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빙의 : 결심한 망나니
‘고든,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예요.’
헤논을 품에 안으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처음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사랑하고 싶다고 여긴 여자는.
그녀와는 첫만남부터 극적이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바람은 선선히 불던 가을.
추수철이 다가와서 고든 로이드도 영지민들도 축제 준비로 들떠있던 날이었다.
후작령 경계 부근까지 시찰을 나섰다가 우연히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일단은 성의 하녀들에게 맡겨서 돌봐주려고 했으나, 후드를 벗기고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엘프?’
이종족을 거두면 주변에서 어떤 시선을 던질지 모른다.
그렇기에 고든은 비밀리에 세바스찬을 불러 여인을 맡겼다.
어차피 얼마 오래 못살 것 같아서 별로 기대는 안 했다.
그런 후작의 예상은 빗나갔다.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강인했다.
정신력 하나로 고통을 견디고 나날이 건강을 회복해갔다.
로이드 후작은 매일 여인의 병문안을 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변방의 소왕국 엘든에서는 엘프를 볼 일이 좀처럼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중에는 호기심에 사적인 감정이 점차 섞여들었다.
‘헤나, 나와 결혼해주시오.’
아름다운 미모과 신비로운 분위기.
포근하고 다정한 성격.
그녀가 보이는 다양한 매력에 푹 빠져버린 로이드 후작은 헤나가 엘프임에도 불구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반지를 건넸다.
‘좋아요.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요.’
둘 사이는 급속도로 진전됐고 어느새 헤나의 배가 불룩 불러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임신과 동시에 헤나의 상처가 기어이 덧나버린 것이다.
하나의 생명을 남기고 떠나려는 그녀의 옆에서 후작은 절망했다.
그런 후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헤나가 말했다.
‘고든, 그거 아나요? 저도 할아버지에게 들은 얘기인데, 인간과 엘프 사이의 아이는 자연의 사랑을 받는데요.”
“그렇소?’
‘네, 그러니 헤논은 운명이 점지해준 특별한 아이예요. 아이를 잘 부탁해요.’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다음날 헤나는 헤논을 출산했고 며칠 뒤 열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후작은 헤나를 직접 내성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주었다.
매일 같이 그곳을 방문하여 그녀를 기억하며 그리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헤나를 묻은 곳에서 묘목이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세바스찬을 불러 따로 나무를 심었냐고 했더니 모르는 일이란다.
묘목은 한 달도 안 되서 정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상수리나무가 되었다.
듣도 보도 못한 기사에 세바스찬은 크게 놀랐고 로이드 후작은 확신했다.
‘저 나무는 헤나의 분신이다.’
후작이 확신한 부분은 바로 향기였다.
상수리나무에서는 예전에 헤나에게서 느꼈던 따뜻하고 포근한 체취가 똑같이 느껴졌다.
그는 상수리나무를 자신의 목숨과도 같이 여겼다.
그런 사이에 시간이 지나고 헤논이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로이드 후작도 그녀의 부탁대로 헤논에게 잘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에게 전해 듣는 헤논의 근황은 실망 가득한 소식들 뿐이었다.
‘오늘은 누구를 폭행했고···’
‘길가던 행인의 금품을 갈취하고···’
‘환청이 들린다며 밥상을 뒤엎었답니다.’
그런 와중에 정실부인 로잘린도 헤논을 눈엣가시로 여기며 로이드 후작을 압박했다.
이대로 가면 드넓은 후작령은 오로지 로잘린의 아들 필립의 차지였는데, 유일하게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사생아 헤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이드 후작은 헤논을 반쯤 놔버렸다. 사실상 포기해버렸다. 그저 사고를 덜 치기만을 바랬다.
‘헤논이 죽었다 살아나더니 변했습니다. 제정신을 차린 듯합니다.’
최근 세바스찬의 보고에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후작은 신중했다.
괜한 기대감은 더한 실망감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에.
더욱 헤논과 거리를 두려 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오밤 중에 헤논이 정원에 들렀단다.
정원에는 그가 목숨처럼 여기던 헤나의 분신이 있지 않던가.
화들짝 놀란 그는 재빨리 정원으로 달렸다.
도착한 그의 눈에는 생명력을 잃고 시들어가는 상수리나무가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매일 같이 나무를 봐왔던 로이드 후작은 알았다.
그녀가 떠나갔다는 것을.
헤나와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사라졌다.
이 사실을 깨닫자 깊은 슬픔과 동시에 헤논에게 강력한 살심이 솟구쳤다.
‘무슨 짓인지 설명하거라.’
몇 년만에 직접 본 아들은 세바스찬의 말대로 크게 변해있었다.
두껍던 지방층은 사라졌고 어머니와 똑 닮은 눈부신 외모가 달빛을 받아 요요하게 빛났다.
대륙의 수호자였던 자신의 기세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초연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와 대화했습니다.’
‘후작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저 나무가 어머니의 분신이라는 사실을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일까.
정말 저 아이는 헤나와 대화를 나눴던 걸까.
설령 저게 거짓말이라도 믿고 싶다.
자꾸만 머릿속 한켠에는 과거 헤나가 해준 이야기가 맴돌았다.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나온 하프엘프는 특별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이.
“정말로 바뀐 걸까?”
로이드 후작이 헤논의 변화를 믿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옆에 있던 세바스찬이 땅에 떨어진 지팡이를 후작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번에는 믿으셔도 될듯합니다···많이 늦었지만 말입니다.”
후작령의 상황은 많이 복잡하다.
인제 와서 헤논이 바뀐다고 한들 오히려 문제는 더 커지겠지.
엘든 왕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가 어지러운 난세에 사생아가 조금 바뀐다고 해서 후작령을 물려줄 수도, 물려줘서도 안 된다.
오히려 집안싸움만 일어나고 헤논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후작령이 공중분해 될지도 모른다.
“그저 지켜보시지요. 미래 일을 걱정한들 달라질 건 하나도 없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들어가서 좀 쉬시지요. 오늘도 격무에 시달리셨습니다.”
“아니네. 난 이곳에 좀 더 있겠네.”
“알겠습니다.”
세바스찬은 물러가고 로이드 후작 혼자 남았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가 정원에 찾아올 일은 없을 터.
시들어 가는 상수리나무를 보며 그는 사랑했던 여인 헤나를 다시금 추억했다.
* * *
아르니아 대륙은 지구와는 달리 신성력과 마나 사용자가 존재하는 세계다.
특히 마나의 경우, 그 사용량과 숙련도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 경지로 나눴다.
비기너
유저
엑스퍼트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비기너는 마나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단계. 무술가의 70%가 이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면 된다.
유저는 초보적인 수준으로 마나를 사용하는 단계. 이때만 되어도 신체능력이 일반인을 훌쩍 상회한다.
엑스퍼트는 마나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전문가.
주로 수석 기사나 경험 많은 용병들이 이 단계에 이르러 있으며, 무기에 마나를 담는 경지인 마나 소드를 사용할 수 있다.
마스터는 마나를 사용하다 깨달음을 얻고 오러 블레이드를 방출하는 경지다.
과거 마왕의 침입에 맞서 대륙을 수호했던 <세븐 스타>는 전원 마스터급으로 분류됐다.
이쯤 되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탈을 쓴 초인이라고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마스터 위에 그랜드 마스터란 경지가 있다.
역사상 이 경지에 이른 자는 일대일 결투로 마왕을 봉인했던 용사 카일이 유일했다.
현재 카일은 북부 산맥에서 펼쳐진 최후의 전투 이후 실종되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도시에서는 용사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럼 나는 어디쯤 있느냐고?
당연히 새내기 비기너다.
“헉! 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휘둘렀다.
이에 맞서는 시온도 체력이 다했는지 호흡이 가빠졌다.
“시온, 조금 더 있으면 네 무례에 대한 벌을 받을 날이 오겠군.”
시온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녀한테 매일 시비를 걸면서 대련을 하는데 안 질리면 그게 이상하다.
이와 별개로 나날이 늘어가는 내 실력에 조금이나마 놀란 기색도 보였다.
지금도 봐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시온과 상대조차 안 되던 내가 이제는 그녀와 엇비슷하게 싸울 정도가 되었다.
특히나 얼마 전 정원에서 드루이드로 각성하고 나서는 그 성장세가 뚜렷해졌다.
패시브 스킬인 끈질긴 생명력이 주는 체력과 강인함, 인내력과 회복력은 상당히 유용해서 순수 피지컬로는 웬만해선 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확실히···많이 성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를 이기시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시온의 말은 사실이다.
그녀는 마나를 쓰지 않고 기술만으로 내 힘과 체력을 극복하고 있었다.
같은 유저급 무인 중에서도 중상위에 속하는 그녀였다.
작정하고 심장에 맺힌 마나서클을 돌리기 시작하면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슬슬 기술적으로도, 마나적으로도 성장을 이루어야 할 텐데···’
지금껏 시온은 좋은 대련 상대로서 도움이 되어왔지만 뚜렷한 한계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날 싫어하는 자에게서 기술을 배울 수는 없잖는가.
괜찮은 스승을 모셔야 하는데 문제는 그 스승님이 내가 알기로 꽤나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계신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면서 오늘 연습을 마무리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온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을 때, 갑자기 연무장 입구가 소란스러워지며 칼을 찬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크핫하하! 여기도 나름 좋은데요? 대연무장 못지않습니다.”
“앞으로 여기서 기초 단련을 하고 대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면 되겠습니다.”
“공자님, 새 연무장에 오니 의욕이 샘솟는군요. 당장 훈련을 시작하시지요.”
왁자지껄 떠드는 젊은 기사들은 후작령 산하 자유 기사들이었고 그 필두에는 내 이복형인 필립이 있었다.
“어? 헤논 아니냐?”
필립은 아무렇지 않게 기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나를 봤는데, 그 연기가 어찌나 어설프던지 터질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누가 봐도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것 같길래 앞으로 나섰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니? 그 말은 마치 내가 이곳에 오면 안 되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곳은 후작님의 직계 가족만 쓸 수 있는 소연무장. 기사들을 위한 대연무장은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족들만 쓸 수 있는 연무장인데 어찌하여 외부인을 출입시켰냐는 말이었다.
필립은 내 대답을 예상했는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되받아쳤다.
“최근에 나와 기사들이 새로운 훈련을 시작했는데 연무장을 두 개를 쓰는 게 효율이 잘 나올 것 같아 소연무장도 함께 쓰기로 했다.”
“후작님도 허락하신 사안입니까?”
내 말에 필립의 얼굴이 구겨졌다.
“난 로이드 후작가의 정당한 후계자다. 내가 이런 사소한 일까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가족들만 허락된 공간에 외부인을 들이는 일입니다. 이게 어찌 사소한 일이란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으로 내심을 짐작하자면, ‘언제부터 이 망나니가 이런 논리적인 말을 구사하게 됐지?’ 딱 이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조소를 지으며 날 비웃었다.
“영지를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들에게 후작가에서 훈련환경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해서야 쓰겠느냐?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좋습니다. 그러면 기사들이 소연무장을 쓸 때는 저는 대연무장을 쓰겠습니다.”
“불가하다. 우리는 그룹을 나누어서 절반은 대연무장, 절반은 소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기로 했거든.”
애초에 필립은 내가 최근에 극적인 변화를 보이고 검술 수련까지 한다는 게 아니꼬워서 찾아왔으니 수련을 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작정하고 시비를 걸러 왔다는 말이다.
“그럼 전 어디서 수련을 하란 말입니까? 후작가의 직계인 제가 내성 바깥에서 수련하는 그림도 웃기지 않습니까?”
“뭐가 웃기단 말씀입니까?”
나와 필립이 얘기하고 있는데 돌연 끼어든 놈이 있었다.
기사들 중에 가장 어려 보이는 놈이었는데 얼굴에 벌써 나 싸가지 없음이 써있는 놈이었다.
기사보다는 건달에 가까운 놈은 일부러 어깨를 건들거리며 빈정거렸다.
“제가 볼 때는 헤논님이 수련한답시고 계집이랑 소꿉장난하는 게 더 웃겨 보입니다만?”
“크핫하하하!!”
“키키킥!!”
기사들이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했다.
옆에 있던 시온의 눈길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하녀복에 딸린 주머니에 슬쩍 손을 집어넣었는데, 손에 날붙이가 들려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반, 말이 너무 심하다. 그래도 헤논이 재밌게 놀겠다는데 그리 면박을 줄 필요까지 있느냐?”
“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웃기지 않습니까? 아까부터 자꾸 후작의 직계 운운하는데 사생아 주제에 혈통 따지는 놈은 또 처음 봅니다.”
“크핫하하하!!”
다시 한 번 기사들이 비웃었다.
솔직히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사람은 예상치 못한 시비에 걸리면 화가 나지만 예상했던 시비에는 한결 침착하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필립이 날 견제하리라 여겼고 그게 오늘일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게다가 드루이드로 각성한 이후로 자신감도 생겼다.
나는 훈련하느라 땀에 젖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는 이반이라 불리는 얼치기 놈을 향해서 있는 힘껏 던졌다.
휘이이익! 철썩!
어이구야.
땀에 푹 쩔어서 그런지 장갑이 얼굴에 아주 착 달라붙었다.
모욕을 당한 이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런 그에게 히죽거리며 말했다.
“보기 좋은 얼굴이군. 내 명예를 더럽힌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