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탈환 : 섬뜩한 망나니
털썩!
힐튼 가에서 온 기사 중 호르만 다음으로 강했던 실력자가 내 기습으로 어이없게 쓰러졌다.
이후에 펼쳐진 장면은 적팀의 대공황이었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호르만 경은 어디 있나!”
남은 유저기사가 황급히 검을 겨누길래 간단하고도 명백한 진실을 이야기해줬다.
“잘 생각해봐. 내가 여기 있어. 그러면 호르만은 어떻게 됐겠어?”
이 녀석들도 속으로는 알고 있을 거다.
호르만이 내게 당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저리 윽박지르는 이유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서일 테지.
“거짓말하지 마라! 호르만 경이 너 따위 근본도 모르는 놈에게 허무하게 당하셨을 리 없다.”
“맞다! 무려 익스퍼트의 기사다. 어중이떠중이와는 차원이 다른 전사란 말이다.”
“하, 웃기는 놈들일세. 그러면 난 어떻게 여기 있는 건데? 호르만이 나한테 저를 밟고 지나가세요 하고 카펫이라도 깔아줬겠냐?”
팩트를 묵직하게 꽂아줬다.
주위에 깔리는 무거운 침묵.
그제야 호르만의 죽음을 수용하는 놈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런 놈들의 표정에서 드러난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힐튼 가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기사를 단신으로 처리한 실력자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비롯된 두려움 말이다.
“대충 알아들은 것 같으니···여기가 너희 무덤이 되어도 상관없겠지.”
기세를 잡았으니 주도권을 꽉 잡는다.
시온과 캠벨에게도 눈짓했다.
이들은 벌써 피에 젖은 병장기를 들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힐튼에서 온 놈들만 잡는다. 알버스 놈들은 뒤지기 싫으면 나가 있어.”
한국에서 유명했던 영화 대사를 따라해봤다.
애들이 영화처럼 고맙다 하면서 떠날 줄 알았는데 망부석처럼 서 있는 채 어쩔 줄 모른다.
그래도 자기 영주가 잡혔으니 구하겠다는 건가.
뭐, 상관없다.
이쪽은 힐튼 녀석들만 처리하면 되니까.
“죽여!”
가장 가까이 있는 기사에게 뛰어들었다.
당황한 녀석이 ‘어어..?’ 거리면서 검을 들고 허우적대다가 열 합도 못 버티고 땅에 몸을 누웠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분위기가 넘어가자 익스퍼트인 캠벨도 특유의 오우거 같은 괴력으로 유저 기사들을 찍어눌렀다.
시온도 지지 않았다.
그녀도 바닥에 쓰러진 영주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최단거리에 있는 기사의 요혈을 단숨에 끊어버렸다.
처음에 스무 명 가까웠던 힐튼 가의 기사들은 우리 셋이 난동을 부리자 금세 절반으로 줄었다.
죽음이 지척에 다다르자 기사들은 명예보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에라이! 튀어!”
“호르만도 죽인 놈을 어떻게 상대해?”
“이런 촌구석에서 죽으면 진짜 개죽음이다.”
우르르 도망가는 힐튼 가의 기사들.
상황은 깔끔하게 일단락되었다.
아직 끝은 아니다.
알버스 가의 수백 군사가 손을 벌벌 떨면서 우리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솔직히 전력으로 싸우면 모조리 해치울 자신이 있었으나 현지 병사와 기사까지 죽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이들을 없애버리면 이후 알버스 성을 점령해도 속 빈 강정이 되어버리고, 거주민들의 반발 또한 덤으로 뒤집어써야 한다.
“여, 영주님을 내놓거라.”
“가만 두지 않겠다...”
진작에 사기가 꺾여도 꺾인 놈들.
이런 놈들 굳이 상대해줄 이유가 없다.
영주의 뒷덜미를 잡고 어깨에 들쳐멘 다음 싱긋 웃으며 우리를 노려보는 녀석들이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친구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병사들의 경악 어린 비명이 뒤에서 들려온다.
“미친! 저기를 뛰어내리다니!”
“나머지라도 잡아!”
“나머지도 뛰어내립니다!”
“으아아아! 미친놈들이 영주님과 같이 벼랑으로 뛰어내렸다!!”
저들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떨어지자마자 올라올 때 미리 만들어두었던 나무 손잡이를 잡고 몸을 지탱했다.
뒤이어 온 시온과 캠벨도 능숙하게 신체를 고정시켰다. 이들은 작전에 성공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흥분에 젖어있었다.
“이 미친 작전이 정말로 성공했군요.”
“부단장을 따라오길 잘했어. 북부도 지루할 틈은 없었는데 역시 부단장 옆이 더 재밌단 말이지.”
“알버스 성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대놓고 영주를 납치한 자는 도련님밖에 없을 겁니다. 이건 역사책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맞아.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부단장을 찬양하겠지. 벌써부터 그들이 어떤 노래를 지을지 궁금하군.”
저렇게 오버하는 걸 보니 많이 기쁘긴한가 보다. 텐션을 낮추고자 일부러 무표정을 고수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귀환하기 전까지 긴장 늦추지 마라.”
“그러기엔 부단장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는데?”
“아무튼 임마!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조금 웃겨서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아직도 머릿속에서는 떨어지기 직전 우리를 바라보는 경비병들의 벙 찐 얼굴이 아른거렸다.
한바탕 낄낄대던 일행은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영주를 데리고 절벽을 하산하기 시작했다.
올라갈 때는 힘들었는데 내려갈 때는 정신적 부담이 덜해서 그런지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익숙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우리가 배를 정박해 두었던 암초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곳에는···아무도 없었다.
“배가 없어졌는데?”
누구의 소행인지는 분명하다.
피터가 결국 그릇된 선택을 했다.
이로써 탈출구가 없어진 셈.
캠벨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래서 배신자를 두고 작전을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결국엔 뒤통수를 맞는다니까? 하여간 피터 놈 잡히기만 해봐. 아주 다리를 분질러버려야지.”
시온의 표정도 흐려졌다.
“도련님, 이제 어쩌죠? 아무리 저희라도 짐덩이 영주를 데리고 밤바다를 헤엄칠 순 없습니다. 해가 뜨면 알버스 쪽에서 배를 띄워서 이쪽을 수색하려 할 수도 있고요.”
분개하는 캠벨과 시온에 비해 내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피터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전이니만큼 방도책은 당연히 있었다.
‘새로운 스킬을 쓸 때가 왔군.’
이쯤에서 드루이드 스킬을 재점검하자면,
1. 우드 컨트롤
-바인드(★★)
-우드골렘(★)
2. 스톤 컨트롤
-스톤 랜스(★)
-스톤 실드(★)
3. 윈드 컨트롤
-순보(★)
이렇게다.
나 혼자라면 S급 이동기인 순보를 써서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일행이 많은 상황.
따라서 여태까지 안 썼던 뉴페이스 스킬인 우드 골렘 소환을 활용할 때가 왔다.
“너희들, 너무 놀라지 마라.”
[우드 컨트롤 발동]
[우드 골렘을 소환합니다]
쿠콰콰콰쾅!
초급 드루이드로 승격하고 나서 생겨난 나무 계열 기술인 우드 골렘이 그 첫 모습을 보였다.
여러 개의 나무줄기가 밧줄처럼 서로 꼬여서 팔다리와 머리를 형성했는데, 그 크기만 해도 트롤에 필적할 수준.
이를 눈앞에서 지켜본 시온과 캠벨이 두 눈이 띠용! 하고 원래 자리에서 출타해버렸다.
“꺄아아악!!”
“뭐야! 몬스터다!!”
“놀라지 말라니깐.”
리액션 한 번 화끈하네.
난데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녀석이 몬스터가 아니라 우리의 도우미라는 걸 10분 동안 설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워낙에 기상천외한 짓을 많이 벌여왔더니 같이 있던 일행들도 적응이 빨라졌다.
“도련님,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왜?”
“그동안 도련님과 지내면서 더는 놀랄 게 없으리라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제 알량한 착각이었군요.”
캠벨도 혀를 내두르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걸 갑자기 소환해? 부단장은 혹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든가 그런 쪽이야?”
“설마.”
“혹시 그쪽이라면 말해. 그동안 내가 섭섭하게 했던 일들 미리 사과할 테니까.”
“아니라고. 정말 드래곤이었으면 넌 북부에서부터 이미 먹잇감행이었어. 숙소에서 싸움 걸었을 때부터 꿀꺽했겠지.”
“하긴 그랬겠네.”
그걸 또 수긍하고 있네.
아무튼 상당히 커다란 덩치의 나무 골렘은 그 자체로도 좋은 뗏목이었다.
나와 의지가 연결된 우드 골렘은 명령을 알아듣고 바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골렘에 탑승한다.”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암초에서 뛰어서 골렘의 상체에 안착했다.
이어서 시온이 뛰었고 마지막으로 캠벨이 뛰자 또 골렘이 휘청인다.
“살 좀 빼라니까!”
“이거 근육이라고!”
“도련님, 돼지는 놓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티격태격하는 동안 골렘은 파도를 헤치며 우아하게 배영을 시전했다.
나와 의식으로 연결된 골렘이 지구에서 배운 내 수영지식을 전달받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아르니아 대륙인인 시온과 캠벨에겐 골렘의 수영법이 다소 생소했는지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한참이나 바다를 가로질렀고.
마침내 뭍이 보였다.
석양이 질 때쯤 출발했는데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갈 때도 넷이고 올 때도 넷이다.
구성원은 조금 바뀌었지만 말이다.
[우드 골렘 소환을 해제합니다.]
“드디어 도착했다.”
“긴 싸움이었습니다.”
뭍에 도착하자마자 캠벨이 엎드려서 모래에 입을 맞추고 난리법석을 떤다. 긴 여정으로 피곤하겠지만 휴식에 앞서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다.
“근처에 마련해 놓은 안가로 향한다. 그리고 최종 작전에 돌입한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캠벨과 시온이 설레발을 멈추고 눈빛을 빛냈다.
최종 작전.
로이드 가문을 배반한 영주를 구워삶을 시간이었다.
* * *
알버스 작전 개시 10분 후.
피터는 고개를 들어서 절벽 위로 올라간 삼인방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점으로라도 보였는데 이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미친놈들.”
육두문자가 저절로 나온다.
말도 안 된다.
무슨 수로 절벽을 올라간단 말인가.
지금이야 어떻게든 팔힘이 남아있을 테니 버티겠지만 조금만 지나도 처참한 비명과 함께 추락할 것이다.
그것이 후계자를 꿈꾸던 후작가 망나니의 비참한 최후가 되겠지. 피터는 썩은 동아줄을 잡고 싶진 않았다.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았어. 어찌 보면 네가 자초한 거야. 헤논.”
결심한 피터가 노를 들어서 암초를 밀어냈다. 출렁거림과 함께 순식간에 배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이로써 피터는 힐튼 가의 기사로부터 목숨까지 구해줬던 헤논을 완전히 배신해버렸다. 그간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비로소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다.
설사 헤논이 극악의 확률을 뚫고 작전에 성공했다 해도 돌아갈 배가 없어졌으니 그가 살아날 유일할 탈출구조차 사라진 셈이다.
혹시라도 살아서 보게 된다면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렇기에 헤논이 이번 작전에 실패하고 죽는다에 피터는 자신이 가진 모든 판돈을 쓸어박았다.
그는 나름대로 승률 100%의 성공적인 도박수를 펼쳤다 자신했다. 배의 밑면으로부터 차오르는 바닷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당황한 그가 서둘러 원인을 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밑면에 물이 상당히 차오른 상태였다.
무엇보다 알버스 영지에서 온실 속 화초로 자란 피터는 긴급상황에 대처할 지식이나 임기응변을 펼칠 용기가 전무했다.
“그, 그래! 노를 젓자! 빨리 해변으로 가면 돼!”
피터가 힘차게 노를 저어보려 했지만 배가 움직일수록 탄력을 받아서 물이 더욱 빠르게 차올랐다.
급기야 손에 쥔 노를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바닥에 차오르는 물을 퍼내는 데 사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중과부적.
선체가 거의 잠겨서 물을 빼는 행위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수영도 못하는 맥주병인 그가 도깨비 바다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 0%다.
죽음을 예감한 피터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운명을 탓한다.
“씨발, 운도 더럽게 없지. 도대체 왜 이런 거야? 갈 때는 아무 문제 없었잖아. 왜 하필 올 때 배에 구멍이 나냐고!!”
그때였다.
피터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온다.
바로 배 밑면에 뚫린 미세한 구멍.
암초에 긁혔다기엔 너무나 인위적으로 뚫어놓은 게 확실해 보이는 구멍이었다.
“도대체 이게 왜···? 어라!?”
구멍이 뚫린 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나 생각해보니 바로 헤논이었다.
피터의 의식에 한 장면이 불현듯 스쳤다.
작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벌어졌던 일.
‘긴장했는지 볼일을 보고 싶군. 잠시 뒤돌아있겠나?’
콰쾅!
피터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갈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올 때는 헤논이 앉았던 자리에 구멍이 뚫려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이렇게 해놨는지는 뻔했다.
“하, 하핫, 하하하하하!!!”
피터가 광소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애초에 헤논은 배신을 눈치챘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자신이 배를 탈취하고 도망갈 행동까지 예상하고 볼일을 핑계로 배에 몰래 구멍까지 뚫어놓은 것이다.
도망치면 물에 잠겨 죽으라고.
“···지독한 새끼.”
죽는 와중인데도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로 섬뜩한 심계를 지닌 놈의 뒤통수를 치려 했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와서 하는 후회는 아무 소용도 없다.
꼬르르륵
바닷물이 코와 입으로 쏟아진다.
발버둥치는 게 무의미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의 마지막 생각은 이러했다.
‘헤논을 끝까지 믿어볼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