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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07 Postscript: 파멸. (39/49)
  • Guest.07 Postscript: 파멸.

    From guest diary of Namia. Page 29.

    이것저것 짜 맞추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폼 잡기 좋아하는 궤변론자를 가장한 멍청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파괴의 행위는 새로운 탄생을 약속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뭐, 그것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말하는 이들 중에서 파괴와 파멸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 뿐이다.

    파괴는 그 뒤에 뭔가를 다시 이룰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세계의 순환화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벌레들이 살고, 포자가 번식해 버섯군을 이루는 등 파괴는 다른 뭔가를 생성하는 역할로 이른바 순환 내지는 재생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파멸은 다르다. 파멸이라는 것은 그 재생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랄하고, 암울하고, 일어나선 안 될 것이다.

    가족의 파괴와 파멸은 그 의미가 확실하게 다르다. 가족의 파괴라는 것은 여러 의미로 쓰일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가족 내의 분란으로 모두 갈라서게 되었다는 식의 의미로 사용된다. 가정 파괴라는 말 자체가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의 파멸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의뢰인, 죽여주는 손님이시자 여관의 새로운 신입생이고 부채 10만 펜의 압박에 시달리는 가여운 소녀-뭐, 굳이 전부 받아낼 생각은 없지만서도-인 티나세르 라르지엔이 당한 일이 바로 파멸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충동적인 일이라고 해도 살해당한 사람이 부활하려면 안스란 언니가 신성을 얻은 사기극-그건 정말로, 절대로 사기극이야!-과 비슷한 사건이 벌어져야 할 것이다. 신성력을 얻었든 어쨌든 세계는 돌아가고, 그녀의 부모는 죽어버렸다. 그녀가 소속되어있던 가족은 회생불가능의 타격을 입고 파멸해버렸다.

    파멸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시간의 법칙이 만들어지는 이 세계에서 파멸이라는 행위는 끝이 끝으로서 남아버리는 일이다. 파멸 이후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무언가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쓰러진 나무에서는 버섯이 자라지만 나무가 뽑힌 자리에서 뭔가가 생겨나길 기대하는 건 많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다시 우리 의뢰인의 상황으로 되돌아와서, 티나세르의 가족이었던 부모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파멸이 찾아왔다. 가족은 다시 만들어질 수 없으며,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파멸의 자리 위에 다른 뭔가를 올려두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일반적인 복수심리가 작용하여 자신을 파멸시킨 상대에게도 똑같은 파멸을 안겨주겠다는 식의 행동으로 나온 것이다. 그래서 티나는 날 죽이려고 한 것이다. 개인의 파멸은 곧 개인의 죽음이니까.

    여기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파멸은 단독활동이 아는 연쇄활동임이 드러나게 된다. 파멸은 파멸을 낳고, 또 다른 파멸을 창조하며, 파멸을 조장한다. 티나의 가족이 파멸한 것으로 티나는 나의 파멸을 바라게 되었고, 그것이 자칫 유효하게 적용되었더라면 역시 많은 파멸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그나마 내 차례에서 멈춘 게 다행이지.

    이번 일의 근원이었던 모사르는 정작 남에게 파멸만 주고서 스스로는 파멸하지 않은 비겁한 경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고아들을 볼보면서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파멸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받은 인과는 범죄자라는 낙인과 그의 인간성 및 도덕성의 파괴였다. 파괴된 인간성과 도덕성은 새로이 재생되고 있었고, 범죄자의 낙인이야 내가 티나의 뜻에 따라 없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렸으니 정작 그는 마땅한 벌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파멸의 대가로 파괴를, 그것도 수복 가능한 정도의 파괴를 받은 그에게 티나가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나는 티나와 모사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티나는 연쇄되는 파멸을 자신 앞에서 멈추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상황에서 모사르를 죽였더라면 그것은 모사르의 파멸임과 동시에 많은 고아들에게 파괴 혹은 파멸행위로 닥치게 된다. 고아들에게 원한을 사게 될 것은 분명하며, 고아들 중 적극적인 복수활동을 꿈꾸는 아이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티나의 결단은 그녀 개인에게는 상당히 쓰라리고 가슴 아픈 것이겠지만 끔찍하게 되풀이 될 수 있는 파멸행위를 멈추었다는 점에서는 박수로서 칭송하고 싶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하여 파멸을 멈추게 했다.

    한 번 시작된 파멸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그 파멸의 기세를 몰아 다른 이들도 함께 끌고 들어가기 마련이다. 파괴는 재생의 희망을 남겨두지만 그럴 가능성조차 앗아가는 파멸은 완벽한 절망의 상태로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는 사회와 세계를 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성공이냐 실패냐 왈가왈부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복수였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의 복수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차적으로 나에게 원한을 품은 채 왔고, 그것을 해소한 뒤에도 나는 모든 일의 선택권을 그녀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성패가 결정되는 일이다.

    조심스럽게 예측을 해보자면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중간하게 종료한 일이라는 거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결말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번 일은 내가 움직인 부분이 너무 적고, 내가 참견할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파멸을 딛고서 다시 일어나기로 결심한 검은 머리의 소녀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는 잘 지켜봐야겠다. 게다가 놀려먹는 재미도 있으니 심심하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 같군.

    그냥 군식구 한명 늘어났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일은.

    Postscript: 파멸. - 종료.

    P.S: 캬아아악! 적자! 적자! 가계부가 새빨갛잖아앗-!

    [ 환상여관「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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