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여관 WISH 5권
Part1: 생각 바로잡기.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4월 20일.
굉장하다면 굉장하다고 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린지 이틀. 브란디에고는 자신의 분위기 파악 능력에 대한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대해서는 서적과 이야기 같은 간접경험 밖에 없는 그는, 아무리 자신이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분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분주함과 자신이 겪고 있는 분주함과는 왠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었다.
“디에고! 여기 좀 도와줘!”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관 WISH는 갑작스런 새단장에 들어가 있었다. 숙박객들을 물리치고, 가게 문을 닫고서는 내부 장식과 겉면 장식을 새로이 하는 일종의 기분전환과도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섯 번의 망치질로 다섯 개의 못을 때려박은 브란디에고는 연장통에 망치를 쑤셔넣고는 자신을 부른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도르래로 옷장을 들어 올려 위층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디에고! 잘 왔어!”
“몇 층으로 옮기면 되지요?”
“여기야!”
샹그렐이 3층의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본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밧줄을 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밧줄에 매달린 옷장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게 전체의 분위기는 예전과 같았다. 많이 쾌활하고, 약간의 망설임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따스한 분위기. 그것은 절대 큰 싸움을 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브란디에고 자신이 느끼기에는 그렇다는 소리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는 해츨링 시절의 짧은 가출과 나미아에게 붙들려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짧은 시간뿐이었다. 물론 서적이라는 위대한 발명품은 그에게 많은 지식을 안겨주었지만, 그런 지식과 실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그래서 그는 불쌍하게도 어떤 결론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행동이 거대한 분쟁을 준비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새로이 가게 단장을 하는 것은, 적진으로 나가는 장수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뜻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며, 직원들의 한결같은 태도는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대개의 가설들에게 뒷받침이란 밭과도 같다. 브란디에고의 가설은 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옥수수처럼 급격한 성장을 계속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가 꺼낼 수 있었던 한가지의 결론은 자신의 분위기 파악 능력에 대한 재검토였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 인간들 역시 변할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변화가 적용된 일부분일 것이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는 다소 지각생인 자신은 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최소한 나미아를 웃기기는 했으니까.
“푸하하핫! 너 정말 머리 복잡했겠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니?”
“…틀린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야야, 내가 전쟁을 준비한다고 해서 여관의 분위기가 바뀔 이유는 없잖아? 아아, 이거 정말 놀랍구나. 너 대체 어떻게 드래곤이 된거니?”
“저도 가끔 그게 고민입니다. 아무래도 이 종족에서 저란 존재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브란디에고는 진심으로 우려 섞인 표정을 하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는 그의 모습에 대해서 뭐라고 지적을 하려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여러가지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같이 상냥하고 착한 레드 드래곤이 있는가 하면 눈앞의 직원 같이 둔하고 덜 총명한 골드 드래곤이 있을 법도 한 일이다.
“뭐, 너무 신경 쓰지 마.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여관 단장을 하는 이유는 일종의 마음을 다잡는 행동이라는 거야.”
“그런가요?”
“응. 머리 모양을 바꾸는 것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던데, 난 별로거든. 쇼핑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의 경우엔 그건 패스. 그래서 한다는 것이 여관의 새단장이라는 거지. 방안이나 집안의 구조를 바꿔서 새로운 기분을 느끼려는 시도야.”
나미아는 방싯방싯 웃으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브란디에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잠깐 동안 생각을 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앞에 있는 상대를 놀라게 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건 좀 의외군요. 이미 결정내린 사항에 굳이 이런 소란을 피워서 자신을 숨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래서 빨리 배우는 종족은 싫다니까.”
나미아는 표정을 굳혔다. 둔하고 덜 총명한 골드 드래곤이라도 일족의 특성은 제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직감과 이어지는 직관력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휘될지 모르는 노릇이다. 물론 브란디에고는 둔하고 덜 총명하기 때문에 상대의 의중을 그대로 말해버린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녀는 말했다.
“맞아. 나도 의식하고 있던 것을 그렇게 제대로 지적해줘서 너무 고마워. 나 비꼬는 거 같지? 사실 비꼬는 거야. 이게 뭐니? 기분전환 하려는 것도 다 망쳐놓고 말이야.”
“아, 저… 죄송합니다.”
“됐어. 죄송해봐야 소용없지. 나 바보 같지?”
경험은 놀라운 것이다. 브란디에고가 거짓으로라도 고개를 저을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 게다가 그 표정까지도 조절할 수 있게 했으니 가히 경험은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미아는 그의 행동에서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위로는 고마워. 하지만 바보 같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 기왕 시작하기로 결정했으면 팍팍! 나가는 것이 나답다고 할 수 있는 태도지만….”
고개를 숙이며 말꼬리를 흐리는 나미아를 보며 브란디에고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차마 그가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나미아는 벌떡 일어나더니 과장스럽게 가슴을 펴고 양 손을 주먹 쥐어 허리에 얹고서는 괄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음무하하하하! 전쟁이다! 당신들의 목숨과 재산을 담보로 건 인생 최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니 나가서 적을 도살하라! 적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도살해라! 평화로운 곳은 나미아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으리! 대륙이여! 울부짖고 통곡해라! 그녀가 가는 길 모두가 전쟁의 업화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대들에게 찾아가는 불길한 손님은 전쟁을 준비하는 손님일지니! 무하하하핫!”
브란디에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과격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녀의 표정과 과도한 당당함을 나타내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을 때,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너.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아. 너라면 괜찮겠어? 생각해봐. 난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서로가 서로를 보았을 때 웃음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었단 말이야. 대규모 상회는 금전의 유통과 물류의 효율적 교환을 가능하게 해서 여러 사람을 웃게 만들지. 돈이 좋다는 것은 부정 못해. 하지만 돈과 그런 미소를 추구하는 건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나미아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오너는 좋은 뜻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에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나쁘지 않습니다.”
“고마워.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그녀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서는 몸을 뒤로 젖혔다. 가느다란 목이 다소 작은 머리조차 지탱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젖혔다. 그녀의 목이 움찔거리며 턱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내가! 전쟁을 조장하려고 한단 말이야! 서로 싸우고, 죽이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지 못해! 전쟁의 미학? 그딴 건 필요 없어! 서로를 죽이면서 자신조차 죽이는 집단적 자살에 무슨 미학이 있어?!”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는 나미아의 모습은 오묘한 애처로움이 있었다. 치렁거리는 드레스가 펼쳐진 채로 팔이 아무렇게나 던져지고, 그렇게 자신의 몸마저 늘어뜨린 채 온몸의 힘을 빼고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브란디에고에겐 그 모습이 그렇게나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랑하고, 행복하게 하고 싶었던 대륙은 이제 혼란으로 가득 찰 거야. 어디가 시작일지는 모르겠지. 동시다발적으로, 갑작스럽게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일이 시작될 거야. 당하는 쪽은 대처도 하지 못하며 죽어가겠지. 그리고 격렬한 저항이 벌어지면서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원하지 않던 관계를 맺게 될 거야. 그들은 모르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 그 혼란이 단 한 여자의 머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그리고 이것도 모르겠지. 그들을 만들고 그들을 돌본 신들이 그들을 죽여서 살신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는 걸.”
브란디에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륙이 혼란에 휩싸이고, 그것이 한 사람의 손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옛 이야기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사실 개인의 능력이 그렇게 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륙전체를 혼란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최소 대륙의 1/3은 그 세력 안으로 넣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제국의 수뇌부가 완벽하게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는 대륙 상권의 반을 장악한 여자가 있었다. 실질적 세력을 따지자면 전 대륙의 1/3은 그녀의 영향권 아래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륙 전체를 혼란으로 이끈다는, 정신병원에서나 들을 법한 말이 현실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난다.
대륙은 혼란으로 빠지고, 정상적으로 운용되던 카르마는 아웃사이더의 개입으로 인하여 허공에 떠버리게 된다. 그것을 긁어모으며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매만지면 멋들어진 살신무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미아와 덩달아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브란디에고는 한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설사 그 의문이 평소에 그가 이야기하여 타박을 받는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그는 일단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는 조심스레 나미아를 불렀다.
“저, 오너. 질문이 있습니다.”
“뭔데?”
“저희들의 목적은 대량의 잉여 카르마를 만들어내는 것이잖습니까?”
“그렇지. 근데 그게 왜?”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미아의 태도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정도는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이러다가는 언제나처럼 바보취급 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리려했지만, 만약 나미아가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일 경우에는 이 사태를 호전시킬 수도 있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바보취급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는 나미아의 목을 보며 말했다.
“거기에, 굳이 사람의 목숨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응?”
“제가 듣기로는 이렇거든요.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가 접촉하고, 인사이더가 아웃사이더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면 정해진 카르마는 배정되지 못해 공중으로 떠버린다고요. 거기까지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나미아는 천천히 상체를 끌어당겼다. 턱이 끌어내려지며 입술과 코, 눈과 이마가 차례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브란디에고는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해봐.”
“그러니까… 전쟁을 위해서 전 대륙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로, 그러나 충돌이나 유혈사태는 없도록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잉여 카르마가 충분하게 모인 시점이 되면 성족들은 지금의 사태를 중단하려고 할 겁니다. 그때까지 전 대륙의 세력들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빙빙 돌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오너의 뜻대로요. 그렇게 되면 어쨌든 간에 아웃사이더의 개입이니까, 그 카르마가 모두 잉여상태가 되겠지요.”
“…그러게.”
나미아의 간단한 수긍은 브란디에고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나미아를 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는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일은 간단합니다. 전 대륙을 전쟁발발 미수상태로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다 단순한 소동이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누구의 목숨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성족들은 메신저를 통해서 대량의 잉여 카르마를 위한 전쟁을 벌이라고 했지, 대살육전을 벌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이상하잖아?”
“그거야 통상적인 관념에 불과합니다. 제국의 명장 부란트 마실엔 장군은 이렇게 말했지요. ‘무혈전쟁이 최고의 전쟁이다. 그리고 최고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전쟁의 한계가 아닐까 싶은 말입니다만, 이런 말에 구애받으시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녀는 그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성족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대량의 카르마를 빼돌리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가장 간단한 수단이 전쟁이다. 그것이 그들의 의뢰인 것이다.
나미아는 늘 자신이 하던 일, 의뢰인의 목적을 가늠하고 그 수단을 자의적 해석에 따라 결정한 후에 실행하는 일을 이번에는 못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자신이 의뢰인이 정한 한계에 구애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미아는 순간 자기불신에 빠져버렸다.
“나, 난… 난 대체 뭐한 거야아-! 아아! 이 바보! 바보! 난 바보야-!”
“저기… 그렇게 자학하지 않으셔도….”
“이럴 때가 아니야. 오디! 오디, 어딨어? 오디잇! 아악! 이 하얀 짝눈 고양이가 대체 어디 있는 거야앗!”
브란디에고의 말을 무시한 채 아무렇게나 떠드는 모습을 본 브란디에고는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손과 입은 그의 생각을 배반했다.
“관리자님은 1층에서 감독을….”
그가 말을 미처 끝내기 전에 나미아는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는 잠시 후에 오디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할 것임을 생각하고는 자신의 이 정직한 성격을 어떻게든 고쳐야 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쟁계획의 입안자이자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하는 담당인 오디는 긴급하게 계획 수정을 요구하는 나미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잠깐! 그건 객실용이야! 아직 아무 계획도 없는데요?”
“…아, 그래?”
자신의 바보스러운 생각은 배제하더라도 유혈사태를 위한 각종 계획이 있었더라면 그것은 모두 취소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 했던 나미아는 이번 일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이라는 것이 광대인가 싶은 생각을 했다.
오디는 나미아를 안심시키거나 혹은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에서 안정을 찾고 싶은 것이 아닌, 진짜로 아무런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기 때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미아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보수 협정이, 삼단 꽃무늬 화병은 특실로! 그게 아직 안 끝났잖아요?”
“어머, 진짜.”
보수 협정을 위해 성족에게 돌아간 에릭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디는 적어도 나미아가 만족할 보수가 제시되지 않는 한은 그 일의 계획을 세우는 준비조차도 낭비라고 이야기할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 그녀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오디는 매우 태평스런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나미아는 자신이 정말로 광대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 닥쳐오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긴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해당 될 일은 아니라고 여겼던 나미아는 어느새 자신이 그런 범부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음을 깨닫고는 좌절하고만 싶었다.
오디는 추욱 늘어진 나미아를 보며 위로하고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지금은 위로보다 다른 화제를 꺼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녀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그 보수 계획은 언제쯤 들어오는 걸까요? 그 액자는 4층!”
“으음…. 나도 그게 궁금하시단 말씀이야.”
“늦는다고 해도 이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텐데요. 목기?! 누가 목기 그릇을 주문한 거야?!”
“물론 나의 생각이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 정도는 인정해. 잠깐, 많은 무리가 있다고 말하려는 그런 표정은 지워.”
무리도 보통 무리가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려던 오디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서 입구 쪽을 향해 말했다.
“그걸 문으로 들여오기는 무리 아닐까?”
오디의 표정은 그대로 재활용되었고, 입구 쪽으로 대형 장롱을 들여오려던 직원들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도르래가 움직이는 뒤뜰로 향했다. 나미아가 보기엔 그것도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그곳에서는 부재중인 브란디에고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얘, 오디. 사람을 움직이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
“물론 알지요. 신뢰관계라고 해도 그 대라고 신뢰를 주고받으니까요. 하지만 그 대상이 신이라면 그건 좀 무리라고 생각해요. 자파인 지배인! 지금 하는 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총감독을 하세요.”
“예! 관리자님!”
오디는 들고 있던 계획서를 아이덴에게 넘기고는 나미아를 돌아보며 계단을 향해 손짓했다. 나미아는 팔짱을 낀 채로 계단을 올라갔고, 뒤에서 들려오는 오디의 발자국 소릴 들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어째서 그게 무리야?”
“당연히, 그들의 결정은 틀린 일이 아닐 테니까요.”
“신은 틀리지 않다는 간단한 진리쯤이야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 보수 없이 날 움직이려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야? 물론 그들의 결정은 그들이 만들고 돌봐왔고, 앞으로도 돌볼 인간들에게 있어서도 옳다는 것 정도는 알아. 하지만 오디, 내가 그들의 자식은 아니잖아?”
오디는 수긍했다. 지금인 제 4 문명기에 살고 있다고 해도 나미아는 어디까지나 제 3 문명기의 주민이었으니까. 오디는 자신의 수긍에 평가 한마디를 곁들였다.
“그거야 그렇죠. 나미아 님은 신들과의 창조주-피조물 관계를 주장하기 보다는 차라리 아버님과의 혈연관계를 주장하실 분이시니까요.”
“혈연관계 맞아. 블러드 스폰 제조에는 피가 들어가잖아. 내가 블러드 스폰이 된 이래로 아빠와 난 혈연관계가 되었다고.”
“예. 그런 식으로 주장하시고 계시죠.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오디의 말에 나미아는 볼을 부풀리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혈연관계가 아닐지라도 그녀들의 부모가 자신들을 친딸과 같이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나미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잘 아는 것을 지적당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했다. 즉, 가볍게 화를 낸 것이다.
“아, 그래서? 결국 내가 보수 받는 게 잘못되었다는 거야? 신들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나와 관계없는 존재들이잖아?”
“하지만 그들은.”
오디의 말은 중간에 싹둑 잘려나갔다.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신들은… 그래, 이야기하자면 집주인이지. 난 그 집에 찾아온 장기 체류자이고. 그런 관계에서 내가 집주인을 위해서 그들의 부탁을 무상으로 들어주는 것은 도의적 차원의 문제야. 그들은 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니까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지. 이번 이도 그런 일이라고 짐작 가능해.”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이번에는 그 도의적인 책임을 회피하시는 건데요?”
나미아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오디를 흘끔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4층의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집주인은 여럿이야.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열여섯이고. 집 안의 일, 창문 닦기 같은 시시콜콜한 일도 그들은 회의를 해서 결정해. 그리고 그 일에 나 같은 체류자의 힘이 필요하다면 도와주지. 그런데, 지금 내가 하기로 한 일은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열 여섯 집주인 중에 하나를 죽이는데 동참하라는 거야. 다른 열다섯 집주인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자. 이 정도라면 정떨어질 법도 한 일이지만, 거부할 수는 없어. 너라면 어떻게 할래? 이것도 도의적인 책임감을 발휘해 볼 거야?”
“하긴 싫지만 해야만 한다면 위험부담을 요구하겠군요.”
“이제 알겠지? 일반적인 반응이야.”
오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미아는 그녀의 질문을 부드럽게 피해간 것이다. 왜냐면 오디가 물어보았던 것은 어떻게 집주인이 신인데도 보수를 받을 생각이 드느냐는 뜻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피해가는 방법 중에서도 상당히 고단수적인 방법인데, 역으로 질문을 해서 긍정을 유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원하던 대답이 아닐지라도 질문자는 이미 수긍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질문에 대한 수긍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자면 다시 원래 질문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럴 경우에 질문대상자는 얼른 다른 말로 질문자의 주의를 돌리려고 하기 마련이다. 나미아는 그렇게 했다.
“어라?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누구요? 어머, 에릭 씨?”
“어이쿠, 이제야 오시네요. 왔을 때 딱 자리를 비우셨다는 소릴 듣고 아뿔싸 싶었습니다.”
나미아는 왜 아직도 브란디에고가 도르래 작업 현장으로 내려가지 않았는가를 이해했다. 말이 많아서 메신저를 하고 있고, 메신저를 하기에 말이 많은 이 시끄러운 정체불명의 아웃사이더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녀는 에릭이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에 왔다는 것에 큰 짜증을 느꼈다.
아무리 그가 특수한 존재라지만 그녀 역시 그와 만만찮은 존재이다. 같은 존재로서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기분 나빴다. 그래서 자연히 그녀의 발걸음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서 브란디에고가 얼른 비켜준 소파의 중앙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도 않은 채 당당하게 오른손의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내밀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내놔요.”
“…예?”
“보수. 아니면 그 제안. 그것 때문에 왔잖아요? 물론, 입구에서 들어오지 않고 곧바로 들어온 당신에게 무단침입의 죄목을 씌워 펜스텐 호수로 던져버리는 것이 먼저겠지만 그건 이야기 진행에 별 도움이 안 되니 대화 다음으로 미루죠. 알아들었으면 얼른 내놔요.”
에릭은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미아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아직 봄이지만 호숫물은 좀 찰 텐데요?”
“알게 뭐예요. 제가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어서 내놔요. 시간 끌면 일단 던진 후에 생각한다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저기, 그렇게 하시다간 제가 말씀드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나미아는 에릭의 말을 한껏 비웃었다.
“하! 정말요? 한 번 묵비권을 행사해 보시죠? 메신저가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겠다면 대체 여긴 왜 왔어요? 아, 지나가다 생각나서 들렀다는 상투적 표현 따위는 바로 짓뭉개질 줄 알아요.”
에릭은 나미아의 시선으로 그녀의 말 뒤에 붙은 문구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마도 그의 입술과 함께 짓뭉개겠다는 말일 것이다. 그는 양 손을 가볍게 들어올려 항복의 제스처를 취하고는 말했다.
“헤유, 이거 참. 격식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을 이렇게 타박해도 됩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용건부터 이야기 하죠. 거참, 메신저 생활하며 이렇게 푸대접 받은 적은… 말한다니까요!”
소매를 걷어 올리는 나미아를 보며 질겁한 에릭은 손을 휘저으며 기겁했고, 오디는 아직 자리에 앉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소파 뒤에서 나미아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이것으로 부족한지 그녀는 브란디에고의 도움도 요청했다.
“브란디에고 씨, 손.”
“아, 예.”
브란디에고는 얼른 나미아의 양손을 붙잡았고, 나미아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잡아놓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얘, 얘네가 지금? 오디, 디에고. 얼른 안 놔? 야! 너희들 정말!”
“에릭 씨. 얼른 말씀하시죠. 호수에 던져지고 싶지 않으면요.”
“이거 참 감사드립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열다섯… 아니, 열넷이군요. 헤르키엘 님은 중립이기 때문에 빠지셨으니까요. 열 네 신들의 전갈을 전합니다. 그분들께서 정하신 보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호수에 빠지기 직전에 몸을 뺄 수도 있는 능력자인 에릭이었지만, 나미아의 기세는 자신을 질리게 하는 흉흉함이 있었다. 그는 얼른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라도 그의 목적은 신속하고 요점만 짚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에도 나미아는 성난 고양이마냥 발광했고, 오디와 브란디에고는 어마어마한 힘을 들여 그녀를 억눌러야 했다. 에릭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이 오늘따라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생각했다.
“캬아악! 인정 못해! 기껏 뼈 빠지게 일하고 받는 것이 조막만한 돌땡이 하나라고옷?!”
브란디에고와 오디는 이제 나미아를 말릴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에릭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나미아는 발광하면서도 똑똑히 들은 보수에 대해서 입으로는 불을 뿜을 듯이 길길이 날뛰었다.
“나미아 님. 그리 낮은 보수도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오너. 그들로서도 꽤나 파격적인 조건인 것 같은데요?”
“앙? 니네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게 어딜 봐서! 너희는 저 윗대가리들이 선심 쓰듯 돌땡이 하나 던져준다는 게 그렇게도 기쁘냐?”
“말씀하시는 돌땡이가 카르마 스톤만 아니라면 같이 화내겠습니다만.”
오디는 나미아의 옆에 앉으면서 차분하게 일렀다. 나미아는 팔짱을 터억 끼고를 콧김을 풀풀 뿜어대며 씩씩거렸다. 브란디에고는 거기서 성난 황소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고양이에서 황소까지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넓구나 하는 헛생각에 잠시 빠져있을 때, 오디는 일상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즉, 나미아 달래기를 계속했다.
“물론 저도 화내시는 마음 공감해요. 그렇게 수고해놓고 카르마 스톤 하나를 보수로 준다는 건 얼핏 보면 저희가 밑지는 일이기도 해요. 하지만, 에릭의 설명을 들으셨잖아요? 카르마 스톤을 복용하고 한 가지 생각을 계속해서 떠올리면 그것이 이뤄진다는 거잖아요? 말하자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거예요.”
“흥! 같잖아! 내가 하는 일이 뭔데? 다른 사람 소원 들어주기야! 그런 내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내 소원 풀겠다고 돌땡이를 삼켜야 하는데?!”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이랑 자신의 소원을 푸는 일이랑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그는 그녀의 말에서 도저히 실마리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 얼른 물어보기로 했다.
“오너. 오너도 소원 같은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남의 소원은 남의 소원이고, 오너의 소원은 오너의 소원이지 않습니까? 남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과 오너의 소원을 해소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요?”
“디에고. 너 바보지?”
“…이유도 좀 같이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너 말이야, 소원을 이룰 수 없을 때의 좌절이나 절망이 얼마나 큰지 알지? 간단하게 설명해서, 베니슬라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려 봐.”
“…끔찍하군요.”
브란디에고의 어두운 표정을 본 나미아는 순간 그를 인간 같이 대했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망각이 없는 드래곤은 기억의 추억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좌절했던 기억의 느낀 그대로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정신의 내구력이 강한 종족이라 쉽게 우울증에 빠져들지는 않지만, 과거의 싫은 기억을 그때 당시의 느낌 그대로 되새긴다는 것은 꽤나 가슴 아플 것이다. 나미아는 얼른 사과했다.
“미, 미안. 난 그저 예시를 들려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너가 그만큼 절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겠죠.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으, 응…. 아무튼, 네가 느꼈던 것을 사람들도 느끼고 있어. 난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싫단 말이야. 사람들이 가진 애절한 소원을 이뤄주는 것은 내가 그걸 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나에게 있어서 소원 성취라는 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해. 그러니 난 내 소원에 그다지 관심 없는 거야.”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나미아의 어조는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브란디에고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여관의 주인을 보면서 잠시 턱을 매만졌다. 그녀의 말투와 행동, 그리고 눈빛은 그의 직관력에 대입되어 그 말의 진위를 가려내 주었다. 그는 말했다.
“거짓말이군요.”
“에….”
“오너가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방금 전 오너의 말은 거짓입니다. 지금 보면 자신을 속이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미아는 살짝 질린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브란디에고는 평소 그의 미소어린 표정 대진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나미아는 그 눈길에 자신의 마음이 낱낱이 ‘읽히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원은 당장 이룰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한 시간, 혹은 하루, 혹은 일주일 정도로 이룰 수 있는 소원이 있다면 그것을 소원이라 부르는 대신에 계획 혹은 예정이라고 부르겠지요. 소원에는 상당한 무게가 실린다는 것 정도는 아실 텐데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 간단히 말해 주관적인 불가능성을 돌파하고 싶은 열망입니다. 그 주관적인 불가능성은 기준도 상대적인 것이라,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한계가 다르지만, 그 한계가 끝에 닿아 있는 존재는 신 밖에 없으니까요. 오너는 당신의 높은 한계로 보다 낮은 한계를 가진 이들을 손쉽게 한계점 위로 끌어올려 줍니다. 다만, 당신의 한계를 넘게 해 줄 사람이 없지요.”
나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도 바라는 것은 많았지만, 그것 대부분은 할 수 없는 일이고, 스스로가 제한한 일들이었다. 소원이라면 소원이었다. ‘이룰 수 없는’이란 말이 앞에 들어가긴 하겠지만.
브란디에고는 계속 이야기했다.
“신들과 성족이 보수로 카르마 스톤을 준 것은 꽤나 그 의미가 큽니다. 언제나 다른 이들의 소원 성취에만 힘을 쓰던 오너에게, 자신의 소원을 이루라고 하는 뜻이 담겨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여관의 주인은 정작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 소원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이루라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
나미아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만족을 할 수 없기에 대리만족으로 충족해야 했던 욕구를 이를 수 있는 걸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확신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런 희망을 가져보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희망이 부정될 경우에 찾아오는 절망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나 애 갖고 싶어.”
“…예?”
“나미아… 님?”
브란디에고의 표정은 가히 황당의 극치를 표현하는 좋은 소재였고, 오디조차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그녀의 말은 갑작스러웠고, 이전의 어떤 암시도 없었다. 나미아는 그렇게 두 사람의 머릿속을 백짓장으로 만들고는 거기에 톡톡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아빠나 엄마들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 보면 그렇고, 부모가 되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더라. 행복한 웃음에 즐거운 표정, 책임감이 얹힌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아기가 정말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이런 말 있잖아? 아기가 귀여우면 결혼할 때라고.”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브란디에고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애가 가지고 싶다는 처녀 마음이야 자신이 알 수는 없지만, 애를 가지고 싶다는 것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듯 보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 찾다보면 나올 것이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결혼해서 애가 생길 것이다. 극히 자연스러운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라면, 그것은 분명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문제? 음… 문제라면 문제야. 확신이 없거든.”
“확신이요? 무슨 확신입니까?”
“내가 애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 왜냐면, 난 아웃사이더거든.”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문제다. 차원에 속해있지 않은 존재들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확실하게 의문이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은 생물학적으로 자라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그것은 이 세계의 신들이 정한 위대한 법칙 중에서도 제일 앞에 가는 것이다. 창조의 권능은 신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신들은 그들의 신민에게 잠시 그들의 권능을 내어준 것이고, 따라서 그 신민들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숭고한 행위로서 자손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영역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에게 그런 축복이 내려질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차원에서 벗어나면 그만인 존재에게 신들이 그들의 권능을 쉽게 대절하진 않을 것 같다.
나미아는 자신의 말을 이해한 것 같은 브란디에고의 표정을 보고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명에 대한 문제는 이미 오래전에 해결되었어. 블러드 스폰이긴 하지만, 더 늘리자면 늘릴 수는 있어. 지겹도록 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 하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 난 나만의 가족을, 가정을 이룰 수 있는지가 정말 궁금해. 굳이 말하자면 멋들어진 배우자와 함께 예쁜 아이 낳아서 알콩달콩 살고 싶어. 세상 따윈 나 몰라라 하고, 가족들하고만 지내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야. 그게 가능 할까? 그들의 내어준다는 그 카르마 스톤을 먹고 열심히 바라면 이루어질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남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하긴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소원까지 커버하지는 않는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신들은 그런 그녀의 소원을 알고서는 지금까지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그런 보수를 책정한 것일 수도 있다. 브란디에고는 그런 취지에서 나미아를 위로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저, 오너….”
“자아! 푸념은 이걸로 끝! 그리고 내가 정말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일 하는 사람을 셋인데, 대가는 하나라는 거야! 일꾼이 셋이면 당연히 보수도 셋이어야지! 이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불공평하잖아!”
“아하하하….”
브란디에고는 위로의 말들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푸념이 끝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해봤자 자신만 바보가 되는 것이다. 비록 바보취급 당하는 일에 익숙하다고 할지라도 사서 당하는 건 정말로 바보짓이다.
오디는 나미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에 기뻐해야할지, 아니면 그녀가 이야기한 그녀의 소원에 대해 더 고민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미아의 파더 콤플렉스에 면죄부를 씌울 생각은 없지만, 아마도 라이니시스가 그 소원 달성에 제일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무래도 더 생각하다가는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서 그녀는 다른 문제를 제기하기로 했다.
“그럼 나미아 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에? 아아. 계획 말이지? 으음…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그것이 모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인식하게끔 하는 일말이지? 그건 이제부터 생각을 해봐야지. 이제야 보수 협상이 끝났으니까.”
“…끝난 겁니까?”
“끝났다고 쳐, 디에고. 너 너무 그렇게 따지고 들면 여자들이 싫어한다?”
나미아는 평소의 태도 그대로 당당하게 브란디에고에게 말했다. 브란디에고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평소의 나미아가 더 보기 좋았다.
“그럼 오너,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너 아까부터 뭐들었어? 지금부터 생각해야 한다니까? 설마 생각하는 모든 일이 나의 몫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물론 다 같이 생각해야지요.”
“그래.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자고.”
그러면서 나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디와 브란디에고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고, 그녀는 당당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서는 힘차게 선언했다.
“조건은 두개! 각 나라의 군대가 움직일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 그리고 그것이 흐지부지될 정도의 약점! 이런 것을 전 대륙에 통용시켜야 한다!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이용해서 대륙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린 후에, 도로 건져낸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예. 나미아 님.”
“알겠습니다. 오너.”
오디와 브란디에고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는 두 사람에 반응에 충분히 만족하고서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점 부터 짚어나가기로 했다. 어떤 일이든지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 기반이 탄탄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밥부터 먹자. 나 배고파.”
“…아, 예.”
오디가 힘겹게 대답했고, 브란디에고는 아예 얼이 빠져버렸다. 누가 뭐래도 나미아는 나미아였기에 그들은 순간적으로나마 그녀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을 후회하며 그것을 원래대로 바로잡았다.
세 사람이 생각이 모두 바로잡힌 기막힌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