
“꺄아아아악!!!!”
비명이 들렸다.
어디서 들렸나 했더니 사샤였다.
하이엘프인 그녀는 피안개에 잠식된 사내 하나가 휘두르는 칼을 필사적으로 회피하며 땅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다.
[윈드 컨트롤]
[순보를 발동합니다.]
공기를 박차고 달려들어 사내의 뒤통수를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들었다.
잔뜩 겁에 질린 사샤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내게 폭 안겼다.
“흐흑, 무서워요. 아저씨.”
사샤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여기 자원해서 온 것도 아니었기에. 그리고 또 하나 놀란 점이 있었다.
“사샤, 너는 안개를 들이마셔도 괜찮나?”
바로 그녀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온이나 캠벨이야 익스퍼트의 고수라 그렇다고 쳐도 사샤는 어떠한 마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멀쩡해 보였다.
“가슴이 조금 답답하긴 한데 괜찮아요.”
이건 그녀가 엘프 중에서도 상위종에 해당하는 하이엘프여서 부정적인 기운으로부터 면역이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사샤의 특별함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마법진이 발동하면서 그곳에 묶여있던 사람들은 급격하게 말라갔다. 촉수가 연신 꿀렁댔고 묶인 사람들의 생명력이 더욱 빠르게 갈취되었다.
동시에 괴물알의 맥박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대로라면 저 정체불명 알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부화는 시간문제였다.
“너희는 여길 지키고 있어라. 내가 가서 저 알을 부수고 오겠다.”
시온과 캠벨에게 대기 명령을 내리고 알을 향해 돌격하려 했다.
탐욕은 이를 대비하고 있었는지 품속에서 꺼낸 녹슨 칼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그마치 공간이 갈라지면서 차원 틈새가 벌어지는 게 아닌가!
틈새 안쪽에는 여러 개로 갈라진 시커먼 기운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일렁거리며 중간계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내밀어댔다.
“별의별 잡동사니를 다 가지고 있구나.”
“잡동사니라니. 아슬란 제국의 유물이다. 이것도 도망쳤을 때 슬쩍했지.”
“믿었던 사람을 배신한 이야기를 자랑이랍시고 떠들고 다니는군.”
“글쎄, 이 유물의 진정한 가치를 맛보고도 그렇게 틱틱댈 수 있는지 궁금하군.”
말이 끝나자마자 갈라진 차원 틈에서 무언가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임신한 모체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 같았다.
결국 끈적한 진액으로 뒤덮인 킬독 한 마리가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아무래도 저 유물은 몬스터를 소환하는 매개체가 아닌가 싶다. 한시라도 빨리 알을 깨부수고 싶은 내게는 참으로 번거로운 상황이었다.
아르니아 대륙의 신선한 공기를 맛본 사족보행 몬스터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살육 본능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크아아아아!!!!”
치타와 같은 속도로 뛰어드는 사냥개들이 인간의 피와 살을 만끽하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옆쪽을 흘낏 봤다. 여전히 톰은 촉수 구체 안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 아무래도 저곳을 탈출하려면 한참 더 걸릴 듯했다.
그때까지 시간을 벌고 탐욕의 견제를 받아가며 알까지 부숴야 했으니 여러모로 불리한 형세였다.
“시온, 캠벨. 뭘 해야 할지는 알겠지.”
“제기랄! 부단장이랑 다니면 어째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어지는군.”
캠벨이 투덜거리며 전위로 나섰다.
킬독의 날카로운 이빨이 덩치 큰 캠벨을 노리자 캠벨이 바스타드 소드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크게 횡으로 그어진 면적 넓은 공격에 직격당한 킬독들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시간에 시온은 사샤와 노예들의 보호를 중점적으로 두었다.
물도마뱀 발걸음으로 빠르게 킬독의 공격을 회피한 후 뒤를 잡아 단숨에 목숨줄을 끊어버렸다.
과연 암살자다운 솜씨였다.
나에게도 킬독 몇 마리가 오긴 왔다.
드루이드의 능력을 쓸 것도 없이 천마검을 X자로 휘둘러 조각을 내버렸다.
몬스터 소환이 귀찮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균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소대가리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쿠워어어어!!!”
미노타우르스.
소의 머리를 한 이족보행 몬스터는 키만 해도 오우거에 맞먹을 정도다.
주로 미궁에 서식한다 알려진 이 괴물은 트롤과 오우거의 딱 중간 능력치를 가진 괴물이라 보면 됐다.
무엇보다 손에 든 마목 방망이가 제법 단단해 보이는 것이 마나소드가 아닌 검으로 부딪쳤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그런 몬스터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세 마리나 나왔다.
콧김을 씩씩 뿜으며 먹잇감을 노리는 미노타우르스를 본 탐욕이 광소했다.
“흐하하하핫! 이것 참 절경이군. 저 미노타우스가 네 녀석을 다진 고기를 만드는 순간이 벌써 기대되는구나.”
시온과 캠벨은 균열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킬독들을 상대하느라 손발이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여기에 소머리괴물까지 가세하면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진다.
이러나저러나 저 미노타우르스 세 마리는 나 혼자 처리해야 했다.
-애송이, 뭘 그리 쭈뼛대느냐! 후딱 끝내고 발 닦고 잠이나 자거라.
마침 들려오는 천마의 목소리가 내 전투의지를 고취시켰다.
맞다.
여태껏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도 직면했고 극복해왔는데 겨우 여기서 위축될 필요 없다.
검을 뽑고 겨눈다.
땅을 발로 박찬다.
가만히 있던 내 신형이 쭉 늘어났다.
어느새 가장 선두에 있던 미노타우르스 앞에 도착했다.
민첩 높은 몬스터는 즉시 몽둥이를 위로 쳐든 다음에 나를 짓뭉개려 했다.
이런 몬스터를 상대로 굳이 정면승부를 해줄 필요는 없지.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몸을 눕혔다.
바닥을 쓸며 슬라이딩.
미노타우르스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가며 천마검으로 녀석의 발목 힘줄을 끊어버렸다.
“우워어어!!”
아무리 괴물이라도 힘줄이 끊어지고도 서 있을 순 없다.
털썩 주저앉은 미노타우르스.
무릎을 꿇자 베어내야 할 머리가 딱 베기 좋은 위치에 놓여졌다.
마무리를 지으려고 다시 녀석에게 쇄도하려 할 때,
-애송아, 옆쪽이다.
나머지 두 마리 미노타우르스가 양쪽에서 방망이를 휘둘러오고 있었다.
천마가 경고하기 전부터 이미 서늘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사적으로 드루이드 스킬을 시전했다.
[스톤 컨트롤]
[스톤 실드를 발동합니다.]
콰콰콱!
양쪽으로 치솟은 바위가 마치 날개처럼 나를 보호했다.
마목 방망이는 스톤 실드를 부숴버리긴 했으나 한번 부딪치면서 그 속도와 위력이 현저히 줄었고.
그 사이에 나는 발목이 나간 미노타우르스 지척에 도착했다.
“끝이다.”
뎅겅—!
미노타우르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이 기세를 살려야 한다.
바로 공중에서 순보를 밟았다.
그러자 하늘에 떠있던 내 동선이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도착한 곳은 다른 미노타우르스의 뒤였다.
“쿠워?”
완벽하게 뒤를 잡힌 괴물이 당황한 소리를 내뱉었지만 이미 늦었다.
에메랄드 빛이 치솟으며 괴물을 일도양단했으니.
좌우로 갈라진 괴물을 사이에서 나는 볼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마지막 남은 미노타우르스를 노려보았다.
지이잉
몬스터라도 자신보다 강자는 알아보는 법. 내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한 남은 미노타우르스가 겁을 먹고 등을 돌렸다.
[우드 컨트롤]
[바인드를 발동합니다.]
땅에서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미노타우르스의 발목을 휘감았다. 드루이드인 내 앞에서 도망이란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서걱!!
마지막 남은 미노타우르스의 목에 혈선이 그려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너진 몬스터. 세 마리의 중대형급 몬스터가 쓰러지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더니 킬독들도 대충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몬스터를 모조리 정리한 시온과 캠벨이 내 양옆으로 섰다.
이제 남은 건 탐욕뿐.
검끝으로 녀석을 겨냥하며 말했다.
“장난질은 끝났나? 보여줄 게 더 없으면 이만 목 내놓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