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복수심의 방향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7일.
지난 4일간 티나세르는 필살(必殺)의 각오로 노력했다.
복도에서 불의의 기습 - 실패.
취침 중 습격 - 실패.
음식에 독 타기 - 나미아의 꾸중과 함께 실패.
화장실 습격 - 불같은 진노와 함께 실패.
목욕할 때의 습격 - 잡혀서 같이 목욕함.
창문에서 화분 떨어뜨리기 - 도로 던지는 걸 받음.
건너편 건물에서 석궁 쏘기 - 명중률 형편없음.
의자에 함정 설치 - 쉽게 간파 당함.
식사 중 습격 - 포크에 막힘.
집무실에 잠복 후 습격 - 방해 된다고 걷어차임.
폭탄 설치 - 폭탄이 해체돼 방으로 돌아옴.
오디를 잡아 인질극 - 오디는 강했다.
죽이려는 방법도 강구하자면 여러 가지였다. 그렇지만 그건 모두 번번이 실패하고서는 나미아의 가소롭다는 표정을 봐야만 했다. 제일 자주 시도했던 것은 단검을 쥐고 덤벼드는 거였지만 나미아는 세 번을 넘기지 않는 동작으로 그 공격을 모두 받아내고 있었다. 결국 짜증이 난 나미아는 이른 아침에 티나세르를 끌고 뒷마당으로 나왔다.
“그런 실력가지고 어디 내 옷깃이나 스치겠어?!”
“이익!”
“허어, 자세 봐라! 똑바로 못해?!”
툰드라의 늑대들을 상대로 교관도 했었던 나미아는 매섭게 티나세르에게 살해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티나세르는 나미아가 정말로 자신의 손에 죽을 생각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나미아가 가르쳐 주는 단검술을 배우고 있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살해능력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 동안의 암살 실패로 15일의 무임근무시간이 쌓였다는 걸 생각하면 실력의 향상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단검은 한 번 꺼내면 장검과는 달리 꺼낸 순간에 상대를 처리해야 한다. 길어봤자 1피트 밖에 되지 않는 단검은 그 거리가 무지하게도 짧아서 장기전을 노리기 위해서는 대륙을 질타하는 솜씨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실력을 쌓기에는 어려운 티나세르는 결국 일격 필살을 노릴 수밖에 없다.
“꺼내서! 휘두른다! 왜 이걸 못해! 힘도 없고, 속도도 없는데 잘도 죽이겠다!”
“이얍!”
“춤을 춰라! 춤을! 응?! 니가 댄서냐?! 비리비리해서 힘도 쓰지 못하는 게!”
“정말! 시끄러웟!”
결국 티나세르는 그녀가 배운 대로 나미아에게 단검을 휘둘렀지만 그녀는 격동적인 천지역전을 경험해야 했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브란디에고가 당한 바로 그 수법이었다.
콰당!
“아야야야….”
배우는 건 좋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나미아라는 건 문제였다. 나미아가 가르치는 만큼 그녀는 수법의 약점도 꿰고 있었기에 그걸로 공격해 봤자 손쉽게 파악당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미아는 손을 탁탁 털고는 허리에 얹고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티나세르를 내려다보았다. 수련 중의 암살 시도는 횟수로 치지 않는다고 했었다. 아마도 티나세르는 수련 중 수시로 암살을 시도할 것이다. 당해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자! 일어나라고!”
“으이익…!”
티나세르는 입술을 깨물며 일어났다. 팔은 이미 더 이상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이 저렸고, 하체를 굳건하게 만든다며 시작한 반마보에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기본 체력을 익힌다며 복근의 단련까지 해서 지금은 이름 아침에도 불구하고 피곤함이 몸에 배어들었다.
“아직 30회 남았다. 밥 얻어먹고 싶으면 계속 해!”
“주, 죽여버릴 거야!”
“그래. 맘대로 하라고. 하지만 네 허접한 실력으로는 내가 죽고 싶어도 못 죽어. 숨소리도 못 죽이고, 발소리도 못 죽이고, 그러니 기척도 목죽이지. 살기를 숨기지도 못하면서 누굴 죽여? 게다가 비실비실해서 힘도 못 쓰지. 야야, 개미새끼도 네 칼에는 안 맞아 주겠다.”
“이씨!"
나미아에게는 화를 내는 모습조차도 귀엽게 보일 정도였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면서 악에 찬 듯 분하다는 태도로 단검을 휘둘렀다. 분하지만 상대는 강했다. 어떻게든 강해져서 상대를 죽여야만 한다. 나미아의 비웃음은 그녀에게 오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힘차게 단검을 휘둘렀을 때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이 배어나와 무럭무럭 김을 솟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티나세르를 안아들고는 여관 안으로 옮겼다. 티나세르는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나미아를 거부했다.
“내… 몸에서… 손… 떼에….”
“떼게 만들어 보시지. 바보.”
“제, 제길… 반드시… 죽일… 거….”
“말로는 뭔들 못하겠어. 에효. 땀 냄새. 그대로 식탁 앞에 앉을 생각은 그만 둬. 오디가 용서 안 할 걸?”
나미아는 슬쩍 티나세르를 보았다. 그녀는 피곤에 절어 잠에서 깬지 3시간 만에 도로 잠들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손에는 그녀의 단검이 꼬옥 쥐어져 있었다. 나미아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날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니…. 모습은 가상하지만 좀 서글프군.”
게다가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이지 않는가. 나미아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5층까지 그녀를 데리고 갔다. 오디가 요리를 하는 냄새가 향긋하게 그녀의 코와 위장을 자극했다.
“오디. 잠깐 이리와 봐.”
부엌 반대편에는 식당이 있었고, 막 오디가 음식을 가지러 부엌으로 나가려는 찰나 나미아가 오디를 불렀다. 오디는 축 늘어진 티나세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말했다.
“어머? 왜 이래요?”
“최선의 노력을 한 결과지. 지쳐 잠들었어. 얘 좀 씻기고 침대에 눕혀. 아마 일어나면 팔다리 움직이기도 못할 걸.”
“좀 살살 다루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아냐.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노력한 거지. 자. 받아.”
나미아는 염력으로 티나세르를 둥실 띄워서 넘겼고, 오디는 팔을 걷고서 그녀를 받았다. 나미아는 티나세르의 땀이 배어든 옷을 보면서 자기도 좀 갈아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뭔가 들어온 정보는 없었어?”
“라르지엔 가문이라는 곳을 찾긴 했는데, 꽤 흔한 이름이더라고요. 대륙에만 열 네 개 가문이 있었어요. 자세한 내용을 기재한 보고서를 집무실에 두었어요.”
“알았어. 그럼 아침은 집무실에서 먹지.”
“네. 그러세요.”
나미아는 일단 옷을 갑아 입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오디는 땀냄새 물씬 풍기는 소녀를 나미아와 마찬가지로 서글픈 미소와 함께 바라보고는 그녀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페네디는 바쁘니 자신이 씻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육통 때문에 식사도 누가 떠먹여줘야 할 것 같은데….’
마법으로 근육의 피로를 풀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근육은 전혀 자라지 않는다. 마법의 치료는 대개 두 가지 수법으로 이뤄지는데, 하나는 신진대사의 촉진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역전이었다. 피로를 푸는 마법은 시간을 역전 시키는 종류였다. 그 마법이 ‘리커버리’이다. 피로가 생기기 전 시간으로 생대방의 신체시간을 되돌리는 것인데, 이 마법이 강화되면 나이를 젊어지게 만드는 ‘리스토어(Restore)’가 된다.
근육이 불어나기 위해선 일단 피로하게 만든 뒤에 조금 쉬게 했다가 다시 피로를 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신체로 하여금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걸 일부러 자각시켜 근육에 힘을 축적하게 만드는 식이다. 이걸 장시간 반복하면 근육에 자연스럽게 힘이 붙으면서 근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피로를 준 시점에서 리커버리를 사용하게 되면 근육이 신체가 힘을 축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서 근육이 자라지 않는다.
문득 거기까지 생각을 한 오디는 티나세르를 씻기기 위해서 옷을 벗기다가 잠시 우려의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여자 몸에 근육 붙으면 별로 보기가 안 좋던데….’
그녀 딴에는 심각한 걱정이었다.
티나세르가 일어난 시각은 6시간 뒤였다.
“윽, 우으윽….”
몸을 일으키려던 티나세르는 끔찍스러운 근육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팔다리는 딱딱하게 굳어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복근은 창으로 쑤시는 듯 당겨왔다. 어깨가 나살려라 지끔거렸고, 골반은 이미 뒤틀린 것 같이 뻑뻑했다. 간신히 목은 움직일 수 있었으나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용쓰며 간신히 10인치 정도 상체를 끌어올린 티나세르는 결국 온 몸에 힘을 쭈욱 뺀 채로 털썩 쓰러져야 했다.
그녀의 뒤에서 재미있다는 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지 않은 모양이군.”
“으윽…!”
오디였다면 도와달라고 하겠지만 아쉽게도 그 목소리는 나미아였다. 티나세르는 자존심을 바득바득 세우면서 혼자서 일어나겠다는 듯이 용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10인치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나미아는 그런 귀여운 모습을 보다가 부드럽게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당연히, 티나세르는 반항했다.
“도, 도움 따위는 필요 없….”
“그런 꼴로 자존심은 살아서는. 오디! 티나가 깼어! 먹을 것 좀 가져와!”
“네에-!”
밖에서 오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나세르는 자신의 애칭을 함부로 불러대는 나미아의 말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 내 애칭 함부로 부르지 마!”
“내 맘이지. 귀엽잖아? 티나?”
“하지마! 악!”
팔을 휘두르려던 티나세르는 근육의 용트림 같은 무시무시한 통증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본 나미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침대의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단검을 들어올렸다.
“흐음… 지금이라면 아주 손쉽게 널 죽일 수 있겠군.”
“뭐…어?”
스릉….
단검이 뽑혀 나오며 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소리를 내었다. 티나세르는 설령 그것이 농담일지라도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
아니, 애초에 자신을 죽이게 만든다는 것이 사람으로서 가능한 생각인가? 나미아는 처음부터 자신을 이렇게 무력하게 만들고는 귀찮은 벌레를 처리하듯 죽일 생각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한 티나세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빠져나갔다. 나미아는 그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피식 웃으며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풋! 너무 웃긴다, 너. 걱정하지 마. 그런 치사한 짓은 안 해. 귀찮기는 해도 너하고 있으면 꽤 즐겁거든.”
나미아는 단검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두고서는 팔짱을 끼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티나세르를 약 올렸다. 티나세르는 그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이리도 관대한가?
“왜… 왜 날 이렇게 대하는 거지?! 난 널 죽이려고 한다고!”
“그것도 매우 같잖은 수법이지만. 어설프지.”
“그렇다고 해도! 날 계속 비참하게 해서 저열한 즐거움이라도 만끽하고 싶은 거야?!”
“헤에.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너는 참 생각이 깊구나. 음음.”
명백한 놀림이었다. 티나세르는 핏기가 빠졌던 모습과 정 반대로 얼굴에 피를 모으면서-새빨개지며- 말했다.
“놀리지 마-!”
“맞아요, 나미아 님. 어린애 가지고 너무 놀리지 마세요.”
오디가 문을 열고 먹기 쉽지만 든든한 음식을 차려왔다. 티나세르가 일어나는 걸 준비하며 미리 만들어둔 것이다. 나미아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너무 재미있잖아. 이 일일이 발끈하는 모습 좀 봐. 너무 귀여워.”
“마치 어렸을 적에 나미아 님을 대하던 아버님 같은 소릴 하시네요.”
“오와! 나한테 그거 최고의 칭찬인 것 알아?! 아빠 닮았다니, 너무 기뻐!”
“…파더 콤플렉스 같으니.”
오디가 아니다. 티나세르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나미아를 보며 티나세르가 꺼낼 수 있는 단 한마디였다. 나미아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 해괴한 생물을 보는 것 같은 티나세르의 시선과 마주했다.
“이쒸…. 딸이 아빠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야?”
“그 나이 먹어서 파더 콤플렉스라는 게 문제야. 세상에, 아직도 아빠라고 불러?”
“뭐가 어때서. 부우-.”
나미아는 입을 삐죽거렸다. 오디는 그 모습을 보면서 대체 누가 어린애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죽이 착착 잘 맞는 모습이었다. 오디는 쟁반을 침대 위에 올려두고는 조금 큰 어린애에게 말했다.
“그만 놀리세요. 화내잖아요.”
“그 모습도 귀여운 걸. 와하하핫!”
“하여튼… 누가 어린애인지….”
오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을 나갔고, 나미아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흥흥거렸다. 그리고 티나세르는 오디의 말이 백 번 맞고 한 번 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공감이었다. 티나세르는 자신도 그녀를 놀려볼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지금은 배가 고팠고, 한 번 더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만 나가주겠어? 밥 먹어야 해.”
“먹을 수나 있어? 팔도 못 가누면서.”
“…네가 걱정할 건 아냐.”
“아니. 계속 네가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이상 오디가 피곤해져. 빨리 죽이고 나가야 오디가 편해지지. 그걸 위해서라도 넌 빨리 먹고 힘을 길러야 해. 그러니 내가 걱정 해야지.”
말이 되는 듯싶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 마리니 그럴 듯하다고 여기면서도 티나세르는 자신이 또 그녀의 화술에 말려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고민 하는 사이 그녀의 앞에는 수프의 옷을 입은 감자가 얹힌 스푼이 다가왔다. 티나세르는 당황하며 말했다.
“무, 뭐야?”
“먹어."
“머, 먹여준다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니? 꼼짝도 못하는 데. 도와줄 테니까 어서 먹어.”
“그, 그딴 도움은 필요 없어!”
감자가 요동칠 정도의 고함이었다. 나미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왼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오른 손에 든 스푼을 입가로 내밀었다. 구수한 수프향이 코로 흘러들어오면서 공복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나미아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 먹어.”
티나세르는 나미아의 능글능글한 표정을 보며 심각한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먹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갈등이 끝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미아가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거 안 먹으면 내일 아침까지 식사 없… 야야, 스푼은 먹지 말라고.”
“…남이사.”
“후훗. 역시 식욕에는 굴복하는 군. 오디의 음식 솜씨는 정말 뛰어나거든. 난 이미 유혹에서 벗어나길 포기했지.”
“그러다 곰처럼 살 찌… 우읍!”
나미아는 빵조각을 던져 넣듯 티나세르의 입으로 집어넣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11일.
티나세르의 근육통은 의외로 심한 것이라, 그녀가 간신히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었던 때가 다음날 오후였다. 이틀 정도 격렬한 움직임을 쉰 그녀는 오늘 아침에 가벼운 체조와 훈련을 하여 차근차근 체력을 비축하자는 나미아의 의견에 암묵적 동의를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서 나미아를 죽일 방법을 골몰히 생각하던 그녀는 책에서 조언을 구하고자 서재에서 여러 추리소설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이미 서재의 책에 대해선 독파를 끝낸 나미아는 나중에 그녀가 전집 하나를 다 읽었을 때 놀리는 기쁨을 남겨두기로 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시끄럽게 굴지 않을 것 같았다. 발상도 참으로 어린애 같았다.
“어차피 추리 소설에서 완전 범죄는 없다고. 탐정이 다 밝혀내는 걸. 와하핫. 어째서 추리소설의 모방범죄가 없는지는 뻔 하잖아.”
오디는 나미아의 말을 듣고 살짝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티나세르에게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티나세르가 죽이는 시도를 할 때마다 뒷처리하기도 바빴고, 연말이 점점 다가올수록 어째 일거리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다른 상회의 총무에 비해서는 경이로운 일 속도를 자랑하는 오디였지만 전 대륙의 49%를 장악한 상회의 총무가 지니는 업무량은 경이로운 속도로 해결하기도 부족했다. 요새는 잠도 줄여가며 고생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티나세르의 일을 핑계로 회장의 업무까지 일부 떠안은 그녀는 애완동물 보호협회가 있다면 가혹행위로 신고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처음엔 장난스레 떠올렸던 그 기분은 점심을 먹은 후에 그녀를 충동질 할 수준까지 치솟게 되었다. 나미아가 매우 활기차게 말한 내용 때문이다.
“오디-! 나 티나랑 피크닉 갔다 올게-!”
“티나라고 부르지 말라고!”
빠직!
오디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펜이 부러지는 소리였다.
뽀득. 뽀득. 뽀드득.
눈을 밟으면서 내는 소리와 발밑의 느낌을 같이 듣고 느끼고 있자면 한 없이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든다. 호수에 얼어붙은 얼음 위와 호숫가에는 전날 밤에 쌓인 눈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해주었다. 묘하게 중독성도 있어서 눈이 물리지 않는 부분을 일부러 밟고 다니는 꼬마도 있었다.
티나세르는 품 안의 단검을 느끼면서 검은 털모자를 쓴 채 눈을 밟는 즐거움을 느끼는 나미아를 바라보았다. 대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과 피크닉을 가자는 여자의 정신구조는 어떻게 된 것인지 파헤쳐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눈을 밟는 것은 그녀의 고향에서 몇 번 없었던 경험이어서 그녀는 품 안에서 느껴지는 단검에 피를 맺히게 하는 일은 잠시 보류했다.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실패했을 때 눈밭에서 뒹굴기는 싫었다.
겨울의 호숫가 날씨 치고는 바람이 없는 날씨였다. 얼굴로 지나치는 차가운 공기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에 비라면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을 밟던 티나세르는 즐거운 듯 눈을 밟는 나미아를 보며 피식 웃었지만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원수였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티나! 여기 앉자. 여기!”
앞서나간 나미아는 눈이 깔린 벤치를 바구니에서 꺼낸 수건으로 삭삭 치우고는 손을 흔들며 티나세르를 불렀다.
“아아.”
티나세르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사이에 나미아는 재빠른 동작으로 바구니에서 잘 접힌 천 두개를 꺼내서는 공기를 불어넣었다. 곧 그 천이 팽창하면서 푹신한 방석이 되었고, 나미아는 그걸 벤치 위에 올렸다. 바람이 없다고 해도 눈이 쌓여 있던 벤치는 엉덩이에 동상이 생기게 하기 충분했다.
나미아는 두 방석 사이에 피크닉 바구니를 올려두고는 털장갑을 낀 손을 입 앞으로 내밀어서는 입김을 천천히 내뱉었다.
“하아….”
다른 사람보다 체열이 좀 높은 나미아의 입에서는 다소 진한 김이 피어나왔고, 손에 맞아 흩어지며 공기중으로 사라지는 입김을 보며 나미아는 히죽 웃었다. 겨울의 재미였다. 티나세르는 방석위에 털썩 앉으면서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린애 같기는.”
“뭐 어때. 남녀노소를 불문한 겨울의 재미야.”
“과연 그럴까.”
“흥. 마치 자기는 없었다는 듯 말하는 군. 솔직하게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없다면 나의 아동적인 면을 인정하지.”
“…쳇.”
솔직하게 말해서, 무척 많았다. 눈이 좀 적은 그녀의 고향에서 눈이라도 오면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 정원을 뛰어다녔고, 날이 추워질수록 입에서 나오는 입김을 가늠하던 때가 있었다. 결국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나미아는 티나세르가 긍정하는 대답에선 입을 다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씨익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 만족의 조건에는 티나세르가 애써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다는 것도 들어있었다.
나미아와 티나세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겨울이 준비하고 눈이 만들어낸 하얀색의 재미있는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호수의 얼음은 중앙으로 서서히 침범해가는 중이었다. 이미 호숫가의 얼음은 올라가서 쾅쾅 뛰어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얼어있었다. 호숫가의 목책이 없었더라면 어디부터 호수의 시작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호수의 표면으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반짝거리는 눈의 입자들이 하얗게 날다가 사그라지었다. 호수 건너편에 있는 산도 앙상한 나무들이 눈의 잎사귀를 달았고, 산 자체도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바위의 명암은 산을 얼룩소 같은 재미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거리도 하얗게 변했다.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고는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하얀 눈이 가득 쌓인 지붕에서는 이따금 무게를 못 이긴 눈이 스르륵 떨어져 내려 길 가던 행인을 덮쳤다. 순식간에 눈 벼락을 맞는 한 숙녀는 옷 속에 들어온 눈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며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어 주변 사람들에게 추운 겨울에 훈훈한 웃음을 전해주기도 했다.
검부르죽죽하게 질척이는 거리를 가는 마차는 주변으로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이웃을 배려한다는 이유 보다는 미끄러운 진탕길에 발생하는 마차 전복에 더 신경을 쓰며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고, 수레꾼은 뒤를 밀어주는 동료와 함께 짐을 의뢰한 이의 조상부터 자손만대를 저주하며 뜨거운 입김을 내뿜었다.
지붕이 무너지기 전에 눈으로 치우러 지붕으로 올라간 사람들의 움직임도 분주했다. 그들은 그럴 의도가 없겠지만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눈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악동들에게 좋은 투사무기의 재료가 되었다. 지금 신나게 놀다가 나중에 감기가 들어 이불을 덮어쓰고 벽난로 앞에 앉아 지독히도 싫어하는 생강차를 마시게 될 거라는 걸 잊고, 어느새 어머니에게 귀를 붙잡힌 채 끌려가는 시간이 온다는 것도 잊은 채 아이들은 신나게 뛰놀고 있었다.
지붕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고드름은 건물의 주인들이 열심히 떼어내는 중이었다. 자칫 잘못 떨어지면 낙하하는 고드름에 찍혀 죽을 수도 있는 황당한 죽음을 만들어낼 것이다. 아마 죽은 사람의 가족도 죽은 이의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고드름에 찍혀 죽었다는 건 차마 밝힐 수 없을 것이다.
호숫가를 거니는 연인들은 훨씬 정취 있는 모습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옆의 여성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꾸며내는 남자나 그 말을 온당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수줍어하는 처녀의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서로 손을 맞잡은 채 호숫가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도 자연의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느끼는 노년 부부의 모습은 겨울의 자연 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모습도 보여주지 않지만 그곳에는 많은 말이 있었고, 많은 모습이 있었다. 그 속에는 삶이 있었고, 대화가 있으며, 즐거움이 있고, 노력도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일상에서 건질 수 있는 모든 가치는 자연이 내려준 일률적인 배경으로 더욱 잘 보이고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 뿌려지는 물감처럼 단조로운 색체 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꺼운 옷을 입고 하나같이 입김을 내뿜으며 어제와 같지만 다른 오늘을 살고 있었다.
“재미있지?”
“응….”
티나세르는 자신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했고, 나미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살고 죽는 삶의 악다구니를 먼발치서 바라보면 알지 못했던 것이 보이며, 더욱 잘 보이게 된다. 대체적으로, 재미있는 것이다.
“자, 추우니 따뜻한 거라도 먹자.”
나미아는 바구니에서 두꺼운 금속 병과 컵 두개를 꺼냈다. 티나세르는 컵을 받아들고는 금속 병에서 나오는 따뜻한 차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눈에 놀라운 기색이 서렸다. 나온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마치 지금 막 덥힌 것 같은 따뜻함은 여태까지 봐오지 못했었다. 나미아는 자신의 컵에 차를 따르고 병의 뚜껑을 닫아 바구니에 넣고서는 말했다.
“보온병이라고 해. 병 안에 단열재를 채워 넣고 유리로 막으면 열이 바깥으로 쉽게 새어나가지 않아. 훨씬 보관시간이 길어. 본체도 알루미늄이라 가볍고 튼튼하지. 이켈라인 상회의 개발부가 내놓은 신상품이야. 쓸 만하지?”
“편하긴 하네.”
“추운 곳에서 따뜻하게 차를 마시거나, 수프를 먹을 수도 있어. 휴대도 간편하니 여행 나갈 때도 그만이지. 사람들은 더욱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난 돈을 버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람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도 좋아. 사람들은 싸고 좋은 물건을 얻어 행복하겠지. 난 볼 수 없겠지만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개발자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감내할 수 있어.”
티나세르는 보람차게 이야기하는 나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미아는 그런 시선을 상관하지 않으면서 앞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엔 한 점 꾸밈없는 즐거운 미소가 있었다. 티나세르를 놀릴 때와는 다른 순수한 기쁨의 미소였다. 나미아는 즐거운 듯 계속 이야기했다.
“남들은 우리 상회가 시장경제의 파괴니 운운하고 있지만 우리는 서민들의 기쁨을 우선으로 하고 있거든. 다들 좋아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물건 값을 올려야 한다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지. 물가가 올라가는 것에 맞춰서 조금씩만 올려도 수익은 생겨.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물건을. 우리 상회는 그 하나의 가치를 위해 존재해. 약간의 대가를 받는 건 당연한 거고. 철저한 상논리에 따르지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나에겐 정말 기쁜 일이야.”
나미아는 진심이었다. 옛날, 마물 생성포로 고통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켈라인 상회의 싸고 좋은 물건을 사면서 적잖은 기쁨을 누린다. 그걸 볼 수는 없어도 가끔 나가는 시장의 모습에서 그녀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실로 가슴 속이 뿌듯해지는 즐거움이었다.
이미 400년이나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는 전설로 밖에 남겨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채무는 아직도 많다. 그녀가 무리하게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순간 티나세르의 가슴 속에서 의문이 치솟아 오르는 걸 느꼈다. 정말로 이 사람이 자신의 부모를 죽였을까? 그녀가 들은 바로는 모든 일의 뒤에는 나미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껏 살펴본 나미아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철저한 이중생활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파악하기 쉬운 모습이었다.
“티나세르.”
“왜?”
“난 네 부모를 죽이지 않았어.”
“…!”
평화로운 어조로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의미였다. 티나세르는 나미아의 어조 때문에 한참이 지나고서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미아는 조금씩 떨리는 티나세르의 컵을 보다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살의가 그리 짙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어. 막연한 생각이었겠지. 너희 아버지인 ‘민델프 라르지엔’이 막대한 빚을 졌다는 건 사실이야. 투자 상의 실수지. 그래서 너희 집과 모든 물건이 압류되었어. 거기까지는 내가 개입한 게 맞을 거야. 어찌되었든 투자는 투자자의 선택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지. 그렇지만 난 죽이려면 직접 죽이지, 청부살인이나 차도살인 따위는 하지 않아.”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어. 어차피 그건 사실이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너희 부모를 죽여서 내가 득이 될 게 뭐가 있지?”
티나세르는 말문이 막혔다. 나미아의 말은 솔직했고, 사실이었다. 상회의 사람도 아닌 사업의 투자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서 득 될 것은… 솔직히 없었다. 돈이라는 이유가 있겠지만 이미 집과 가구는 차압에 들어간 상태니 돈에 대한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나미아는 그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 아니던가. 평생 쓰고도 넉넉할 돈이 있을 것이다. 나미아는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살인이라는 건 다른 모든 범죄와 마찬가지로 무언가의 충족을 위해 일어나지.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거기서 뭔가를 얻기 위해 저지르는 범죄의 일종이야. 그리고 그런 면에서 나는 너희 부모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어.”
“그, 그럼 왜… 왜 자신을 죽이라고 한 거지?”
“손님이니까. 네가 날 원수로 생각하고 있다면, 아마 그렇겠지. 손님은 언제나 옳으니까.”
나미아는 명쾌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 명쾌함은 티나세르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하지 않았다면 단지 손님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죽이게 할까? 정말로 그녀가 죽이지 않았다면 대체 누구지? 아니야. 이건 날 혼란시키려는 수작이야. 얄팍한 것처럼 보여도 고도로 위장된 수작.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날 혼란시키기 위한 것? 아니야. 그건 거짓이 아니었어. 저 인간의 장난스러운 행동이나 오디 씨의 친절은 거짓이 아니야. 그렇다면 정말 단지 손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목숨을 건다는 건가? 내가 옳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정말로 내가 옳다고 믿는 거야? 그런 의심 없는 눈으로 날 보지 말라고!
“그만해!”
티나세르는 벌떡 일어났다. 컵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고, 찻물은 눈을 녹이며 흘러갔다. 나미아는 약간 당황한 듯 거친 숨을 내쉬는 티나세르를 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티나…?”
“그만해! 그만하라고! 연극인지 진심인지 모를 행동 그만 둬! 대, 대체 뭐야?! 뭘 믿으라는 거야! 내가, 내가 뭘! 나, 난… 내가…!”
“티나….”
“하지마! 오지마! 보지마! 말하지마! 아무 것도 하지마! 하지 말라고! 으아아아아아!”
티나세르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미아에게 멀어졌다. 나미아는 귀를 막고 달려 나가는 티나세르를 보며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하는 시간을 잘 못 정했던 걸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 것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을 부모의 원수라고 믿고 있는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진심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 숨기지 않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 방법은 없었다.
“후우….”
그녀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천천히 흩어지는 걸 보면서 그녀는 땅 위를 뒹구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피크닉 바구니에 찻잔을 집어넣은 그녀는 티나세르가 거칠게 밟고 간 자국을 바라보았다. 호반의 나무들 사이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티나세르의 집안이 투자의 실패로 몰락하게 되었다는 보고는 이미 예전에 받았었다. 그리고 그 며칠 후에 골목 어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보고도 받았다. 그건 석 달 전의 일이었다.
티나세르는 신사이 왕국의 국민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투자사업을 벌이는 사업가였고, 부유한 집에서 즐거운 유년기를 보내었다. 그녀의 집은 에디킨츠 왕국과의 무역사업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양국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사업이 실패했고, 집안이 기울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백방으로 수소문 하여 돈을 모았지만 차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라르지엔 가의 차압이 결정되고서 며칠 뒤, 티나세르의 부모는 어느 거리에서 가슴에 칼을 맞은 채 죽어서 발견되었다. 형제도, 친척도 없던 티나세르는 순식간에 고아가 되어서는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가출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두 달 전 일이다.
신사이 왕국에서 이곳 힐텐펜츠까지는 성인 남성이 걸어서 40여일 걸리는 거리였다. 두 달이라는 기간은 16세 소녀가 약간의 착오를 곁들여서 걸어온다면 충분히 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가출하기 직전, 대체 그녀는 무슨 말을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나미아가 힐텐펜스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후자의 경우는 그리 궁금하지도 않다. 아이리펜 대륙의 상업계에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 특이한 취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흘러 다니고 있으니 관심이 없는 사람도 조금만 신경을 쓰면 여관 WISH가 힐텐펜스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문제는 전자였다. 가출하기 전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나미아는 이미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마셨다. 피크닉 바구니 속에 컵을 잘 정리한 그녀는 자리를 정리하고서는 다시 여관으로 향했다. 스스로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머리를 식히게 내버려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13일.
오디는 5G1호의 문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티나세르는 11일 이후로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는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발자국 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일단 살아있기는 한 것 같은데 불러도 대답이 없고, 음식을 방 앞에 둬도 손 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나미아는 나미아대로 티나세르에게 참견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생각을 정리하게 내버려 둔다는 말 뿐이었고, 오디는 걱정스럽지만 그 말을 받아들여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평소보다는 분위기가 많이 침체된 티타임에서 오디는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찌 보면 저희들이 일으킨 일이네요.”
“티나세르네 아버지?”
“네. 원인을 따지자면 신사이 왕국과 에디킨츠 왕국 사이를 나빠지게 한 건 저희니까요.”
“진짜 원인은 신사이 해군의 원조를 받은 신사이 해적단 때문이지. 적대국에 대한 무역로 봉쇄는 당연한 일이고, 거기서 피해를 입은 것이 티나세르의 아버지 뿐만은 아닐거야. 이건 우연이지.”
오디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는 나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의 하얀 세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디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미아도 짐작하리라 생각되는 걸 말했다.
“과연 정말 우연일까요?”
“필연일지도 모르지. 모든 것은 카르마가 만든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오디는 나미아의 앞에 있는 서류를 보았다. 그곳에는 티나세르가 입양되었다는 그녀의 아버지 친구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티나세르가 본다면, 더욱 혼란스러워 할 내용이 그곳에 적혀져 있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내용이었고, 사실로만 이루어진 보고서였다. 나미아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때로는… 명확한 거짓보다도 혼란스러운 진실이 존재하기도 하지.”
“때문에 거짓을 더 믿고 싶어지지요.”
그녀들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해 창문을 떨리게 하고 날카로운 공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침묵은 그 소리를 더욱 크게 들리게 만들었다.
휘이이이잉…. 덜컹덜컹. 철컥.
마지막 소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나이아와 오디는 동시에 마지막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5G1호의 문이 열리면서 약간 수척해진 검은 머리의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디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티나세르? 괜찮니?”
“…네.”
너무나 미약해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나미아는 오디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녀가 찻잔과 티 포트를 옮기는 사이 티나세르는 힘없이 걸어와 쓰러지듯 소파 위에 앉았다. 오디는 풍성한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티나세르의 눈을 보기위해 애쓰며 말했다.
“저기, 뭔가 먹을 거라도 줄까?”
“있다가요…. 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말해봐.”
티나세르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뒤로 넘겼다. 요 이틀 사이에 많이 수척해진 얼굴이 드러났다. 그러나 눈만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듯한 의지가 서려있는 눈동자였다. 나미아는 잠시 어떤 말을 들어도 의연하게 대처할 마음가짐을 하고 티나세르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나미아를 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당신을 죽여 볼 거야….”
“….”
“성공하면… 이대로 끝내…. 실패해도… 끝낼 거야.”
“성공이든, 실패든 그 후엔 어떻게 할 건데?”
티나세르는 나미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끝간데 없는 복수심의 방향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미아로 향하게 한 것이다. 끝이 어떻게 되든 이번 한 번을 마지막으로 해결을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손님이 원하는 것이 그거라면 당연히 들어줘야 한다.
“좋아. 네가 성공하면… 여관 너 가져.”
“…뭐?”
“예엣?!”
“그리고 실패하면, 이걸 읽도록 해.”
나미아는 서류의 뒷면이 보이게끔 들어올렸다. 티나세르는 그것이 뭔가 싶은 아주 약간의 호기심만 드러내었을 뿐, 서류에 정확하게 무엇이 적혀있는지는 전혀 알바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한다면… 대체 자신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성공을 한다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걸로 결정 된 걸로 알겠어. 지금 당장 하기엔 네 상태가 너무 안 좋으니까 새 암살 시도는 3일 뒤로 하지. 장소는… 내가 정해도 괜찮겠지? 죽을 장소 정도는 마음대로 정하고 싶어.”
“마음대로….”
“그럼 오디. 필요한 물건들을 내어줄 테니 사용법을 익히게 해. 후회 없는 암살이 되도록 해야지.”
“나미아 님…!”
오디는 나미아가 무엇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 물품들의 사용을 허가하여 티나세르가 최선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일반적인 무기에 상처입지 않는 나미아였지만, 마법무기로 허를 찔리면 죽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천만지일(千萬之一)의 일이지만 그럴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오디는 말리고 싶었다.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나미아와 티나세르의 각오는 확고했다. 죽이려는 자와 진심을 대하는 자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것 같았다. 제삼자가 뭐라 할 내용은 없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죠.”
결국 오디도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기로 했다.
그 뒤, 3일이 지날 때까지 나미아와 티나세르는 한 마디의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