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70화 (70/200)

10장 부화 : 밀쳐낸 망나니

“이건 예상 못했는데.”

그동안 내 안의 기운들이 딱히 충돌한 적은 없었기에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水)속성 기운이 들어가서 용혈과 마나를 중재하자 비로소 내면의 기운이 제대로 혼합된 느낌이 든다.

만약 인어의 눈물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언젠가 두 기운은 불화를 빚었을 것이고 내 성장을 방해했을 테니 이 시기에 푸른 마나를 얻은 건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

운기행공을 마치고 천마에게 방금의 현상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있던 대륙에도 너 같은 녀석들이 제법 많았다. 성장을 위해서 여러 기운을 닥치는 대로 단전에 넣어서 잡탕밥을 만들었지.

“그래서 그들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갔습니까?”

-열이면 여덟아홉은 위로 올라갈수록 기운의 충돌로 인해 기혈이 뒤틀리고 역류하여 미치광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천마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 말은 나 또한 광인이 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더 높은 세계를 맛보기 위한 여정은 고되고 힘들다. 물론 차근차근 동일한 기운을 쌓아가는 게 가장 상책이겠지. 허나 사람일이 어째 뜻대로만 되겠느냐. 더 높은 성장을 위해서 다른 기운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이후 천마도 자신 또한 성장을 위해서 여러 기운을 받아들이길 주저하지 않았고 이들 간의 충돌로 인한 위기를 여러 번 극복했다고 털어놨다.

-미래에 너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겠지. 나중에 얘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벌써 문제를 발견했을 줄은 몰랐구나.

“그러면 푸른 마나를 얻었으니 제 안의 문제는 해결된 겁니까?”

-임시방편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명 사이에 중재자를 넣으면 분위기야 좋아지겠지만 딱 거기까지일뿐. 세 기운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기점을 맞이해야만 한다.

어째 숙제가 늘어버렸는데.

당장 방 안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지금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일단은 움직이고 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일에 심사숙고하기로 했다.

“시온, 들어와라.”

방문 바깥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들어온 시온은 공기 중에 둥둥 떠있는 에메랄드 빛을 보고 기쁜 눈빛을 보였다.

“아름답습니다.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성취가 아니다. 응급약으로 상처를 잠깐 막아놨을 뿐이다.”

어쨌든 푸른 마나가 빠져나가고 평범한 보석이 된 인어의 눈물을 시온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뒤돌아라.”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뒤로 돌았다. 그런 그녀의 하얀 목에 인어의 눈물을 걸어주었다.

“잘 어울리는군.”

매일 시온에게 틱틱댔지만 이번만큼은 빈말이 아니었다.

최상급 악세서리인 인어의 눈물이 시온의 미모와 맞물리면서 최고의 미를 뽐냈으니 말이다.

그녀 또한 거울을 보고 잠시 숨을 멈추더니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주시했다.

“그간 고생했으니 주는 상이다. 계속 옆에서 정진하도록.”

사장이 직원에게 주는 보너스랄까. 시온의 반응을 보니 선물로는 대만족인 듯했다.

[시온이 매우 행복해합니다.]

[시온의 충성도가 +10 올랐습니다.]

이런 시스템창이라도 떠올라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다. 물론 여기는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가 아니니 그런 시스템창 따위는 뜨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되었다. 당장 큰 임무를 앞두고 있으니 너무 들뜨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바로 톰을 만나겠다. 그리고 출발한다.”

이로써 경매장 뒤처리를 완료했다.

탐욕을 마주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상인조합건물을 나온 우리는 리앙의 시장으로 행세하고 있는 탐욕을 잡기 위해 시청사로 이동했다.

이동은 통행량이 적은 새벽을 틈타 이루어졌다.

자유도시라 몇몇 구역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순찰병도 없어서 별다른 소란 없이 시청사까지 무난하게 도착했다.

현재 우리 일행의 구성은 이러했다.

순례자 톰, 나, 시온과 캠벨, 사샤.

리앙의 진짜 시장 유론.

보름달 시장에서 꺼내온 노예들까지.

시청사에 들어가기 전에 톰이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탐욕은 내가 잡는다.”

과거에 순례자였던 탐욕과 직접적인 악연이 있는 톰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에 나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수긍했다.

“나는 고대의 유물을 사용해서 탐욕을 속박할 것이다. 그동안 너희는 부하들을 처리해라. 탐욕 혼자서 시청사에 있을 리는 없을 테니.”

“좋습니다. 보름달 시장에서 주기적으로 노예를 공급받았다고 했으니 시청사 안쪽에는 꽤 많은 노예가 잡혀있을 겁니다. 인질의 확보를 우선적으로 하겠습니다.”

톰은 다음에 유론 시장을 보고 말했다.

“시장께서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를 보내면 즉시 시청사로 진입하여 오늘의 소란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유론의 역할은 나름 중요했다.

시청사에서 탐욕과 전투를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시끄러워질 테니 사태를 수습해줄 공권력이 필요했다.

“맡겨만 주게.”

남은 건 사샤와 노예들.

“여려분은 탐욕의 눈을 속이기 위한 디코이입니다. 원하신다면 전투에 참여해도 무방하지만 기왕이면 무리하지 말고 여차하면 도망치세요.”

일러두긴 했는데 복수심에 불타는 눈동자를 보니 말을 들을 것 같진 않다.

“특히 사샤. 너는 생존에만 초점을 맞춰라.”

톰이 사샤에게 말하자 그녀는 겁을 먹었는지 또다시 내 뒤에 착 달라붙어서 껌딱지가 되었다.

시청사 안에 들어가면 시온 곁에 붙어있으라고 단단히 말해놓긴 했는데 잘 지켜질지는 모르겠다.

“진입한다.”

시청사의 입구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보름달 시장 탈주 노예들은 그럴듯한 쇠사슬로 손발목이 구속되어 엉기적거리며 끌려갔다.

실제로는 즉시 빠져나올 수 있는 가짜 구속구였다.

톰은 하만의 얼굴로 바꿨고 나와 시온, 캠벨은 해저동굴에서 봤던 위장상인 복장을 갖추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청사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는 콧수염을 만지작대다가 하만으로 변장한 톰을 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알님께 영광을.”

“바알님께 영광을.”

황혼식 인사를 했는데 받아주는 걸 보니 시청사 전체가 황혼교도에게 잠식된 모양이다.

굳이 문지기를 해치워서 입구에서부터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

결국 정체는 들키겠지만 최대한 나중에 발각되는 게 작전상 이로웠다.

“그럼 수고하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시청사 안으로 진입하려는데 문지기가 뒤에서 붙잡았다.

“헌데 오늘은 알프레도님이 안 보이는군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해저동굴에서 행정총괄을 맡았던 알프레도 또한 정기적인 방문자 중 하나였나 보다.

톰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를 넘겼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문이나 열어라.”

“알겠습니다.”

톰이 지위를 내세우자 문이 쉽게 열렸다.

그렇게 입장한 시청사.

죽은 하만에게서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시청사 지하 쪽에 비밀통로가 있다고 했었다.

톰은 능수능란하게 어색한 부분을 찾아내더니 지하실 입구를 열었다.

“익숙하시군요.”

“십 년 동안 온갖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아슬란 제국의 유물을 모았네. 숨겨진 통로쯤이야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지.”

나선형의 계단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어두컴컴한 복도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넓은 공간이 확 펼쳐졌다.

보름달 시장에서 봤던 것과 동일한 발광석이 사방에 설치되어서 주위를 훤히 밝혔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바닥에 넓게 깔린 피로 된 마법진이었다.

복잡한 룬어가 가득 쓰인 마법진에서는 연신 불길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마법진이 어찌나 큰지 웬만한 학교 운동장만 했다.

시청사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 일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마법진 위에 거리를 두고 곳곳마다 인간들이 박혀있었다.

정황상 노예로 보이는 이들은 끈적해 보이는 점액질의 촉수에 꽁꽁 묶인 채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

촉수 자체도 징그러워 죽겠는데 그 촉수가 고무호스처럼 사람의 목구멍 안쪽 깊숙이 삽입된 상태다.

연신 꿀렁대는 촉수는 인간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갈취하는 듯했는데, 피인지 생기인지 영혼인지 셋 다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동안 잡아온 노예들로 뭘 했나 궁금했는데 이런 끔찍한 짓을 하고 있었다니.

“저건 뭐지?”

캠벨의 순수한 물음.

바로 마법진 중앙에 있는 기이한 알.

알의 크기도 웬만한 트롤 크기만큼 컸는데 사람들에게 빨대를 꽂은 촉수들이 모두 저 알에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알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처럼.

알의 껍질은 점성 높은 끈적한 촉수들로 뒤덮여서 보호받는 듯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알이 깨어나면 안 되겠군.”

어린아이라도 보자마자 파악할만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참혹한 환경을 조성한 장본인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하만!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가면을 쓴 중절모 신사.

일단의 황혼교도를 뒤에 거느린 탐욕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하만으로 변신한 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아마 품속에 숨긴 고대의 유물로 그를 습격할 기회를 엿보는 중이리라.

“사도님을 뵙습니다. 바알님께 영광을.”

“바알님께 영광을!!”

나와 시온, 그리고 캠벨도 분위기에 맞춰서 황혼식 인사를 했다. 톰의 움직임에 맞춰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서 말이다.

“음? 알프레도가 안 왔군.”

역시나 문지기와 같은 걸 문제 삼는다.

“지금 시장 주변에 낯선 침입자가 어슬렁거려서 급하게 출장을 나갔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만 왔습니다.”

“······”

가면 틈으로 드러난 탐욕의 눈이 가늘어졌다.

탐욕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기에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동안 로이드 영지에 해놓은 짓만 봤을 때는 조심스럽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차라리 톰이 빨리 행동을 취해줬으면 했을 때, 좌우로 연신 눈알을 굴려대던 탐욕의 시선이 사샤에게 꽂혔다.

“오오! 이게 그 하이엘프인가!”

의심 많은 탐욕조차 하이엘프를 본 반가움은 주체를 못하나 보다. 순간 그의 모든 이목이 사샤에게 쏠렸다.

“대단해! 아주 좋아! 이 정도로 강하고 순수한 영혼이라면 고대의 저주를 일찍 완성할 수 있겠어.”

탐욕의 손이 사샤에게 가까워지자 겁먹은 사샤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구속구를 차지 않은 사샤를 본 탐욕의 눈에 미약한 분노가 서렸다.

“뭐지? 하이엘프를 묶지 않은 건가?”

“특별 상품이라 직접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망가려면 어쩌려고.”

탐욕이 다시 사샤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 사샤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눈을 꼭 감고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렇게 탐욕의 손끝이 사샤의 볼에 닿으려는 순간,

“요놈! 걸렸구나!”

가슴팍에서 흑색 종을 꺼낸 톰이 탐욕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한 손에 움켜쥘만한 작은 종이 갑자기 커지며 탐욕을 집어삼켰다.

데엥-! 데엥-! 데엥-!

세번의 종소리.

하늘로 떠오른 종은 겉면에서부터 조금씩 외형이 바뀌더니 이내 특정한 형체를 갖추었다.

“봉인 전문 유물. 아이언 메이든이다.”

머리 쪽은 무표정한 여인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고 몸통 쪽에 설치된 문은 옷장처럼 좌우로 열려서 관의 역할을 했다.

그곳에 갇힌 탐욕이 당황해서 허둥댔다.

“아이언 메이든이라니? 이게 뭐지?”

“모르는 척하지 마라. 순례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유물일 텐데.”

“헛소리하지 마 당장 열어!

탐욕이 허둥대며 문을 열려 했지만 괜히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아이언 메이든의 문이 조금씩 닫히기 시작했고 탐욕의 저항은 의미가 없어졌다.

끼익 쿵!!

아이언 메이든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일시적이지만 탐욕을 묶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시간이면 행동을 취하기엔 충분하다.

“계획대로다. 이제 노예들을 구출하고 저 괴상한 알을 부숴버리자.”

톰의 말대로 행동할 차례.

보름달 시장 노예들이 일제히 구속구를 벗어던졌다.

시온이 두 개의 단도를 빼 들고 캠벨도 바스타드 소드를 양손에 쥐었다

나도 천마검을 뽑고 마법진에 뛰어들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사도님을 공격하다니!!”

마법진을 관리하고 있던 황혼교도들이 헐레벌떡 우리를 막으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천마검이 번개처럼 쏘아지며 녀석들의 몸에 구멍을 뚫었다.

캠벨도 큰 체구를 이용하여 황소처럼 황혼교도를 날려버렸고 시온은 사샤를 보호하며 최대한 많은 수의 적에게 칼을 찔러넣었다.

작전은 순조로웠다.

변변찮은 무력을 지닌 황혼교도들은 익스퍼트에 오른 우리 셋을 상대로 무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땅에 누웠다.

그동안 보름달 시장 노예들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마법진에 묶인 노예들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으윽! 더러워!”

괴물의 알과 연결된 촉수를 검으로 끊어내자 사람의 입속에서 나온 촉수들이 애벌레처럼 땅바닥에서 꿈틀댔다.

상당히 역겨운 광경이었지만 어쨌든 촉수로부터 해방된 노예들은 정신을 차렸다.

“으으···여기는?”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는 위험하니 움직여야 합니다!”

숙주가 되었던 사람들이 부축을 받으며 하나둘씩 마법진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아직도 사람이 한참 남았으나 다 구출되는 건 시간문제다.

봉인된 탐욕이야 순례자 톰이 알아서 할 테고 나와 시온, 캠벨은 알을 깨기만 하면 된다.

“후딱 끝내고 가서 빵이나 먹어야지.”

캠벨이 황혼교도의 피로 물든 바스타드 소드를 어깨에 걸치고 흥얼거리며 알 쪽을 향했다.

이대로 가면 작전은 종료.

그래야만 했는데···

-애송아, 놈들의 우두머리가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의식속에 들리는 천마의 목소리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천마는 이런 일을 두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탐욕을 도대체 어디에?

직감이 경종을 때린다.

“캠벨!!”

[윈드 컨트롤]

[순보를 발동합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공기를 박차고 캠벨에게 쇄도해서 그를 마법진 바깥으로 밀쳐버렸다. 내가 온 힘을 다했기에 거구의 캠벨도 멀리 날아갔다.

불과 1초도 안 돼서 캠벨이 있던 자리를 피에 잠식된 촉수가 덮쳤다. 조금만 늦었어도 아찔한 상황이 펼쳐질 뻔했다.

“아깝군.”

스산한 목소리.

이어서 강렬한 살기가 휘몰아친다.

어둠 속을 헤치고 나타난 자는 아까와 외형은 똑같지만 느낌은 전혀 다른 가면 쓴 중절모 신사였다.

“이렇게 보니 반갑네. 친구들.”

직감이 심장을 두드리며 경고한다.

이 사람이 진짜 탐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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