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 망나니가 천재임-62화 (62/200)

8장 리앙 : 대화할 망나니

퍼그와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게 하고 싶었지만 혼비백산한 녀석이 자기가 입은 팬티 색깔까지 말할 기세로 아는 걸 모조리 떠벌였다.

“그러니까···리앙의 상인조합장에게서 노예를 구입했다?”

“그렇습니다. 리앙의 굵직한 거래는 조합장과 선을 대야만 이루어집니다. 제가 끌고 온 자경단도 조합장의 허락을 받고 데려온 겁니다.”

“조합장은 리앙 토박이인가?”

“아닙니다. 몇 년 전에 타지에서 왔는데 돈도 워낙 많고 희귀한 상품도 많이 취급해서 단숨에 조합장에 올랐습니다.”

리앙의 상인조합.

평민이라도 돈만 많으면 귀족과도 어깨를 견줄 수 있게 한 리앙의 핵심조직.

그 조직의 우두머리가 무척이나 수상했다.

“조합장의 이름은 뭐지?”

“하만입니다.”

“하만이라···알았다.”

대충 퍼그에게서 알아낼 건 다 알아냈다.

침묵이 길어지자 불안해진 퍼그가 목숨을 구걸했으나 이놈은 이미 여러 번 선을 넘은 놈.

자비를 베풀기엔 너무 멀리 갔다.

“잘 가라.”

“안 돼!!”

촤아악!

퍼그의 어깨 위가 휑해졌고.

비대한 몸이 털썩 쓰러졌다.

시온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도련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도 들었잖아. 조합장이란 놈을 족친다.”

“내일 해가 뜨면 가십니까?”

“아니. 지금 당장.”

하만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병력을 퍼그에게 양도했으니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터.

한두 명이 아니고 수십 명이 한꺼번에 정리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름의 대처를 할 게 분명했다.

병력을 늘리거나 고수를 초빙하는 등의 방법을 쓰면 그저 힘으로 깨부수면 되니까 상관이 없겠으나 오히려 충돌을 피하고 음지로 숨어들면 골치 아파진다.

그러니 숨기 전에 당장 가서 뒷덜미를 틀어쥐어야 했다.

“위치가 어딘지는 알아냈으니 단숨에 친다.”

“흐흐흐, 좋아. 안 그래도 요런 피래미 놈으로는 몸이 덜 풀렸단 말이지?”

“도련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시온과 캠벨도 환영하는 눈치다.

뒤에서 쭈뼛대는 톰에게 말했다.

“위험한 곳에 갈 예정이니 내 옆에 바짝 붙어있어라.”

“알았어요.”

“도련님, 톰은 두고 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제가 좋은 여관을 하나 잡아두겠습니다.”

“아니. 톰도 같이 간다.”

톰의 정체를 모르는 시온과 캠벨이 우려의 눈빛을 보냈지만 실상은 여기서 제일 걱정할 일 없는 소년이다.

* * *

리앙의 상인조합 건물.

자유도시의 남서쪽에 있는 이 건물은 리앙의 시청사보다도 높게 솟아있다.

상인의 가진 권력을 상징하는 이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에는 다부진 몸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수정구를 통해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수정구 너머에는 가면을 쓴 중절모 사내가 있었다.

황혼의 대간부 탐욕이었다.

“내일 암시장을 열면 되겠습니까?”

-그렇다. 노예 조달은 어떻게 되가고 있지?

“순조롭습니다. 왕국은 노예 거래가 불법이고 제국은 합법이나 거래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죄다 리앙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좋다. 위장상인들을 이용해서 쓸만한 노예를 최대한 끌어모아서 보내라.

“알겠습니다. 사도시여.”

그랬다.

리앙의 총수라 불려도 모자라지 않을 조합장은 사실 탐욕의 꼭두각시였다.

조합장은 공급자들의 노예를 받아주고 이를 맡아두었다가 시장을 열어서 수요자들에게 경매를 붙였다.

그러나 여기엔 맹점이 있었는데, 바로 노예를 사는 사람 중에는 황혼에서 미리 심어둔 위장상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탐욕에게 돈을 지원받은 황혼의 위장상인들은 암시장에서 노예를 역으로 사들인 다음에 탐욕에게 보내고 있었다.

원래 하만은 이런 번거로운 절차 없이 노예를 받는대로 탐욕에게 보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암시장이 열리지 않으면 노예 공급자들이 자신의 노예가 제값을 받고 팔리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기둥이 되어주는 구매자들도 등을 돌릴 터.

그렇게 되면 리앙의 거래구조가 의심 받게 되고 이는 필연적인 시장 규모 축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런 귀찮은 작업을 하게 되었다.

“사도시여. 그리고 이번에 희귀한 노예가 들어왔습니다.”

-희귀하다니. 어떤 노예지?

“무려 동부 대산림 출신의 엘프입니다.”

-희귀하긴 하군. 엘프도 희귀한데 동부 대산림이면 거의 나오지도 않는 녀석들이니.

“헌데 그냥 엘프가 아닙니다. 하이엘프족 같습니다.”

-!!!

하이엘프면 엘프 중에서도 우두머리격에 해당하는 고귀한 종족이다.

수명도 길고 아름다운 외모 또한 대륙 제일이라 일컬어 지곤 한다.

그러나 탐욕이 욕심내는 점은 그런 외적인 요소보다 하이엘프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정수.

깨끗하면서도 측량하기 힘들 정도의 윤기 있는 영혼은 저주를 완성하기 위한 최고의 제물이었다.

-당장 하이엘프를 내 쪽으로 보내거라.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애매합니다.”

-어째서지?

“엘프를 우리에게 건넨 공급자가 꼭 경매를 통해 최대한의 값을 받아내고 싶답니다.”

-제기랄, 공급자가 어떤 놈인데 그래? 어중간한 녀석이면 그냥 무시하거나 암살해버려.

“동부 대산림 엘프 대장로입니다.”

-······

탐욕도 이번만큼은 대답을 못했다.

-엘프가···엘프를 팔았다고?

“그렇습니다.”

-이것참 별일이군.

“앞으로도 엘프 노예를 공급받으려면 대장로와는 친분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이엘프 하나 빼돌려서 관계를 끝내기엔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군. 그러면 위장상인에게 거금을 쥐여주고 반드시 하이엘프를 데려와라. 경매가가 얼마나 올라가든지 간에 반드시 확보해.

“알겠습니다.”

탐욕이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조심해라. 최근 북쪽의 로이드 영지에서 리앙을 주시한단 소문이 돌고 있다.

조합장 하만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로이드 가문은 이미 저무는 해 아니었습니까? 외다리 후작은 이빨 빠진 호랑이고 자식 농사도 영 시원찮다 들었습니다만.”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사생아 놈이 제법이더군.

“저도 소문은 들었습니다. 악마 살해자 헤논이라지요. 놈이 조금 두각을 드러내긴 합니다만 그래봐야 혼자입니다. 걱정 놓으십시오.”

하만의 여유만만한 태도를 본 탐욕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네놈을 조합장으로 세워두기 잘했어. 리앙 시장은 어떻게 됐지?

“잘 가둬두고 있습니다. 놈이 햇빛을 볼 일은 시체가 됐을 때 빼곤 없을 겁니다.”

-혹시 필요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 살려두어라. 나도 시장 행세를 오래 했더니 좀이 쑤시는군. 원래 같은 역할을 오래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말이야.

“모든 건 바알님의 부활을 위해서입니다.”

수정구를 바라보는 하만의 눈동자에는 황혼교에 대한 충성심이 이글이들 타오르고 있었다.

-좋군. 내일 중으로 결과 보고하도록.

연락이 끊어졌다.

벌떡 일어난 하만이 집무실 한켠에 매달려있는 초상화를 건드렸다.

양끝 모서리를 만지고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리자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밀려나며 숨겨있는 밀실이 드러났다.

밀실에는 밧줄에 꽁꽁 묶여있는 늙은이가 입이 막힌 채 읍읍거리고 있었다.

늙은이는 바로 리앙의 시장이었다.

재갈을 풀러주자 거친 숨을 내쉰 시장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건가? 리앙은 자유도시라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 풀어주고 도시를 원래대로 돌려놓게나.”

“아직도 노인네가 정신을 못 차렸군. 어차피 너는 필요 없다. 모든 시민이 네가 여전히 건재한 줄 알고 있을 테니까.”

하만은 리앙의 시장에게 재갈을 물리고 다시 밀실에 가두었다.

벽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쯤,

쿵쿵쿵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비서가 상당히 다급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하만님,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뭘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보고하지? 날파리가 보이면 때려잡으면 될 것을.”

“그것이···좀 나와보셔야···끄아아악!!!”

콰아아앙!!!

방문이 산산조각났고.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삼남일녀가 서늘한 기세를 뿌리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늘 침착한 하만조차도 지금만큼은 평정심이 흔들릴 뻔했다.

가장 앞에 들어온 사내는 외모가 수려했는데, 섬뜩할 정도로 요요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짙은 혈향을 풍기던 그는 하만을 보더니 씩 웃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날파리는 잡아야 제맛이지.”

* * *

조합장과의 만남 1시간 전.

나는 퍼그에게 알아낸 정보로 상단조합 건물에 도착해 있었다.

근처에 숨어서 주변을 탐색했는데 경비가 무척이나 삼엄했다.

“장사꾼들 친목질하는 건물에 경비는 웬만한 영주성보다 많이 세워놨군.”

경비가 삼엄하다 해서 발을 뺄 수는 없는 노릇.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단숨에 처리하기로 했다.

입구에 모습을 보이자 성문은 자유롭게 통과시키던 경비병들이 여기서는 창을 교차시켜 막은 후 눈을 부라린다.

“누구냐? 출입시간은 지났다. 쓸데없이 서성거리다 처맞지 말고 썩 꺼져라.”

잡놈 상대로 굳이 나설 필요는 없지.

나직하게 한마디 날렸다.

“시온. 캠벨.”

촤아아악!!

두 문지기의 목이 날아가며 붉은 피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죽은 문지기 둘이 털썩 쓰러졌다.

안쪽에서 이 광경을 본 다른 병사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위험을 알렸다.

“침입자다! 침입자!”

“문부터 걸어 잠가. 어차피 이 문은 오우거라도 오지 않는 이상 못 뚫는···”

“우워어어어어!!!!!”

포효하는 캠벨이 두꺼운 바스타드 소드를 풍차처럼 휘두르며 철문을 직격했다.

마나가 가득 담긴 소드는 캠벨의 무지막지한 힘까지 받아 대문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렸다.

“무, 문이 뚫렸다!”

“괴물이야!”

“그런 게 어딨어! 막아! 막으라고!”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우왕좌왕하는 병사들 사이로 지그재그로 움직이던 시온이 빠르게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캠벨도 검면으로 병사들을 날려보냈는데, 얻어맞은 상대마다 공중을 훨훨 날다 땅에 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별 거 없군.”

머릿수는 많은데 그럴듯한 놈들이 없었다. 죄다 마나조차 못 쓰는 비기너이거나 비기너를 갓 벗어난 러너였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을 피우는 게냐!”

드디어 정예병들이 납셨군.

얼굴에 흉터가 그득하고 체격이 건장한 녀석들이 건물 안에서 나왔다.

기운으로 볼 때는 소드 유저급은 되는 듯했다.

물론 그래봐야 소드 유저다.

동급 실력의 익스퍼트를 만나도 찍어누를만한 기량을 가진 시온과 캠벨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였다.

“으랴아아아!!!”

“하앗!”

정리는 3분 정도 걸렸다.

유저 기사들은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고 시종일관 맞다가 기절해버렸다.

그리고 등장한 사내.

“으음···”

침음을 흘리는 자는 여태껏 만난 자 중에 가장 강해보였다.

그러자 병사를 처리하면서도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시온과 캠벨의 눈이 반짝였다.

“고수군요.”

“저놈은 내 거다. 비켜라, 하녀.”

“돼지는 저놈 감당 못하니 내가 싸웁니다.”

“먹을 건 양보해도 이건 양보 못 해.”

“당신이 먹을 걸 양보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입니다.”

딱 봐도 익스퍼트 초입 정도 되는 고수를 앞에 두고 오히려 시온과 캠벨이 자기들끼리 격렬하게 말다툼을 벌인다.

이건 아무래도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둘을 제치고 내가 나섰다.

“이 녀석은 내 거다.”

“아···”

“쩝!”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는 시온과 캠벨.

자신을 마치 맛있는 별미로 취급하는 우리를 본 익스퍼트의 고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지 검을 뽑아들고 덤벼들었다.

“네놈들 머리를 죄다 날려주마!”

[우드 컨트롤 발동]

[바인드를 시전합니다]

발목을 살짝 묶어주자 멧돼지처럼 돌격하던 녀석이 휘청한다.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쇳소리와 함께 적이 몸을 뒤틀어서 간신히 막아냈다.

“호오? 과연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익스퍼트의 고수는 자신의 급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럼 뭐해.

검술, 움직임, 마나량, 특이스킬.

무엇 하나도 나에게 안 되는걸.

이후에도 녀석은 방어에만 급급했다.

나는 단 한 차례도 녀석에게 공격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정신없이 밀리던 녀석이 결국 등이 벽에 닿았다.

이제는 도망칠 곳도 없다.

“자, 잠깐! 우리 말로 하자!”

푸욱!

녀석의 심장에 천마검이 관통했다.

소드마스터를 눈앞에 둔 세바스찬도 나와 대련할 때 애먹는 판에 이제 이런 새내기 익스퍼트 정도는 손바닥 위에 놓고 요리할 수준이 되었다.

“아, 맞다. 죽이기 전에 조합장 사무실 어딘지 알아내야 했는데.”

“맨 위에 있지 않겠나?”

캠벨의 말이 맞았다.

꼭대기 층에 누가 봐도 보스룸처럼 장식된 커다란 문이 보였다.

피로 점철된 우리를 본 비서가 화들짝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늦었다.

문을 발로 부숴버렸으니까.

콰지직!!

조합장 하만은 깔끔하게 수염을 민 중년 남자였다.

겉보기엔 저렇게 멀쩡해보이는 사람이 리앙의 노예시장을 좌지우지한 위선자였다는 사실이 더욱 화를 돋우었다.

“너흰 누구냐!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침입하느냐? 당장 도시를 봉쇄하면 너흰 갈곳도 없이 잡혀들어갈···커헉!”

하만 자체는 별다른 무력이 없었다.

복부에 주먹 한 대를 먹여주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이 녀석도 황천길로 보낸 퍼그처럼 찐득한 대화를 나눠보려 할 참이었다.

“잠시만.”

톰이 손을 들었다.

여태껏 가만히 있던 녀석이 나서자 일행의 시선이 모두 집중됐다.

“무슨 일이야?”

“톱니바퀴 소리가 들려. 여기 어딘가에 숨겨진 공간이 있는 듯한데.”

톰은 반말을 썼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 중 누구도 이를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한동안 벽에 귀를 대보던 톰이 대형 초상화 근처에서 멈춰 선다.

“여기다.”

그때부터 톰이 능숙한 손길로 초상화를 만져댔다.

좌로도 돌려보고 우로도 돌려보고 중앙과 사이드를 눌러보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고.

그렇게 1분 정도를 쿰척거리자 갑자기 초상화 뒤쪽에서 덜컥 소리가 들리며 벽이 한쪽으로 밀려났다.

“아니! 어떻게 그걸 뚫었지? 제국의 금고지기에게 특별히 의뢰를 맡긴 잠금장치였건만.”

조합장 하만이 경악했다.

그러나 톰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별다른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뒤편에 드러난 숨겨진 공간.

밀실에는 사지가 결박된 채 몸부림치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으니.

아무래도 조합장보다 먼저 대화를 나눠야 할 상대가 나타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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