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3: 의무라는 이름의 원동력 (37/49)

Part3: 의무라는 이름의 원동력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16일.

힐텐펜스에서 북서쪽으로 60마일을 올라가면 노송(老松)들이 흰 옷을 입고 있는 산이 있었다. 여러 봉우리와 많은 구릉, 계곡, 기암괴석을 가진 높은 산은 평야 위에 고고하게 서있어 더욱 크게 보인다. 모든 평야가 내려다보이고 세상을 발아래 둘 수 있는 곳. 그곳을 나미아는 자신이 죽을 장소로 정했다.

“죽을 생각은 없지만… 내 천명이 여기까지라면 받아 들여야지.”

“남길 말은?”

“없어. 사후 처리는 오디가 알아서 해 줄 거야. 장비 사용법은 다 익혔겠지?”

“그럭저럭.”

3일 동안 티나세르는 오디로부터 시료스와 마법 부츠의 사용법을 익혔다. 장거리 점프와 2단 점프를 가능하게 하고 신체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는 부츠의 이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시료스에 실어 형상화시키는 일에는 많은 노력일 기울여야 했다. 그 밖에도 약간의 마법 저항이 실린 반지와 신체 내구력을 높여주는 목걸이가 있었지만 특별히 신경 쓸 물건은 아니었다. 그녀가 중점으로 교육받은 것은 시료스의 조작이었다.

나미아는 단순한 편한 복장을 입은 상태였다. 가죽 갑옷에 가죽 바지를 입고서는 레이피어 한자루를 착용한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나미아는 본신의 능력 자체가 훌륭한 무기이기 때문에 별다른 무기가 필요 없었다.

나미아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내가 출발하고, 15분 뒤에 네가 쫓는다. 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어. 이 산의 영역 아래에 있을 테니 잘 찾아봐.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 6시간 반 정도 남았군.”

“좋아.”

“그럼 난 간다. 미리 봐둔 자리가 있거든.”

나미아는 살짝 손을 흔들었고, 그녀의 육체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티나세르의 앞에서 사라졌다. 티나세르는 왼손에 착용한 시료스와 다리를 감싼 부츠의 감촉이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여겼다. 오른손으로 왼손의 시료스를 살짝 매만진 그녀는 한두 호흡 정도 낮게 숨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속으로 열둘을 센 티나세르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바닥을 박찼다.

파악!

약간 무른 땅에 깊은 발자국이 나면서 그녀의 몸이 단번에 10야드 위로 치솟아 올랐다. 그녀다 노린 것은 그 높이에 있는 노송의 가지였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그녀의 발이 재차 목적했던 가지를 딛고 다시 공중으로 치솟았다.

평야 너머로 보이는 지평선에 작은 점이 보였다. 반짝거리는 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까마득히 먼 저곳이 아마도 힐텐펜스일 것이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백색의 땅을 보다가 티나세르는 고개를 돌려 아애를 살펴보았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미아를 더욱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거진 덤불 아래나 바위 밑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죽음을 피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좁고 어둡고 음침한, 죽음의 이름과 딱 좋은 곳에서 죽음을 회피하는 이율배반을 본능적 차원에서 저지르니까. 그러나 그녀는 일단 그럴 가능성을 배재했다. 자신이 생각할 때, 나미아는 당당하게 태양빛이 드는 산수가 화려한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지금의 날씨보다도 차가운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말도 안 돼는 생각이다.

‘죽음…? 웃기는 소리.’

나미아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하물며 죽인다고 해서 죽을 그런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지난 3일간 열심히 노력했지만, 실상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을 몸에 익히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손에는 칼을, 칼날은 상대의 몸속에. 급소면 더욱 좋다. 죽일 상대를 미리 정해두었다면 더욱 시간절약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잠시 생각할 여유를 위해 한 시간. 별다른 기술을 연습할 필요도 없이 한 시간이면 살해의 결심에서 실행완료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들여야 하는 노력과 성공 여부라는 건 있기 마련이다. 나미아를 그런 조건에서 살펴보자면 티나세르가 100년을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그런 경우였다. 하물며 고작 3일간 특별훈련을 한 것 가지고서 그녀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건 언감생심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불가능에 도전하면서까지 나미아를 죽이려 하는 것인가. 그것도 정말 필사적인 각오로 노력해서까지.

‘갈데없는 분노, 원한, 슬픔…. 손님이기에 받아주는 걸까.’

분출구를 찾지 못한 그녀의 감정에 스스로가 과녁이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티나세르는 이미 나미아가 그녀의 부모의 원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가 살해당하던 날, 그 때 나미아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소상하게 들었다. 나미아의 힘이라면 차도살인에서 증거인멸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나미아의 천진한 미소. 그녀와 티격태격하던 때를 생각했다. 단검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면서 셀 수 없이 쏘아본 그녀의 익살스런 미소.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여관 WISH에서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의 무의식은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개는 사람들의 자의식에서 무시되곤 하는 무의식은 직관력이 곁들여진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녀의 맹렬한 살의에 완전히 무시당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수많은 암살시도가 실패하고 단검술의 교육을 받으면서 그녀가 생각했던 것은 인정하기 싫은 감정이었다.

‘즐거웠어…. 그래, 정말로.’

나미아는 장난기가 많았고, 말에 가시가 돋쳐있었지만 꽤나 그녀를 신경 써서 돌봐주었다. 동생의 공부를 봐주는 언니와 같은 태도였고, 그녀도 역시 그런 태도에서 언니같은 느낌을 받았다. 억지로 부정하고 싶어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무의식이 가진 느낌이 그런 생각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난 단지… 분노의 배출구를 찾고 있었을지도….’

막연한 살의와 어설픈 확증으로 생긴 거대한 분노를 추기위한 배출구. 희생양. 뭐라고 정의해도 좋은 그런 대상이 필요했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을 위해 멀고 먼 길을 걸어 힐텐펜스까지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나미아는 그런 그녀의 분노를 거리낌 없이 받아주었다. 포용하면서, 받아넘기듯이.

파스슥!

가지에 얹힌 눈이 떨어지면서 그 사이로 티나세르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나미아의 모습을 찾고 있었지만 실상은 해가 질 때까지 찾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오갈 데 없는 분노는 허무와 함께 사라졌고, 결국 남은 것은 힘없는 마지막 시도뿐이었다. 마지막 한 번만,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의도 없고, 분노도 없고, 명분도 없다.

단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허무가 찾아와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그 끝을 내어야만 할 것 같았다. 목적조차 불분명한 막연한 그 어떤 것.

의무.

그것이 그녀가 가진 행동의 원동력이었다.

그녀는 다시 땅을 박찼다. 무수한 초록과 하양이 눈앞을 가로질렀다. 파란 하늘에서 노란 빛이 떨어져 회색의 바위를 비추고 갈색의 동토를 가로질렀다. 온갖 색채가 춤추며 흐르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그곳에서, 그녀는 너울거리는 빨강을 찾고 있었다.

어디에? 저 곳. 저기.

녹색과 하양과 회색과 갈색의 가운데.

그녀는 찾아내었다.

깎아지른 회색의 암벽 밑으로는 하얗게 얼어붙은 물이 멈춰있었다. 그 안에 움츠린 물고기들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무색의 물을 상상하며 나미아는 정면에서 불어 닥치는 바람에 너울거리를 붉은 머리를 그대로 둔 채 갈색의 땅 위에 서있는 녹색의 침엽수림 앞에 서있었다.

그녀가 해제한 봉인은 감각영역을 극소화시키는 것 하나 뿐이었다. 평소에 지니고 있을 오른손의 팔찌는 그녀의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그녀의 붉은 홍채는 지평선을 꿰뚫듯 앞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감촉과 귀로 들리는 소리, 생체적 감각이 아닌 육감으로 판단되는 모든 정보는 그녀의 생각의 재료들이 되고 있었다.

나미아가 티나세르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그리 훌륭한 암살자는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녀의 청력이 통상 수십 배로 증가되었다고는 해도 티나세르가 나뭇가지를 밟고, 땅을 박차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범인의 귀에도 충분히 들릴만한 그런 크기였다. 그녀가 박차고 오른 가지에서 떨어지는 눈 소리는 차라리 애교였다.

무기는 꺼내들지 않았다. 시료스가 전개되면서 울리는 미명의 금속음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런 전개로 기습을 가할 작정인 걸까. 하지만 저렇게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다가오는 건 그리 좋은 기습의 태도라고 할 수 없었다.

‘포기한 건 아니지만,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티나 다운 생각이야. 아니, 어린애다운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실패할 일에 무모하게 도전하지만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 저래선 요행도 얻을 수 없지.’

요행도 아무에게나 생기는 건 아니다. 계속 추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행운이 요행이다. 혹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내리는 하늘의 최상급 행운이다. 이미 포기한 사람에게는 세상도 등을 돌린다.

나미아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폭 1인치 반의 레이피어는 미동도 하지 않으며 다가오는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언제라도 즉각 들어 올릴 수 있지만 나미아는 티나세르의 심정을 알고 있기에 미리 방어 자세를 취하진 않았다. 자포자기한 만큼 거의 막무가내로 덤벼들 것이 뻔했다. 일부러 그 의욕을 꺾어둘 필요는 없었다.

기왕 받아주기로 한 것, 확실하게 후회 없이 받아줄 작정이었다. 어린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일 정도는 여섯 명의 동생이 있는 그녀에겐 쉬운 일이었다.

티나세르는 부모님이 죽어버린 슬픔과 어찌할 줄 모르는 그 참담한 심정으로 응석을 받아줄 사람에게 마음껏 그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모두 사라져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의 태도와 꼭 닮아있었다. 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자아, 어서와. 한 번, 신나게 놀아보자고. 지칠 때까지.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신나게 놀고, 놀고 또 놀아보자. 후회가 없도록, 미련 없이,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껏. 놀 수 있을 때 놀아야지?’

나미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 직후 미소를 지으며 몸을 휘릭 돌려 레이피어로 허공을 그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계곡을 울렸다.

카가강!

레이피어에 와 닿는 느낌이 먼저였고, 매우 가는 금속실에 매달린 날카로운 추 열두 개가 밀려나는 걸 본 것이 나중이었다. 보통의 무기였자면 그대로 밀려났겠지만 시료스는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열두 개의 추는 잠시 멈칫했을 뿐, 그녀의 양 옆 사선에서 그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휘익!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열두 개의 추는 허공을 휘젓다가 나미아가 있던 자리에서 작게 반전해 위로 솟구쳤다.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비튼 나미아는 추가 그녀의 몸에 닿기 전에 낙하각을 약간 바꿔 땅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내려선 곳 3야드 앞에는 왼손을 내밀고 있는 티나세르의 굳을 각오를 한 얼굴이 보였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그리고는 등 뒤에서, 몸 앞에서 날아오는 미스릴 와이어와 추를 피하기 위해 우측으로 내달렸다.

열두 개의 추는 위에서 내려찍듯 그녀에게 향했지만 나미아는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는 듯 복잡한 좌우 반전으로 그것들을 모두 피해내었다. 추에 박힌 땅이 팍팍 파이고, 바위가 깨어지는 살벌한 위력이었다.

그녀의 손은 놀고 있지만 많았다. 시료스가 와이어를 뻗는 속력은 감으로도 맞출 수 있는 그녀였기에 오른손과 왼손에 레이피어를 번갈아 들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추격해오는 보이지 않는 와이어들을 일일이 쳐내야 했다.

캉! 카가강! 카앙!

보통의 레이피어였다면 와이어에 잘려 동강나고 말았을 거다. 시료스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 나미아는 와이어에 걸린 힘이 대단하다는 걸 처음 일격부터 알고서는 긴장했다. 자포자기한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기는 꽤나 어려운 법이었다.

낮은 점프로 이리저리 날아오는 시료스를 피해가면서 가속 높이 솟구치기도 하였다.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점차점차 티나세르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의외로 그녀의 응용력은 좋았다. 티나세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의 앞길을 거미줄처럼 가로막고 그녀가 오지 못하게 했다.

“아아, 시료스. 너무 사람 차별하는데?”

나미아는 푸념 섞인 한숨을 내뱉고는 나무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지들이 떨리면서 눈드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어차피 시료스라고 해도 사용자의 시각에 의존하는 물건이었다. 나미아가 모습을 감추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티나세르는 그에 당황하지 않고 처음에 나미아가 서있던 장소로 갔다. 어차피 이곳으로 정한 이상 나미아는 멀리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낭랑한 목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왔다.

“매직 애로우!”

쉬시시싱!

여섯 말의 하얀 마법의 화살이 티나세르에게 향했다. 순순히 방어만 하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니 이런 정도의 공격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티나세르는 왼손의 손가락을 교묘하게 움직이면서 전방을 쓸어내듯 시료스를 휘둘렀다. 마법금속인 미스릴은 자체적인 마법 저항력으로 모든 마법의 화살을 꺼트렸다. 퍼버벅!

“차아앗!”

챵! 카강! 차장!

시료스가 훑고 지나간 전방으로 나미아가 레이피어를 들고 달려들었다. 어느새 죽이고 죽이는 입장이 바뀐 듯싶은 모습이었다. 티나세르는 오른 손에 든 단검을 움직이면서 왼손으로 시료스를 조종했지만 그 모습은 약간 어눌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오른손에 신경을 쓰는 사이 왼 손의 시료스는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해 공중에 떠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깨닫고는 시료스를 움직이자면 오른손의 단검으로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티나세르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양손을 모두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야압!”

오른손과 왼손이 앞으로 모이면서 레이피어를 쳐내었고, 그와 동시에 주변에 떠있던 시료스가 죄여오듯 모여들었다. 나미아는 칼몸으로 단검을 쳐내고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뒤로 떨어져 내렸다.

봉인구로도 어쩔 수 없는 그녀의 단단한 피부는 티나세르의 단검에 상하지 않겠지만 시료스에게는 반쯤 무력했다. 그 패턴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예기치 못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시료스의 일이었다. 그래서 나미아는 최대한 시료스를 경계했다.

티나세르는 나미아가 시료스를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료스의 놀라운 위력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나미아에게도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지금 눈치 챈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에게 순순히 그 일이 가능한 무기를 들려주다니, 나미아가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티나세르는 애초에 양손으로 싸우는 것이 자신의 수련으로는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아까의 격돌이 그걸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기로 작정하고서는 오른손에 든 단검을 공중으로 던졌다. 그녀의 앞에 모여 있던 미스릴 와이어들이 단검을 감싸면서 날을 보강하고, 그 뒤에 길게 꼬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왼손의 송등을 오른손으로 가리듯 덮으면서 검을 빗겨든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나미아를 응시했다.

그녀가 어느 정도 검을 수련했던 적이 있든가 무술을 수련했더라면 나미아의 방만한 자세 속 여러 빈틈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좀 더 많은 수련을 했더라면 그 빈틈이 모조리 함정임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무술도 배우지 않았던 그녀는 나미아의 모든 반경이 공격범위라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 한 곳을 골라 집중공격하는 대신 미스릴 와이어를 수백가닥으로 만들어 나미아의 전방위를 찔러 들어갔다.

샤사사사삭!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공기를 자르며 와이어들이 뻗어나갔다. 나미아는 정면과 좌우측에서 달려드는 와이어를 보며 초심자나 할 수 있는 이 패턴에 가볍게 미소지어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와이어의 속도가 빠르다고 할지라도 등 뒤를 점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차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초심자다운 모습이었다. 무조건 빠르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와이어가 한 곳을 찌르고, 다시 나미아를 추적했다. 금속의 몸을 가지고서 수백가닥으로 갈라지는 시료스는 이미 하나의 생물로 보는 편이 더 나았다. 나미아는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발을 내밀며 레이피어를 뻗어 와이어 가닥을 휘감았다.

차자작!

티나세르는 엉겁결이었지만 와이어를 감은 나미아의 레이피어를 포박했고, 그것은 유효한 판단으로 적용했다. 와이어들을 휘감아서 단번에 내칠 작정이었던 나미아는 와이어가 레이피어를 먹어버렸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침착함을 되찾고서 레이피어를 놓아버렸다.

“앗?”

격전의 순간이 오가는 싸움터에서 무기를 놓는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 티나세르는 레이피어를 붙들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나미아가 미스릴 와이어의 뭉치를 밟고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싸움에서 초심자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다. 당황은 모든 행동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당황은 어떤 행동이든 가능하게 해준다.

쉬익! 팍!

“하악?!”

“에…?”

티나세르의 옆에 떠있던 단검이 미스릴 와이어의 속으로 파고들어가 나미아의 등을 찔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나미아의 등이 비어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시료스에게로 전달되었다. 수동적인 무기와는 다르게 능동적이 자의식을 갖춘 병기인 시료스는 그 판단을 지금까지의 모든 공격방식이었던 기습에 적용시켜 순식간에 나미아의 등쪽으로 단검을 이동시켜 비어있는 등을 찌른 것이다.

푸우욱….

날은 깊숙히 나미아의 등을 파고 들어갔다. 시료스에서 그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져왔고, 티나세르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단검을 놓아버렸다. 나미아의 놀란 표정이 티나세르의 옆으로 지나쳤다. 그녀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지면서 티나세르의 등 뒤로 넘어갔다. 수백 야드의 깊이를 가진 계곡으로….

“하아아….”

나미아가 탄식하듯 내뱉는 한숨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나풀거리는 붉은 실타래 같은 머리가 얼굴을 스치면서 향긋한 내음이 콧속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사고가 정지해버린 티나세르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왼손 전체에서 느껴졌던 살을 가르며 날이 파고드는 느낌은 끔찍스러울 정도였다.

탱그랑!

시료스에 의해 날이 보강된 단검은 그녀가 그것을 놓기로 결정하자마자 물러나는 시료스와 함께 나미아의 등에서 뽑혔다. 나미아의 몸은 이미 계곡 아래로 추락했고, 단검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나고서야 티나세르는 퍼뜩 정신을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다. 엉겁결에,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초기의 자신이 가졌던 목적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시도로 생각했던 일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아…! 내, 내가…?!”

기쁘지 않았다. 복수의 달콤함이나 분노의 갈증이 해소되는 청량감 따위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경악으로 물든 표정과 덜덜 떨리는 아래턱. 그녀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려다본 오른쪽 아래엔 뿌려진 피와 그 위에 떨어진 단검이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붉은 피였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생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흔적이 흩뿌려져 있었다. 새빨간 피에서 그녀는 나미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떠올렸다. 피처럼, 불꽃처럼 붉은….

“아아악! 내, 난! 내가 바란 건…!”

목이 매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뭔가에 막힌 듯한 목에서는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게 아냐!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눈앞을 아련하게 가렸다. 자신이 원한 것이 이런 결과였던가?

이런 게 아냐!

눈에 맺힌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니셜이 새겨진 단검과 나미아의 붉은 피.

“이런게 아냐!”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숲 속으로 공허하게 파고드는 목소리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살해시도는 실패했어야 했다. 오갈 데 없는 살의를 받아주는 나미아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계속해서 매달리고, 계속해서 시도한 자신이 문제였다. 왜, 왜? 원래대로라면 자신은 실패했어야 했고, 나미아는 그 앞에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단검술을 가르칠 때처럼 자신을 놀렸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발끈하면서 받아치고….

나미아가 죽었다.

“이게 아니야!”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떨었다. 소리 없이 숨죽여 오열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와 버렸다.

물론, 나미아도 원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아야야…. 아빠한테 맞은 이후로 다친 적은 처음이야.”

“히익?!”

“응? 뭐야? 왜 사람을 죽은 사람 보듯이 보니?”

나미아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기겁해있는 티나세르를 보았다. 계곡을 날아올라올 때부터 뭔가 이상한 소리들이 들린다 싶었는데, 티나세르가 공황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같았다. 티나세르는 더듬거리면서 나미아를 가리켰다.

“어, 어떻게…?”

“응? 얘도 참. 내가 한번 찔렸다고 죽을 사람이니? 게다가 여긴 떨어져 죽으려고 해도 너무 낮아. 아무튼, 시도는 성공이었지만 결과는 실패였군. 해가 질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더 해보는 건…?”

“끄으윽! 으아아앙!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이러려고 이런 게 아닌데! 으아앙!”

티나세르는 나미아가 어찌 할 틈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어서는 품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완전히 안심하고서 목놓아 울고 있었다. 나미아는 당황하다가 부드럽게 티나세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어린애에게 너무 큰 충격이 아니었다 싶어 미안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흐윽! 나, 난…! 으흑! 으아아아…!”

나미아는 품속을 파고드는 티나세르를 부드럽게 안았다. 이러나저러나 응석부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쪽은 좀 더 귀여웠다는 점에서, 솔직히 받아줄만한 응석이었다.

‘휴우…. 이제야 좀 살겠구나.’

나미아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새로 생긴 동생 같은 티나세르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머니 같기도 하고 언니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티나세르 역시 어머니의 품에서 울고 있는 것 같은 안도를 느꼈고 그래서 더욱 크게 울 수 있었다.

안심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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