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Guest.Supplementary story: 멋있는 손님. (33/49)

환상여관 WISH 4권

Guest.Supplementary story: 멋있는 손님.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4월 4일.

브란디에고 루 세스칸추는 1년 전에야 성룡이 된 골드 드래곤의 신예였다.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착해도 너무 착하다는 평가를 칭찬으로 받아오면서 살아온 그는 너무 착했기 때문에 부모와 친척들이 말하는 말의 이면까지 살필 주변머리가 없었다. 단지 그는 착하다고 할 때의 표정이 왠지 좀 안타까움을 동반했다는 것만 느낄 뿐 다른 사람이 그러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성룡이 되어 레어를 가질 때 단지 현재 남는 자리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북쪽 산맥에 자신의 레어를 만든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드래곤은 현재 나미아의 앞에 앉아서 종족이 무색하다고 할 정도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여 그녀를 화나게 하고 있었다.

그가 이러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해츨링 시절부터 레드 드래곤에 새로 태어났다는 엄청 특이한 드래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그가 성룡이 되어서는 자기보다 500년이나 먼저 산 블랙 드래곤의 문제아였던 체리랑스 루 번타리스를 척살하였다는 말도 들었다.

라이니시스 루 이켈라인이라는 이름의 레드 드래곤은 그후 레어에 칩거하면서 알 수 없는 복잡한 사정에 의해 블랙 드래곤이 되어버린 두명의 엘프 아내에게서 6명의 자식을 얻어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 일족의 대 경사를 치러낸 경력도 있었다. 현재는 육아활동 때문에 그 모습을 외부에 보이고 있진 않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행적은 신예 드래곤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그의 영웅담에 가까운 업적을 들으며 자란 브란디에고는 아버지만큼이나 유명한 두 양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나미아 이켈라인과 오디 미아 싸이 이켈라인이 그 둘이었다. 블랙 드래곤과 레드 드래곤의 피를 받은 블러드 스폰이자 알 수 없는 능력으로 무장한 첫째 양녀와 정신의 정령이 죽은 신의 파편이라는 육체를 얻어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된 마, 성, 정의 힘을 한 몸에 갖춘 둘째 양녀가 힘을 합치면 어지간한 신예 드래곤 정도는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시 말해, 브란디에고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아까의 무례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죠?”

“그렇지만 어떻게든 사과를 하는 편이….”

다른 종족이었다면 자는 모습을 보았든 어떤 모습을 보았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미아는 이미 반쯤 드래곤이었고, 또한 그녀에게 저지른 무례는 곧 라이니시스에게 저지른 것과도 같았다. 여러 의미에서 브란디에고는 간곡한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놓고서는 기껏 사과만 하고 앉아있는 그를 나미아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너무 예의바르고 착한 건지, 아니면 비굴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미아는 눈꼬리를 추켜올리고서는 약간 화를 내듯 말했다.

“알았어요. 용서할게요. 아빠한테도 아무런 말 안 할 테니까 그 놈의 무례소리 좀 그만하고 사과는 딴데 가서 사먹으라고욧!”

“예, 예엣!”

브란디에고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미아의 용서(?)를 받았다. 나미아는 그런 브란디에고를 보면서 골드 드래곤을 가리켜 ‘순둥이 금딱지 도마뱀’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갓 성룡이 되었다고 해도 저렇게나 순하고 바보 같아서 어찌 살려나? 나미아는 이 골치 아픈 손님의 용건이 뭔지 일단 듣고서 얼른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순해 빠져서 착하기만 해 고지식함으로 발전해버린 성격은 악의가 없이 사람의 분통을 터지게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 나미아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란?”

“저… 오디 씨에게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는 일을 하고 계시죠?”

“예. 그래요.”

성족과 카르마에 관련된 이야기는 그냥 넘기고 대충 대답하는 나미아였다. 브란디에고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제 사정도 좀 해결해 주실 수 있겠군요. 가능하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떤 사정인데요?”

나미아는 골드 드래곤이나 되는 존재가 해결 못할 일이 있냐는 표정으로 솔직한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브란디에고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예? 사람이요? 어떤 사람이요?”

“그러니까… 제가 150년 전에 잠시 바깥 세상에 나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곧 성룡이 되겠지만 바깥세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는 호기심이 너무 컸지요. 일주일 정도 뒤에 어머니께 잡혀 돌아가긴 했지만… 그 일주일의 시간동안 제가 만난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미아는 약간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브란디에고를 쳐다보았다. 해츨링 시절에 가출을 했다는 소리를 솔직하게 하는 드래곤도 있던가. 해츨링의 가출은 곧 부모의 관리 소흘로 이어지며, 이것은 곧 그 일족 전체의 흉이 된다. 해츨링 시절은 갑옷보다도 단단한 드래곤의 비늘이 아직 완성되지 않을 때라서 길가다 휘둘러진 칼에 맞아 절명하는 어이없는 죽음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나미아는 일단 그 문제에 대해선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분명 본인도 많이 혼났을게 분명하니 한심천만한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상호 대화에 좋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부탁에 대한 결론을 간단하게 내렸다.

“다시 말해, 사람 찾기군요?”

“예. 그렇습니다.”

나미아는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특별손님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면식이 있는 사람들에겐 이곳은 그냥 단순한 사적인 공간이니까. 브란디에고는 드래곤답지 않게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절실한 어감이 깃든 말을 했다.

“부탁드립니다.”

오디는 약간 복잡한 표정의 나미아를 보면서 저래도 결국 나미아가 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란디에고는 은인이었고, 드래곤이었으며, 라이니시스와의 일면식도 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거절합니다.”

나미아는 확고한 태도로 말했다. 보통 거절할 때는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하고, 상대방의 의를 상하게 하지 않고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방법의 표준이지만 나미아는 그런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것이다.

브란디에고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감히 한낱 인간…’ 운운하지는 않았다. 특이하게 착한 골드 드래곤이면서 인간사회에서도 통용될 예절을 갖추고 있는 그는 정중하게 나미아에게 물었다.

“이유가 있으십니까?”

“있어요. 대략 세 개 정도군요. 첫째. 이곳은 소원을 수리하는 곳이지 심부름센터 같은 다목적 사무실이 아닙니다. 둘째. 드래곤이죠? 능력은 갖추고 있을 텐데요. 저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도와주지는 않아요. 지금까지의 모든 손님들은 전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의뢰하기 위해 왔어요. 능력도 되는 존재께서 굳이 저희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 군요.”

여기까지는 꽤 괜찮은 이유였다. 여관의 설립목적에도 맞고, 사리에도 맞다. 그래서 브란디에고는 셋째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유-일 것이라 생각하고서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미아의 옆에서 브란디에고와 같은 준비를 하고 있던 오디는 오늘 두번째의 희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미아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더니 다리를 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셋째. 이게 꽤 중요한 건데요, 전 절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을 도와주진 않아요. 분명 그 고대의 도시에서 시기적절하게 모두를 구해준 것은 결국 전 과정을 보고 있었다는 소리지요. 그 말을 풀이해보면 당신은 처음부터 우리의 모든 행적을 보고 있었고, 도와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뭐, 안테르지오의 의념을 부숴버린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럴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도와줬어야죠. 게다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서 터덜터덜 와서는 생색내고 있는 거예요?”

나미아의 쏘아붙이듯 내뱉는 말에 브란디에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아닙니다.”

“흐음…. 일단, 대화의 편이성을 위해서 편하게 이야기해도 될까요?”

오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건 말이 좋아 편이성이지, 실상은 말 놓겠다는 소리이다. 나미아의 배짱도 참 두둑하다고 생각하는 오디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골드 드래곤의 신예와 힐텐펜스의 사활을 건 대 격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브란디에고는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뜻이 뭔지도 모른 채-1000년의 수명이 헛되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하세요.”

나미아는 대번에 말을 놓았다.

“좋아. 이봐, 브란디에고. 너도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뭔가의 일이 있는데 그 과정을 처음부터 봤다고 쳐. 그러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드래곤인 너는 충분히 그 일의 흑백을 가려낼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가, 가능할 겁니다.”

“가능하다고 결정하겠어. 불만 없지? 좋아. 그 흑백이 갈려진 일에서 옳은 편에 서는 것이 너희 일족의 의무 아니었던가? 혹은 내가 알고 있는 드래곤의 성격이 많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겠군. 열심히 구경하다가 자기 몸 위험해질 것 같으니 냉큼 힘쓰고서 일 다 끝나고 나니 생색내러 오는 게 요즘 신세대 드래곤들의 모습인가?”

나미아는 브란디에고를 몰아치듯이 말을 쏟아놓았다. 해츨링 기간에 잠깐 가출했다고는 쳐도 1000년의 기간 동안에는 단순한 학습의 나날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경험이 부족하면 상황의 대처가 느린 법이다. 그것이 착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성룡이 되서 100년 정도 인간 세상에서 뒹굴다보면 산전수전 다 겪고서는 노련하다 보기에는 약간 부족하지만 대화의 분위기는 능숙하게 파악하고 조장할 수 있는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드래곤들의 모습이지만, 브란디에고는 이제 1001세에 인간사회의 경험이라고는 아예 없는 신출내기다. 성격도 착해 터졌으니 그의 나이에 반 밖에 안 되는 나미아에게 휘둘리는 것이다. 그 증거로,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정색했다.

“그, 그건 압니다. 단지….”

“단지, 뭐?”

“그냥 호기심만 들어서 구경만 하고자 했는….”

“이봐, 브란디에고. 내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불의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는 일단 그 불의를 막아야 하는 거 아냐? 최소한 너희 일족은 그렇다고 알고 있는데? 아냐?”

“그… 아닙니다.”

브란디에고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 나미아의 내면의 얼굴은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의 신출내기 드래곤이 아니라면 언제 이렇게 다 큰 성룡을 물 먹이겠는가? 오디는 그런 나미아의 내면을 생각하고서는 작은 탁식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가끔 그녀는 그의 아버지를 물 먹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착한 성격이 못 돼.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난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블러드 스폰이란 말이야. 정식 드래곤은 아니지만 너보다는 훨씬 오래 성인으로써 살아온 반 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무튼 그런 내 성격상 날 도와주지 않았고, 도와줄 생각도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건 마음에 별로 내키지 않아. 부당한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한 브란디에고는 나미아의 궤변이라고 할 수 있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고로 궤변은 정론이 아니되 반론이 없으면 정론이 되는 법. 나미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론으로 만들어버렸다. 순진한지 바보 같은지 그 경계점이 모호한 브란디에고였다. 나미아는 다른 변론이나 반론이 나오기 전에 자신의 말을 진실로 굳혀버리기로 했다.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난 못 도와줘. 사람 찾는 일이야 알아서 하라고. 마법을 쓰든 탐문을 하던 너의 일이잖아?”

브란디에고는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잘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나미아의 말에 뭐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미아의 말만 듣고 수긍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기에 나미아는 스스로가 만들어둔 상황에 매우 만족하게 되었다. 오디는 여기서 브란디에고를 도와주게 되면 나미아로부터 얼마나 시달림을 받아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다지 매력있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브란디에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제가 그럴 염치도 없이… 실례 많았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는 가려는 채비를 했고, 나미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예?”

“뭐… 인도적인 차원에서는 들어줄 수 없긴 하지만, 의뢰하지 않을래?”

“예?”

“그러니까, 우리는 돈을 받고 일을 해결하고 있다고. 돈을 내면 손님으로 대접해 드리지.”

오디는 이마를 짚으면서 한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드래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야말로 상인의 귀감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감동적이라거나 신비로움이 깃든 진귀한 장면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실컷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린 다음에 선심 쓰듯 거래를 청하는 모습은 어린애를 어르고 뺨치는 경우 밖에 되지 않았다.

브란디에고는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돈…이요?”

“그래. 드래곤 사회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이거든. 이래도 저래도 돈이야. 아니꼽더라도 돈을 지불하면 얼마든지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게 이 세상일이거든.”

황금만능주의에 찌들어있는 듯한 사람의 말투란 정말로 여유 천만에 재수 없기 그지없었다. 오디는 물씬 풍기는 그 비릿한 느낌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못하고서는 눈앞의 차만 홀짝이고 있었고, 브란디에고는 뭔가 큰 진리를 들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돈으로 해결 되는 일이었군요. 예. 좋아요. 돈을 드리죠.”

“오, 화끈하네? 좋아. 그러면 10만 펜으로 하지. 어때?”

“10만펜이요? 예. 알겠습니다.”

시원시원한 태도는 가히 드래곤답다고 할 수 있었다. 나미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여태까지의 모든 손해를 이번 한 방에 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붕 떠올랐지만 오디는 왠지 시원한 브란디에고의 태도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사람을 대하는 어눌한 태도나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순진한 구석이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생각 했을 때, 과연 10만 펜이라는 거금이 어떤 정도인지 알고나 있을까 싶은 의심이었다.

그녀는 브란디에고가 10만 펜의 가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켈라인 상회에 총무였고, 이래저래 큰 구멍이 생긴 상회의 지출내역을 보며 한숨을 내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브란디에고에겐 미안한 생각이지만, 일단 의뢰비용이 빵빵한 만큼 그녀는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브란디에고. 1001세의 골드 드래곤 신예는 사기라는 이름의 늪에 저도 모르게 발을 들이밀었고, 깊숙하게 빠져들어 버렸다. 본인이 어눌한 것을 탓해야 하겠지만.

‘착해가지고는 세상 살기 어려운 법이야.’

나미아는 오늘 큰 진리를 새삼 깨달았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4월 7일.

150년 전의 소녀였다면 지금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160대 중반내지 후반의 노인일 것이다. 나미아는 브란디에고에게 그 점을 충분히 설명했지만 그래도 브란디에고의 만나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소녀의 이름은 ‘베니슬라 아쿠힐드‘라는 다소 희귀한 편에 드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밤색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어차피 노인이 된 지금은 대체적으로 하얀 머리가 되었을 테니 이름과 나잇대만 가지고서 대상을 찾아야 하는 일이었다.

나미아는 의뢰인이 찾는 사람의 나이가 고령인 점을 감안해 오늘 내일 숨넘어갈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서 브란디에고가 알려준 곳, 동남해의 주인인 데베스 공국의 수도인 ‘세데스’의 이켈라인 상회 정보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노령의 여자를 찾으라는 지시서를 보내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조사 현황과 진행 보고를 하라 했고, 의뢰를 받은 당일부터 오늘까지의 연락을 받은 나미아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 말았다. 오디는 오늘 날아온 조사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베니슬라 아쿠힐드라는 이름의 여성은 130년 전에 세데스를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사이에그롭으로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두 명 더 발견되었으나 그들 모두 젊었을 적의 머리색이 금발과 흑발로써 지시하신 사람의 인상착의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보부에서 온 힘을 다해 기울인 조사의 결론은 현재 데베스 공국 내에는 회장님께서 찾으시는 노령의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이며….”

“…거기까지.”

“네.”

최고로 오래 살면 200살을 넘기고 몇 년 더 가는 인간의 일생이었다. 여행을 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관도를 따라 전 대륙을 여행 다닐 수도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한 도시에서 평생을 시작해 끝내는 사람도 있지만 젊었을 시절에 열심히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바꾼 사람들도 많다. 나미아는 그녀가 알고 있었던 사람 중에서 머기를 떠올리며 그 생각에 긍정했다. ‘머기 구스‘라는 이름의 무빙 캐스터였던 마법사는 원래 이름이 ‘머기 마르티구스‘였다. 마르티구스라는 성은 한때 마창기병으로서 호평과 악평 양쪽으로 공평하게 유명했던 이름이었고, 400년 전의 사이에그롭 마법학계에서는 금기와도 같았던 이름이었다. 그래서 머기는 자신의 성을 숨긴 채 마르티구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고, 현재는 당당히 사이에그롭 마법학계와 대륙 마법사 길드에 영광된 이름을 올리는 성과를 거두어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상의 편력을 떠올린 나미아는 자신에 대해 만족스러워 했다. 그리고 머기의 장례식에 참여했었던 기억까지 모두 떠올린 그녀는 그만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정작 떠올린 생각이라곤 아무것도 도움이 도지 않는 생각들뿐이었다.

“가명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겠군요. 요즘엔 가명 한두 개는 있어야 세상 살기 편하다고 하던데요?”

“오디, 시끄러워.”

“아무튼, 조사 대상 지역을 전 대륙으로 넓혀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일단 모든 지부 산하의 정보부에 같은 명령을 내려 둘게요.”

여기서 모든 지부란 전 대륙을 의미한다. 원래 살고 있던 지역에서의 행방이 묘연한 이상 조사 범위를 광범위하게 늘릴 필요가 있었다. 탐색 대상이 데베스와 정 반대 지역에 있는 에디킨츠 왕국에 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남은 시간은 11일이었다. 브란디에고는 의뢰를 받은 시점으로부터 15일까지라는 날짜 제한을 제시했다. 왜 그렇게 시간을 정했는지 모르지만 일단 돈을 받고 의뢰를 받은 이상은 확실하게 날짜를 지켜야 했기에 나미아는 앞으로 남은 11일 동안 브란디에고의 추억의 여성을 탐색해내야만 했다.

현재 브란디에고는 4층의 특별 객실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특별손님에 한해서는 숙박비 면제에 5층에 주거하는 권한을 부여하지만 나미아는 이 손님이 연줄(?)로 타고 들어온 손님이라는 점과 갑부 이상의 갑부를 대변하는 드래곤이라는 점을 들어 확실하게 뜯어먹겠다는 태도를 취하여 그곳에 머물게 한 것이다. 하루 숙박 요금이 15펜에 달하는 고급 객실이었다.(여관 WISH의 최고 싼 객실은 2층의 1인실로 하루 20길을 받고 있다. 특별 객실의 가격을 길로 환산하면 그 100배인 1500길이다.)

손님은 왕이며, 언제나 옳다(Customer is always right). 서비스 업종에서는 불변의 법칙으로 통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서비스를 뛰어나게 해도, 최고급의 시설로 치장한다고 해도 손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건 틀린 것이다.

서비스 업종은 평판으로 먹고 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손님의 만족도에 따라서 그 평가가 나뉘게 되는 세심한 업종이었다. 나미아가 16일째에 베니슬라를 발견했고, 그에 들어간 노력이 설령 전에 없을 정도라고 해도 브란디에고가 제시한 15일을 넘기면 모든 게 무효다.

비록 그녀가 브란디에고에게서 왕창 뜯어낼 속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손님이었고, 그가 제시한 시간 내에 모든 걸 끝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프로를 뛰어 넘은 상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녀는 11일이나 남았다는 여유보다도 11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을 가지고 있었다. 손님이 제시한 날짜 제한이 1세기라고 하더라도 여유를 가져선 안 된다. 이것이 나미아의 생각이었다.

“에휴…. 조금 까다로운 걸. 대륙 전역에서 1명을 찾는 일이라니….”

사막에서 바늘 찾기를 해도 이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미아는 보고서를 정리하여 봉투 안으로 집어넣은 뒤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집무실에 있는 의자는 장시간 업무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편안함을 추구하게끔 되어 있었다. 그녀는 측면에서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살을 맞이하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잠깐 지나쳤을 뿐인 사람을 찾는 거지?”

1만 2천년 정도 되는 드래곤의 생애에서 1주일의 시간은 짧고 짧은 기간이다. 그런 시간에 만났던 사람이, 그가 아무리 해츨링의 가출이라는 특이한 상황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한들 다급하게 찾을 이유는 없었다. 대륙 전역이라는 개념을 적용해보면 15일이란 시간은 짧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해츨링에서 성룡이 되기 위한 밀레니엄의 시간 중에서 1주일. 그야말로 순간의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무슨 추억이 있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찾는 것일까? 나미아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물어보러 가볼까?”

브란디에고는 특별 객실에서 독서와 사색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시간을 때우는 방법으로는 고상하거니와 최고의 방법으로 손꼽히는 생각의 연동이었고, 그것으로 볼 때는 할일이 없다는 걸로 간주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심심함을 덜어준다는 기특한 생각으로 자신을 치장하고서 그를 찾아가 말상대가 되어준다는 지극히 착하지만 그 이면에는 숨겨진 사연을 듣겠다는 음흉함을 갖추고서 그를 찾아가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혹시라도 그 사정이 애절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으면 실컷 감정이입을 하면서 측은하게 여길 것이고, 비정함과 불쾌감으로 채워져 있으면 일을 함에 있어 껄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나중에, 베니슬라를 찾게 되면 같이 찾아가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된다면 무슨 사정일지 알게 될 테니까.

브란디에고는 아직도 연락이 없다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정심으로 무장하고 있어도 시간이 11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현실을 떠올리면 그 평정심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는 며칠 전의 꿈에서 베니슬라의 죽음을 보았다. 그 날짜는 14월 18일이었고, 그는 그 꿈이 예지몽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능력이 예지몽임을 감안하면 베니슬라는 확실하게 14일 18일에 손쓸 방도가 없이 죽게 된다.

“베니슬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는 눈앞에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리움이 깃든 말이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안녕? 많이 늙었네, 베니슬라.”

이것도 아니다. 시간이 할퀴고 지나간 그녀에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 건네는 인사 치고는 너무 악질적이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가워.”

뭔가 어색했다. 오랜 시간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브란디에고는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그가 읽는 책에는 헤어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적혀있었고, 그는 그 인사말들을 하나하나 습득해가는 중이었다.

베니슬라는 그에게 특별한 소녀였다. 해츨링인 채로 어머니 몰래 가출해 나와있던 일주일의 시간동안 베니슬라는 타인의 따스함을 알려 준 사람이었다. 세데스의 어느 폐가를 ‘비밀기지’로 정한 그는 그곳의 정원이 상당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폐가에 정원을 가꾸러 온 밤색 머리의 소녀와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가 가꾼 정원만큼이나 소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밖에 나오게 되었다는 말에 베니슬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를 오랜 친구처럼, 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거리로 데리고 나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알려주고, 식물들의 말없는 대화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었으며,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차가운 비의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순수한 모습으로 자신을 따스하게 감싸준 베니슬라는 그에게 있어 레어의 벽과 책, 정령들과만 노닐던 유년기 시절의 빛나는 태양과도 같았다.

아직도 그는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베니슬라를 만난 지 7일째 되던 날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찾아와 그를 데려갔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법으로 영상을 남겨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 강제로 집으로 돌아온 그는 크나큰 상실감에 빠져 성룡이 될 때까지 잠만 잤고, 성룡이 되어 레어의 정리를 끝내자마자 그녀를 찾아 나선 것이다.

“넌 여전히 아름답구나.”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의 꿈속에서 베니슬라는 침대에 누워서 미약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 숨결은 그녀의 생명을 점차 앗아가는 것 같았다.

만나게 되면 무슨 인사를 할까,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어떤 대화가 이루어질까.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자신으로 인해 상처입지나 않을까. 브란디에고는 그런 모든 일을 생각했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읽었던 여러 책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말을 하라고 했지만 너무나도 할 이야기가 많은 그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대감도 있었지만 불안감도 있었다.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알아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녀의 임종을 가까이 두고서 과연 자신이 슬픔에 무너지지 않을까, 임종 직전에 찾아온 어린남의 추억을 보며 그녀는 어떻게 이야기 할까. 불안한 미래였다. 그것도 너무나 가까운 미래의 일이었다. 어떻게 이야기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

그가 교본으로 삼은 책들은 너무 추상적이었고, 감정이입을 하기도 어려웠다. 역시 종족성의 차이 때문일까, 그리 쉽게 와 닿지가 않았다. 한숨을 푸욱 내쉬던 그는 자신에게 깊은 공감과 이해를 하게 만든 나미아의 말을 떠올렸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드래곤인 그녀라면 인간과 드래곤의 마음 양쪽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그 뒤를 이었다.

“나미아 씨라면 뭔가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

의뢰를 받을 때 그녀가 했던 말들은 적어도 그의 생각에서는 옳은 말들이었다.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던 그녀라면 옳은 말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친 그는 두번 생각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배우기로, 모르는 일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었기에 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나미아는 자신의 궤변론자적 자질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자신의 생각의 틀에 집어넣어 적당히 편집한 다음 상대에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멋진 재능이 있었다. 수많은 거래를 성사시킨 능력이기도 하며, 그 뒤끝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칭찬받을 능력이었다. 궤변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정론이 되어 굳어져버리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상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 능력이 편했으면 편했지 불편한 적은 없다고 여겨왔고, 그것은 그녀의 인생에서 불변의 진리로 인정되어 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약간의 회의감을 가지고 그 능력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미아 씨라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눈앞의 남자, 브란디에고하는 이름의 순진한 손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름대로 더 뻥튀기해 생각하고는 자신이 언제나 옳은 판단으로 행동한다는 결론까지 내려버린 것이다.

기대를 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기대감은 신뢰가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마음이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신뢰받는 걸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미아 역시 기대 받는 일에는 익숙했고,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대 받는 걸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브란디에고의 기대감에는 왠지 응해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인생의 축을 이루는 부분을 재점검할 필요성이 있다고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궤변도 사람이 너무 빠져들게 해도 안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너무 큰 기대감을 갖도록 자신을 치장하는 일도 지양해야겠다는 다소 철든 생각은 지금 상황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왜냐면 사건이 발생한 후에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흐음…. 유년기에 멋진 추억이군.”

“아름다운 시간이었지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추억은 미화되어 기억에 남지만 드래곤에겐 추억을 가지기 위한 전제인 망각이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을 재편집하여 그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정신활동이 없는 이상 그가 받은 느낌과는 별개로 그 시간들은 진짜로 아름다운 것들이었을 것이리라. 불쾌한 기억도 있겠지만 그것 보다는 그가 만족한 부분이 더 컸다.

어른이 되기 전에 겪은 일들 중에서 몇 가지는 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가 아닌 과거를 보는 눈으로 조용히 사색하며 즐길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가지게 된다. 대개는 그것이 브란디에고처럼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나미아는 자신의 유년기 시절 중에서 제일 크게 각인된 고대 유적에서 마물생성포가 발사되었던 일을 떠올리며 브란디에고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에 크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추억. 정말로 부러운 것이다.

“네가 본 책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었지?”

“네. 하지만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어떤 것부터 해야 할지….”

브란디에고의 지금 모습은 마치 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만나게 된 성인 남자의 그것과도 같았다. 쑥스러워하고, 어색해하면서도 과거와는 많이 변해있을 것에 자신의 추억이 퇴색되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상대를 만난다기에 크나큰 기대를 가지는 모습이었다.

나미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책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평범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를 생각에 빠져들게끔 유도했다.

“그걸 잘 갈무리 해봐. 종이에 적어가면서 말을 정리하는 것도 좋아.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 말도 못한다는 건 결국 순서의 문제거든. 어떤 것부터 먼저 할까 생각하면서 말을 정리해. 그렇다고 결정하지는 마. 어떤 말을 먼저 할까 정리하라는 말은 아니야. 이런 저런 말을 생각하고 그걸 말하겠다는 결심만 필요해. 그리고 나머지는 재회의 자리에서 알아서 떠오르게 될 거야.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말은 이런 뜻이거든.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다음 그 상황에 따르라는 거지.”

“아아…. 그러면 되겠군요.”

나미아가 제시한 것은 평범한 생각의 정리방법이었다. 단지 그런 간단한 방법이라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상대가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정해지게 된다. 나미아는 그런 방식으로 브란디에고를 사색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 뒤에 그녀는 자신의 사색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브란디에고의 과거는 아름다웠다. 망각이 없는 드래곤의 이야기인 만큼 그것은 사실로써 남아있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곁들여진 그의 느낌은 마치 현재 겪고 있는 듯한 생생함을 불러 일으켰고, 나미아는 순간 이런 좋은 드래곤에게서 나쁜 생각을 품고서 돈을 뜯어낼 생각을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 같았다. 아마도 브란디에고의 이야기가 10분쯤 더 진행되었으면 실컷 감정이입을 한 나미아는 의뢰비용을 깎아주겠다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의 순정에 돈을 들이대는 일은 정말이지 지저분한 것 같았다.

아름다운 과거는 조금 덜 아름다운 현실에 깨어지기 마련이지만 그건 결심한 사람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막연한 기대감이나 미래를 단정 짓고서는 행동하는 사람들이나 좌절하는 것이지, 브란디에고같이 자신의 모든 생각을 끌어안고 결심한 사람들에겐 그런 문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품는 감정 중에 하나는 신기한 장난감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시선과도 같은 것이다. 나미아의 속에 있는 드래곤적 사상은 그것을 절반쯤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속에 있는 인간적 사상은 그런 사상의 이해를 뒷받침했다.

엘프나 드워프나 늑대인간 같은 비인간 종족은 각자의 정해진 사고관이 있다. 각자의 성격은 다르지만 어떤 때는 어떻게 한다는 패턴이 그들의 사고관 속에 들어있었다. 그들의 방식은 정해진 것이며, 그것은 고쳐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발전이 느린 것일 수도 있었다. 인간의 피를 받아들인 늑대인간은 그 굴레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지만 그만큼 종족의 색이 희미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인간은 다르다. 인간의 사상은 그 사람만의 것이며, 가끔 하나의 사상 아래 공감한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인간은 그 하나하나가 각각 다르면서 작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그 유년기 성장에 따라서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었다. 엘프와 가까이 지낸 인간은 엘프의 사고관을 가지게 되며 드워프화 함께 자란 인간은 드워프의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 다른 종족들은 어디서 자라든 그 기본 사고관이 바뀌지 않는데 반해 인간은 무수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가능성 중에서 인간은 언감생심 최강의 종족에 대한 도전을 꿈꾸게 되었고, 역사상 많은 인간들이 드래곤에게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또는 건방지게 드래곤에게 거래를 걸기도 하고, 그중 몇몇은 드래곤의 친구가 된 적도 있었다. 제 4문명기 전체에서 몇 안 되는 인간들뿐이지만.

드래곤에게 있어서 무지렁이에서 동등한 친구까지 다양한 위치가 될 수 있는 인간은 호기심 가는 존재다.

브란디에고의 경우는 베니슬라라는 소녀를 친구 이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친구를 뛰어넘은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그녀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죽음은 모든 걸 뛰어넘는 단절이었기에 그는 바퀴가 구르지 않는 수레를 탄 사신이 그녀를 태워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은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미아는 이 말을 묻지 않고 넘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브란디에고에게 물었다.

“상처받지 않겠어?”

“예?”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알다시피, 자연스러운 죽음은 드래곤도 막지 못해. 어린 시절의 추억의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슬픈 일이거든. 가끔 보고 싶어질 떄도 있어. 그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이 생각나면서 미소 짓지만 다신 만날 수 없다는 기분이 짓누르지. 차차 추억이 되면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넌 그럴 수가 없잖아. 추억의 다이어리는 갱신되지 않지. 그건 슬픈 일이야.”

나미아는 자신이 과거에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눈앞의 드래곤은 너무나 착했다. 아직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지 않은 어린 성룡이었다. 슬픔을 느끼고서 자신을 버려둘 수도 있었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친한 이를 잃는 슬픔 앞에 당당할 수는 없는 법이다.

브란디에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만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말리진 않을 게.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진 않지만. 베니슬라라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찾고 있으니까 조만간 좋은 연락이 있을 거야. 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브란디에고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라 그런지 나미아의 태도는 매우 배려 깊은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브란디에고는 역시 그녀는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실 된 감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아, 아냐. 손님의… 손님의 일인 걸 뭐….”

나미아는 그의 미소를 보자 그를 황금덩어리로 본 자신의 생각에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살짝 빨개진 얼굴을 찻잔으로 가리고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브란디에고는 그것이 겸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더더욱 나미아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순진한 사람을 속이는 괴로움.

나미아는 오늘 따라 깨닫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4월 13일.

나미아와 오디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켈라인 상회의 전력을 부어도 사람 하나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일까.

정보부는 급조된 것도 아니고 만들어진지 200년은 되는 조직이었다. 이켈라인 상회가 망하더라도 정보부만 있으면 그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전 대륙을 상대로 한 전문 정보기관이었다. 그 어떤 국가의 정보, 첩보기관이라고 할지라도 이켈라인 상회만큼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이리켄 정보계의 정설이었다. 따라서 뒷세계의 정보망마저도 좌지우지하는 이켈라인 상회의 정보부가 총력을 기울여서 삽질하고 있다는 소식은 나미아와 오디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베니슬라라는 여성은 혹시 카르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미아는 자신과 오디가 불가해의 영역으로 설정한 카르마에 빗대어 베니슬라를 평가했다. 오디는 농담이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적절한 비유에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조사가 시작된 지 일주일째 되던 때까지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말에 오디는 특단의 조치로 공동묘지에 올라간 이름까지 조사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나미아는 그쪽에서의 성과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브란디에고는 그녀가 살아있다고 단정 지었으니 그녀는 살아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란디에고는 나미아와의 대화로 마음속부터 평정심을 얻었으나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평정심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미아 역시 이 정보조직이 연간 수십만 펜의 예산만 까먹는 불필요한 집단이 아닐까 싶은 의심이 무럭무럭 자란고 있음을 느꼈지만 점점 자책과 자신들의 쓸모없음을 증명하는 정보부의 조사서는 보는 이를 측은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요 3일 간, 정보부에서 보낸 조사서의 말머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감히 용서를 부탁드리오며, 전일과 금일의 조사보고를 올립니다.]

죽은 사람도 아니다. 가명도 치밀하게 조사했다. 밤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여성의 모든 조사를 다른 지부의 정보부와 연계하여 필사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나 그 대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제발 기회를 더 주고 실망하지 말아 달라.

며칠 사이의 모든 조사보고를 요약하면 위와 같은 애절함이 깃든 문장들이 되는 것을 확인한 나미아는 차마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보고서는 보내지 말라는 간접적 실망의 의사를 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힘 내’라는 말이 되는 지시서를 모든 지부로 보냈고, 오디의 감탄하는 눈빛을 받았다.

조사 범위는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이미 뒷세계의 모든 정보망을 풀가동하였고, 범죄자 리스트나 각 국 정보부의 1급 기밀까지 넘나들고 있었다. 나미아가 요 며칠간 거둔 성과는 이켈라인 상회의 정보부가 가진 정보망의 엄청난 범위의 확인이었다. 앞으로는 뭔가 조사할 때도 상당히 편할 것 같았다. 지금은 별로 쓸모없는 성과지만.

용서 운운하는 말머리로 시작되는 조사서는 그대로 패스한 채 오디는 다른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상회의 운용이나 각 국의 특별한 사정 등이 들어오는 정기 보고서였다.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물건의 수급 조절이나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서 지시를 내리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일과였다. 그렇게 보고서를 살펴보던 오디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으음… 제국 선황의 황후가 곧 죽을 것 같다더군요. 노화해 죽을 지경이니 곧 국장이 이뤄질 것 같다던데요?”

“황모(皇母)가? 조만간 격식 있는 장례복을 갖춰 입어야겠군. 조의금하고 위로품은 적당한 수준에서 알아….”

나미아는 의자에 등을 묻고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며 오디처럼 심드렁하게 말하다가 황급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디는 말끝이 흐려졌다는 걸 알고는 알겠다고 말하기 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미아의 표정이 의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디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황모의 나이가 몇이지?”

“예. 올해로 168세… 아?!”

오디는 퍼뜩 놀랐다. 황모의 나이라기보다도 과거에 봤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서는 그런 것이다. 나미아는 신중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젊었을 적에 봤지. 밤색의 곱슬머리였어. 정보부가 조사한 범위에 황모가 들어갔던가?”

오디는 고개를 저었다. 황모는 정보부에서도 생각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제국 선황의 황모는 120년 전 선황이 파격적으로 받아들인 출신성분을 알 수 없는 여성이었고, 그녀의 과거는 모두 불문에 붙여져 있었다. 그녀의 고향이나 가족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제국의 황모라는 직위 자체는 너무나 확실한 근거였기에 그녀의 과거는 현재에 눌려 정보부에서도 탐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미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디에게 명령했다.

“당장 황모의 본명을 조사해. 그녀의 과거 행적을 말이야. 제국 정보부에 첩자를 보내서라도… 아니, 이미 있잖아? 정정하지. 제국 정보부의 첩자를 늘려서라도 알아내. 당장.”

“예.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오디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서는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나미아는 오디가 두고 간 황모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밤색의 곱슬머리.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약간 조용한 듯한 성격 외엔 나미아는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 한 잔 같이 마신 기억도 없었고, 제국의 상권 분할로 왈가왈부하던 때였기 때문에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신경을 썼던 때였다. 게다가 황제는 그녀의 과거를 묻는 일에 매우 과민했기 때문에 아예 화두에 올리지도 않았다. 나미아는 스치듯 지나친 예감에 숙고했다.

젊었을 적 밤색의 곱슬머리, 160대 후반의 나이, 오늘 내일 하는 목숨이라는 세 가지 조건은 베니슬라에 근접한 조건이었다. 이제 그녀의 본명, 가장 중요한 그것만 알아내면 확실할 것이다. 그녀가, 황모가 베니슬라라면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도 증명된다. 이제 5일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 끝나기 전에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나미아는 솔직한 불안감을 느꼈다.

착한 브란디에고의 소원을 이뤄주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그의 기억은 끝맺음을 하지 못한 채 아쉬움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소원을 이뤄준다 해도 곧 죽을 사람을 만나게 하여 슬프게 하는 한이 있겠지만 이미 그는 각오한 일이다.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나미아에겐 개인적인 불명예로도 남을 것이며, 자신에게 보내준 신뢰를 본의 아니게 배신하게 되는 일이다.

“나미아 이켈라인의 자존심을 걸고, 반드시 찾아내겠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브란디에고의 기억을 이대로 끝나게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하고 불쌍한 일이지 않는가. 그녀는 손에 들린 서류를 노려보았다.

이번엔, 이번엔 확실할 것 같았다.

나미아는 진심으로-막돼먹었다고 생각하지만-제국의 선황이 죽어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예감이 적중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결과가 슬프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 일은 적중되는 게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의뢰인의 소원을 해결했다는 기쁨과 앞에 닥쳐올 일을 알고 있기에 생기는 슬픔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4월 16일.

나미아는 제국 황모의 이름이 베니슬라 아쿠힐드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다. 추가적인 사항으로 고향이 데베스 공국의 세데스라는 것도 알아낼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여행을 하던 그녀는 케리팔에서 암행을 나온 황제를 만나게 되었고, 5년 뒤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도 알고 계셨지. 어머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또 한 사람을. 하지만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사랑하셨어. 그 점은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해도 좋아. 어렸을 적의 추억을 위해서 아버지는 브란디에고라는 사람을 찾게 했었지만 40년쯤 뒤에,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 일을 그만 두게 하셨지. 추억은 추억으로. 어머니의 생각이셨으니까. 나는 그 일을 완전히 추억으로 여긴 건가 싶었어. 하지만 아니야. 어머니는 현실에 만족하기로 하셨지 그 추억을 포기하시진 않으셨던 거야.”

“너무 오랜 시간을 돌아왔어. 미안해. 심정이 복잡할 텐데.”

“응? 아냐. 어머니는 만족하실 거야. 그리고 아들로서, 어머니의 임종이 만족될 수 있다면 나 역시 만족해. 아버지의 영전은 대할 때마다 약간 껄끄럽겠지만 아버지도 인정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분은 너도 알다시피 꾸밈이 없으셨으니까. 아버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조차도 사랑하셨어. 고마워, 나미아. 어머니의 한을 풀어줘서.”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고마워.”

제국의 황제는 정원에서 열린 티 파티에 나미아와 오디를 초대했다. 보통 남는 시간에는 쇠약해진 그의 어머니 곁을 돌보는 것이 그의 일과였지만 지금은 자신보다도 더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

아들로서는 솔직히 섭섭하고 그 상대에 대한 분노가 생기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선황의 피를 확실하게 이어받은 그는 넓은 포용력으로 그 모든 걸 끌어안았다. 대 제국의 황제라 할 수 있는 면모에 나미아는 솔직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황모의 방에서 베니슬라와 눈이 마주친 브란디에고는 뭐라 할 수 없는 감회를 느끼는 것 같았다. 베니슬라 역시 눈을 크게 뜨면서 추억속의 소년과 그를 대조하고 있었다. 브란디에고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고, 베니슬라는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브란디에고는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베니슬라는 여태껏 그의 아들이 보지 못한 생경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당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당신의 말이 사실이었어요. 처음엔 드래곤이라고 자신을 착각하는 소년이라고 여겼는데…. 약속을 지켜주셨군요.”

어머니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음을 깨달은 아들은 조용히 주변 사람들을 갈무리하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정원에 나온 그는 심호흡 세 번으로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티타임을 선언했다.

저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까. 어떤 과거의 시간이 머물러 있을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아름답고 밝은 색으로 치장된 애절한 시간일 것이다. 서로가 너무 많이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다음을 장식한다. 기약할 수 없는 재회는 영원한 단절로 받아들여 질 것이지만 그들은 과거의 자신들을 떠올리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언어. 침묵. 언어. 침묵. 미소와 미소.

서로가 느끼는 건 일치하고 있을 것이다. 언어는 불필요한 요소지만 침묵 사이에 오가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선 언어가 필요하다는 모순이 있다. 그 모순은 서로에게 보여주는 미소로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 모순은 모순이 아니게 되며, 현실은 과거가 되고 과거는 추억으로 남겨진다.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정겨우며, 언제나 행복한.

나미아는 브란디에고가 그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각오하고 있기에 그를 안내했지만 그는 여린 구석이 많았다. 너무나 착했기에 슬픔도 솔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순진함이란 그런 것이다. 진솔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거침없는 순수함. 바보 같지만 멋지기까지 하다.

“골드 드래곤이라. 게다가 이제 막 성룡이라니, 그 동안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겠어. 황족의 비사가 하나 더 늘겠군.”

황제의 말은 나미아를 미소 짓게 했다. 그녀의 주변엔 너무 멋있는 남자들만 가득했다. 너무 멋있기에 보는 사람을 서글프게 하는 멋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멋 부리고 있어. 너무… 너무 멋있잖아. 너무할 정도로….”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4월 28일.

황모가 임종한 3일 뒤, 제국에는 국장이 선포되었다. 일주일 동안 각 지역의 모든 귀족들이 참여해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나미아는 그랜드 크로스를 검은 색으로 도장해 하늘에 띄우는 것으로 최고의 예우를 보여주었다. 제국의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검은 옷을 입고 그들의 황모를 조의했고, 검은색과 흰색의 조문객이 끊임없이 행복하게 눈을 감은 황모의 시신을 알현했다.

브란디에고는 그랜드 크로스에 탑승해 베니슬라가 누워있는 황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른 전망대에 단출한 의자를 가져다 놓은 채 그는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 나미아가 걸어왔다. 등과 어깨는 당당해 보였지만 그녀는 거기서 그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만족해?”

“예. 만족합니다. 그녀는… 여전히 제 기억 속의 베니슬라였습니다.”

“다행이네.”

그는 정말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슬퍼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잘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나미아는 그가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기 싫어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슬픔이란 잘 막아둔 둑 뒤의 물과도 같지만 범람하면 둑을 무너뜨려서 온 농지를 잠기게 만드는 물이었다. 그는 둑을 무너뜨리지 않고 물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나미아는 그걸 볼 수 있었다. 그의 행동, 눈빛, 말투가 그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나 멋을 부리고 있었다. 서글프리만치.

“슬프겠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기뻐했고, 저도… 기쁩니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떨리고 있었다. 나미아는 천천히 그의 뒤로 다가가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브란디에고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미아는 조용히 말했다.

“슬퍼해도 좋아.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네가 고이 보낸 그 사람의 모습이 그러듯, 슬퍼하는 너 역시 아름다우니까. 그러니… 그러니….”

나미아는 목이 멨다. 그녀는 그렇게 뒤에서 그를 그러않은 채 조용히 눈물 흘렸고, 브란디에고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왜… 왜 당신이 슬퍼하죠?”

“네가, 네가 슬퍼하지 않으니까! 이 순진하고 멋있는 자식아….”

“고마워요. 슬퍼해줘서.”

나미아는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을 느꼈다. 조용히 눈물 흘리는 브란디에고는 나미아의 떨림에 의지해 조용히 어깨를 떨었다. 너무나 빨리 지나간 행복한 과거의 그리움이 아롱져 나미아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고, 남겨진 사람에게 또 다른 추억이 되어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지만 과거가 현실이라는 걸 알기에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과 과거의 현실을 끊임없이 곱씹어야 할 사람은 조용히 눈물 흘리며 한 사람의 과거였던 현실을 추억으로 보내고 있었다.

‘안녕. 베니슬라. 아름다운 기억이여.’

브란디에고는 울었다.

외전: 멋있는 손님. - 종료.

후문.

브란디에고와 나미아를 본 오디는 ‘마실 것 좀 드시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웨건의 손잡이를 잡은 채 전망대의 입구에서 굳어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