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음모 : 깨달은 망나니
아침식사자리가 파하고.
방으로 들어온 로잘린은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으아아아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게 그 사생아 놈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수년 전.
후작이 갑자기 아기를 데려왔다.
누군지도 모르는 어미는 죽었단다.
로잘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필립보다는 어리나 엇비슷한 나이의 헤논을 그녀는 계속 경계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환청이 들린다며 온 후작성을 들쑤시며 망나니짓을 일삼는 헤논을 보며 로잘린은 마음을 놓았다.
이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후작령은 자기 아들인 필립이 물려받으리라 확신했다.
‘그런 놈이 왜 갑자기 정신을 차린 척하는 거지? 인제 와서 영지에 욕심이 나서?’
뭐가 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필립의 앞날에 헤논이 확실히 끼어들었다는 사실.
로잘린은 조금 시기가 늦긴 했으나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하녀장.”
“네.”
로이드 후작성에는 하녀장도 있었다.
집사장은 후작이 칼론 제국에서 직접 데려온 세바스찬으로 철저히 후작의 수족이다.
반면에 하녀장은 로잘린의 처가인 에비스 자작가에서 직접 데려온 하녀로 그녀의 수족이었다.
로잘린의 발광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던 하녀장이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자네 남동생 말이야. 용병단장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누더기 용병단 단장입니다.”
“누더기 용병단? 이름 참 이상하네.”
“그것이···적을 잡아다가 가죽을 죄다 벗겨서 누더기처럼 입고 다닌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제 동생이지만 솔직히 미친놈입니다. 연 끊은지도 오래됐고요.”
하녀장의 얘기를 들은 로잘린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의 목적에 딱 부합하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네 연락은 받지?”
“동생 쪽에서 일년에 한 번 정도 안부차 사람 가죽을 보냅니다. 저는 답장을 안 하고 있지요.”
“실력은 어때? 확실해?”
“그렇게 미친 짓을 하고 다니는데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실력이야 있겠죠.”
“좋아···”
잠시 뜸을 들이던 로잘린이 운을 뗐다.
“하녀장.”
“네.”
“하녀장은 확실히 내 사람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동생에게 사람을 좀 보내.”
“무슨 말을 전할까요?”
“이번에 세금을 걷으러 후작령을 도는 헤논을 습격하라고 말이야.”
“!!!”
하녀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계모라지만 정말로 사생아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릴지는 몰랐기에.
그러나 놀란 티를 내면 안 된다.
하녀장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해가 빨라서 좋네. 습격으로 얻은 재물과는 별개로 보수도 확실히 지급한다고 전해. 백일 안으로 내 손에 헤논의 얼굴 가죽이 들어왔으면 좋겠어.”
“예!”
하녀장이 종종거리며 나갔다.
혼자 남은 로잘린은 창 밖으로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래, 난 이러고 싶지 않았어. 모든 건 헤논 네가 자처한 일이야.’
속으로 생각하던 그녀는 곧 받게 될 헤논의 가죽을 어떻게 처리할지 상상했다.
* * *
로이드 후작가는 엘든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방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후작령을 구분하는 경계는 다소 모호하다.
후작가 직할 소속 장원만 따지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장원에서 좀 더 발전한 캐슬까지 포함하는 사람도 있고, 그도 아니면 사실상 후작과 운명공동체인 산하 타가문까지 세력권에 두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내가 맡은 임무는 바로 후작가 직할 장원을 돌며 세금를 걷는 일이었다.
장원은 지금으로 치면 읍면리 중에 리에 해당하는 수준의 행정구역 상으로 깡촌 중의 깡촌이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기에 세금을 걷어도 그걸 후작성까지 옮길 능력이 없는 곳이라 보면 된다.
도적과 몬스터가 횡횡하는 흉흉한 세상이다.
훌륭한 기사도, 용감한 용병도 강도로 돌변할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 재물을 담은 수레를 끌고 무방비로 길거리를 나선다는 건 그냥 잡아먹어 달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캐슬 정도만 되어도 마을 안에 자경단 내지는 경비대을 두기 때문에 여차하면 이들을 동원하여 후작성까지 운반한다.
그러나 장원에서 장정을 차출했다간 당장 마을 유지가 안 되는 수준이기에 후작성에서 따로 세금을 걷을 관리인과 호송될 재물을 지킬 병사를 같이 파견하는 거다.
로이드 후작은 관리인에게 명해 헤논과 세금을 호위할 병사 서른 명을 선발하게 했다.
동원규모 자체는 예년과 비슷했다.
문제는 여기에 따라붙는 기사였다.
병사들은 기사가 아니다.
기초 훈련을 받긴 받지만 그보다는 술 마시고 카드게임을 하는 시간이 긴 자경단이라 보면 된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장비, 즉 철갑과 잘 버려진 검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조금만 고수를 만나도 쓸모없는 전력이 돼버리고 만다.
이럴 때 필요한 전력이 바로 밥만 먹고 검만 휘두르는 기사인데.
문제는 이 자유기사들이 단체로 담합하여 헤논의 임무에 차출되는 것을 거부했다.
“곤란합니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어서 수련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산달이어서요. 아내 곁을 지키고 싶네요.”
“바쁩니다. 다른 기사님을 알아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자유기사들은 지금이야 기사지만 언젠가는 땅 한조각이라도 얻어서 영주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만약 나를 따라나섰다가 찍혀버리면 나중에 필립이 후작이 된 후 불이익을 당할 수 있으니 온갖 핑계를 다 대며 피하려는 것이다.
“곤란하군요.”
옆에 있던 시온도 난색을 표했다.
시온은 이번 임무에 특별히 같이 따라가기로 했다.
시온 정도면 든든한 전력이 될 테지만 철갑을 두른 기사만큼은 아니다.
당장 산적과 도적들이 습격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점이 기사의 유무였으니까.
“나도 싫다는 놈들 억지로 끌고 가고 싶진 않다. 이대로 간다.”
“도련님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후작님께 부탁을 드려보는 게 어떻습니까?”
“후작님은 이미 서른 명의 병사를 지원해주셨다. 거기서 선을 그은 거다. 더 도움을 청하면 나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셈이다.”
그렇게 나는 병사 서른 명과 함께 후작성을 출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배웅은 없었다.
* * *
후작령의 땅덩이는 과연 넓었다.
가장 인근에 있는 장원까지 가는데도 꽤 시간이 걸린단다.
나와 시온은 특별히 마차를 타고 갔다.
빈수레를 끌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병사들은 자신과 동행하는 화려한 마차를 보고 눈을 흘겼다.
“무슨 이런 일을 하는데 마차까지 끌고 가는지 원.”
“누가 보면 어디 놀러라도 가는 줄 알겠네.”
“요새 좀 달라졌다고 하더니 다 헛소리였어. 망나니 기질이 어디 가겠나.”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마차 안에서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느낌이 거의 왔다.’
여태껏 나는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비기너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최근의 맹훈련, 드루이드 특유의 자연친화력, 필립과의 대련에서 얻은 깨달음이 겹쳐서 뭔가를 살살 간질이고 있었다.
이에 더해 에고소드에 갇힌 천마가 끊임없이 조언을 해주었다.
-온종일 검만 휘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똑같이 검을 휘둘러도 생각을 하고 휘둘러야 해.
-내가 알기로 이곳 색목인들은 중단전, 즉 심장에 마나를 모은다. 아주 비효율적인 짓이지. 물론 서클과 회전이라는 참신한 방법을 쓰긴 하지만 비효율적이라는 건 변함없다.
-심장과 아랫배 사이의 복부! 그곳에 네 마나를 저장할 지점을 찾아라. 하단전이라 하는 그곳부터 시작해야 앞으로의 네 성장이 수월할 게다.
곁에 있던 시온도 내가 어떤 특이점에 도달했다는 걸 알았는지 가만히 앉아서 지켜봐 주었다.
‘도토리를 먹었을 때, 마나가 몸에 있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리고 되새겨보자. 평상시와 무엇이 달랐는가?’
온몸의 솜털이 올올이 곤두서는 느낌.
세포가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느낌.
오감이 극도로 민감해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
무엇보다···
‘마나라는 것도 결국 자연이란 커다란 군집체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거창하게 여길 필요 없어. 정령과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하자.’
상념에 상념에 상념을 파고들었을 때.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글자가 떠오른다.
[자연과의 교감력이 상승합니다.]
[마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기너->유저로 승급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와 동시에 아랫배로 청량한 기운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당황하지 마라. 지금이 중요하다. 물줄기는 끝없이 쏟아진다. 그중에서 네가 감당할 만큼만 네 몸에 붙잡아두거라.
-머릿속으로 알을 품는다 상상하면 도움이 된다. 콩알만한 원을 복부에 넣는다 생각해.
나는 천마가 알려준 복부, 즉 기해혈 부분에 마나를 인도했다.
세븐 스타였던 아버지의 덕분인지, 아니면 하이엘프였던 어머니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헤논의 몸은 놀라운 소질을 보이며 상당량의 마나를 몸 안에 붙잡아두었다.
붙잡힌 마나는 태극 문양을 그리며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달걀만한 점이 되어 복부에 맺혔다.
나는 그것이 단전임을 깨달았다.
-네놈, 괴물이냐?
-시작부터 그만한 양의 마나를 모으다니.
-나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옆에서 천마가 감탄하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모은 형성한 단전의 크기가 처음치고는 상당한 모양이다.
번쩍!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안광 너머로 마나가 넘실거렸다.
마나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탓이다.
아무래도 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경지에 오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눈치 빠른 시온은 내가 벽을 넘어섰다는 걸 파악했다.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연신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음이 보였다.
“어때, 시온. 나 정도면 빠르게 유저가 된 건가?”
“도련님의 성장 속도는 이미 빠르다고 분류할 수준이 아닙니다. 제 아버지나 후작님도 도련님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군. 조만간 다시 한 번 검을 겨뤄보지. 점점 자네의 무례를 벌할 날이 머지않았어.”
시온은 평상시처럼 ‘그날을 기대하지요.’ 내지는 ‘아직 제 상대는 아니십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정말로 그녀를 넘어서겠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탓이겠지.
모르긴 몰라도 내일부터 그녀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개인 연습을 늘릴 것이다.
* * *
마침내 도착한 첫 번째 장원.
촌장이 몸소 나와서 나를 맞이해줬다.
“어서 오십시오. 관리인님. 못 보던 얼굴이군요. 새로 임명되셨나 봅니다.”
“후작님의 아들 헤논 트리스라 한다.”
“헤논님? 설마···그 헤논?”
“그래. 그 헤논 맞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쇼!”
촌장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넙죽 엎드렸다.
이런 시골까지 내 악명이 자자하다니.
나도 내가 이렇게 유명인인지 몰랐다.
“안 잡아먹어. 관리인 대신 나왔다. 매년 해왔던 대로 세금만 걷고 갈 거다.”
“정말입니까?”
“왜? 집집마다 뒤져서 값나가는 거 죄다 가져가 줄까?”
“아닙니다!!”
촌장은 혹시라도 내가 정말 그렇게 할까 봐 냉큼 세금을 바쳤다.
첫번째 장원의 세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나귀가 이끄는 두 개 수레 분의 밀과 장원 여인들이 뜨개질로 짠 약간의 모직물.
최근에 염소가 새끼를 쳤다길래 새끼 염소 한 마리를 거두었다.
그 밖에도 장원주민은 우리를 위해 소박하지만 정성 어린 식사를 준비해줬다.
시온을 포함한 나와 병사들은 주민과 어울려서 빵을 먹었다.
나는 촌장 옆자리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듣기로는 올해 풍작이라던데.”
“최근 몇 해 동안 워낙 흉작이었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거지, 전체를 놓고 보면 평이한 수준입니다.”
“그런가.”
“후작께서는 잘 계십니까?”
“늘 바쁘시지. 이 드넓은 후작령을 다스리시는데 한가할 틈이 어디 있겠나.”
“그도 그렇겠군요.”
나무잔에 가득 담긴 미지근한 밀맥주를 한모금한 촌장이 화제를 돌렸다.
“헤논님을 보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저희 마을에는 가끔 후작성에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런 분들이 헤논님에 대한 소문을 몇 개 들고 왔는데 사실 좋은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오늘 대화를 나눠보니 멀쩡한 분이시더군요. 아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모양입니다.”
“켁! 케켁!”
옆에서 촌장의 말을 듣던 시온이 맥주가 목에 걸렸는지 켁켁댔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뭐, 나도 소문을 맹신하는 편은 아니야. 호사가들이 아무리 떠들어 봐야 직접 보고 느끼지 않으면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법이거든.”
“맞지요.”
“밖으로 나온 김에 좀 근황이나 듣고 싶군. 혹시 최근에 뭐 특이한 사항이 있었나? 몬스터가 출몰했다든지, 맹수가 나타났다든지, 아니면 무장 집단이 돌아다닌다든지, 새로운 상단이 방문했다든지, 뭐 그런 소식들 있잖는가.”
촌장은 턱을 괸 채 머릿속으로 기억을 되새겨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었지요.”
“그런가.”
“아참! 그나마 좀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이상한 일이 있긴 했습니다.”
“뭐지?”
“저는 옆동네 촌장 주정뱅이 해리슨과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일종의 생존 신고인 셈이지요. 헌데 최근에 그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