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2: 가벼운 시작. (46/49)

Part2: 가벼운 시작.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4월 22일.

전쟁은 무작정 일으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의 이야기를 보면 심심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광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역사라는 것 자체가 전쟁의 시간표이기 때문이다. 제일 활발하게 참여한 사람이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원인은 터무니없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수도 있다. 모 왕국과 모 왕국의 지배자가 체스를 두다가 생겨난 불화가 전쟁으로 이어지는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전쟁에 나서는 많은 중간관리직들이 착각하는 것은 그 전쟁은 당연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란 생각이다. 그들로서는 상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으니 윗사람들에겐 당연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돌격 명령과 한께 칼날을 적군의 몸에 쑤셔 박으면 되는 일이다.

모든 전쟁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것을 최대한 부각시켜서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모든 전쟁이나 심지어 동네 어린아이 싸움에서도 적용되는 행위로서 자신에게 명문을 가져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 왜 정당화를 시켜야 할까?”

“애초에 그것이 부당한 일이기 때문인가요?”

“음. 잘 맞췄어요. 디에고 학생. 요즘 들어 쑥쑥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이는 군.”

“감사합니다.”

나미아는 브란디에고에게 전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브란디에고의 물음은 마치 청소년 학생의 그것과 같이 ‘왜?’라는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왜 전쟁을 일으키냐는 물음이 속에서 생겨난 브란디에고는 그것을 궁리한 끝에 역시 많이 아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야겠다는 고금의 진리를 적용시켰고, 처음 한 번에 한해서라면 매우 성실한 선생이 될 수 있는 나미아는 브란디에고에게 전쟁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어찌되었든, 어떤 일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대화와 합의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친다면, 폭력은 최악의 방법이지. 하지만 그 해결의 난이도를 따졌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쉽지. 대충 몇 대 때려주고는 ‘내가 옳지?’라고 물어보면 되거든. 그런데 그건 말했다시피 최악의 방법이야. 자기만 좋거든. 남도 같이 좋게 할 수 없이 이기적으로, 비인도적으로 해결하려드는 방법이라서 최악이야. 누구라도 눈살을 찌푸릴 방법이지. 폭력은 본능적인 방법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본능을 거부하는 이성의 원칙에 따라 폭력도 거부해. 그래서 거기에 정당화가 필요한 거야.”

“예를 들면요?”

“예를 들면? 흔히 이야기나 소설에 많이 나오잖아? ‘부모님의 원수! 그 피값을 받아 내리라!’라든가 ‘주민을 핍박하는 사악한 영주여! 정의의 심판을 받으라!’라는 식의 이야기. 가장 단순하고 훌륭한 정당화야. 복수라는 거지. 받은 만큼 되돌려 준다. 가장 훌륭한 명분이야. 하지만 이건 애초에 폭력으로 시작했으니 폭력으로 끝을 낸다는 식이지. 국가나 영지간의 전쟁에서 할 수 있는 정당화는 이런 게 있겠다. ‘귀국의 모모가 본국의 귀족 모모에게 이러저러한 범법행위를 하였고, 그것은 본국의 영토 안에서 행해진 것이니 신속한 범인 인도와 사과를 요구한다.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강제적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이건 대충 이렇게 해석 되는 거야. ‘돈 내놔라. 못 내놓겠다면 거두러 간다.’ 간단하지?”

“하지만 그것은 국가 간의 체면이 걸린 이야기잖습니까? 인간들의 체면을 중시하는 모습만 봐도 그건 이미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데요?”

“그래? 그럼 이런 건 어때? 모 영지의 영주는 이웃 영지의 딸인 모 양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나, 정식으로 결혼할 경우 자신의 영지가 상대 영지의 하부로 귀속된다. 그래서 그는 이웃 영지의 영주가 취미로 토속신앙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것을 빌미로 그것을 악마적 행위로 규정하여 당당하게 쳐들어가 그 딸을 빼앗았다. 이해할 수 있겠어?”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터무니없는 트집이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납득이 갈 그런 이유였다. 그러다 그는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자신이 옳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겁니까?”

“맞아. 바로 그거야.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당당하고 강해져. 왜냐고? 자신이 옳으니까. 옳은 일을 하는 거니까 열심히 매진하고, 옳으니까 더욱 더 잘 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이게 의외로 정말 무서워. 사교의 광신도 집단들이 강한 이유도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거든. 게다가 그런 당위성을 말단 병사들에게도 주입할 경우에는 군단 전체의 사기가 최상으로 유지되지. 옳은 일은 좋은 일이고, 좋은 일을 한다고 알게 된 사람들은 두려움이 반쯤 사라지거든.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당위성을 부여받은 군대는 강하다. 이거지.”

“아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전쟁의 진짜 이유는 시시한 거군요?”

“이해가 빠르군. 왜 전쟁을 하느냐? 상대방에게 강제적으로 얻어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그것이 돈이든 땅이든 명예든 뭔가 얻어낼 것이 있기 때문이지. 인류의 공적이나 그런 것이 없는 한, 적어도 자기네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건 대충 저런 이유야. 얻고 싶은 게 있으니까.”

브란디에고는 의외로 시시한 문제였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자면 그가 읽은 서적에서 나오는 전쟁의 이유는 다들 거창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공격자 쪽이나 수비자 쪽 모두 다 상대가 나쁘고, 자신은 옳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전쟁의 본질이나 그런 것을 생각해 보자면 시시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진지하게 임할 것이다. 마치 아이들이 놀이에서 정한 역할을 진지하게 연기는 것과 같은 태도로. 브란디에고는 거기서 느낄 수 있는 허무함에 허탈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저희는 어떤 정당화를 시켜야 하는 건가요?”

“음…. 아무래도 그게 문제란 말이야. 대륙의 모든 귀족들은 내 모습을 뻔히 다 알고 있으니 섣불리 등장하기도 그렇고, 너 역시 황제에게 얼굴 팔렸잖아? 당당하게 음모를 꾸밀 처지는 안 된다 이거지. 그러니까 특정 국가에 가서 음모를 꾸민다는 계획은 불가능해. 게다가 우리 스스로가 인류의 공적쯤 되는 역할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런 짓 했다가는 우리 아빠가 당장 뛰쳐나와서는 날 두들겨 팬 다음에 레어로 데려가서는 동생들 성인식 할 때까지 보모 노릇 시킬 거야.”

“서,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아니. 진심이야. 아빠라면 해. 왜냐면 예전에 한 번 그랬거든. 많이 맞았어.”

매우 담담하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나미아의 모습에서 브란디에고는 그 어떤 가정파탄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혼란스러워했다. 보통은 그렇게 되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불리기 딱 좋은 상태일 테지만, 그녀는 그것이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여 그 집의 가정교육을 의심케 하고 있었다.

굳이 다른 집의 가정교육을 평가하고 싶지 않은 브란디에고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럼 어떻게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미아는 그 표정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스레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빌미가 될 사건이 어디선가 시기적절하게 터져주면 정말로 좋겠는데 말이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있어. 저 위의 계획에 따르자면 10월에 시작해서 6개월 이내로 끝내야 한다잖아? 지금은 봄볕 내리쬐는 4월 하순이고, 5개월 하고 약간 더 남아있어. 그 동안에 어떤 수가 생기겠지.”

“태평하시군요. 걱정은 안 되는 겁니까?”

“글쎄. 사실 내 걱정이야 전 대륙이 슬픔과 혼란의 도가니로 말려들어가 고통의 신음을 내는 일이지만, 그럴 일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봐야지. 그래도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 죽어나가는 사람은 있을 거야. 대륙 곳곳에서 생기는 분쟁은 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 언제나 생각하는 거긴 해. 그렇다고 해서 지금부터 침울해할 필요는 없어. 일이 다 끝난 뒤에 침울해 해도 되는 거니까.”

나미아는 양 손을 뒤통수에 대고는 팔베개를 하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비스듬하게 앉은 그녀는 창밖에서 천천히 떠가는 구름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분쟁이라도 안 생기나…?”

브란디에고는 그런 일이 그리 쉽게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뭘 할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고 있는 도중, 방에 들어가 있던 오디가 응접실로 나왔다.

“나미아 님. 급한 소식이라네요.”

“…설마 아니겠지?”

“예?”

오디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나미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는 오디를 비스듬하게 오려다보며 말했다.

“설마 어디선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아니겠지?”

“…이번엔 무슨 일을 하신 거예요?

오디는 나미아가 모든 일의 원흉이라는 듯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사고뭉치 취급을 당한 나미아는 당연하게도 발끈했다.

“내가 무슨 사고뭉치로 보이니? 고개는 왜 끄덕이는데? 디에고!”

“예? 아니, 전 그냥….”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브란디에고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얼른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가렸다. 오디는 그런 나미아의 반응을 보고는 손에 들린 서류를 보다가 다시 나미아를 보며 말했다.

“아무런 일도 안하셨어요?”

“나 요 며칠간은 계속 여관에 있었거든? 흙 만지러 내려간 몇 시간 빼고는 계속 내 방하고 응접실만 왔다 갔다 했다고. 뭐니? 그 서류?”

“아, 예. 나미아 님이 말씀하신대로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인데요?”

“분쟁? 어디서, 어떤 분쟁이?”

오디는 정말로 나미아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그녀는 나미아를 더 화나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서류를 천천히 읽었다.

“에… 신사이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대요. 2왕자 측의 귀족들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 국왕을 감금하고 2왕자를 왕으로 추대했다던데… 정말 모르세요?”

“모르는 일이야. 누굴 사고치기 전문가로 생각하니? 평소에 그런 점이 조금 보였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나 같은 청초한 요조숙녀에게 그런 시선은 너무… 디에고, 웃지 마.”

“아, 예, 큭…!”

나미아는 입을 가리는 디에고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가 오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오디에게서 서류를 인도받은 다음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을 읽었고, 3장짜리 서류를 빠르게 독파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좋아. 때마침 좋은 대상이 나와줬구만.”

“예? 무슨 말씀이세요?”

나미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디가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나미아는 생기가 도는 눈으로 브란디에고와 오디에게 말했다.

“큰 산불도 작은 불씨에서 시작하는 법. 슬슬 움직여볼까?”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5월 1일.

신사이 왕국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작년 가을경에 일어난 대규모 음모사건이 철저하게 박살나면서 주변국가로부터 고립당한 불쌍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다. 티나세르의 일이 생긴 이유도 그런 과정에서 생긴 여러 사항이 모이다보니 생겨난 일이었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나미아가 어느 정도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사이 왕국의 바로 위에 있는 에디킨츠 왕국은 자신들의 아래쪽에 버티고 있는 나라에서 걸어온 수작을 두고두고 잊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신사이 왕국의 만행, 해적단을 끌어들여 에디킨츠의 해상치안을 교란시키고, 나아가 해안을 무력화시킨 뒤에 그 나라 전체를 먹어버리려던 계획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래로 신사이 왕국은 외교적으로, 무역적으로 고립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날로 높아져가는 지배층에 대한 불만은 급기야 2왕자파에 의한 왕실 반란으로 이어졌다. 국왕파인 1왕자파를 효과적으로 억누를 수 있는 상황에서 2왕자파는 순식간에 귀족원과 왕실을 장악, 1왕자파를 숙청하고 대국 사과를 감행하여 신사이의 숨통을 틔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말하자면 국왕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혈족을 내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 문제지요? 체스탄틴 3왕자폐하?”

피의 폭풍 속을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신사이 왕국의 3왕자는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성인도 안된 남성의 표정이 얼마나 수심 깊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미아의 표현에 따르자면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인 체스탄틴 오켈 마이넬 신사이엔은 꽤나 적절한 표정으로 폐왕자의 모습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소. 아바마마께서는 2주 뒤에 왕위를 큰형님께 물려주시는 걸로 책임을 다하겠다고 하셨소이다. 아바마마께서 왕위를 이양하시며 에디킨츠에 대한 전폭적인 국가적 사과를 하신다 하셨소. 그것을 위해 작은 누님을 에디킨츠 국왕의 후실로 바칠 준비로 하고 있었소. 헌데 그것을 둘째형님께서 못마땅하게 여기셨는지 이런 식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오.”

“흠…. 후실로 준다고 해도 그 깐깐한 스나일이 받을지는 모르겠군요. 그 녀석 의외로 순정파니까요.”

“스나일이 누구요?”

“아, 애칭으로 그렇게 부르지요. 언급하셨던 에디킨츠의 국왕입니다.”

체스탄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바라보았다.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은 각국의 왕과 상당한 교분을 가지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한 나라의 국왕을 애칭으로 부를 정도의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을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런 접촉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자신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찾아온 것이다.

나미아는 신사이 왕국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신아이 국왕의 복권을 위한 조치를 단행하지는 않았다. 1왕자파가 숙청의 대상이 된 이상, 도망친 3왕자를 처리함과 동시에 3왕자파의 거점 될 수 있는 국왕을 그들이 살려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사이 국왕인 데그로인 3세의 목숨을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한 그녀가 수소문한 존재는 도망쳤다던 3왕자의 소식이었다.

신사이 왕국 전체에서 이켈라인 상회가 철수하였지만, 정보부는 한 지점도 철수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정보를 물어왔고, 꽁꽁 숨어버린 3왕자를 찾아내는 데는 무려 9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외출은커녕 빛이 들어오는지도 의심스러운 공간에서 사는 3왕자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정보부의 직원들은 생각할 수 있는 유력 인사아 3왕자의 평소 행적을 토대로 만든 도피처 리스트를 제일 처음으로 파기시키고 그 리스트에서 뽑아낼 수 있었던 2차 도피처에 주목했다. 3왕자가 아무리 어리다고는 해도 왕족의 핏줄인 이상 상식적인 범위 내에 도피해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정보부 직원들은 그 2차 도피처로 향하는 마차에 실린 음식물 1파운드의 무게까지도 세세하게 조사한 결과, 마침내 3왕자의 도피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소식은 단번에 오디에게 향했고, 기다렸던 소식을 잡은 나미아는 뜸들이지 않은 채 곧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나미아의 목적은 단순했다. 3왕자의 복권을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3왕자는 그것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떤 지지 세력도 없었을 뿐더러 왕족으로 가져야 할 필수 교양만 익혔을 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방법과 과신하지 않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왕족의 일원이었던 체스탄틴은 자신에게 어떠한 메리트도 없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했다.

“이켈라인 회장. 대체 왜 날 도우려는 거요?”

“폐하. 말했을 텐데요? 전 당신의 복권을 도우려는 것뿐입니다.”

“돕는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는 단지 난 뱃머리에 매달린 선수상(船首像)일 뿐이오. 나는 지금 당신이 날 이용하여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구료.”

나미아는 생긋 웃었다. 적어도 자신이 사람을 잘 고른 것 같긴 했다. 무도회에 나가서 몇 번 본 적 밖에는 없었지만, 3왕자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있는 만큼이나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이 여린 것이고, 복잡하게 말하자면 인간적인 무엇을 거세당하도록 강요하는 제왕학의 오염에 벗어나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일 경우,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쓸데없는 야망으로 자신과 주변을 불사르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도 얼른 긍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인격적인 사람이다.

대개 왕위 계승권의 다툼을 벌이는 1왕자와 2왕자는 설령 자신이 잘못하였더라도 그것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드는 교육을 받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당해야하는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조건 옳다는 편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대로 밀고 나가면 나라가 운영 될 리가 없기에 그들은 자신을 절제하는 방법도 배우면서 야암을 천천히 이뤄나가는 총체적인 방법을 배운다. 나미아가 지배자에 대해 피곤한 직업이라고 평하는 것도 이런 이유인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현재 상황에서 성군이 될 자질을 가진 분은 3왕자 폐하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무릇 상인은 좀 더 멀리 봐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면 2왕자에 투자를 해야 하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계획일 뿐이지요. 좀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흑자를 볼 것이 분명한 3왕자폐하께 투자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상인의 감각이지요.”

흔하디흔한 이야기였지만 이것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붙드는 말도 없었다. 누군들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해주면서 손해도 마다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게다가 상대는 자신이 뭔가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처한 소년이었다. 자신의 주변에 처한 상황 때문에 자신이 어른이라고 믿지만 속은 어린애인 소년이었다. 나미아로서는 다루기가 쉬운 편에 속하는 상대였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허나 나에겐 어떠한 힘도 없소.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봐도 뻔 한 일이지 않소?”

왕자의 처소는 왕자가 머무는 곳이라고 말했을 경우 매우 큰 비웃음과 함께 정신질환의 의심마저 사게 될 그런 곳이었다. 공동묘지 바로 옆의 폐가라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연쇄살인범이나 숨어있을 법한 분위기지, 왕자가 숨어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람이 드나든다고 생각하면 수상한 생각부터 드는 그런 폐가였다.

그런 와중에도 전혀 의심을 사지 않는 무덤지기가 3일에 한 번 꼴로 와서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보따리는 3왕자의 목숨을 잇게 하는 구명줄이었다. 그리고 3왕자 역시 최대한의 주의를 하며 뻥 뚫린 천장에서 내려오는 햇빛만 보며 살아간다. 창문이나 깨진 벽으로는 무의식적으로라도 가지 않게끔 노력하고 있다.

나미아는 이런 곳에 처박힌 사람을 정보부가 참으로 잘도 찾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중에 그들에게 뭐라도 상을 내려야 하지 않나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3왕자가 말했다.

“사실 둘째형님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이오. 자신의 목적을 이룬 이상, 알아서 나라를 잘 꾸려 나가지 않겠소? 특별히 나는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소이다. 생각은 고맙지만, 나를 대륙 반대편에 데려가주는 것이 날 돕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오. 이 나라와 상관 없는 곳에서 과거를 잊고 살고 싶소.”

“…거 되게 늙은이 같은 소릴 하시네.”

“뭐라고 하셨소?”

나미아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태껏 벽에 기대어 서있던 그녀는 옆에 있던 낡은 의자를 가져가서는 체스탄틴의 반대편에 가져다 놓고 털썩 앉았다. 그녀는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체스탄틴의 시선을 무시하며 한쪽 떨어진 곳에 서있는 오디를 불렀다.

“오디.”

“예. 말씀하세요.”

“내부소음차단결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변의 마나가 충돌하면서 안의 소리를 바깥쪽으로 흘려보내지 않는 결계가 완성되었다. 나미아는 만족스러운 마법의 시연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방에서 궐련을 꺼내어 입에 물었다. 체스탄틴의 눈이 커지는 사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꽃이 생겨나 궐련의 끝에 불을 붙였다. 오디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미아 님. 하루 한 대.”

“알았어. 알았다고.”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나미아가 귀찮다는 듯 답했다. 체스탄틴은 여성의 이러한 퇴폐적인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에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궐련을 거의 마약으로나 취급하는 신사이 왕국에서는 남자들도 몰래 핀다는 궐련을 여자가 당당하게 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듣기로는 고급 작부나 핀다고 했었기에 그의 충격은 더 컸다.

청소년의 충격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는 나미아는 살짝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아서요.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그, 그러시오….”

오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브란디에고를 말로서 당황시킨 뒤 말을 놓았던 나미아는 이번엔 체스탄틴에게 정신적 충격을 가해서 생각할 여유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하긴 나미아가 그녀의 기준에서 한참 어린 아이를 데리고서 존대를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미아는 흰 연기를 길게 뿜고는 오른다리를 윈 무릎에 얹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집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환상적인 미녀가 한 손에 궐련을 들고 묘한 자세로 자신을 응시하는데 견딜 수 있는 소년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들어봐, 체스탄틴.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언젠간 신사이는 망하게 될 거야. 틀림없어. 국가를 유지하는 것도 일종의 경영이거든. 그리고 난 매우 긴 시간동안 그런 일을 해 와서 알아. 너의 형에게는 경영자의 자질이 부족해.”

“그, 그렇지만….”

오디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궐련부터가 이미 연출의 시작이었다. 그러니 나미아가 저렇게 도발적으로 고개를 스윽 내미는 것 역시 충분한 연출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브란디에고가 망을 보기 위해 지붕 위에서 몸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 외의 목격자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은 비록 네가 힘도 없고 약한 존재지만, 나중에 가면 이 나라를 이끌어갈 큰 재목이 될 거라는 걸 난 알 수 있어. 게다가 상관 없는 곳에서 조용히 산다는 건 불가능해. 넌 어떻게든 이곳의 소식을 들을 테고, 그것을 늘 들으며,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생각하겠지. 가슴에 후회가 남지만 돌릴 수 없는 발길에 언제나 괴로워하겠지.”

“그럴…까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있어. 잊어버릴 수 없는 추억. 돌렸으면 하는 과거. 너에겐 없는 거야? 있겠지. 그것보다 더 큰 안타까움과 허무함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해. 네가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며, 지금은 이미 늦었다는 말로 자신을 삭이지만 너의 가슴속에 남은 열망은 꺼지지 않을 거야.”

나미아는 얼굴을 좀 더 가까이 했다. 당황해하고 있는 체스탄틴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알싸한 궐련의 향이 그의 콧가를 오가면서 그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 무렵, 나미아는 결정타를 가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너는 이 나라는 살려야 해. 음모와 반란으로 죽어가는 나라를, 너의 모국을, 너의 아버지가 그렇게 구하려고 애썼던 나라를. 너의 형의 권력욕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거야.”

“이 나라…를…? 내…가?”

“네가. 너만이 할 수 있어. 누구도 아닌 너만이. 신사이 왕국의 3왕자인 체스탄틴 오켈 마이넬 신사이엔. 너만이 가능해.”

나미아는 천천히 자세를 원래의 느긋한 태도로 바꾸었다. 그녀는 궐련을 입에 물고 깊게 빨아들이고는 나긋한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고는 말했다.

“자. 결정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난 도움을 줄게. 네 선택을 존중할테니까, 잘 생각해서 결정해. 그리고….”

“아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 다다, 다다다담배라니요!”

나미아는 갑자기 말을 끊어버린 브란디에고의 목소리를 들으며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갑자기 지끈거리는 골치를 매만지며 내뱉듯 생각했다.

‘하여튼 산통 깨는 데 일가견 있어….’

체스탄틴의 몽롱했던 표정이 브란디에고의 고함에 깨지면서 깜짝 놀란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나미아는 궐련의 끝을 깨물고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디에고. 너 망 안 봐?”

“망이고 뭐고, 이게 뭡니까! 당장 끄세요!”

그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궐련을 움켜쥐려는 듯 나미아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나미아는 그 손을 가볍게 쳐내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며 표독스럽게 말했다.

“거참 말 안 듣네? 남이 피우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이 집이 탈 것 같기라도 하니, 아니면 너에게 뭐 피해준 거라도 있니?!”

“몸을 생각하셔야죠!”

“하! 여자가 담배 피우면 안 된다는 거야? 그런 사소한 자율권도 누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거니, 지금?”

“남자든 여자든 몸에 해로운 건 안 됩니다! 게다가 담배는 독이라고요, 독!”

나미아는 궐련을 들지 않은 손을 뻗어 브란디에고의 눈 바로 앞에 들이대었다. 그가 잠시 갸웃하는 사이에 그의 눈앞에 있는 중지가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가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것을 엄지가 막았다. 잠시 가중지에 그렇게 힘을 모은 그녀는 궐련의 연기를 한 모금 더 빨았다가 내뱉으며 중지를 튕겼다.

따악!

“아코!”

경쾌한 소리가 들리면서 브란디에고는 이마를 감싸 쥐었고, 나미아는 이빨로 문 궐련을 움찔거리며 팔짱을 낀 채로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너 말야, 내가 독 따위에 당할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나보다도 내 몸 끔찍하게 걱정하는 사람 옆에 있으니 추가 흡연은 어림도 없네요. 괜히 남의 흡연에 뭐라고 하지 마시고 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보세요. 네? 정말이지, 애가 왜 저리 꽉 막혔다니? 얼른 안 가?!”

브란디에고는 그제야 나미아가 음식에 독을 타면 독이 들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독 때문에 음식 맛이 변한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부류의 존재임을 새삼 깨닫고는 얼얼한 이마의 통증으로 그것을 각인시켰다. 나미아는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블러드 스폰이며, 그런 만큼 기후와 독극물에는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미리 하지 못한 것이다.

거의 다 될 뻔한 일을 그르친 나미아는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체스탄틴을 보면서 새로이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지난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모든 책임을 그렇게 브란디에고에게 떠넘기려 했을 때, 브란디에고가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아, 아 저기… 죄송합니다. 근데 이쪽으로 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드리려고요….”

“뭐?! 누가? 얼마나?”

“사람들이요? 묘지기가 아니라?”

체스탄틴도 화들짝 놀라면서 브란디에고에게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실하게 답했다.

“네. 숫자는 여덟 명입니다. 입고 있는 옷을 봐도 묘지기는 아니더군요. 묘지의 입구에서 묘지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까요. 모두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묘지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밤색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덩치는 조금 큰 편이고요. 그리고 오른손 약지에 커다란 호박이 박힌 금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빌머크 후작! 맙소사! 그 사람이야!”

체스탄틴은 그 진위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크게 놀랐다. 경악인지, 환희인지 모르겠지만, 나미아는 그가 찾아온 일행에 대해서 설명만을 듣고서 그 신원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브란디에고의 설명이 자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빌머크 후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빌머크 후작이라면, 세스코린타 다실 빌머크 후작 말이야?”

“예! 그래요! 평소 절 많이 도와준 사람이에요! 맙소사, 여길 어떻게 알고?”

체스탄틴의 표정은 아무래도 기뻐하는 표정이었나 보다. 그는 불안해하기보다도 잘되었다는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미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 오디가 말했다.

“그보다는 어서 저희의 몸을 가려야겠는걸요? 지금 그 사람들은 건물의 앞까지 와있어요.”

“아, 그렇지? 오디, 시작해.”

“예. 알겠습니다.”

체스탄틴이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오디는 양손을 조용히 모으더니 눈을 감았다.

샤아아….

그녀의 손 사이에서 색을 알기 어려운 빛이 번뜩였고, 그녀가 그것을 주변으로 퍼뜨리자 그것을 모든 색으로 빛나는 입자가 되었다. 그것은 그녀와 나미아, 브란디에고의 몸을 감쌌고, 잠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미아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흘끔 보고는 오디를 보며 말했다.

“끝났어?”

“예. 끝났어요.”

“예? 예? 뭐가 끝났다는 말씀이죠? 방금 뭘 하신 겁니까?”

체스탄틴은 대체 조금 전에 무엇이 변화했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나미아는 대답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고, 체스탄틴의 의문은 더욱 터졌다. 그가 조금 더 목소리를 돋워 이야기 하려 했을 때, 층계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런 곳에 3왕자님이 계신단 말인가?”

“누군가 숨기에는 좋은 장소지만….”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군. 3왕자님 대신에 희뿌연 뭔가가 나와서 놀래킨다 해도 이상하지 않겠어.”

체스탄틴은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올라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서둘러 모습을 숨기라는 듯 나미아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미아는 궐련을 벽에 비벼서 끄고는 그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었다. 오디는 한술 더 떠서 브란디에고의 팔을 잡아끌어 계단에서 비켜주고 있었다.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한 태도다.

이켈라인 상회가 어떤 나라의 정책적 협박이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 대륙적인 유통망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회 자체가 어느 한 나라의 편을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륙의 상권 반을 잠식한 상회가 한 나라의 편을 들 경우, 최소한 1세기 동안은 대륙의 패권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켈라인 상회의 구조는 특별한 거점이 없이, 각 나라의 수도에 있는 지부들이 동등한 위치를 가지는 횡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신사이 왕국의 내전에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 직접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면, 그런 대륙적인 형평성에 어긋나므로 상회 자체가 아이리펜 전 대륙의 나라들에게서 축출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상인이 따르는 것은 상도와 돈이지, 권력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이켈라인 상회로 하여금 대륙 상권의 반을 차지하게 만든 명분이 되었다.

체스탄틴은 그 유명하고 좋은 명분이 지금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는 것에 소름이 끼 칠 것 같이 두려웠다. 그렇지만 지금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태였다.

거의 공황에 가까운 정신 상태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올라온 빌머크 후작 일행은 불안해하는 3왕자의 모습을 보더니 바도 그의 앞으로 달려가서는 부복했다. 그들은 계단 옆에서 조용히 서있었던 오디와 브란디에고를 없는 사람 취급했고, 빤히 보이는 벽에 기대어 서있는 나미아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왕자전하! 소인이 아둔하여 전하가 계신 곳을 찾는데 이리 지체하였나이다! 불충한 소인에게 벌을 내려주옵소서!”

“비, 빌머크… 후작? 나, 나는 괜찮소. 그러니….”

당신 옆의 놀라운 미인이 보이지 않냐고 물으려 했던 체스탄틴은 갑자기 폭발하듯 터져 나온 빌머크 후작의 말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악독한 반역자의 무리로부터 전하의 안전을 소인의 손으로 직접 보호하여야 했으나 그날 밤, 궁성이 반역자들로 장악되던 때에 소인은 그만 결박당하여 어두운 지하 감옥 속에 유폐되어버렸나이다! 그러나 하늘은 저와 소신들을 보리지 아니하야 반역이 일어난 나흘 째….”

빌머크 후작은 모리를 조아리고 그간의 이야기를 장엄하게 늘어놓느라 체스탄틴의 표정은 살피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를 따라온 나머지 사람도 마찬가지인 상태라서 체스탄틴은 황당한 표정을 마음껏 지어보일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단체로 미치기라고 했는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괜찮아. 저 사람들은 우리 못 봐. 그리고 목소리도 못 들어.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하지는 마.”

갑작스럽게 들려온 나미아의 말에 체스탄틴은 그만 “예?!”라고 되물을 뻔 했다. 나미아는 여전히 아까의 그 자리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죄와 친우들의 공적을 늘어놓는 빌머크 후작을 한심하게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사람 너무 싫어하지 마. 정말 감정이 복받쳐서 저러는 거니까. 간신과 충신 중에서 충신에 속해. 곁에 두고 잘 사용해. 아, 표정을 보니 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의문이군. 안 그래? 설명해줄까?”

“…그래서 소인이 이렇게 오게 되었나이다! 전하! 누추한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는지요! 압으로 소인이 전하를 모시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체스탄틴은 다시 머리를 크게 조아리는 빌머크 후작을 보며 정말로 들리지 않는건가 싶었다. 그는 나미아의 대답과 후작에 대한 대답을 같이 할 요량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러시오.”

“하해와 같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전하의 대양과도 같으신….”

“이 사람들 어차피 당분간 고개 안 들 거니까 고갯짓으로 대답해. 간단한 거니까. 최면술 알지? 대부분은 사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사실 뇌의 한계영역을 건드리는 고도의 기술이야. 이 사람들은 이것과 같아. 나와 오디, 디에고는 이 공간에 있지만, 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과 목소리, 우리로 인해서 발생되는 소음이나 현상에서 우리라는 존재를 배제하게 돼. 내가 이렇게 낭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해도 저들은 듣지 못해. 뇌에서 그걸 안 들었다고 해버리거든. 생물의 인지과정은 뇌에서 최종적인 처리를 하는 건데, 오디는 그 사이에 개입해서 우리의 존재를 슬쩍 지운거야. 그러니 별로 걱정하지 마. 어차피 내가 뭔 짓을 해도 저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으니까. 볼래?”

콰쾅! 끼기기기!

나미아는 그녀의 오른쪽에 잠겨있는 나무 창문을 조금 세게 쳤고, 창문의 조금 부서져 나가면서 낡은 경첩소리와 함께 열렸다. 열심히 말하던 빌머크나 다른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았지만, 옆에서 나미아가 열렬히 환영하듯 손을 흔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람이 조금 센가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체스탄틴은 난해한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는 생각했다. 자신의 눈에만 보이고, 자신의 귀에만 목소리가 들리는 조언자가 당당하게 있다는 사실은 그를 어느 정도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빌머크 후작의 말이 끝날 쯤에는 자신의 말을 갈무리 할 수 있을 정도의 평상심을 얻을 수가 있었다.

나미아는 히죽 웃으며 그와 그들의 하는 모습을 잘 지켜보았다. 그런 와중에서 브란디에고만이 나미아의 말을 곱씹느라고 상황에 전혀 끼어들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고 있었다. 조금 전 일을 방해한데 앙심을 품은 나미아의 복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빌머크 후작은 이를테면 감춰진 충신 같은 사람이었다. 왕의 측근으로서 눈부신 업적을 쌓고 반대파의 대대적인 표적이 되는 충신이 있는가 하면, 정치에 관심도 없는 듯한 행적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음지에서 활약하는 충신도 있다.

세스코린타 다실 빌머크 후작은 후자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왕자파가 아닌 국왕파의 인물이었다. 세대교체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왕자가 왕이 될 경우 자신의 모든 힘을 새로운 왕에게 바치는, 왕실 유지형의 귀족이었다.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와서 비교적 평안한 생활을 했던 체스탄틴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체스탄틴의 거처는 확실하게 상향조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공동묘지의 폐가 보다는 농가의 허름한 집이 훨씬 나은 모습일 것이다. 둘 다 왕자라는 신분이 거주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곳이었지만, 집으로서의 요건이라고는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벽과 지붕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공동묘지의 폐허보다는 지푸라기가 깔린 침대가 있는 농가의 허름한 집에 체스탄틴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나미아와 오디, 브란디에고는 체스탄틴이 머무는 집으로 어느 샌가 찾아오게 되었다. 그들의 옆을 지나는 사람들의 그들을 본체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체스탄틴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공동묘지에서는 마치 유령 같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사람 같았으니 말이다. 그림자도 확실하게 보이니 훨씬 안심되는 모습이었다.

“어쩌다보니 남아버린 패를 사용하게 되는 것 같군요.”

“사실이야. 왕자 중에서 남은 사람은 너 뿐이잖아? 그러고 보니 밑에 여동생 둘이 있었지?”

“예. 그 애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제일 걱정입니다. 사실 나라보다도 더 걱정되는 군요.”

“이제 곧 나라도 걱정해야 될 때가 올 걸?”

“예? 무슨 말씀이세요?”

나미아는 대답하지 않고 오디를 슬쩍 보았다. 체스탄틴의 고개도 오디쪽을 향하였고, 오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5시 경, 왕궁 제 3탑에 유폐 당하신 국왕폐하가 음독자살로 붕어하셨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도 아시다시피 국왕폐하께서 몸에 언제나 치사량의 독을 지니고 다니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살해당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말도 안 돼.”

“왕실을 장악한 2왕자인 세티나 오켈 브링 신사이엔은 이 사태에 대해서 조만간 국장을 치를 예정이며, 국장 후 즉위식을 치른다고 합니다. 왕명으로는 선왕의 죄과를 답습한다는 의미로 데그로인 4세를 쓸 예정입니다. 국장은 열흘 후, 즉위식은 열이틀 뒤입니다.”

“그, 그럴 리가… 그건… 그건….”

체스탄틴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의 작은 형이 야심가라고는 해도, 낳아준 사람을 죽일 리는 없다. 자신의 앞길에 장애물이 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일 정도로 냉혹한 사람은 아니다. 형제를 죽이는 거야 후계자 내정을 위한 피의 숙청의 일환으로 생각하면 머리로는 납득 안가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혼란을 겪는 체스탄틴의 귓속으로 나미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사실이야. 아무리 대의가 있고, 어떻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를 죽인 자식이 왕이 된 나라에 대해 좋은 눈길을 보낼 나라는 많지 않아. 신사이는 더욱 고립되게 될 거야. 지금 상황에서 명분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깨끗한 사람은 너 뿐이야. 너의 작은 형이 왕이 된다면, 나라를 잘 다스리긴 하겠지만 아버지도 죽일 수 있는 냉혈한의 말에 진심으로 따를 사람이 있을까?”

“그럴리가 없어요! 빌머크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

체스탄틴은 말을 멈췄다. 서글프게 고개를 젓는 나미아의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직감적으로 눈치 챈 것이다. 숨은 충신 빌머크 후작은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는 좀 더 나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그런 때를.

“맙소사…! 말도 안 돼! 진짜로 그런 일이…?”

“왕자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왕자 전하?”

체스탄틴의 목소리를 들은 듯 문 너머에서 당황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스탄틴은 가슴을 쥐고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힘겹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다. 가봐라.”

“하지만 왕자 전하, 소인이 듣기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예, 옛! 전하!”

체스탄틴은 비척비척 걸어서는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촛점이 잡히지 않는 멍한 눈으로 하염없이 천장을 보던 그는 미약한 음성으로 말했다.

“왜, 왜… 그런 이야기를… 지금…?”

“빌머크 후작은 조금 더 나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에겐 지금이 최적이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남은 시간은 적어. 되도록이면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어.”

나미아는 측은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군가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일은 어떻게 하더라도 전혀 기쁘지 않다. 설령 원수같은 관계였다고 할지라도 전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결정은 빨리 내리는 것이 좋다. 2왕자가 완전히 왕실을 장악하기 전에 체스탄틴이 왕실을 장악해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를 위해서 훨씬 좋은 길인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신사이 왕국은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녀가 가진 계획을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지점으로 자연스러운 분쟁을 꾀할 수 있는 장소. 이곳에서 시작된 일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연쇄충돌로 이어지면서 전 대륙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 누구도 모르게 진행될 것이다.

죽는 사람도 나올 것이며, 성공하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이 엇갈릴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생활은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모두 그녀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신들의 음모를 위해서.

“후우….”

체스탄틴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결정으로 인하여 찾아올 혼란이나 흘러갈 피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것이다.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히겠다고 결정하는 것 또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형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 또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는 음울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나미아는 문으로 가는 길을 슬쩍 비켜주었고, 체스탄틴은 그녀를 지나쳐서 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문 앞에 도착한 그는 심호흡을 두어차례 하고는 말했다.

“밖에… 누가 있는가?”

“예. 하명하옵소서.”

“빌머크 후작을 들라 하여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피곤한 표정의 체스탄틴은 천천히 걸어 테이블에 있는 의자를 빼 앉았다. 나미아는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고서 말했다.

“괜찮니?”

“예…. 괜찮습니다. 결정은… 빨리 내려야지요.”

“어떻게 할 거니?”

“왕이… 되겠습니다. 이대로 작은 형이 왕위를 가지게 되어 이 나라가 대륙에서 고립되는 것만큼은 막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나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까. 그녀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했구나. 그렇다면… 난 전력을 다해 널 돕겠어. 물론, 비밀스러운 계약이야. 네가 이 나라를 제대로 일으켜 세울 때까지, 돕겠어.”

“고마워요.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객기겠죠. 고맙게… 도움을 받을게요.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체스탄틴은 자신의 현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도피처만 보더라도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는데 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무소불위의 금전력은 그에겐 많은 도움이 된다. 게다가 400년을 살아온 사람의 경험이 깃든 조언과 이켈라인 상회가 지닌 정보력 또한 어느 누구라도 바라마지않는 그런 힘이 되어준다.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왕자 전하. 부르셨사옵나이까?”

“아. 들어오시오. 빌머크 후작.”

문이 열리면서 과묵하게 입을 다문 빌머크 후작의 얼굴이 보였다. 나미아는 슬쩍 물러서서는 오디에게 눈짓했고,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체스탄틴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까?”

“출발은 가볍지. 어느 나라에서든지 겪어본 적이 있는 왕위 쟁탈의 혈족다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그런 시작이야.”

나미아는 브랜디가 담긴 올드 패션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브란디에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잔을 들어 올리며 나미아를 주시했다. 혼란과 걱정, 약간의 슬픔이 깃든 그녀의 눈은 평소 같이 않아 혼탁했다.

“그리고 이건… 대규모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 어쨌든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살 수 없다는 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조금 버거운 일이겠지. 혼란이라는 건 그리 큰 사건이 아니야. 그건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거니까.”

“일상에서요?”

“그래. 간단한 예를 들지. 어떤 사람이 그저께 아침엔 빵, 어제 아침엔 수프, 오늘 아침은 굶고 내일 아침은 샌드위치를 먹을 것 같아. 이 사람의 아침식사는 정말 혼란스러워. 종잡을 수가 없지. 안 그래?”

브란디에고는 조금 이상한 걸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괄되지 않은 난해함이 있는 아침식사의 경우였다. 나미아는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사실 이건 다양하다거나, 다채롭다고 표현되지. 식단의 변화야 늘상 겪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것 역시 혼란이지. 사람들이 늘 겪고 있으면서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혼란임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야. 사실, 사람들은 그러한 혼란에는 매우 익숙해. 자신이 그저께 어제 한 일과 오늘 한 일 그리고 내일 할 일을 냉정하게 따져서 비교해보자면 상당한 부분이 다를 거야. 이것 역시 혼란이지.”

브란디에고는 혀를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나미아에게 말했다.

“그건 변화이지 않습니까?”

“그래. 대신 규칙성은 없어. 모든 변화가 그렇지만, 전과 다르게 바뀌는 거지. 내가 조장하는 것은 그와 같아. 어디에서든지, 있을 법한 일이 시작할 거야. 어제와 다른 일이지만, 그것은 과거에 있었기에 익숙한 일이야. 따라서 무시당하지. 그 다음날도 그런 일이 일어나. 있을 법하니까 그러려니 하지.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 날도 그렇게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을 때, 그것은 혼란이 되지. 그 때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거야.”

“멈출 수가 없습니까? 하지만, 카르마가 일정량 걷어지면 멈출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 머리에 쥐나도록 생각해도 그런 방법은 없어. 현실을 생각하라고. 전 대륙적인 일이 뒤탈도 없이 우야무야 끝날 것처럼 보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카르마가 걷혀도, 한참동안은 잉여 카르마가 발생할 거야. 최대한 노력하긴 하겠지만 완전히 없던 일처럼 딱 끝낼 그런 종류의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가 않을 거야. 역사에서 보자면 잠깐일 시간이겠지만, 그때가 지나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될 거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녀의 얼굴에선 신을 조롱하는 태도가 한껏 엿보였다. 가벼운 시작으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끝은 그리 가볍게 끝낼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시작과 같은 끝이라는 건, 언제나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브란디에고는 조용히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나미아도 그랬다.

가벼운 시작이 있던 날, 그들의 밤은 무겁게 지나갔다.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6월 4일.

나미아는 배부른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서류에는 신사이 왕국에서 시작된 체스탄틴의 왕위 찬탈전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다. 비밀리에 그것을 지원하는 이켈라인 상회의 지원내역도 있었다.

“이쪽은 슬슬 움직이는 것 같아.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군. 수고했어, 디에고.”

“수고는 무슨…. 오너의 지시대로 따른 것뿐입니다.”

“아냐. 지시대로 따른다고 해도 너만큼 확실하게 따르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야. 최상급은 아니지만 일등급 인재라고.”

“그… 최상급 인재란 어떤 사람입니까?”

기왕이면 자신이 최상급으로 분류되고 싶었는지 브란디에고의 표정에는 스리슬쩍 욕심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나미아는 그것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지시한 것을 조금 어길지라도 최고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지. 다소의 도박도 해야 하고, 위험도 감수하면서 실패하더라도 최소한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이야. 오디가 그런 경우지만, 너에게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아. 아, 나중에라도 내가 한 말 때문에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제겐 약간 어려운 일 같군요. 그래도 처음 한 일이 일등급이라니, 언젠가는 최상급의 인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면 됐어.”

“그런데 오디 씨는 어디 계십니까?”

그는 티 포트를 들어 나미아의 잔을 채우며 물어보았다. 요 며칠 사이에 오디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나미아의 시중을 드는 건 그의 역할이었다. 대부분 음식을 만들거나 차를 타는 소일거리였지만, 이런 일은 역시 오디가 해야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나미아는 브란디에고가 채운 잔을 들어 올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걔는 지금 토타카 연합국에 가있지.”

“토타카요? 거긴 어쩐 일로 가셨습니까?”

“화이트 캣의 수리도 있고, 그쪽 상회의 감사도 있고 해서 출장. 명목은 그거지만 실제로는 뒷공작하러 갔지.”

“이번엔 거기입니까?”

나미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가 체스탄틴으로 하여금 신사이 왕국의 내란을 조장했던 것과 같이, 오디는 토타카 연합국에서 또 다른 시끄러운 일을 벌이기 위해 찾아간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토타카가 아직까지 연합국이라는 소리는 언제고 갈라설 수 있다는 거야. 물론 너무나 역사가 깊은 연합국이다 보니까 한 나라로 보는 사람이 전부지. 토린느나 타실렌, 카도르 세 지방을 따로 보는 사람은 없어. 여기에 주목을 해야지. 따로 보는 사람이 없지만, 굳이 한 나라로 만들려고 하진 않아. 어째서일까?”

“어째서죠?”

“그럴 필요가 없거든. 평의회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고, 국민들도 이젠 지역감정에 휘둘리지 않아. 그런 시점에서는 오히려 연합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더욱 친밀감 있게 만들지. 연합은 언제고 해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서로를 긴밀하게 만들어줘. 무의식중에 그렇게 되지. 물론 국가로서 발돋움하면 국가에 속한 소속감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단결력이 더욱 강해지겠지만, 소속감을 가지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거든. 인간의 특징이지. 하나의 사실에 익숙해지게 되면 자극이 없인 기억해내지 않아.”

“뭔가 복잡하군요. 차차 이해하게 되겠지요.”

“그럴 거야. 어쨌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걸 뒤흔들 작정이야. 지역감정이라는 묵은 감정을 서서히 끌어내서는 분열을 조장할 계획이지. 연합국은 사실 망가지기 쉽다는 걸 일깨워서, 토타카를 혼란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한 국가를 붕괴의 위기로 몰아간다는 뜻 치고는 너무나 산뜻한 어조라서 브란디에고는 미처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상 군사력에서는 으뜸이라는 토타카 연합국이 분열하기 시작하면 세 지방은 서로의 군사력을 앞세울 것이라는 점을.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그 일대는 전란의 위기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게다가 토타카의 분열을 본 인근 국가들은 서로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애를 쓸 것이다. 토타카의 세 지방은 기실 서로의 무력의 의지해 다른 국가의 유혹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는 지배자라면 그 분열을 잠자코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한 브란디에고는 그저 자신의 잔을 채울 뿐이었고, 나미아는 그런 그를 흘끔 보고는 속으로만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최상급 인재가 될 수 없는 거라고.’

저 계약에 묶인 골드 드래곤이 최상급 인재가 되려면 아마도 그 계약이 끝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후에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상하는 나미아였다.

나미아가 브란디에고의 인재 육성에 대해 불확실한 미래를 점치고 있을 무렵, 오디는 토린느 지방의 중심지인 ‘토우렌’에서 주인이 내린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불어 그녀는 명목상으로 왔을 뿐인 상회 감사도 확실하게 행하는 걸로 자신이 나미아가 분류한 최상급 인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미아의 분류는 물론이고 증명해도 봐 줄 사람이 없다는 것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그녀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과 면의 세율 계산치가 맞지 않군요. 제 계산으로는 지난해 약 35000펜의 대금이 남는데, 그건 어디 갔나요?”

“에… 저, 그게….”

이켈라인 상회 토우렌 지부의 지부장인 ‘휠켄 아도르’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쩔쩔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난해에 빼돌린 대금으로 사들인 산의 모습이 슬쩍 지나치고 있었다.

그는 오디가 그 산의 이름이나 그곳에 지어진 그의 별장에 대해 다 알고 왔다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전설로 여겨지는 이켈라인 상회의 백발총무를 속여 넘길 말재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에 더욱 고민해야했다.

오디는 그의 입에서 횡설수설이 튀어나오기 전에 진짜 목적을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녀는 말했다.

“타바마의 지부장인 ‘파쿠차 피엘’이 말하더군요. 토우렌 지부장이 요즘 팔자가 폈다고요. 장사가 잘 되는 지역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면서요. 그의 성실성에 비해서 대가가 적은 건 사실이지요. 그쪽 지부는 그가 진두지휘하고 있으니까요. 토우렌도 타마바와 같다고 생각해서 왔는데… 조금 실망이군요. 세율 계산도 제대로 못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휠켄은 더없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실상 빼돌린 걸 말하자면 파쿠차 역시 마찬가지다. 오히려 휠켄이 그 빼돌린 비법을 그에게서 배워왔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그런데 파쿠차는 오디를 구워삶아서 자신에게 죄를 떠넘긴 것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기에 휠켄은 당황에 당황을 더욱 덮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해고당하는 것은 장난에 불과한 일이 될 것 같기에 그는 서둘러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오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다시 오겠어요. 그때까지는 장부 정리를 똑바로 하세요. 나중에 언제 또 올지는 모르지만, 서두르는 편이 좋을 거예요.”

“예잇! 여부가 있겠습니까!”

일단은 목숨이 살아난 것이다. 오디는 그의 인사를 받는 체 마는 체 하면서 집무실을 나와 버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상회의 총부로부터 미움을 사버린 휠켄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장부의 정리보다도 어떻게 하면 파쿠차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했다.

상회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내란이 되겠지만, 어차피 그와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은 틀리다. 파쿠차는 타실렌 지역의 책임자이고, 자신은 토린느 지역의 책임자이다. 분리해서 생각할 것도 없다. 애초에 분리되어 있었으니까.

“제기랄 그 원형 탈모증 자식… 내 기필코 가만두지 않겠다!”

서로 잘못한 마당에 자신의 잘못만 지적당하게 된 후리켄은 공범의 배신에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일 지으며 복수심에 불타기 시작했다.

위와 같은 일은 타바마와 토우렌과 카델 세 지부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타바마 지부장은 카델 지부장이, 카델 지부장은 토우렌 지부장이 서로의 치부를 밝혀낸 것으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토타카 연합국의 경제의 55%를 책임지고 있는 이켈라인 상회가 서로를 향해 공격을 하기 시작할 경우에는 단순계산으로도 토타카의 경제의 반이 휘말린다는 뜻이다. 오디는 너무나도 간단한 말 몇 마디만으로 그것을 이루어내었다.

이런 일에는 정신을 조작하는 일도 쓸 필요가 없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붙잡고 들어가게 되면 사람들을 당황하면서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약점을 다른 사람이 쥐어주었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이쪽의 말은 철석같이 믿어버리게 된다. 격장지계 치고는 상당히 간단한 일이기도 하다.

“선주님. 주포 발사 준비 완료했습니다.”

캡틴 벅의 말이 그녀의 상념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내리감았던 눈을 뜨며 명령을 기다리는 캡틴 벅 옆에 있는 토타카의 국방장관과 해군 사령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폐가 될 일을 선선히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라니요. 저희도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화이트 캣의 주포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어 매우 기대되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도 많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주포의 성능시험을 위해서는 적당한 목표가 필요했으니까요. 토타카의 해군이 이렇게 선뜻 지원을 해주시니 다행입니다.”

토타카의 국방장관인 ‘미탈센타 자브로’는 날카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로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니까요.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이번 측정 결과가 꽤나 기대됩니다.”

그의 옆에 있던 토타카 해군 사령관인 ‘살로레타 자브로’도 그의 형이자 상관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폐기될 배를 대주고, 화이트 캣의 주포가 가진 위력도 관측할 수 있어서 기쁠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오디 님이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하하핫!”

오디는 솔직한 형제의 말에 부드러운 웃음으로 답했다.

이건 일종의 교환조건이었다. 오디는 화이트 캣의 주포에 대한 관측을 허락하는 대신 주포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장소와 목표를 얻을 수 있었다. 토타카 해군측에서는 그 주포의 발사를 자세히 관측함으로서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살로레타의 말대로 오디가 손해보는 역할이라 의심이 들기는 해도, 화이트 캣의 전설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토타카 해군으로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만은 없었다. 이켈라인 상회에의 판단으로는 이 일이 이익은 없을망정 손해는 보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고서 추진했을 테니 의심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오디는 고개를 숙여 자브로 형제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캡틴 벅에게 명령했다.

“주포 블루 아이(Blue eye), 발사하세요.”

“옙! 블루 아이! 발사!”

화이트 캣의 오른쪽에 있는 거대한 포가 10마일 앞에 점으로 보이는 폐선을 조준했다. 육중한 기계음이 조타관제실까지 울렸고, 기계음이 멈춘 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파란 광선이 굉음과 함께 뻗어져 나갔다.

콰아앙-!

광선은 저 멀리까지 날아가서는 폐선에 명중하며 거대한 파도를 띄워 올렸다.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파도는 솟구친 모습 그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이 그대로 꼿꼿하게 서있었다.

“목표에 명중! 급속냉각으로 인한 목표 동결 확인!”

조타관제실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저 10마일 너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화이트 캣의 좌측 주포인 블루 아이는 목표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오디는 고개를 끄덕이곤 우측 주포의 발사를 명령했다.

“주포 레드 아이(Red eye), 발사하세요.”

“옙! 레드 아이! 발사!”

역시 기계음이 들리며 조준을 하던 레드 아이에서 블루 아이와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작열하는 붉은 광선이라는 점이다.

콰아앙-!

광선은 곧게 날아가서는 하얗게 일어선 파도에 명중했다. 그 순간 붉은 빛이 폭발하면서 그 일대가 순식간에 증발하기 시작했다.

“목표에 명중! 고열과 화염으로 인한 목표 증발 확인!”

“지금부터 계측된 결과에 따라 주포의 이상을 탐지합니다. 정비반은 최단시간 이내로 이상을 발견과 동시에 수리에 들어가세요.”

“예!”

캡틴 벅은 화이트 캣의 각 반에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디는 선장석에서 내려와서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국방장관과 해군 사령관에게 다가가서는 그들의 정신을 깨웠다.

“실례합니다. 좋은 구경 되셨습니까?”

“아, 에… 예. 과, 과연 대단한 주포군요….”

“놀랍습니다. 어떻게 저런 기술력을 일개 상회가…, 헙.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살로레타는 얼른 입을 다물며 자신의 실언에 질책했다. 일개 상회라는 말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한다는 건 매우 실례되는 발언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를 뒤흔드는 이켈라인 상회가 아니었던가.

오디는 그의 말실수에 트집을 잡지 않았다. 화이트 캣의 주포가 가진 위력을 관철시킨다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선원들이 바쁜 틈을 타서 선주를 앞세워 화이트 캣을 염탐하실 시간입니다.”

“하하핫!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는군요. 그럼 삼가 실례하겠습니다.”

미탈센타는 부드럽게 오디의 말을 받았고, 살로레타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오디는 조타관제실의 문을 열며 두 사람을 이끌기 시작했고, 토타카 군부의 핵심인 두 형제는 선선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선내 복도를 걸으며 미탈센타는 때마침 떠오른 궁금즘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런데 화이트 캣의 매각에 많은 국가가 관심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만….”

“바다에 닿아있는 국가들 중에서 화이트 캣을 탐내지 않은 국가가 없었습니다. 레리첸트 쪽은 오히려 그랜드 크로스에 관심을 보였지요. 하나 저희 상회는 해로에서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화이트 캣을 만들었습니다. 매각은 저희의 안전을 파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하긴 그렇군요. 누가 자신의 안전을 돈으로 팔겠습니까. 사실 저희 해군측에서는 긴장하고 있습니다. 화이트 캣을 얻는 국가는 순식간에 해상강국이 될 테니까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감히 토타카의 해군력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배 한 척에 내리는 평가 치고는 과한 평가입니다.”

오디의 말은 물론 겸양의 표현이었다. 화이트 캣을 제외하고 바다에서 제일 빠른 배는 화이트 캣의 최고 속도의 1/3에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초장거리를 발사할 수 있는 주포는 기동력과 화력을 동시에 갖춘 무시무시한 무기이다. 주포의 발사 역시 별다른 간격이 없어서 제아무리 많은 배가 덤벼든다 해도 모두 격파하는 일은 시간문제이다.

살로레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과한 게 아닙니다. 저희 대전 전술 전략 평가 목록에는 화이트 캣도 있는데, 저희의 승률은 없다고 보는 편이 더 좋겠더군요. 그래서 이미 저희는 화이트 캣을 대상으로 한 대전 전술 전략에는 딱 한 가지만 적혀 있을 뿐입니다.”

“그 한 가지는 뭐지요?”

“협상입니다. 상회에서 설마 협상을 하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핫!”

“호호호,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긴 하지만 오디는 상대의 재치를 인정했다. 무적이나 다름이 없는 화이트 캣을 상대할 방법은 오로지 협상뿐이다. 애초에 협상 또는 괴멸을 목적으로 건조한 선박이니까.

오디는 이것으로 이 사람들이 화이트 캣의 위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적이 될 경우에 무엇보다도 무섭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오디는 생각보다 계획이 쉽게 전개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짝만 경각심을 일깨워줘도 이들은 미끼를 덥석 물 것이다.

“아, 생각해 보니까 필파드 평의회장님이 화이트 캣의 매각을 개인적으로 요청한 적이 있었어요.”

“예? 평의회장님이요? 어떤 이유로 말입니까?”

“음… 타실렌의 영해에서 벌어지는 분란을 조정하기 위해서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어차피 허락할 생각도 없어서 깊은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타실렌의 영해…입니까?”

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두 형제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자브로 형제는 토린느 출신으로, 애향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현재 토타카의 최고 권력자인 필파드 평의회장 역시 애향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개인적으로 영해를 지키기 위해 화이트 캣을 사겠다고 나선 것은 지나친 애향심의 발로이다. 게다가 그것은 해군의 영역권을 침범하는 행위였고, 자기 고장만 생각하는 편협한 행위였다. 지킬 것이면 나라 전체의 영해를 지키는 일에 써야지, 자기 고장만 생각한다는 식의 태도는 군부에 몸담은 형제로서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디가 노린 것은 이것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지역감정을 조장할 수 없지만, 지역을 등에 업고서 지역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는 걸 보여준다면 없던 지역감정도 생기게 된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사람이 지역을 등에 업고 있다면 자기 역시 그렇게 해야 동등한 싸움이 될거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연합국의 평의회장이라는 사람이 내뱉을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오디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필파드라는 사람이 분명 그런 이유를 제시하긴 했지만, 그것은 농담조로 이야기 한 것이었다. 오디도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고는 추궁을 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필파드는 자신의 말이 농담이라고 이야기 한 적은 없었기에 오디는 그것을 마음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분명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은 화이트 캣이 보여준 주포의 위력과 맞물려 이 군부의 핵심이 되는 두 형제에게서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더불어 이 두 사람이 필파드 평의회장과 대립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군부와 정치가 대립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래쪽에서는 시장경제의 세 축이 흔들릴 것이며, 위쪽에서는 군부와 정치권이 이권다툼을 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은근슬쩍 끼워 넣은 지역감정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면서 알아서 부풀어 오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친 오디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로 자브로 형제를 데리고 화이트 캣의 이모저모를 소개했다. 그들의 정신은 이미 딴 데 팔려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매우 성심껏 안내를 하여 모든 일의 발단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오디의 술수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경제, 군사, 정치에 술수를 부렸던 오디는 마지막으로 행정을 흔들기로 했다.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일에서 제일 중요한 점은 행정이다. 행정 기반이 튼튼하고 원활하게 돌아가야 정치나 경제, 군사 분야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심하게 비약하자면 돈과 서류를 주고받는 기능밖에 없는 것이 행정이지만 그것이 나라를 운영하는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오디는 행정도 함께 뒤흔들어야 자신이 뿌려둔 분란의 씨앗이 더욱 크게 퍼질 것이라 생각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행정 장관을 만나는 일이지만, 토타카는 자신이 연합국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각 행정부가 따로 있었다. 분과된 행정부는 서로를 감시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느라 허점을 보이지 않게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분할되어 있는 것 자체가 단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오디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카도르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부처 부처관의 아내였다.

지금까지는 오디가 직접 관련자를 만났지만, 증거가 셋이 모이면 확인이 된다고 여기까지 직접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것보다도 때로는 간접적인 공작이 더 큰 효과가 있는 법이었다.

카도르 행정부처 부처관의 아내인 ‘하미나 젠탈라’는 이켈라인 상회의 고급 고객이기도 하니 만날 수 있는 명분이야 충분했다.

“총무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을 가지시게 된 건지 정말 궁금해요.”

“뭘요. 젠탈라 부인이야 말로 손색없는 미모를 가지고 계신 걸요.”

“어머,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호호홋.”

오디는 하미나가 잘 다닌다는 카페를 알아내어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각 나라의 핵심인물 치고 나미아와 오디가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를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일단 오디는 그녀와 뜬구름 잡는 소리부터 시작했다. 확실한 신분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대로 그녀의 말을 믿는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의 경계심은 눈앞의 사람을 아느냐에 따라서 나눠진다. 어느 정도 공작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여자의 경계심은 쉽게 풀어지지 않기에 오디는 천천히 시작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떠올린 생각이 그녀의 생각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점이다. 정신조작을 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정신조작을 당한 사람의 경우 그 방면의 행동이나 언행에서 평소와 다른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각을 이끌어내야 한다.

“바깥 분은 여전히 바쁘신가요? 저희 상회에 참 많은 신경을 써주시는 터라 언제 인사라도 드리고 싶군요.”

“여전해요. 그래도 이켈라인 상회는 다른 상회들과는 달리 세금도 잘 내고 취급하는 물건도 확실하기 때문에 제일 많은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해요. 저로서도 그 점에서는 이켈라인 상회에 감사해하고 있답니다. 덕분에 남편의 귀가가 빨라지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부부간의 단란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드렸으니까요. 약간은 자랑해도 되려나요? 후훗.”

“어머, 말씀도 잘하시네요. 그런데 총무님은 혼자라서 쓸쓸하지 않으세요? 저도 옛날에는 독신이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때를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남자란 귀여운 면이 있잖아요?”

오디는 그 뜻이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의 정령이기도 해서 이미 그런 관계에선 일탈해 있는 그녀였기에 별다른 배우자가 필요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미아를 먼저 어떻게 결혼시키지 않는 이상은 소원할 것 같았다. 그녀는 결국 흔하디흔한 대답을 했다.

“그렇네요. 저는 아직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지 못했거든요.”

“총무님이라면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그냥 그 중에서 아무나 붙잡고 남편 삼으세요. 어지간하면 총무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을 걸요.”

“그 말씀은 아데루트 부인이 하셨던 말씀과 같네요.”

“토린느 행정부 부처관의 아내 말씀이시군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보네요. 호홋.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럴 말 할 자격이나 있을까 생각되네요.”

오디의 눈이 잠깐 빛났다.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하미나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째서죠? 그 부부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별 거 아니에요. 결혼한 공무원들이 흔히 저지르는 거 있죠? 그쪽은 권태기부터 극복해야 할 텐데, 정말 큰 문제에요.”

불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전혀 몰랐다는 듯이 놀라는 체를 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그 아데루트 부처관은 저한테도 추파를 던졌어요. 얼마나 기분 나쁘던지, 욕 한 마디하고는 파티에서 그냥 나와 버렸죠. 그게 한 6개월 전이네요.”

“어쩐지…. 요즘 젠탈라 부처관과 아데루트 부처관 사이가 나쁘다는 게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예. 그래요. 사실 그것 때문이죠. 그래서 요전번에 있었던 탈세사건도 평소라면 협력했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떠넘기고 있잖아요.”

오디는 이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하미나는 행정부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탈세사건은 단지 그 두 최고 권력자의 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기에 연루된 사람이 거물급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고, 그것이 물 위에 오를 때까지는 아마도 계속 사건을 서로에게 떠넘길 것이다. 그런데 하미나는 거리의 가십을 그대로 듣고 있는 것이다. 보기보다는 귀가 얇은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래서 그런 말이 도는 거네요.”

“예? 어떤 말이요?”

“아뇨, 뭐… 신경 쓰실 일은 아니에요. 듣기에도 우스운 일이라서.”

“어떤 일인데요? 설마 우리 남편을 음해하거나 그런 말인가요?”

오디의 인물평가에는 하미나가 남편에 대해서는 맹목적일 거라는 예상이 덧붙여졌다. 그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데루트 부처관이 말하길, 바다 냄새도 못 맡아본 땅강아지들은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는 말이 있어서요.”

“예? 아니, 그런…. 바다에 닿아있다고 대수인 줄 아나보네요.”

토타카의 세 지역 중에서 타도르만 유일하게 바다와 접점이 없다. 그래도 그 점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는 바다로 가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이유이다.

“거기에다 역시 일꾼은 토린느 출신이 제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바다를 모르는 사람과 일하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말도 했다는군요.”

“점점…. 아니, 대체 타도르가 뭐가 어때서 그런데요? 게다가 그 해묵은 지역이기주의는 또 뭐람. 어머나 세상에. 나 참….”

“자기가 맡은 지역이 뛰어나다고 하고 싶나 보지요. 그냥 가십거리니까 크게 염두에 두지 마세요. 젠탈라 부처관 님도 업무에 바쁘시니 그런 말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고 봐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지역감정이에요?”

“그렇긴 하지만….”

오디는 난색을 표하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살짝만 건드렸을 뿐인데, 하미나는 의외로 쉽게 넘어 들어왔다. 애초에 아데루트 부처관에게 추파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격한 반응이 나올리가 없지만, 그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좋지 않은 반응이 나온다.

하미나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 몇 가지는 있다. 아데루트 부처관의 발언은 그가 맡은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고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그 고장의 일에 대해선 제일이라는 뜻이며, 상당량의 업무가 몰려있는 바다를 모르고서는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뜻이다.

단지 몇 가지 사실을 감추는 것만 해도 그 뜻은 매우 훌륭하게 왜곡된다. 하미나는 귀부인의 모습을 하곤 있지만, 가십거리를 좋아하고 귀가 얇은 축이었다. 이 말은 분명히 하미나의 생각에 덧씌워져 그 남편에게 전달될 것이다.

또한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만큼 퍼뜨리는 것도 좋아할 테니, 그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이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송사는 베갯머리 송사라는 진리는 오늘도 유효하게 작용할 것이다.

오디는 발끈하는 하미나를 달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여유 있는 웃음과 함께 앞으로 전대 될 토타카의 양상에 대해 은근한 기대감을 품었다.

이런 일이 은근히 재미있어지려는 그녀였다.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6월 14일.

토타카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민들은 이상하게도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공무원들은 묘한 감정에 서서히 휩싸이고 있었다.

군부와 정치권은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 모든 분야가 한데 엉켜서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서로의 지역에 대해 냉기어린 비웃음을 보내게 되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타지 사람들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국론은 지역에 따라서 분열되고 있었고, 그것은 공직사회뿐만 아니라 군부에서도 나타났고, 심지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토린느, 타실렌, 카도르 세 지역은 연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흑색비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원인을 분석해보려 했지만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일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성급한 사람들은 토타카 연합 해체설을 들고 나왔고, 신중한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극소수의 신중한 사람은 이것이 치밀하게 계획되어진 음모라고 했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른 지역들을 비난하고 자기 지역을 우선시 하는 지역 이기주의를 발휘했고, 그 전까지 잘 돌아가던 토타카의 사회질서는 그 근본부터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각 국의 정보부에 여과 없이 흘러들어가게 되었으며, 한 상회의 정보부에서도 간단하게 입수할 수가 있었다.

“수고했어, 오디.”

“네, 나미아 님.”

나미아의 치하에 오디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토타카의 분열 조짐은 벌써부터 많은 나라에서 눈독을 들이게 하고 있었다. 뭉치면 같은 크기의 단일국가보다 무섭지만 흩어지면 상대하기 쉬운 것이 연합국이다. 이 틈을 타고 뭔가 공작을 벌일 국가가 많을 것이다.

나미아는 탁자위에 넓게 펼쳐진 지도에 펜을 들어 토타카 지역에 일필휘지로 ‘공작 종료’라고 적었다.

그 누구도 이켈라인 상회에서 토타카를 분열시키려 했다고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상회로서 오로지 상도만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인상이 이미 몇 백 년에 걸쳐 대륙에 박혀있었기 때문에 이런 흉악한 뒷공작을 꾸밀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중립신의 교단이 한 쪽 편을 든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취급될 것이다.

브란디에고는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지도를 보며 감탄한 어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쉽게 되었군요.”

“말했지? 단결력도 세지만, 흩어지는 것도 쉽다고. 약점만 골라서 톡톡 치다보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있어. 연합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자, 그럼 이제부터는 어디를 칠까? 사분오열하는 모습을 보니 슬슬 재미있어지려고 해.”

“…오너.”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 남이 뻔히 힘들거 알면서도 어려운 일만 맡기는 윗대가리들을 좀 조롱하려고 그런다. 왜?”

나미아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브란디에고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는 그녀에게 주어져야 할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오디는 그 둘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펼쳐진 지도를 보며 다음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대륙을 뒤흔들 작정이라면 사이에그롭이나 제국을 건드리는 편이 좋아요. 하지만 단일 국가이기 때문에 다소 힘든 면을 감수하긴 해야죠. 조금 더 간단하게 일을 추진하다면 라스킨 아주버님께 부탁해서 툰드라를 움직이는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늑대인간들의 생존이 위험해지니까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에요. 면적과 위력 면에서 살펴보자면 사이에그롭과 제국을 건드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끄응…. 둘 다 건드리기가 좀 그렇다. 제국에는 황제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렇겐 못하겠고, 사이에그롭은 머기 아저씨의 추억이 너무 커서 못하겠어. 어차피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륜도 저버리고 도의도 저버리기로 했지만, 양심에 설리지 않는 건 아냐. 에잇! 기왕 이렇게 된 거 양심마저도!”

“그러다가 인간성마저 버리게 되실 것 같네요. 인륜이고 도의고 아무래도 상관없이 진행하도록 하죠. 그렇다면 다음 대상은 제국과 사이에그롭이 되겠는 걸요. 둘 다 따로따로 움직이자면 번거로우니까 한 번에 손을 쓰는 건 어떨까요?”

“응? 어떻게?”

오디는 희고 곧은 손가락으로 제국과 사이에그롭의 국경지대를 가리켰다.

“여기에서 사이에그롭과 제국의 국경 수비대를 충돌시키는 거지요.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명백한 공격행위로 충돌하게 만드는 거예요.”

“호오, 그 다음엔?”

“국가 간의 분쟁이지만 처음에는 관할 영주들이 알아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거예요. 국경을 맞대고는 있지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던 도중 계속해서 복수에 복수를 반복하게끔 만드는 거예요. 사건은 점점 커지고, 국제문제로 대두되겠지요. 그 때 영주간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거예요. 거기까지만 가면 그건 이미 사소한 트러블이라고 하긴 어려워지지요. 그 다음에는 알아서 잘 굴러갈 거예요. 몇 가지 협상의 여지만 잠깐 숨겨두면 돈독했던 국가 사이가 레리첸트의 대협곡처럼 벌어질 거예요.”

“하지만 이건 본격적인 공작이 되겠는 걸. 우연이고 필연이고 맞출 필요가 없잖아. 그렇게 되면 꼬리를 밟힐 수가 있다고.”

나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국경수비대를 충돌시킬 방법도, 복수에 복수를 반복하게 만들 방법도, 영주간의 전면전을 벌이게 할 방법도 지금까지 벌였던 자연스러운 공작으로 하기에는 어려웠다.

국가 내부의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최대한의 충돌을 극도로 회피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어찌 보면 어려웠다. 전쟁을 벌일 경우 서로에게 예상되는 피해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조용히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다.

정말 쓸데없는 오기나 욕심이 아니라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행위는 어지간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신사이 왕국의 경우가 오히려 이상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오디는 그런 것을 모두 생각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뭐 감추고 할 것이 있나요?”

“응? 무슨 뜻이니, 그건?”

“어차피 사람들은 눈앞의 혼란에만 신경 쓰게 될 거예요. 누가 무슨 문제를 어떻게 일으켰느냐는 나중에 볼 문제에요. 역사적인 사건들의 진상규명은 언제나 후손들의 몫이죠. 당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눈앞의 모습에 현혹되기 마련이잖아요? 이제 와서 조심스럽게 나가자는 소리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쩐지 그거 막나가자는 소리로 들린다?”

나미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오디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놀랄 수밖에 없다.

“맞아요. 막나가자는 거예요. 수상한 무리들 투입시키고, 마음껏 정보조작하고, 할 수 있는 한 실컷 소문 퍼뜨리고 그러자고요. 참회나 후회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해요. 지금은 눈앞의 상황이나 실컷 어지럽혀보자고요. 제 2의 매쉬암을 준동시켜도 아무래도 상관없죠.”

“오, 오디…. 너 좀 성격이 바뀐 것 같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죠. 사실, 지금까지 나미아 님이 너무 소극적으로 나가신 거라고 생각해요. 나미아 님이 얼마나 이 세계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은 방해만 될 거예요. 전 세계로 퍼뜨리자고요. 전쟁과 혼란을 위한 공작원들을. 그 끝에 이켈라인 상회가 있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걸로 또 다른 혼란이 시작될 테니까요. 상회가 무너지면 또 세우면 돼요. 한 천 년 정도 지나면 기억하지도 못하게 될 걸요?”

나미아는 지금 오디가 진심으로 세계를 상대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적지근하게 나간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기왕 하는 일이라면 단번에, 미련 없이, 더 큰 괴로움을 안기 전에 짧게 끝내자고 하고 있었다.

“그, 그치만… 그런 일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그럼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죠. 나미아 님의 평소 말씀 아니셨어요? 할 바에는 화끈하게 하자는 거요. 미친 척 하고 대담하게 나가요. 괴로울 것 같아요? 슬플 것 같아요? 괜찮아요. 옆에서 그걸 같이 감내할 사람들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미아 님의 결심이에요.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하는 일이잖아요? 무분별한 발전으로 멸망이 가속화되는 걸 막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미아 님이 하시는 일은 결론적으로 좋은 일이에요. 현재가 좀 쓰리고 아프겠지만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하는 일이에요.”

오디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이 세계의 발전이 가속화되는 걸 내버려 둔다면 무분별한 발전으로 인해 멸망이 다가올 것이다. 신들은 인간과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길 원하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 열여섯의 신들 중 하나를 없앤다는 궁여지책을 꺼내놓은 것이다.

나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괴로움을 오래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평소에 하던 대로 한 번에 일을 저지르고는 한 번에 후회 할 것인가.

결론은 간단했다.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대수술에서 여러 번 칼을 대는 건 당하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바라지 않는 것일 게다.

그녀는 눈을 떴다. 망설임이 사라진 눈동자로, 그녀는 여느 때의 당당함을 지니고 독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좋-아! 까짓것 해보자고! 질질 끄는 것도 싫고, 여러 번 걸쳐서 후회하기도 싫다 이거야! 오디! 지금 당장 정보부의 공작원들을 풀어! 전 세계로! 분란을 조장하고 전쟁을 준비시켜!”

“네! 나미아 님!”

나미아는 전 세계로 자신들의 손님들을 보내었다.

그 날, 세계 각지로 전쟁을 준비하는 손님들이 퍼져나갔다.

Guest.08: 전쟁을 준비하는 손님 - 종료.

[ 환상여관「WISH」]

Guest.09 Postscript: 분쟁.

From guest diary of Namia. Page 38.

사람이 싸우는 일은 상당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시작이 사소하다고 해서 그 끝도 사소하게 끝나지는 않는다. 분쟁이라는 것은 언제나 작게 시작해서 크게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분쟁에 끼어들게 된 사람들은 그 시작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분쟁으로 인해 자신에게 피해 또는 이익이 생기기 때문에 그 원인을 파헤쳐서 해결하려기보다는 거기서 얻을 것은 다 얻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분쟁이란 그런 것이다. 이익과 이익의 대립으로 인한 분쟁이든, 원한으로 인한 분쟁이든 쉽게 끝나는 법이 없다.

분쟁이 끝나는 시점은 그 분쟁을 주도하는 측이 얻을 것을 다 얻었을 때이다. 그것으로 인해 목적을 달성하고,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으면 그것을 그만둔다.

이유야 각자 다르더라도 분쟁이란 것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행위이다.

원한으로 인한 핏값을 받든,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든,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든 원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벌이는 일 중에 하나다.

분쟁을 조금 더 확대해서 살펴보자면, 그것은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시장거리에서 상인과 고객이 서로 가격흥정을 하는 것도 작은 분쟁이다.

외교라는 것은 국가 간의 분쟁을 조금 더 좋게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이 살면서 서로 부딪히고 사는 건 당연한 일이며,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지만, 실상 그것은 언제나 분쟁인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해하려드는 세상과 싸워야 하는 존재들에게 씌워진 분쟁의 천명은 결코 벗을 수 없는 굴레인 것이다. 심지어 인간들은 이길 수 없음을 알고도 죽음과도 분쟁을 벌이지 않던가.

분쟁을 사람을 무모하게도 만든다. 평소라면 생각할 수 없었던 행동을 하게 만들며, 그것을 주도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몰랐던 내면의 새로운 그 어떤가를 발견해내는 수도 있다.

분쟁이란 서로 나눠져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어느 한쪽과 한쪽이 벌이는 상호작용이다. 설령 그 나눠진 부분이 자기 내면의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분쟁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전쟁은 곧 분쟁이며 대립이다.

하나로는 분쟁을 할 수 없다. 하나는 나눠지지 않는 완전수이며 홀로 오롯한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이나 셋이 될 경우에는 얼마든지 나눠질 수 있다. 나눠진 것은 대립하여 분쟁한다.

대립할 수 있기 때문에 나눠지는 걸까, 나눠지기 때문에 대립하는 것일까.

그런 원론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저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이다. 사소한 분쟁이 커져 또 다른 분쟁을 낳고, 그러다보면 도저히 그만 둘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가 벌인 분쟁은 그 속에서 남게 되는 잉여 카르마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분쟁을 낳게 되며 점점 커져나갈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분쟁들은 점점 커져서는 서로 맞물리게 되고, 대륙의 양 극단을 이을 정도로 심화될 것이다.

이미 난 그것을 일으킨 것으로 나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내가 일으킨 분쟁은, 나에게도 또 다른 분쟁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성족들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게 될 것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나와 대립하게 될 일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성족들과의 분쟁을 준비하는 중이다.

이 분쟁의 고리가 언제쯤 끊어질지는 아마 그들도 모를 것이다. 설령 그들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나의 분쟁에서 그들이 쉽사리 발을 빼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슬슬 그들과 나의 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나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내가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나 나미아 이켈라인. 마음껏 싸워주겠어.

Postscript: 분쟁 - 종료.

p.s 평화는 이제 끝났다.

Guest.Last: 진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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