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05: 꿈을 쫒는 손님.
Part1: 순수한 꿈을 속이는 이유.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3월 13일.
미리안은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체리랑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체리랑스야. 저기 언니랑 오빠들한테 가서 놀렴.”
“저 여기 좋아요.”
“가서 놀지 않겠니?”
체리랑스는 물끄러미 엄마의 표정을 보았다. 곤란함과 진지함이 머문 표정을 본 체리랑스는 아쉽다는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네, 엄마.”
체리랑스는 나미아의 무릎에서 폴짝 내려와서는 거실의 반대편에서 놀고 있는 다섯 명의 다른 형제들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1마일의 범위를 가진 레어의 반대편이니 달려가려면 꽤 걸릴 것이다.
라이니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달려가는 체리랑스를 보다가 적당히 멀어졌다고 생각하고는 눈앞의 손님에게 말했다.
“귀여운 아이죠?”
“예. 아마도 여러분은 저 아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것 같군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그 이야기는 거기서 접어주시죠. 아무리 뭐라고 해도 저 아이는 저희의 귀여운 막내니까요.”
에실루나의 말은 애정이 어려있으면서도 서릿발같은 위엄이 서있었다. 그녀의 말에 에릭 안자이는 양손을 들어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하다는 뜻과 알겠다는 뜻이 동시에 담겨진 제스처를 취했다.
라이니시스나 미리안, 에실루나는 체리랑스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아이는 그들의 사랑 받는 막내이며,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설령 체리랑스가 동명이었던 블랙 드래곤의 전생체라고 해도 말이다.
전생을 기억하는 라이니시스와는 달리 체리랑스는 기억이 백지화된 상태로 태어났다. 그것이 과연 백지화일지, 아니면 그녀의 영혼 위에 백지를 덮어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변하진 않았다. 전생의 체리랑스는 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과 결부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전생 체리랑스의 남편이었던 라이니시스는 더욱 그랬다.
“혜진은 그걸로 죽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아이에겐 아버지의 도를 넘지 않는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고 싶고요. 나미아와 오디에게서 들은 것처럼 가족을 인질로 잡은 협박이 성족의 방식이라면 그냥 있지는 않을 겁니다.”
라이니시스의 단호한 말에 그의 두 아내는 전적으로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세 드래곤의 압박감을 느끼게 된 에릭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이거,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이야기를 꺼내기 쉽게 하기 위해 공통분모가 될 화제를 꺼낸 것뿐인데… 제 생각이 짧았군요. 사죄 드립니다.”
에릭은 깊이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에게 쏟아지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한결 숨쉬기 쉬운 공기를 느낀 에릭은 고개를 들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공통분모라도 상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 정도는 기억해둬요.”
미리안의 맺음말이었다. 에릭은 절감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성족이라고 할지라도 체리랑스의 기억을 억지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말은 차라리 안 하는 편이 좋았다. 아니, 체리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라고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해둔 에릭은 준비해둔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새로운 포석을 내밀었다.
“앞으로 드릴 말씀은 협박도, 위협도 아니라는 걸 먼저 알려드립니다. 여러분께 사랑 받는 아이들이 부럽군요. 어쨌든 여러분께는 불유쾌한 손님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메신저인 이상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요.”
“메신저인 덕분에 여기저기 원망도 많이 들었겠군요.”
“가깝게는 여러분의 따님이신 나미아 씨와 오디 씨에게서 들었습니다. 뭐,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제가 본인들에게 찾아가는 건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자식 분들께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 말씀, 믿지요.”
에실루나는 목소리에서 위엄을 거두었다. 확실히 나미아나 오디에게 그가 직접 찾아가는 건 성족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뿐이라고 그녀도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라이니시스는 일단 편히 소파에 등을 기대며 에릭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무슨 용무이십니까?”
“예. 에… 그 두 분에 대한 용무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도록 하고, 여러분들께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죠?”
“예. 성족이 나미아 씨와 오디 씨에게 무슨 목적이 있는가 하는 겁니다.”
라이니시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들의 처리하지 못하는 카르마의 정리가 목적이라는 건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에 그는 상체를 끌어당겼다. 성족이 이야기하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말했다.
“저희가 아는 것과는 다른 목적이겠군요. 일단 듣기 전에 묻지요. 제가 나서야 합니까?”
“라이니시스. ‘저희’라고 하셔야죠.”
“미안, 미리안. 저희가 나서야 합니까?”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말했다.
“라이니시스 씨도 알고 계시겠지만 성족에게 있어 당신의 역할은 ‘그 때’의 ‘그 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관여하실 필요도 없고, 관여를 원치도 않습니다. 단지 성족은 여러분들이, 이 세계에서 단 세분만이 이 진실을 알고 계셔야 한다고 생각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훗날, 나미아 씨와 오디 씨에게 조언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을 꼽자면 여러분들 외엔 없으니까요.”
“꽤나 거창한 진실이 아니면 긴장하고 있는 것이 허사가 되겠군요.”
“하하, 사실 긴장하면서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메신저의 역할을 하게 된지가 어언 1000년이 넘었지만 이런 메시지 전달은 또 처음이거든요.”
“긴장해야겠네요.”
미리안은 전혀 긴장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해서 에릭에게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에릭은 이것으로 이야기할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두 따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만, 사실 그녀들의 일에서는 잉여 카르마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두 분이 해결하는 일은 아웃사이더의 손으로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현실에 간섭해야할 카르마가 대상에게 가지 못하고 공중에 뜬 상태가 되지요. 이 전에는 이 잉여 카르마가 예기치 않게 발생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지금은 일부러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두 따님의 손을 빌려서요. 일단 여기까지 이해하시겠습니까?”
“흐음… 그건 뭐 나미아나 오디가 벌이는 일로 여러분이 얻는 이익이라고 생각해 두지요. 계속하시죠.”
라이니시스의 말에 미리안과 에실루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은 반쯤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마시고는 새로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뭔가를 남긴다는 건 그걸 쓸 곳이 있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궁금해하실 부분은 그걸 어디다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 이야기를 본론으로 넘기기에 앞서 여러분께 이걸 보여드리지요.”
에릭은 호주머니에서 지저분한 명주 천에 쌓인 뭔가를 꺼내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집중하는 사이 그는 명주 천을 서서히 열었고, 그 안에는 노란 색으로 발광하는 어른 손가락 하나 길이의 두툼한 타원형의 돌이 놓여있었다.
라이니시스와 미리안, 에실루나는 형언키 어려운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혼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도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는 돌이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그들의 영혼을 천천히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니시스는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그 돌을 가리키며 억눌린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이건… 뭡니까?”
“잉여 카르마가 형체 구현화 된 겁니다. 성족들은 이걸 카르마 스톤(Karma stone)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에릭은 그걸 다시 지저분한 명주 천으로 감싸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앞에 있는 세 사람은 카르마가 형체로 구현 화된 것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다뤄도 좋은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함부로 취급할 정도인데 저것이 진품일까 싶은 의혹도 생겼지만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느껴지던 위압감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에릭이 말했다.
“잉여 카르마는 카르마 스톤을 정제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뭐… 여러분도 겪어보셔서 알겠지만 안스란에 의해 영석(靈石)이 현실에 나타난 일이 있었습니다.”
라이니시스는 불쾌감을 느끼며 표정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에 반해 미리안의 표정이 순간 헬쓱해졌다. 처절한 패배감을 느끼는 남자와 죽을 뻔한 공포를 느꼈던 여자를 보던 에릭은 다시 사과했다.
“이거,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마 어쩔 수 없이 그 이야기를 예로 삼지 않고서는 카르마 스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군요.”
“괜찮으니까 계속 하십시오.”
라이니시스는 테이블 밑에서 미리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미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옆에서 에실루나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질투를 삭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영석의 실체화는 영석 자체에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된 일입니다. 성족이 그걸 감독하고 주관했지요. 영석의 실체화 과정에서 수많은 죽은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산 자는 죽은 자가 되었지요. 그것은 영석이 실체화를 이루기 위해 주변에서 강제로 카르마를 흡수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카르마를 빼앗긴 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카르마에 이끌려 안스란에게 모여들었지요. 그리고 600만의 카르마를 얻은 영석은 실체화되어 힐텐펜스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여신 안스란의 손위에서요.”
라이니시스는 그때의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망각이 없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 일만큼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600만의 죽은 자들이 모여 신의 문양을 그리던 모습, 거대한 빛의 기둥 안에서 영석을 안은 채 승천하던 안스란의 모습, 절규하던 소년 하인츠의 모습, 안스란의 서글픈 미소와 살고 싶다는 목소리, 지상에 떨어진 마지막 빛과 함께 안스란을 따라 승천한 600만의 죽은 자들.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일을 지켜 본 성족들은 영의 낙원에서 떨어져 나온 영석이 카르마를 끌어들여 실체화되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영석이라는 존재가 없이 잉여 카르마를 끌어들여 하나로 모으면 그것을 독립적인 개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족들은 연구를 했고, 그 결과가 카르마 스톤입니다. 카르마의 응집체이죠.”
“예. 그 카르마 스톤에 대해선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체 제 두 딸과 무근 관련이라는 겁니까?”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 따님은 카르마 스톤을 만드는 연금술사라는 거죠. 그리고, 성족들은 막대한 카르마가 응집되어 만들어진 카르마 스톤을 사용하는 하나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 좀 축이고 시작하죠.”
에릭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진지한 표정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라이니시스와 미리안, 에실루나의 표정에는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다가 차츰차츰 그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경악하기 시작했다. 에릭의 이야기는 그들의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한참을 벗어난 이야기였다. 맙소사! 그게 가능하다는 소리인가?!
“마, 말도 안 돼…!”
“그, 그런 일이 가능 한가요?”
“세상에… 맙소사….”
경악하는 세 사람의 반응을 보면서 에릭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지 그럴 것이다. 자신도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서는 ‘한 번만 더 들려주시겠어요?’라고 말했을 정도니. 그는 말했다.
“여기까지가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입니다. 절대 발설하지 마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말해도 못 믿을 거요. 오, 맙소사. 진짜 맙소사군.”
라이니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안스란 때의 사건으로 이미 그는 성족이 벌이는 일이 간단히 상상을 벗어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번 일은 더하지 않는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였다. 세 사람 중에서 제일 빨리 평정심을 찾은 것은 역시 에실루나였다.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함구하도록 하죠.”
“용단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두 따님께 전해드릴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에… 일차적으로 성족들의 카르마 스톤 만들기 실험이 성공함에 따라 카르마 스톤 제작이 가속화될 전망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이 생기게 되었는데요, 여러분의 두 따님께 이렇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꿈을 쫓는 사람을 조심하거라.”
“…끝이에요?”
“끝이다.”
“아빠. 머리가 있어야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알 수 있다고요. 게다가 고기도 적게 붙은 뼈만 던져주면 어쩌라고요?”
나미아는 불만스러움을 얼굴 가득 표현했다. 개점 이후 처음으로 라이니시스가 찾아와 줘서 매우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대뜸 할 말이 있다고 하고서 분위기 잔뜩 잡더니 밑도 끝도 없는 말만 던진 것이다.
라이니시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는 나미아의 볼을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편식하면 몸에 안 좋다. 그리고 볼에 바람 빼라.”
“흥! 이미 저는 자랄 대로 자랐다고요. 훌륭하게 자라줘서 고마운 것 아녜요?”
“그렇긴 하지. 네 청소년기 때는 도통 몸매가 자라지 않아서 이대로 크면 어쩔까 아버지로서 심각하게 고민했다만 훌륭하게 커줘서 고맙구나.”
“우이…! 그때는 그때라고요! 그리고 제가 빈약한 게 아니라 오디가 너무 빵빵했던 거예요!”
“지금도 오디가 더 나은 걸.”
“에에?! 아빠 설마 오디에게 눈독들여요? 안 돼요! 얘는 내 애완용이에요!”
나미아는 마치 인형을 빼앗기는 위기에 처한 어린아이처럼 오디는 답삭 끌어안았고, 인형이 되어버린 오디는 붉어진 얼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생각하느라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이니시스는 오디를 끌어안은 나미아를 보며 새삼 보람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훌륭하게 커주었구나. 개그 센스도 많이 성장했고.”
“누구의 가르침 덕분인데요.”
오디는 이 부녀만담이 대체 언제쯤 끝날까 고민하고 있었다. 이 부녀는 만담말고는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디의 기억 속에 있는 라이니시스와 나미아는 끊임없는 부녀만담의 열전뿐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고양이 취급을 당한 그녀는 그냥 한숨을 내쉬며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진지한 이야기를 어서 수확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에릭 안자이. 너희들도 알고 있는 사람이지?”
나미아는 표정을 굳히며 오디를 놓았다.
그제야 자유를 되찾은 오디는 잠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서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을 본 라이니시스는 오디도 은근히 이런 만담분위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오디가 알면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겠지만.
나미아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새끼가 뭐라고 나불대… 아차.”
언제나 늘 그렇다.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늦은 법이다.
따악!
“좋은 말 써라.”
“히잉… 아파요오….”
나미아는 라이니시스에게 쥐어 박힌 머리를 감싸고는 칭얼거렸다. 라이니시스는 신중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했다. 잉여 카르마로 만들어진 카르마 스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 속에 있었으니 그 이야기는 일단 패스했다. 그는 말했다.
“네가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 메신저가 대신 나에게 온 거다. 이야기를 전달하자면, 이번 일은 너와 관련이 깊은 문제라고 하더구나. 자세한 것은 손님이 오면 알게 될 것이지만, 꿈을 쫓는 사람을 주의하거라.”
“알겠어요. 아후… 아파.”
“그럼 난 가겠다. 장사가 잘 되고 있는 걸 보니 아빠로서 자랑스럽구나.”
“에에? 벌써 가요? 하룻밤 자고 가도 되잖아요! 서비스 잘 해 드릴게요.”
나미아는 일어서는 라이니시스의 팔에 답삭 매달려서는 눈웃음을 쳤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꼴딱 넘어가고 말 그런 행동이었지만 라이니시스는 피식 웃으면서 딸의 가소로운 생각을 짚어내었다.
“나한테 얼마나 뜯어내려고 하니?”
“한 100펜쯤? 여자 종업원 한 명 벗겨서 밀어 넣으면 효과 두 배! 남자 종업원이면 수 십 배!”
“흥, 100펜 짜리 손님인데 주인이 안 나오는 거냐?”
“그것도 괜찮겠네요. 금단의 사랑을 불태우는 것도 나쁘지 않죠. 오호호홋! 그렇게 되면 아빠는 영원한 나의 봉-! 까르르륵!”
농담이라고 해도 쉽게 말하는 아버지나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딸이나 둘 다 문제라고 생각했다. 라이니시스가 저러니 나미아가 더욱 더 파더 콤플렉스를 가속화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그나마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되어 두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용했다.
라이니시스는 나미아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으며 말했다.
“시끄러워. 이 파더 콤플렉스 덩어리 같으니. 대체 언제쯤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래? 네 첫 사위보다도 라르딘이 첫 며느리 맞는 게 더 빠르겠다.”
“흥. 칫. 동생들 인생은 걔네 거라고요. 제 인생은 제가 살렵니다.”
“그러니까 사위 덕은 언제쯤 보게 해 줄 거냐고 묻는 거 아니냐.”
“음… 아빠 복제인간 한 명만 만들어서 나주면 안 돼요?”
“넌 도플갱어 신드롬하고 클론 법칙도 모르냐. 한 차원에 같은 존재가 존재하게 되면 차원 프로토콜에 위반된다.”
“오아! 그럼 다른 차원이면 허락해 주신다는 이야기?! 만세!”
따악!
‘맞을 줄 알았어요.’
나미아는 정수리를 감싸안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없었지만 만담이 끝을 내려면 끝내는 종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디는 자업자득으로 괴로워하는 나미아에게 신경 쓰지 않고 라이니시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와주셔서 반가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님.”
“그래. 만나서 즐거웠다. 나미아를 잘 부탁한다. 파더 콤플렉스 좀 어떻게 해봐라. 이러다간 내가 미리안하고 에실루나한테 맞아 죽겠다.”
“푸훗. 노력해 볼게요.”
“우우… 오디이… 너무해에….”
라이니시스와 오디는 꿍얼대는 나미아를 전심전력으로 깨끗하게 무시했다. 나미아는 정수리를 쓱쓱 문지르면서 말했다.
“아빠, 잘 가요. 다음에 모두 와서 자고 가세요. 그땐 정말 서비스 잘 해드릴 테니까요.”
“그래. 그러마. 그럼 잘 있어라!”
라이니시스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거실에서 사라졌다. 나미아는 오늘 두 대나 맞은 충격 때문에 정수리를 문지르며 아픈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통증은 간단히 마법으로 가라앉히겠지만, 그녀는 어지간해선 라이니시스에게 이렇게 맞은 부분엔 마법을 대지 않았다.
“훗. 아빠의 사랑이 날로 커지는걸 느낄 수 있어. 오늘의 강도는 매우 특별했… 오디, 어디 가?”
“정리해야죠.”
오디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파더 콤플렉스 중증의 여인으로부터 멀어졌고, 나미아는 완전히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꿍얼거렸다.
“딸이 아빠 좋아하는 게 뭐가 잘못이라고….”
‘그 정도가 문제에요. 아니, 애초에 아버님을 남자로 보는 게 잘못이잖아요. 아무리 양녀라고는 해도 너무하잖아요?’
오디는 이런 긴 말을 생각하는 대신 그냥 짧게 끝내기로 했다.
“휴우… 아무튼 문제야.”
“응? 오디, 뭐라고 했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긴. 나 분명히 뭐라고 들었어. 요즘 너 자꾸 나한테 반항하는 기미가 슬슬 보인다아?”
“반항이라뇨.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오디는 평온한 태도로 테이블을 정리했고, 나미아는 뭔가 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오디의 행동을 보고서는 그만 사레가 들려 케켁거리기 시작했다. 오디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것이다.
“어머, 어서오세요.”
“콜록! 콜록! 케엑! 쿠헥! 소, 손니… 콜록!”
“저… 괜찮으세요?”
오디는 한 손으로는 가슴을 두들기면서 다른 손으로는 손사래를 치는 나미아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 쟁반 위에 올려진 티 포트와 찻잔을 보고서는 곰곰이 생각했다. 다시 세팅해야 하겠구나.
“저는 ‘빈센트 데번’이라고 합니다. 고고학자 겸 트레져 헌터(Treasure hunter)지요. 토타카의 토린트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려고 하는 모험가지요. 남들이 이야기하길, 꿈을 쫓는 남자라고 하지요. 와, 이 카스텔라 맛있군요.”
“전 나미아라고 해요. 이쪽은 오디고요.”
“예? 으음…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두 분의 이름은 세간에 널리 퍼진 이름 아닌가요?”
나미아는 찻잔을 들어올리며 살짝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여태까지 오는 손님 중에서는 그녀들의 이름을 듣고서도 처음 듣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녀들의 이름을 들을 만한 상황에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제일 권력에 가까웠던 손님으로는 레이라인과 미네안 정도였는데, 그녀들은 워낙 세상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어서 그녀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나미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과 총무로 잘 알려진 이름이라지요. 유명하다보니 흔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부담 가는 이름이라 딸에게 지어주기에는 꺼려지는 이름이지요.”
“부모님들께서 재미있는 생각을 하셨나 보군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특이한 분들이라는 건 인정하는데, 한 번 언제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네요.”
그래봤자 나미아의 친부모는 제 3 문명기가 끝나면서 돌아가셨을 것이고, 오디의 이름은 나미아가 거의 즉석에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유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오드 아이를 보고서는 3초 내에 지어진 이름이니까.
빈센트는 나미아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본인들이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확실한 대답을 피하시니까요. 게다가 제가 들은 그 두 분의 용모와 두 분의 용모는 흡사하다 못해 같군요.”
“후, 날카로우시네요. 아니면 꽤나 자세히 알고 계시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맞아요. 제가 나미아 이켈라인이고 얘가 오디 이켈라인이에요.”
나미아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미소는 신뢰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약식으로 인사하는 식의 가벼운 미소였다. 그녀가 그런 미소를 짓는 이유는 빈센트가 놀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빈센트는 과연 놀라지도 않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그렇군요. 놀라운 용모에 특이한 이름. 짐작은 했습니다. 그런데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과 총무 되시는 분들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하시는지….”
“그건 당신의 용건과 관계없는 일 같군요. 개인적인 사정이랍니다.”
나미아의 말에는 어딘지 모르게 가시가 돋쳐 있었다. 라이니시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꿈을 쫓는 사람이라는 말에 그다지 친근감을 가지기 어려웠다. 빈센트는 찔끔하며 말했다.
“하하하. 뭐, 개인의 사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죄송합니다. 직업으로 가졌다는 것이 파헤쳐서 밝혀내는 거라 일상생활에도 이렇군요.”
“그건 저도 그래요. 상회의 일을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흥정을 하게 되거든요.”
오디는 오늘 따라 나미아가 왜 이런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의 나미아답지 않았다. 라이니시스의 말 때문일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손님이 있는 자리에서 뭐라고 하는 것은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는 걸로 일관하기로 했다.
“하하핫. 닮은꼴이군요. 음, 아무튼 이거 제가 찾아오기는 잘 찾아왔나 봅니다. 마침 도움을 필요로 하던 차였거든요.”
“저희에게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 그렇죠. 다들 도움을 원하기 때문에 찾아오니까요.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지 그 전후사정을 말씀드리길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물론이죠. 저는 고고학자 겸 트레져 헌터입니다.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고대 문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동료 고고학자들은 사라진 왕국이나 민족들에 대해 조사를 다니는데 반해 저는 좀 특이한 편이랄까요. 그래서 아직 박사학위가 나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에 손댄지도 어언 40년인데요.”
고대 문명이라는 말에 나미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빈센트는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에… 저는 고대 문명에 대해서 많은 것을 조사했습니다. 고대어도 반 정도는 해독할 수 있고, 고대 문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중에 하나지요.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대의 문명은 지금의 물질문명-아, 제가 붙인 말입니다-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명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들의 문명을 저는 ‘의념문명’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의념문명이요? 특이한 말이로군요.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계기는 뭔가요?”
빈센트는 빙긋이 웃으며 자신의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그것은 날이 없는 칼자루와 활 대가 없는 활 자루, 짧은 단봉이었다. 나미아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녀의 입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이건 뭐죠? 마치….”
“하하. 만들다 만 것 같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발굴한 고대 유적지에는 이런 것 밖에 남아있지 않았어요. 날이 삭아서 사라졌을까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벽화는 전쟁을 그리고 있었는데,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은 이런 날 없는 자루를 들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날이 서있는 자루를 들고 있더라 이겁니다. 저는 대체 그게 뭔가 생각했는데 발굴한 고대 문헌 중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전사들은 의지로 칼날을 세웠다.’ 보통은 이게 용맹함을 나타내는 어구로 쓰이겠지만 저는 이걸 곧이곧대로 해석했지요. 이 칼자루나 활 자루, 단봉을 들고 의지를 세우면 의지가 구현하여 칼날이 되거나 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고대의 벽화를 보면 더욱 확실해 지는데, 그들은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고 물건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걸로 마법사들은 고대는 고도로 발달된 마법문명이라고 하는데, 그건 틀린 소리지요. 고대인은 그들의 의지와 염원만으로 물체를 움직이고, 날을 일으켜 세웠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문명을 의념문명이라고 정의했지요.”
“흥미롭군요. 쉽게 믿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요.”
빈센트는 나미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했다. 나미아는 ‘이 정도로 고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라고 한 뜻이었지만 그녀의 말 어느 곳에도 그런 뜻을 나타내는 복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표정 대신 그걸 적절하게 바꿔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꾸었고, 오디는 적당한 흥미를 얼굴에 채색하고서는 속마음을 꽁꽁 감추었다.
“그러시겠지요. 사실 다들 반응이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말도 안 된다고, 거짓부렁이라고 하는 것보단 좋은 반응입니다. 아무튼 저는 제 가설을 증명해서 토린트 대학에서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정식으로 지원금을 받으며 활발하게 고대사에 관한 연구를 하는 게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제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하죠. 학회라는 게 상당히 편협적이라 눈으로 증거를 들이대도 무시하는 사람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고생하시네요.”
나미아는 살짝 지루하다는 표정을 띄웠다. 대체 자기가 뭘 도와주면 되는지 아직까지도 갈피가 안 잡히고 있었다. 학회의 인물을 모두 회유하여 박사학위를 줘야 할지, 아니면 뭔가 다른 도움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빈센트는 그녀의 표정으로 이상과 같은 뜻을 읽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이거, 본론으로 넘어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째 제 꿈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해가 가는 줄 모르니…. 본론으로 넘어가지요. 사실 제가 툰드라의 모처에서 고대 유적으로 판단되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산맥 깊숙한 곳에 늑대들도 다니지 않고, 산양들도 피해 다니는 험한 곳에서 유적이라 추정되는 곳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곳을 발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 ‘고대의 의념문명설’의 증거가 될 물건을 찾고자 합니다.”
“흐음… 어떤 물건이죠?”
“고대의 문헌 중하나를 어렵사리 해독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의념으로 물체를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생각하더군요. 당연한 일입니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장애인으로 취급받지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적은 의념으로도 물건을 움직일 수 있게 한 보조기구가 발명되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휠체어나 목발정도 될까요? 이건 오히려 조악한 표현이군요. 휠체어나 목발이라고 해도 일반인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 보조기구는 정말 완벽한 물건이었습니다. 의념이 부족한 ‘장애인’들도 보통 사람들처럼 의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찾기만 한다면 제 가설이 진짜라고 판명되고, 저는 박사가 되어 지원금을 받을 수 있을 뿐더러 베일에 쌓인 고대 문명도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낼 겁니다. 제 목적은 그 보조기구들 중에서 사용 가능한 걸 발굴해 내어 가설을 정설로 만드는 겁니다.”
나미아는 그런 기구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이상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고대에서도 분명 그 의념을 증폭시켜주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장애를 도와 원활한 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도구들은 그 어느 시대라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령 고대라 할지라도.
“흐음… 결국은 유적을 발굴하는 일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나미아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고대의 문명이 과연 지금 시대에 알려져서 되는 것인가, 안되는 것인가.
고대의 문명이 멸망한 이유는 서로가 엄청난 무기를 발명해 내어 그걸 서로에게 쏴대었기 때문이다. 문명을 멸망시킬 정도의 거대한 힘은 분명 이 시대의 야심가들에게는 좋은 먹이감이 될 것이다. 비록 작동시키는 방법이 죽어라고 어렵지만.
고대인의 피와 살로 움직이는 마물 생성포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당하고 고통스러워했던가. 나미아는 그 피와 살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에 아직까지도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현대에 남아있는 고대인은 자기 외엔 없다고 생각되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이다. 그때의 매쉬암 같은 조직이 또 있지 않을 거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런 힘이 부활하게 두어선 안 된다. 부활하기 전에, 파괴한다. 나미아는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흥미롭군요. 보통은 손님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일로 돕고 있지만… 이번 일에 한해서는 저희 상회가 스폰서가 되어 드리죠.”
“예?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그런 장치가 있다면 분명 좋은 상품이 되겠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안전한 제품을 원하고, 그것 덕분에 발명품이 사랑 받지요. 그것이 설령 발굴품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반길 거예요. 만약 그런 장치가 있다면 저희는 그 독점권한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것을 통한 연구와 연구 발표의 모든 권한은 빈센트씨가 가지시고요. 물론 상품화가 될 수 있고, 상품화가 된다면 그에 따른 이익 배분도 가능합니다.”
빈센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꿈이었다. 그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멸망당한 고대 문명의 발굴이라고? 한 사람의 손으로 가능 할 거 같아? 제 4 문명기에 멸망한 수많은 국가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 제 3 문명기를 한낱 한 인간의 손으로 발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결국 당신은 끝없이 꿈을 쫓을 수밖에 없어. 당신의 목숨이 다 할 그 날까지 당신은 꿈을 쫓는 사람이 될 거야.
미안하지만, 그 꿈, 내가 이용해야겠어.
‘아빠가 조심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겠어.’
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마물 생성포 같은 무기가 발굴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 나미아는 절대 이 사람을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은 위험했다.
순수하고 깨끗한 꿈을, 아무런 야심도 없는 꿈을 쫓고 있었지만 그 순수함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한 어린아이가 잔인하게 새의 목을 비틀고, 개구리를 밟아 터뜨리고, 벌레를 조각 내고, 불장난으로 집을 태운다.
“도, 도와주신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아, 발굴에 저희도 동참시켜 주실 수 있나요? 매우 흥미롭군요. 안 그래, 오디?”
“예. 아주 흥미롭군요.”
오디도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나미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같은 생각인 것이다. 이 사람이 위험하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빈센트는 그런 그녀들의 속을 하나도 모르고 감격해하였다. 대륙을 뒤흔드는 강력한 상회가 스폰서가 되어 주는 것만큼 큰 힘도 없었다. 원하는 물품을 구할 수 있고, 돈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꿈을 향하여 크나큰 한 걸음을 딛었다는 생각에 감격하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 발굴,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예. 기대할게요.”
나미아는 생긋 웃었다.
‘당신 나에게 속고 있는 거야.’
그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속였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거나 인간 기준에 실격되는 자들이었기에 그들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꿈을 쫓는 정열적인 사람들을 아주 좋아했고, 많은 도움을 주어 그들이 꿈을 이루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나미아는 난생 처음으로 순수한 꿈을 가진 사람을 속였다.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