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07 Postscript: 믿음.
From guest diary of Namia. Page 33.
자기자신을 너무 믿어버리게 될 경우, 그것은 낡은 격언의 재확인밖엔 되지 못할 것이다.
과한 것은 모자람에 미치지 아니한다는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쓰이는 정확한 격언 말이다.
이번 손님이었던 자마닌 와르벡은 그런 격언을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향한 믿음이 너무나도 굳건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처음 여관에 왔을 때의 자마닌 같은 사람에겐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
자신이 가는 길이나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언제나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일 수록 사고의 전환이 어렵다.
사고의 전환이라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틀렸기 때문에 다른 계책을 생각하고자 일의 관점을 돌려보는 일이지만, 자신이 옳고, 자신이 진리인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역시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서 남의 의견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흔히 말하는 독선이 이것이다.
자신의 방법으로 어떤 일을 해서 그 방법이 실패했을 때는 그것은 자신의 방법이 틀려서가 아니라 다른 주변 요인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자신을 고치는 대신 남을 고치려 드는 것이 독선이다.
왜냐면 자신은 옳으니까 고쳐질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나쁜 건 남이고, 틀린 것은 주변 환경이이라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실패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나는 차라리 바보라고 정의하겠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실수가 있는 법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마치 세상의 종말인양 생각하며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는 거대한 실수도 옳다고 여긴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완고하기 그지없어 주변을 피곤하게 만든다.
자마닌은 이런 타입이었다.
그는 자신의 솜씨에 자신이 있었고, 그 솜씨를 믿었기에 요리가 예술인양 말하고, 궁극의 맛에 다다르기 위한 노력아닌 노력을 했었다. 게다가 자신의 길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인가? 덕분에 피곤한 것은 이쪽이었다. 믿음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진 근본적인 자신감부터 깨부수어야만 한다.
자마닌은 그의 실력을 믿고 있었기에 나는 그 실력을 깨부수기로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자신감을 이루고 있던 믿음은 순식간에 깨어져 나갔고,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힘겹게 받아들였다.
아마 인정하기는 싫었을 것이다.
믿음이 사라진 사람은 뭔가를 이룰 수 없다. 그 시점에서 나는 그에게 새로운 믿음을 주어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때 자마닌이 방에서 두문불출한 것은 정말로 다행이었다.
난 그에게 어떤 믿음을 줘야 할 지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때 나를 도운 것은 또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마닌의 약속녀인 세이아란은 자마닌이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옛말의 약속을 믿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마닌의 새로운 믿음이 되었고, 그것은 그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믿음이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의 사이를 이어주면서 그들이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 믿음이 사라진 관계나 집단은 필연적으로 산산 조각 날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은 의뢰로 아슬아슬했다.
만약 자마닌이 브란디에고와의 승부 결과를 수긍하지 않고 그것마저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거나, 누군가 어쨌다거나 하는 등의 핑계를 대었다면 그의 믿음을 부수기 어려웠을 것이며, 세이아란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자마닌을 새로이 일으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상황과 상황이 너무나 잘 맞물려서 좋은 결과를 낸 것 같기도 하다.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면 시간의 흐름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잘 되겠지, 잘 해결되겠지 싶은 생각들을 가지고 상황에 따라 대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가 단순히 막무가내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상황을 믿었기 때문일까? 애매한 일이다. 애당초 이 믿음이라는 개념도 정확하지 않은 애매모호한 것이니까.
사람은 여러가지를 믿는다.
자기자신부터 시작해 다른 사람을, 어떤 물건을, 어떤 현상을 믿는다. 그것에 기대어 안도를 할 수 있고, 그것을 무기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믿음이 없이는 도약하거나 걸어갈 수 없다. 욕망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면 믿음은 그 사람을 계속 서있게 하는 버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을 잃은 사람은 무너지고, 그걸 다시 세우는 데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자마닌은 잊고 있었던 예전의 믿음을 다시 되찾는 것으로 비교적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에 자신을 기대어 살아갈 것이다.
남은 행복하게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보람찬 일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기상을 지닌 요리사를 위해 환호하자.
이번 일은 정말 성공적이었다.
즐겁기도 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손님의 일을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채,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Postscript: 믿음 - 종료.
p.s 아자앗! 돈 벌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Guest.Supplementary story: 그들의 결정
헤르디스 베올딘은 성족의 일원이자 성지의 관리자이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물질계의 존재들을 만나는 것이며, 이는 카르마의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함이다.
그의 행적 중에서 제일 큰일을 꼽으라면 평범한 소녀였던 안스란을 거대한 카르마의 운집과 동시에 여신으로 만든 일이었다. 여신이 된 소녀는 현재 제이중립신의 역할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신이나 신이 사는 곳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경우는 많다. 신들은 언제나 즐겁고 걱정 없이 매일 연회와 함께 살아간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낙원에서 신들이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는 거야 쉬운 일이다.
그러나 헤르디스 베올딘은 신을 직접 보고, 신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성족이다. 그들은 이 세계를 운영하는 신의 모습에서 물질계의 인간들이 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뇌와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밑에 있는 성족들 역시 비슷한 고뇌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는 물질계에서 한숨으로 표현될 수 있을 행동을 취한 다음 몸을 전이시켰다. 성족과 신들이 살아가는 차원은 그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이동에서 대화까지.
“헤르디스 베올딘. 지금 입장하였습니다.”
“오, 어서 오게나. 헤르디스 베올딘. 다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헤르디스는 주변을 지각했다. 많은 수의 성족들이 한 장소(개념적 의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익숙한 느낌의 존재임을 확인한 헤르디스 베올딘은 예의바른 의지를 발하며 모두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의장의 일이 누구보다 바쁘다는 건 여기 모인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동의의 개념이 그들 사이를 오갔고, 헤르디스 베올딘은 감사의 의지를 발했다. 장소와 방향, 거리의 개념을 만드는 것은 오직 물질계뿐이다. 물질을 벗어난 다른 무엇인 이들에겐 상적이나 좌석의 의미는 해학적 농담거리에 불과했다.
헤르디스 베올딘은 주변을 떠다니는 의지와 개념을 적당히 조율하고는 그곳에 자신의 의지를 꺼내놓았다.
“카르마를 조율하는 담당 일족들은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서 일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현재 ‘그녀’는 저희와 다른 신들의 요청에 따라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작업에 착수중이라고 합니다.”
“오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예의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뭐라 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날짜가 빠듯한데 반해 정해진 작업량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느린 속도입니다. 물론 그녀는 최대한 노력하고 있겠지만 이쪽의 사정을 모르는 이상은 지금과 같은 자세가 최대한의 협조를 보인다고 봐야겠지요.”
우려의 개념이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한 성족은 의문으로 우려를 슬쩍 밀어내면서 의지를 실어보냈다.
“그렇다면 카르마 스톤의 제작이 너무 느리다는 소리군요. 지난번에 그렇게 많은 양의 카르마를 응집했음에도 불구하고요.”
헤르디스 베올딘은 의문 위에 동의를 올려놓았다.
“그렇습니다. 지난 문명기의 인간이었던 안테르지오의 의념으로 만들어낸 카르마 스톤은 목표했던 것보다 적은 양이었습니다. 사실, 상황 자체로 보자면 많은 양이긴 하지만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 일을 반복해보면 어떨까요?”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카르마를 생성하는 유적은 골드 드래곤의 신예인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가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번엔 아쉬움이 그들 사이를 흘러 다녔다. 헤르디스 베올딘은 아쉬움을 억지로 치우는 대신 자신의 의지만을 꺼내놓았다.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루어낸 결과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모인 이 장소에서 제안하고자 합니다. 대량의 카르마를 강제적으로 거두는 방안을 말이지요.”
헤르디스는 의지를 사용해 그 방안을 드러내었다. 성족들은 각자 조심스레 의지를 내놓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헤르디스 베올딘의 제안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 그들이 하려는 일은 결코 실패해선 안 되는 범주에 속했고, 중간 과정을 노출시킬 수도 없는 부류였다. 신중하게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성족들은 서로의 의지를 받아들이면서 헤르디스의 방안이 기일 내에 맞출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그런 의지를 느낀 헤르디스는 주목의 소망을 밖으로 꺼내어 모든 이들의 주의를 끌었다.
“물질계의 존재들이 저희에 대해 안다면 뭐라 욕할지 상상조차 하기 두렵군요. 그렇지만 범우주적인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물질계의 시간으로 아우레스력 1876년 10월에 시작하여 새해가 오기 전에 끝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아웃사이더인 나미아 이켈라인 양과 오디 미아 싸이 이켈라인 양의 전포적인 협조를 필요로 합니다. 여태껏 저희의 성과를 위해서 두 사람에게 심한 협박이나 강요, 그리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점에 대해서 일단 사과를 해야겠지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성족과 열다섯 신의 사과를 받는 존재가 되겠군요.”
“그렇군요. 참으로 유일무이한 일입니다. 하긴 저희들이 하려는 것 또한 전대미문에 속하니 여러모로 처음이 겹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메신저 에릭 안자이에게는 회의의 내용과 앞으로의 일정, 그리고 저희 모두의 사과를 전달할 것을 요청합니다.”
역시 개념의 덩어리로서 존재하던 에릭은 동의의 의지를 꺼내놓았다. 그제야 헤르디스 베올딘은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우레스력 1876년, 안스란력 436년 4월 18일.
“지금까지 불쾌한 일이 있었다면 모두 사죄드리겠으니,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달라는 말씀을 먼저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엔 또 어떻게 부려먹으려고 그런데요?”
나미아는 팔짱을 낀 채로 완벽에 가까운 적의를 드러내며 에릭을 쏘아보았다. 흉흉한 살기가 순식간에 응접실을 메웠고, 그 살기는 브란디에고마저도 불편해할 정도였다. 살기의 목표인 에릭은 살짝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성족 여러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목적? 이렇게 따로 말하는 걸 보면 저희가 알고 있는 클리너의 목적은 아닌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나미아는 일단 살기를 거뒀다. 거실의 공기가 한층 가벼워졌다. 에릭은 목덜미를 느슨하게 하며 막혀있던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제야 좀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많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하고는 상관없으니까요. 단지 전달자의 역할만 할 뿐이라서 억울해할 수도 있겠지만, 제게 있어서 좋지 않은 일을 전달하는 사람이 곱게 보일 리는 없지요.”
에릭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알고서도 메신저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 정도는 사실 익숙합니다. 어이쿠, 제가 또 실언을 했군요. 하하핫.”
“잡담은 그만 하고 본론이나 말해요.”
“예, 그러지요. 성족이 여러분께 진짜로 원한 것은 카르마의 정리가 아니라 잉여 카르마의 발생을 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뭐… 이 부분에 대해선 짐작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짐작을 하고 있었어요.”
나미아는 에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님의 일에 개입하게 되면 손님이나 그녀가 만나는 그 주변 사람들의 상황이 카르마에 맞춰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웃사이더의 개입으로 처리된다.
여기서는 우주적인 법칙인 카르마가 통하지 않게 되며, 준비되어 있던 카르마는 배정되지 못한 채 남아버린다. 잉여 카르마는 그렇게 발생하며, 나미아와 오디는 일전에 이러한 것이 남을 것이라 예상한 적이 있었다.
“아아, 다행이군요.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그 잉여 카르마는 사실 여러분이 예전에 인가받지 않은 선행을 했을 때처럼 성족의 골칫덩이가 되는 대신 다른 계획을 위한 재료가 되고 있습니다. 열다섯 신과 성족은 모종의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많은 카르마가 필요합니다. 카르마를 만드는 것이 성족의 임무 중 하나입니다만, 함부로 빼돌릴 수는 없지요. 카르마는 면밀히 관리되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도 없고요.”
“흐음… 관리자를 속이거나 눈을 돌리게 만들면?”
“물질계에선 가능하겠지만 저 위에서는 그렇게 못합니다. 그곳은 개념과 의지가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곳이니까요.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미심쩍은 곳이며, 의념만 올돋다면 무엇이든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카르마를 빼돌리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편법이지만 정당하게 남는 카르마를 회수해서 이용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런데 빼돌려서 어디다 쓰게요?”
“일단 빼돌린 카르마는 어떤 존재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응집시킵니다. 일정량의 카르마를 모아 카르마 스톤으로 정제하지요.”
에릭은 슬슬 호기심을 드러내는 나미아에게 천천히 설명했다. 그녀가 안테르지오와 싸웠던 유적의 병기는 카르마를 생성하는 병기였고, 고대의 병기는 대부분 그와 같은 형태였다는 것까지 소상하게,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다.
브란디에고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성족의 계획의 일환디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고, 나미아와 오디는 짐작했던 내용을 사실로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 달갑진 않았지만.
“이상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성족과 신이 도모하여 하려고 하는 어떤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두 가지인데, 지금까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와 무게가 다르겠군요.”
“그렇습니다.”
에릭은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미아는 팔짱을 낀 채로 침묵했다.
성족들이 마음이 급해져서 자신에게 많은 것을 무리하게 요구한 것은 사실이고, 사실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물질계를 조율한다는 존재들이 협박을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이렇게 부랴부랴 사과를 하면서 상정을 설명한다는 것은 더욱 더 급해졌다는 소리다.
나미아는 슬쩍 오디를 보았다. 오디는 여느 때와 같이 주인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기에 나미아는 안심할 수 있었다. 자신이 멋대로 결정하더라도 같이 갈 사람 하나는 있는 셈이었다.
그러는 김에 나미아는 브란디에고도 바라보았다. 그는 이야기의 전체 맥락을 간신히 붙잡은 듯 이야기의 무게에 꽤나 질려하는 표정이었다.
그도 나름 관련자였기에 나미아는 딱히 그를 내보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겼다. 그녀는 에릭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중요한 일 같네요. 그리고 지금 당장은 우리 이외에 부탁할 존재가 없다는 소리고요. 그렇지요?”
“예, 그렇습니다.”
“좋아요. 일단 해보지요. 어떤 일인가요?”
“전쟁입니다. 대륙 전체의.”
에릭은 빠르게 말했고, 나미아와 오디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굳었다. 전쟁. 그것도 아이리펜을 아우르는 전쟁을 하란 말이었다. 나미아는 당혹의 도를 넘어 황당함마저 느꼈다.
“제정신이에요?”
“물론 두 분이 전쟁을 하라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전쟁을 위해 두 분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다시 말해, 엄청난 양의 잉여 카르마를 발생시켜달라는 소립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대규모의 인원이 있는 곳에서 한 번에 하시는 편이 더 좋겠지요. 두 분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일으켜 두 분의 뜻대로 움직이게만 만든다면, 휘하의 일개 병사의 카르마까지가 모두 남게 될 테니까요.”
나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에릭의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디는 나미아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며 일단 자신의 의문부터 확실히 하기로 했다.
“전 대륙적인 잉여 카르마가 필요한 건가요? 확실히 전쟁이 제일 좋은 수단이긴 하군요. 게다가 전 대륙의 모든 군세를 저희 마음대로 다루었을 때 발생하는 잉여 카르마의 양은 성족이라도 상상하기 힘들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낸 잉여 카르마로 카르마 스톤을 정제해서… 무슨 일에 사용할 생각이시지요?”
에릭은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생각해야 했다. 워낙에 많은 사정이 있는지라 그냥 설명하다보면 요점이 어긋날 정도였다. 무엇을 하려는지 짧고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고민하던 에릭은 이내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신을 죽일 겁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미친 거 아냐?”
나미아의 말에 심지어 브란디에고마저도 고개를 끄덕였다. 폭언에 가까운 언사에 에릭이 멍하니 있을 때, 나미아가 말을 이었다.
“신을 죽여요? 지금 열여섯이나 되니까 하나 둘 정도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리 영향력이 적다고 해도 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사라지면 물질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바도 아닐 텐데요?”
에릭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못 들은 셈 치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신을 죽인다니, 죽여서 뭐하려고요?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놓고 입장료라도 받을 셈이에요?”
“아하하… 참신한 발상입니다만, 성족은 보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신을 죽인 후에 우주를 구하려고 하는 거지요.”
나미아는 아까부터 자꾸 뜬금없는 소리만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르마가 어떻고 신을 죽이는 것이 저쩌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작 상대는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고만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나미아는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자세히 설명해요! 시간 없다면 왜 자꾸 시간을 끄는 건데?!”
“나미아 님, 제발 참아주세요.”
“오, 오너. 여기선 일단 진정하셔야…….”
오디와 브란디에고가 양쪽에서 그녀를 달래는 사이, 흠칫했던 에릭은 서둘러 설명을 시작했다.
“예, 예에. 그러니까 아시죠? 그… 안스란께서 여신이 되신 그 사건이요.”
“…그 사기극이라면 잘 알고 있어요. 그게 왜요?”
“그 때 문제가 생긴 것이… 이 세계는 열다섯 신들이 조율하도록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빛과 어둠이 각각 일곱에 한 면의 중립신을 두어 균형을 맞춰왔지요. 그런데 신이 하나 더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열여섯이 되었지요. 그러자 체계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신이 과포화된 데다가 짝수가 되니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어떤 일이요?”
에릭은 거창한 한숨을 내쉬었다.
“진보가 너무 빨라졌습니다.”
“예?”
“인간들은 이제 마법의 힘이 없이도 하늘을 날고, 철에 의지해 말보다도 빨리 달리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필요 없는 배를 만들어 대양을 떠다니지요. 마법과 역학, 물리법칙만을 사용해 자연력을 배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436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제신이 끼어들 새도 없이, 그들이 가진 가치가 무색할 정도로 발전을 계속한 것입니다!”
에릭의 개탄스러운 한탄에 나미아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안스란력이 발호된 이래 다른 종족보다도 인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했다.
그 전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될 속도였다.
비공정을 만들고 철도를 놓으며, 돛이 없는 배를 만들었다. 자연력을 무시할 수 있게 된 세계에서는 신의 영광이나 자연의 위대함 따위는 들어올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일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근데 그게 어때서요?”
“하! 어떠냐고요? 신을 믿는 자들이 신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종족은 괜찮습니다. 엘프나 드워프는 믿는 신이 없고, 늑대인간들은 자신을 믿지요. 신앙을 인간들이 만들어 신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신앙을 받아 힘을 생사합니다. 또한 신앙으로 인해 물질계에 그 힘을 역사하여 세계를 유지시킵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눈부신 발전으로 신의 존재가 여흥거리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신앙을 받지 못하게 되어 신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이 세계는 조율할 존재가 없이 파멸로 향하는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겁니다!”
“파, 파멸?”
나미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의 신 때문에 이 세계의 파멸을 운운할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브란디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신계의 좌석이 미어터지는 것과 발전 속도의 가속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설명해 드리지요. 조금 전에 저는 신들의 수가 짝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짝수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지요.”
“그걸 지금 빨리 설명해달라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짝수,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짝수는 경쟁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쟁의 궁극적 목표는 상대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며, 이는 곧 발전입니다. 이기기 위해선 뛰어나야 할 테니까요. 짝수가 되면 이분법이 통하고 흑백논리가 적용됩니다. 중용은 홀수에서 시작합니다. 짝수는 나누어질 뿐입니다. 여분이 없지요.”
갑자기 수비학을 이야기하는 에릭에게 나미아는 울컥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말에 신들의 숫자를 대입해본 뒤, 에릭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분별한 진보와 발전.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
짝수가 되어버린 신의 좌석.
“조율할 존재가 없군요?!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이고, 신들은 세계를 점진적으로 좋게 발전시키기 위해 중간에서 조율하는 중립신을 두었지요. 그가 바로 헤르키엘, 과거에 유일 중립이었던 신이었고요. 전제가 홀수로 되면 둘로 나눠도 하나가 남지요. 그 하나가 조율을 해서 과도한 치우침이 없게끔 만들었던 거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안스란이 중립신이 되었다지만, 중재자가 둘이 되면 대립이 생깁니다. 중간에서 조율하는 존재는 하나여야만 합니다. 그 하나가 설령 미덥잖더라도 하나의 결정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의 수가 대립하는 수가 되어버렸으니 무분별하게 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진보와 발전의 양상을 보이지 다행이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지난 436년간 파멸로 치우쳐왔다면 지금 이 세계의 꼴은 어떻겠습니까?”
436년에 걸친 파멸을 향한 행진을 생각하던 다른 세 사람을 어깨를 부르르 떨어야 했다. 무엇이든 간에 쌓아올리기는 어렵지만 무너뜨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436년이라면 물질계의 모든 인간이 사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기간이다.
에릭은 계속해서 말했다.
“신들은 세계의 주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멸망을 방조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인간이 신을 경배하지 않아 신이 지닌 가치를 말살해버릴 경우에는 이 세계가 무너집니다. 신이 왜 인간을 돌보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들 없이도 자기들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실천하길 바랍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신 보다 위대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발전은 그 길을 멀게 만듭니다. 따라서 신들은 예전처럼 느리더라도 확실한 걸음을 딛기로 한 것입니다.”
에릭은 말을 끝내며 한숨을 토했다. 오랫동안 메신저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피곤했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했던 일 중에는 우주 자체의 존망이 걸린 적이 없으니까. 에릭은 힘겹게, 자신이 처음 꺼내놓았던 말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아, 안스란……을?”
나미아가 더듬거리며 묻는 말에 에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나 상관없습니다. 대립수가 아닌 중립수가 존재하도록 그 균형을 잡기만 하면 됩니다. 성족들은 이미 열다섯 신과 이야기해서 희생이 될 하나의 신을 골랐습니다. 저는 그에 누군지 모릅니다. 정의의 관조자인 사리디마스나 대지모신 마아, 혹은 죽음과 공포의 데소러나 그의 상위신 다키힐데라든지 욕망의 신 라기, 시기의 신 기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헤르키엘은 아니겠지요. 그의 조율능력은 신계 제일이니까요. 어쨌든 일곱-하나-일곱의 균형을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르마를 모아…… 카르마 스톤으로 신을 죽여야 하는 건가요?”
오디가 새하얗게 질려 꺼내놓은 말에 에릭은 피곤해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쟁을 해야 하는군요.”
브란디에고의 말에 에릭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희밖에 없다는 말이군요.”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는 황망한 표정이 되어서는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과 날아다니는 새들. 지금 한 이야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상관있는 모습.
그녀의 입꼬리가 샐쭉 올라갔다.
“크히히히…! 꺄하하하핫!”
나미아는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고, 오디와 브란디에고는 기겁했다.
“나, 나이마 님?”
“오너?!”
이야기의 무게에 눌려 그녀의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싶은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에릭 역시 깜짝 놀라서는 나미아를 보았으며, 그녀는 배를 잡고 눈물이 맺히도록 웃어댈 뿐이엇다.
“꺄하하하!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
“나미아 님? 괜찮으세요?”
“오너! 진정하세요!”
“나-아! 괜찮아! 꺄하하핫, 나 괜찮다고오! 으하, 으하하하하핫!”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었다. 나미아는 계속해서 웃어대었다.
당황하던 세 사람은 나미아가 웃음에 섞어 내지르는 말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머, 멋져! 파하하핫! 당시, 당신들 정말 멋져! 까르르륵! 이제, 이제와서 부랴부랴 실수를 수습해? 꺄하하하핫! 스, 스스호의 손으로는… 아하하하하! 해결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 아웃사이더에게 이런 일을, 푸하하핫! 이거 절망 개그야! 너무 웃기잖아! 꺄하하하하!”
에릭은 고개를 푹 숙였고, 오디와 브란디에고는 당황한 시전을 교환했다. 저 폭소는 미웃음인 걸까?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나 시원한 웃음이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도 잘 이해해서 나오는 화통한 폭소였다.
“아하하… 아, 배 아파. 다른 족속도 아니고 신들이… 푸흐흡! 전쟁? 좋아. 해주지. 살신? 그것도 좋아. 해주겠어. 세상을 구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 이번 고객은 신이고. 아아, 여기까지는 생각 못했어……. 세상에, 곤란해하는 열다섯의 신이 내 손님이 될 줄은 몰랐다고. 너무 상쾌할 정도로 유쾌하잖아?”
당황해하던 세 사람은 그제야 나미아의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여관을 만든 목적도 다른 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해결해주기 위함이다. 그 목적에 딱 걸맞은 손님이, 여관을 만들게끔 한 신들이라는 사실은 정말이니 희극적인 아이러니다.
에릭은 일단 나미아가 승낙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러나 나미아의 즐거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에릭에게 말했다.
“그래서, 의뢰비용은 뭐로 해주실 건가요?”
“예?”
“저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거 아니에요. 손님이잖아요? 대가를 지물해야지요?”
“어어… 저기…….”
“그렇죠? 네?”
신에게 당당히 보수를 요구하는 여자.
그 이름하야 나미아 이켈라인이었다.
“좋았어. 이번 일은 아주 대박이군.”
보수 협상을 위해 에릭이 자리를 떠난 사이, 나미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오디는 곤란한 표정으로 나미아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나미아 님…….”
“응? 왜?”
아무리 그래도 신들에게 보수를 요구하는 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해요.“
“흥! 칫! 뭐가 어때서? 그 녀석들 생각대로 무리한 카르마 만들어내느라 너나 나나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잖아?”
“오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목적이 붙었딘 했지만, 나미아는 기본적으로 이번 일을 의뢰로 처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받아들인 이상 오디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전 대륙적인 정쟁을 일으킬 방법과 신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미아를 도울 준비부터 시작했다.
“저, 오너.”
“응? 왜에?”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습니까?”
브란디에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최종 상대가 신이다. 신을 죽여야 하는 일에 위험성이 없다면 세상에 거짓말이 하나 늘어나는 셈이다.
나미아는 눈꼬리를 추윽 늘어뜨리며 말했다.
“물론 죽을 수도 있겠지.”
“그, 그런데 왜 그렇게 흔쾌히…….”
“내 손으로 죽일 것도 아닐 거 아냐? 어차피 나는 화살통에 화살 채워주는 역할이라고. 신을 죽이는 거야 걔네 목적이지 내 목적은 아니잖아? 물론 그 죽임을 당하는 신이 미리 알고 날 죽인다는 상황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
나미아는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브란디에고는 그래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것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물어야만 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말했잖아.”
“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요. 저는 절대 오너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의뢰를 받아들였다는 걸 믿을 수 없습니다. 저도 이 일에 말려든 이상은 꼭 들어야겠습니다.”
“하아…… 하여튼, 다 큰 놈이 호기심 하고는…….”
놀리는 말에도 브란디에고는 발끈하지 않았다. 말꼬리를 잡을 계기를 제공해서도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이미 몸에 익히고 있었다.
나미아는 저렇게 우직하게 밀고 나오는 상대일수록 둘러대기가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비의 죄는 자식에게 대물림되지.”
“…예?”
“여신 안스란 말이야, 그거 우리 아빠가 만들었어.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빠가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안스란 언니가 열쇠로 낙점된 것이지. 안스란 언니의 승천 사건이 일어난 본질을 보자면, ‘영의 낙원에서 실종된 영석’이 지상에 구현하면서 수많은 죽은 자의 카르마를 가지고 산 자의 카르마를 죽은 자의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여기까지는 알겠지?”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전의 중심에 유명한 혈족이 있었기에 잘 알려진 사건이었다. 나미아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계속 말했다.
“그런데 영석이 왜 실종되었는지 알아?”
“예? 그건… 성족이 실험을 하다….”
“아니야. 무엇보다도 영혼의 근간을 이루는 영석을 어떻게 뽑아올 수 있다는 건게? 그 영석은 단지 자리가 없어서 뒹굴던 것뿐이야. 나와 오디 때문에 남아버리는 카르마처럼.”
“…예?
나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의 본질을 파고들자면 중요한 비밀마저도 밝혀야 한다. 나미나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사과한 다름에 입을 열었따.
“우리 아빠는, 이 세계의 영혼이 아니야. 다른 차원의 인간이었어. 말하자면 차원을 넘어서 환생한 거야. 그 이유를 말하자면 복잡해지니 일단 넘어가고, 어쨌든 아빠가 여기 아이리펜에서 태어남으로 해서 영혼을 이루지 못한 영석이 남아버렸어. 어차피 영의 낙원은 시간개념과 상관이 없으니 영석 사건이 수만 년 전의 것이라도 상관없겠지.”
브란디에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 유명한 레드 드래곤 라이니시스가 사실은 인간이었다는 소린가? 아니, 다른 차원의 인간의 환생이라는 소린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 너무나 담백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미아는 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자아, 이쯤에서 정리. 아빠다 이곳에서 환생하게 됨으로써 영석의 잔여량이 생겼고, 그 잔여량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던 성족과 사족의 실수로 인해 그것이 세상에 유출되었어. 복잡한 중간과정 배제하고, 그 결과 여신 안스란이 태어났지. 여신 안스란이 생긴 덕분에 세상이 말할 위기에 이르렀고, 그걸 막기 위해선 신 중에서 하나를 없애야만 해. 거기서 나는 아빠가 원인이 되었던 일이기에 내 선에서 마무리를 짓겠다는 소리야.”
“그, 그런……! 그건 라이니시스 씨의 일이잖습니까? 그런데 왜 오너가 해결한단 말씀이십니까?”
“에릭이 왜 나한테 왔다고 생각해? 여태까지 내가 성족들의 착실한 하녀 노릇을 했기 때문일까?”
브란디에고는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많은 일을 해왔다고는 해도 이런 일에서까지 무작정 인재를 기용할 성족이 아니었다.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마음대로 판단하는 거야! 아빠 때문에 생긴 일, 딸이 매듭짓는 게 뭐가 나빠?”
“그렇지만… 부당합니다! 이런 일이라면 라이니시스 씨와 상의해서……?!”
브란디에고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헛바람을 삼켜야 했다. 나미아가 불타는 눈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브란디에고와 시선을 맞춘 채 힘주어 말했다.
“닥쳐. 아빠에게 입도 뻥긋하지 마. 그랬다간 신을 죽이기 전에 너부터 죽일 거니까. 아빠에게 괜한 걱정 끼치는 사람은 그 누구라고 용서 못해. 나 자신일지라도!”
“오, 오너가 절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연히. 진심이야.”
브란디에고는 나미아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미아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대체 뭐가 웃기다는 거지?
브란디에고는 멱살이 잡힌 채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라이니시스 씨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다는 생각이 우선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은…… 진심으로 절 죽일 수 없습니다.”
“……이래서 빨리 배우는 종족이 싫다니까.”
나미아는 그를 내던지듯 멱살을 놓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브란디에고는 그녀의 귀가 새빨개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나미아의 옆에서 입을 가리며 작게 웃는 오디의 모습도. 그는 말했다.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저도 돕겠습니다.”
“뭐?”
“전쟁이든 살신이든 돕겠습니다. 에릭이 저도 이야기에 포함시킨 이유는 제 힘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단지 그 이유 뿐이야?”
나미아는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브란디에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슬픕을 대신해 눈물 흘려줄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야 나도 잘 알아.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을 돕고 싶은 망마음은 누구든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너.”
나미아는 곳방귀를 뀌었다.
“흥! 나 사랑해? 가서 줄 서.”
“예, 그러죠. 몇 번째면 될까요?”
이렇게 되자 되레 당황하는 사람은 나미아였다.
“무, 으… 너?! 진심이야?”
“경쟁자가 많다고 시간이 충분히 해결할… 응?”
브란디에고는 갑자기 희고 가는 손가락이 튀어나와 자신의 코를 가리키는 모습에 의아해했다.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당황해하는 나미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넌 누구야?! 내가 아는 디에고가 아냐! 정체를 밝혀아!”
“제 이름은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 골드 드래곤의 신예입니다.”
브란디에고의 부드러운 자기소개에 나미아는 더욱 당황했다. 그녀는 거의 착란증세로 보일 지경으로 당황했다.
“그랬군! 그럴 수밖에 없어! 넌 그러니까… 그으…! 해고얏!”
“네엣?!”
“사, 사내 연애는 그, 금지되어 있…!”
“금지되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런 규정도 없잖아요.”
오디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나미아의 폭주와 헛소리를 동시에 중단시켰다. 오늘도 나미아에게 반해버린 불쌍한 중생이 나왔다는 사실에 개탄스러워하면서도, 그녀는 일단 여관 직원 디에고가 아닌 골드 드래곤 브란디에고에게 묻기로 했다.
“브란디에고 씨. 당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참견하고 싶지 않지만, 제발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조언부터 드리겠습니다.”
브란디에고는 어색하게 웃었고, 나미아는 발끈했다.
“그게 무슨 의미야?!”
“그리고 나미아 님은 브란디에고 씨를 해고하기에 앞서 아직 빚이 남갔다는 사실부터 상기해주세요. 대체 브란디에고 씨가 왜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으으…! 그, 그건…….”
“게다가 그렇게 당황하시는 것도 나미아 님 답지 않아요. 청혼도 아니고 직접적인 구애도 아닌 은근한 고백에 그렇게 당황하시는 건 좀 이상해요. 지난 몇 백년간 이런 상황은 셀 수도 없었잖아요?”
오디는 물끄러미 나미아를 바라보았고, 나미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오디는 더 파고들었다가는 정말 화낼지도 모르기에 일단 지금 상황부터 수습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해야 할 일부터 생각해요. 구애든 해고든 끝난 다음에나 생각해 보자고요. 아시겠어요, 두 분 다?”
“알았어, 칫!”
“예, 알겠습니다.”
오디는 촌극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사태를 훌륭하게 수습했다. 일단 진정이 된 것 같자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논의를 하는 것으로 다른 일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계획을 짜보도록 해요.”
“계획?”
“네. 전쟁계획이요. 10월부터 시작해야 하지요? 지금이 4월이니까 시간은 촉박해요. 뒷공작이나 물밑작업만 해도 시간이 걸려요. 뭐니 해서 전 대륙을 상대로 해야 하니까요. 6개월은 좀 빠듯하네요.”
오디의 말에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개념이 조금 부족한 브란디에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오디는 그에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건을 조장해 군대뿐만 아니라 전 대륙의 사람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해요. 직간접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요. 짧으면 짧을수록 번민하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 지금부터 당장 해야겠지요. 편리하게 뒷수습할 수 있는 방안도 포함해서요.”
오디가 방향성을 제시한 덕분에 나미아는 평소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생긋 웃었다.
“흐음, 그건 그러네. 옛날에는 본의 아닉 대륙을 뒤집었는데, 지금은 완전 계획적이잖아? 좋아, 전쟁이든 뭐든 해보자고.”
나미아는 오른손을 꽈악 쥐며 소리쳤다.
“환상여관 WISH의 이름을 걸고! 생애 최대의 일을 해보자고!”
그들의 결절리 추후 대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지금 이 시점에선 신들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Guest.Supplementary story: 그들의 결정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