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uest.06: 죽여주는 손님.-Part1: 죽여주는 손님과 굳게임. (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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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여관「WISH」]

Guest.06: 죽여주는 손님.

Part1: 죽여주는 손님과 굳게임.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2일.

계절은 완연한 겨울이었다. 첫눈은 이미 지난달 내려 소복이 쌓여서는 꽁꽁 얼어있었고, 펜스텐 호수도 호반에 가까운 지점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북쪽에 위치한 힐텐펜스는 다소 추운 편이었다. 그 지방 토박이는 추위에 상당히 적응해 있었지만 외부에서 온 순례객들의 복장은 지역에 따라 얇고 두터움이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사이에그롭에서 온 순례객들은 제대로 순례를 끝마칠 수 있을 지 심히 걱정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여관 WISH는 첫 겨울을 맞이하여 초반에 분주함을 보였다. 겨울 대비라는 것이 처음인지라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 직원들은 나미아와 오디의 불호령을 두려워해 추운 겨울을 더 춥게 보낼 각오를 했으나 여관의 주인인 두 여성은 경험부족에서 오는 자잘한 실수에 대해선 관대했기에 생각보다는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직원들은 관대함의 훈훈함이 첫 번째 실수에만 적용된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여관의 새 식수로 받아들여진 브란디에고는 디에고라는 자신의 가명 겸 애칭에 익숙해졌고, 그 익숙해짐은 여관의 말단 직원이라는 생소한 직위에 비례했다. 어떤 곳이든 막내의 직위는 제일 많은 호통과 질책을 듣고 있는 직위였고, 골드 드래곤인 그는 그의 해츨링 기간 동안 들었던 질책의 정도와 비슷한 질책을 한 달 동안 들었다는 것에 종족적 이유를 들며 불쾌해하진 않았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그는 이걸 생소한 시작점의 유희로 삼기로 했고, 그 유희의 상황에 처한 자신의 직위를 잘 받아들였다.

“디에고! 식당 청소해!”

“예!”

“디에고. 장작이 부족한데 창고에서 꺼내와.”

“예. 그러죠.”

“디에고. 405호하고 6호에 시트 교환 좀 부탁해.”

“예.”

“디에고! 주방에 감자 한 포대!”

“잠시만요!”

브란디에고는 일주일의 교육기간을 거쳐서 어디든지 투입 가능한 만능 말단직원으로 결정되었다. 주방의 일을 제외하고서 그는 잡역부에서 홀 서비스 팀과 플로어 서비스에 이르는 범용적인 일꾼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그가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일하는 걸 본 나미아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빚을 탕감하는 그날까지 디에고는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었다.

추운 겨울은 도예 수행을 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날씨이다. 작업장의 온도와 습도를 마법으로 조절할 수도 있지만 나미아는 느긋한 마음으로 자연의 날씨가 적당한 날씨가 되길 기다렸다. 겨울은 겨울 나름대로 보내는 방법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침대에 누워 게으른 고양이 흉내를 내며 행복한 표정으로 골골거리는 일 같이.

“나미아 님….”

“왜에?”

나미아는 벽난로에서 가까운 쪽으로 몸을 데굴 굴리고는 게으름의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디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오후 2시에요.”

“우응. 그래서?”

“언제 침대에서 나오실 거예요?”

“그을쎄에?”

나미아는 다시 데굴 구르고서는 빙긋이 웃었다. 정작 고양이인 오디는 멀쩡한데 왜 나미아가 고양이 흉내를 내는 지는 고양이인 그녀로서도 의미해석 불가능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잘 때 입는 가벼운 란제리 차림 그대로인체 이불을 덮었다 내렸다 하며 뒹굴 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한가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실상 그녀가 한가한 것은 아니었다. 한 해의 끝 달인 지금은 연말결산이나 신년계획이다 뭐다 해서 한창 이것저것 날아올 시기이기 때문에 어찌 보자면 제일 바쁜 때였다. 오디는 별로 기대하지 않지만 혹시나 싶은 생각에 나미아에게 물었다.

“일 처리는 하셨어요?”

“일? 무슨 일?”

“…저기, 진짜 모르신다고 하면 화낼 거예요.”

“에헤헤헷. 알아. 하지만 침대가 너무 따뜻한 걸. 후으응.”

콧소리는 내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는 나미아는 행복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 핑계가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는 생각 하에 고개를 끄덕일 부분이었지만 오디는 나미아에 대해 거의 모든 부분을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말했다.

“기후 영향도 안 받으시면서 추위타신다는 농담 하시는 건 아니시죠?”

“우에에…. 오늘 따라 되게 깐깐하다. 일부러 농담이냐고 못 박다니. 못됐어.”

“저라도 안 그러면 누가 하겠어요. 얼른 일어나세요. 어서요.”

오디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나미아를 침대에서 끌어내었다. 그녀는 비스듬하게 햇살이 들어오는 창문을 보며 손가락을 소리 나게 튕겼고, 곱게 젖혀져 있던 커튼들이 일제히 내부의 모습이 외부로 나가는 걸 차단했다.

나미아는 침대에서 나와서는 기지개를 주욱 펴고서 샤워를 하러 욕탕으로 살랑살랑 걸어 들어갔다. 오디는 침대위의 베개를 원래대고 돌려놓고 시트와 이불을 정리한 뒤에 옷장에서 옷가지들을 꺼내어 침대위에 올렸다. 대개는 나미아가 나와서 옷을 고르는데 시간을 쓰지만 바쁜 날의 경우는 오디가 나미아의 시중을 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 나미아의 옷을 강제로 골라 입힌다는 고도의 작업도 아무렇지 않게 수행한다.

욕실 안쪽에서 나미아의 콧노래소리와 물소리가 들려왔고, 오디는 마법으로 적당히 내부의 공기를 신선하게 교체했다. 보통이라면 창문을 열고 자연의 공기를 받아들이겠지만 나미아는 욕실에서 베스 타월을 두르고 나올 것이 뻔 하기 때문에 일부러 커튼을 닫은 것이다. 연말이면 바빠진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미아는 겨울이 춥다는 이유로 게으른 고양이 흉내를 낸다.

정말로 춥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나미아와 오디는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춥다는 차갑다의 확장개념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통의 마법사들이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저항마법을 사용하는 대신 그녀들은 기후의 영향을 받는 역저항마법을 사용해 기후를 일부러 느껴야 할 정도다.

굳이 영향을 받는 게 있다면 기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분파인 나미아는 더욱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오디는 400년이나 넘게 그 모습을 봐오면서도 지겨운 내색을 하지 않았고, 나미아는 변함없이 그녀에게 계속 응석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다소의 막무가내는 아직도 감당하기가 어렵지만.

오디는 하는 김에 방 안의 정리도 했다. 나미아가 보고 있던 책은 책갈피를 끼워 탁자위에 올려두었고, 다 본 책은 그녀가 기억하는 책꽂이의 순서에 따라 책장에 집어넣었다. 약간 구겨진 카펫도 적당히 눌러 펴고 비뚤어진 액자도 꼼꼼하게 교정했다. 나미아가 곧 사용할 화장대의 화장품도 손닿기 쉽게 위치를 재조정 하는 듯 세심하게 그녀의 방을 돌보았다.

그녀의 태도에서는 그녀가 얼마나 나미아를 잘 돌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그녀들의 부모가 나미아가 사회에 나가서 살아도 안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 정도면 되겠지?”

오디는 나머지 청소와 정리는 다른 여직원에게 시키기로 하고서 차분한 태도로 소파에 앉아 나미아가 나오길 기다렸다. 어지간하면 나가서 기다릴 그녀였지만 아마 나미아는 욕실에서 나와 오디가 없으면 마음껏 침대 위를 뒹굴 것이 뻔하다. 이미 나미아의 모든 패턴을 꿰고 있는 오디는 그것을 가정이 아닌 사실로 결정하고는 나미아 감시 체재로 들어갔다.

그렇게 오디가 약간 어두운 실내에서 한가로움을 느끼며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를 듣고 있을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오너. 계십니까?”

“나미아 님은 지금 목욕중이신데요, 무슨 일이죠? 디에고?”

오디는 문을 열고 디에고를 맞이했다. 디에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상회 본사에서 손님이 오셨다는 전갈입니다. 지금 곧 지부 사무실로 와달라는 힐텐펜스 지부장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사람이 왔더군요.”

“어머, 그래요? 본사에서 손님이? 무슨 일일까….”

대개 어지간한 일은 서신을 주고받도록 했기 때문에 본사에서 사람이 온 거라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연말이 되다보니 이것저것 바쁜 일이 생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점점 큰 일이 생기네?

“알겠어요. 곧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예.”

그때 욕실 문이 열리며 나미아가 걸어 나왔다. 오디가 예상한 대로 베스 타월로 몸을 가린 채 머리는 돌돌 말아 수건으로 감아 올린 채였다.

“오디. 무슨 일이….”

“안녕하세요. 오너.”

“…….”

브란디에고는 깍듯하게 나미아에게 인사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그는 그녀의 보송보송하고 아슬아슬한 차림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일하는 여관의 주인에게 보내는 공경을 담아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원래 인간이었고, 따라서 자연스레 가질 수치심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문 바로 옆에 침대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바로 베개를 집어던지면서 소리 질렀다.

“나가앗! 뭘 멀뚱멀뚱 보는 거야앗!”

“옛?! 푸억! 아, 알겠습…!”

퍼억!

베개 하나를 잽싸게 피한 그는 시간차로 날아오는 두 번째의 베개를 피하진 못했다. 나미아는 세 번째 베개를 들고서는 씩씩거리며 더 화를 낼 수 있다는 듯 베스 타월을 움켜쥐고는 황급히 나가는 브란디에고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오디는 바닥으로 떨어진 두개의 베개를 들고서는 탁탁 털고서 침대로 가져갔다. 그녀는 두개의 베개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서 나미아의 손에서 마저 하나를 더 꺼내들고는 침대를 다시 정리했다. 그녀는 말했다.

“너무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잖아요.”

“뭐엇?! 욕실에 베스 타월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어!”

“제가 들여보내지도 않았겠죠. 인간도 아니잖아요? 뭘 그리 신경 쓰세요?”

“이이이익! 인간이냐 아니냐가 중요해?! 남자냐 여자냐가 문제잖아!”

오디는 화내는 나미아의 어깨를 잡고는 화장대 앞에 앉히면서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적어도 나미아 님의 파티 의상 보다는 면적이 더 많은 걸요.”

“파티는 파티고! 그때는 보여주려고 나가는 거잖아!”

오디는 나미아의 머리에 둘러진 수건을 풀었고, 젖은 머리가 무겁게 내려가는 걸 느낀 나미아는 늘 그렇듯이 단번에 불을 일으켜 머리를 말렸다. 오디는 화장대에서 빗을 집어 들고는 그녀의 머릿결을 삭삭 빗어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려니 하세요. 뭐 어때요.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너 자꾸 그러면 너 목욕하고 나올 때 디에고 집어넣는다.”

“전 상관 없는 걸요?”

“진짜 한다?!”

“자, 얼굴 찡그리지 마세요. 주름 생겨요. 화장할 때는 주의하셔야죠.”

나미아는 로션을 찍어 바르면서 찡그렸던 인상을 도로 폈다. 화장을 하기 위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그녀는 결국 얼굴과 목소리가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기이함을 보여주었다.

“하여튼 디에고도 아직 교육 덜 됐어! 뭐야 저 심드렁한 태도는?!”

“드래곤이시잖아요. 골드는 드래곤 중에서도 착한 성격이라고 아버님도 말씀하셨죠.”

“저건 착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근데 오디. 물어볼게 있어.”

“뭔데요?”

오디는 세심하게 머리를 빗어 내리다가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른쪽을 세 번 정도 더 빗을까.

“나 매력 없니?”

“글쎄요. 굳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사람이 나무를 보고 에로티시즘을 느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종족이 다른데 겉모습만 보고 욕정 느낄 드래곤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요?”

나미아의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오디는 중간단계를 건너뛰고서 대답했다. 보통의 남자가 나미아의 모습을 보았더라면 얼굴이 홍당무가 되거나 입을 헤 벌리든지 하는 식의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언뜻언뜻 보이는 면만으로 남자들에게는 즐거운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나미아의 몸매였다. 브란디에고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않고서는 늘 그러듯 공경으로 인사를 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그 반응에 나미아는 의문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 매력의 존재 유무를 묻는 말이었다.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대답하는 말에 나미아는 만족감을 느꼈고, 그 만족감과는 별개로 그녀의 의문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심미안은 있을 거 아냐. 아빠만 해도 엄마들의 성격에 반한 것보다도 용모에 반한 것이 먼저였다고 했으니… 아, 맞아. 아빠는 인간인가?”

“인간이시죠. 뭐… 다른 드래곤의 척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 그들은 참된 매력을 아는 게 아닐까요?”

“응? 무슨 뜻이야?”

오디는 다시 빗질을 멈추고는 나미아의 머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왼쪽으로 머리카락이 치우친 것 같은데.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드래곤은 폴리모프를 하죠. 겉모습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들에게 외양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게 되지요. 외양을 중시하는 건 그것이 바뀌지 않기 때문인데, 드래곤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겉모양이 바뀌죠. 미남에서 추남으로, 미녀에서 추녀로 얼마든지. 그러니 그들은 겉모습이 얼마나 허무한지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보는 것은 본질이죠. 사물과 생물의 본질. 무엇은 어떻고, 무엇은 어떻다. 그러니 어찌어찌할 가치가 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거야?”

“예. 그들은 본질을 봐요. 그리고 본질을 쉽게 드러내죠. 흔히 말해 드래곤은 색깔별이라잖아요. 그건 그들의 본질이 그만큼 쉽게 드러난다는 말이죠. 외양이 아닌 본질을 추구하는 그들이니 자신들도 본질을 드러내는 거예요. 브란디에고 씨도 마찬가지죠. 유희로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그의 성실함과 근면함, 착한 성격은 그의 본질이에요.”

“그렇군. 그렇다면 다시 말해 내 본질은 그리 큰 매력이 없다는… 왜 그래?”

나미아는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오디가 상당히 해괴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이 사람 왜 이래?’라는 뜻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오디는 빗을 내려놓고서는 화장대의 서랍에서 머리핀을 꺼내들고는 다시 나미아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본질을 파악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인 줄 아세요? 물론 드래곤들은 대체적으로 생각이 깊기 때문에 빨리 파악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브란디에고 씨가 일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 동안 나미아 님과 직접적으로 대화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고요. 본질을 파악할 시간이 부족하다고요.”

머리를 적당히 매만진 오디는 그녀가 고른 옷에 맞게끔 머리를 정동하고서 머리핀으로 고정시켰다. 나미아는 화장솜으로 얼굴을 슥슥 닦으며 오디의 말을 곱씹고는 다시 얼굴에 궁금증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네가 보기에 내 본질은 어때? 설마 너도 모른다는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나미아 님은 충분히 매력적이니까요. 자, 됐어요. 이제 옷 입고 나오세요.”

“응. 알았어.”

오디가 진심으로 말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미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력을 인정받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나미아는 브란디에고를 호위로 삼아 힐텐펜스 지부에 갔다. 그곳에서는 현재 본사의 사장이 와서는 퇴임을 표하고 후임을 임명하는 문제로 직접 회장을 찾아왔었다. 나미아는 그의 사정을 듣고는 소신껏 하라는 말을 하고서는 얼마간 잡담을 나누다가 왔었다.

연말이 되니 인사이동도 생긴다는 골치 아픈 문제를 오디에게 떠넘길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던 그녀는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 브란디에고를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에겐 인간의 도시가 생경한가보다.

“신기하니?”

“예? 아, 네. 150년 전에도 나왔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느긋하게 구경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지금 와서 본 인간의 도시는… 많이 달라진 듯 하면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 하군요.”

“150년 전이면 두 세대에서 약간 모자라는 시간이니까. 너도 이제부터 느긋하게 볼 수 있겠지만, 나중에 놀라게 될 거야. 의외로 변화하는 속도가 느리면서도 빠르거든. 인간은 원래 역동적이야.”

“그럴 것 같더군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나미아는 조만간 휴가라도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기는 신년 초 정도가 좋을까 생각하던 그녀는 그랜드 트리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몰려드는 신년 참배객을 생각하고서는 그 시기를 조금 늦추기로 했다. 브란디에고에게는 매우 반가운 생각을 하던 그녀는 그런 생각 때문에 자신에게 보내오는 살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브란디에고는 재빨리 살기에 반응하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고, 앳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야 나미아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죽어엇!”

“에?”

나미아가 놀란 눈을 치켜뜨는 사이 그녀의 눈앞에서 금발머리가 살짝 일렁거렸다. 지저분한 망토를 두른 소녀가 날카로운 단검으로 자신을 찌르러 오는걸 끝까지 보지 못한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신속한 동작으로 다리를 뻗는 것만 목격할 수 있었다.

퍼억!

“아아악!”

고통에 찬 단발마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며 새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미아는 브란디에고의 어깨 너머로 왠 소녀가 나뒹구는 걸 보았고, 그녀가 바라보는 어깨가 움직이며 칼이 뽑혀 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챠앙!

브란디에고는 한 호흡도 놓치지 않는 부드럽고 깔끔한 자세로 칼을 뽑자마자 앞으로 달려들었고, 나미아는 자신을 향해오던 살기가 사그라지며 대신 브란디에고가 내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브란디에고는 단호한 태도로 나미아에게 암습을 가한 상대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단검을 든 소녀는 이미 브란디에고의 일격에 맞아 기절해 있었고, 브란디에고는 신속하게 소녀를 처리하려고 했다. 나미아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달려가는 브란디에고보다 빠르게 나아가 그 손을 잡았다.

“잠까안!”

“우와악?!”

쿠웅!

브란디에고는 땅과 하늘이 역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몸의 중심이 뒤바뀌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화려한 업어치기를 당하고는 땅을 등에 호되게 부딪혔고, 주변의 사람들은 연속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 브란디에고가 멍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보았을 때, 그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정신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너 미쳤니?! 백주대낮에 왠 살인이야?!”

“저, 저기, 암습을 가하려….”

“내가 그런 거에 당할까봐? 걱정도 팔자셔. 저딴 단검으로 잘도 찌르겠다!”

“아, 저기….”

브란디에고는 블러드 스폰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피부의 경도가 드래곤의 비늘과 비슷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표정,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으나 나미아는 단호하게 그의 표정을 무시했다.

“뭐하니? 얼른 안 일어나?! 칼 꽂아!”

“아, 네!”

브란디에고는 벌떡 일어나서는 발검할 때보다 세배는 빠르게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나미아는 자신을 습격하려다 불의의 반격(?)을 받아 기절한 소녀에게 다가갔다. 푸석푸석한 검은 머리를 가진 소녀는 잠들듯 기절해 있었고, 얼굴에는 땟국이 가득했다. 복장과 얼굴이 꽤나 일치하고 있는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누구지?”

나미아는 소녀의 얼굴을 보면서 어디선가 본적이 있나 면밀하게 살폈다. 자신의 얼굴은 그 직위와 함께 인상 깊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기에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의뢰를 받은 암살자라고 보기에는 수법이 너무 싸구려고, 순식간에 반격을 당해 나뒹구는 걸 보면 이런 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브란디에고는 소녀가 놓친 단검을 집어 들었다. 만들어질 때부터 날카롭게 되어 있는 화려한 모양의 단검은 뭔가 유서가 깊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걸 조심스럽게 나미아에게 내밀었다. 의장용 단검 같았지만 날이 세워진 정도를 보면 단순한 의장용은 아닌 것 같았다.

“저기, 이걸….”

“아, 고마워. 흐음… 뭔가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군.”

나미아는 소녀의 품을 뒤져서는 단검의 집을 꺼낼 수 있었다. 복장과 행색과는 별대로 단검의 칼집은 꽤나 화려하고 고가의 물건 같았다. 내력을 조사한다면 금방 나올 것 도 같았기에 그녀는 단검을 칼집에 끼워 넣고는 브란디에고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나미아가 조심스레 소녀를 살피는 걸 보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아는 소녀입니까?”

“응? 아니. 몰라. 하지만 곧 알게 되겠지. 디에고, 업어.”

“네?”

“업으라고. 데려가서 치료하고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봐야지. 네가 기절시켰으니까 업어. 하여튼, 생각이 있니? 대낮에 왜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

브란디에고는 변명할 생각을 아예 버린 채로 조심스레 소녀를 등에 업었다. 뼈가 부러졌다든가 금이 간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히 기절시킬 요량으로 발차기를 했던 거였고, 그 뒤에 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 두 번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단순한 기절을 부여하는 일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브란디에고가 소녀를 업자 나미아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그럼 다들 볼일 보세요. 죄송합니다.”

“저도… 죄송합니다….”

브란디에고는 나미아가 찔러오는 옆구리에서 부담을 느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나미아의 뒤를 따라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뭔지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 하면서 저마다 자기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몇 명은 떠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지만 섣불리 따라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미아와 브란디에고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서 종종걸음으로 여관 WISH를 향해 걸었다.

“넌 그렇게 생각이 없니? 백주대낮에 웬 살인이야?”

“아니… 호위의 역할이….”

“그렇다고 해도 살인은 범법행위야. 돈과 권력으로 무마시키면 되는 일이지만 그건 옳은 일이 아니지.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어. 저 꼬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공격했다고 해서 저 꼬마를 죽일 명분은 생기지 않는단 말이야. 사회에서 앞으로 꽤 살아가야 할 텐데, 이 정도는 알아둬.”

“예. 알겠습니다.”

즉석 사회교육에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 소녀가 깨어나면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등에 업힌 소녀가 미끄러지지 않게 한번 추슬렀다.

“그런데 언제쯤 깨어날까요?”

“글쎄. 얼마나 세게 쳤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겠지. 그 정도에 따라서 시간이 결정될지도 모르니.”

“…잘 모르겠군요.”

“그럼 때 되면 깨어나겠지.”

나미아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앞장섰고, 브란디에고는 사과를 두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히도 착한 성격이었다.

소녀가 깨어난 것은 여관을 목전에 둔 때였다. 소녀는 자신이 업혀있다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멍한 상태에서 얼굴을 들어 앞을 보았다. 베이지색 건물에 장미넝쿨이 그려져 있는 큰 건물이었다. 소녀는 가물가물한 눈에 보이는 건물의 입구를 보았다. 입구의 위에는 큰 간판이 걸려있었고, 그것으로 소녀는 그 건물이 뭔가 장사를 하는 가게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소녀는 그 간판을 소리 내어 읽었다.

“환상여관… 위시?”

나미아는 고개를 홱 돌려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다시 피곤해진 듯 눈을 감으며 브란디에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고, 브란디에고와 나미아는 당황한 눈빛을 교차했다. 소녀는 간판에 숨겨진 글자를 읽었다. 브란디에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 손님입니까?”

나미아는 떨떠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 그런 것 같은데…?”

대체 왜 나미아를 공격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소녀는 여관 WISH의 일곱 번째 특별손님이었다. 나미아는 정말 특별한 경우도 다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리고는 브란디에고에게 말했다.

“디에고. 5층에 G1호실이 있어. 거기에 눕혀놔. 그리고 페네디 불러서 적당히 씻겨 놓으라고 전해줘.”

“아, 네.”

“거참 희한하네? 왜 손님이 날 공격하지?”

나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브란디에고는 마찬가지 동작을 하면서도 소녀가 흘러내리지 않게 다시 추스르고는 여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참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일격에 죽이지 않기를 잘했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목을 감싸드는 소녀의 정체를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체 무슨 사연을 가진 걸까?

오디는 5G1호에 눕혀진 소녀를 보고는 나미아의 설명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근의 손에는 브란디에고가 챙겨둔 단검이 들려있었다.

손잡이까지 금칠을 한 단검에는 기묘한 무늬와 함께 작은 보석들이 여럿 박혀있었다. 그 무늬에 얽혀서 칼과 맞물리는 지점에는 ‘T?R’이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디 귀한 집의 자식 같았다. 복장이나 용모를 보면 상당히 지저분해서 그런 걸 느끼기 어려웠다는 게 문제였지만.

오디는 나미아에게 말했다.

“상당한 사연이 있을 것 같네요.”

“응. 그런데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을까?”

“예? 글세요. 나미아 님 같은 용모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지? 그렇다면 사람 착각한 건 아니라는 거야. 그런데 저 꼬마는 나한테 ‘죽어엇!’이라고 꽤나 원한에 찬 피맺힌 외침을 질렀거든? 손에는 단검을 들고서 날 찌르려는 확고한 태도로.”

그 이야기는 브란디에고에게 들었다. 오디는 단검의 칼집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고는 짐작 가는 데가 있을까 생각했다. 이켈라인 상회가 커진 만큼 원한이야 여기저기 많았지만 저런 소녀가 원한으로 회장을 암습할 정도의 원한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디는 같은 문제에 대해 열심히 고심하는 나미아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무슨 일을 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안했어. 혹은 어떤 것이든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런 꼬맹이한테 원한 살 그런 일은 안했어.”

“꼬맹이는 아닌 듯해요. 적어도 16세 정도로 보이니까요.”

“흥, 내 나이에 비해선 한참 꼬맹이지. 내가 저 애의 추정연령이었을 때는 저 아이의 현할아버지도 태어나지 않았을 걸.”

그건 그렇지. 오디는 그렇게 납득하다가 문득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샜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도 있던 일이라 오디는 자연스럽게 다시 화두를 돌렸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손님이니까 일단 의뢰를 들어줘야 하겠는데, 저 아이의 목적이 날 죽이는 거면 내가 죽어줘야 하는 일이잖아. 으음… 나도 너처럼 죽었다 살아날 수 있을까?”

“글쎄요. 아웃사이더에게 리저렉션이 통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요. 그리고 별로 좋은 방법도 아니잖아요. 죽지 마세요. 슬퍼할 사람 많아요.”

오디는 우려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미아가 죽으면 먼저 오디가 제일 크게 슬퍼할 것이며, 그 다음에 그녀의 가족들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할 것이다. 나미아는 진심이 들어있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생긋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었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마. 어쨌든 손님이니까 일은 해결해야 하잖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지.”

“저 아이의 정신을 들여다볼까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미아는 이 매력적인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확실히 손쉽고도 좋은 방법이었다. 오디에게 있어서 정신을 읽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나 다름없었기에 힘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나미아는 손님의 정신을 읽고 싶지 않았다.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스스로 이야기해야만 그 고난에 대한 각오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니. 스스로 말할 때가 있을 거야. 손님이니까 손님으로 받아 줘야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는 조심하세요. 어쨌든 한 번 죽이려고 했으니 다음도 있을 거예요.”

“흥. 이 나미아 이켈라인, 라이니시스 루 이켈라인의 장녀로서 그리 쉽사리 죽을까 보냐.”

‘아버님과는 별로 상관 없는 문제지만요.’

오디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대신 그냥 살포시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암튼 이번엔 좀 특이한 손님이 온 것 같았다. 빈센트, 안테르지오 이후로 두 달 만에 온 손님이었다. 이 전의 손님만큼이나 복잡한 일을 달고 오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비록 나미아 님을 죽이러 온 손님이라는 사실이 좀 걸리지만.’

죽음의 불청객. 오디는 스스로 떠올린 말에 대해 재미있어하다가 이내 그 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죽음을 겪었던 그녀에겐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나 죽었다 깨어난 과정이 확고해서 오히려 충격으로 다가온 것보다 그냥 기절했다 깨어난 기분이었다.

나미아는 주욱 기지개를 펴고는 생기가 가득 찬 눈으로 말했다.

“자자, 그럼 손님이 깨어나기 전에 일해야지? 오디야. 일하자! 일!”

“아, 네. 알았어요.”

손님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오디는 나미아가 일할 의욕을 찾았다는 것에는 손님의 존재에 감사해야 했다. 일을 미뤘다가 한 번에 처리하는 나미아의 성격엔 그리 감사하지 않지만.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6월 3일.

‘티나세르 라르지엔’은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르는 침대 위에 앉아서 모르는 방의 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낮선 옷이 입혀져 있었고, 그녀가 입었던 기억이 있는 옷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침대 옆의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단검도 그 위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두 달이나 씻을 수가 없어서 꾀죄죄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던 그녀였는데, 어느새 그녀의 피부는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어깨를 살짝 덮는 머릿결도 푸석푸석했던 날이 대체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게다가 은은한 박하향까지 나고 있었다.

거울을 찾던 그녀는 무심결에 자신의 옷차림을 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아앗…!”

하얀색의 넉넉한 잠옷을 입고 있던 그녀는 누군가가 옷을 갈아입혔다는 생각-실은 곱게 개어져 있는 옷을 볼 때 깨달아야 했지만-에 깜짝 놀라며 손을 가슴께로 모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당황해했고, 그녀의 당황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방의 문이 열렸다.

찰칵. 끼이이….

“어머, 벌써 일어났구나.”

“…….”

티나세르는 멍하니 하얀 머리카락을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놀라운 용모의 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성장해서 저렇게 되기에는 천년도 더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게 하고, 실제로는 그 아름다움에 눌려 고개를 숙이게 하는 미녀였다. 오디는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해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잠자리는 편했니?”

“에, 저기… 예에.”

“그래. 다행이네.”

오디는 생긋 웃고는 창문으로 다가가서 커튼을 열었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방을 밝혔다. 티나세르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목 뒤에서 가지런하게 묶은 머리는 하얀 물결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유백색의 머릿결은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깔끔해보였다. 방금 짜낸 우유같은 신선한 색이었다.

티나레스는 한참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퍼뜩 이곳이 어딜까 생각이 들었다.

“저어… 여긴 어디죠?”

“여기? 여긴 여관이고, 이름은 WISH라고 한단다.”

“제, 제가 왜… 여기 있죠?”

“흐음…. 나도 잘 모르겠어. 단지 마스터가 널 데리고 와서는 깨끗하게 씻기라고 했거든. 아, 맞아. 널 씻긴 사람은 페네디라고, 이 여관의 플로어 매니저야. 단정하고 성실한 멋진 여성이지.”

페네디가 들었다면 고개를 숙이며 겸양을 표했을 말이었다. 티나세르는 여성이라는 말에 내심 안도했다. 남자가 자신의 몸을 씻겼다면 수치심에 죽을 것 같았다. 오디는 커튼의 정리를 끝마치고서는 티나세르에게 다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티나세르가 내밀어진 하얀 손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오디라 생긋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씻지 않겠니? 아침식사도 해야 하니까.”

“예…에.”

티나세르는 오디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는 침대에서 나왔다. 오디는 침대의 맞은편에 있는 문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처음 쓰는 사람은 다소 어려워할 수도 있는 욕실의 구조를 세심하게 설명해준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오디라고 한단다. 넌 이름이 뭐니?”

“전… 티나세르라고 해요.”

“티나세르…. 예쁜 이름이네. 갈아입을 옷은 문 앞에 둘 테니까 그걸로 입고서 나오렴. 혹시 달걀 싫어하니?”

“아, 아뇨. 좋아…해요.”

“그래? 다행이네. 난 달걀요리에 꽤 자신 있거든. 맛있는 아침식사가 될 거야. 후훗. 자, 그럼 들어가서 씻으면 나중에 나와서 보자.”

“예, 예에….”

오디는 즐거운 듯 이야기 했다. 티나세르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오디가 시키는 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혼자서 쓰기에는 조금 큰 욕실을 보며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분명 나미아 이켈라인에게 단검을 쥐고 달려들었던 것 까지만 기억이 났었다. 그 뒤는 어렴풋이 ‘환상여관 WISH‘라는 간판을 본 것 같았고, 일어나보니 여기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티나세르는 곰곰이 생각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을 서서 고민하던 그녀는 어떻게 되었든 일단 씻고 보자는 생각에 욕실로 들어갔다. 식사라도 하면서 물어보면 오디라는 여성이 친절하게 답해줄 것 같았다. 수도꼭지를 틀자 차가운 물이 내려와 세면대 위로 흘러갔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언제나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 말이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충분히 신뢰를 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믿는 것이 더 좋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가 철저한 준비, 혹은 즉흥적 계획으로 그 신뢰를 배반할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자신은 큰 피해를 입고 신뢰하기에 앞서 불신감이 먼저 들기 마련이다. 부정적 사고방식은 그리 좋지 않지만 커다란 신뢰의 배신을 당한 사람이나 여러 번 배신을 당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람을 신뢰하기 어려운 법이다.

티나세르는 오디를 믿어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눈앞에서 모락모락 김을 내는 스크럼블 에그는 오디의 말대로 자신 있는 요리법으로 탄생한 것 같았으며 그녀가 꽤나 좋아하는 메뉴였다. 그러나 그녀의 자리 건너편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고, 아직도 그럴 의향이 충분한 사람이다. 오디는 그 사람의 부하 같았고, 대개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같은 방식을 적용한다는 걸 믿고 있는 티나세르는 이 달걀요리에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비약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오디는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는 스크럼블 에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티나세르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저런… 내가 너무 익혔나 보구나. 조금 덜 익힐 걸….”

“예? 저기, 그게 아니….”

“그래? 그럼 역시 후추를 취향대로 뿌리게 할 걸 그랬구나.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것도 아닌데요….”

오디는 그럼 왜 안 먹느냐는 듯이 티나세르를 바라보았다. 티나레스는 오디의 눈을 보면서 차마 위험물질이 조미료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오디의 표정에는 그 어떤 음모의 빛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들어서 조심스레 스크럼블 에그로 접근시켰다. 몽글몽글하게 볶아진 계란을 조심스레 떠올린 그녀는 잠시 번민하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젠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스크럼블 에그를 응시하는 소녀를 보던 나미아는 자신의 접시에 있는 요리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독은… 없어.”

“히익!”

딸그랑!

“…없다니까 그러네.”

‘독’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티나세르는 그만 스크럼블 에그를 포크채로 놓쳐버렸다. 나미아는 피식 웃었고, 오디는 떨어뜨린 포크를 주워올렸다. 그녀는 신경쓰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새것으로 가져다줄게.”

“죄, 죄송합니다….”

“그냥 닦아서 먹으면 되잖아?”

“나미아 님. 세상 사람이 전부 나미아 님 같진 않아요.”

“그래, 그래.”

나미아는 스크럼블 에그를 우물거리며 포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디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서는 주방으로 들어갔고, 티나세르는 고개를 푹 숙인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미아는 마지막 조각을 들어 올리고서는 미약한 김을 내뿜고 있는 티나세르의 접시를 보며 말했다.

“안 먹을 거니?”

“…….”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먹고 이야기 하자고. 보아하니 배고픈 것 아냐?”

꼬르르륵….

티나는 얼굴을 화악 붉히며 배를 잡았다. 향긋한 음식냄새에 그녀의 위장은 정신을 배반했다. 나미아는 시기적절한 소리에 깔깔거렸다.

“꺄하하하! 와아! 나이스 타이밍! 까르르륵!”

“…….”

“나미아 님. 애 놀리지 마세요. 당연한 현상가지고 놀리시기는.”

“하, 하지만 웃기는 걸. 꺄하핫!”

오디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새 포크를 티나세르의 앞에 놀려두었고, 티나세르는 조심스레 스크럼블 에그를 들어올렸다.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서 우물거리던 티나세르는 정말로 자신있어할 정도의 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낸 배에 대해서는 별개로 원망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물론 자신의 위장도.

나미아는 식사시간 내내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모든 요리는 오디가 주방에서 만들어오고 있었고, 티나세르는 처음보다 상당히 안심하면서 음식을 먹을 수가 있었다. 독은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식사시간의 불안감을 제외하자면 상당히 훌륭하게 진행된 아침식사였다. 적당한 양에 훌륭한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식후 한 잔의 차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여기는 나미아는 느긋한 태도로 툰드라에서 가져온 이끼 차를 마셨다. 재료의 이름이 가져다주는 위화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깨끗하고 신선한 향과 맛을 즐길 수 있는 차였다.

티나세르도 조심스레 오디가 가져온 차를 마셨다. 차를 내려놓은 오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미아와 티나세르를 독대하게 되었고, 티나세르는 한결 또렷해진 정신으로 눈앞에서 차를 마시고 잇는 사람에 대한 분노를 천천히 끌어올릴 수 있었다. 나미아는 한 모금 차를 마시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향의 여운을 즐기는 듯 눈을 감고 있던 나미아는 타이르는 듯 말했다.

“사람 상대로 쉽게 살기를 보내지 마.”

“…싫은데?”

“헷. 당돌하네.”

“당신에게 뭐라고 말 듣고 싶지 않아.”

티나세르는 어제의 분노를 되찾은 듯 보였다. 나미아는 놀라기 보다도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는 티나세르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너, 왜 날 죽이려고 하지?”

“몰라서 물어?!”

타앙!

티나세르는 거세게 테이블을 쳤다. 나미아는 그딴 위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코웃음 쳤고, 티나세르는 더욱 큰 화를 내려고 했다.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벼락같은 말이 튀어나오려 했을 때, 오디가 매우 익숙해 보이는 물건을 들고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

“나미아 님.”

“그래. 수고했어.”

“저, 저건…!”

티나세르가 경악하고 있을 때 나미아는 어제 충분히 살펴볼 시간이 없었던 단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반짝거리는 날이나 번뜩이는 칼집은 화려함과 위험함을 동시에 갖춘 물건이었다. 티나세르는 거의 발작할 듯이 소리 질렀다.

“그, 그 단검에서 손 떼!”

“싫어.”

“이…! 그! 그! 이잇!”

뭔가 할 말을 찾던 티나세르는 결국 아무런 말도 못하게 되었다. 나미아는 피식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티나세르를 바라보고는 단검을 도로 칼집에 끼워넣고서는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티나세르는 당황하면서 그걸 받아들었다.

“꽤나 가소로운 행동을 하더구나, 어제는.”

“뭐가 어째?!”

“티나세르라고 했던가? 죽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정말로 모른다고 하는 거야?! 엉?!”

티나세르는 분통이 터질 듯 화를 내었다. 당장이라도 단검을 꺼내들 것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나미아나 오디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티나세르를 무시했다.

“와. 오늘은 차향이 좋은 걸?”

“예. 허브를 약간 섞었어요. 3:1의 조합이 제일 향이 좋아요.”

“그래? 역시 이건 혼합해서 마시는 게 좋은 걸까. 베이스로 마셔도 꽤 괜찮지만.”

“조금만 더 개발하면 충분히 상품화할 가치가 있어요.”

“무시하지 마!”

타앙!

티나세르는 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나미아나 오디는 둘 다 찻잔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게 흔들린 건 티나세르의 찻잔뿐이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둘 다 위험하게 흔들리는 찻잔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티나세르는 분노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소리 질렀다.

“네, 네가 한 일을 정말 모른다는 거야?! 그, 그따위 일을 해놓고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야앗?! 제가 저지른 일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악!”

“시끄러 꼬맹이.”

그러잖아도 티나세르는 이미 숨이 차서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티나세르는 조용하고 확고한 말에 입을 다물었고, 나미아는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내가 뭘 했는지 모르지만 일일이 기억할 것 같아? 꼬맹아. 네가 너 자신에겐 특별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선 길가에 걸어가는 다른 꼬마들하고 다를 게 없어.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해서 남들이 널 기억하리라는 착각은 그만 두는 게 좋아. 뭐, 어린아이들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무, 뭐라고…!”

“대화는 소리 지르며 하는 게 아냐.”

화악!

나미아는 짧게 피어를 터뜨렸고, 티나세르는 순식간에 기가 죽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반응에 나미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유야 어쨌든, 너 날 죽이고 싶냐?”

티나세르의 눈에 다시 분노가 차는 걸 본 나미아는 충분한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팔짱을 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죽여 봐.”

“뭐?”

“열심히 시도해 봐. 방법은 뭘 해도 상관없고, 필요한 물건은 오디가 지원 해 줄 거야. 단, 한 번의 시도 실패마다 여관에서 무임으로 하루간 일해라. 네가 죽거나 포기할 때까지 죽인 횟수가 누적되니 그런 줄 알아. 열 번마다 3일의 패널티를 적용시킬 테니까 만약 50번 실패 하면 65일간 일해야 한다는 걸 알아둬.”

티나세르는 대체 나미아가 말하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죽여보라도 순순히 말하는 사람이 있던가? 대체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일까? 나미아는 약간 혼란스러운 티나세르의 표정을 보며 싸늘한 미소로 말했다.

“단, 순순히 죽어주진 않는다. 복수는… 글쎄, 네 실패에서 생기는 좌절이 나의 복수가 되겠군. 한 번 열심히 죽여 봐. 죽어 줄지는… 역시 글쎄로군.”

나미아는 의미심장하게 티나세르를 훑어보고는 뒤를 돌아서 걸어갔다. 그녀는 뒤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마지막으로 말꼬리를 붙였다.

“시간은 지금부터다. 시작! 힘 내, 죽여주는 손님. 굳게임!”

여유 있는 나미아의 뒷모습을 티나세르는 허망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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