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2: 북쪽 산맥으로. (29/49)
  • Part2: 북쪽 산맥으로.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3월 20일.

    힐텐펜스에서 툰드라 공화국까지 가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제국과 레리첸트와 국경을 대고 있는 툰드라 공화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렌디너스 왕국에서 제국을 가로질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공정을 타더라도 제국 국경에서 한 번 멈춰서 여권 심사를 하고 제국 국경을 나갈 때 다시 여권검사를 한다. 중간중간 멈추는 것까지 합치면 비공정을 타고서도 일주일 동안 가야 하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냥 그랜드 크로스를 탈 걸 그랬어.”

    “그랬다간 황제가 한 번 들렀다 가라고 했을 걸요. 그 편이 더 시간 걸려요.”

    “상공 1만 피트를 지나가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 군사 비공정 정류장에서도 잡아낼 수 없을 걸.”

    “그럼 되돌아가서 그랜드 크로스를 끌고 올 까요?”

    “그냥 두자.”

    이미 그들은 툰드라 공화국의 수도인 ‘라투나’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 시전에서 나미아의 말은 단순한 투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녀들의 짐은 여행용 가방 한 개씩이 전부였고, 복장 역시 여행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복장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비공정에서 내려서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빈센트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타카에 있는 그의 연구 자료들을 특급비공정으로 부쳐 제국 수도 ‘케리팔’의 정류장에서 그들이 탄 비공정에 선적해 현재 그 짐을 내리는 중이었다. 나미아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혼자서 들고 오기에는 꽤나 많은 무리가 따르는 양이었기에 빈센트가 어떻게 짐을 가져 올 지는 흥미진진한 문제였다.

    “나미아 님. 저기….”

    “…뭐냐 저건?”

    저쪽에서 웬 짐뭉치가 스물스물 기어오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큰 왜건에 얹혀진 각종 짐들의 산이었는데, 가운데를 교묘하게 뚫어둬 전방에 대한 시야는 확보한 상태였다. 개인의 짐이라고 생각되기에는 꽤나 많은 양이었다.

    “저렇게 많았나?”

    “위에서 보고 있었으니까 시각의 착각이 왔을 수도 있겠죠.”

    “…그럴지도. 설마 저 짐들이 자연증식하지는 않겠지.”

    짐뭉치가 느릿느릿 움직여서 그녀들의 앞에 멈추었고, 그 뒤에서 빈센트의 새빨개진 얼굴이 드러났다. 바퀴가 달렸다고 해도 이런 거대한 뭉치를 움직이는데는 상당한 힘이 필요할 것이다. 그나마 그가 트레져 헌팅을 하면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빈센트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고는 말했다.

    “히야. 이거 좀 많군요.”

    “…알면서 그렇게 가져오라고 시킨 건 대체 무슨 경우예요?”

    “하하하. 다 필요한 자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발굴할 때 전부 가져갈 생각은 아니시죠?”

    “물론이지요. 기본 조사를 위한 것과 조사 후에 얻은 새로운 발굴품에 대해 알아볼 준비를 한 것입니다.”

    나미아는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성은 철저했다. 물건들을 가지고 토타카로 돌아갈 시간조차도 아깝다는 것일까. 직업에 대한 열의가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 상황 판단에는 느린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빈센트씨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어요.”

    “예? 그게 뭡니까?”

    “여기 내리막길이거든요?”

    “예? 우와악!”

    천천히 나미아 쪽으로 움직이던 짐수레는 점점 가속도가 붙어서 빈센트의 손을 떠나고 말았다.

    앞 뒤 길이가 3야드 정도 되는 폭 2야드, 높이 2야드의 짐뭉치가 가녀린 여성을 향해 움직이는 건 위험해 보였다. 아무리 나미아와 그 짐뭉치 사이의 거리가 1야드 정도라고 해도 말이다.

    “조심…!”

    “조심하셔야죠.”

    나미아는 가볍게 한쪽 손을 들어 굴러오는 짐수레를 막아내었고, 빈센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단 1야드의 거리라고 해도 여성의 한 팔로 막을 수 있을 그런 무게가 아닐 텐데? 나미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짐뭉치를 막은 팔을 굽혔다 폈고, 짐뭉치를 다리 낮은 경사를 되돌아가 빈센트에게 향했다. 빈센트는 얼떨결에 짐뭉치를 잡고는 간신히 바퀴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무시무시한 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나미아에게 뭐라고 질문하려다 그만 두고는 다른 질문을 꺼내었다.

    “아, 저기… 그런데 여기서 뭐하십니까?”

    “빈센트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빈센트씨가 오셨으니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야겠네요.”

    “누가 또 오기로 했습니까?”

    “예. 마중이요.”

    빈센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툰드라 공화국에도 이켈라인 상회가 진출해 있었으니 상회의 사람들이 마중을 나올 것이라는 상식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나미아가 상식을 뛰어 넘는 행각을 벌인다는 걸 제대로 각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툰드라 공화국의 제 2 특수부대의 2중대 1소대, 별칭으로 광혈랑(狂血狼) 소대라 불리는 자들이 왔을 때 이 일행을 잡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다.

    “교관님! 오랜만입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라스로울! 그 깽깽대던 신병 강아지가 훌륭하게 늑대로 컷네? 소대장 딱지까지 달고 말야.”

    “전체, 교관님께 대하여 경례!”

    라스로울이라 불린 제 2 특수부대 2 중대 1 소대의 소대장은 빠릿하게 경례를 붙였고 그의 소대원 이하도 한결같은 동작으로 나미아에게 경례했다.

    두툼한 모직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양모 스웨터, 합성 섬유로 된 붉은 코트를 입고서 베이지 색 통모자를 쓴 나미아는 전혀 그들의 경례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라스로울을 비롯한 소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경례를 붙였고,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마주 경례를 해주었다.

    빈센트는 이런 일련의 상황보다도 라스로울이 한 말을 되뇌며 놀라고 있었다.

    “교, 교관이요?”

    “한 30년쯤 전, 공화국 출범하기 전에 부족 연합이었을 때였거든요. 부족연합간의 상품 유통을 이켈라인 상회에 맡기는 대신 제가 한 300명 정도 열심히 굴려줬죠. 2년 정도였나?”

    “정확하게 2년 3개월입니다.”

    “그 시간 동안 얘네들 꽁지가 빠져라 굴려대었죠. 그런데 의외네. 난 라스킨 아저씨의 비서들이 올 줄 알았어.”

    라스로울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요즘은 행정부가 전부 바쁘거든요. 제일 한가한 애들이 군부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입니다. 외증조할아버님이나 그 비서나 바쁘기 그지없지요.”

    “그래? 그래서 아저씨가 요즘 바쁘다는 거구나. 하긴, 공화국 출범한지 10년도 안 지났는데 바쁜 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치안은 문제없겠다. 너희들 같은 피에 미친 늑대들이 있으니까.”

    “아아! 그렇게 만드신 분이 누군데 그러십니까?”

    “글쎄. 난 기억 안 나는 걸?”

    나미아는 히죽 웃었고, 라스로울은 2년 3개월의 훈련이 끝나고서야 볼 수 있었던 나미아의 미소를 이리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에 약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훈련할 때 나미아는 그들을 사정없이 몰아쳤었고, 절대 웃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차이 때문에 반항했다가는 온 몸에 피멍이 들 때까지 두들겨 맞았고, 지옥 같은 훈련과정이었지만 나미아는 철저하게 낙오자가 없게끔 그들을 배려했다.

    모든 훈련이 끝났을 때, 300명의 인원은 2년 3개월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한 자신의 힘을 느끼고서는 감격했고, 나미아가 생긋 웃으며 ‘수고했다’라고 말했을 때는 그녀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 마저 가지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인 라스로울은 나미아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는 존경을 담은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저희가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툰드라에 테러 위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은 그냥 내 짐꾼 노릇밖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솔직히 아무리 나라고 해도 흉기로 키운 애들이 짐꾼 한다고 하면 위기의식부터 느낄 거야.”

    “흉기는 자신이 언제 날카로워야 할 때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무 때나 대놓고 흉기임을 자처한다면 단순한 파락호나 다름이 없죠.”

    “후훗. 잘도 기억하네? 알았어. 나하고 오디 짐은 됐으니까 빈센트씨의 짐이나 좀 옮겨다 줘. 혼자서 옮기기엔 많은 무리가 따르겠지?”

    나미아는 자신이 가르쳐준 말을 잘 기억하고 있는 라스로울에게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고, 라스로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대원들에게 짐을 나눠들 것을 명령했다. 짐의 주인인 빈센트는 이 황송스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하다가 이내 자신이 들 수 있는 짐 몇 개를 챙겨드는 것으로 최대한의 대처를 했다.

    라스로울은 짐을 나눠드는 부하들을 보다가 나미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이켈라인 상회 라투나 지부. 숙소 마련하라고 했으니까 거기로 가면 돼.”

    “예. 알겠습니다. 이 자식들아! 1분 이내로 챙겨들지 못하면 피 터지게 맞을 줄 알아!”

    “예스 서(Yes sir)!”

    소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고, 그 모습을 본 나미아는 슬쩍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녀는 라스로울에게 말했다.

    “아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지.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그럼 어떻게 말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돼. 챙기는 거 제일 늦은 사람은 나랑 개별 상담한다-!”

    애교가 가득 섞인 목소리였건만 소대원들의 움직임이 3배는 더 빨라졌다. 라스로울은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라투나는 툰드라 공화국의 수도이면서 유서 깊다는 소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였다. 라투나는 공화국 출범이 세계에 선포된 15년 전에 만들어진 계획도시였다.

    이전까지는 툰드라의 각종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한 계절이나 길게는 1년 정도 머무는 곳이 마을이고 도시였지만 나라의 형태를 띄게 되면서 라투나라는 정착도시를 가지게 되었다.

    툰드라 공화국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도시였으니 유서 깊다는 말이나 시간의 오래됨을 뜻하는 어구들이 사용될 법 하지만 현실적인 툰드라의 늑대들은 치장하는 말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라투나의 정확한 명칭은 ‘툰드라 공화국 대통령저 라투나 그랜파빌렌 아르페나르 신도시’였다. 고대어에 정통한 빈센트는 ‘늑대들이 모이는 위대한 벌판에 세워진 신도시’라는 이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지금도 툰드라 공화국의 국민들의 반수는 툰드라 지대를 떠돌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라 라투나는 수도라고 생각되기에는 다소 작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오밀조밀하면서도 튼튼하게 짜여진 면직물의 느낌을 주는 도시지만 있을 만한 건 전부 있었다.

    이켈라인 상회가 상권의 80%을 장악하고 있지만 다른 상회들의 진출도 서서히 시작되고 있어서 상업적으로도 툰드라 공화국 내에서는 많이 발전되어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툰드라 공화국의 돈을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켈라인 상회의 라투나 지부는 나미아에 의해 간단한 평가절하를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상회가 상권을 이만큼이나 차지한 나라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중앙 지부는 또 없을 거야.”

    “상회가 거의 분산되어 있으니까요.”

    대륙의 모든 이켈라인 상회의 중앙 지부들 중에서 제일 작은 면적을 자랑하는 라투나 지부의 지부장인 ‘윌터스 라슬렌’은 회장과 총무의 평가에도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툰드라 공화국의 독특한 국민 생활상 덕분에 퍼져있는 지부들의 반은 거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거주가 정확하지 않아서 중앙 지부로부터의 명령을 받으려면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다른 나라에서 1달에 한 번 아래 지부의 결산서를 받는데 반해 툰드라 공화국에서는 4개월에 한 번, 다시 말해 1년에 4번의 결산과정을 거친다. 단순 계산으로도 작업량이 4배로 늘어나는 셈이지만 상회의 본사로 보내는 결산 보고서는 1년에 두 번뿐인지라 적은 인원으로도 충분히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이곳의 사람들은 의리를 목숨같이 알기 때문에 횡령 같은 비겁한 짓을 벌이지 않아서 좋지요. 덕분에 저희들도 최소한의 감독으로도 툰드라 공화국 내의 상회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이죠.”

    “윌터스 지부장의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다른 사람이면 지금이 인원보다 1.5배는 증원해야 했을 걸?”

    “하하하.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툰드라 공화국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늑대인간들의 본연의 모습으로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점이다. 덕분에 건물들도 층수에 비해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데, 성장이 좋은 늑대인간은 최고 9피트까지도 키가 자라기 때문이다. 덕분에 모든 건물들은 한 층 당 높이를 최소 12피트로 정한다.

    윌터스는 슬슬 중년기로 넘어가는 늑대인간이었는데, 그의 집무실은 15피트의 높이를 가지고 있었다. 장식의 의미가 아닌 다분히 실용적인 의미가 있었다. 늑대들의 양팔을 들어올리면 최소 높이인 12피트가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윌터스의 집무실에서는 아무리 키가 큰 늑대인간이라고 할지라도 기지개를 폈을 때 천장을 부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회장님, 이번에 제가 받은 연락을 보고서는 살짝 제 눈을 의심했는데요, 그게 사실이십니까?”

    “아, 물론이야. 난 허언은 하지 않아.”

    “허허… 거 참 곤란한 일이군요. 내리신 명령의 수행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는 말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준비는 다 했나보지?”

    나미아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윌터스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은 뒤 말했다.

    “물론이죠. 명령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마워, 윌터스. 걱정하지는 마. 위험과 나랑은 툰드라에서 일사병 걸릴 만큼이나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까.”

    “그 병, 실내에서 햇볕만 쬐다보면 걸리는 사람도 있더군요. 아무튼, 3일 정도만 더 기다리시면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날 겁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기다리지 뭐.”

    나미아는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슬쩍 빈센트에게로 향했는데, 모든 집기들이 윌터스의 크기에 맞춰져 있다보니 인간들이 사용하는 것에 비해 1.5배에서 2배 가까이 거대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빈센트는 자신의 몸이 순식간에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인지 눈앞의 찻잔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그가 고대인이었다면 그 의념만으로도 찻잔의 차를 몽땅 마셔버릴 것 같았다.

    대화의 도중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자금의 문제였다. 빈센트는 당연히 이켈라인 상회의 공적자금이 사용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모두 나미아의 사비였다.

    의뢰비용은 고대의 물건을 복원해 판매하는 이익으로 받고자 했지만 나미아는 애초부터 그런 이익을 내고픈 생각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꽤나 크게 손해가 날 것이다. 고대의 유적을 발굴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가슴이 아픈 나미아였다.

    똑똑.

    “들어오세요.”

    보통의 문보다는 훨씬 큰문이 열리면서 문에 비해 너무 작은 사람이 들어왔다. 손잡이는 위아래 두개가 달려있어서 인간일지라도 문을 여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약간 앳되 보이는 소녀였다. 하녀 일을 하고 있는 듯 싶었다.

    “저, 라스로울 소대장님이 모든 짐을 다 옮겼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쉬고 있으라고 전해줘.”

    “예. 알겠습니다.”

    윌터스는 문이 닫히는 걸 본 뒤 말했다.

    “제 손녀입니다. 굳이 이 곳에서 지내겠다고 하더군요.”

    “헤에, 사이가 좋네. 아들하고 며느리는?”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상회의 일도 겸하고 있지요. 손녀아이한테는 그 생활이 조금 힘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서 사무 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녀 같은데?”

    나미아의 진솔한 말에 윌터스는 덥수룩하게 난 턱의 털을 슥슥 긁으며 말했다.

    “여기 지부 사람들은 워낙 일이 적다보니 한 두개 정도 겸직을 한답니다. 저도 사실은 이 지부의 정원사죠. 하하핫.”

    “다른 사람들이 보면 헷갈리겠네요. 특히 손님들이.”

    “그렇습니다. 제가 정원 손질을 하고 있을 때 온 손님들이 거만하게 물어보다가 집무실에서 만나게 됐을 때는 상당히 당황하더군요. 하하핫!”

    “아, 그거 재미있을 것 같아. 하찮아 보이던 사람이 알고 보니 거물이었다던가 하는 상황을 만드는 건 아무 재미나지. 나도 가끔 하는 일이거든.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미아는 이제 일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업무량이 적은 지부의 지부장과 재미있는 대화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빈센트는 방으로 가면 안되겠냐는 그 짧은 질문을 할 타이밍을 놓쳐서 계속 뚫어져라 찻잔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의념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찻잔 밑의 테이블도 뚫어버리고서 땅을 파고 들어갈 그런 기세였다.

    빈센트는 그냥 처음부터 방에서 짐이나 정리할 것을 괜히 왔다고 후회하였으나 이미 방에서 벗어나기는 늦은 때였다.

    빈센트가 곤란해하고 있을 때, 오디는 나미아의 명령으로 윌터스가 마련해 두었다는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산을 탈 때 필요로 하는 그런 물건들이었고, 그에 따른 인원의 목록도 있었다.

    그들이 향해야 할 목적지는 북해와 접해있는 ‘북쪽 산맥’의 한 가운데였다. 재미있게도 북쪽 산맥의 중심은 아이리펜 대륙에 세로 중심선을 그었을 때 동쪽과 서쪽의 길이의 비가 1:1이 되는 산맥이었다. 그런 산맥의 한 가운데라는 것은 결국 아이리펜 대륙의 중심선의 위라는 소리였다.

    고대의 도시가 그런 곳에 있다는 것이 뭔가 상당한 연관이 있는 것일까 오디는 잠시 고민해 보았다.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지만 속단하기가 싫었던 오디는 연관성에 대한 추측은 잠시 접어두었다. 지금 시대에도 기운이 좋은 땅이라는 이유로 지어진 도시나 건물이 많았기에 고대에도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까지만 했다.

    그 도시에 대해서는 빈센트가 매우 신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기에 그녀는 그 모습을 머릿속에 상당한 구체성을 지닌 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빈센트는 그 도시를 목격한 것은 매우 높은 봉우리였고, 자신의 힘으로는 그 도시까지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었다.

    날아가는 새도 얼어서 떨어지고, 모험심 많은 늑대들이나 미친 산양도 접근하기 어려운 지대까지 들어가서 살아 나온 빈센트의 용기와 행운을 축복해야 할는지, 아니면 저주해야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정보는 귀중한 것이었다.

    직경은 대략 1마일. 주변에는 두꺼운 눈을 덮은 봉우리들로 분지를 이루고 있었고 날아서 가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넓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곡이 도시를 빙 둘러 패어져 있다고 했었다. 빈센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의 도시를 눈사태로부터 보호하려는 고대인들의 의념이 작용한 계곡 같다고 했다. 안 그러면 그렇게 깨끗하게 도시 주변을 둘러 깎아지른 듯한 계곡이 생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분지의 안은 전혀 거센 바람이 불지 않는 신기한 곳이라고 했었다. 봉우리들 사이로는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도 도시 위로는 따스함 햇살이 쏟아지고 있어 눈에 덮이지도 않은 채 남아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굴뚝같은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말도 했었다. 고대의 유적들에서 보이는 공통점이라는 설명을 했지만 그는 도저히 그 구조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오디는 대체 이 사람이 고대의 무엇에 대해 연구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알고 보니 빈센트는 고대의 멸망원인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 시체나 물건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데 건물은 제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그저 전쟁이 났나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의 발굴 초점은 의념문명의 증거에 대해서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도외시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오디는 결론을 내렸다.

    “고고학자인지 트레져 헌터인지 확실히 하라고….”

    오디는 도저히 빈센트가 고고학 박사 학위를 노리는 고고학자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고대의 도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탐구욕이 아니라 신기한 물건에 대한 갈망이었다. 확실히 고대의 물건만큼 신기한 물건은 없을 것이다. 고고학은 트레져 헌팅에 따르는 부수적인 학문이었다.

    오디는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는 다시 물품들의 확인에 들어갔다. 단 세명이 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물건들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대충 따져봐도 식량은 10배 가까이 많았으며 다른 짐들도 무시 못하게 많았다. 특히 알 수 없었던 것은 텐트로 쓰일 것 같은 천과 골대이었다.

    혹독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만년설의 산에서 1인용 텐트를 치다가는 얼어죽기 딱 좋다. 어떻게든 여러명이서 모여 사람의 온기로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정석인데, 1인당 하나의 텐트를 지을 분량의 천과 골대는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그 골대는 당연하게도 금속이었다. 아무리 가벼운 소재를 사용했다고 해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오디는 지금까지 들어온 짐들을 보면서 정리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이런 경우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단 두개였다. 나미아가 틀리거나, 자신이 틀리거나였기에 그녀는 물품대장을 문에서 제일 가까운 짐더미에 올려두고는 나미아에게로 찾아갔다. 자신이 틀린지, 그녀가 틀린지 알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와중에 오디가 제일 걱정하는 점은 나미아와 자신이 둘 다 틀렸을 때의 경우였다. 그런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오디는 지부장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라스킨과 나미아는 라이니시스라는 공통점 외에 개인적인 특징으로 또 다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나미아와 라스킨 사이에는 주군의 따님과 맘씨 좋은 아저씨 사이 외에 특별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나미아가 특별히 라스킨을 따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라스킨은 블랙 드래곤의 블러드 스폰이었다. 그리고 나미아는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혼합 블러드 스폰이었다. 공통점으로 블랙 드래곤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들 사이의 유대감을 유지하는 것은 그 블랙 드래곤의 피가 한 존재에게서 나온 것이란 점이다. 그들은 세계를 혼란으로 이끌어 라이니시스가 척살 했다고 알려진 블랙 드래곤 체리랑스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원래 은백색에 가까운 털을 가지고 있었던 라스킨은 블러드 스폰 폼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는 털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전신의 모발은 흑색이었다. 나미아도 레드 드래곤의 피가 아니었다면 검은머리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동질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나미아는 다른 지인들 보다더 더욱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줌마!”

    “격조하셨습니까. 아주버님, 아주머님.”

    라스킨과 그의 아내 제이나는 따스한 웃음으로 나미아와 오디를 맞이해 주었다. 제이나 역시 같은 피의 블러드 스폰이었기에 나미아가 매우 잘 따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어서오십시오. 나미아 아가씨, 오디 아가씨.”

    “안녕하세요.”

    툰드라 공화국의 대통령과 영부인은 직접 대통령 관저인 ‘설랑전(雪狼殿)’의 입구에서 그녀들을 맞이하였다.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중요한 귀빈이었기에 대통령 내외가 직접 나와서 맞이하는 몇 안 되는 손님이었다.

    “헤헷. 툰드라도 많이 발전되었던데요?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아요. 많이 바쁘시겠네요?”

    “하핫. 두 아가씨의 상회 덕분에 그나마 제가 이렇게 숨쉬고 있을 수 있지요. 어서 들어오세요. 주모님들의 음식보다는 못하겠지만 정성을 다해 마련한 저녁식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와아! 마침 배고팠는데, 고마워요!”

    “이건 선물입니다.”

    오디는 검은 금속을 상감 하여 늑대를 그린 은판이 담긴 액자를 제이나에게 건네주었다. 툰드라 공화국의 국기였다. 라스킨은 반색하면서 말했다.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것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집무실에 소중하게 걸어 두겠습니다.”

    “들어가시죠.”

    제이나는 상냥한 웃음으로 그들을 이끌었고, 나미아는 생글생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오디는 선물을 마음에 들어하자 직접 준비한 사람으로써 상당히 좋은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대통령 관저인 설랑전은 그 이름으로 툰드라의 모든 것을 간단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눈과 늑대. 툰드라를 대표하는 두 가지 상징의 이름이 붙은 관저는 내부도 하얀 눈 같이 깨끗했지만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없는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장소였다.

    석찬(夕餐)을 가지는 곳은 대통령의 개인 식사공간인 영식실(靈食室)이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최고의 귀빈으로 대접한다는 성의가 눈에 띄는 장소였다.

    보통의 외교관이라면 접근할 수도 없는 장소였건만 나미아와 오디는 부담이 마비된 사람 같이 당당하게 들어갔으며, 영식실을 드나드는 설랑전의 직원들은 라스킨의 가족 이외에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 들어오는 사람을 처음 본다는 듯 연신 흘깃거리면서 그녀들을 관찰했다.

    영식실의 식탁 위에는 툰드라에서 나오는 식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들이 맛깔스럽게 차려져 있었고, 갓 올려둔 모양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나미아와 오디가 언제 올 건지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시간의 안배였다.

    보통이라면 자신의 행적이 파헤쳐졌다는 것에 불쾌감을 느낄 나미아였지만 여기서만큼은 매우 감격했다는 표정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아저씨도 참 시간 잘 맞추시네요. 너무 기막힌 타이밍인데요?”

    “기뻐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대충 예감으로 맞춘 건데 우연하게도 맞아 떨어졌군요. 혹시라도 음식이 다 식어버리면 어쩌라 걱정했습니다.”

    “아니에요. 무슨 말씀을. 식은 음식이라도 맛있다는 건 예전에 여행 해봐서 알아요. 꼭 따뜻해야만 음식인가요. 괜찮아요.”

    나미아가 이렇게 절대적인 호의를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 몇 없다는 걸 아는 오디는 눈앞의 음식을 가리키며 식으면 맛없어질 거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나미아는 라스킨이 잔을 들길 기다렸다가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들어올렸다.

    “귀중한 만남에 감사 드리며.”

    “툰드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나미아와 라스킨은 서로에게 살짝 잔을 들어 보인 뒤에 잔을 비웠다. 제이나와 오디도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다음 음식에 포크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약간 매콤하면서도 몸에 열을 낼 수 있도록 한 툰드라의 전통음식이었다. 나미아는 음식을 한 입 먹고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입에서 솔직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하! 맛있네요. 실내에서 먹는 것도 꽤 좋아요.”

    “하지만 역시 모닥불에 둘러앉아 부족민들끼리 먹을 때가 제 맛이죠. 대통령이라는 직위에서 언제쯤 벗어나 유랑생활을 하게 될지 걱정입니다.”

    “글쎄요. 그 누가 감히 늑대왕 라스킨의 권위에 도전할까요?”

    “어이쿠! 그럼 저보고 이 지루한 자리에 계속 앉아있으란 끔찍한 말씀이십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고 싶은 데요?”

    대화 내용만 본다면 대통령과 손님이 아닌 주인집 아가씨와 늙은 집사의 대화 같았다. 실제로도 그들의 관계는 그와 비슷했기에 체면 차리지 않고 자유분방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없는 영식실의 직원들은 서로의 눈만 쳐다보며 의문을 교환할 뿐이었다. 저 두 사람 누구야? 나도 몰라.

    “그런데, 두 분께서는 단순한 여행으로 오신 게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이나의 차분한 목소리는 대화 주제를 바꾸면서도 분위기를 죽지 않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나미아는 빵을 길게 찢으며 대수롭잖다는 듯 말했다.

    “예. 뭐… 여관의 손님 때문이죠.”

    “여관 운영은 어떻습니까?”

    “잘 되고 있어요. 특별손님도 잘 찾아오는 편이고요. 이번이 여섯 번째 손님이거든요.”

    “흐음… 이번엔 이곳 툰드라 국내의 일입니까?”

    라스킨은 곤란한 일이 아니었으면 싶은 생각이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바쁜데 더 바쁜 일이 벌어지면 곤란했다. 나미아는 그런 라스킨을 보고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헤헷. 걱정하는 눈초리를 보니 완연한 통치자의 풍모네요. 괜찮아요. 툰드라 국내의 일은 아니에요. 단지… 저 북쪽 산맥의 일이죠.”

    “북쪽 산맥이요? 늑대들도 끝까지 가지 않는다던 그 북쪽 산맥 말씀이십니까? 그곳에는 또 무슨 용무이십니까?”

    “에… 그러니까, 주변을 좀 치워야겠네요.”

    나미아는 약간 표정을 굳히며 말했고, 라스킨은 주변의 직원들을 물렸다. 어차피 코스 메뉴가 아닌 이상 직원들의 시중은 크게 필요가 없었다.

    영식실에 라스킨 내외와 나미아, 오디 밖에 남지 않게 되자 나미아는 포크로 음식을 휘휘 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단 저희 손님은 상회 지부에 있어요. 아저씨에게 협조 요청을 하러 오긴 했는데, 손님이 있으면 본론을 꺼내기가 껄끄러울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아저씨는 돌려 말하기에 약하잖아요?”

    “그렇게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시니 부끄러워하지도 못하겠군요.”

    “이이가 원래 우직한 편이잖아요. 그 점은 저희도 이해해요.”

    “왠지 나까지 은근슬쩍 밀어 넣는구려.”

    사이좋은 부부지간에 나미아는 생긋 미소짓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 두 분이 마물의 사건으로 얼마나 바쁘셨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요청에 대해서도 참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꺼려지는 군요. 저희 손님의 목적은 북쪽 산맥에 있는 고대 유적의 발굴이에요.”

    “…그런 곳에 있었습니까?”

    라스킨의 얼굴에서 서글서글한 표정이 사라졌다. 고대의 유적에 대해서는 라스킨도 라이니시스와 많은 모험을 해봐서 잘 알고 있었다.

    제일 마지막 일은 마물 생성포를 두고 체리랑스와 싸웠던 일이며, 결국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라스킨의 자존심에 아직도 상처로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해하는 것이 그 체리랑스가 라이니시스의 첫사랑-이라고 라이니시스가 알려주었다.-이었고, 그녀의 두 아내를 드래곤으로 바꿔버려 훗날 라이니시스가 슬퍼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점이며, 또한 그들의 막내의 이름이 체리랑스라는 점이었다는 면에서 라스킨은 상처가 난 자존심을 간직해야 할지, 그냥 없던 일로 치부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가족은 보호하고 적은 물리치며 상처 난 자존심은 복수로 해결한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라스킨은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에 대해 도저히 결정을 낼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 모든 사태가 벌어진 것이 고대의 유적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경험 속에서 고대의 유적은 언제나 분쟁의 장소였기에 그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스킨의 이런 복잡한 심정은 모르지만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는 나미아는 눈썹을 추욱 내리깔며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손님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거. 괜히 분쟁의 씨앗을 품고 온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최악의 사태는 제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목숨 건다는 쪽이 더 걱정입니다. 만에 하나 두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마스터와 주모님의 진노가 고스란히 저에게 오게 되니까요. 아가씨께서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세분이 진심으로 화를 내신다고요.”

    나미아는 라스킨의 말대로 라이니시스와 미리안과 에실루나가 동시에 진심으로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 셋이 일시에 진심으로 화를 낸다면 이 아이리펜 대륙이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 그녀는 잠시 몸서리를 치고는 말했다.

    “…세상에 둘도 없이 무섭군요. 말을 바꾸죠. 다치게 되더라도 기필코 살아남아서 라스킨 아저씨의 목숨을 보장해 드릴게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에… 그래서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여차하면 제가 직접 아가씨를 모시겠습니다.”

    “그건 안 되요. 라스킨 아주버님은 툰드라를 지키셔야죠.”

    오디의 말에 진심으로 말한 라스킨과 농담으로 받아들이려던 나미아는 순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나는 오디에 의해서 동시에 비슷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 숙여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나미아는 계면쩍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제가 하면 왠지 농담이 나올 것 같으니까, 나머지 설명은 오디가 하는 게 좋겠네요. 오디, 부탁해.”

    “예. 일단 그 유적지가 진짜 고대의 유적인지는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차적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어지간해서 최악의 무기는 작동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그 기계들은 고대인의 피와 살로 움직이니까요. 현대에 깨어나 있는 고대인이 나미아 님 이외에 또 누가 있을까 의문이지만, 구동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편이 좋겠죠. 혹시라도 나미아 님이 호기심의 충족으로 사용 될 피 한 방울과 머리카락 한 줌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말이요.”

    나미아는 찔끔했는지 포크를 입에 물고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오디는 그런 나미아를 점잖게 모른척하고서 말을 이었다.

    “저희가 요청하는 것은 20명 정도의 늑대인간들이에요. 험난한 산을 타기 위해서는 힘과 체력을 갖춘 사람들이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발굴대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치장용 인원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미아 님의 생각입니다. 일단 저희의 목적을 이야기하자면 발굴 활동의 근본적 저지에서 시작해 최악의 경우 유적을 근본적으로 강제적 봉쇄하는 방법입니다.”

    “그 근본적인 봉쇄라는 게, 그러니까… 그겁니까?”

    “그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유적의 완전파괴입니다.”

    오디는 나미아에 이어 라스킨까지 다시 한 번 머쓱하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해 제이나를 웃게 했다.

    나미아와 오디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상황은 빈센트가 트레져 헌팅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게 되어 발굴조사는 돌연 중단하는 일이었지만, 정신조작이라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방안이었다.

    발굴 조사는 아마도 하게 될 것이며, 그 상황에서 그녀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상황은 빈센트가 만족할 물건을 얻지 못하게 되고,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여 고대 유적의 발굴에서 손을 떼거나 제 4 문명기에 멸망한 국가들을 상대로 고고학 탐문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나미아와 오디는 이번 일의 결말이 유적의 완전 파괴로 끝날 것 같다는 불길하고 뼈빠지게 힘든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라스킨은 자신이 고대의 유적에서 여러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호기심에라도 그 유적의 발굴을 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부족과 종족의 단위에서 국가로 생각의 폭을 넓힌 그에게 있어 생활을 윤택하게 하거나 툰드라의 힘을 과시할 물건이 전략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과거에 여러 경험을 하길 잘했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마지막 방법이 최선의 방법 같지만… 그럼 만약 마지막 방법이 실행될 경우 그 손님은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 방법은 사람에게도 강제적인 면으로 작용합니다. 저희가 물어야 할 카르마의 대가를 각오하고서라도 빈센트씨의 정신을 조작해서 이번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향후 그의 행동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는 수단입니다.”

    라스킨과 제이나는 오디가 말하는 ‘카르마의 대가’가 뭔지 알지 못했지만 이 말이 나올 때 나미아의 표정이 싸악 굳어졌다는 걸 보는 것으로 모든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나미아가 저리 표정을 굳힐 정도라면 굳이 캐물어 봐서 좋을 일도 아니었다.

    라스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어떻게 되든 이번 일에는 해피엔딩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스터에게 연락을 취해야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식탁의 분위기를 원래대로 되돌리기로 했다.

    “자! 그럼 됐습니다. 필요한 인원은 얼마든지 빌려 드리겠습니다. 그보다도 음식이 완전히 식어버리겠습니다. 어서 들도록 하죠. 식사 후에는 가벼운 티타임이나 즐기도록 할까요? 툰드라의 이끼 차가 결코 내륙의 홍차나 녹차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제이나가 보여줄 겁니다.”

    “어머, 그래요? 괜찮네요. 상품가치가 있는 거면 저희가 팔아봐도 돼죠?”

    “물론이죠. 이쪽도 이윤이 잘 남게 부탁드립니다.”

    “상황 봐서요. 맛없으면 청구서 보낼 거예요! 까르르륵!”

    “허허, 좀 봐주시죠. 으하하핫!”

    식탁 위에는 다시 훈훈한 공기가 불기 시작했다. 비록 그 공기가 음식을 도로 뎁히지는 못했지만 즐거운 식사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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