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진입.
튼튼한 가죽 옷을 입고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나미아는 눈부시게 비추는 햇살을 맞으며 구름 위에 떠있었다. 구름이 그녀의 발밑을 비껴나며 그 밑에 점으로 보이는 힐텐펜스를 잠깐씩 보여주고 있었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나미아는 배낭을 추스르며 말했다.
“오빠가 늦네. 시간약속은 어기는 편이 없었는데.”
그녀의 옆에서 곱게 땋은 흰머리를 매만지던 오디가 말했다.
“마음 준비를 해야죠. 곧 오실 거예요.”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든 오디는 나미아와는 다르게 편하고 넉넉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 실크 치마가 창공의 드센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들이 있는 곳은 힐텐펜스 중앙에서 수직으로 올라선 4000피트 상공이었다. 그 어떤 새도 이 높이로는 날지 않는다. 구름마저 발밑에 둔 터라 하늘은 티 없이 맑은 푸른색이었다.
양 손에 건틀렛을 착용한 나미아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주변정리를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지만,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어린 티나세르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준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강한 아이니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도와줄 사람도 아주 많았으니까.
“아, 저기 오시네요.”
“응? 어디?”
오디는 바로 앞을 가리켰다. 구름 위를 스치듯 날아오는 검은색이 확실하게 보였다. 평소에 입는 하얀 옷 대신 검은 옷을 입고 오는 하인츠였다.
나미아는 입 앞에 손을 모으고는 한껏 목소리를 드높였다.
“오-빠-! 여기에요!”
하인츠는 검은 갑옷과 등 뒤에 맨 검이 장비의 전부인 복장이었다. 보급도 필요 없는 싸움을 나가는 사람의 모습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직각에 가깝게 방향을 전환해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날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희도 방금 왔어요. 근데 옷 색깔이 참 묘하네요? 왠 검은색이에요?”
“신중에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야.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내 진짜 복장이지.”
“흐응…. 역시 왜곡된 진실의 여신의 최고 신관답네요. 하얀 옷이 진짜 옷인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나미아는 팔짱을 끼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평소와 같은 행동에 하인츠 역시 멋쩍게 볼을 긁적이는 것으로 평소의 행동을 했다.
겉모습은 평소와 같지만, 속마음마저 평소와 같지는 않다. 그들 모두 그걸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짚어내지는 않았다.
하인츠를 마지막으로 살신을 위한 세 사람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나미아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럼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힐텐펜스 중앙의 상공이라, 안스란 언니가 승천한 곳과 같네요. 바로 발밑에 여신수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 일로 인해서 이미 이곳에는 신의 힘이 오가는 통로가 생겼으니까. 우리는 그 통로를 이용하는 거야.”
“그렇다면 안스란 언니가 탐지하지 않을까요? 그 통로는 그녀의 것이잖아요?”
“아니. 안스란은 지금 새로운 차원의 마무리를 하는 중이야. 아예 신경을 쓰지 못할 거야. 뭔가 느끼더라도 그것은 천사들이 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일정 급수 이상의 천사들은 자유로이 물질계와 신계를 오갈 수 있거든.”
최근 안스란의 성법이 약해졌다는 소식도 접한 적이 있는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스란이 워낙에 바빠진 터라 지상에 신경을 쓰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들이 이곳을 통해 간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가요. 꾸물거릴 틈이 없어요.”
“그래. 가자꾸나. 둘 다 내 손을 잡아.”
나미아와 오디는 각자 하인츠의 오른손과 왼손을 잡았다. 그녀들의 손이 자신을 꽉 부여잡은 것을 느낀 그는 그녀들의 손을 마주 쥐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빗겨나간 사실과 뒤틀린 진상으로 왜곡된 진실이 이루어질저, 그 진실의 주인 된 자의 이름을 빌어 그 첫 번째 하인이 외치노라. 디 안스란 아 두아르 오우페나 히나마 두 아쿰! 아나스라나 마케호! 테하!”
화악!
그들의 머리 위 높은 곳에 은은한 노란색이 빛나는 원이 생겼다. 무엇보다 거룩하고 무엇보다 위대한 빛이 내려와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원 주위로는 성스러운 글자가 맴돌고 있어 그 모든 부정한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인츠는 외쳤다.
“가자!”
그들의 몸이 그 원 속으로, 신계로 향하는 문으로 향하듯 빨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은은한 노란색이 만든 통로 속에서 세 사람의 몸이 상승하며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빛과 함께, 그들의 몸이 원 속으로 빨려들었다.
그것은 무(無).
없음으로서 존재한다.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존속하는 모순.
태초의 모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혼돈.
무와 유가 함께 섞이면서 있고 없고의 진리를 타두는 어지러움.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의 모습이며, 이 세상이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형태.
혼돈 속에서 생겨난 무한한 질서는 결국 혼돈으로 귀결되며 근원을 따질 수도 없이 어그러지는 곳이다.
혼돈의 파형과 골을 타고 모순의 언덕을 지나 무의 바다를 건너 나미아는 가고 있었다. 가지 않고 있었다.
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가지 않는 것과 같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동의어로 취급되는 곳.
모순이 빚어낸 혼돈. 결국에는 무.
자신 또한 모순이며, 혼돈이다. 고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혼돈의 주체이며 모순의 내막이다.
나미아는 말했다.
나미아는 말하지 않았다.
나미아는 의아해했다.
나미아는 의아해하지 않았다.
나미아는 이해했다.
나미아는 이해하지 않았다.
나미아는 ‘나’를 느꼈다.
그녀는 느꼈다.
좀 더 강하게 자신을 느꼈다.
혼돈 속에서, 모순 속에서 자신을 느꼈다.
없음에서 비로소 있음이 갈라지고, 혼돈 속에서 질서가 태어나고, 모순이 모순에 의해 깨어졌다.
그녀는 존재로서 존재했다.
자각할 수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행위. 태초의 이기심. 단순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진리가 담겨진 것.
스스로를 ‘나’라 칭하는 것.
그녀는 ‘나’를 강렬하게 느꼈고, 강렬하게 생각했다.
‘나’를 느낌으로서 비로소 주변의 것이 느껴진다. ‘나’와 구분가는 것들이기에, ‘나’와 다른 것들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다르다는 걸 알 수만 있자면 주변을 감지할 수 있다.
그녀는 감지했다.
더욱 크게, 더욱 넓게.
그러자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오오! 인간이 이렇듯 쉽게 자신을 분리할 줄이야!”
“보통 인간이 아니라고 했잖은가. 제 3시대의 생존자야. 의념이 대단하지.”
“과연. 부족함이 없도다.”
나미아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는 것도 없었다. 보인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부터가 들었다. ‘나’를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은 평소에 그녀가 느끼는 ‘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그렇게 되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여긴 어디죠?”
“후훗…. ‘여기’라 3차원의 공간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로군. 한 가지 물어봅세. ‘여기’가 ‘공간’이라고 생각되는가?”
“공간을 초월한 그 무엇인가요? 하인츠 오빠는, 오디는 어디 있나요?”
“또 그러는군. 습관이란 무섭지. ‘어디’라고 지칭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그 두 존재는 너의 옆에, 앞에, 뒤에, 위에, 아래에, 속에, 겉에, 가까이에, 멀리에 있다네. 사실, 3차원에서 쓰이는 말은 이곳에선 소용이 없지. 자네는 모르겠나? 그들은 자네를 알고 느끼고 있네. 좀 더 개념을 확장시켜봐. 그들은 자신의 개념 속에 끌어 넣어봐.”
나미아는 그제야 이곳이 물질계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이곳을 지칭할 수도 없고, 뭔가를 알 수도 없다. 아까부터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개념을 전해오는 ‘것’ 역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느끼고자 했다. 자기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느끼고자 개념을 확장했다.
그러자 느껴졌다. 엄청난 사람들이 모인 광장 한 가운데에 있는 것 같이, 수 많은 존재들이 그녀의 주변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미아 님. 깨어나셨군요.”
“괜찮아, 나미아? 생각보다 적응이 빠르군.”
“오디, 오빠?”
오디라고 느껴지는 존재와 하인츠라고 느껴지는 존재는 나미아에게 ‘나’와 확실하게 구분되는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부딪혀서 되돌아가는 파동 같은 것으로 나미아는 주변을 인식할 수 있었고, 개념을 쏟아놓을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던 거지?”
“허허, 아직도…. ‘얼마나’라는 차원축의 단위가 이곳에 있을 것 같은가? 이곳은 단위가 없고 존재와 부재만으로 모든 것이 있으며, 자각과 감지로 느끼며, 의념으로 움직이고 개념을 발하는 곳이야. 나의 이 개념이 물질계의 시간으로 1만 년 전의 것이 아니라고 자네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겠는가?”
“자신 없네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뭔가?”
“당신 뭔데 나한테 일일이 참견하고 있는 거야?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아빠하고 엄마들밖에 없어!”
잠시 주변이 멈추었다가 유쾌하게 진동했다. 황당함과 즐거움의 개념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있었다. 가소롭다는 개념이나 유쾌하다는 개념도 같이 섞여서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나미아 님. 지금 나미아 님은 성족의 수장에게 일침을 놓으셨어요.”
“칫. 뭐가 보여야 말이지. 알아서 개념을 발해야 할 것 아냐? 성족이 개념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소개할 개념도 없다는 것엔 실망이야.”
다시 주변에서 웃음의 존재가 거세게 드러났다 부재로 변했다.
“허허허. 인간이여. 보통 인간이 이곳에 이르게 되면 자신을 찾지 못해 녹아내리는데, 자네는 다르군. 자신을 차리고서는 쓴소리까지 할 수 있다니 말이야. 우리가 사람을 잘 뽑기는 한 모양이군. 어허헛.”
나미아는 골을 내는 개념을 발했다.
“흥. 실컷 고생만 시켜놓고 죽을 위기에 몰아넣는 사람에게 할 말은 그게 끝? 일단 하나의 결론을 내리자면, 당신들이 물질화 되어 있었다면 한 대씩은 맞았을 거라는 점이에요. 세계를 유지한다는 존재들이 그렇게 치사하게 놀면 벌 받는다고요. 어서 용건이나 말하고 가야할 곳이나 말해줘요. 차원간 이동은 처음 해보니까 마음준비 좀 해야겠으니까.”
“날카로운 사람이군. 괜찮아. 그 정도가 딱 적당해. 이런 초월 차원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자아가 뚜렷하다는 거지. 좋네, 좋네. 내 어서 자네의 뜻을 이뤄주지.”
그는 개념을 발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나미아의 개념이 퍼져 나와 그의 개념을 저지했다.
“잠깐! 그 전에!”
“응? 뭔가?”
“통성명이나 하죠? 라이니시스 루 이켈라인의 첫째 딸, 나미아 이켈라인이라고 해요. 당신들의 카르마 클리너이기도 하면서 안스란을 상대로 한 히트맨으로 업종 변환한, 200세 이후로 나이 세기를 포기한 여자랍니다.”
나미아 이켈라인. 성족들이 당황할 정도로 당당한 여성이었다.
자세한 브리핑에 앞서 나미아와 오디, 하인츠는 물질차원의 창조과정부터 듣게 되었다.
공간의 차지라는 개념이 없는 차원의 틈새에서, 창조를 담당하게 된 존재는 그 일대의 틈새를 끌어 모아 영역을 만든다. 그 영역이 차원 전체의 크기를 정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에 적절히 끌어 모아야 한다. 그렇게 영역을 만든 뒤, 창조의 권능을 지닌 존재는 그 차원 둘레에 벽을 만든다. 차원의 고유성을 위해서다.
벽으로 둘러싸인 차원은 그것 자체만으로 차원이 될 준비를 끝마쳤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은 외부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공간으로, 차원의 틈새를 오가는 다른 존재들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된다. 그 안에서 창조의 권능을 사용하여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차원의 틈새는 모순과 혼돈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곳에 확립되는 근원적인 질서를 만들게 되는데, 그 질서의 근본은 대립이다. 하나가 있으면 그 하나에 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단일 존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하나가 있으면 그것에 반대되는 대립요소가 있어야 한다.
제일 간단한 것은 빛을 만들고 어둠을 분리하는 것이다. 혼돈과 모순 속에서 하나의 요소를 만들면 다른 하나는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때문에 창조의 권능은 사실 차원을 만드는 존재와 만들어지는 차원이 둘 다 가지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전자의 경우는 의식적이라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대립되는 요소를 만들면, 그것을 서로 모아 묶기 시작한다. 그 요소들을 전체적으로 대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물질의 창조가 시작된다.
가령 중력을 만들어서 사물을 정착시키게 된다면, 무중력이 그 바깥에서 사물을 흘러가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물들은 중력이 필요한 곳에 정착되게 되므로, 중력을 중심으로 땅이 만들어지고, 무중력을 중심으로 하늘이 만들어진다.
행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중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중력은 끝없이 끌어 모아서 자신의 힘이 미치는 곳까지 모든 걸 끌어모은다. 어설픈 생명의 개념을 만들어도 어차피 중력이 먹어버리므로, 중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을 먼저 그곳에 투입시킨다.
그렇게 땅이 생기고 하늘과 구분되기 시작하면 그곳에는 생물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를 결정한다. 그것은 주로 원소로 존재하게 되어 생물들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섭취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그 요소가 결정되면 그것을 뿌려 존재하고 순환하게 한다. 제일 먼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물은 제일 나중에 만들어진다. 자연스러운 차원의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단한 것에서부터 천천히 시작해 복잡한 것을 만들게 된다.
차원 내의 모든 것은 대립요소다. 생물이 만들어지면 그것에 반하는 것이 자연스레 생기기 마련이다. 차원의 힘은 그것에 반하는 것을 만드는 것으로 창조를 시작한다.
차원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생물의 근본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원은 죽음을 만든다.
그러나 안스란이 만드는 차원은 신들이 물질화되는 차원이다. 여기에서는 차원 자체의 창조권능이 상당수 배제된다.
다시 말해, 그곳은 불멸의 땅이다.
중력과 무중력이 물질 위에 혼재한다.
어떤 곳에서는 중력이, 어떤 곳에서는 무중력이 그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것이 따로 구분되어 발현하지 않는다.
보통의 차원은 차원의 중심에서 만들어지지만, 그 곳은 차원의 바깥쪽에 둘러쳐지듯이 만들어진 곳이다. 태양의 반대편에는 달이 있어 태양이 회전하며 낮과 밤을 만든다. 달은 태양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닌, 어둠을 깔고 유일하게 빛나는 이기적인 존재다.
행성이되 행성이 아니다.
차원이되 차원이 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은 정식으로 차원으로 인정되지 않은 곳이다. 무엇보다 차원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지.”
“이름?”
“그렇지. 어떤 것이든 스스로를 알아야만 ‘나’로서 존재하지.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름’으로 자신을 느끼는 거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느끼게 만드는 고유한 것. 이름에는 그런 힘이 있다네. 안스란이 만든 차원에는 이름이 없지. 원래 이름은 차원이 제대로 만들어 지고 난 다음, 최후의 최후에 짓는 법이거든. 아직 그곳은 이름이 없네. 따라서 안스란이 그곳에서 자신만의 힘을 행사하려 들기가 어렵지. 자신의 힘이 스스로가 발현될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존립하기가 어려워지거든.”
“알겠군요. 게다가 정식 차원이 아닌 이상, 파괴하기도 쉽다는 거죠? 우주의 질서와는 아직 상관이 없으니까요.”
인정하는 개념이 성족의 수장 ‘아사페르 다타나 하디네’로부터 흘러나왔다. 나미아는 다시 개념을 발했다.
“당신들, 의외로 파렴치한이네요? 이건 완전히 낙태잖아요? 태어나기 전의 태아, 만들어지는 과정의 태아를 강제로 죽여 버리는 행위.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기 무서워하는 남자나 여자들이 벌이는 제일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반인륜적 행위. 이건 차원의 개념에서 벌어지는 낙태군요.”
“…그렇다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지저분한 일에 관여되게 되었는지 내 자신이 처량해지네요. 기껏 왔더니만 최고의 낙태시술전문가로 모셔지게 되는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어요. 뭐, 좋아요. 어차피 지저분한 일이라는 건 안스란 언니를 도로 인간으로 격하시킨다고 했을 때 알았으니까요. 하긴, 쓸모없어지거나 피해를 입히게 된 존재는 어서 잘라버리는 편이 현명하죠. 더 큰 손해를 보기 전에 규제하고, 정 안 되면 싹둑 끊어버리는 것이 상인다운 일이죠. 다른 것도 아니고 차원을 상대로 운영과 영업을 하는 성족 상회의 일이니까요.”
나미아의 개념에서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짙게 느껴졌다. 그걸 느낀 성족들 모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신랄하고 기분 나쁜 말이지만 사실을 그대로 짚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계속 말씀 하세요. 그 미성숙 차원에 들어가서 어떻게 헤집으면 되는지.”
“으, 음…. 자네들 셋은 차원의 세 곳에 각각 떨어지게 되네. 그곳에는 안스란을 따르는 육백만의 죽은 영이 각자의 모습을 얻어 그곳에 있지. 안스란에게는 신들의 하인이 될 것이라고 말해서 데려가게 했네. 그것을 모두 없애야 하네. 그래야 안스란을 죽이기가 쉬워질 테니까.”
“음…. 그들의 카르마는 안스란의 것이니, 일단 힘을 약화시킨다? 좋아요. 이해했어요. 그럼 한 사람당 200만씩 해치우라는 거로군요. 후아, 이거 대살육전이 되겠는 걸요.”
“자네들에게 주어진 카르마 스톤은 그곳에서 자네들 본신의 힘을 낼 수 있게 만들걸세. 안스란이 만든 곳이기 때문에 안스란의 카르마만 존재하지. 다른 신들이 그곳에 카르마를 넣기 위해서는 차원의 인가가 필요하고 안스란을 그곳의 창조주로 만들어야 하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어려워. 그래서 많은 카르마가 필요로 하는 걸세. 그 차원은 아이리펜과 같은 시간단위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네. 자네들이 가진 카르마 스톤으로는 아마 일주일을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 걸세.”
일주일에 200만을 죽이기 위해서는 하루에 30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죽은 영들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 다른 형상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확실히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안스란과의 싸움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일을 끝마쳐야 한다.
“안스란을 죽일 카르마 스톤은 따로 하인츠에게 맡기겠네. 추종자들을 잃은 안스란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 할 테지만, 그래도 중립신의 자리에 있는 고로 그게 걸맞은 힘이 필요하지. 아마 꽤 강할걸세. 게다가 죽기 싫은 마음은 신일지라도 마찬가지인 지라 반항도 거세겠지.”
“그렇군요. 알겠어요. 아, 질문이 있어요.”
“뭔가?”
“왜 신들은 직접 안스란을 죽이지 않죠? 싸움을 수가 많으면 유리하다는 것은 고금의 진실이잖아요? 신이 열다섯이면 다른 하나를 제압하기 쉬울 텐데요?”
아사페르는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물론 그게 더 쉽지. 그렇지만 그렇게 될 경우에는 안스란의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린다네. 인간으로 되돌아갈 여지도 없지. 어린 소녀였던 안스란을 억지로 신으로 만들어 고통에 노출시켜 놨다는 것에 신들은 자책감을 안고 있다네. 그래서 훨씬 어려운 길을 택한 거지. 안스란을 인간으로 만들어 그녀의 행복을 돌려준다. 그리고 안스란이 만든 차원이 붕괴될 때의 고통을 자신들이 감수한다.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그녀의 고통을 느끼며 참회하겠다는 것이지. 신의 결정이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들뿐이라네. 신들의 사회에서는 실수도 있고 후회도 있지. 인간은 신의 훌륭한 복사본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결국 실수의 수습이군요. 생색내면서 후회하기. 그렇게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고통을 받을 마음이라면야 별다른 비난은 하지 않을게요. 네, 좋아요. 안스란이 만든 차원의 붕괴. 그녀의 살해는 확실하게 이루겠어요. 그 전에, 저희의 생존과 안스란의 무사 인간화는 보장하시는거죠? 열다섯 신의 이름에 걸고?”
“물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신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할 준비까지 한 신도 셋이나 있다네. 다키힐테, 사리디마스, 헤르키엘이네. 빛과 어둠과 중립을 대표하는 신의 맹세이니, 확실하겠지?”
나미아는 크게 놀랐다가 이내 자신을 추슬렀다. 그 세 신의 영향력을 상상할 때, 이 일에 걸고 있는 신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안스란에 대해 보상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비난을 거두었다.
어쩔 수 없이 나선다는 생각도 거두었다.
명예를 느낄 일은 아니었지만, 자기만 지저분해지는 일도 아니었다. 모두가 흙탕물을 뒤집어쓰겠다고 각오한 만큼, 자신도 그에 걸맞은 각오가 필요했다.
“확실하네요.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신들의 진심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이제야 마음이 후련해지네요. 좀 더 일찍 말씀해 주셨더라면 즐겁게 일에 착수할 수 있었을 텐데요. 괜히 유언장 써놓고 나온 게 후회되네요. 티나가 얼마나 날 놀려댈지 생각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임무 받들지요. 아, 그래서 말인데 또 한 가지 여쭤 볼 것이 있어요.”
“기꺼이 나서준다니 고맙네. 그래, 뭐가 궁금한가?”
“메신저를 통해서 이야기 들으셨죠? 이번 일에 대한 보수는 어떤 건가요?”
!!!
나미아를 제외한 모든 존재에게서 형언할 수 없는 크기의 경악이 흘러나왔다.
신에게 당당하게 보수를 요구하는 여자.
최강의 상인, 나미아 이켈라인이었다.
“나미아 님….”
“나미아….”
“왜들 그래요? 오디! 그 눈은 뭐니? 오빠! 오빠도 왜 그래요?!”
나미아는 일에 착수하기에 앞서서 물질화 된 장소에서 쉴 수 있게 해 달라 요구했고, 그래서 그들은 현재 성지가 있는 에테리얼 플레인에서 물질화된 공간에 구현된 저택 같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나미아는 재질을 알 수 없는 소파에 배낭을 던지고 갑옷을 벗은 뒤 풀썩 몸을 던졌다가 오디와 하인츠의 시선에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하인츠가 말했다.
“진심으로 보수를 요구하는 거니?”
“물론이죠!”
“신들의 진심을 알고서도 그러는 거니?”
“진심은 진심이고, 보수는 보수! 사람을 부리는데 마음만 가지고 충분하다고 할 정도로 저와 신들의 정리가 깊지 않잖아요?”
철저한 상도덕의 논리에 따른 나미아의 궤변은 반론할 거리가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아웃사이더이니 신들에게 보수를 요구할 위치가 되었지만, 대개는 신들이 스스로 보수를 내려 줄 때까지 원하지 않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과 통념에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그걸 부수는 걸 즐기는 사람이 바로 나미아이기도 했다.
오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뭐라고 할 기운도 안 나요.”
“뭐, 그런 거지. 그건 그렇고, 오디. 뭣 좀 먹자. 먹고서 한 숨 푹 자고 난 다음에 가자. 싸움 전에 한 번 제대로 쉬어 보자고.”
“…하아. 이젠 될 대로 되라지.”
오디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서는 주방을 찾아 움직였다. 나미아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그보다도 소파의 쿠션을 끌어안고 볼을 비비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인츠 역시 오디와 마찬가지로 뭐라고 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갑옷을 벗고는 다른 소파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라이니시스 아저씨가 많이 힘들었겠다.”
“응? 오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 결과적으로는 잘 키운 셈이지만, 아저씨나 아주머니들이 꽤나 힘들었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어.”
“흥! 흥! 그래도 사랑받는 딸이네요! 흥!”
나미아가 그렇게 뒹굴 거리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면서 그들에게는 익숙한 성족이 걸어 들어왔다. 헤르디스 베올딘이었다.
“이거, 휴식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헤르디스 씨. 오랜만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이군요. 실베언 군.”
미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흘렀지만 그것뿐이었다. 하인츠로서는 안스란을 신으로 만드는데 주요 역할을 한 헤르디스를 그리 곱게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번 일로 그도 많이 힘들 거라는 걸 생각하며 과거의 일을 꺼내지는 않았다.
나미아는 누운 채로 말했다.
“음냐. 어쩐 일이세요? 보수 협상하러 오셨어요?”
“하핫! 나미아 씨도 참 대단하십니다. 신들이 얼마나 당황해 하던지 그 주변의 패턴이 당황으로 굳어져버릴 지경이었어요. 아무튼 대답을 받아오긴 했습니다.”
“호오? 과연 신들이군요. 통이 커요. 그래서 보수는 어떤 거예요?”
나미아는 자리를 똑바로 앉아서는 눈을 번뜩였고, 헤르디스는 느긋하게 걸어서는 그녀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는 말했다.
“신들의 회의에서는 이런 결정이 내렸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이든 들어줄 용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원하는 걸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와아! 굉장히 파격적이군요!”
나미아는 활짝 웃으며 솔직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존재도 아니고 신들이라면 세속적인 조건보다는 이런 조건이 더 편하기도 할 것이다. 선택권을 나미아에게 순순히 넘긴 것이다.
헤르디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수를 요구한 것이 아니십니까?”
“흐흥~ 그야 그렇죠. 새삼 신들이 좋아지려고 하네요.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건 상당히 즐거워요.”
“그래서 여쭤보러 왔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미아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느긋하게 등을 기대었다. 궐련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생각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전부터 미리 생각해 왔던 보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카르마를 거두기 위해서 세상을 좀 많이 뒤흔들었어요. 그거 뒤처리는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 둘째. 더 이상 저희 부모와 가족을 괴롭히지 말아줬으면 해요.”
“저기… 몇 개입니까?”
“말 끊지 마요. 마지막이니까. 셋째. 이제 아웃사이더로 있기 싫어요. 모습과 능력과 수명 그대로, 저와 오디를 세상에 포함시켜 주세요.”
“예?”
헤르디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인츠 역시 놀랐으며,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서 돌아오던 오디도 깜짝 놀랄만한 조건이었다. 헤르디스는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말이십니까?”
“네. 진심이에요.”
“그렇게 되면…. 나미아 씨의 카르마를 저희가 관리하고, 멋대로 조작하고, 다룰 수가 있는 데도요? 그게 싫어서 아웃사이더로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나미아 님. 조종되기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오디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웃사이더라는 사항은 나미아의 개성과도 같은 부분이었다. 나미아가 자신을 이루는 한 요소를 그냥 포기한다는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나미아는 사람들의 표정을 한 번 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싫긴 해요. 나도 누군가에게 조종 받고 있다는 걸 알면 섬뜩해요. 그렇지만 이번 일로 알게 된 것이 있어요. 성족들은 카르마를 함부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 분명 필요할 때는 움직이기야 하겠지만, 자기 마음대로 그러진 않아요. 카르마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힘든 과정이 수반되는 걸 알았어요. 오히려 아웃사이더를 움직이는 게 쉽지요. 요구조건만 맞춰주면 뜻대로 움직이니까. 하지만 세계에 속한 존재를 움직이기는 쉽지 않지요. 그렇죠?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다면 차라리 전 아이리펜에 포함되겠어요. 이제 혼란에 휩쓸리는 것도 지겹고, 상회 운영도 차분하게 하고 싶어요. 돕고 싶은 사람을 돕고 싶고, 가정도 만들고 싶어요. 아웃사이더는 인사이더와 맺어져도 애가 생기지 않잖아요? 날 기다리는 참한 남자도 있고 하니, 느긋하게 연애도 하고 싶어요.”
침묵한 사람들을 보며 나미아는 확실하게 매듭을 지었다. 그녀가 늘 원했던 것, 마음속 깊이 언제나 바랬지만, 불안해서 하기 싫었던 것을 확실하게 말하기로 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도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말했다.
“전, 살고 싶어요.”
헤르디스는 침묵했다. 이런 조건인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미아라면 분명 뭔가 대단한 걸 요구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이런 평범한 요구일 줄은 몰랐었다. 그만큼 신들이 그녀를 몰아세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살고 싶다.
그 말에 실린 무게는 보통 인간이 말하는 무게보다 훨씬 큰 것이다. 헤르디스는 힘겹게, 정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겠… 습니다. 이 일이 끝나는 즉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힘들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들었지? 오디? 이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거야. 이제 아웃사이더니 뭐니 신경 쓰지 말고 살자고. 아, 오디는 어떻게 되죠? 기반이 다르잖아요?”
“음… 그 점은 이쪽에서 회의를 좀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디 씨는 죽은 신의 파편이라서요. 신관이라도 되신다면 좋겠지만, 내제된 마법력도 대단하시니 한 번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디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 될 수는 없겠군요. 괜찮습니다. 굳이 그렇게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웃사이더로 남아있어도 상관없습니다만….”
오디는 그러면서 나미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나미아는 단호한 태도로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며 말했다.
“안 돼! 허락 못 해!”
“…제 주인께서 허락하지 않으니 저도 인사이더가 되어야겠군요. 후훗. 적당한 선에서 해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괜찮다면 신의 파편임을 포기해도 상관없어요. 그럴 경우엔 조건이 붙지만요.”
헤르디스는 기가 막혔다. 저토록 닮은 성격의 주종관계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들이었다.
“조, 조건이요?”
“제 눈. 마음에 들거든요? 이걸 온전하게 지켰으면 해요.”
“물론 그래야지! 오드 아이는 오디만의 매력이야!”
나미아는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디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별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허허 웃는 것으로 대답을 다 할 뿐이었다.
브란디에고는 나미아가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 말을 순순히 들어줄 정도로 호인은 아니었다. 나미아가 그만큼의 각오를 한 것이니만큼 그 생각에 동참해야겠지만 돌아오는 것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릴 정도로 소극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직접 도우려고 하는 겁니다.”
“남자의 오기라는 건가? 그것 참 위험한 거지. 그것 말고 달리 준비한 건 없나? 무작정적인 돌격으로 목숨이라도 잃으면 어떻게 하나? 난 자네의 어머니를 감당할 자신 없네. 물론 내 딸을 감당한 자신도 더더욱 없고.”
“물론 무작정 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라이니시스 씨가 홍염의 일족으로서 고유의 힘을 가지고 계시듯이, 저희 역시 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가진 것은 신의 뜻에 거부할 수 있는 힘입니다. 다시 말해,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로의 변환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차원 여행은 저희 일족의 유희 중 하나지요.”
“하긴, 골드 드래곤이 제일 신의 힘에 가깝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 그렇다면 자네는 결국 아웃사이더로서 안스란이 만든 차원에 들어간다는 거지? 하지만 그곳에선 안스란의 법칙을 거부할 수 있는 카르마 스톤이 필요한데?”
브란디에고는 매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그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고, 라이니시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브란디에고는 말했다.
“이것 말입니까?”
라이니시스와 미리안, 에실루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카르마 스톤이었다. 라이니시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말했다.
“이, 이것은… 무엇인가?”
“제일 신에 가까운 저희 일족입니다. 그런 저희가 신의 힘을 거부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카르마 응집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족들은 이걸 알기 쉬운 개념으로 돌로 만든 것이지만, 저희는 몸속에서 스스로의 카르마를 만들어낼 수 가 있습니다. 이것이 저희의 진실 된 능력입니다. 그걸 조종해 이런 돌을 만들어내는 건… 시간문제지요.”
브란디에고는 카르마 스톤을 꿀꺽 삼켰다. 그것으로 그의 몸 안에서 카르마 스톤이 흩어지며 다시 카르마로 환원되어 몸속에 누적되는 것이다.
골드 드래곤의 신기에 가까운 능력에 라이니시스와 두 부인은 황당해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대단하다고만 알려져 있던 골드 드래곤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다. 역시 명실공히 드래곤 혈족 중 최강의 일족다운 능력이었다.
그 골드 드래곤 일족의 신예가 말했다.
“문제는 제게 시간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저를 아웃사이더로 바꿔서 차원의 틈새에 들어가 나미아 씨를 찾아내는 일은 쉽습니다. 라이니시스 씨가 만든 물건의 마나 패턴을 따라가면 되니까요. 단지 그 안에서 움직일 힘이 부족합니다. 그것을 위해, 이렇게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근데… 내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예. 말씀하십시오.”
라이니시스는 턱을 매만지며 호감 가는 얼굴형의 브란디에고를 잘 살펴보았다. 어딜 봐도 손색이 없는 사내였고, 성격도 그의 일족 성격상 확실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정의, 옳음, 선의 추구자라서 할 수 있는 일 치고는 너무나 개인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내 딸을 도와주고 싶어 하나? 물론 의리가 있어서 그렇다는 건 인정하네만, 그런 위험한 일에 자신을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네.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무엇보다 나미아가 오지 말라고 했다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 되네.”
그의 양 옆에 있던 두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브란디에고는 나미아의 세 부모에게서 받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약간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 따님과 결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브란디에고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킨 센스를 감지하고 있는 나미아의 부모 셋은 모두 경악에 빠졌다. 그리고 그 느낌이 브란디에고에게 전해져서 그를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브란디에고는 순간 자신이 너무 앞서나간 것이 아닐까 덜컥 걱정이 되었다.
라이니시스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을 때는 그만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말을 번복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한 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자네.”
라이니시스의 싸늘한 말투가 브란디에고의 어깨를 살짝 떨게 했지만 그는 결코 시선을 피하거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
한참동안 긴장감이 둘 사이를 흘렀고, 라이니시스는 진심어린 표정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젊은이가 자신의 인생을 그리 쉽게 포기하는 게 아닐세.”
“예에?”
라이니시스에 뒤이어 미리안과 에실루나가 차례로 나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맞아요. 좀 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세요. 하필 나미아라니요. 당신 같은 성격에는 분명 휘둘리고 말 거예요.”
“예?”
“미리안의 말이 맞습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에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아이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사견에는 극구 동의합니다만, 앞으로의 인생을 생각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 저기….”
브란디에고는 세 사람이 모두 진심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순간 나미아가 대체 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브란디에고는 한참의 시간을 들여 자신의 생각과 나미아의 생활을 설명했다. 나미아가 정말은 착하는 것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말했고, 평생을 들여 소중히 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도 말했다.
물론 나미아의 평소 성격을 그도 모르는 바도 아니고, 나미아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 같다는 것도 말했다. 시간이야 충분히 남았으니 느긋하게 공을 들여 사귀고 싶다는 말도 했다.
결국 남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 딸의 성격이 괴팍하기에 극구 교제를 반대하던 부모들은 브란디에고의 성실성에 모든 것을 맡겨보기로 했다.
“그래. 그 파더 콤플렉스를 어떻게든 바꿔보게나.”
“예, 예.”
“브란디에고 군만 믿겠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협조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결국 이 자리에서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나미아만 제외하고는 네 사람의 협상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협상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그렇게 되고 나서야 그들은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성룡이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저라서, 그리 많은 카르마를 비축하지는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아웃사이더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고작이지요. 그래서 라이니시스 씨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마법으로 라이니시스 씨의 힘을 제게 전이시기는 방법이지요. 물론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좀 지칠 뿐이지요. 안전성에 대해서는 저희 외조부님께서 주신 확인서도 있습니다.”
착실하게 확인서까지 보여주는 브란디에고는 정녕 성실하다 할 수 있었다. 라이니시스는 확인서가 없더라도 나쁜 마법은 알아볼 자신이 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 힘이라도 필요하다면 빌려주지. 다만 조건이 있네.”
“예. 무엇입니까?”
“내 딸의 눈에서 눈물 흐르지 말게 하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자네 때문에 내 딸이 자책하며 슬퍼하지 않게 하란 말일세.”
브란디에고는 확고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꼭 따님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라이니시스는 확실하게 전해져오는 진심을 믿기로 했다. 아군은 많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마법진을 그려야겠군. 간만에 재미있는 작업이 되겠어. 미리안, 에실루나. 좀 도와주겠어? 차원 진입을 위한 마법진도 필요하니까.”
“물론이죠.”
“기꺼이.”
브란디에고는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로서 나미아는 물론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차원의 틈새로, 안스란이 만든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 골드 드래곤의 신예였다.
그 무렵, 보호막에 싸여진 채 차원의 틈새를 유영하던 나미아와 오디, 하인츠의 앞에는 유백색의 공과 같은 덩어리가 출몰하게 되었다. 껍데기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아 아직도 꿈틀거리듯 움직이는 차원이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미완성 차원. 안스란이 만든 차원이었다.
“그럼 여러분, 부디 무사히 목적을 완수하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회수나 제대로 해주세요.”
나미아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녀와 오디, 하인츠는 차원의 세 부분으로 진입해서 차원의 1/3을 각각 담당해야 한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싸움이지만, 그곳에서 각자 200만의 적을 해치우고 반쪽짜리 태양의 속에 있는 안스란을 격퇴해야 한다.
“자, 그럼 가보자고!”
나미아는 활기차게 외치며 미완성 차원의 한 곳을 향해 날았다. 오디와 하인츠도 그 뒤를 따라 각각 다른 곳을 향해 날았다.
차원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세 명은 곧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헤르디스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부디 성공하시길….”
진심이 단김 말이었다.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동물이나 식물의 모습을 한 회색의 존재들이 무리지어 어슬렁거리고 있는 땅.
땅과 바다가 있지만, 숲은 없고, 보라색 하늘에 노란 태양이 떠서 파란 빛을 발하는 괴이한 땅.
그런 곳의 땅이 마치 물처럼 일렁거리면서 하얀 색의 물체가 땅으로부터 토해지듯 뛰쳐나왔다.
그 주변을 빼곡하게 매운 괴이한 존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것으로 향했고, 땅으로부터 뛰쳐나와 한참을 솟아오르다가 공중에서 멈춘 새하얀 물체, 오디는 여태까지 봐오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통 차원과는… 역시 틀리네.”
시선을 내리면 중간이 오목하게 내려간 수평선이 보인다. 보통의 수평선이 위로 볼록한 선을 그리는데 반해 구체의 안쪽에 발라두듯이 만들어진 이 불완전한 세상은 단순한 수평선도 그 궤를 달리했다.
캬아아아-!
쉬에에에!
카악! 키엑! 키이익!
그녀의 발밑에서 회색으로 꿈틀거리는 물결같이 보이는 이상한 존재들이 그녀를 향해 괴이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안스란을 쫓아 올라온 죽은 영혼들이자, 이 세상의 주축이 될 600만의 존재들 중 일부였다.
“여기서부터 시작인가….”
오디는 마음의 준비도 뭐고 없이 당장 대파괴와 대학살을 벌여야 하는 자신의 불행에 한숨을 쉬었다.
저들 중에서 비행을 할 수 있는 녀석들은 아직 이곳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공중에 떠있는 채로 그들이 지르는 시끄러운 소리만 듣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전력으로 시작해 주겠어.”
그녀는 자신의 뒤로 흩날리건 하얀 머리카락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목 뒤에서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손에 한번 힘을 주자 마치 잘려나간 듯이 머리카락들이 떨어져 나와 그녀의 손에 남게 되었다.
“나미아 님은 내 짧은 머리를 싫어하지만, 이게 내게 제일 큰 힘을 줄 수 있지.”
단발머리가 된 채 한 손에는 머리카락을,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던 오디는 회색으로 꿈틀거리는 발밑을 보았다. 괴이한 행동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죽은 영혼들을 보던 오디는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변하며 그녀의 눈동자도 번뜩거리는 은빛으로 변했다.
한순간에 자신의 신성을 일깨운 그녀는 밑에서 꿈틀거리는 존재들을 향해 일갈했다.
“보아라! 이것이 내가 일으키는 마지막 신성일지니!”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머리카락을 바닥을 향해 뿌렸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들이 사르르 떨어졌다. 그녀의 발밑으로는 은색의 실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머리카락들이 서서히 회색 존재들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외쳤다.
“나의 육신의 일부여! 신성을 얻어 위대해진 자의 조각이여! 일어나라!”
파아아아-앗!
은색의 머리카락들이 일제히 번쩍거리더니 하얀 빛을 일으키며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공중을 올려다보던 회색 존재들이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일 때, 그들의 머리 위로 빛과 함께 퍼져나간 오디의 머리카락은 그 한 가닥 한 가닥이 한 손에는 긴 칼을 들고, 한 손에는 하얀 방패를 든 흰 장발의 천사로 변하였다.
머리 위에는 신성의 고리가 떠있고, 등에는 하얀 두 쌍의 날개를 퍼덕거리는 수천의 천사들이 그 날개를 서서히 퍼덕거리며 하얀 눈동자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디는, 그들의 신이 된 그녀는 자신의 몸속에 내제된 신성을 모조리 쏟아 부으면서 천사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신성을 완전히 소모할 경우,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되는 것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정령으로서의 힘도 나미아처럼 본신의 능력으로 만들면 되지만 신성력 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대량으로 신성을 소모할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들으라! 그대들의 위업을 행하라! 하루 낮과 하루 밤이 지날 때까지 저들을 주살하라!”
단지 하루에 불과하지만 머리카락으로 만든 수천의 천사들은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하게 저들을 주살할 것이다. 천사들의 능력은 그 하나하나가 능히 수천의 인간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안스란의 천사라고도 할 수 있는 저들을 대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천사들은 일제히 검을 끌어당겨 회색의 존재들을 겨냥했다. 그들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무런 신호도 없이 일제히 날개를 퍼덕거렸고, 쏜살같이 지상으로 향했다.
대학살의 시작이었다.
나미아는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의 한쪽 끝에 나타났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이 세계의 이상을 느낀 회색의 존재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어지러이 들리고 있었다. 하늘을 덮고 땅을 메우는 기세로 회색의 존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오빠나 오디는 어디 있을까? 태양 건너편을 살펴보면 보이지 않을까?”
나미아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며 파랗게 번뜩거리는 태양 너머 보라색으로 채색된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보라색 하늘은 그 뒤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볼을 부풀리며 퉁퉁거리듯 말했다.
“에이, 뭐야. 재미없어. 기껏 다른 차원에 왔는데 관광은커녕 싸우기만 해야 한다니, 이거 실망이야. 안스란 언니는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군. 흠흠.”
그녀는 하늘과 땅에서 다가오는 회색의 파도를 보며 씨익 웃었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규모의 회색 존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건만, 그녀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양 손에 장착된 시료스에서는 수백가닥의 미스릴 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변에서 어지러이 파란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 시료스, 전 무기 장착!”
그녀는 양 앞을 펼치면서 시료스에 명령했고, 수백가닥의 미스릴 실은 그녀의 등에 매어져 있던 배낭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실들이 밖으로 나올 때는 빠짐없이 그 끝에 각종 무기들을 감아쥐고 있었다.
수십 자루의 총과 수백자루의 무기들이 무한배낭에서 쏟아지듯 꺼내져 시료스에게 들리게 되었고, 그녀는 양 손으로 양 허리에 있는 롱 소드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이미 지척거리까지 다가온 회색의 물결을 보며 말했다.
“난 오디처럼 천사도 만들 수 없고, 하인츠 오빠처럼 신성력도 없어. 다만 나는 내 자신의 힘과 아빠가 털어준 무기고의 힘을 사용할 뿐이지.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 아빠 무기고가 텅 비게 되서 엄마들이 얼마나 즐거워 하셨는지? 전 총기 폭렬탄 장전!”
철컥! 차라라라라락! 처적!
시료스에 달려있는 무기들 중 총기류가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게 일제히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키아아아!
쒜에엑! 샤아아악!
키르르르르륵!
회색의 존재들이 질러대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도 들리고 있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겁을 먹을 장면이었지만, 나미아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일으키게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은 녀석들 또 한 번 죽이는 일엔 나도 별 감정 없다 이거야! 지금까지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너희들이 받아라! 내 이름은 나미아! 라이니시스 루 이켈라인의 딸인 나미아 이켈라인이다!”
그녀는 그렇게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회색의 존재들을 향해 돌격했다. 파도같이 짓쳐오던 존재들 사이로 그녀가 먹혀들어가듯 사라졌으나, 이내 폭음과 함께 붉고 푸르고, 노란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살육의 시작이었다.
그 시각, 하인츠는 이미 싸우고 있었다.
“나의 여신이여! 이제 돌아오실 때가 되었나이다!”
안스란의 정신은 차원을 만드는 일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녀의 힘은 신들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은 하인츠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안스란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었다.
콰가가가강!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땅에는 깊은 골이 패였다. 안스란의 힘은 안스란의 천사라고 부를 수 있는 회색의 존재들에게 매우 유효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파장의 힘이지만, 내재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힘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인츠는 종횡무진으로 내달렸다. 그의 몸은 회색의 빛에 감싸여 있었고, 그 빛은 감히 회색의 존재들이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다.
회색이야말로 왜곡된 진실의 색이다. 검지도 않고 하얗지도 않은 왜곡되어 있는 색인 회색. 안스란의 색이다.
“여신이 돌아온다! 그들의 손에서 진정한 그녀가 돌아온다!”
그의 외침은 곧 의지가 되어 힘이 되었다. 그의 사방으로 빛이 폭사하고, 그 빛에 맞은 회색의 존재들은 재가 되듯 부스러졌다.
하인츠는 지금 전력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회색의 존재들을 죽이면, 안스란이 그만큼 덜 괴로움을 겪으며 인간이 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짧게,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안스란! 안스란 메이! 더이상 널 고통 속에 내버려두지 않겠다!”
하인츠는 몇 백 년 전부터 가슴속에 품어온 말을 꺼내놓았다. 안스란이 여신이 될 때부터, 그의 마음속에 있던 말들이 고스란히 흘러나와 그의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여신이 되기 전,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을 더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 하인츠 실베언의 힘은 그렇게 생겨나고 있었다.
굳은 의지, 집념,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
신이 가지는 제일 근본적인 힘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의 힘을 쓰면서도 더 큰 힘을 끌어올릴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을 널 위해! 내 모든 걸 건다!”
그는 검을 휘둘렀다. 신의 힘이 터져 나오며 모든 걸 지워버리고 있었다.
투천사의 날개는 4장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묘사하는 모습은 2장의 날개 밖에 없다. 그것은 싸움이 시작되면 투천사들의 날개 중 두장은 자신의 몸을 감싸 갑옷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들은 하늘을 날며 신의 뜻에 거역하는 자들을 처단한다.
지상으로 내려온 투천사들은 날개가 없다. 두 장의 날개는 갑옷으로 화하고, 다른 두 장은 각각 전차와 백마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땅으로 내려온 투천사들은 전차를 달리며 지상을 휩쓴다.
공중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회색의 존재들과 천사들의 싸움, 그리고 땅에서 벌어지는 회색의 존재들과 전차를 탄 투천사들의 싸움.
수적 열세가 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두려움을 모른다. 분노도 없고 기쁨도 모른다. 그들은 감정이 없이 싸우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일회선 존재들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슬퍼할 감정도 없다.
오로지 단 하나. 그들의 신이 내린 명령. 하루 낮과 하루 밤이 지날 때까지 모든 적을 주살하라는 명령만을 따를 뿐이었다.
지휘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최고의 싸움방법을 알고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병단을 짜고 대열을 만들어 진격하고 돌격한다. 쉬지도 않는다. 쉴 수가 없다. 휴식할 필요가 없으니까.
집중공격을 받은 투천사의 몸이 넝마가 되며 빛으로 변한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자신의 파편을 날려 적들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고 한 올의 머리카락이 된다. 동료들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투천사끼리는 다치게 할 수 없으니 그들의 파편은 그냥 동료의 몸을 지나칠 뿐이다.
이곳저곳에서 번쩍거리며 투천사가 소멸하는 것이 오디의 눈에도 보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들이니까.
그녀는 땅을 향해 신의 불을 뿌리고, 하늘을 얼어붙게 했다. 땅과 하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며 회색의 존재들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색의 존재들은 점점 모여들고 있었고, 그 숫자는 기백만이다. 이제 막 시작한 싸움에서 쉽사리 전멸되지는 않는다.
땅은 이미 회색의 시체들로 덮여있었지만, 그것보다 몇십 배는 더 많은 숫자가 남아있었다.
아직 끝나기엔 멀었다.
“자! 와라! 오라고!”
나미아는 신나게 두 자루의 검을 휘둘러가며 검무를 추듯 싸우고 있었다. 그녀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포성이 들리면서 주변의 모든 소리를 잠식했다. 이미 그녀는 회색의 존재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지 오래였다. 총열이 후퇴하며 굉음과 함께 탄환을 내뱉고, 그 탄환이 명중해 폭발하며 내는 소리는 모든 소리들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시료스의 와이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무기였다.
번뜩거리며 은색의 빛이 지나간 곳에는 그 어떤 것도 붙어있지 못했다. 예리하게 잘려진 단면을 따라 떨어지는 육신에서는 피도 배어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손이 닿는 적들은 없었다. 최대한의 힘을 개방한 그녀는 마음껏 몸을 움직이며 싸우고 있었다. 시료스가 그 일대를 휘감으면 살아있는 것이 없었고, 그녀가 내지르는 인페르노 플레임이나 퓨어 애시드에 맞고 버틸 존재는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마치 짚단을 베어내는 것 같이 회색의 존재들은 쓰러지고 있었다. 그녀가 한 번 지나간 길에는 회색의 시체로 길이 났고, 그녀가 잠시 머무른 곳에는 시체로 구릉을 이루었다.
무차별적인 절대적인 힘.
그녀가 휘두르는 건 단지 그것이었다.
하인츠는 안스란의 환영을 보고 있었다. 회색의 존재를 베거나 없앨 때마다 안스란이 점점 그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환각이라고 해도 그는 좋았다. 그것은 적어도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힘을 일으켰고, 그 일대가 진동하며 휩쓸렸다. 그의 사방 수십 야드 일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고, 그 위로 다시 회색의 존재들이 빼곡히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안스란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어린 시절 그때의 그 웃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스란!”
이름을 부르면 대답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불렀다. 안스란은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스란!”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뻗었다. 안스란은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스란-!”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안스란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품속으로 오라는 듯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녀의 품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안스란이 말했다.
“하인츠…. 나와 함께하겠어?”
하인츠가 말했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는 그녀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회색의 빛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했다.
태양은 저 먼 창공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태양의 이면에서 어둠이 드러나며 어둠이 지상에 서서히 깔렸다.
녹색의 석양은 보라색의 하늘을 침범하며 짙은 푸른색의 밤을 가져오고 있었다. 별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밤이 미완성된 차원의 내부에 머물렀다.
다시 녹색의 새벽이 오고, 보라색의 하늘이 그 뒤를 이었다. 천천히 회전하는 태양은 파란 빛을 뿌렸고, 세계에는 낮이 왔다.
남아있던 수백의 천사들이 일제히 빛이 되어 사라졌다. 단 하루 싸웠을 뿐이지만 백만에 가까운 회색의 존재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오디는 피로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며 말했다.
“앞으로 사흘. 그 정도면 충분해.”
투천사들이 사라진 지금, 그녀는 나머지 반에 가까운 숫자를 상대하기 위해 딱 사흘의 시간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 먼저 공중의 것들부터 처치해야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해치웠을지 궁금했다.
철컥, 철컥, 철컥철컥철컥철컥….
방아쇠가 헛도는 소리들만 들려왔다. 나미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칫! 아빠는 탄환 안 만들고 뭐하고 계신 거야?!”
이미 그녀가 사용한 탄환만도 십수 만발에 달하지만, 그녀는 부족함을 느꼈다. 수십 자루의 총이 그렇게 쏴댔으니 당연하기도 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당연함에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회색의 존재들은 150만 가까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쌓아놓은 높이 수십 야드의 시체의 산에서 계속 꾸역꾸역 올라오는 회색의 존재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의 산뿐만 아니라 저 멀리까지도 바닥을 가득 메운 회색의 존재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총들을 모두 집어넣고는 수첩 같은 책 여러 권을 깨내었다.
“아빠가 좀 눈물을 흘리셨지. 마나 빅뱅이나 먹어봐라!”
시료스가 책 한권을 반으로 잘라서는 바닥에 던짐과 동시에 나미아는 수천피트 상공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인위적인 마나의 폭주를 생성해 그 일대의 마나를 완전히 지우는 것으로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마나 빅뱅이 엄청난 빛과 함께 시작되었다. 저것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들던 몇 천은 족히 사라졌을 것이다.
“앞으로 사흘! 그 안에 해결해 주겠어!”
고공에서 밑으로 떨어져 내리며 그녀가 자신 있게 외쳤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해치웠을지 궁금했다.
브란디에고는 화염 브레스를 뿜고는 발을 구르는 가벼운 동작으로 상당수의 회색 존재를 격살했다.
지금 그에게는 라이니시스와 미리안, 에실루나가 전해준 세 드래곤의 힘이 내제되어 있었다. 하루에 횟수가 제한되어 있는 브레스도 벌써 그 제한을 넘어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고, 용언도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녹색 새벽이 보라색 아침을 끌어오고 있을 시점이었다. 상당한 저투가 벌어졌던 모양인지 땅이 이리저리 파여 있었고, 여기저기 죽어있는 회색 존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덮고 서있는 회색 존재들은 마치 땅 위에 껍질이 씌워진 것 같았다.
그는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개미와도 같은 귀찮은 회색 존재들을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이미 몇 배의 힘이 자신에게 들어와 카르마로 변해있었다. 힘의 제한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돈다.
그러나 그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은 자신이 오기 전까지 이곳에서 싸운 사람이 누군가 하는 점이었다.
가까이 있다면 함께 싸우는 편이 좋겠지만 그런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자리를 옮긴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일단 자신에게 몰려드는 것들부터 전멸시키기로 작정했다.
‘사흘이면 되겠군.’
아마 그가 살아온 나날 중에서 제일 단조로운 사흘이 될 것 같았다. 그냥 죽이기만 하면 끝이니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해치웠을지 궁금했다.
“하압!”
화르르륵!
오디는 땅에 두껍게 깔린 시체 위체 마지막 남은 회색의 존재를 불태웠다. 귓가에는 그들이 지르던 소리가 쟁쟁하게 울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덤벼들던 그것들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면서 그런 소리도 이미 들리지 않았다.
사흘 밤낮을 싸워 마지막 하나를 해치운 그녀는 약간의 피곤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에서 제일 격렬하게 보냈던 사흘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비릿한 피냄새는 이제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의 옷 여기저기에 묻은 갖가지 색의 피는 원래 그렇게 물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오디는 전신에 불을 두르는 것으로 몸에 붙은 살점과 피를 태워버렸다.
하늘은 여전히 보라색이었고, 태양은 여전히 파란색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이대로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쉬는 시간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얼마든지 있다.
그녀는 마법으로 나미아를 찾았다. 아직 자신을 찾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다 해치우지 못한 것 같았다.
“모르는 세계이다 보니… 찾는 것도 어렵네.”
오디는 살짝 푸념했다. 그녀의 마법으로도 위치만을 잡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그녀는 지팡이에 살짝 걸터앉아서는 그 방향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곧장 날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걸로 끝이다!”
수십 가닥의 시료스와 나미아의 검이 일제히 교차하면서 시체의 산 위에서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도달한 회색 존재를 산산이 조각내었다. 수십 조각으로 갈라지며 무너지는 회색 존재를 보며 나이마는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을 소모하면서 200만에 달하던 존재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이대로 쉬었으면 좋겠지만… 나중에 쉬어야지. 이틀 내내 잠이나 잘 거야!”
그녀 딴에는 오디가 깨워도 무시하고 자겠다는 야심만만한 생각을 하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대업을 치룬 뒤에 맞이하는 휴식은 너무나도 달콤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격렬하게 보낸 적은 없었다.
무기들도 모두 집어넣고 시료스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양 손에 들고 있던 칼도 각각 칼집에 꽂아 넣으면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안위가 궁금했다.
“으음…. 누구부터 찾을까? 오디부터 찾을까?”
자신이 이제 끝났으니 아마 제일 늦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녀는 일단 오디부터 만나기로 했다. 하인츠는 자신이 참견하지 않아도 훌륭하게 일을 끝냈을 것 같다.
탐지 마법을 사용해서 오디의 위치만을 알아낼 수 있었던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차원에서 방향만 잡아낸 건 그럭저럭 성공이었다.
“가자!”
그녀의 등에서 피막이 달린 날개가 솟아났다. 드래곤의 날개를 단 채로 그녀는 오디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브란디에고는 뿜어대던 브레스를 멈추었다. 브레스를 뿜으며 목을 한 번 돌려주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회색의 존재들을 모두 처리한 것이다.
이미 그의 밑에는 카펫이라고 불려도 좋은 정도로 회색의 존재들이 깔리고, 구워지는 등 각종 형태로 죽어있었다.
“제일 심심하게 보낸 사흘이군.”
그에게 피로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 중에서 반을 소모했다는 걸 깨닫고는 단조로운 작업에 너무 힘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여관 WISH에서 잡역부로 일했던 때가 더 박진감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심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에게 자랑할 것도 아니거니와, 3일 내내 밤낮으로 죽여대기만 했다는 건 작업시간에 비해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몸을 띄웠다. 그의 아래에서는 흙이 아닌 시체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것 역시 그의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그는 마법으로 나미아와 오디의 위치를 동시에 찾아보았다.
“오너와 관리자님이… 움직이고 계시군.”
나미아와 오디가 한 지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들도 각자의 일을 끝내고 한 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아마 그 가운데 지점에 하인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따로 하인츠를 찾거나 하진 않았다.
골드 드래곤의 거체가 빨간색의 구름을 찢으며 보라색 창공을 가로질렀다.
“오디! 오랜만이야! 와아!”
“나미아 님. 무사하셔서 기뻐요.”
나미아는 오디를 보자마자 일단 끌어안았고, 오디는 가만히 나미아의 등을 두들겼다.
“그런데 하인츠 오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곳에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래? 음… 그러고 보니 하인츠 오빠는 마법으로 탐지가 안 되는 사람이지?”
“예. 이건 고민이네요. 어디에 계신지 모르면 찾아갈 수가 없을 텐데….”
나미아와 오디는 철썩거리는 바다 위에서 마법 지팡이 위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인츠까지 찾아야 그를 돕던지 어쩌던지 해서 안스란을 죽이러 가야겠지만, 그는 애초에 마법으로 찾을 수가 없는 존재다. 그는 지금 신의 힘을 몸에 지니고 있는 상태였고, 신의 위치를 마법으로 찾는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인데, 하인츠의 위치를 찾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한다는 건지 그녀들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날면서 찾아볼까?”
“이 세계는 꽤 넓은 것 같은데요. 거기서 한 사람을 찾기란 너무 어려워요.”
“그렇지? 그럼 오빠가 우리 찾을 때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해?”
“아마도 그래야 할 걸요?”
오디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는 손 위에 턱을 올렸다. 갈색의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지금부터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어쩐지 갈매기가 된 기분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그럼 나도 잠이나 자야지.”
나미아는 오디에게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는 잠이라도 자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우우웅-!
태양이 크게 번뜩였고, 파란 빛이 세상에 번쩍거렸다. 크나큰 울림과 강렬한 빛은 세상을 만든 태초의 의미로 나미아와 오디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미아 님?”
“오디? 너도 들었어?”
그녀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빛과 그 울림은 그녀들의 정신 깊은 곳에서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오라.>
단순하지만 강한 힘이 서린 말이었다.
이 차원에서 그런 힘을 발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였다.
“안스란 언니가… 부르고 있어.”
“어떻게 된 일이죠? 그녀는 지상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요?”
“그래. 그럴 거라고 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녀밖에 없잖아?”
나미아의 말에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는 말했다.
“곱게 죽지는 않겠다는 건가? 하긴, 누가 자신을 죽이겠다는데 곱게 죽어주겠어? 게다가 안스란 언니의 신성과 진짜 영혼은 별개라고 했던 하인츠 오빠의 말이 기억나. 안스란 언니는 인간이 되고 싶겠지만, 그 신성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걸 거야. 이것 역시… 그 신성이 어떻게든 움직였다는 것이겠지.”
“왜 하필 지금일까요?”
“그거야 모르지.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일단 우리가 저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지. 하인츠 오빠도 저 부름을 듣고는 바로 그곳으로 향할 거야.”
“그렇군요. 그럼 가도록 해요.”
나미아는 지팡이를 박차고 뛰어올라 날개를 펼쳤다. 오디는 지팡이를 쥐고는 빠르게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그렇게 보라색 하늘의 파란 태양을 향해 날아올랐다.
브란디에고는 갑작스럽게 울린 하늘에서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이곳의 천둥은 저런 식으로 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나미아와 오디가 갑자기 공중으로 향하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는 잠시 공중에서 멈춰 섰다. 하인츠와 합류해서는 이제 결판을 지으러 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생각이 맞을 것 같았다.
안스란이라는 여신이 대체 어디에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이 향하는 걸 생각해보면 태양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덜 만들어진 이 차원에 신이 있다면, 세상의 근원이 되는 빛과 어둠을 발하는 태양의 속에 있거나 그 근처에 있을 거라는 게 타당한 생각일 것이다.
“이런, 아직 내가 왔다는 걸 모르시는 건가?”
그는 애초에 나미아가 떨쳐버리려 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탐지 범위에는 생각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은 모두 마찬가지인지라 아직 저들은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끝으로, 그는 날아가던 방향을 바꿨다.
머리를 들고 저 높이 빛나는 파란 태양을 향해 금빛으로 빛나는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차원에 있건만, 만나는 것이 참 힘들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속도로 하늘을 향했다. 중간중간 장거리 텔레포트까지 하면서,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면서 땅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올랐다. 그렇지만 태양과의 거리는 멀기만 했다.
“아, 정말! 왜 이렇게 멀어?!”
“그러게요.”
짜증을 내는 나미아와 한가롭게 답하는 오디의 모습은 도저히 신을 상대하러 간다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들의 각오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점점 보라색이 짙어지며 검게 변하기 시작했고, 붉은 구름이 마치 붉은 땅처럼 보이며 점차적으로 벌어질 때, 서서히 태양이 커지고 있었다. 그녀들이 다가가면 갈수록 커지는 태양은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확인하게 해주었다.
태양의 표면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새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점차 눈을 뜨고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순백색을 발하는 태양의 중심은 다가가기만 해도 순식간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이미 수만 피트 상공으로 올라와서 가까워진 태양이 온 몸을 태워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지만, 그녀들은 아무런 영향도 없이 점차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다만 불편한 것은 똑바로 태양을 볼 수가 없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너무나 밝아서 맨눈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선글라스라도 가져올걸 그랬어.”
“그걸로 태양 빛을 막을 수 있다면요.”
나미아와 오디는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오르자 눈앞에 마법을 걸어 강한 빛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게 만들었다.
태양이 커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좋아, 오디! 전속력으로!”
“예!”
그녀들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하얀 공기의 궤적을 남기며 태양을 향해 쏘아지듯이 날아갔다.
하얀 꼬리를 길게 남기며, 태양을 향하는 그녀들의 궤적만이 이곳에 뭔가가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태양. 흰 빛. 파랗게 빛나는.
백색의 세상. 모든 공간이 백열하는 곳.
태초에 신이 말하는 빛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
신이 있기에 제일 어울리는 곳.
신에게 도전하기에 제일 적당한 곳.
신을 죽여 묻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
그들은 그 안으로 향했다.
태양의 안. 그곳은 파란 하늘이 있고, 하얀 구름이 있었으며 푸른 바다와 황색의 땅이 있었다.
녹색의 숲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알던 세상은 오로지 태양 속에 국한되어 있었다. 태양은 없지만 하늘 전체가 빛나고 있는 곳.
그렇기에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소름끼치는 빛의 세계였다.
“왜곡된 진실의 여신이 살기엔… 어울리는 곳이야.”
나미아가 나무 가까이에 손을 가져다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하늘 전체가 발하는 빛은 광원이라는 개념을 아예 상식에서 삭제하고 있었다.
진초록색 풀이 바람에 휘날리는 초원이었지만, 움직이는 생명체는 없었다. 식물만이 존재하는 정적인 세상이었다.
“이 세상은… 좁군요.”
태양의 크기는 수백 마일에 달하는 거대한 원이었지만, 이 차원에 비한다면 좁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오디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고, 나미아는 그걸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빛만 있고 그림자는 없다. 지상과는 확연하게 다른 세상이 있다. 동물은 없이 오로지 식물만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현실에서 왜곡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것들.
왜곡된 진실.
이곳은 정녕 여신 안스란의 성역이었다.
푸르게 펼쳐진 초원의 너머에는 녹색 숲이 있다. 녹색 숲의 뒤에는 산이 있고, 산허리에 걸린 구름과 산에 씌워진 만년설은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이었다.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초원을 노니는 동물도 없고, 하다못해 곤충도 보이지 않는다.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미아는 이 부조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위대한 존재가 되어서는 고작 이런 편협하고 왜곡된 진실이 실재하는 세계밖에 만들지 못했다는 것에 화가 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여긴 가짜야….”
“예?”
“여긴 가짜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세상이야! 안스란은 어디 있어? 이딴 세상을 만든 주인은 어 디있는 거야앗!”
사아아아아….
그녀의 외침에 답하는 건 바람에 흩날리는 풀들뿐이었다.
오디는 나미아의 기분을 이해하기 때문에 굳이 그녀를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별다른 변화가 있나 살펴보았다.
변화는 있었다.
툭. 투둑. 쏴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어느새 잿빛으로 물들었고, 어두워진 구름은 비를 뿌렸다. 아니, 피를 뿌렸다.
“이, 이건… 뭐야?”
“피…?”
입안에 들어오는 피는 짭짤했다. 쇠냄새가 났다. 비린내가 났다.
피의 비가 초원에, 숲에, 산에 떨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가 붉게 물드는 것 같은 모습. 막대한 양의 피가 뿌려지는 모습은 가히 괴기스러웠다.
무엇을 위해 피를 뿌리는가.
이것은 누구의 피인가.
피의 비를 맞으며, 나미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맞아 떨어지는 핏물은 마치 피눈물을 그려내는 것 같았다.
오디는 온 몸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피가 너무나 기분 나빴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부지화불식간에 맞은 비였다. 별로 막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아 그녀는 조용히 있었다.
피가 풀들에 튀며 지상 낮은 곳에서는 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피의 운무는 어느 곳이든 그 색이 같았다.
그 사이로, 가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호호호호…. 히히히히히….
까르르르르르! 아하하하하하!
후후후후후…. 키히히히히….
웃고 있었다. 끊임없이, 다른 음색이 겹치며, 즐겁게, 비열하게, 쾌활하게, 음울하게, 각종 음색으로 웃고 있었다.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웃음소리.
피의 빗줄기 사이로 들리는 웃음소리.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커지며, 세상을 울렸다.
이 세상이 웃고 있었다.
나미아는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가 그리 웃긴 거지?”
이 세상이?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신세가? 이 피가? 이 부조리가?
“나미아 님. 저곳을 보세요.”
오디의 조용한 말에 나미아는 고개를 돌렸다. 오디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곳에서는 붉은 피의 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하얀 옷을 입고 하늘거리는 춤을 추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웃음소리에 묻히지 않는 노래를.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을 것 같지만, 너무나 똑똑하게 들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누구를 위해서 부르는 것인지도 모를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었다.
육백만이 죽었네. 나흘 만에 죽었네.
짓밟히고, 잘리고, 태워지고, 얼리고,
맞고, 찔리고, 녹고, 끊어지며!
신나게 죽었네. 꼴불견으로 죽었네.
의미도 없이 정해진 육체를 갖고 죽었네.
진홍의 피가 내리고, 진혼의 노래 부르네.
속아서 온 작자들에게 그런 게 필요할까?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피의 강을 이루네.
시체의 산을 만드네.
마르지 않는 핏방울
지워지지 않는 피냄새.
어깨위에 걸쳐진 육백만의 죽음!
하이호오-! 웃자! 그냥 웃어버리자!
버러지 육백만이 죽어봤자 별거냐.
바보 같은 남자는 여자에게 당하고,
똑똑한 여걸들은 피에 젖어 있다네.
모두들 바보. 모두가 바보.
자기 손으로 만든 시체가 되자.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여서
마지막엔 자기시체를 꼭대기에 올리자.
정복했다! 위대하다! 위업을 이루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여신의 슬픔은 알까?
이래저래 상관없지 어차피 그걸로 끝.
몰라도 상관없지.
어차피 그걸로 끝인 걸.
“꺄하하하하하!”
노래를 마치고 소녀는 웃었다.
피의 비는 어느새 그치고, 회색의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하인츠는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오, 오빠?!”
“맙소사…!”
하인츠의 모습은 처참했다.
눈이 있던 곳에서는 피를 흘리는 구멍이 있을 뿐이었다. 눈알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곳에 없었고, 눈꺼풀도 뜯겨인 양 사라져 있었다. 왼쪽 뺨은 이빨이 보일 정도로 헤어져 있었고, 가슴과 배에는 살이라는 게 남아있지 않았다.
강제로 갈빗대를 부러뜨린 것 같이, 하얀 뼈가 보이는 가슴은 예사였고, 왼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는 뼈만 남아있었다.
온 몸에서 피를 흘린 채로, 그렇게 처참한 모습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숨을 쉬고 있었다.
나미아는 크게 분노하며 하얀 소녀에게 외쳤다.
“너…! 오빠를 어떻게 한 거야?!”
“먹었어. 별로 맛없었지만.”
“머, 먹었다고?”
“여신의 힘. 날로 먹기는 좀 미안해서 환상을 보여줬지. 후훗. 알고 싶어? 적당히 나와 동침하는 모습을 그려줬을 뿐이야. 그러면서 차츰차츰 육신을 먹었지. 괜찮아. 식사습관은 깔끔한 편이야. 죽이진 않았잖아?”
하얀 소녀, 여신 안스란은 하얀 미소를 지었다.
나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인츠의 상태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았을 정도였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며 오디에게 말했다.
“오디, 치료해.”
“예!”
“어머나? 난 이미 배불러. 또 마련해줄 필요는 없어.”
안스란은 생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오라버니!”
오디의 처참한 비명소리가 나미아의 발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나무에 기대어진 모습 그대로 재가 되어 떨어지는 하인츠의 모습이 그녀의 동공에 각인되었다.
“아… 아아…!”
“여신을 위해서 정력을 아껴둔 것 같지만, 고만고만한 수준이던 걸? 별로 만족 못했어. 다들 암컷 사마귀의 이야기는 알지? 교미 중에 배가 고파지면 수컷을 잡아먹지. 수컷은 알면서도 당해야 하는 게 그들의 숙명이야. 후세를 위해서. 어머, 이런. 내가 말이 많았네? 별로 쓸모없는 이야긴데 말야. 에헷!”
소녀는 자신의 머리를 툭 치며 귀여운 듯이 말했지만, 나미아는 이미 처음부터 그녀를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하인츠의 죽음으로 인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하인츠가 누구이던가?
여신 안스란이 인간이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소꿉친구이며, 그녀가 승천하기 전에는 그녀를 목숨 걸고 지켜냈었다. 그녀가 여신이 된 이후에도 그녀의 제일 가까이에서 지내며 그녀의 진실을 알리는 일에 주력했고, 자신의 모든 걸 안스란을 위해 바쳤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낱 여신의 망령에게 뜯어 먹히고 재가 되었다.
“으아아아아-!”
나미아는 포효하며 그녀의 힘을 일시에 풀어놓았다.
용서할 수 없어….
저렇게 할 수는 없는 거야…!
저렇게 죽일 수는 없어!
“너 따위는 안스란이 아냐-!”
드래곤의 팔로 변한 오른팔로 그녀는 안스란에게 달려들었다.
그 폭발적인 기세에 그녀가 딛고 있던 땅이 움푹 파이면서 그녀의 몸이 흐릿하고 사라졌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안스란에게 달려들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살짝 웃으며 사라지는 안스란을 보며 경악했다.
“내가 바로 안스란이야.”
안스란은 나미아의 머리 위에서 땅을 딛듯이 허공을 딛고 서있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손을 치켜들었고, 그 손에는 검은 기운이 맺히고 있었다.
“어딜!”
오디는 그것이 위험하다고 느꼈고, 지팡이로 안스란의 몸을 후려쳤다. 그러나 안스란은 그 검은 기운만을 남기고 사라졌고, 검은 기운은 동그랗게 뭉치더니 서서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미아 님!”
“알고 있어!”
나미아는 얼른 오디의 허리를 잡고는 그 구체에게서 멀어졌다. 매우 느린 속도로 땅에 닿은 그 구체는 갑자기 크게 부풀며 그 공간 자체를 먹어치웠다.
뻐엉!
갑자기 빈 공간으로 일시에 공기가 밀려들면서 거대한 소리가 났다. 그 일대 10야드는 둥그렇게 파여 들어가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안스란은 그 위에서 천천히 공중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깝게시리. 흰머리 언니, 방해하지 말지?”
“그렇게 둘 순 없다!”
“하긴. 어차피 2:1도 괜찮아. 내 계획에는 무리 없으니까. 당신들 둘을 지워버리는 것 정도는.”
안스란은 생긋 웃으며 공중으로 둥실 날아올랐다. 나미아와 오디는 안스란을 좇아 시선을 옮겼고, 하늘에서 점점이 내려오는 검은 눈을 볼 수 있었다.
“이건 어때? 크기는 작아도, 아까와 똑같은 것들이야.”
“이건 어떠냐!”
나미아는 크게 소리 지르며 카르마 스톤을 던졌다. 그것은 안스란에게 닿자마자 큰 폭발을 일으켰고, 그 즉시 공중에서 내려오던 검은 눈이 사라졌다. 치마의 끝단이 살짝 그을린 안스란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야, 아파! 무슨 짓이야!”
“카르마를 통한 직접공격이다!”
“호오, 어쩐지 날 따돌리고서 윗대가리들이 뭔가 하고 있는 것 같다더니, 그런 걸 만들고 있었어? 하긴. 그런 걸로 맞으면 나도 좀 아프지.”
말과는 다르게 안스란의 표정에는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무기가 있다고 해서 신을 죽일 수 있다면, 신이 위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기는 맞추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직 많아! 너 따위를 죽이기엔…!”
“그래? 그렇지만 일단은… 맞춰봐야 알겠지?”
안스란은 다시 양 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 뒤편으로 그녀와 똑같은 모습의 환영들이 수백 개가 생겨났고, 나미아와 오디는 경악했다.
“어때? 이 정도는? 한 번 찾아볼 수 있겠어?”
안스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환영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이로서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환영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번 잡아보라고!”
“날… 날 놀리지 마!”
안스란의 뜻은 명명백백했다. 그녀는 나미아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다. 나미아는 시료스가 착용된 양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오디! 다 잡아!”
“예!”
미스릴 실 수십 가닥이 뻗어졌고, 오디의 주변으로는 수십 발의 마법 구체가 생겨났다. 그것이 일제히 발사되면서 수십 개의 환영을 노렸다.
“쉽게 맞아주진 않아!”
“메롱! 나 잡아봐라!”
“까르르르르!”
환영은 각자 말하고, 웃고, 소리치며 이리저리 움직였고, 나미아와 오디는 마법 구체와 시료스를 조종해 그것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펑! 퍼벙! 퍼버벙!
공격당한 환영들은 붉은 화염과 함께 폭발했다. 나미아와 오디는 그렇게 착실하게 하나하나 환영을 죽여 갔지만, 그 숫자가 줄지는 않았다. 그녀들을 농락하듯 숫자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으아아! 당당하게 덤벼라!”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있던 나미아는 카르마 스톤을 시료스에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시료스에 카르마를 입힌 그녀는 다시 시료스를 휘둘렀고, 카르마가 발라진 공격에 맞은 환영들은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었다.
오디 역시 그것을 보고서는 카르마 스톤을 손에 쥐고 그것들을 조종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환영들을 없애고 있을 때, 나미아의 시료스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걸렸다!”
“과연?”
안스란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고, 그 자리에서 환영 둘이 쏜살같이 날아서 나미아를 향했다. 나미아는 시료스를 움직여서 공격을 하려 했지만, 그 환영 둘은 지금까지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복잡한 움직임으로 시료스를 피해서는 그녀에게 충돌했다.
콰앙!
“꺄아악!”
“나미아 님?!”
오디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왼팔이 몽땅 타들어가고, 얼굴까지 그을린 나미아의 처참한 모습이 보였다.
붉은 머리는 검은 재가 되어 휘날렸고, 살과 함께 오그라들어 있었다. 머리의 한쪽이 완전히 타들어간 것이다.
“흐으윽! 저, 저것이…!”
“나미아 님. 가만 계세요!”
오디는 서둘러 그녀를 치료하려 마법을 사용했지만, 치유마법이 듣질 않았다. 눌어붙은 화상에서 진물이 흘러나왔고, 오디는 수차례 정신을 집중해 마법을 사용했지만 나미아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후훗. 어때? 격의 차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어? 어차피 그래봐야 당신들은 완전한 나의 공간에서 벗어나질 못해. 다시 말해,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내 맘대로 된다는 거야.”
안스란은 환영을 거두어들였다. 그녀는 생긋 웃는 얼굴로 손가락 두개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두 개의 가능성을 제시하지. 하나, 이대로 물러가서 임무실패를 보고한다. 둘, 저항하다 죽는다. 선택할 시간은 넉넉하게 줄 테니까 잘 생각해봐.”
나미아의 왼쪽 얼굴의 윗부분은 거의 눌어붙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오른쪽 눈으로만 안스란을 올려다보며 소리 질렀다.
“셋! 널 죽이고 돌아가겠어!”
그녀는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콰아아아!
시퍼런 화염줄기와 투명한 산성액이 용솟음치듯 안스란을 향했다. 모든 것을 태우고 녹여버리는 힘이건만, 안스란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비웃음을 날렸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듯 가볍게 손바닥만을 내밀었고, 그 손바닥과 부딪힌 불줄기는 그 주변으로 흩어졌다.
화라라라락!
“이런 구식 힘 따위는 나에게 통하지 않아. 카르마를 소모하며 던지는 공격이니까 조금 따끔거리기는 하네.”
안스란의 어조는 평온했다. 마치 하늘을 보며 오늘은 맑다고 말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말이었다.
나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공간을 얻은 신은 무엇보다도 강력했다.
안스란은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단순히 소멸의 의지만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손 위에는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무형의 기운이 가득 생성되기 시작했다.
의지가 닿는 모든 것에 영향력을 구축하는 신의 힘이었다.
안스란은 순진무구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미있게 놀았어. 좀 더 놀고 싶지만, 난 할 일이 많거든. 그럼 이만.”
그녀의 손에서 소멸을 위한 의지가 뻗어나갔다. 가볍게 공을 던지는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녀가 던진 것은 놀이용 공이 아닌 닿는 모든 걸 소멸하는 의지의 집합체였다.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심지어 공기마저도. 결과적으로 소멸의 의지는 그 뒤로 길게 공기의 소용돌이를 만들며 나미아와 오디에게 쏘아졌다.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걸!”
오디는 자신이 소지한 남은 카르마 스톤을 모두 허공에 뿌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수직을 잡은 채 자신의 의지를 실었다.
샤아아아악!
카르마 스톤이 빛나며 오디의 의지를 구현했다.
파아앙!
그녀의 바로 앞에서, 안스란의 소멸의 의지는 오디의 카르마 스톤 두개를 부수면서 사라졌다. 이 공간에 존재하기 위해서, 이 공간에서 본신의 힘을 다하기 위해 가져온 카르마 스톤을 직접적으로 사용해 안스란의 힘을 막는 것이었다.
“오, 오디! 그만둬!”
“저 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그러니 나미아 님, 제가 막는 틈을 타서 어서 공격을…?”
“그렇게 놔 둘 것 같아?!
안스란은 이 공간에 대한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나미아와 오디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고, 자신에게도 위협적인 카르마 직접 공격을 허락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연속적으로 소멸의 의지를 끌어올렸다. 저들이 저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게끔 신간차를 두어 맹렬하게 퍼부었다.
콰가가가가!
안스란의 힘은 무한정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디의 카르마 스톤은 한계가 있었다. 결과가 명백한 싸움이었으나, 오디는 물러서지 않았다.
파앙! 파아앙! 파바바방!
카르마 스톤이 깨어져 나가면서 소멸의 의지를 막아내고 있었다. 오디의 앞에 흩뿌려졌던 카르마 스톤이 눈에 띌 정도로 줄어가고 있었고, 나미아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디! 그만 해! 계속 하다간 네가…!”
“이 세계에서 추방당하겠죠. 하지만… 막는 걸 그만두면 나미아 님이 죽어요.”
그렇지만 저 소멸의 의지 사이를 뚫고서 안스란에게 공격을 할 방법도 없었다. 막기만 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방법은 그녀들로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나미아는 난생 처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걸 깨달았다.
막는 데라도 보탬을 주고 싶었지만, 카르마 스톤은 한 사람의 소유가 된 이상 그 사람의 의지만을 따르며, 다른 이의 의지와는 섞이지 않는다. 오디가 막고 있는 이상 그녀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어떤 때고 상황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조율하던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무력하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켜, 오디! 나의 의지도 만만치 않다는 걸 저 여신에게 보여주겠어!”
“나미아 님?! 아앗?!”
오디는 갑작스레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나미아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왼 쪽 팔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다치고, 왼쪽 눈마저 화상에 녹아내린 피부 때문에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나미아는 전신으로 주변을 느끼고 있었다. 안스란에게 다가가는 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미아는 카르마 스톤을 오른손에 쥐고서는 거기에 자신의 힘을 실었다.
“받아! 이 가짜여신!”
카르마 스톤에서 해방된 카르마가 나미아의 힘에 섞였고, 그것은 노란 광선이 되어 폭발하는 쏘아졌다.
콰아앙!
조금 전의 공격을 막아내던 것과는 달리, 안스란은 표정을 구기며 모습을 감추었고, 폭음과 함께 주변의 공간을 황색으로 물들며 날아간 힘은 안스란이 있던 자리를 관통했다.
광선이 지나가자마자 도로 나타난 안스란은 가볍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말했지? 난 진짜라고.”
“흥, 진짜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지!”
나미아의 오른쪽 눈이 빛났다. 안스란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고, 서둘러 모습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광선은 그녀보다 빨랐다.
콰르르릉!
“허억?!”
안스란의 등에 황색 광선이 직격했고, 안스란은 처음으로 받는 충격에 숨 막히는 소리를 내야 했다. 잠시나마 그녀의 모습이 꺼지듯이 흐릿하게 변했다. 카르마에 의한 타격으로 그녀의 일부분이 날아간 것이다.
“어떠냐! 가짜여신!”
“날 때리다니…. 꽤 노력 했는 걸?”
안스란의 표정에서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는 어느새 모았는지 모를 소멸의 의지가 공간을 간뜩 일그러뜨리며 발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날리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크기였다.
“장난은 이제 끝내겠어. 이젠… 재미없어.”
안스란은 너무나도 간단한 동작을 취했다. 단지 나미아를 가리키는 것만으로 거대하게 응집한 소멸의 의지를 쏘아 보내었다.
콰가가가가-!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공기를 먹어치우며 달려드는 소멸의 의지를 보며, 나미아는 몸이 굳는 걸 느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느껴졌다. 그녀의 입에서는 작은, 매우 작은 한마디만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그 때, 그녀의 눈앞으로 하얀색의 뭔가가 나타났다. 유백색의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지팡이를 들고 나선 오디는 카르마 스톤에 자신의 의지를 실었다.
“나미아 님!”
“오디?!”
오디는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그것을 매개체로 삼아 카르마 스톤에 막고자 하는 의지만을 흘려보내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 떠있던 카르마 스톤들이 일제히 앞으로 모여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나미아 님! 살아야 해요! 안스란을 물리치지 않아도 되잖아요! 살아야 해요! 도망치세요!”
“오디! 너는…?”
“차원의 틈새로 추방당해도 성족들이 알아서 구해주겠죠. 추방당하면서 무엇을 잃을지는 몰라요. 하지만… 살 수는 있겠지요. 그러니 나미아 님도 어서…!”
쩌저저적!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앞을 막아선 모든 카르마 스톤에 서서히 금기 가기 시작했다.
오디는 온 힘을 집중했지만, 안스란은 기어코 그녀들을 해치울 작정이었기 때문에 고작 단발로 끝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내보낸 의지에 좀 더 의지를 실었다.
카르마 스톤에 의해 소멸의 의지가 점점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지고 있었다. 카르마 스톤에 금이 가는 속도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오디가 강제로 차원 바깥으로 추방당하기 전에 소멸 될 것이다. 그러나 오디는 자신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미아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가세요! 카르마 스톤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하, 하지만 넌…!”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 때, 카르마 스톤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파아아아앙!
하안 빛과 함께 카르마 스톤의 파편이 날렸다. 막는 것이 없어지자 소멸의 의지는 다시 닿는 모든 걸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빛과 파편과 땅이 소멸되기 시작했고 나미아와 오디는 움직일 수도 없이 다가오는 소멸을 바라봐야 했다.
그런 그녀들의 앞으로, 금빛이 휘몰아쳤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한다! 사라져라!”
파스스스….
소멸의 의지는 목소리의 주인이 내린 명을 따랐고, 그 모습에 나미아와 오디를 물론이고 안스란마저 경악했다.
“너, 넌… 누구냐?! 어째서 내가 알 수 없는 거지?”
“내가 당신에게 발각되지 않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안스란.”
금발머리를 단정하게 기른 청년은 수수한 웃음과 함께 안스란의 말에 대답했다. 나미아는 그 목소리와 모습에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디에…고?”
“해고당했으니 지금은 브란디에고라고 불어주십시오. 나미아 씨.”
골드 드래곤의 신예인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는 밝은 웃음으로 나미아의 말을 정정했다.
“하아… 다행이군요. 당신이 도움을 주러 온 것이… 흐윽?!”
“오디?!”
오디의 몸이 조금씩 깜빡거리면서 점점 흐릿하게 변하고 있었다. 카르마 스톤을 모두 써버렸기에 더 이상 이 공간에 존재할 수 없게 되어 추방당하려는 것이다.
브란디에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늦었군요.”
“아뇨. 적당하게… 오셨어요. 죄송해요 나미아 님. 끝까지…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전 먼저… 추방당하게 되네요.”
“아니. 괜찮아. 나가서 보자. 응? 약속이야?”
“예. 나미아 님…. 그럼 브란디에고 님. 나미아 님을… 잘… 부타….”
오디의 몸이 완전히 흐려지면서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촛불이 꺼지듯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차원 밖으로의 추방이었다.
브란디에고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워하던 안스란은 오디가 사라지자 그제야 아직 자신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너, 넌 누구야! 너 같은 존재는 듣지도 못했어!”
“골드 드래곤의 신예이고, 지금은 세계에서 벗어난 존재로 변했습니다. 또한 어르신들이 주신 힘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거대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지요.”
“드래곤? 어째서 드래곤이 이 일에 개입하는 건가!”
“아, 지금은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라는 개인으로서 온 것이니 저의 혈족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마시길 바랍니다.”
브란디에고는 정중하게 안스란에게 대답했다. 이럴 때마저도 성실하게 대답한다는 것이 브란디에고다운 모습이기에, 나미아는 피식 웃었다.
“너 말이지…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다치셨군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치료를 하겠습니다.”
“아니, 이건 안스란의 공격으로 당한 거라 고쳐지지 않을…?”
나미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이내 표정을 바꿔야 했다. 닫혀있던 왼쪽 시야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화끈거리면서 계속 통증을 주던 얼굴과 팔이 서서히 편해지고 있었다.
“어어…?”
“카르마를 이용한 직접치료입니다. 카르마 소비가 많지만, 그런 만큼 확실하게 치유가 되지요. 이제야 괜찮아졌군요.”
“정말…이네?”
나미아는 자신의 얼굴과 팔을 매만지고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안스란을 보며 그녀가 했던 일이 아무 소용없게 되었다고 도발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안스란이 당장 여관 WISH만한 소멸의 의지를 던지려드는 걸 볼 수가 있었다.
“디, 디에고!”
“명한다! 사라져라!”
뒤를 돌아본 디에고는 얼른 외쳤고, 안스란이 모은 소멸의 의지는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안스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어, 어떻게…?”
“흠…. 카르마 소비가 크군요. 이렇게 소비하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데 어째 한 사람이 부족해 보이는군요? 하인츠 씨는 어디 가셨습니까?”
브란디에고는 자신이 행한 일에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 같았다.
나미아는 하인츠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얼굴에 분노를 띄웠다.
“저년이… 먹어치웠어. 하인츠 오빠는… 죽어버렸어.”
“허엇, 그렇군요. 그런데 나미아 씨의 카르마 스톤은 많이 있습니까?”
“처음에 너무 무리를 해서 그런지… 이제 열개 남았어. 그런데 너는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지? 카르마 스톤도 없잖아?”
“그건 나중에 설명 드리도록 하고…. 일단은 날아보도록 하지요.”
나미아는 뜬금없는 브란디에고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고 브란디에고는 설명 대신 나미아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있던 땅에 시커먼 암흑이 닥쳐오면서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무슨 일이야?”
“안스란이 공간 자체를 없애기로 한 겁니다. 저기 보세요. 어지간히 화가 난 것 같군요.”
안스란은 온 몸에서 분노를 발산하며 떠있었다. 그녀의 뒤로 보이던 하늘도 이내 암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천지의 구분이 없어지고 온통 암흑만이 있을 뿐이었지만, 서로의 모습은 너무나 잘 보였다. 단지 검은 천으로 주변을 둘러싼 방 안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이건…?”
“왜곡된 진실의 힘을 거둬들이는 것으로 공간을 유지하던 힘마저 거둬들인 겁니다. 그만큼 그녀가 싸우는 데만 힘을 집중하겠다는 뜻이지요. 지금 이 공간의 상태가 허공의 경계입니다.”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안스란이 손을 모으고서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계획은 침입자들을 간단하게 물리치고는 차원의 힘을 폭주시켜 신들에게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침입자 중에 예상치 못했고 감지하지 못했던 변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카르마를 생성할 수 있는 골드 드래곤이 어떠한 힘을 받아 더욱 강해진 채로 나타난 것이다. 신의 의지를 꺼트릴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의지를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적이 아니고 뭐겠는가. 어쩌면 골드 드래곤이 진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신들이 보낸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아 씨. 제 생각으로는 아마 평소처럼 힘을 쓰는 것으로 카르마를 소비하셨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응. 그래. 하지만 전혀 듣지 않았어. 그건 왜?”
“늦었긴 했지만, 카르마의 진짜 힘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이런 공간에서 카르마를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디 씨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이지요. 사실 카르마라는 건….”
브란디에고는 작게 나미아에게 설명했다. 단순히 지성이 있는 개체의 인연을 조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강 의미의 카르마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설명했다.
“…그거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카르마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증폭시켜 전지전능한 능력을 다룰 수 있지요. 제가 말씀드린 것 역시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거… 꽤 시간 걸리는 거 아냐?”
“아쉽게도 그렇지요. 익숙하지 않은 작업이 되실 테니까요. 그 시간 동안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미아 씨는 그 일에만 집중하실 수 있도록 안스란과 싸우겠습니다.”
브란디에고 같은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잘못 안 것을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한 나미아는 그의 말이 못미덥기도 했지만, 안스란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하인츠가 죽어버린 이상, 사용할 수단은 그것 밖에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보겠어.”
“그럼 부탁드립니다. 저쪽도 준비가 끝났군요.”
모든 힘을 자신에게 회귀시킨 안스란은 사방을 어둠으로 뒤덮은 빛을 두르고 있었다. 그 빛이야말로 왜곡된 진실을 상징하는 혼돈의 빛이었다.
나미아는 카르마 스톤이 든 주머니를 꺼내들었고, 브란디에고는 자신의 몸 속에 들어있는 다른 세 드래곤의 힘마저 끌어올렸다. 전체적인 힘은 안스란이 더 강하겠지만, 짧은 시간동안 목숨을 걸고 힘을 방출한다면, 그 시간만큼은 안스란에 필적할 것이다.
“자, 시작합니다. 안스란이시여! 세상의 평화를 위해, 사라져 줘야겠습니다!”
“한 번 해 보시지!”
브란디에고는 허공을 박차고 금빛의 섬광이 되었다. 안스란은 어둠을 발하는 빛이 되었고, 그 둘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질주하며 충돌하기 시작했다.
나미아는 그 모습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카르마 스톤을 꺼내 하나씩 삼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거의 자포자기 한 것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후우…. 애는커녕 남자하고 자본 적도 없는데….”
브란디에고는 가슴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힘을 온 몸에 둘렀다. 안스란의 주의를 최대한 끌기 위해서, 그녀의 모든 감각이 자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파장을 내뿜었다.
자신의 힘이 강한 기운을 내 뿜을수록, 나미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감춰질 것이다. 무한히 뻗어있는 허공의 경계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다면 지각능력으로 공간을 인식해야 하는 안스란의 주의력을 가릴 수 있었다.
신과 대적한다는 건 그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 되겠지만,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을 당연하게 벌여야 한다.
그는 안스란에게 돌진했다.
“신에게 덤비려 드는가, 드래곤!”
“드래곤이라서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첫 격돌.
신의 힘으로 서로를 장악하려 든다. 일종의 자장과 같이 뻗어 나오는 힘들을 있는 힘껏 맞붙여 서로의 영역을 장악하고, 잠식하여 점차적으로 우위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안스란은 수백만 개의 바늘로 그를 공격했고, 브란디에고는 그 술수를 흉내 내어 마찬가지 숫자로 그것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아주 조금 늦게 하나를 더 내보내었다. 의지이자 개념 그 자체인 힘은 서로에게 본질적인 타격을 준다. 존재의 여부를 뒤흔드는 근본적인 힘의 싸움이다.
소리도 없었고, 빛도 없었지만 그것은 치열한 싸움이었다.
0.1초도 되지 않을 시간의 격돌동안 인간 사회가 수십 번을 망했다 다시 세워질 카르마가 오갔다. 둘 다 서로가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인식하고 있었고, 힘을 아낀다는 것도 불가능했다.
안스란은 분노했다. 아니, 그녀는 분노 그 자체였다.
소녀였던 안스란을 죽이고, 억지로 망자의 여왕을 만들고는 육백만의 죽은 자들에게 추앙받게 하여 여신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세상의 위협이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말살하려고 든다.
그것을 알게 된 그녀의 분노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미 안스란의 본성은 분노에 잠식당해 사라지게 된 지 오래였다.
진실은 순수한 사실에 숨겨진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그것이 왜곡되었다는 것은 본질적인 모순을 뜻하며, 모순은 곧 혼돈으로 정형화되기 전의 세상을 의미한다. 결국 안스란에게 주어진 힘은 세상의 근본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런 강력한 힘이 분노에 이끌렸다.
분노의 창조, 분노의 형상화, 분노의 세계….
모든 것의 파멸을 바라고 동시에 자신마저 버릴 분노가 안스란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곧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며, 자신의 존재가 지워짐과 동시에 모든 차원이 헝클어지며 신들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시기를 앞에 두고, 방해를 받는다는 것에 분노했다.
“아무도 날 막지 못해! 날 막을 수는 없어! 마지막마저도 내 뜻대로 할 수 없게 둘 수는 없어!”
여신이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의지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무시당하고 쌓아온 분노의 의지는 과연 강력했다.
처음으로 마음껏 발산하는 힘에 안스란은 어느덧 나미아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과연… 그런 것이었어.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구나.”
나미아는 브란디에고가 한 말을 할 수 있었다. 카르마를 직접적으로 다룰 경우에는 사용자의 의지가 그대로 세상에 구현된다. 세상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힘이기 때문에 없던 것을 생겨나게 하고, 있던 것을 지울 수 있는 것이다.
“알겠어. 디에고. 이걸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몸 안에서 카르마들을 다뤄 의지대로 이끌었다. 이것으로 자신이 해야 될 일은 명백해졌다.
이 일이 끝나기 전에 브란디에고의 힘이 다 떨어지지나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야. 그러니, 한 번에 성공하자. 디에고.”
이젠 보이지도 않지만, 그녀는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디에고에게 말했다.
그녀의 아랫배에서 하얀 빛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다.
마흔 네 번째의 격돌을 마친 브란디에고는 나미아의 부모가 전해준 힘 중, 두 사람분이 이미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나미아의 부모가 준 모든 힘이 사라진 것이었다.
한 명 분은 이백만의 회색 존재를 상대할 때 사용했었다. 남은 것은 이제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던 힘뿐이었다.
이것으로는 앞으로 고작 열 세 번의 격돌을 더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나미아가 어서 자신이 부탁한 일을 끝내길 바랄 뿐이었다.
그는 찰나의 시간 동안 나미아의 상태를 살폈고,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계산을 한 결과 앞으로의 진행 시간동안 자신의 힘을 몽땅 써도 부족하다고 결론 내렸다.
‘최소한 한 번, 한 번의 격돌만 줄일 수 있으면 승산이 있어.’
브란디에고는 이를 악물고는 중간에 공간을 가르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속도를 높이고서는 전체적으로 사용하는 힘을 줄여 추격전을 벌이는 것으로 힘을 아끼기로 했다.
안스란은 브란디에고가 속도를 높이는 걸 보고서는 자신 역시 속도를 높였다. 분노의 초점은 하나에 맞춰져 있었고, 그 하나는 나미아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대로 물질계의 존재인 이상, 자신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최대한 가지고 놀고, 비명을 지르는 걸 보며 천천히 먹어치우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안스란’이라는 존재 자체가 되어 브란디에고를 습격했다.
보통 때 같았다면 입 끝을 들어 올리며 배부른 미소를 지었겠지만, 지금 나미아는 인자한 웃음을 얼굴에 그리고 있었다. 아홉 개의 카르마 스톤을 먹는 것으로 그녀의 의지는 형상화의 직전에 다다라 있었고, 마지막 하나를 먹는 것으로 그 형상화가 끝나게 된다.
“와! 디에고! 난 이미 준비가 끝났어!”
그녀는 어디있는지도 모를 브란디에고를 불렀다. 분명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 닿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미아의 확신대로, 브란디에고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때마침 힘이 거의 다 떨어졌을 무렵에 참으로 시기적절한 부름이었다.
안스란은 이미 하나의 존재일 뿐이었다. 형태도 없었기에 그녀의 힘을 존재 바깥으로 마구마구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와 대적하는 자신에게는 독과도 같은 힘이었다.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집적률이 낮은 안스란의 모습은 힘이 있을지언정 예리함이 없는 망치와도 같았다. 충격이 오히려 분산되기 때문에 힘을 보존하기는 쉬웠다.
그는 방향을 크게 바꿔 나미아에게 직진했다. 이미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안스란은 당연히 그를 따라왔다.
그러나 브란디에고는 한 가지 사실을 놓쳤다. 집적률이 낮다는 건 결국 인식 범위가 획기적으로 넓어진다는 뜻이었다. 안스란은 브란디에고가 나미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챘다.
<무엇을 꾸미고 있는가! 허튼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아차!’
브란디에고는 이를 악물고 더욱 더 속도를 높였다. 안스란이 다시 형체를 갖춰 집적률을 높이고는 속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그의 힘이 약해졌고, 그녀의 익식 범위가 확산되면서 결국 나미아의 형태가 들킨 것이다.
이대로라면 나미아에게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녀가 손 쓸 틈도 없이 안스란이 그녀에게 닿을 것 같았다.
대책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안스란의 발목을 잡을 대책이.
그러던 그가 첫 번째로 느낀 것은 그 생각마저 너무 늦었다는 것이며, 두 번째로 느낀 것은 나미아가 이미 마지막 카르마 스톤을 삼키고 최종 과정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점으로 보이던 나미아가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왔고, 그는 그녀와 충동하지 않도록 방향을 살짝 바꾸었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브란디에고의 수고를 칭찬하고는, 그의 뒤에서 날아오는 안스란을 보았다.
신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나락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와도 같은 형상을 한 안스란을 보며, 나미아는 측은함을 느꼈다. 살아있을 때의 죽음도 마음대로 되지 못했건만, 초월자가 된 지금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랫배에 올려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마치 안스란을 포옹하려는 것과 같은 자세를 취한 그녀는 인자한 웃음을 띈 채 상냥하게 말했다.
“나와요. 하인츠 오빠. 안스란 언니를 사슬에서 풀어내자고요.”
안스란의 눈이 커졌다. 하인츠는 분명 자신이 뜯어먹고 죽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미아의 말은 무엇이며, 그녀의 아랫배에서 터져 나오는 하얀 빛과 검을 든 소년은 무엇이란 말인가?
안스란은 멈추려고 했다. 이대로 멈춰 저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서둘러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녀가 나미아에게 달려들던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소년의 모습을 한 하인츠의 검이 그녀를 꿰뚫었다.
“아아아아악!”
“안스란! 이걸로 해방이다!”
안스란을 구하기 위해 한 번 죽었다가 성족 헤르디스 베올딘에 의해 되살아났을 때의 모습을 한 하인츠는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미아에 의해 부활하면서, 그의 근본부터가 다시 만들어졌고, 첫 죽음이 있기 전에 그가 손에 쥐었던 검이 손에 들려있었다.
하인츠의 검이 안스란을 꿰뚫으면서 하인츠의 몸도 칼과 같이 그 몸을 꿰뚫었다.
콰가가가가-!
하인츠의 머리가 안스란의 등 뒤로 힘겹게 빠져나오면서, 안스란으로부터 안스란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소녀 안스란은 소년 하인츠의 목을 감싼 채로, 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여신 안스란으로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
여신 안스란은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두 존재를 느꼈다. 그녀의 입으로는 참혹한 슬픔과 비통한 좌절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 이럴 수는…! 나의 존재는…!”
나미아는 그 모습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가슴 아프지만…. 여신 안스란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
“이럴 수는… 없… 아아아악!”
여신 안스란의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소년 하인츠와 소녀 안스란은 그 속을 빠져나왔고,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소리 지르던 여신의 몸이 그대로 회백색으로 변하여 천천히 그 형태가 스러졌다.
나미아는 무너지는 안스란의 너머로 조용히 공중을 딛고 서있는 하인츠와 안스란을 보았다. 그의 부활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 넣은 터라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그의 안부정도는 물을 수 있었다.
“하인츠 오빠. 괜찮아요?”
“난… 괜찮아. 안스란, 너는?”
하인츠의 품에 안긴 작은 소녀는 젖은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나… 오래…. 흐윽!”
소녀 안스란을 울면서 하인츠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브란디에고는 힘없이 떠있는 나미아의 어깨를 잡아 부축하며 그 둘의 모습을 보았다.
“이걸로… 끝이군요.”
“응. 그래. 끝이야.”
“일단 이걸로 회복을 하세요. 차원 탈출은 힘들 테니까요.”
“고마워, 디에고….”
디에고는 자신이 만들어낸 카르마 스톤을 나미아에게 넘겼다.
그것으로 자신의 체력과 정신을 회복하려던 나미아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뭐지?”
“예?”
“저것… 봐.”
나미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암흑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보이는 균열이 있었다. 브란디에고가 그것을 올려다 본 순간, 그 균열은 사방으로 균열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은 차원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하, 하인츠 오빠! 어서 이쪽으로! 차원이… 차원이 무너져요!”
“알았어!”
하인츠는 매우 느릿한 속도로 나미아에게 다가갔다. 여신 안스란이 죽은 이상 그 힘을 끌어다 쓸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은 고작 그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디에고. 차원 탈출은 할 수 있겠어?”
“아, 할 수 있어요. 아직 카르마 스톤 안 쓰셨죠? 지금 당한 탈출하려면 나미아 씨의 도움도 필요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
“제 생각에 동조해주시기만 하면 돼요.”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붕괴는 겉면부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그 내부는 시간이 넉넉한 것 같았다.
하인츠와 안스란이 이제 막 나미아의 손이 닿을 거리까지 왔고, 나미아는 손을 내밀었다.
그 때, 내부의 붕괴가 시작됐다.
쩌저저적!
“아앗?!”
하인츠와 안스란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자리는 찢겨져 나간 차원의 어둠이 차지하고 있었다.
“오빠! 언니!”
“여기야!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균열이 3차원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간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어요! 어서 이쪽으로 와서 같이…. 나미아 씨!”
설명을 하던 브란디에고는 갑자기 위로 날아오르는 나미아를 보고 경악했다. 그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나미아는 위로 치솟아서는 앞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공간의 붕괴가 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그 균열은 건너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서둘러 안스란과 하인츠를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고작 머리하나 들어갈 공간만이 남아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미아는 이를 악물고는 그들을 불렀다.
“하인츠 오빠! 안스란 언니! 이거 받아요!”
하인츠는 갑자기 날아오는 카르마 스톤을 엉겁결에 받아들고는 경악했다. 이걸 줘버린다면 그녀는 어떻게 귀환을 할 것인가?
“나미아! 너는 어쩌려고?!”
“괜찮아요! 그걸로 어서 돌아가요! 어서!”
“나미아! 나미…!”
쿠르르릉….
그들의 모습이 보이던 공간마저 무너졌고, 나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카르마를 모두 썼으니 차원 추방이라도 당할 것이지만, 그들은 아예 차원에 갇혀 죽어버릴 것이다. 카르마 스톤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안전하게 차원 밖으로 나가 성족들을 만나면 될 것이다.
브란디에고는 나미아를 붙잡았다. 그의 표정엔 당황함이 가득 어렸다.
“나미아 씨! 어쩌자고…!”
“돌아갈 힘은 있지?”
“하, 하지만 남은 힘은 고작 한 명 분…!”
“괜찮아. 이대로 난 차원 추방을 당하면 되니….”
웃으면서 말하던 나미아는 퍼뜩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붕괴되는 차원에서는 모든 출입 채널이 닫히기 때문에 추방당할 수 없었다.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 추방당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오디가 알면 화낼 거야. 또 준비가 부족했다고.”
“지금 그걸 생각할 때입니까? 안 되겠군요. 통로를 열 테니 어서 나미아 씨라도 빠져 나가요! 빨리!”
“디에고. 너무 무리한 말을 하는 구나?”
쩌저저적! 쩌적! 쿠르르르….
그들 주변의 공간이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다급해진 브란디에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어서 가요!”
“싫어. 네 힘으로 널 구해야지, 왜 날 구하겠다는 거니? 이상한 녀석이구나. 서둘러서 가. 난 이곳에서 죽어도 성족이나 신들이 알아서 살려줄 거니까. 어차피 그러기로 계약이 되어 있어.”
“…정말입니까?”
브란디에고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나미아는 거짓말을 했다.
“응. 정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서 뵙도록 하지요.”
브란디에고는 차원의 붕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차원의 붕괴한다는 것은 그 내부의 모든 존재가 소멸한다는 것으로, 다시 말해 존재 정보가 말소된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서 소멸된 나미아의 존재 정보 역시 아예 없던 것으로 되기 때문에 그녀를 되살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원망하는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지만… 미안, 디에고. 네 취직자리는 다른 곳에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브란디에고를 설득하는 것은 쉬웠다. 그가 모르는 그럴싸한 근거를 대고 납득시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이 차원에는 나미아 혼자 남게 되었다. 붕괴되는 차원의 유일한 존재로서 같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슬프거나 서글프지도 않았다. 다시 살아날 수 없고, 다시 부모와 동생을, 그녀를 알고 친하게 지내던 모든 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그러나 눈물이 나왔다.
“어라…?”
그녀는 눈앞을 적시며 눈가로 떠다니는 눈물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슬프지 않은데, 자신은 슬프지 않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하하하…. 바보구나, 나도….”
슬프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을 생각해주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고 있었다.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의식적으로 당당한 체를 해 봤자, 아무도 봐줄리 없는 이 공간에서 그녀는 홀로 강한 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 모두들. 나미아는 이제 가요. 흐윽…!”
그녀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어린애처럼 웅크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가강! 콰앙!
그녀의 주변으로 공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울었다.
한참을 계속된 공간의 무너짐. 울다 지쳐 잠든 그녀는, 그것으로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야말로 영원한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녀의 귀로 들리는 목소리는 뭐란 말인가?
“나 참…. 이래서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렇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거짓말을 하다니, 하마터면 진짜로 탈출할 뻔 했잖아요.”
그 목소리 이외의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음소리를 먹어치우던 차원이 붕괴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는 책방의 눈빛을 하고 쓴웃음을 짓는 수려한 금발의 남성이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디에…고?”
“직원이 아니니 브란디에고로 불러 달라 했잖습니까. 아니, 상관없군요. 나미아 씨에게라면 애칭을 허용해 드리겠습니다. 정신이 드세요?”
“여긴… 뭐니?”
“두 사람을 탈출시킬 양은 안 되어도, 두 사람을 보호할 힘은 남아있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가짜로 나가는 체 하다가 우는 소리 듣고 되돌아 왔습니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황금색의 반투명한 막이었다. 이미 차원의 붕괴는 끝난 듯, 황금색 막의 저편으로는 각종 차원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그들은 차원의 바깥쪽에서 그 틈새를 떠다니는 중이었다.
현재 상황을 파악한 나미아는 경악한 표정으로 브란디에고를 꾸짖었다.
“대체 어쩌자고! 차원의 틈새를 유영하다가 이대로 죽어버릴 수도 있잖아! 어떻게 넌 계산이 그렇게 둔하니?! 성족들이 우릴 발견해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아무 차원이나 끌려 들어갈 수 있다고! 바보 아니니?”
브란디에고는 무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꿋꿋하게 듣고는 곧바로 화를 내었다.
“바보는 누가 바보입니까! 자살을 해도 정도가 있지! 사람이 뻔히 걱정할 거라는 거 알면서 속이려 듭니까?! 당신 가족을 생각해 봐요! 그래도 그리 쉽게 죽고 싶습니까?! 헤어지기 싫어서 붕괴되는 차원 속에서 징징 짜던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바보취급을 하다니요!”
“디에고…?”
“그대로 당신이 죽었으면 넘쳐날 슬픔이 아이리펜 전역에 넘실거릴 겁니다! 게다가 전 그럴싸한 고백도 하기 전에 실연당하게 된다고요! 당신 주변을 좀 생각해요!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습니까?! 이대로 어떤 차원에 끌려간들 어떻습니까! 힘을 합치면 분명히 돌아갈 수 있어요!”
“…너 너무 논점이 부정확하다고 생각 안 해?”
나미아는 당황한 나머지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브란디에고는 현재 나미아가 멋대로 죽으려고 했다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죠. 아무튼, 전 절대 당신이 그냥 죽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아버님께 선전포고도 했으니까요.”
“아버님? 누구 말이야?”
“라이니시스 씨요. 여기로 오기 전 선전포고를 했고, 많은 도움도 받았습니다.”
“…뭔가 말이 이상하다? 선전포고는 뭐고 도움은 뭐야? 그거 참 상반되는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니?”
브란디에고는 책상다리를 한 채 무릎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된 자세로 잠시 생각했다. 나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바로 옆에 와서 앉았고, 곧 브란디에고가 입을 열었다.
“나미아 씨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 전에 일단 살아는 있어야겠기에 힘 좀 빌려달라고 했… 왜요?”
“수많은 구애자들 중에서 아빠를 직접 만난 건 너 뿐이라고 생각하니 재미있어서 말이야. 너 치고는 대단한 수를 쓰네. 이걸로 우리 아빠라고 엄마한테 점수 좀 따놓으려는 거지?”
브란디에고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미아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살짝 어깨를 기대었다.
“그래. 내 생에서 내 평생 날 보살펴줄 사람도 필요하긴 하지. 무사히 돌아가면 애인 자리 정도는 내줄게. 그런데 어떻게 돌아갈 거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흘러가다 아무 차원으로 들어가 힘을 비축해야 합니다. 차원을 이동할 카르마를 얻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많이 걸립니다. 어차피 차원이라고 해도 관장하는 신들이 같으니 금방 저희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불가능할 경우에는 최소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힘이라도 빌려 주겠지요.”
“후훗. 차원간 여행이야? 꽤 재미있겠네. 가족 외의 사람이랑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아. 앞으로 잘 부탁해. 애인 후보생 씨.”
“예. 나미아 씨.”
나미아는 조금 더 그에게 기대었다. 어떤 차원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브란디에고는 노력할 것이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짜 손님의 의뢰가 끝난 지금, 이것은 그녀가 최초로 일에서 벗어나 즐기는 휴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쨌든,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렇게 차원의 틈새를 흘러갔다.
어딘지 모를 시작점이 될 차원을 향해….
Guest.Last: 진짜 손님. - 종료.
Guest.Epilogue: 기다리는 사람들 품으로.
여신사력 8년. 14월 10일.
지금도 신관들 사이에서 불가사의로 거론되는 여신 안스란의 사멸은 처음에 악질적인 거짓말로 받아들여졌다가 안스란의 신전이 모두 문을 닫고 신관들이 마지막 신의 말씀에 따라 흩어지고서야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힐텐펜스의 중앙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던 여신수는 사시사철 무성하던 잎이 모두 떨어져 내리고서는 줄기와 가지가 모두 하얗게 변했다. 사람들은 여신이 사멸한 증거로서 그것을 받아들였고, 안스란 교단의 총본산이던 그랜드 트리는 신학을 위한 성전에서 고고학을 위한 성전으로 바뀌었다.
죽은 것에 대한 학문은 고고학일 수밖에 없다.
안스란 교단의 최고 신관이던 하인츠는 홀연히 나타나 신관들에게 여신이 해방되었다는 말을 전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신관들은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환희에 몸을 떨었단다.
자신이 섬기던 신의 사멸이 그들에겐 그렇게나 기쁜 것이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지만, 그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안스란 교단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이로 인하여 신전에 관련해 종사하던 무수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었으며, 신도들은 믿을 곳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륙 전역을 휩쓸던 대 혼란이 소강상태로 가라앉았고, 안스란이 사멸한 해를 원년으로 만들어진 여신사력이 3년이 될 때까지 혼란의 정리로 아이리펜은 몸살을 앓았다.
신이 죽은 관에 채워지는 것은 금화라고 누가 말했던가.
안스란 교단이 가지고 있던 신전 소유의 농토와 농장, 장원은 신앙이 아닌 금화로 매각되었고, 이곳에서 이켈라인 상회는 거대한 돈줄을 마음껏 풀었다. 신전에서 주조하던 와인이나 재배하던 밭작물은 물론이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까지 대부분을 사들였다.
돈은 감정이 없다. 자신이 어디에 투자되는지, 돈은 따지거나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돈은 좋은 동료다. 많으면 많은 수록 좋은 동료.
여신이 죽은 지 8년 째. 혼란은 이제 정돈되고, 안스란의 사멸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은거한 신관들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힐텐펜스에 들르게 되었다.
아직은 여신수에 대한 경외와 존경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얀 박제가 되어버린 나무를 치우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마도 두 세대 이상 지나면 기념물로 지정하든지 베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로 결정을 내릴 지도 모른다.
그랜드 트리는 이켈라인 상회가 사들여서 그곳으로 본사를 옮길 거라는 많은 사람들의 예측을 깨부수고 거대 도서관으로 탈바꿈했다. 근처에 있는 많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며 그랜드 트리 도서관을 애용했다.
처음에 힐텐펜스 시민이나 관광객들은 도서관으로 변한 신전에 많은 거부감을 가졌지만, 그것은 치열한 광고 전략과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침묵의 미덕을 아는 동료가 많이 소모되었다.
안스란 교단의 이전의 영광을 알던 사람들은 씁쓸한 얼굴을,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은 신기한 표정을,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랜드 트리 도서관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쩌면 속이 늙었을지도 모른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찾으시는 책들은 있었습니까?”
“다행히도요.”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늘 가시던 호숫가로 자릴 옮길까요?”
“아니요. 집으로 가주세요. 비가 올 것 같군요.”
마부인 에렉낙스는 안스란 교단의 몰락과 함께 실업자가 된 신전 고용 인력이었다. 그것을 내가 거둬 마부로 쓰고 있었다.
“어서 오렴. 티나세르.”
“예.”
마차안에 앉아있던 오디 언니가 생긋 웃으며 날 반겨주었다. 벌써 8년이나 지났지만 나미아 언니 옆이 아닌 자리에 앉은 오디 언니를 보면 어색하기만 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고, 오디 언니는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시청에서 주최하는 상회 연합 무도회가 있어. 우리 상회가 연합에 가입되어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경쟁자들의 얼굴 정도는 봐주렴.”
“언니… 그 말씀은…?”
“너도 이제 정식으로 데뷔를 해야지. 언제까지 ‘흑막의 회장’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잖니?”
“그렇지만 상회의 회장은 나미아 언니에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미아 언니의 생사가 불투명한 지금, 상회의 대표자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오디 언니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나미아 언니의 자리에 내가 앉을 수는 없다.
물론 오디 언니가 이야기한 대로 흑막의 회장으로서 대부분의 최종 결재를 처리하고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라지만, 정식으로 회장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
“나미아 님은 이 세계에 계시지 않잖니. 시장에서 상회의 주인을 기다리는 것도 이제 한계란다. 앞으로 계속 숨기고만 있으면 상회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거래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거야.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상회가 사라질 수도 있어. 나미아 님이 돌아오셨을 때 뭐라고 하시겠니?”
“그건….”
“나미아 님은 절대 무리수를 두지 않으셔. 너도 알잖니? 가능성 있는 일에만 도전하고, 무슨 일이든 좋게 끝낼 수 있는 분이라는 걸. 그 분의 손님이었던 너라면 잘 알고 있을 거야.”
“네. 알아요. 그건 그렇죠.”
나는 왼손 손등에 있는 상처를 매만졌다.
이 상처를 만들게 한 ‘데그 아저씨’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내년 초 결혼까지 한다고 한다. 굳이 내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는 일을 편지를 보내어 허락해 달라 간곡히 부탁했다. 상대는 그때 그의 앞을 제일 먼저 막아선 내 또래의 소녀, 휘리넨이라고 한다. 이제는 나만큼 커서 고아들의 큰누나 역할을 하겠지.
이미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가 우리 부모님을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헌신적으로 수많은 고아들을 돌본 것도 사실이다. 매달 이켈라인 상회 소속 티나세르 이켈라인의 이름으로 가는 후원금을 장부에 기록 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되새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약간의 행복이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고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내년부터 그에게 가는 후원금에는 티나세르 이켈라인이 보냈다는 짧은 서명도 없어질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나미아 언니의 작품이다. 그 상황만 두고 볼 것이 아니라 훗날까지도 예상해 최후까지 행복하게 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옛날이야기의 결론처럼 사람들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도록 조치를 한다.
어떠한 일에 도전하든, 최대한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나미아 언니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앞가림조차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언니는 꼭 돌아온다.
하나,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상회를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적어도 언니가 돌아왔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걸 내가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도리겠지.
나미아 언니는 내 인생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니까.
“알겠어요. 무도회에 참석하겠어요. 하지만, 춤을 추지도 않을 것이며 오디 언니가 같이 가지 않는 이상은 저도 나가지 않아요.”
“당연하지. 그런 자리는 비서가 같이 가줘야 하잖니?”
“비, 비서요?”
어느 틈엔가 자신의 지위까지 정해버리는 오디 언니를 보며, 난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미아 언니가 부재중인 8년간, 어쩐지 오디 언니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럴 필요 없는데… 무리하시기는….
여신사력 8년. 14월 12일.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상회 연합 무도회에 등장한 이켈라인 상회의 흑막의 회장이 묘령의 여성이라는 소문은 이미 대학 졸업 논문을 제출하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수고했어요, 라르지엔 양. 검토 후 연락을 주겠어요.”
“예. 교수님.”
학교에서 나의 성은 라르지엔이다. 아직 정식으로 이켈라인 가문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내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정식으로 이켈라인 가문의 일원이 될 것이다.
“얘. 티나. 그래서 말인데, 그 흑막의 회장이 말이지….”
교수실에서 나온 날 붙잡고, 대학 다닐 동안 내내 친구였던 페시아 사블이 흑막의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삼촌이 그 무도회에 출석해서는 이야기를 해주었나보다. 나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사블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있었나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난 눈을 가리는 가면을 하고 참석했다. 가장무도회는 아니었지만, 흑막에서 가면으로 노출도를 조금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불만을 종식되었다.
오디 언니가 말하길, 내가 절세미녀는 아니더라도 한 나라를 풍미할 정도의 미모를 갖추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오디 언니는 나미아 언니와 마찬가지로 절세미녀에 동성이 봐도 육감적인 몸매를 하고 있으니, 나로선 부러움에 눈이 멀어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
나미아 언니처럼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면 훨씬 편하겠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내 사춘기를 지배한 두 언니의 영향 때문이리라.
어쩌면 오디 언니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리저리 꼬이는 날파리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티나세르. 시간 있으면 오늘 저녁 우리 집의 무도회에 참석해줄 수 있겠니?”
“미안하지만, 아르츠헤버. 난 오늘 막 논문을 제출한 터라서 피곤해.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
힐텐펜스 시장의 아들인 아르츠헤버는 나의 단호한 거절에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나의 두 언니처럼 사람의 속을 직접적으로 읽는다든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아르츠헤버가 자신의 집안 배경으로 날 꼬시려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벌써 4년째고, 그의 태도는 집안배경을 어떤 형식으로 등에 업느냐는 것에서 한 치도 발전하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정성을 봐서라도 한 번 정도는 응해주겠지만, 자신보다도 자신의 힘을 내세우는 사람에겐 별 볼일 없다.
“티나, 너도 참 매정하다. 오늘 지나면 볼 일도 없잖아?”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그러면 한층 더 편해지겠네. 앞으로 볼 일이 없을 테니까. 안 그래?”
“후훗, 너도 참 별난 아이야.”
페시아는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얼굴로 어린아이 같이 웃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나도 같이 웃음이 나왔다. 같이 있어 마음이 편한 친구다.
“무도회는 안 되겠지만, 티 파티는 어때? 우리 집에서 조촐하게 이브닝 티 파티를 열기로 했거든. 저녁 먹고서 수다나 떨자고.”
“누가 오는데?”
“늘 그렇지. 우리 학부 애들 몇몇. 대부분은 아르츠의 무도회에 간다나 봐.”
“알았어. 해 질 무렵에 찾아갈게.”
페시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기뻐하는 표정을 보며 나도 기뻐한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나의 일상 곳곳에 있었다. 나미아 언니가 있었기에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이다.
정작 그 소중한 일상에 언니가 없다는 건 슬프기만 하다.
여관 WISH의 5층에는 더 이상의 특별손님 찾아오지 않았다. 특별손님이 있도록 만든 자들의 목적은 이미 달성된 것 같으니, 그 때 찾아온 손님, 진짜 손님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특별손님은 없었다.
5층의 G1호는 여전히 나의 방이다. 이제는 5층의 주인이라고 해도 좋다고 오디 언니가 허락했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나미아 언니의 방을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니가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오디 언니와 내가 살고 있는 그 조용한 공간에,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미아 언니와 오디 언니의 부모 되시는 분들이시다.
척 봐도 나미아 언니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는 라이니시스 씨와 부드러운 인상의 미리안 씨, 차분한 인상의 에실루나 씨가 두 언니의 부모들이시다.
오디 언니는 나미아 언니가 내게 유언장 같은 편지를 남기고 떠난 후, 일주일 뒤에 나와 비슷한 연배의 소년과 소녀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 직후 3일간 세 명은 잠만 자면서 혼절해 있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깨어나 나에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신들의 음모와 여관 WISH의 탄생 배경 등을 알게 되었고, 나미아 언니와 오디 언니의 집안사정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 뒤, 처음으로 라이니시스 씨를 만났을 때, 드래곤 중에서도 흉포하기 이를 데 없다는 레드 드래곤을 만난다는 생각에 그만 척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실례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세 분은 그 뒤에도 종종 이곳을 방문하셔서 나미아 언니의 소식을 묻곤 하셨고, 그럴 때마다 난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오늘도 그랬다.
“늘 찾아오시는데 좋은 소식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니, 티나세르가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누차 말했다시피 우리가 미안하지. 딸자식을 잘못 키워 다른 사람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았으니까.”
“어머? 전 잘못 키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아이가 자랑스러운걸요? 당신의 가슴 속 깊이 남아있던 슬픔을 거둬갔으니까요.”
“게다가 그 아이는 죽음과는 그다지 친한 아이가 아니지요. 조만간 웃으면서 기다기는 사람들 품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미아 언니가 언제나 당당하고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데에는 부모의 교육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자신들의 교육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다.
허나, 초월적인 존재들이라고 할지라도 부모자식간의 정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미약하지만 저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슬픔이 그것을 증명한다.
“동생들은 잘 있나요?”
“잘 있다. 나미아가 언제 오냐고 칭얼거리는 걸 제외하면.”
“그러고 보니 체리랑스가 기묘한 말을 했어. 걱정하기보다도 놀랄 것에 대비하는 편이 더 좋다고. 무슨 뜻이었을까?”
“그런 말은 오히려 화이트 드래곤 쪽이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아이는 특별하니까요.”
오디 언니와 세 부모님들 간의 이야기는 대부분 내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지 오디 언니의 뒤로 여섯 명의 동생들이 더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해츨링들이라서 아마 내가 죽기 전까지도 볼 수는 없을 것이라 했다.
그 뒤로 오디 언니와 세 분의 이야기를 계속되었고, 나는 이브닝 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비웠다.
레드 드래곤 남편과 블랙 드래곤 아내 둘이 있는 자리에 함께 앉아 찻잔을 기울인다는 건 언제 겪어도 익숙하지 않는 일이다. 상회의 중역들과 앉아서 차를 마시며 서너수 집어나가는 이야기를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정도다.
오디 언니가 날 그만큼 가족으로 생각해주고 있고, 그 부모님들이 그런 언니의 생각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그런 자리를 버티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 일상속의 비일상은 점점 나미아 언니의 공백을 크게 느끼게만 하고 있었다.
여신사력 8년. 14월 14일.
“어서 오세요. 어머, 티나. 오랜만이야. 요새 발길이 뜸하던데?”
“미안해, 언니. 졸업논문이다 뭐다 바빴어. 라이니시스 씨하고 미리안 씨, 에실루나 씨가 들르셨는데 만났어?”
“너희 쪽에 가기 전에 이쪽에 먼저 들르셨어. 차줄까?”
“응. 쿠키나 빵 있으면 곁들여서. 오빠는?”
“물건 받으러. 조만간 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카페 Karma의 여주인인 메이 언니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여신이 죽은 이후에 그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그들은 그녀가 힐텐펜스 내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줄은 모르고 있다.
안스란 메이. 제이중립신이었다가 세계의 유지를 위하여 신들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신성을 소멸당하고 인간으로 격하된 그녀는 자신의 성을 이름으로 삼고 최고 신관이었던 하인츠를 남편으로 맞이해 힐텐펜스에 정착했다.
원래는 그들이 고향인 펜힐마을에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나미아 언니를 기다리면서 힐텐펜스에 남아있기로 했다.
여신과 그녀의 최고신관을 알고 지내는 언니 오빠로 대하라는 건 상당한 무리가 있는 요구였지만, 자주 보다보니 지금을 그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안스란 교를 믿었더라면 조금 더 거부감이 컸을지도 모른다.
“메이! 나 왔어! 어, 티나? 오랜만이다.”
“안녕, 하츠 오빠.”
하인츠 실베언. 지금은 하츠 베인이라고 이름을 바꾼 전 안스란 최고신관은 거리를 가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청년으로서 지내고 있었다. 이전 경력이 워낙 화려해서 그렇지, 길거리에서 보면 그냥 지나치고 말 평범한 사람이다.
예전 그가 은자행을 하던 때에는 아마도 그 평범한 외모 때문에 찾기가 어려워 신비감이 더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런 그의 뒤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튀어나왔다.
“이모!”
“와아! 라이닌! 많이 컷구나!”
올해로 다섯살이 되는 이 아이는 하츠 오빠와 메이 언니의 아들로서, 그들의 은인이라고 하는 라이니시스 씨의 애칭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하츠 오빠와 메이 언니는 아이를 둘 낳았는데, 첫째가 이 개구장이 라이닌이고 둘째가 미아라는 딸이다.
라이니시스 씨와 나미아 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카페 Karma는 작지만 포근한 가족적인 분위기와 맛 좋은 음식으로 서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카페다. 이켈라인 상회가 저렴하게 물건을 대주고 있기 때문에 값도 싸서 학생들도 많이 찾아온다.
가족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기가 좋다. 나도 가정을 꾸린다면 저렇게 꾸려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오랜 세월 고통의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짧은 인간의 삶을 얻었기에, 될 수 있으면 저들이 고생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디 언니는 되도록이면 행복만을 겪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바라던 평범한 행복은 얻은 저들은 정말 행복해 보인다. 나미아 언니도 저 모습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라 몇 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마 저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언니는 꼭 돌아올 것이다.
여신사력 8년. 14월 15일.
“어이,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요번에 새로 건조된 신형 비공정의 정장으로 한스 스미스라는 20대 청년이 취임했다는데? 렌디너스 공군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청년이라더군. 요전까지 상업 비공정을 몰다가 이전에 갑자기 발탁되었다는데?”
“그거라면 분명 바나스 급의 뉴 테트라 아닌가? 그걸 20대의 청년이? 어지간한 실력을 가졌나 보군. 역시 공군 사관학교야. 그나저나 이름은 되게 평범하군.”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문에는 저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그런 소문들 속에 혹시라도 붉은 장발을 휘날리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미아 언니라면 아이리펜에 발을 딛자마자 그녀의 부모 혹은 여관 WISH로 찾아올 것이 뻔했지만, 어쩌면 그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세계여행을 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는 그다지 신통스러운 소문이 없었다. 마물들로 인하여 세상이 어지럽던 시절, 붉은 학살자나 검은 세자매가 떠돌던 전설의 시대는 아니지만, 유명인들의 소문은 어느 정도 들리기는 한다.
“이번에 안샤크 공작이 산적들을 회유해서 빈타 백작의 땅을 공격했다지?”
“아, 그래. 그랬지. 근데 그걸 또 막아낸 사람이 안젤라라는 여자 레인저라지? 단신으로 공작의 음모를 박살냈다고 요즘 명성이 자자하더군.”
“단신은 무슨, 내 듣기로는 가리안이라는 레리첸트 최고의 사냥꾼과 함께 했다던데? 이 친구, 정보가 느리구만.”
“어어, 그래? 가리안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지. 대륙 연합 사냥꾼 길드의 회장인 베르힌츠가 인정한 사냥꾼 아닌가?”
주점에서 들리는 유명인들의 소문은 신빈성 반에 불신성 반이었다. 그렇지만 아예 근거가 없는 소문들도 아니니 들어둘 필요는 있었다.
상회의 정보부를 이용하면 현재 소문의 주인공들이 되는 사람들을 모두 리스트화 할 수 있지만, 술집에서 듣는 소문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정보부를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솔직히, 나미아 언니의 소식은 정보부를 통해서가 아닌 내 귀로 직접 듣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술집의 소문에 기대는 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사람 마음을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오늘 들리는 소문은 처음 듣는 소문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익숙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오늘도 별다른 소문은 없었다.
술집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오랜만에 들른 자마닌 씨 내외와의 저녁식사가 약속되어 있다.
서민식 경식당을 운영하시는 자마닌 씨는 절대 크기를 늘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깨고 요번에 식당을 두 배 가량 넓히셨단다. 그 공사기간동안에는 짬이 나기 때문에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들러주셨다.
원래의 일정은 나미아 언니를 만나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나미아 언니가 알던 사람들은 거의 다 내가 만나고 있다. 이전에 여관의 특별손님 때 만난 사람들이면 차라리 대하기가 편하다.
최소한 어디의 왕이다, 왕자다, 공작이다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만큼은 피했으면 싶다. 그런 계층하고 만나게 되면 점점 계급을 인식하는 감각이 둔해져서 나미아 언니처럼 황제하고 농담하고 왕한테 핀잔주게 될지도 모른다.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 된다면, 그 정도를 해야 상회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겠지만, 올해가 지나기 전까지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 사람마다 그릇이 다른 것은 어찌 할 수 없잖은가?
여신사력 8년. 15월 4일.
그저께 학교를 졸업하면서 경영학 학사의 학위를 받았다. 생각 같아서는 대학원에 올라가 박사 학위를 준비하고도 싶지만, 그 시간에 차라리 이켈라인 상회 인명부나 외우는 게 좋을 것이다.
교수님은 재능이 아깝다든가 하는 말로 대학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내년부터는 내가 활동할 범위가 대학 정도는 우습게 여길 정도로 늘어난다. 대학을 우습게 보기 보다도, 그런 범위를 가졌으니 도저히 학업과 병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켈라인 상회의 자본력이면, 아이리펜 전역에 있는 국가에 초등교육부터 대학까지 해결하는 교육도시를 건설할 수도 있다. 이켈라인 상회가 후원한다면 안 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대륙 전역의 문맹율과 환경의 탓으로 어둠의 길로 빠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등쳐먹는 암흑의 손길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기실 그런 시설이 필요하다.
회장이 되면서 처음으로 발표할 이켈라인 상회의 범 대륙적인 프로젝트로 구상하고 있는 이 계획은, 향후 30년 정도 이켈라인 상회의 성장에 치명타를 안겨주게 될 것이지만, 현재 모아둔 상회의 자본력은 상회를 50년 가량 유지할 수 있다.
300년이나 넘게 장사를 해왔는데, 그 정도도 못 모았다면 장사한 의미가 없지. 게다가 30년 후에는 다시 상회 자본 축적비율이 오름세로 돌아설 테니 그렇게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다.
나미아 언니와 오디 언니가 상회를 처음 만들면서 장난스레 이야기 했던 것 중에 하나가 ‘천년상회’라는 것으로, 밀레니엄의 역사를 간직한 상회를 구상했었단다. 나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30년 정도의 손해를 생각하고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다.
사실, 30년 동안 손해를 보지 않고 본전 혹은 이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안스란 교단의 사멸로 인해 거둬들인 것들이 꽤 많아서 여신사력 8년 3/4분기 아이리펜 상권 점유율을 보면 56%다. 원래 이켈라인 상회의 시본 사상 중에 하나는 절반에 가깝지만 과반수를 넘지 않는 상권 점유로 시장의 독과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 49% 체제로 돌려야 한다.
결과적으로 7%의 점유분을 매각해서 떼어버려야 한다는 건데, 대륙적으로 볼 때 이 7%라는 건 의외로 엄청난 수치다. 어느 정도로 엄청난가 하면, 각 나라들에 내가 계획한 도시를 설립할 수 있을 정도로.
결국, 제일 크게 돈이 들어가는 설립비용은 상회의 축소계획과 맞물려 축적자본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디 언니는 상당히 훌륭한 기획이라고 칭찬해주었다. 나미아 언니에게도 계획은 있었지만, 설립비용과 유지비용의 문제 때문에 섣불리 시행하지 못했던 일이었다면서, 언니가 돌아오면 상당히 기뻐할 것이라고도 했다.
나미아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상회의 이름이 가지는 가치를 언니가 있던 때의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적어도 사람들에게 그만한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 계획은, 2대 회장의 역량을 보여줌과 동시에 회장 교체로 불안해 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어 상회의 이름값을 온전하게 보존하고자 하는 숨겨진 목적이 있다.
죽여도 죽지 않을 사람이니 만큼, 언니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설령 내가 살아있을 때에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내 뒤를 잇는 사람들에게 믿게 만들 것이다. 언니가 올 때까지, 꼭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나 티나세르 라르지엔, 곧 티나세르 이켈라인이 될 사람의 평생을 건 맹세다.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신사력 9년. 1월 4일.
신년 연휴가 지나고, 폭발적인 새해 업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티나세르 이켈라인으로서 지금까지 얼굴을 가렸던 흑막을 벗고 대대적인 취임식을 가졌다.
나미아 언니의 영향력은 확실히 컸다. 일부 반발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대 회장의 제일측근인 오디 언니가 나서서 나를 상당히 치장했기에 별 문제 없이 회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로 인하여 대륙의 상계는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이켈라인 상회의 후계자, 나미아 이켈라인이 심혈을 기울여 철저하게 교육했고,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파격적인 기획서를 들고 나타난 혜성과도 같은 여성의 이야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라는 것이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낯 뜨겁다. 어떻게 이런 말을 지어낼 수 있을까? 소문 퍼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해도, 대륙 전역에 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니, 새삼 정보부의 여론조작은 무서울 정도다.
그 파격적인 기획서라는 것도 각 나라의 수장들과 협상 끝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그 과정은 오디 언니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나는 입안자로서 참석해 고개를 끄덕거려준 것 밖에 없는데, 왜 ‘황제와 담판을 지은 초대 못지않은 2대 회장’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지 모르겠다.
영웅화도 적당히 해줘야지, 이러다가는 부담 걸려서 위장에 구멍 날 것 같다.
상황은 오디 언니의 계획대로 시작되고,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초 계획에서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새 회장의 사생활을 위해 이름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르지안 이켈라인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켈라인 상회의 2대 회장이다.
에휴. 나미아 언니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회장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도 없고, 상회를 사장길로 내몰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이렇게 엄청난 양의 서류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야.
“레리첸트 지부의 금년도 예산 가결 동의서, 상회 성장 보고서, 재등록한 연감, 툰드라 공화국의 대통령으로부터 온 공식 메시지, 교육도시 건설을 위한 각계의 반응 및 반론에 대비한 대응 논리, 상회 점유분 매각 계획서 및 협상안, 전년도 퇴직자 및 정리해고 명단, 하청업체 변경신고서….”
오디 언니는 하나하나 설명하며 노끈으로 엮어지거나 아교로 붙인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오늘 이내로 보고 숙지하거나 결재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 다음. 각 국 왕실의 연회와 무도회와 만찬회 초청장, 대륙 상인연합회의 만찬회 초청장, 각 국 귀족들의 여러 초청장.”
초청장 묶음들이 쿵쿵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장도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으면 툭이 아니라 쿵 소리가 날 수 있지?
“이상 총 34건 242장의 서류와 61건의 초청장에 대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구나?”
“…나미아 언니도 이렇게 하고 사셨어요?”
“그분이야 워낙 마이페이스셨지만, 그 부분마저 따라가지 않아도 돼. 지금은 신년이다 보니 최종결재 서류가 좀 많은 것뿐이야. 그 분이 평소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잖니? 바쁜 때는 길어야 한 달에 사나흘이야. 앞으로의 예상인데, 너도 일주일만 고생하면 네 계획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야.”
“네에….”
나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미아 언니가 과도하게 자유 시간을 바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건 본사의 총무부에서 해결한다고 한다. 결국 내게 올라오는 건 최소한의 결재및 확인서류들이지만, 하루에 이 정도 양으로도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게다가 이 수많은 초정장들이라니! 어떻게든 상회와 연줄을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눈에 뻔하다. 왕실 같은 곳이라면 참석할 수밖에 없겠지만, 귀족 주최 무도회 같은 곳은 거절하는 편이 좋겠다.
“그럼 수고하렴. 쉴 만한 시간에 다과를 가져다줄게.”
“예. 수고하셨습니다.”
오디 언니는 집무실을 나갔고, 나는 산적해있는 서류를 보며 손가락을 꺾었다.
우드드득!
힘내자! 티나세르!
그렇게 10시간이 흘렀다. 오후에 시작한 업무는 하루의 1/3을 잡아먹었고, 집무실 책상에 앉은 채로 식사를 하며 서류를 정리한 끝에 10시간이라는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단지 서류 정리로만 10시간이면, 다른 업무에는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할까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집무실에서 나온 시간은 오후 13시였다. 씻고 잠들면 딱 좋은 시간이다. 응접실을 겸한 거실은 당연히 누군가 있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곳은 나와 오디 언니만 사용하는 곳이었고, 가끔 손님들이 오곤 했지만 오늘은 손님이 없었다.
그렇게 힘없이 5G1호로 들어가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은 나미아 언니의 방에서 자야지.
나미아 언니가 그리워지는 날이면, 종종 그렇게 기분전환을 하곤 했다. 이미 시간은 흐를 대로 흘러 체향이나 체취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언니가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의 모습을 간직한 방에서 잠을 자면 그리움이 한결 충족되는 느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오디 언니를 불러서 오늘은 나미아 언니 방에서 잔다고 해야… 아니, 언니도 피곤할 테니 그냥 쉬게 하자. 아침에 5G1호에 갔다가 없으면 나미아 언니의 방으로 찾아오시겠지.
“후아아아…. 피곤해….”
하품을 하며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은은한 레몬향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도 산뜻할 정도의 레몬향이 날 맞이해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마법 광구에 불을 밝히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렀다. 그 뒤에 치마끈마저 풀어헤칠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우음…?”
“꺄앗?! 누, 누구야?!”
뭐지? 왜 침대에서 소리가 나는 거야? 그것도 굵직한 남자 목소리? 아앗! 치마! 내려가겠어!
얼른 치마끈을 조이고 블라우스를 여몄다. 침대에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배드커튼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의 고개가 내 쪽을 향했을 때, 온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거기 있는 거야?!”
침대 위의 그림자가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였고, 또 다른 그림자가 스르륵 일어나 그에게 안겨들었다. 여성의 체형이었다.
아니, 나미아 언니의 침대에 감히 여자까지 끌어들여?!
순간 열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저 침대가 어떤 침대인데? 내가 자는 것 빼고는 언니의 부모님들에게만 내주었던 침대인데!
커튼을 거두는 끈을 화악 잡아당겼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 소리 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봐요! 거기! ……!”
“흐으음… 불 꺼어….”
남자의 목을 끌어안은 여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고, 단정한 이목구비의 남자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 얼굴은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저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가진 여인의 목소리도 익히 들어본 목소리였다.
“디에고…오빠?”
“오랜만이지? 티나? 저기, 나미아. 그만 눈 떠요. 티나가 왔습니다.”
“안녀엉, 티나. 졸리니까 아침에 보자. 그만 자자, 디에고.”
“저, 저기…, 나미아….”
나미아 언니는 디에고 오빠의 목을 끌어안고는 같이 누우려는 듯 끌어당겼다. 디에고 오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저 목소리와 얼굴, 저 태도는 모든 것이 나미아 언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와서는 어디 잠시 다녀온 것 같이 인사하고 있는 모습은… 평소처럼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던 나의 생각과 같았다.
“언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작정 언니에게 안겨들었다.
꿈이라면 깨지 말아다오. 아침에 눈 떴을 때 지금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결국 디에고하고 나는 합심해서 차원을 옮겨 다니게 된 거야.”
“그렇군요. 그렇게 두 분이서 보낸 시간이 38년이라고요?”
“그래. 여기서는 고작 9년 밖에 안 지났더라? 으음…. 뭐랄까, 너무나 오랜만인 느낌이야.”
나미아 언니는 디에고 오빠와 함께 앉아 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차원의 틈새에서 유영하던 언니와 오빠는 차원의 인력에 이끌려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한다.
여신 안스란과 대적하고 차원의 틈새를 유영하느라 힘을 소진한 그들이 기본 개념이 다른 차원에 적응해 성족들이 발견하기까지 힘을 비축하며 기다렸던 시간이 5년이라고 한다.
성족들의 능력이 어떤지 모르지만, 신을 대행한다는 자들이 두 사람의 수색에 그렇게나 오래 걸렸다는 게 믿을 수 없었는데, 그 차원 외에 다른 차원도 많아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성족들이 그들을 발견했지만, 아이리펜으로 오기 위해서는 순차적인 차원 이동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차원 사이에서도 순서가 있고, 그것을 모조리 뛰어넘어 목적한 차원으로 가는 일은 성족과 사족을 제외한 존재들에겐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언니와 오빠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한다.
“곧바로 여기로 오신 거예요?”
“아니. 먼저 집에 좀 들렀다 왔어. 부모님 얼굴이 보고 싶었거든. 디에고도 인사시켜야 하고.”
“아, 그렇군요. 으음… 축하드린다고 해야 할까요?”
“축하해 준다면 고맙고. 그런데 별로 재미는 없었어. 아빠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딸은 넘겨줄 수 없다!’라고 말하고, 디에고가 ‘따님을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날 가운데 두고 다투는 두 남자의 갈등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약속이나 한 것처럼 듯이 아빠하고 디에고가 허허 웃으며 악수하고, 엄마들은 축복해주고, 동생들은 놀라기만 하지 ‘저런 형부, 매형은 인정 못해!’라고 말해주는 녀석도 없었어. 아, 맞아. 체리는 ‘이제야 고삐가 채워졌네’라는 식으로 속 뒤집어 놓고 말이야. 재미없었어. 치잇.”
나미아 언니의 성격으로 볼 때, 저건 진담이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는 말은 이미 오디 언니는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숨겼다는 것이다. 나는 오디 언니를 슬쩍 돌아봤고, 오랜만에 희색만면한 오디 언니는 미안한 듯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티나. 숨기려던 건 아닌데, 나미아 님이 평소처럼 만나고 싶다고 하셨거든….”
“그럴 것 같았어요. 어제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 아침에 나미아 언니가 응접실에서 차 마시다가 ‘좋은 아침! 잘 잤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했겠죠.”
“에헤헷. 그렇지? 아무튼,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도 매우 편안해. 기다리는 사람들 품으로 돌아오길 잘했어. 음음.”
나미아 언니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니.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상회 운영 다시 하실 거예요?”
“응? 아니. 됐어. 난 은퇴했으니 2대 회장이 하는 일을 따스한 눈으로 지켜봐야지. 당분간 쉬면서 가족계획이나 짜볼까?”
“푸웁! 나, 나미아!”
디에고 오빠의 격렬한 반응을 보니 앞으로도 고생길이 훤해 보인다.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디에고 오빠가 나미아 언니를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휘둘리는 입장인 것 같지만.
나미아 언니는 입을 가리며 작게 웃고는 말했다.
“뭘 하든, 디에고하고 많이 이야기하고 결정 할 거야. 이제 나도 이 차원의 구성원이 되었으니까 아웃사이더의 업무에서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느긋하게 살 수 있잖아? 여관을 경영하든, 도자기를 만들든, 여행을 하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뭐든지 해도 되고 말이야. 이제야 진정으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되었다는 걸 느껴.”
“인생 새로 사는 기분이겠네요.”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들었기에, 그런 모습이 그렇게 기뻐 보일 수 없었다.
“응! 맞아. 정말이지, 이제야 사는 것 같다니까? 이젠 어지간하면 큰일에는 말려들고 싶지 않아.”
그 동안의 일을 생각하는 듯 언니는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언니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조용히 쉬고 싶겠지만, 언니의 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산다는 걸 느낀 사람이, 여기서 안심하고 안주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신을 죽이는 정도로 큰일은 없겠지만, 언니가 충분히 쉰 다음에는 또 다시 심심함을 못 이겨 움직이고 말 것이 분명했다.
나는 디에고 오빠에게 말했다.
“많이 고생하셔야겠네요.”
“그렇지? 뭐, 괜찮아. 각오하고 있고, 그것도 나름대로 좋으니까.”
“브란디에고 씨의 선전을 기대해 보죠.”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디 언니도 나의 말에 동의했고, 우리는 그렇게 디에고 오빠를 응원하기로 했다.
단지, 순식간에 따돌림 당한 나미아 언니만 삐친 표정을 지었지만.
“칫칫. 다들 너무해. 내가 무슨 사고뭉치도 아니고. 흥!”
언니는 고개를 팩 돌렸고, 우리는 그것을 보며 웃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언니는 자신이 원하던 생활을 드디어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환상여관 WISH.
어쩌면 그 주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건 아니었을까?
나미아 언니의 웃음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소원을 이루고 싶어 했던 사람은 언니였을 거라고. 그래서 그 소원을 이룬 지금, 저렇게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라고.
그렇다고 믿는다.
축하해, 언니.
Guest.Epilogue: 기다리는 사람들 품으로. - 종료.
환상여관 WISH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