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상여관「WISH」] 외전.
Guest.Supplementary story: 모임.
여신사력 712년 5월 8일.
제국의 수도 케리팔.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과 함께 아이리펜에서 제일가는 문물의 도시이다.
제도 자체가 제국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외적의 방비로부터 느슨하여 문물이 발전할 기회가 다른 곳에 비해 더 많은 곳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며 발발했던 전쟁으로 1000년 전에 비해 아이리펜 대륙의 국가는 3배 이상 늘었고, 그에 따라 기존 나라들의 영토가 좁아졌지만, 제국의 수도만큼은 언제나 전쟁의 업화에서 빗겨나 있었다.
역사적으로 절대 침공을 받은 적이 없는 제도는 그만큼 문물이 발전할 기회가 더 많았다.
현재 제국의 수도는 명망 높은 학자나 마법사, 논객,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수많은 국가의 난립으로 어느 국가든지 정치계에 파란이 일고 일부 국가의 정치 체계는 뿌리부터 흔들렸으나, 애초에 황제를 제외한 모든 작위가 비세습제였던 제국은 다른 나라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안정적인 정치구조를 자랑했다.
비록 외곽의 영토가 많이 줄어들었다 할지라도 제국의 뿌리를 흔들지는 못해 세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척 봐도 도시 전체에서 안정감이 느껴지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곳이 바로 케리팔이었다.
여신사력 209년, 서남부 독립세력의 테러공작에 휩쓸릴 뻔 했던 케리팔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 ‘반 디에고’의 이름을 딴 ‘반 디에고 거리’에는 최근 10년 동안 급격히 유명해진 학자의 집이 있었다.
학자에 불과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학식과 생각의 깊이, 나이에 비해 나올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지면서 뭇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라르딘 안츠’가 바로 그 사람이다.
대륙 최고의 대학도시라는 레리첸트 이켈라인에서 13개 학위의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현재 케리팔 대학의 역사학과를 비롯한 여섯 과의 교수를 맡고 있는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
대부분의 명망 높은 학자들이 100세를 넘겨 남은 시간 3, 40세를 바라 볼 때, 그들의 살아온 날을 남겨두고 있는 그는 앞으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때도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가진 천재다.
지금 그 천재는 제국 황실 역사 이래 최고의 기재라는 2황녀 ‘미스테리아’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분탄트 칸이 주장한 여신자살설은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예전 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비사 하나 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여신 안스란의 죽음에 대해서는 논하기가 어렵군요.”
“안츠 교수님이 쓰셨던 논문, ‘여신 각성으로부터 유추한 사멸까지의 과정’을 보면 그 의견에 반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물론 그와 제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허나 추측의 반대급부로 추측을 내미는 것은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논문을 발표하셨다는 의미신가요?”
햇살에 반짝거리는 불꽃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라르딘은 깊이 있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날카로우시군요. 자신의 말에 확실할 사람은 몇이며, 책임질 사람은 과연 있겠습니까? 어차피 여신 안스란의 사멸은 우리 시대가 풀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로서 존재할 것입니다. 여신사력 원년부터 200년 까지는 그것이 심각한 주제로 거론되었지만, 요즘은 역사적 사건에 불과하지요. 점점 그 의미가 지니는 무게는 가벼워질 것이고, 주객의 안주로도 거론되지 않을 때가 오겠지요.”
미스테리아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곤 하는 라르딘의 깊이 있는 미소에 대하여 떠도는 소문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마치 그때의 역사를 겪어 본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라는 소문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그 때를 겪어보신 듯하시군요. 혹자는 말하지요. 내력이 불분명한 안츠 교수는 변신한 엘프거나 드래곤이라고요. 처음 들었을 때는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하였지만, 지금 보니 더욱 그 말에 신빙성을 싣게 되는군요.”
“하하, 이거 고작 학자에게 대단한 명성을 안겨주시는군요. 세 번의 밀레니엄을 사는 엘프나 영원을 사는 드래곤이라면 알고 싶은 것을 전부 알 수 있으니 얼마나 부럽습니까. 인간 수명이 길어야 200년이었고, 점점 짧아져 지금은 150을 넘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 시간이 부족할 따름입니다.”
라르딘은 진정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유명한 학자답지 않게 순박한 표정을 보이는 그를 보며 미스테리아는 황궁에 넘치는 학자들과는 역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시절부터 무도관 보다는 도서관을 좋아했고, 사교보다도 독서를 좋아했으며, 읽은 책의 모두를 기억할 정도로 영민하고 속 깊은 24세 처녀는 소녀시절부터 들어오던 소문이 거짓없는 진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견을 경청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음에 찾아뵙더라도 귀찮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명성이 자자한 2황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즐거운 토론이었습니다. 송구스럽지만 멀리 배웅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미스테리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잠깐 움직였다.
황위에 오르지 못한 황족은 서민이 된다고 해도 제국의 제일권력자와 친척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든 연줄을 대려고 하는 사람 투성이였다. 그것이 사교계와 관련이 없다는 그녀일지라도 잘 보이려고 하는 남자들 투성이었는데 라르딘은 초청했던 논객을 보내는 행동보다 더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배웅이라도 받으려면 논객으로서 인정받아야 하겠구나.’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다소 경우 없다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토론과 가르침을 청하고자 왔지, 손님으로서 대접받기 위한 건 아니었다. 사람에 관계없이 손님은 대접하고 논객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준다는 일각의 이야기는 진실인 듯싶었다.
라르딘에 비하면 한참 아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도 학식으로 이름 높은 사람이었다. 24세의 나이에 3개 부분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을 정도로 알짜배기 학자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손님으로서 대접받는다는 건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녀와 함께 정원을 나왔다. 당분간 제국 황녀가 공부하는 시간은 좀 더 길어질 것 같다.
황녀를 그렇게 배웅 없이 보낸 라르딘은 넥타이를 풀며 소매의 단추도 풀어 숨통을 트려는 듯 편안한 자세로 정원 잔디 아무 곳에나 앉았다.
그의 곁으로 집사인 호머가 다가왔다.
“지치신 듯한데 안으로 들어가 쉬시는 건 어떠하신지요?”
“아니. 집안보다도 햇빛을 쬐는 게 더 몸에 좋아. 그건 그렇고, 제국의 2황녀는 소문 그대로의 사람이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꾸밈없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보통의 귀족가문 영애라면 저 나이에는 언제나 자기 치장에 바쁠 테니까요.”
라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황녀 앞에서는 가여운 농으로 사양했지만, 그는 정말로 드래곤이었고, 겉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는 그에게는 겉모습을 꾸민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고 있다.
미스테리아야말로 내면의 매력이 독보적인 사람이었다. 지금은 치기어린 자존심도 보이고, 생각의 정리가 얕은 면도 있었지만 다듬으면 훨씬 더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레드 드래곤의 신예, 라르딘 루 라이엔츠는 이대로 학자로서 유희를 즐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스테리아라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 동안이지만 결정을 내린 라르딘은 호머에게 말했다.
“좋아. 미스테리아 황녀에게 내일 찾아가겠다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 편지인가? 누구에게서 온 건가?”
“저, 그것이… 큰누님이라시더군요.”
라르딘은 고개를 갸웃하며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의 큰누나라면 나미아 이켈라인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새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편지를 부치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알았네. 편지라니, 오랜만이군. 이만 가 보게.”
“예.”
호머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고, 라르딘은 붉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는 편지의 겉봉을 조심스레 열었다. 가끔 편지가 폭발을 한다던가 하는 장난을 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편지는 보통의 편지였고, 그는 깨끗한 필체가 일필휘지로 쓰인 편지를 주르륵 읽고는 한 번 더 읽었다.
이윽고 편지에서 눈을 뗀 그의 약간의 당혹감과 함께 기쁨이 일었다.
“하하… 이거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는 난처하게 웃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미스테리아에게 방문소식을 알리는 건 조금 늦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권력층의 바로 옆에 있는 황녀를 거절할 정도의 일이 그 편지에 적혀져 있는 것이다. 과련 그런 내용이란 뭘까?
라르딘은 조금 전 호머를 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는 혀를 한 번 차고는 잔디에서 일어나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외출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조금 전에 그 큰누님이라는 사람에게서 온 편지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리펜에서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집단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국가를 제외하면 남는 집단은 딱 하나였다. 몇 해 전 개업 1000년을 맞이한 이켈라인 상회가 바로 그것이다.
오래전 은퇴한 ‘나미아 이켈라인’으로부터 시작된 상회의 역사는 그 이후 아이리펜 대륙의 역사와 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해왔다.
한때 대륙 상권의 56%를 장악했었던 이켈라인 상회는 회장의 교체와 전쟁의 흐름에 휘말려 현재는 대륙 상권의 40%를 장악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그나마 한때 25%까지 떨어졌던 것을 여기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아이리펜의 역사를 공부할 때 이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켈라인 상회였고, 그 이름이 가지는 브랜드 밸류는 역사적인 가치로 통한다.
2대 회장이었던 티나세르 이켈라인이 그때 당시 존재하던 모든 국가에 만든 교육도시 ‘이켈라인’은 현재도 순조롭게 운영되면서 그 수준이 표준 교육의 척도로 쓰인다.
현재의 회장은 ‘이률킨 이켈라인’이라는 여성으로, 생김새가 초대 회장과 매우 닮았을 뿐만 아니라 경영 감각도 그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7대 회장인 이률킨은 첫 연설에서 이켈라인 상회가 설립되던 초기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했고, 그 말대로 이켈라인 상회는 처음의 모토인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물건을’이라는 문구를 재창하며 활발히 운영하는 중이었다.
제국 수도 케리팔에는 제국의 이켈라인 상회 지부를 총괄하는 중앙 지부가 있었다. 아이리펜 대륙에서 제일 큰 국가인 만큼 시장의 규모도 커서 그 점검을 위해 회장이 직접 그 중앙지부에 와 있었다.
하나, 그런 그녀를 만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 대륙을 아우르는 상회의 특성상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수 없이 많았고, 계층 또한 다양했다. 사업상의 관계가 아닌 개인적인 관계를 만들어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업 협상은 관련 담당자가 알아서 전개한다. 새로운 품목의 취급 같은 사항은 회장의 결재까지 미치지 않는다. 중요한 사업 이야기라고 하면서 그녀를 만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약속도 되어 있지 않았던 라르딘을 그녀가 직접 만난다는 건 비서인 아디스에게 있어 큰 충격과도 같았다. 어쩌면 저명한 학자이기에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차를 준비했다.
오늘 이내로 케리팔에는 이률킨이 개인 손님을 받았고, 그 상대가 유명한 학자인 라르딘이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질 것이다.
“이만 나가봐, 아디스.”
“예. 회장님.”
아디스는 라르딘이 일찍 일어나지 않을 경우 이 앞에 약속된 만남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도 회장과 학자가 무슨 관계냐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녀가 문을 닫자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던 이률킨은 금세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되었다. 상계에서 그녀의 웃음을 본 사람이 셋도 안 된다는 소문과는 퍽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어쩐 일이야, 오빠? 약속도 없이.”
“큰누나가 이걸 보냈어. 맏이니까, 알아서 해결하래.”
“어머? 큰언니가?”
이률킨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르딘이 건네준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말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드래곤을 오빠라 부르는 그녀 역시 드래곤이었다. 레드 드래곤의 신예 이률킨 루 지오덴틱은 편지를 한 번 주욱 읽어보고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아…. 큰언니도 참 막무가내라니까. 결혼하면 좀 성격이 변할까 싶었는데.”
“매형만 고생이시지. 입덧할 때 이것저것 구해다 주느라 과로 걸렸던 적도 있다잖아.”
“그래도 형부가 화내면 그 큰언니도 수그러드니, 서로 짝을 잘 만난 건 확실하지. 그건 그렇고, 정통 드래곤식이네? 첫 생일에 명명식을 가지다니.”
“매형이 바른생활 사나이잖아. 별 일 없는 이상에는 율법을 지키지.”
그들의 형제는 모두 8남매다. 그 중 맨 위의 둘은 양녀이고, 나머지가 피를 이은 혈육이지만, 그런 것에 구분 없이 자라왔다.
그 중 첫째는 300년 전에 400년 동안의 연애기간을 거쳐 골드 드래곤과 결혼해 작년에 해츨링을 순산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그 아이의 첫 생일을 앞두고 돌잔치와 더불어 아이의 이름을 짓기로 했으니 여섯 형제 중 맏이인 라르딘이 알아서 다른 동생들을 데려 오라는 게 편지의 내용이었다.
라르딘의 행적이 제일 확실하고, 고정된 주거지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률킨은 상회의 일 때문에 수시로 대륙 전역을 돌아다녔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모험가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 남매 중 다섯째가 한 곳에서 살며 일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시키기에는 서열이 너무 낮았다. 결국 총대를 멜 사람은 라르딘 밖에 없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다들 얼굴 좀 봐야겠어. 작년에 조카 태어날 때 알만 보고서 되돌아왔는데, 이번엔 얼굴을 보겠군.”
“그런데 알에서 나온 게 아기라지? 해츨링이 아니라. 그런데 드래곤으로 취급해주네? 혼혈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우리도 사실 혼혈이잖아. 니에라와 시크린 같은 완전 혼혈은 아니지만. 편지에도 쓰여 있지만, 많은 논란과 여러 검사 끝에 우리 조카는 드래곤이라고 판명이 났다고 하잖아. 골드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의 혼혈 드래곤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신경 쓰이지만. 인간 모양이야 둘째 치지. 우리도 그랬으니까. 문제는 성격이야.”
“음. 큰언니의 성격과 형부의 성격을 반반 물려받으면….”
이률킨은 조심스레 생각의 재료를 꺼내놓았고, 라르딘은 차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둘의 성격, 섞일 수나 있는 거야?”
“…역시 안 되겠지?”
“이중인격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해. 그러니 기왕이면 형부 성격을 물려받았으면 좋겠어.”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 편이 좋겠지?”
라르딘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큰누나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한명 더 생긴다면, 그때부터 세계는 존립의 위기에 처하는 것과도 같았다.
“아무튼,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애들 데리고 가봐야겠네. 스웰텐이야 어디서 일하는지 뻔한 거라 상관은 없는데, 문제는 체리랑스야.”
“뭐… 니에라와 시크린은 어디선가 사고를 치게 되어있으니 그 소식만 들으면 될 테니까. 정말이지, 우리 속 깊은 막내님은 어디 계신지 모르겠네. 작년에 만나지 않았었나?”
“일주일 기다렸는데도 안 오더라. 나중에 소식 들어보니 9일째 도착했대. 그것도 소식 듣고 온 게 아니라 필요한 물건 있어서.”
“체리랑스 답다.”
평소에 워낙 과묵한데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막내 체리랑스는 현재 독립 후 지속적으로 실종 중이었다. 레어에 없는 걸로 봐서는 돌아다니기는 하는 중인 것 같은데, 행방을 알 수 없어 오늘처럼 소식을 전하기도 어려웠다.
마법으로 전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드래곤 특유의 마법저항 때문에 직접적으로 전해주기가 어렵다. 그래서 주로 마법 물품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지만, 체리랑스는 그마저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이률킨은 주먹을 꼭 쥐며 다짐했다.
“이번 기회에, 꼭 메시지 스톤이라도 쥐어줘야겠어.”
“제발 그래라. 버리기 귀찮아서라도 들고 다닐 걸. 상회 운영은 어때?”
라르딘은 온 목적도 끝냈으니 가족 간의 일상적인 대화로 주제를 돌렸다.
“이켈라인 상회 소식이야 늘 들리잖아? 그대로야. 일단 시장점유율 49%를 목적으로 상회 성장을 가속화 하고 있는 중이지. 그보다도 오빠 소식이 더 자주 들리는데? 안츠 교수님. 지금은 이렇게 교수 행세하고 계시는데, 진짜 목적은 무엇이신지요?”
“글쎄. 지금은 단지 공부하고 싶은 걸 공부하면서 정리하고 있을 뿐이야. 아, 맞아. 이번에 내 상대를 찾은 것 같아.”
“어머, 정말? 누구야?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이률킨은 바짝 흥분해서 몸을 당겼다. 냉정하고 침착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켈라인 회장의 실상은 이런 가십거리에 열광하는 보통의 처녀였던 것이다.
“제국 2황녀. 알고 있지?”
“미스테리아? 확실히 학자의 짝으로 어울리네. 권력에서 동떨어져 있으니 그렇게 골치 아픈 일도 없을 테고. 나이도 적당하네. 겉모습과는 다르게 의외로 여린 면도 있는 것 같았어.”
“나도 알아. 치기어린 면이 있더라고. 귀여워 보였거든.”
라르딘은 씨익 웃었다. 드래곤이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다른 종족에 녹아들어 그 행동과 습성대로 사는 것, 이른바 유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유희에서 자신의 아내로 미스테리아를 맞아들일 결심을 한 것이다.
이률킨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오빠. 아무리 유희라고 해도… 알고 있지?”
“물론이야. 가지고 논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진심으로 대하라는 아버지의 말씀, 잊지 않았어.”
그들의 아버지인 라이니시스는 독립하는 자식들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유희를 할 때 다른 종족들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진실 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생물이든 그 목숨의 무게는 결코 다르지 않다면서, 그것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 그 당부였다. 평소에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그들은 그 점을 단단히 숙지하고서 지내는 중이었다.
“오빠가 하는 일이니, 어련하겠지. 그건 그렇고, 행방이 불문명한 셋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일단 너희 정보부를 사용해봐. 니에라와 시크린은 분명 어디선가 사고를 치고 있을 테니까. 체리랑스는… 신의 뜻에 달렸지만.”
“알았어. 기왕이면 빨리 사고를 쳤으면 싶은데….”
본인들이 들으면 억울해하겠지만, 그 둘은 어서 빨리 여섯 남매의 셋째와 넷째가 평소와 같이 사고를 치길 간절히 바랐다.
같은 시각, 제국 남쪽의 ‘비나사’ 왕국에 있는 ‘아도라 산맥’에서는 두 사람의 재채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취!”
“에취!”
붉은 머리의 남자와 검은 머리의 여자는 동시에 재채기를 하고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지적당한다면 격렬하게 거부하겠지만, 너무나도 닮은 두 남녀는 동시에 같은 말을 외쳤다.
“방금 내 욕했지?!”
“방금 내 욕했지?!”
그렇게 잠시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린 두 남녀는 여섯 남매 중 셋째와 넷째인 니에라와 시크린이었다. 여자가 니에라고 남자가 시크린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싸잡아 욕한 것 같아.”
“흠. 싸잡을 것이 있나? 우리가 대체 닮은 점이 어디 있다고 말이야.”
그들을 아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기막혀했을 말이겠지만, 그들은 진정 서로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로 닯은 꼴 남매였다. 사사건건 대립하는 성격도 그렇고, 서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마법으로 머리색을 바꿨지만, 원래 그들은 앞쪽은 붉은색이고 그 뒤가 검은색인 특이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모양부터 닮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 나머지 머리 모양을 다르게 하는 것으로 공통점을 없앴지만, 그것을 위해서 한 같은 색을 두고 싸웠기도 했었다.
외모도 많이 닮아있었다. 얼굴의 형태는 많이 다르지만, 이목구비는 대체적으로 닮아있는 편이라서 어딜 가도 남매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진짜 서로를 질색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한다면 같이 여행도 하지 않을 것이며, 성룡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충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부모나 손윗형제는 단지 쑥스럽기 때문에 서로를 거부하는 체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워낙 닮아있기에 티격태격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쯤 오는 거야?”
“음…. 5분 정도 기다리면 선발대가 이 앞을 지나갈 것 같아.”
“그거 신나게 두들기면 되는 거지?”
“의뢰주가 그랬잖아. 능력껏 하라고.”
니에라는 정령이 전해주는 정보를 들으며 한가하게 대답했다.
현재 그들은 용병으로서 고용되어 일하는 중이었다. 국가 사이의 분쟁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고, 국가 내부의 분쟁도 종종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용병이 쓰이는 건 흔한 일이었고, 그들도 그런 쪽으로 해서 고용된 용병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기에 전적으로 고용주가 이득을 보는 일이었다. 그들이 지닌 힘에 비하자면 고용비용으로는 턱도 없는 돈으로 고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의 힘 조절을 하고 있다고 해도, 인간 이상의 실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특급 용병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특급이라는 이름이 붙는 용병답게, 오늘은 300명 규모의 군대를 둘이서 상대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의뢰였다.
“다 죽이지 않고 가능할까?”
“전투 불능으로만 만들어도 되잖아. 재미로 하는 일인데, 사람이 죽으면 그것도 좀 마음 불편하지 않겠어? 간단하게 마법 몇 개만 써도 300명 정도 패퇴시키는 것도 사실 어렵지 않지.”
“그런데 의뢰주의 표정은 그걸 믿는 표정이 아니었는데? 불가능을 전제에 깔고서 이용하려는 속셈 같았어.”
그들을 고용한 사람은 ‘부사나 이간’ 후작으로, ‘칸타리나 탄틴’ 후작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광산을 사이에 둔 영토분쟁으로 시작된 그 둘의 싸움은 현재 전면전의 양상으로 치달아서, 나흘 전에 탄틴 후작의 토벌대가 출발했었다.
이간 후작도 많은 기사와 병사를 준비하면서 그와 동시에 용병을 고용해 탄틴 후작의 심기를 어지럽힐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전면전이 벌어지면 서로가 큰 피해를 입기 때문에 특급용병을 고용해 선발대를 박살내는 것으로 무력의 차이를 보여 쉽게 협상을 이끌려는 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고용된 특급용병이 니에라와 시크린이었지만, 단 둘로 300명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니에라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훗. 괜찮아. 우리는 당당하게 의뢰를 완수하고서 돌아가 나머지 보수를 받으면 되는 거야. 불가능하다는 거야 그쪽 생각이지. 이용한다고 해도, 어차피 용병이라는 직업이 이용해 달라고 있는 직업이잖아? 직업정신에 맞게 대접해주면 좋지.”
“그렇긴 하지. 그건 그렇고, 그 노인네는 무슨 땅 욕심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 고작해야 철광 하나 가지고 되게 싸우잖아? 아버지 영토에 있는 광산 꼬투리만큼이나 광물이 있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엘 타칸리스 산맥이 워낙에 자원의 보고니까 그렇지. 그리고 인간들이 얻어봤자 그들 기술로는 드워프만큼 잘 캐낼 수도 없을 걸? 드워프들이니까 마법 광물이나 마정석을 그만큼 캐낼 수 있는 거야.”
“그래도 철광 하나만 보고 일을 벌인다는 건 이해할 수 없어. 철광으로 인해서 생기는 지형적 이익도 있겠지만, 표면으로 내세우는 건 철광이잖아? 서로가 자원이 부족해서 그러는 척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하여튼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어.”
“그러려니 하렴. 그네들이나 그렇게 살라고. 어차피 우리랑 관계있는 건 그들이 우릴 고용할 돈이 있느냐 하는 거야.”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한다. 용병은 침묵의 미덕을 아는 친구만 따른다. 그 정도야 알고 있어. 아, 저기 온다. 깃발 저거 맞지?”
그들의 100야드 앞에서 일단의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산에 뚫려있는 널찍한 도로를 따라 위풍당당하게 지나가는 300의 무리였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의 색을 알아보는 게 고작이겠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볼 수 있었다.
니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누가 앞을 맡을까? 나? 너?”
“누나가 앞 해. 내가 뒤 할게.”
“그럼 간다!”
“좋아!”
두 남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각자 탄틴 후작의 선발대의 앞과 뒤로 향했다. 의뢰를 완수할 시간이었다.
니에라와 시크린이 원래 모습으로 덤비지 않는 것에 감사해도 모자라겠지만, 그런 걸 알리가 없는 사람들은 단 두 명의 사람에게 군대가 작살나는 걸 보면서 망연자실해하고 있었다.
“하압!”
콰앙!
니에라가 한 번 손짓할 때마다 정령이 움직이며 땅을 뒤집고 무시무시한 바람을 불게 했다. 바람에 맞아 기절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기막힌 기절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고작 이거뿐이냐! 더 덤비란 말이다!”
시크린이 그레이트 소드를 들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옆면에 맞은 사람들은 훨훨 날다 떨어졌다. 이건 숫제 짚단을 후려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단 두 명에게 포위를 당했다는 사실에, 300명 일동은 기막힘을 뛰어넘어 억울함마저 느꼈다. 그들은 후작의 사병으로서 이름난 자들이었고, 평소 혹독한 훈련을 거치면서 단련된 정예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늘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2인조에게 박살이 나니 황당하기보다 억울했다.
“전열을 가다듬고 거리를 벌려라! 소총수는 사격 견제를!”
“초, 총알을 모두 튕겨내고 있습니다!”
“뭐라고?!”
처음에는 방탄조끼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날아오는 총알을 상대로 칼을 휘둘러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덤벼서 막아라! 계속해서 덤벼서 지치게 만들, 컥!”
소대장들은 열심히 부하들을 독려하다가 제일 먼저 맞아 떨어지곤 했다. 그들의 목소리로 사기를 증진시키던 병사들은 순식간에 사기가 격감하는 걸 느꼈다.
니에라와 시크린은 서로가 다르다고 여겼지만, 전투 방식은 똑같았다. 제일 먼저 지휘관처럼 보이는 고급장교를 노려 명령체계를 흐트러트리고,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부하나 동료를 격려한는 이들을 잠재운 뒤에 도망치는 자들을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엄청난 실력의 차이가 눈에 훤한데다가 위에서부터 명령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격려조차 받지 못하게 된 병사들은 도망치는 길마저 막혔다는 것에 절망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항복하라는 말이라도 들으면 무기를 높고 양 손을 높이 들어 올리겠지만, 니에라와 시크린은 현재 신나게 깽판치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 두 남매는 서로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300명을 상대로 열심히 쑥을 재배하던 걸 중단했다. 쑥밭이 된 싸움터를 보며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만하면 되겠지?”
“응. 충분할 거야.”
시크린은 신음을 기절하거나 신음을 흘리며 여기저기 쓰러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서있는 사람은 채 30명도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물러날 정도로 실력을 보여줬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간 후작으로부터! 실력 차이를 알았으면 냉큼 돌아가라! 불쌍하게 여겨 죽이지는 않았다! 허나 다음에 볼 때는 오늘과 같지 않으리라!”
“휘이익! 멋지다! 내 동생!”
니에라는 휘파람을 불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한 사람당 백 명을 족히 넘는 인원을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기막혀하고 있을 때, 부러진 팔을 붙잡고 신음을 흘리던 장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 당신들의 이름은…?”
“난 니에라. 이쪽은 시크린. 이간 후작에게 고용된 특급 용병! 기억해 두셨다가 비싼 값으로 부르시길 바랍니다. 후훗!”
“요, 용병이라고…? 크윽…!”
장교는 너무나 기막힌 나머지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 비단 그 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도 고작 두 명의 용병에게 깨진 것을 생각하니 저 장교처럼 기절하고 싶었다.
그렇게 기막혀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니에라와 시크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떠나갔다. 일을 다 끝마쳤으니 보수를 받아야 할 때였다.
이간 후작은 두 남매에 의해 선발대가 박살난 곳에서부터 한나절 거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특급 용병이라고 해도 정면에서 300명을 생각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적어도 산악지형을 이용한 장기 유격전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하고 그들이 시간을 벌 무렵에 진지를 구축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나, 떠나간 지 하루도 되지 않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두 특급 용병이 거둬온 실적을 보니 입이 안 다물어질 지경이었다.
니에라가 의기양양하게 내민 것은 확실히 선발대의 선두가 들고 있을 탄틴 후작의 깃발과 대장이 가지고 있던 탄틴 가문의 인장인 것이다.
시크린이 간략하게 보고했다.
“300명 중에서 9할을 전투 불능의 부상자로 만들었습니다. 설마하니 남은 사람들이 달려오거나, 응급처치를 하고 이곳으로 달려들 것이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겠군요.”
“그, 그게 정말이냐? 세, 세상에… 어떻게…?”
이간 후작의 경악한 표정을 보며 시크린은 니에라와 똑같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흰 특급용병이니까요.”
세상 특급용병이 모두 그렇다면, 세상은 이미 그들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장난스레 한 대답이었지만, 이간 후작은 다른 특급용병들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상을 뒤져도 찾기 어려운 특급용병이 둘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만약 자신의 휘하에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한 이간 후작은 순간 니에라와 시크린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비싸기만 한 일회용 소모품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세상에 또 없을 중요한 인재들이었다.
니에라는 후작이 자신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 얼른 그의 정신을 현실로 돌렸다.
“으흠! 그만 보수를 받고 싶은데요, 후작님?”
“아?! 아아, 그, 그렇군. 보수. 그래. 보수를 줘야지. 아무렴…. 이, 이쪽으로 오시게.”
어느새 후작의 말투는 하대에서 온대로 바뀌어 있었다. 눈앞의 두 용병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진지 정도는 간단하게 뭉개버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인원의 숫자는 4000이었다. 둘이서 300을 상대하고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이는 걸 보면 적어도 둘이서 능히 1000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 300도 죽인 것이 아니라 전투불능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제압을 한다는 건 죽이는 것보다 거의 두 배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단순계산으로도 2000을 모두 죽여 없애는 건 단순한 시간문제였다. 말 그대로 일기당천의 용병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어떤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실력만으로 군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간 후작은 얼른 그들을 자신의 막사로 친히 불러들였다.
“자, 이제 보수네. 확인해 보게나.”
니에라는 후작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았다. 성인 남자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꽤나 묵직했다. 열어보니 보수보다 훨씬 많은 보석이 가득했다. 군자금의 일부로 가져온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너무 많은데요?”
“그러네. 우리가 받을 돈은 이거 절반이면 충분하지 않나?”
남매는 동시에 이간 후작을 빤히 바라보았고, 후작은 사람 좋게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받아들 두게. 다음 일을 위한 선금을 포함한 것일세.”
아직 이들이 다른 곳과 계약을 하지 않았으니 미리 선금을 걸어서 이들을 자신의 쪽에 묶어두는 편이 좋았기에 그는 일부러 많은 돈을 쥐어준 것이다.
그러나 니에라와 시크린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니에라가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반은 돌려드릴게요. 저희는 다른 곳과 계약이 되어있거든요. 아쉽게도 한 발 늦으셨네요.”
그녀가 이야기를 할 때 시크린이 보석 중에 반을 추려내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반이 든 주머니를 이간 후작에게 건네주었다.
이간 후작은 당황했다. 대체 언제 의뢰를 받았다는 것인가? 분명 이들은 이제 막 자신의 의뢰를 끝낸 참이었다. 한데 대체 언제 계약을 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약이라고? 언제?”
“아, 임무를 완수한 직후에요. 보수를 받고 그쪽의 일을 하기로 했어요.”
이간 후작은 시크린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아들고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되도록이면 자신의 곁에 두고 계속해서 부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니에라는 계산이 모두 끝나자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후작님.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그래….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아쉽구만. 허허….”
그래도 나중에 보자는 말은 훗날 이들에게 다시 일을 맡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그걸 기대하기로 했다.
니에라와 시크린이 막사를 나가고, 보석 주머니를 간추리던 그는 갑자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선발대와 조우하기로 한 장소와 이곳 사이에는 어떤 인가도 없다. 곧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통행을 금지해서 지나가는 여행자를 만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의뢰를 받았다는 것인가?
이간 후작은 서둘러 막사를 나왔다. 아직 남매는 그의 시야에 있었다.
“이, 이보게나! 누구에게 의뢰를 받았다는 건가?”
니아레와 시크린은 한참 돈 계산을 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이내 니에라가 산뜻한 표정으로 말했다.
“탄틴 후작님이요. 그러니 ‘나중에’ 뵈요, 후작님.”
이간 후작은 뜨악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니에라가 말한 나중은 좀 다른 의미의 나중이었던 것이다. 탄틴 후작이 무슨 의뢰를 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현재의 이 분쟁에 관련된 일일 것이다. 일기당천인 저 남매가 탄틴의 세력에 가담한다면 자신의 패배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막아야 한다. 저들을 이대로 가게 해선 안 된다.
그는 얼른 주변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이봐라! 다들 저들을 막아라! 절대로 가게 해선 안된다!”
“예! 후작님!”
제일 먼저 움직인 이들은 후작의 호위를 하던 경비병들이었고, 다른 이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후작의 목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근처에서 노닥거리던 병사들도 의아해하면서 몰려들었고, 순식간에 그 주변으로 100명 정도의 병사와 장교가 모여들었다.
“어머? 후작님. 지금 저희를 막으시는 거예요?”
“그렇다! 너, 너희가 탄틴 후작에게 가게 둘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흰 의뢰를 할 수 없게 되는 걸요?”
“그러니까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니에라와 시크린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시크린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 상황을 간단하게 정의했다.
“간단하게 말해, 저희가 돈 버는 걸 방해하시겠다 이거군요?”
“그렇다!”
어느새 검까지 뽑아든 이간 후작이었다. 니에라는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의 병사들은 주욱 둘러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만 두시는 편이 좋아요. 그냥 보내주시죠?”
“그럴 수는 없다! 너희는 절대 이 진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보내주시지 않겠어요?”
니에라는 표정을 굳혔다. 용병이 의뢰를 하겠다는 걸 방해하면 어쩔 수 없이 실력행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전 의뢰인이었던지라, 그녀는 그 의리를 봐서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간 후작은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절대로 저들은 탄틴 후작에게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의 목소리가 노을 지는 하늘로 흩어졌고, 시크린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기회를 줘도 내팽개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누나. 할까?”
“후우…. 그러자.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패야지, 별 수 있니?”
니에라와 시크린의 눈이 번득였다.
이간 후작의 사병이 궤멸하기까지는 6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식을 전해들은 라르딘과 이률킨은 역시나 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니에라와 시크린은 또다시 동시에 재채기를 하게 되지만, 그건 며칠 뒤의 이야기.
라르딘이 이률킨을 찾았을 무렵, 여섯 남매 중에서 다섯째인 스웰텐은 열심히 일을 하는 중이었다. 땀 흘려 버는 동전 한 닢의 가치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웰텐이었다.
그가 하는 일은 바로 대장장이. 야장의 명가인 스미스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촉망받는 야장의 길을 걷고 있었다.
타앙! 깡! 타앙! 깡!
스미스 가문은 질 좋은 쇠로 명품을 만들어내는 유명한 가문이다. 주조에도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총기류 설계의 명인 ‘웨슨’과 합작하여 만든 스미스&웨슨 시리즈는 총잡이들이 최고로 치는 명품이기도 하다.
요새는 총기류가 더 돈이 잘 되기 때문에 많은 대장장이들이 주조술에 눈을 돌리지만, 스웰텐은 오직 한길만을 고집하며 철을 두드리기를 계속했다.
스웰텐이 만드는 물건은 주로 병기류였다.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는 힘으로 철을 단련하여 만드는 칼이나 창은 소문난 명품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지금은 제자를 받아들여 그 제자를 가리키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소문난 명장이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말에 많은 이들이 서운해 하고 있었지만, 장인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다.
“작은 나이프부터 만들 수 있어야 큰 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삿된 마음을 담지 말고 정심하게 쇠를 만져라.”
“예. 스승님.”
스웰텐의 제자인 ‘아냐타 낙스’는 고운 목소리로 스승의 충고를 귀담아들었다.
아냐타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녀의 결정을 안타까워했을 만큼, 그녀는 대장간에서 쇠를 만질 그런 용모가 아니었다. 어딘가 극단에서 주연 배우를 받아 프리마돈나가 되어도 손색이 없는 미모였다. 허나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밀고 갔다. 애초에 고아였던 그녀가 자신의 길을 가는 건 쉬웠다.
데릴사위긴 했지만, 스미스 가문에서 크게 인정받던 스웰텐이 힘든 일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아이를 제자로 택했을 때도 큰 논란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힘이 좋은 아이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 대장장이다. 그런데 연약한 여자아이가 대체 어떻게 야장업을 견딜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스웰텐은 그 모든 논란에 대해서 그저 애매한 웃음으로 답할 뿐이었다. 혹자는 그가 어린 계집의 미모에 혹해서 그리 되었다는 엄한 소문을 흘리기도 하였으니, 어지간한 반대가 아니었으리라.
그로부터 3년, 열둘의 소녀가 열다섯이 되고, 대장장이 망치를 잡은 지 6개월 되던 때에 만들어낸 첫 작품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겉보기에는 특이한 점이 없고, 오히려 초보자의 손매가 엿보이는 조잡한 나이프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날은 곧게 서있었다. 겉보기는 투박해도 손에 잡았을 때 느껴지는 무게중심과 물건을 자를 때의 느껴지는 예리함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 할 만 했다.
그 첫 작품에는 스웰텐이 친히 ‘낙스’라는 이름을 붙여서 자신이 가졌다. 어지간한 작품이 아니고서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스웰텐이 초보자의 처녀작을 가졌다는 소문과 함께 아냐타의 솜씨에 대한 소문도 널리 퍼졌다.
그 뒤로부터 아냐타는 속속 새로운 나이프를 만들어내었고, 그것이 점차 밖으로 흘러나갈 수록 명인의 제자 역시 명인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스웰텐이 왜 망치를 놓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지 알게 되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걸 알아보고 키워줄 스승이 있을 때야 빛을 발하게 된다. 아냐타와 스웰텐이 바로 그런 관계인 것이다.
스웰텐은 요즘 제자가 망치를 두들길 때면 자신에게 들어온 칼의 날을 갈거나 새로 벼르는 소일거리를 하고 있다. 스미스 가문에서 일한 지 30년이 넘은 그는 이 정도의 휴식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새로 얻은 제자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아냐타는 마치 대장장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재목 같았다. 흔한 말로 ‘쇠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어디를 어떻게 치며, 얼마나 힘을 주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그가 드워프의 마을에서 배울 때도 몇 번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평균 능력은 다른 종족에 비해 보잘것없는 인간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역사를 인간이 만들어간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모든 종족을 초월해 신에 접근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것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냐타는 다른 건 몰라도 대장장이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감각을 타고났다.
처음에 그는 장신구 만드는 법이나 가르쳐서 섬세한 공예품을 만들게끔 하려고 가르쳤지만, 점점 보면 볼수록 그녀는 공예품과 거리가 멀다는 걸 알았다. 쇠를 두들길 때의 눈빛이나, 담금질 할 때의 표정을 살펴보면 아냐타는 천부적인 도검 제작자였다.
그는 드래곤이기 때문에 인간이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훌륭한 물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노력만 한다면 드워프의 보통 대장장이보다 뛰어난 걸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허나, 아냐타가 충분히 배워 망치를 휘두른다면 신이나 가능할까 싶은 절세의 무기가 탄생할 것이다.
스웰텐은 바로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최고의 대장장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길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뜻 깊고 보람 있는 일인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손으로 키우기 시작했으니 올바른 대장장이의 사상을 주입시켜 정심한 마음으로 만든 지고의 무구를 직접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앞으로 3년. 그때까지 그녀의 기초를 닦아주고 함께 물건을 만들어가면서 진짜배기 대장장이로 기를 생각을 하니 앞으로가 기대되는 스웰텐이었다. 그 기대감 때문에 가슴이 설레다 못해 떨리기까지 하여 물건을 만들 때 잡생각이 끼어들기 때문에 제작을 중단했던 것이다.
‘하긴, 저 용모도 아깝기는 하지.’
이제 막 사춘기를 지나는 소녀의 얼굴에는 검댕이 묻어 있었고, 팔은 또래 소녀들보다도 좀 더 굵었다. 잡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언제나 짧게 친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모는 숨길 수 없었다. 불빛을 쬐며 더더욱 빛나는 것 같은 얼굴과, 코끝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은 그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미래를 생각하던 스웰텐은, 아무래도 자기 제자가 솜씨보다도 얼굴이 더 잘 알려지게 될까 걱정되었다. 다른 대장장이들과 일을 하기 시작할 때는 가면이라도 만들어서 씌워줘야 다른 대장장이들의 작업에 지장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숏소드의 날을 갈은 뒤 칼집에 넣은 스웰텐은 조용히 제자의 뒤로 다가가 한참 형체가 만들어지는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까앙! 캉! 까앙! 캉!
한 번 망치가 두들겨질 때마다 번뜩이는 불꽃이 튀었고, 새빨갛게 달구어진 쇠는 점차 모습을 바꿔가고 있었다. 제법 틀을 잡은 나이프를 보니 또 신력이 한 단계 올라간 것 같았다.
그렇게 흐뭇해하던 스웰텐은 한쪽 눈꼬리를 추켜올렸다. 제자의 작품에서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망치를 쥔 손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까앙! 턱!
“에…?”
아냐타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바라본 그곳에는 검은 두건을 쓴 스승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웰텐은 말했다.
“무얼 하고 있었느냐?”
“예에…?”
“무얼 하고 있었냐고 묻질 않느냐!”
“나, 나이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만?”
아냐타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승의 얼굴을 보건데 자신이 잘못한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대답에 스웰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제자의 왼손에서 달구어진 쇳덩이를 잡고 있던 집게를 빼앗아 화로 속에 쇳덩이를 던져버렸다.
“아앗! 스, 스승님?!”
“나이프? 저걸로 무엇을 하겠다는 게냐?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삿된 마음을 담지 말라고!”
“저, 저….”
아냐타는 우물거렸다. 자신의 실력이 슬슬 인정받기로 하거니와, 어제는 나이프를 사간 고객에게서 칭찬도 들어서 마음이 많이 들떠있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생각을 스승이 단련되고 있던 쇠에서 엿보았던 것이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느냐? 피조물은 창조주의 마음이 드러난다고. 헛된 공명심과 허영심으로 만든 나이프가 참 잘도 제 몫을 하겠구나.”
“죄송합니다, 스승님!”
아냐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다른 건 몰라도 혼낼 때만큼은 엄격한 스웰텐이었다. 잘못은 그때그때 바로잡지 않으면 영영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이 그가 가진 생각이었고, 그렇게 배워왔다. 물론 아냐타가 벌써부터 승승장구하는 것이 스승으로서 대견하기도 하지만, 아직 아냐타는 자심의 마음을 다스릴 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무기를 만들면 피해보는 것은 사용자다.
“오늘은 이만 하자. 혼나고 난 다음에 쇠를 만진다고 해도 곤란한 일이지. 이리 와서 같이 날이나 갈자꾸나. 그러면서 자신을 갈아라.”
“예. 스승님.”
아냐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스승은 언제나 그녀가 크게 될 재목이라고 했지만 다듬지 않으면 통나무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듬기는 평생에 걸쳐 해도 모자라다고 했다.
남이 다듬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다듬기였다. 자만심이나 공명심, 독선이 섞여 들어가면 당연히 올바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스승은 평정심으로 쇠를 두들기라고 했었다. 무기를 잡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무기를 써야지, 대장장이의 사심에 이끌리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자신이 스승을 매우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조차 미처 깨닫지 못한 단점을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지적해내는 사람은 정말이지 드물기 때문이다. 명인 중의 명인이라 불리는 스웰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회전 숫돌에 이가 빠진 단검을 가져다 대었다. 세심하게 무기를 복구하는 것에만 마음을 기울이며 마음속의 사심을 없애고자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녀가 일할 날이 아니었나보다. 그녀가 숫돌에 단검을 대자마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오늘도 엄하게 가르치시는군요.”
“아, 여보.”
“사모님. 안녕하셨습니까?”
“어머나, 아냐타. 언니라고 부르랬잖니. 사모님이 뭐니.”
스웰텐의 부인인 ‘베네디트 스미스’는 피크니 바구니를 든 채 아직도 열기가 후끈한 대장간 안으로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 주로 드나든 그녀였기에 한 여름에 숨 막히는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일은 어쩌고?”
“당신은 저보다도 일을 걱정하시나요? 섭섭한데요? 샌드위치 주지 말까보다.”
“하핫! 건강해 보이니까 걱정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소. 그건 그렇고, 나 줄려고 싸 온거요?”
“흥! 몰라요. 아냐타하고만 먹을 거예요. 아냐타. 같이 간식 먹자. 오늘도 따끔하게 혼났구나? 매정한 스승 따위 내버려두고 이리오렴.”
아냐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스웰텐의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때는 대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제자의 딜레마라 할 수 있었다.
스웰텐은 제자가 곤란하지 않게끔 자리에서 일어나 베네디트에게 말했다.
“그렇게 애 가지고 놀지 마시오. 안은 더우니 바깥에서 먹읍시다.”
“그래요. 밀랍 인장이 다 녹아서 형체도 없어지겠네요.”
베네디트는 주머니에서 봉투 세 개를 꺼내었다. 각각 갈색, 파란색, 붉은색 밀랍으로 인장이 찍힌 봉투였다. 스웰텐은 바깥으로 나가며 봉투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하나는 렌디너스 왕실 직통이었고, 하나는 그의 아들 사반트가 공군 사관학교에서 보낸 안부 편지, 또 하나는 이켈라인 상회를 통해 날아온 것이었다.
인장을 본 스웰텐은 살짝 웃음을 띄웠다. 발신자 측은 이켈라인 상회였지만, 인장은 개인의 인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조만간 외출해야 할 일이 생기겠군.”
“그래요? 아무래도 전 왕실에는 들어가기 싫어요. 죄송하지만, 당신 혼자 다녀오세요.”
베네디트는 그의 말이 왕실에서 온 편지 때문인 줄로 지레짐작했고, 아냐타도 그런가보다 싶었다. 워낙에 유명인사인 스웰텐은 종종 왕실 야장에게 불려가 가르침을 주고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시간동안 익숙하지도 않은 귀부인들 틈바구니에 있어야 할 베네디트는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여겼다.
“당장은 아닐 테니 그렇게 질색하지 마시구려. 지금은 그저 그늘에 앉아서 간식이나 듭시다. 때마침 출출했는데 고맙소.”
“흥! 누가 당신 줄 거랬어요? 아냐타랑 둘이서만 먹을 거라구요. 그렇지?”
베네디트의 시선을 받게 된 아냐타는 다시금 상황이 곤란해졌다. 이래서 제자란 입장은 언제나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던 스웰텐은 문득 자신의 여동생이 어디 있을지 궁금해졌다. 성인식 이후 3번 밖에 보지 못했고, 형제들 중에서 제일 많이 본 사람이 다섯 번일 정도로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꼭 제때 와야 할 텐데….’
형제 대부분의 걱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문제의 막내, 체리랑스 루 라이엔츠는 현재 다른 드래곤을 곤란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이거 줘요.”
“그러니까 라이엔츠 양. 대뜸 와서 달라니,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줘요.”
“저기, 그러니까….”
블루 드래곤의 일원인 ‘가네타트라 루 아사만트’는 혈족을 사이에서 ‘인형 제작사’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만드는 인형은 말 그대로 유아 취향 인형에서부터 사람 모양의 골렘 혹은 그와 비슷한 것들인데, 이 방면에서는 그의 솜씨를 따라올 혈족이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많은 요청을 받으면서 레어안에서 인형제작에 몰두하는 것이 취미이자 생활이었다.
그러던 도중, 오늘도 인형을 원하는 혈족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평소의 방문자 대부분은 좋은 대가를 주고 그의 인형을 사가는 혈족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는 언제나의 영업용 스마일로 손님을 맞이했다가 그만 표정 그대로 굳어버리는 불상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를 방문한 손님은 그 유명한 레드 드래곤 일족인 라이니시스의 막내딸인 체리랑스였던 것이다. 일명 ‘막무가내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체리랑스 루 라이엔츠의 방문은 그리 달갑지 않은 방문이었다.
체리랑스는 얻고자 하는 물건이 생기면 그 소유주에게 집요하게 요구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제대로 된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강탈하다시피 물건을 취해가는 성격이었다.
하루는 고룡급의 혈족 하나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크게 분노했지만, 결국에는 체리랑스가 원하던 물건을 내어주고는 한숨만 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룡의 힘으로도 그녀의 막무가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작해야 신예인 가네타트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체리랑스는 블랙 드래곤이었다. 집요하기로는 그린 드래곤과 쌍벽을 이루는 일족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아버지인 라이니시스가 레드 드래곤답지 않게 공정하며 예의를 아는 드래곤이고, 그녀의 어머니가 본신이 엘프였다고 해도 그 자식까지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줄 거예요?”
표정을 같다 붙여도 떨어질 것 같은 딱딱한 무표정부터가 대화를 시도할 마음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었다. 어찌어찌 정을 붙여 이야기를 꺼내보려 해도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정이 꽁꽁 얼어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라이엔츠 양. 준다 주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적어도 대가는 지불하셔야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라이엔츠 양이 원하는 건 제가 제일 처음 만든 물건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갑옷을 입히고, 생체 시계를 동결시킨 뒤에 이것저것 기능을 추가해 만든 ‘이모탈 나이트’라고요. 알고 계십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줘요.”
“넉넉하게 잡아서 800년 된 물건입니다. 그걸 그냥 가져가시겠다고요? 골동품 전문점에서도 그런 취급은 안 해줄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기나 합시다. 대체 그걸 왜 원하시는 겁니까?”
“말하면 줄 거예요?”
“…….”
가네타트라는 그만 항복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인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로부터 무뚝뚝함과 막무가내만 모조리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는 잠시 여태까지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던 혈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이내 깨닫는 게 있었다. 그녀의 요청을 거절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걸.
“저기,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싶습니까?”
체리랑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말해주기 싫고요?”
다시 고개 끄덕.
“대가는 지불하실 생각이 없습니까?”
잠시 망설이다가 끄덕.
이건 말 그대로 강탈이었다.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처녀작을 그냥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다른 혈족이 와서 그랬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상대는 여태껏 원하는 물건을 성공률 100%로 강탈한 여성이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했기에 가능했던 걸까? 문득 그것이 궁금해졌던 그는 다시 그것이 두려운 호기심이라는 걸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 방법을 알게 되면 일단 물건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는 결국 결심했다. 어떻게든 대가를 받아내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대가를 내놓으시면 드리겠습니다. 합당한 대가일 때 말이죠.”
“어떤?”
“…스스로 생각하시죠.”
“까다롭네요.”
가네타르라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까다로운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 아닌가? 체리라스의 패턴이 너무나 단순하기에 자신의 행동이 까다롭게 보이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체리랑스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 숨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게 만드는 한숨이라서 가네타트라의 심정이 상당히 복잡했다.
“여기요.”
“…뭡니까?”
“대가.”
체리랑스는 더 이상 무엇 말할게 있냐는 듯 간단명료하게 말했고, 손바닥 위에 올라온 큼지막한 보석 하나를 본 가네타트라는 이러다 상습적인 두통이 생길 것만 같았다. 보석의 크기로 볼 때는 분명 대단한 값어치가 있겠지만, 자신이 만든 이모탈 나이트의 값어치에 비하면 택도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기, 이런 걸로….”
“퍼스널리티 스톤. 베이직.”
“…예?”
“아빠가 만든 거, 부족해요?”
체리랑스의 무심한 말에 가네타트라의 정신이 잠시 멍해졌다. 퍼스널리티 스톤이라면 체리랑스의 아버지인 라이니시스의 발명품으로, 보석에 인격을 담아서 그것을 장착한 어떤 물건이든 자아를 가지게 만드는 놀라운 물건이었다. 아직도 그 제조비법을 공개하지 않아 많은 혈족들이 하나라도 얻기 위해 몸이 달아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가네타트라는 급작스런 두뇌회전을 개시했다. 퍼스널리티 스톤은 라이니시스가 체리랑스에게 주었을 것이고, 소유권이 완전히 이전된 상태에서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것은 결국 이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소리이다. 이것을 연구하기만 하면 같은 걸을 또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사용하면 자신이 만든 인형들이 한층 더 정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한 그는 이모탈 나이트 하나로 얻기에는 좀 비싼 값이 든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에게 이익이었다.
“부족해요?”
“아니아니! 괜찮습니다. 충분합니다. 이런 걸 선뜻 내놓다니, 저 이모탈 나이트가 그렇게도 마음에 드셨습니까?”
체리랑스는 수정 기둥에 양 팔이 묶여 매달려있는 전신갑주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그럼… 왜 저걸 원하시죠?”
가네타트라는 의아해하며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은 흰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녀는 가네타트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만 놀라서 주저앉을 뻔 했다.
체리랑스가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웃는 일이 없을 것 같은 이런 혈족도 웃을 줄 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이내, 그 미소는 환상같이 사라지고, 가네타트라는 다시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무감정한 목소리를 마주했다.
“주세요.”
“예? 아, 네. 드, 드려야죠. 흐음.”
가네타트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수정기둥에 매여 있던 이모탈 나이트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체리랑스의 앞에 나타났다.
겉모습만 보면 평범한 기사와 같았다. 물론 푸른색 전신갑주를 입고 돌아다니는 기사는 보기 드물지만.
바이저 뒤로 보이는 성인 남자의 얼굴은 편하게 잠들어있는 채였다. 가네타트라는 그 등에 손을 짚고는 정신을 집중해 중얼거렸다.
“이 시간 이후부터 가네타트라 루 아사만트의 이모탈 나이트는 체리랑스 루 라이엔츠의 소유가 됨을 선언한다. 이후, 이모탈 나이트는 체리랑스 루 라이엔츠의 힘을 사용하며, 그 권위를 표시하고 그녀의 생명과 함께하리라.”
그렇게 말을 마치자 새 파란 색을 하고 있던 전신 갑주의 색이 검은 색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체리랑스는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힘이 일부 사라진 것 같은 허한 느낌이었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이모탈 나이트도 평생 마나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오늘부터 생명의 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생각 하세요. 사실, 그렇게 지장은 없지만요. 혈족의 1년 치 생명이야 인간들에게는 큰 힘이 되겠지만, 저희에겐 별 영향도 없잖아요?”
“…알겠어요.”
가네타트라는 미리 말해주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체리랑스의 표정이 살짝 찡그러졌던 것이다. 계속 그녀 앞에 있다가는 대가가 축소 지불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얼른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자, 곧 깨어날 테니 이야기 나눠보세요. 아이쿠, 이런 내 정신 좀 봐. 손님께 차 한 잔도 안 내놓다니 말이죠. 조금만 기다리십쇼. 좋은 차가 들어왔거든요.”
얼른 자리를 피하는 가네타트라는 보며, 체리랑스는 3초 정도 시선을 두었을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그녀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모탈 나이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모탈 나이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로로 줄쳐진 바이저 사이로, 언제 봤을지 모르는 빛이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던 그는 자신에게서 뭔가가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의 눈에 제일 처음 들어온 주인의 일부분은 레이스가 달린 치마와 그 위에 걸쳐진 에이프런이었다. 순간 자신이 어느 집 메이드에게 팔린 건가 싶었던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원래 주인과의 느낌은 달랐지만, 분명 새 주인도 드래곤인 것이 분명했다. 그는 계속 고개를 들었다.
보기 좋게 들어간 허리 위로 치마와 같은 색 블라우스가 있었다. 그 위에 꽉 조이는 조끼를 입어 봉긋하게 솟은 가슴을 볼 수 있었다. 다시 그 위로 단정하게 채워진 목단추와 검고 매끄러운 머릿결이 보였다.
계속해서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진 붉은 입술, 오똑한 콧날이 보이며 전체적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매우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이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여성은 부드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안녕.”
“아,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그는 얼른 헬름을 벗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했다. 모습을 보면 어딘가의 메이드 같은 모습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고딕 드레스의 일종이었다. 이번에 자신을 가지게 된 주인은 옷 입는 취향이 유별난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그는 얼른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예의였다.
“소인의 이름은 스티브 맥클레인이라고 하옵니다.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어떤 일이든 성실하게 행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명령해 주십시오.”
체리랑스는 거침없이 명령했다.
“첫 명령. 질문. 왜 이모탈 나이트가 될 생각을 했지?”
“소인에겐 원수가 있었는데, 그것을 갚기에는 제 힘과 시간이 부족하야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치는 대신, 힘을 얻었고 복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 뿐?”
스티브는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감히 함부로 주인의 얼굴을 봤다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내렸다. 그는 말했다.
“또, 또한… 소인에게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시절, 600년 뒤에 살아있다면 만나자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 약속, 중요한 거야?”
“주인님에겐 그렇게… 중요하진 않겠지만, 제가 살아오면서 한 몇 안 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저에겐 중요한 약속입니다.”
스티브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주인에게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없는 것이 이모탈 나이트의 원칙이기도 했다.
“그 약속, 이뤘어?”
“…아직입니다. 게다가 이루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인간이 600년을 살리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하프엘프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만… 이미 예전에 포기했습니다.”
스티브는 어렸을 때, 유괴범에게 끌려가다 되레 그들을 때려눕히는 한 소녀와 만났었다. 그 소녀를 돕기 위해서 유괴범들에게 덤볐지만, 되레 자신이 수녀에게 구조를 받았던 것이다.
그 때, 그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는 살아있다면 600년 뒤에 만나자는 말과 함께 손수건과 계피맛 사탕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이후, 틈날 때마다 그 소녀를 찾아봤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약속은 열 가지가 채 되지 않는다. 워낙 사람을 믿지 못하며 살았었고, 험악한 시간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엉겁결에 받아버린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리랑스는 생긋 웃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한 사람을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뭔가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 올라왔다. 마음이 충족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좋아. 괜찮아.”
“예?”
스티브가 뜻 모를 체리랑스의 말에 의아해할 때, 한쪽에서 다기가 실린 카트를 끌고 가네타트라가 다가왔다.
“아, 라이엔츠 양.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물건은 어떻습니까?”
“만족했어요. 고마워요.”
“아뇨. 뭘요. 그나저나 천하에 체리랑스 루 라이엔츠 양이 미소를 보일 정도의 물건이라니, 제가 오히려 손해를 본 것 같군요. 하하핫! 자, 그건 그렇고. 죄송하지만 퍼스널리티 스톤의 감정을 위해 아버님께 연락을 드렸었습니다. 일단 진품임이 확인 되었고요, 아버님께서 말씀을 좀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체리랑스?’
스티브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와 어릴 적에 약속을 했던 여자아이의 이름은 체리랑스 킷 라이엔츠였다. 오랜 시간의 동결 때문에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다시 주인을 보니 그 어린 시절의 소녀와 쏙 빼닮았다.
‘맙소사, 드래곤?!’
잘해야 하프엘프라고 생각하던 그는 체리랑스가 드래곤일 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니 600년이란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스티브가 그렇게 경악하고 있을 때, 체리랑스는 다시 무표정이 되어 가네타트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제 첫째언니에 관련된 일인가요?”
“아, 예. 그렇습니다. 아, 참! 축하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이거, 라이엔츠 양의 가족 분들이 참 많은 경사를 일으켜 주시니 혈족의 홍복입니다. 하핫!”
“고마워요. 덕분에 그냥 지나갈 뻔 했던 걸 떠올릴 수 있었네요.”
“곧바로 가시렵니까? 수리와 복구에 대한 주의사항을 일러드려야 하는데요. 이게 좀 복잡합니다만.”
만들어진 과정이 특이하니만큼, 수리와 복구에도 특별함을 요구하는 것이 이모탈 나이트였다. 체리랑스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메뉴얼로 만들어서 형부한테 보내주세요. 도착 할 때까지는 거기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어이, 스티브! 새 주인 잘 모셔라. 네가 마음에 드신가보다.”
“예, 예엣!”
스티브는 예전 주인에게 고개를 숙였고, 체리랑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해. 앞으로 잘 부탁해.”
“옛!”
스티브는 운명이라는 걸 믿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강한 운명을 느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그런 운명과도 같은 느낌을.
여신사력 712년 5월 14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거대 나무, 여신수가 있는 곳. 렌디너스 왕국의 힐텐펜스에는 이켈라인 상회의 초대 회장이 만들었다는 여관 WISH가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여관은, 처음 만들었을 때의 그 크기 그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여관에 대를 이어 투숙했던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았고, 이켈라인 상회의 초대 회장이라는 배경 덕분에 이켈라인 상회의 내부 다툼에도 많이 휘말렸던 장소였다.
지금 현재, 여관 WISH는 이켈라인 상회의 현 회장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직원과 손님이 모두 나간 여관의 뒤뜰에는 금발머리의 남자가 햇살을 받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북쪽 산맥을 레어로 삼은 욕심 없는 드래곤,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였다.
새삼 이곳을 밟게 된 그의 마음은 새로웠다. 여관의 외장은 많이 바뀌었지만, 내부는 그대로였고, 그것은 그가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때 이 여관의 다목적 가용직원이었던 적이 있었던 그는 현재는 그때 당시 상관으로 모셨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나미아 이켈라인. 이켈라인 상회의 초대 회장이자 지금은 모든 일에서 은퇴해 육아에만 전념하는 여성은 브란디에고와 오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하고, 그의 레어에서 깨가 쏟아지는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다가 작년, 그녀는 눈부시도록 새하얀 알을 낳았고, 얼마 뒤에 붉은 머리를 한 아기가 안에서 태어났다.
나미아는 반은 드래곤이라 할 수 있었기에 드래곤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레드 드래곤이 나와서 브란디에고는 조금 놀랐었다. 그래도 자기 자식임이 틀림없었기에 그는 기뻐했고, 아기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눈동자가 금색인 걸 보고서는 잠시 고민했어야 했다.
레드 드래곤과 골드 드래곤의 혼혈인 것이다. 모계혈통이 이어지는 드래곤의 생식과정을 볼 때, 레드 드래곤이 나온다면 차라리 이해하기 쉽겠지만, 그의 아들은 드래곤 역사상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혼혈인 것이다.
그의 작은 처제와 작은 처남이 혼혈 드래곤이었던지라 당혹감은 많이 가셨지만, 그래도 앞으로 어떤 성격으로 자랄지 심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탄생일 1주년을 앞두고 생각해봐야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아내가 성격이 다소 괴팍하다고 해도 근본은 착한 사람이었기에 아이 역시 그런 성격을 타고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관의 뒷문에서 남편의 그런 표정을 읽은 나미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 아들이잖아? 좋은 아버지가 있으니까 곱게 자랄 거야. 나를 봐.”
“…….”
“뭐하는 건데?”
“보고 있어. 장인어른의 유일하게 빗나간 자식농사라서.”
“뭐어?! 자기 정말!”
나미아는 발끈했지만, 그럼과 동시에 그녀의 품에 있던 아기가 깨어나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아이라서 여태껏 ‘아가야’ 또는 ‘우리 아기’ 정도로 부르고 있었다.
아이를 가지고, 낳고부터 나미아의 성격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연 어머니라는 존재가 되면 무시무시할 정도로 성격이 변한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가족들은 이야기했지만, 브란디에고는 전혀 변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나미아는 나미아였지, 다른 누군가가 될 수는 없었다.
“아아, 그런데 동생들은 잘 오고 있을까? 라르딘에게 모두 일임했으니까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 하지만, 역시 불안해. 오디를 소환해서 찾아오게 할 걸 그랬나?”
“언제까지 첫째 처제를 부릴 생각이야? 조용하게 전원생활 하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야. 처남만 불쌍하지.”
“후웅…. 그래도오…. 걘 원래 내 애완동물이었단 말이야.”
“우리 아기 이모가 될 사람이야. 언제까지 애매한 관계로 둘 거야? 애완동물을 부리고 싶으면, 골드 드래곤 한 마리로 족해. 하얀 고양이는 포기하고.”
브란디에고는 자신의 가슴을 탁탁 치며 말했고, 나미아는 피식 웃었다.
“어련 하시겠어요, 서방님. 오디한테도 연락 했지?”
“응. 선물 구해서 온다더군. 아아, 그건 그렇고…. 역시 너무 아름다워.”
“응? 뭐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내 아내.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자애로운 여신과도 같은 모습이니 더욱 아름답구려.”
브란디에고는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였고, 나미아는 작게 웃고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금색의 기사여. 날 위해 뭐든 해줄 수 있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신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를 이끌고 손님맞이를 하시지 않으시겠나요? 곧 사랑하는 가족들이 찾아올 거예요. 사랑하는 나의 기사여.”
“기꺼이. 나의 여신이여.”
과장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있었다. 브란디에고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은 채 그녀를 이끌었고, 나미아는 한 손으로 조심스레 애기 포대기를 안으며 사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이미 그들에게는 강력한 지원군이 와있었기 때문이다.
“체리야! 음식 준비 끝났니?”
“응. 이걸로 끝이야. 스티브,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체리랑스와 스티브는 며칠 전에 브란디에고의 레어에 도착해서는 미리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왔다는 것에 나미아와 브란디에고는 너무도 놀라버렸고, 나미아는 체리랑스가 아기 태어났을 때 오지 않았다는 걸 그만 용서해버리고 말았다.
먼저 온 이들은 주인 내외를 앉혀두고는 열심히 요리하고, 그것을 차리기 시작했다. 라이니시스의 여덟 자식들은 모두 요리 솜씨가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체리랑스의 솜씨는 숨은 명인의 솜씨였다. 그다지 횟수가 많진 않지만, 체리랑스의 요리는 그들의 부모의 수준과 비견되곤 했다.
그런 체리랑스가 사흘 전부터 열심히 준비한 것이 바로 뷔페식 연회였고, 지금은 전채에서 디저트까지 화려한 코스를 자랑하는 다양한 음식들이 올려진 테이블이 연회장으로 차려진 홀의 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스티브는 여전히 갑옷을 입은 채였지만 정중한 동작으로 음식들을 날랐고, 그 모습은 한때 여관을 운영했던 나미아의 관심을 사게 되었다.
“호오, 꽤 동작이 좋을 걸? 스티브라고 했지? 우리 집으로 오지 않을래?”
“예?”
“대우 잘해줄게. 우리 집에 와서 이것저것 일 좀 해라. 체리야! 저거 나 주라!”
“아니, 저….”
한쪽에서 음식을 정리하던 체리랑스는 물끄러미 나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점차 울상이 되었고, 건드리기만 하면 울 것 같이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그 모습에 나미아는 차마 장난으로도 가져가겠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장난이었어.”
“막내 처제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군.”
“나도 그래.”
체리랑스는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굳히며 식기들을 운반했고, 스티브도 당혹에서 벗어나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가 한창 될 무렵이었다. 나미아와 브란디에고, 체리랑스는 급격하게 움직이는 마나를 느끼고는 연회장의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오는 건가?”
“그런가봐.”
“오는 사람이 당신 가족하고 우리 가족이 다야?”
“다른 분들도 불렀는데, 다들 오늘 일이 있다네. 다음에 뵙기로 했어.”
“그렇군. 다음에 찾아뵈어야겠군.”
한가로이 이야기하는 부부의 목소리 사이로, 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그 안에서 아홉의 그림자가 보였다. 나미아의 가족 전원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엄마! 아빠! 오디! 얘들아!”
나미아의 기쁜 음성이 울렸다.
실로 오랜만에 가족 모임이었다.
“에… 이 자리에 모여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여러분의 앞에서 제 아들의 명명식을 가지게 된 것을 참으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이쪽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 내자인 나미아 이켈라인입니다.”
“새삼스럽지만, 인사드릴게요. 이 사람이 워낙 깐깐한 것 아시죠? 답답해도 이해해 주세요. 앗, 어머님. 그 이해한다는 표정이 너무 보기 좋아요!”
한 차례 웃음보가 터졌다. 브란디에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에 한 점 변화 없이 말했다.
“아이 이름 문제로 아내와 많이 고민했습니다. 평생 동안 불러야 할 테니 신중하게 짓지 않을 수가 없지요. 수많은 이름 후보들이 경합을 벌였고, 결국 저희의 희망을 담아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원래 자식이 부모의 마음대로 크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이름에 부모가 바라는 걸 담을 수는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흰 그렇게 이름을 지었고, 오늘, 이 장소에서 아이의 이름을 발표하기로 했어요. 저에겐 이곳이 매우 특별한 장소에요.”
“여관 WISH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여관이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신들의 복잡한 알력싸움이 있었지만, 그건 오늘 이야기할 거리가 아니니 넘기도록 하지요. 아무튼 이 여관과 마찬가지로, 저희 둘의 작은 소망을 담아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나미아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었다. 붉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한 아기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모와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방긋 웃었다. 아무 걱정도 없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나미아는 말했다.
“아이의 이름은 페이하루아. 고대어로 ‘평화로이’라는 뜻을 가졌어요. 부디 이 아이는 평화롭고 순탄한 삶을 살았으면 싶어요.”
“페이하루아 이켈라인. 저희 아들의 이름입니다. 좋은 이름이죠?”
나미아와 브란디에고는 마주보며 웃었다. 이제 페이하루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아기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까르륵 웃었다.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평화로이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부모의 ‘소원’이고, 환상여관 WISH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여관이니까.
Guest.Supplementary story: 모임. -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