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4: 끝맺음 없는 유보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17일.
콰앙!
서류를 읽다가 내팽개치고 테이블을 내려치는 액션은 이미 유명한 행동패턴이다. 일반적이면서도 단순명료한 뜻이 담겨진 행동인지라 나미아와 오디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할 말은 이미 뻔한 것이라 나미아는 티나세르의 말이 끝나는 즉시 대답할 수 있었다.
“이게 사실이예요?!” “응.”
숨고를 틈도 없이 대답이 나오면 대개의 사람들은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그 대개의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티나세르는 당황한 채 숨을 들이마셨다가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자자, 진정하고 물 한잔 마셔.”
“히끅! 콜록! 네, 히끅! 히끅!”
티나세르는 어제 이후로 태도가 상당히 공손해져 있었다. 나미아에게 일일이 반말하며 대들던 태도도 사라졌고, 조신한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나미아는 아마 그것이 티나세르의 원래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 딸꾹질하는 모습은 원래 모습과는 아무런 과련이 없지만.
오디는 조용히 물잔을 티나세르에게 건네주며 나미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숨 돌릴 틈 정도는 주셨어야죠.”
“이럴 줄 몰랐지.”
티나세르의 감정과 그녀들의 태도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 같았다. 나미아는 물을 마시며 숨을 참는 티나세르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며 희극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연극에서도 볼 수 없는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티나세르의 감정이 격정적이 된 원인을 제공한 서류는 4일 전에 나미아가 티나세르의 암살이 실패하면 읽으라고 한 그 서류였다. 그곳에는 이켈라인 상회의 정보부가 조사한 티나세르의 부모를 죽인 진범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모든 배경조사까지 끝마친 뒤였다.
티나세르의 양친을 살해한 진범은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의 중역이었던 ‘모사르 자비쿤’이라는 남성이었다. 이켈라인 상회에서 파견나온 파견직원이기도 한 그는 회사의 몰락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서는 집안에서 축출 당했고,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녀의 양친을 살해한 것이었다.
정보부의 조사에 따르면 모사르는 라르지엔 부부를 살해하고서 티나세르의 양부가 된 사람인 ‘마진 나르게‘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물론 그때 당시 마진은 라르지엔 부부의 살해범이 모사르인 것을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민델프 라르지엔의 사업이 실패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진은 모든 일의 배후에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 있다는 말을 모사르에게 했었다는 걸 정보부가 알아내었다.
정보부에서는 모사르가 살해용의자로 지목되고서 그의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참고인 조사의 기록을 얻어내었고, 그 중에서 마진과 모사르간에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기술한 조서 또한 얻을 수 있었다. 티나세르의 가출이 그들의 대화 직후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티나세르는 모든 일의 배후에 있다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인 나미아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그, 그때 분명 나미아 언니가 모든 일의 배후라고 했었는데….”
“너희 부모님의 죽음과 내가 관련이 없다고는 못하겠어. 신사이 왕국에서 에디킨츠 왕국을 상대로 벌였던 해적단 사기극을 밝혀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와 오디가 제일 많이 힘을 썼으니까. 다른 손님의 일 때문이었지만.”
“그, 그럼… 그때 마진 아저씨가 이야기 했던 아버지가 당했던 일이란 게… 무역로 봉쇄였던 거예요?”
“문맥상 그렇게 되겠지? 일단 나는 에디킨츠 국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무역로를 봉쇄한 거니까. 무역업자들이 큰 타격을 입겠지만 적국으로 간주된 국가를 상대로 수입이나 수출을 하긴 어렵잖아.”
나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을 위해서 했던 일이 결과적으로 이렇게 나와 버렸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워낙 일을 거대하게 벌려놔서 그런지 성족들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카르마가 발생되어 또 다른 손님은 만든 것 같았다. 아니면 지난번 일처럼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취지였던가.
티나세르는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나미아가 했던 일이 원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원수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지만 국가간의 일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티나세르는 그의 양친으로부터 사건의 상관관계를 알아내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지만 그녀의 판단력은 또래보다 뛰어난 편이었고, 이번 일에서 나미아의 일차적인 잘못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한 것뿐이었다.
“이 모사르라는 인간은… 어디에 있죠?”
“용의자로 지목되기 하루 전에, 신사이 왕국에서 벗어났어. 추적하는데 꽤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지. 포튼렌의 빈민가에 있다던데?”
“포튼렌…? 여기 렌디너스 왕국에요?”
“응. 공군사관학교가 있는 도시.”
나미아는 지금쯤 겨울방학을 맞이했을 한스 스미스를 떠올리며 살짝 미소 지었다. 티나세르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재까지 파악된 이상 여유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진짜 원수가 빠르면 하루거리에 있는 도시에 있다는 걸 알게 되니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당장 가요.”
“…지금?”
“지금 당장이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요! 자기만 실패한 것도 아닌 주제에 모든 책임을 부모님에게 몰아 살해한 그 개자식이 하루거리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나미아는 자신에게 칼을 빼들고 덤빌 때의 티나세르를 떠올렸다.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대상을 향해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췄다가는 이곳에 올 때처럼 자기 발로 찾아가고 말 것 같았다. 나미아는 만류할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고서 오디에게 말했다.
“오디. 그랜드 크로스는 어디에 있어?”
“현재 데린너스 정류장의 이켈라인 상회 전용 격납고에 있습니다.”
“당장 이리로 오라고 전해. 목적지는 포튼렌.”
“예. 알겠습니다.”
오디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물러났고, 나미아는 조용히 분노를 삭이는 티나세르를 보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초고속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네….”
티나세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조금이라는 시간마저도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면서 티나세르는 조용히 복수의 칼날을 세울 준비를 했다.
초고속으로 오기 했지만 포튼렌은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통행인도 적어지는 저녁 무렵이었고, 늦게나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종종걸음으로 바뀔 시간이었다. 기숙사로 향하는 마지막 마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가는 사관학교의 생도들의 발걸음이 우르르 지나치는 대로의 가로든 아래에는 거적이라고 부르기에도 송구스러운 넝마를 걸친 걸인이 이가 빠진 사발을 앞에 두고 통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스튜라도…. 나으리 제발 한 푼만…. 아가씨 좀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수척하고 지저분한 걸인의 모습과 애절한 말은 약간의 성과만을 거둘 뿐이었다. 연신 절을 하는 그의 앞에 놓인 그릇에는 동화가 반 정도 담겨져 있었다. 다 세어봤자 10길을 넘기기 힘든 양이었다. 간혹 가다 떨어지는 동전들도 전부 닐화 뿐이었다.
누구라도 눈살을 찌푸릴 그의 앞으로 역시나 누구라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인물들이 다가가고 있었다. 거리의 부랑배, 그것도 걸인들을 상대로 등쳐먹는 하류 쓰레기 부랑배였다.
“헤헷. 이봐, 아저씨. 많이 버셨나?”
“아, 아이고. 제, 제발 살려줍쇼. 이게 오늘 번 전부입니다. 이걸론 애들 저녁도 먹이기가….”
“우리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하하, 이거 오늘 저녁은 따뜻하게 먹겠는 걸?”
세 명의 부랑배는 서로를 바라보며 히죽 웃고서는 그릇을 들어 그들의 손 위로 동전을 좌르륵 부었다. 걸인의 눈이 커지면서 다급하게 그릇을 든 부랑배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이고, 나으리! 안 됩니다! 제발 자비를…, 커억!”
“이 거지새끼가! 어디다 지저분한 손을 대는 거야?!”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나? 쓰레기랑 뒹굴다보니 쓰레기답게 행동하고 있네?”
“쿨럭! 제, 제발…! 아이들이 벌써 사흘째 굶고 있… 커헉!”
발에 채인 걸인이 다시 발길질에 나뒹구는 모습은 종종걸음을 걷던 행인들의 걸음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다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그들을 흘깃 보고는 황망히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걸인은 배를 움켜잡고는 연신 마른기침을 해대었고, 세 명의 부랑배는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다. 동전을 모두 거둔 부랑배는 걸인의 등 위로 사발을 던지고는 말했다.
“헤헷. 오늘은 꽤 괜찮았어. 이대로만 벌라고.”
탱그랑. 데구르르….
사발은 간신히 깨지지 않고서 포석이 깔린 거리 위를 굴러갔다. 걸인은 이제 거의 흐느끼면서 말했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으리들…. 조금만, 조금이라도 자비를….”
“무슨 놈의 자비가 그리 그리워? 신전이라도 가보지? 하핫!”
“시끄럽게 중얼대지 말로 닥쳐!”
퍼억!
“아이고!”
걸인이 호되게 발길질을 당해서는 나가 떨어졌다. 세 명의 부랑배들은 거리의 구석에서 끙끙대는 걸인을 보며 히죽히죽 웃은 뒤에 동전의 넉넉함에 만족하고는 다음 희생양을 찾기 위해 시시덕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그들의 앞에 여태껏 본적도 없는 빼어난 미모의 아가씨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우와….”
“세상에….”
“죽이는 걸?”
나미아는 눈살을 가득 찌푸리면서 걸인과 부랑배들을 번갈아보았다. 이곳에 아마 한스가 있었더라면 온 힘을 다해 부랑배를 계도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가 없으니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도 같았다. 나미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서는 쏘아 붙이듯 말했다.
“많이 버셨나?”
“이야! 목소리! 정말 끝내준다!”
“세상에, 아가씨! 어디 살아? 여태까지 본적 없어!”
“가슴에 불이 화악 지펴지는 기분이구만. 이야….”
마지막 부랑배는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나미아를 훑어보았다. 나미아는 이미 수없이 겪은 지저분한 시선이라 아랑곳하지 않고서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걸었다. 쓰레기 같은 인종을 앞에 둔 그녀의입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쓰레기통이나 뒤질 들개새끼 세 마리가 왜 두발로 걷고 있는 거지? 마치 사람 같잖아? 하는 짓은 쓰레기만도 못한데.”
“뭐라고?”
“우리보고 하는 소리야?”
“이봐 아가씨, 주변에 호위라도 있을 때 그런 말을 하시지?”
나미아는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저들은 아마 지나가던 귀한 집 따님이 불의의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자존심을 무기삼아 덤벼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개 그런 아가씨들은 실컷 위기상황에 처한 뒤에 ‘내, 내가 누군지나 알아?!’등의 소리를 지르기 마련이다. 사실,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왜냐면 소설에서는 구해줄 사람이 꼬박꼬박 등장하니까.
“호위? 내가 왜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쓰레기 상대하는데 남의 손을 빌릴 수야 있나.”
“계속 쓰레기라고 하네….”
“얼굴 좀 반반하다고 세상이 네 뜻대로 되는 줄 아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얼른 갈 길 가는 게 좋을 걸?"
나미아는 그들의 앞까지 도착했다. 세 명의 표정에서는 지금 그들의 일생에서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구라고 그 반대의 경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여긴 걸인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아가씨! 전 괜찮으니 어서 가십시오! 욕보입니다!”
“히야, 저 새끼가 그래도 옳은 말은 하네.”
“이봐, 아가씨. 우리가 막나가기 전에 얼른 아가씨답게 도망가셔. 응?”
“계속 그러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아? 응?”
나미아는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자신이 지금 외출복으로 입고 있고,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그런 복장이어서 위협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끊임없는 개김성을 유지하는 부랑배들에게 나눠둘 침착성이나 인내심은 없었다. 그녀는 앞의 세 명을 무시하고는 부랑배들에게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그 돈 돌려주고 개답게 쓰레기통이나 뒤지시지?”
“뭐라?”
“사람 말 못 들어? 짖어주리?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 어서 삥을 뜯고 지랄이야? 네녀석들보다 저 아저씨가 더 인간적이다. 후회할 시간도 없애버리기 전에 돈 돌려주고 가지? 개새끼들아.”
나미아의 어조는 조용했지만 어투는 신랄했다. 세 명의 부랑배와 걸인은 전부 멍한 채로 나미아를 바라보았고, 나미아는 허리에 손을 얹은 태세로 ‘어서 하지 못해?’라는 듯한 도도한 시선으로 부랑배들을 바라보았다. 부랑배들 중 제일 그녀와 가까이 있던 부랑배의 눈에 분노가 튀었다. 아무리 하류인생이라고 해도 모기 한 마리 잡지 못할 여자에게 폭언을 듣고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년이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휘익!
그의 손이 공중을 날았고, 다른 부랑배들은 울려 퍼질 두개의 소리, 뺨 맞는 소리와 가는 비명을 기대했다. 그러나 나미아의 얼굴이 사라지고서 허공을 향하는 손을 보았을 때 그들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서렸다. 그들의 밑에서 차가운 음성이 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병신들.”
나미아는 전심전력으로 그들을 자근자근 밟아주기로 했다. 겨울에 하는 보리밟기 같이.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10분간.
누가 들으면 거리에 이동식 푸줏간이 생겼다고 생각할 소리가 울려버렸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거리에서 도축도 하나?”
“으으으….”
“사, 살려주… 커억!”
“…….”
기절한 사내는 말이 없는 법이다. 깨어있는 두 사내는 무자비한 구타와 거침없는 폭행으로 서있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제일 처음 턱이 깨진 사내는 제일 편안한 축에 들 것이다. 나미아는 조금 전과 한 치도 다름없이 허리에 손을 올린 자세로 지저분한 무정물을 바라보는 것 같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안 내놔?”
“예, 예엣?”
“돈. 내가 두 번 설명해야 되니? 좀 더 맞아 볼까?”
다른 위협은 필요 없었다. 그저 오른 발을 반 발자국 내딛은 것만으로 부랑배들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들은 덜덜 떨면서 쓰러져있는 사내를 가리켰고, 나미아는 도저히 깨어날 생각이 없는 사내를 보며 코웃음 쳤다.
“흥! 내가 손을 대라는 거야? 이것들이 아직도 지랄이네?! 좋아. 한 번 더 놀아볼까?”
“아, 아닙니다! 내놓겠습니다!”
“다, 당장합죠!”
나미아의 싸늘한 시선 아래, 부랑배들이 열심히 쓰러진 동료의 품을 뒤져 다량의 동화를 꺼내놓았다. 그들은 벌벌 떨면서 두 손으로 나미아에게 그것을 내밀었고, 나미아는 뒹굴고 있는 사발을 조용히 가리켰다. 두 부랑배는 이번에는 되묻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하나라도 흘리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사발에 동전을 채운 그들은 그것을 나미아에게 내밀었다. 나미아는 황당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진짜 이 새끼들이! 나랑 장난해?! 내가 처음에 뭐라고 말했어?!”
“죄,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부랑배들은 얼른 동전이 든 사발을 걸인에게 내밀었다. 걸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고, 두 부랑배는 나미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 자리에서 얼른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것 같았다. 마치 똥마려운 강아지 같은 행색을 한 그들을 보면서 나미아는 조용히 손가락 세 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셋 센다. 늘어진 쓰레기 끌고 사라지지 않으면 1초마다 1분씩 팬다. 하나, 둘….”
“으와아악!”
“사, 사람살려엇!”
황급하게 도망치는 그들이었지만 나미아의 말 대로 착실하게 동료를 들춰 업고 가는 그들이었다. 어느 사이에 주변에 모인 행인들은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고, 나미아는 승리자의 미소로 비굴하기 짝이 없는 부랑배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걸인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걸어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몸은 괜찮으세요?”
“예에…. 익숙하니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런 미천한 놈에게….”
걸인은 나미아에게 접근하면 자신의 더러움이 옮을 거라는 태도로 그녀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나미아는 고개를 젓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것보다도, 고아들을 돌보세요?”
“예에. 그렇지요.”
“몇 명이에요?”
“여, 열댓 정도 됩니다만… 그건 왜…?”
나미아는 손을 뻗어 두개의 금화를 사발에 떨구었다. 동화들 속에 있는 두개의 금화는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아 보였다. 걸인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을 쩌억 벌린 채 금화와 나미아를 번갈아 보았다.
“애들 따뜻한 거라도 먹이세요. 겨울에 맞으면 몸 상하니까 약도 챙겨 드시고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뭐… 곧 갚게 되겠죠.”
“예에?”
걸인은 고개를 꾸벅거리다가 들려온 나미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띄웠지만 이미 그녀는 등을 돌려 걸어가고 있었다. 걸인은 비록 등 뒤였지만 그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고서는 금화와 동화가 든 사발을 가슴에 품고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걸인-모사르 자비쿤의 지저분한 얼굴에는 밝은 미소로 채워져 있었다.
“이제 따라가 보는 거야.”
“저, 저게 정말 모사르인가요?”
“틀림없어. 그야.”
“왜, 왜 저런 모습을…!”
티나세르는 이를 부득 갈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전 재산을 날리고 집안에서 쫓겨난데다가 살인까지 저질렀다면 막바지 벼랑에 이른 사람임이 분명한데 그런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 사회의 제일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분명한데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밑바닥이 아니었다. 비참하고 비굴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도 좋을 거야. 따라가 봐야지.”
나미아는 마차의 벽을 두 번 두들겼고,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티나세르는 이를 악물면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비틀비틀 걸어가는 모사르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던 원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런 사람이 과연 그녀의 양친을 죽일 그런 사람인가? 티나세르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그의 행적을 지켜보기로 했다.
모사르는 먼저 푸줏간으로 들어갔다. 그를 내쫓으려는 주인에게 사정사정을 하며 금화를 보여준 그는 많은 양의 버려질 고기를 얻고 거스름돈을 받아내었다. 커다란 뼈다귀도 몇 개 얻은 그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과일가게에서는 오래된 과일들을 싼값으로 왕창 받아왔고, 빵집에서는 단단한 흑빵을 한 아름 샀다. 그의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큰 행복을 만났다는 듯한 즐거운 표정이었다. 자신에 대한 즐거움이 아닌, 남의 즐거움을 보게 되어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본 티나세르는 더욱 알 수가 없었다.
모사르의 발길이 향한 곳은 무너져가는 건물들과 폐가들이 반은 차지한 빈민가였다. 그런 폐가에서도 사람이 사는 듯 마차를 흘깃 내다보고 얼른 고개를 숨기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모사르는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과일 약관과 고기 조금, 빵 세 덩어리를 나눠주고는 다시 자신의 갈 길을 갔다. 티나세르는 그들의 옆으로 마차가 지나갈 때 희희낙락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언제 봐도 그렇지만, 저 친구 정말 착하단 말이야.”
“그러게. 저 사람 덕분에 그 애들이 지금껏 살아있는 것 아닌가.”
“우리도 살아있지. 간만에 진수성찬이군 이거, 어허헛!”
티나세르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착하다고? 누가?!’
“언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글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
티나세르의 의문에도 나미아는 표정을 굳힌 채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티나세르는 완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서는 저만치 걸어가는 모사르의 등을 계속 보았다.
모사르는 이윽고 어느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촛불이 간간히 안을 밝히는 그런 건물에서 왁자지껄 거리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모사르의 주위를 에워쌌고, 다들 그의 귀환을 반기는 모양인지 기뻐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모사르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거는 아이도 있었다.
‘대체 이건…? 뭐냔 말이야!’
티나세르는 머리가 복잡해서 시선을 보내는 걸 관두었다. 나미아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창문을 살짝 열고 근처의 아무나 불렀다. 그녀는 은화를 꺼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저기, 저곳은 누가 관리하지?”
“예. 그러니까… ‘데그‘라는 청년입니다. 두어 달 전에 여기에 거의 죽어가는 몰골로 와서는 아이들에게 보살핌을 받았는데… 언젠가 거꾸로 저 아이들을 돌보더군요.”
“고아들인가?”
“예예. 부모가 버리고 가거나, 사고로 생고아가 되어버린 애들입지요. 데그가 없었으면 전부 뿔뿔이 흩어져 굶어 죽었을겝니다. 데그가 간신히 품 팔고 구걸해서 먹여 살리고 있습죠.”
“착한 사람인가보지?”
“그렇구 말굽쇼. 무슨 사연으로 여기 흘러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성실하고 착한 청년입죠. 생각해 보십쇼. 피붙이도 아닌 아이들을 자기 몸 아끼지 않고 먹여 살리는 게 어디 보통 사람이 할 일입니까? 하늘도 무심하지 저럼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고생을 하는 지 원….”
“알았어. 가봐.”
나미아는 티나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 개인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듯 티나세르에겐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티나세르는 머리를 감싸 안은 채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1시간쯤 지났을 때, 마부석에 있던 오디가 쪽창을 열고 말했다.
“나미아 님. 슬슬 위험해질 시간입니다.”
“그래? 알겠어. 티나. 고개 들어봐.”
“예…?”
티나세르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앞으로 단검이 들이대어졌다. 나미아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티나세르의 눈을 보면서 뭔가를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꾸욱 억눌렀다. 여기서부터는 스스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었다. 생각할 재료는 충분히 던져주었고, 선택의 여지도 그녀의 마음에 있었다. 나미아는 말했다.
“해결하고 와.”
‘복수하고 와’라든가 ‘죽이고 와’라는 말이 아니었다. 해결하라는 말은 묘하게 티나세르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해결할 일이라는 것만 인지하고 있던 티나세르는 단검을 받아들었다. 어제의 기억 때문에 뼛속부터 소름이 치밀어 올라 단검을 놓고 싶었지만 그녀의 의사와는 반대로 손은 단검의 손잡이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해결…하고 올게요.”
티나세르는 조용히 말하고는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나미아는 서글픈 표정으로 티나세르의 작은 그림자가 노란 촛불로 밝혀진 허름한 건물로 향하는 걸 바라보았다. 오디가 조용히 말했다.
“나미아 님. 괜찮겠어요?”
“어떻게 하던… 그건 저 아이의 결정이야. 자신의 마음으로 정하지 않으면 언젠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할 거야. 우리 여관의 목적을 잊은 거야? 후회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어.”
“알아요. 하지만….”
“그래.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우리 할 일은 여기까지야.”
나미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걸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미아는 작게 읊조렸다.
“모든 것은 카르마가 흐르는 대로….”
그 말 그대로였다.
“오늘 이렇게 따스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신의 뜻이란다. 우리 모두 대지모신 마아 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자꾸나.”
“네! 데그 아저씨!”
모사르는 모락모락 김을 뿜는 스튜-자투리 고기들로 만들어 맛은 형편 없었지만-와 그 속에서 춤추듯 움찔거리는 흑빵을 보면서 이미 배부른 표정을 짓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기도를 드렸다.
“자애로우신 대지의 어머니여….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일용할 양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그 깊은 자애를 느끼는 우리 아이들에게 부디 따스한 손길이 닿으시길 바랍니다. 마아 사테 에스 팔로그(자애로운 여신 마아에 경배하며).”
“마아 사테 에스 팔로그.”
아이들은 마아의 기도문을 읊고는 스푼을 들어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는 따스한 음식에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보는 모사르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티나세르는 그 웃음을, 만족스러운 그 표정을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식당으로 걸어 들어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델프 라르지엔은 그런 은총을 입지 못했어. 그 부인도. 그 딸도.”
“…! 너, 너는…?!”
“누구세요?”
“누구지?”
“몰라. 아는 사람이야?”
티나세르는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모사르를 바라보았다. 모사르의 표정은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티나세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모사르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죽인 그 부부의 딸이라는 걸 알았다. 티나세르는 말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모사르 자비툰.”
“티, 티나세르 양…. 여긴 어떻게…?”
“내가 할 말이야. 너야말로 왜 여기 있지? 왜 살아있는거냐고!”
티나세르는 단검을 치켜 올려 그를 가리켰다. 아이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모사르와 티나세르를 번갈아보았다. 모사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 왔니?”
“그럼 뭐 하러 왔다고 생각해?”
티나세르는 싸늘하게 말했다. 단검이 촛불에 번뜩이면서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모사르는 입술을 깨물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아이들 중에서 성인에 가까운 아이들이 말했다.
“아저씨? 무슨 일이죠?”
“데그 아저씨? 예?”
“아니다. 그냥… 계속 식사하려므나. 티나세르 양. 나가서… 이야기를 할 수 없을까?”
“…흥.”
티나세르는 고래를 팩 돌리고서는 뒷문을 향해 걸었다. 모사르는 두려운 눈초리로 살펴보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자, 괜찮아. 다들 저녁 먹으렴. 스튜가 식겠다. 휘리넨? 아이들이 식사하게 돌보렴.”
“아저씨….”
모사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휘리넨이란 소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티나세르의 뒤를 쫓아 뒷문으로 걸어갔다. 티나세르는 뒤뜰의 가운데에 서서 조용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사르는 그녀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섰다. 티나세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 네가 보다시피.”
“하! 하! 웃기는 군. 남의 부모를 죽여서 고아로 만들고는 도망쳐서 고아들을 돌봐?! 하하핫! 이거 악마도 비웃을 일인데?”
청명한 달빛 아래에서 비웃음을 흘리는 티나세르의 얼굴을 본 모사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티나세르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을 고아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착한 아저씨 행세를 하면서 고아들을 돌본다니, 이런 웃기는 경우가 또 있을까?
“이 무슨 개 같은 경우야? 이딴 짓이나 하려고 우리 엄마와 아빠를 죽인 거야?! 대답을 해봐!”
“너에겐… 내가 뭐라고 할지 모르겠구나….”
“당연하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거야! 이제 와서 마음에 캥겨? 멀쩡한 아이 한 명 고아로 만들고 나니 고아에 대한 애정이 새록새록 피어난 거야?! 더러운 새끼…! 네가 감히 그럴 권리나 있다고 생각해?!”
“미,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됐어! 너 따위 녀석에게 사과 듣자고 온 건 아니니까. 복수? 좋지! 하지만 이를 어쩌나? 우리 부모님은 둘인데 넌 하나잖아? 숫자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티나세르는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그 소리에 모사르는 어깨를 움추렸다. 모사르는 떨리는 턱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제, 제발… 아이들은…!”
“우리 아빠와 엄마도 그렇게 말했겠지. 개자식. 아이들?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넌 그럴 권리도 없어.”
“너에게 한 일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저 아이들에겐 무슨 죄가 있다고….”
“나에겐 무슨 죄가 있는 거야! 말해봐! 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어렵더라도 같이 헤쳐 나갈 수 있는 가족이 있는 내가! 우리 부모님은?! 나에겐 무슨 죄가 있다고 우리 부모님이 죽어야 했던 거야! 말해봐! 말해보라니까!”
티나세르는 눈물을 흘리며 고함질렀다. 모사르는 부들부들 떨다가 덜석 무릎을 꿇었다. 그는 그 상태로 티나세르에게 엎드리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발… 일주일만… 일주일만 기다려줘!”
“뭐?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것이…!”
“제발! 일주일 뒤면… 일주일 뒤면 마아의 신전에서 이곳을 돌봐주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일주일 뒤면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고 네 손에 몇 번이고 죽어 줄테니… 제발!”
“무… 무슨… 너…!”
모사르의 어깨가 떨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아닌 아이들의 안위를 더욱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티나세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사르는 흐느끼면서 사정하기 시작했다.
“제발…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야. 갈데없는 아이들이야. 내가 돌보지 않으면 사흘도 지나기 전에 얼어 죽을 거야. 내 목숨과 바꿔 아이들만이라도 살 길을 마련해 줘! 제발! 제발! 크흐흑!”
“네,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미친놈이야. 내가 죽일 놈이야. 내가 어쩌자고 그 두 분을 죽였는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하, 하지만 알아.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건방지게 용서를 구하지는 않겠지만… 제발! 저 아이들만큼은! 일주일만 기다려주면 죽어줄게! 아니, 스스로 죽을게!”
티나세르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 수가 없었다. 사죄…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부탁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든 뭔가를 말하기 전에 휘리넨이라는 소녀가 뒷문에서 뛰쳐나와서는 모사르의 앞에 팔을 펼치고 섰다.
“제발! 데그 아저씨를 살려주세요! 부탁이에요!”
티나세르는 자신보다 한두 살 많아 보일 것 같은 휘리넨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뒷문에서 고아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모사르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아저씨를 죽이지 마!”
“데그 아저씨를 살려줘요!”
“죽이지 마요! 죽이지 마요!”
이구 동성으로 모사르를 감싸면서 소리 지르는 아이들은 하는 말을 달랐지만 모두 티나세르에게 간곡하게 사정하고 있었다. 티나세르는 고아원의 뒤뜰을 가득 메운 반 울음 섞인 소리에 귀를 막으며 소리 질렀다.
“그만!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아이들의 목소리가 그쳤다. 티나세르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아이들의 가운데 있는 모사르를 보며 울부짖었다.
“대체 뭐야…! 왜! 원한 때문에 사람도 죽이는 자식이…! 왜 이렇게…! 죄책감에 몸부림 쳤어야 했어! 끝까지 죽을 수도 없어서 두려움에 괴로워해야 한다고! 희망 따위를 품으며 사는 건 사치야! 네, 네가 지은 죄가… 이렇게…! 네가 나쁜 거야! 몸부림치면서, 벌레처럼 죽어야 한다고! 죽는 그날까지도 편안할 수 없이 공포에 쫓기면서! 죽어서도 영원한 지옥불 속에 한없이 태워지며! 그런데…!”
티나세르는 더 이상 설 힘도 없는 듯 옆에 서있는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양 팔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고, 그녀의 양 팔 사이로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사르는 일어나서 아이들 사이를 걸어갔다. 아이들은 그를 말렸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 안 돼요!”
“가면 죽어요!”
“아니다. 내가 말했지?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아저씨가 벌을 받아야 할 때구나….”
“아저씨!”
모사르는 아이들 사이를 걸어와 티나세르의 앞에 무릎을 뚫고 앉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에게 말했다.
“나를 죽이렴. 아이들에겐 손대지 말아줘. 저 아이들에겐 죄가 없어. 내가, 내가 죽겠어. 그러니 아이들은 살려줘.”
“크으윽… 더러워…! 착한, 착한체도 작작해…. 네 두 손엔 우리 부모님의 피가 묻어있다고! 피냄새가 나! 그런 주제에, 그런 주제에 숭고하게 죽겠다는 거야?! 버러지! 쓰레기! 이 살인자!”
“난… 난 이것 밖에는 할 수 없어. 저 아이들은 다 죽어가던 날 돌봐주었어. 죽을 생각이었던 날 살려줬어. 그 목숨 값을 갚는 방법은 저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일 외엔 없었어. 그러니 날 죽이고… 저 아이들은 살려줘.”
티나세르는 우르르 서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다들 모사르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모사르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고작 두어 달 남짓한 시간동안 얼마나 모사르가 아이들을 극진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그 모습을 보기 싫었다. 저 아이들은 모두 그녀의 거울 같았다.
나미아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짧은 시간, 한없는 절망을 느꼈다. 저 아이들 역시 그럴 것이다. 수많은 티나세르가 나미아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한없는 절망의 시간이 그녀의 손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손에 들려있는 단검, 부모님이 선물로 주신 그 단검. 골목에서 차가운 시체로 발견된 두 분. 자신이 죽일 뻔 했던 나미아. 고아들을 돌보고 부모나 다름없는 모사르. 비극의 시작은 어디서부터?
“으아아아아아-!”
혼란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비명같이 밤하늘을 울렸다.
티나세르는 단검을 휘둘렀다.
붉은 피가 튀었다.
나미아는 마차의 문을 열고 티나세르를 맞이했다. 그녀는 티나세르의 단검에 맺힌 붉은 피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녀가 결정한 일이었다. 나미아는 마차의 문을 닫고는 단검을 움켜잡은 채 고개를 숙인 티나세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어깨를 움찔한 티나세르는 어깨를 떨었다. 단검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마차의 바닥에 배어들었다. 나미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니…?”
“……세요.”
“뭐라고?”
티나세르는 덜덜 떨며 숨을 들이마신 다음 다시 말했다.
“모사르 그 개자식에게 전해주세요.”
그녀의 손등이 크게 베여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아들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이 생각나겠지. 평생 내 모습을 떠올리고 괴로워하면서 고아들이 나처럼 되지 않게 보살펴. 평생. 평생. 내가 죄인에게 내리는 저주야.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걸.”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모사르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자신의 손등을 그은 티나세르를 떠올렸다. 그녀의 말 대로 평생 떠올릴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용서를 한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단지 그녀는 좀 더 많은 자신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오디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 거기엔 이켈라인 상회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꽤나 묵직한 금속의 소리가 났다. 모사르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이건…?”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지모신 마아의 신관과 연계하여 이 고아원에 사회환원을 실시한다. 이 이후, 조금이라도 태만하거나 회의스러운 태도가 보인다면 능지처참하리라.”
주머니 속에는 꽤 많은 양의 금화가 들어있었다. 고아원 건물을 새로 지을 수도 있는 그런 양이었다. 잘하면 이 주변의 사람들도 돌볼 수 있는 그런 금액이었다. 모사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떨리는 손을 들어 주머니를 들었다.
“이…, 이런…? 무, 무어라 감사해야할지….”
오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감사하지 말고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죄인으로서 평생에 걸친 형벌을 받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죄과를 치르기 위해 평생 동안 고아의 복지에 매달리십시오. 수많은 고아들의 부모가 되어 당신이 만든 단 하나의 고아를 두 번 다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보는 그 날은 당신이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끼고 태만함을 보일 때입니다. 당신이 제일 죽기 싫을 때, 제일 비굴하고 구차하게 죽여드릴 때가 나와 당신의 재회일이 될 것입니다.”
오디는 차갑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모사르는 자신에게 내려진 평생의 형벌을 달게 받아들였다. 그는 고아원 밖에서 마차가 떠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복수의 밤은 그렇게 끝맺음 없는 유보를 맞게 되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18일.
티나세르는 우울한 표정으로 토스트를 씹었다. 어젯밤의 일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심란하기만 했다. 그래도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의 티나세르가 나올 때, 그때가 복수의 때였다. 그때까지 모사르는 집행유예기간 평생의 형벌을 살 것이다.
자신의 왼쪽 손등에 남겨진 흉터는 그걸 잊지 않기 위함이다. 나미아는 온갖 성화를 부리면서 여자의 몸에 난 상처는 평생의 흠집이라고 강조했지만 그녀는 평생 갈 흉터를 남길 만큼의 치료만을 원했다.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티나?”
“우음…. 글쎄요. 모르겠어요. 양아버지도 걱정하실 것 같으니 슬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기도 해요. 아마 그쪽에선 절 잊었겠지만요.”
“편지 한 장도 남기지 않고 왔다며? 사실 그 집에서야 넌 짐덩어리겠지. 일단 보름동안 일하면서 생각해 봐.”
“예? 보름동안 일이요? 무슨 일이요?”
티나세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고, 나미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차 물었다.
“모르니?”
“예? 저기, 무슨 일을…?”
“잊어버린 거야? 너 나 죽이는데 12번… 아니지, 13번 실패했어. 한 번 실패에 하루 무임 노동, 10번 당 3일 추가. 총합 16일이네? 그 시간동안 너 여기서 공짜로 일해야 해.”
티나세르는 그제야 처음 나미아와 맺었던 약속에 대해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뜨악하면서 말했다.
“그, 그거 진심이셨어요?”
“얘는, 당연히 진심이지. 난 돈 들어가는 일에 거짓말 안 해.”
“마, 맙소사…. 미성년자를?”
“시 당국에서 클레임 걸까봐? 호오, 과연 그러나 보자. 시장이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간이 큰지 봐야겠군.”
티나세르는 눈앞의 여성이 황제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돈에는 무서우리만치 철저하다는 전설의 여인이었다. 티나세르는 그래봤자 고작 반 개월 밖에 되지 않으니 그냥 넘어가자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았어요. 일할게요.”
“그리고, 너 나한테 10만 펜 빚졌어.”
“예?! 시, 10만 펜이요?! 어째서요?!”
“모르고 있었구나. 우리 여관의 ‘특별손님’은 의뢰 해결 요금이 10만 펜이야. 흘러들어온 경로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너도 특별손님이라고. 일은 잘 해결 되었잖아? 그러니 10만 펜 내놓아야지.”
이야기를 끝마치고는 아작거리며 토스트를 씹는 나미아의 표정에서는 평소에 볼 수 있었던 장난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돈에 관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다운 모습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맞아. 너 디에고 알지? 우리 여관 신입.”
“아, 네. 그 사람이 왜요?”
“그 사람도 특별손님이었거든? 그런데 돈이 없어서 지금 여관에서 일하고 있어. 빚 다 갚을 때까지 최고 157년이던가? 무임 근속계약이야.”
말이 무임 근속이지 노예계약이나 다를 것 없었다. 157년이라는 자기 나이의 열배의 기간을 세던 티나세르는 그만 눈을 스륵 뒤집으면서 기절해버렸다. 나미아는 기겁하면서 그녀를 흔들었다.
“어머, 얘! 죽으면 안 돼! 10만 펜 채우고 죽어야지! 티나! 정신 차려! 앞으로 10만 펜은 벌어야 한다고!”
“…그런 말씀 하시니까 더 안 깨어나는 거 같은데요.”
오디는 토스트 위에 조린 사과를 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로서 여관 WISH에는 신입 한명이 추가되었다.
Guest.06: 죽여주는 손님 - 종료.
[ 환상여관「W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