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Supplementary story(외전): 막내의 심부름.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28일.
여관 WISH에서는 오후 3시에 객실 점검을 시작한다. 손님이 있는 객실을 제외한 다른 방의 준비 상태를 점검하는 의례적인 일이다. 플로어 매니저인 페네디와 플로어 팀의 두 명이 나미아의 뒤를 따라다니며 미흡한 점을 고치고, 잘된 점은 칭찬을 받는다.
상벌의 의미가 확실한 이 일은 직원들의 긴장감을 적당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직원으로 하여금 여관에 애착을 가지게 만드는 일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나미아도 숙박업을 하고 있는 이상 관리는 확실하게 하고 있다.
평소라면 페네디를 비롯한 플로어 직원들은 칭찬을 듣고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나미아가 작정하고 나선 것 같은 질책을 듣고 있었다.
“이 방은 왜 시트가 없지?”
“예. 세탁중입니다.”
“세탁중? 여관의 시트는 충분할 텐데?”
“요전번 오신 손님들이 시트를 자주 더럽히는 바람에….”
페네디는 말을 하려다 나미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 것을 보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직원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그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급료도 넉넉히 주는 주인이 화가 났음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 것이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다른 방도 있으니….”
“지금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야? 갑자기 모든 객실에 손님이 들어차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손님에게 ‘죄송합니다. 시트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할거야? 그리고 손님이 시트를 더럽히는 바람에? 지금 너 여관업을 장난으로 하고 있는 거야? 손님 핑계를 대면 어쩌자는 거냐고! 시트가 없어? 아이덴 지배인은 허수아비로 보여? 시트가 없으면 공급받으면 되잖아! 부족해? 부족하면 말해서 더 사오면 될 거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페네디와 플로어 직원을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나미아는 고개를 팩 돌리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화병을 가리켰다. 꽃이 말라서 꽃잎이 두 세 장 떨어져 있었다.
“저건 뭐야?”
“예?”
“꽃이 시들어 있잖아! 시든 꽃은 교체해야겠다는 생각 안 들어? 손님이 안 올 수도 있으니까? 설령 1년 480일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더라도 시든 꽃을 방치할 수 있는 거야? 손님이 안 들어오면 방에 거미가 들어와서 집이라도 짓고서 아싸 좋구나하고 살게 둬도 괜찮다는 건 아니겠지? 손님이 오든 말든 상관없어! 꽃이야 시들기 전에 공급받는 게 있잖아! 그렇게 생각이 없어?”
“시, 시정하겠습니다!”
어느 때라도 손님을 맞을 준비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나미아의 평소 경영 철학이었다. 여관에 있어서 가장 옳은 쪽은 언제나 손님이고, 그 다음엔 경영자였다. 직원들이 아무리 뭐라고 한들 손님이다 경영자가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었으며, 나미아가 하는 말이 단순한 트집잡기는 아니었기에 페네디와 직원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은 티끌만치도 들지 않았다.
나미아는 그 외에 옷장과 창틀을 죽 둘러보았다. 꽃이 시들 정도면 내부의 청소상태가 대충 어떨 것인지 알 수 있었던 페네디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나미아의 추상같은 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청소상태가 왜 이래? 이 먼지는 뭐야? 하루 이틀 정도는 봐 주겠는데 이 먼지 두께는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5일 이상 손대지 않았다는 거잖아? 너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야?! 이래가지고 플로어 매니저야?! 직원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페네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정하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최근 직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원활했기 때문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나미아는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시설을 겸한 화장실은 여관 WISH의 편의시설로 유명했다. 그러나 나미아의 눈에는 유명이고자시고간에 소용이 없었다.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눅눅한 공기와 좋다고 할 수 없는 냄새에 그녀의 입이 재차 열리게 되었다.
“5일 동안 청소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눅눅해? 대답 좀 해봐. 물론 물을 사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습기가 차있다는 사실 정도는 아는데, 적어도 5일간 청소도 안한 방의 화장실에서 왜 습기가 느껴지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쳐. 이건 뭐야! 곰팡이 냄새가 풀풀 풍기는 화장실에 손님을 밀어 넣으라는 거야?! 방향제도 다 써버렸어?! 그런 거야? 모자라면 사와야 된다는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차라리 내 지하 작업실에 손님을 모시는 게 더 낫겠다!”
“시, 시정… 용서해주십시오!”
“뭐야, 지금! 여기가 무슨 삼류 싸구려 여관인 줄 알아?! 이런 꼴 보자고 직원 고용하고 물건 사들이는 줄 알아?! 용서받고 싶어? 그럼 시정해! 당장!”
“알겠습니다! 셰린, 아이덴 지배인에게 가서 시트를 추가 공급받아. 꽃도. 그리고 청소할 직원들 이리로 보내. 린스넬은 샤워실 청소부터 시작해.”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조금 전부터 서릿발같은 소리를 들어온 지라 황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미아는 자신의 옆을 지나쳐 들어가는 린스넬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미아의 표정이 다시금 찡그려졌다. 페데디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스터…?”
“왜 그러시…!”
린스넬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나미아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나미아를 모셔서 눈치가 빨라진 페네디는 나미아의 행동이 뭘 뜻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린스넬의 목덜미에서 냄새를 맡던 나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불쾌한 느낌이 자뜩 묻어나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땀 냄새….”
린스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러나 나미아는 직원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페네디에게만 말했다.
“여관 문 열 때 내가 뭐라고 했지? 각 부 매니저는 직원들 청결에 신경 쓰게 하라고 했지? 잊어버렸어? 아니면 내가 지어낸 소릴 하고 있는 건가? 내가 혼자 말했다고 생각하고 착각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너 매니저 맞니? 플로어 직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누이 말했지? 걔네 들은 여관의 얼굴이야! 깨끗해야해! 온 몸에서 꽃 냄새가 나라는 것까진 바라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청결이라고! 다른 사람의 체취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짜증나게 하는지 알고 있는 거 맞아? 내가 지금까지 헛 가르쳤어?!”
“죄송합니다!”
“말로만 죄송에 시정에 용서지. 오늘부터 당장 직원들 교육 다시 해! 오늘 내로 시말서(始末書) 써서 올려! 넌 3개월 감봉(減俸)이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미아는 절대 맨 밑의 직원들을 혼내지 않았다. 그녀는 직원들 교육을 각 부 매니저들에게 일임했고, 직원의 잘못은 곧 교육의 잘못이기 때문에 교육자를 질책한다. 아무리 잘못한 당사자가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절대로 직원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이건 어느 정도 직원들의 결속과도 관계가 있는 행동이다. 직원들이 설령 나미아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더라도 페네디에겐 신뢰를 보낼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대신 덮어쓰는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과 함께 자기 자신을 다시 차리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다른 비어있는 방들 전부 다시 점검해. 내일 두고 보겠어. 어설픈 생각으로 이 일 하고 있다면 차라리 그만 둬! 알겠어?! 확실하게 해!”
“예!”
나미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방을 나갔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녀의 잘못도 크다. 너무 긴장만 하고 있으면 피곤해지기 때문에 조금 풀어두었더니 그대로 나태해져 버렸다. 원인을 제공한 것이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에 페네디에게 내린 처사가 좀 가혹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일 객실점검을 해서 결과가 좋으면 1개월 감봉으로 그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5층으로 올라갔다.
나미아가 객실점검을 하고 있을 무렵, 오디는 나미아가 손대지 않은 다른 부분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가 주로 보는 건 주방의 상태와 홀의 청소상태, 직원들의 움직임이었다.
홀 매니저인 샹그렐이 언제나 홀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홀 서비스 직원들은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가질 수가 없었다. 샹그렐이 제일 먼저 나서서 일하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디는 샹그렐에게는 예의 내리던 칭찬을 해주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주방이었다.
“…제가 어디를 지적할지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델리스 요리장.”
“바닥이 지저분합니다. 주방 직원의 옷차림도 말끔하지 못합니다. 주방 전체의 청소상대도 좋지 않습니다. 재료의 취급도 지저분합니다.”
“알면서 왜 고치지 않는 거죠?”
“언제나 바쁘던 터라….”
오디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델리스를 바라보았다. 델리스는 곧 자신이 핑계를 대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오디가 말했다.
“청소인원이 부족한가요? 홀 서비스 직원들의 시간이 남을 때 그들을 불러서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나요? 샹그렐 씨에게 말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죄송합니다.”
“주방은 뭐하는 곳이죠?”
“음식을 만드는… 장소입니다.”
“당신이라면, 이런 주방환경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겠어요?”
델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주방 직원들은 입술을 깨물거나 고개를 숙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디의 질문은 그들이 별로 생각하기 싫은 대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디는 말했다.
“저라면 이런 주방에서 만든 커피도 입에 대고 싶지 않네요.”
주방직원들의 입에서는 커피는 홀 서비스 직원들의 담당이라는 말도 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 그런 실없는 농담을 할 정도로 정신 없는 직원은 없었다. 오디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들을 질책하지 않고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오늘 음식은 안 만드셔도 되요. 남은 시간동안 주방청소에 최선을 기울이세요.”
“저기 저녁식사와 오후의 장사는….”
“외부에 요청해야겠죠. 다행히도 요즘엔 음식배달을 잘하는 곳이 많으니까요. 그럼 청소 시작하세요.”
그녀의 질책은 나미아처럼 잘못을 원론적 수준으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질책이었다.
전문직 종사자만큼 자존심이 강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이들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매우 커다란 흠을 남기는 것이다. 오디는 주방 직원들의 모든 능력을 간단히 폄하함으로써 크나큰 모욕을 준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반론할 수도 없는 모욕이라는 전에서 직원들의 모욕감은 더더욱 컸다.
요식업계에 종사하면서 손님들의 음식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그들의 존재 의미를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오디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몇 마디의 말로 그들의 존재의미를 지워버렸다.
“내일 아침 다시 점검하겠어요. 그때도 미흡하면 내일도 배달을 시켜야겠죠. 돈이야 들겠지만 손님들에게 안전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면 상관없으니까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녀는 그들의 존재를 간단히 무시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는 주방을 나왔다. 재기의 여지를 남겨둔 채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 어떤 사람이든 오기로 분발하게 되어 있었다. 특히 전문직 종사자들이면 더더욱 악에 받혀서 일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오디의 질책은 모욕적이면서도 확실하다.
점검을 끝낸 오디는 5층으로 올라갔다. 주방의 상태가 저 모양이었으니 나미아가 맡았던 객실 점검도 상당한 불호령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녀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플로어 직원들을 보면서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했다. 당분간 플로어 직원들은 바짝 긴장이 들어서 다닐 것이다.
이런 상태를 보아하건데, 아마 지배인인 아이덴은 나미아에게 엄청나게 혼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안구를 특정 어류가 얼어붙은 상태의 것과 비교 당하면서. 혹은 나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태학적 형태에 비교 당하면서.
“네 눈은 동태눈이야? 아니면 옹이구멍이야? 시력 나빠? 안경 사줘? 여관 꼴이 이지경이 되도록 지배인이 뭐하고 있던 거야? 명색이 집사였던 남자가 왜 이래? 사람 많아지니까 헷갈려? 어깨 위에 있는 게 머리야, 아니면 혹이야? 생각은 하고 사니? 너라면 이런 겉만 번드르르한 여관에 투숙하고 싶어?”
오디는 엄한 질책을 받고 있는 아이덴을 보면서 자기마저 뭐라고 하면 사표 내고 도망간 새로운 지배인을 구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뭐라고 하지도 않고, 감싸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성큼성큼 걸어가서 나미아의 옆에 앉았고, 나미아는 그런 그녀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돈이 없어? 상회 이익금 좀 가져다줘? 이런 식으로 궁핍하게 흑자 경영할 생각은 없으니까 서비스에 신경 써. 내가 손님이라면 당장 주인에게 클레임 걸고 만다. 허울 좋으라고 지배인 맡긴 것 아냐. 알겠어? 똑바로 해!”
“옙! 시정하겠습니다!”
“내려가 봐. 내일 재점검이야. 실패하면 감봉이다.”
“옙!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덴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계단을 내려갔다. 나미아는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등을 소파에 기대고는 오디에게 말했다.
“오디. 네 쪽은 어때?”
“홀은 큰 이상이 없어요. 주방이 문제였죠. 내일 다시 점검하기로 했어요.”
“후우… 우리가 잘못하고 있던 거였니?”
“잘못이라면 잘못일 수도 있지요.”
“으음… 동생들한테 하던 것처럼 행동하면 직원들이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을까 싶어서 약간 듬성듬성 했는데 잘못된 걸까?”
“그다지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약간만 바꾸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바꾸는 것도 별로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 휴우… 내일 어떻게 되나 보고서 다시 이야기해야지. 그래도 역시 좀 심했다. 격려 차원에서 선물이라도 줄까?”
“채찍과 당근이에요?”
오디의 비유에 나미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책만 하고서 달랑 수고했다는 말만하기엔 너무 많이 화를 내서 미안한 감이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나미아는 역시 뭔가 선물을 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결론을 내었다.
“보너스라고 하긴 뭐하지만 뭔가 하나씩은 주는 게 좋겠다. 뭐가 좋을까?”
“글쎄요? 갑작스럽게 이야기 하셔도….”
“으음… 역시 이럴 때는 뭔가 먹어야 해. 간식시간이다!”
“예예. 알겠습니다.”
오디는 피식 웃으면서 나미아가 낸 이상한 결론에 두말없이 따랐다. 그녀는 재빨리 카스텔라와 홍차를 준비했고, 나미아는 직원들에게 줄 선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문득-어떤 사고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오늘이 상회 본부에서 정례 회의가 있는 날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런. 선물을 준비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네?”
“오늘이 정례회의죠?”
“응. 뭔가 선물해주고 싶어도 살 시간이 없네? 여관 직원들 시키기는 뭐하잖아?”
“그러네요. 주문해서 가져오는데는 시간이 걸리니까 직접 사러 가야 할텐데….”
남아있는 카스텔라를 접시 위에 얹고서 거름망에 얹혀진 찻잎 위로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부은 오디는 접시와 포트를 찻잔과 함께 철제 쟁반에 올려서 나미아의 앞으로 가져왔다. 차가 충분히 우려나는 시간을 기다릴 동안 나미아는 브레드 나이프로 카스텔라를 잘라서는 포크로 찍어 올렸다.
“나 오늘 회의 빠지면 안 될까?”
“제가 무슨 말할지 아시죠?”
“응. 고마워. 이해해줘서. 이걸로 부담 없이….”
“…….”
“…그렇게 보지마.”
나미아는 바보를 보는 듯한 오디의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슬쩍 돌리고는 카스텔라를 베어 물었다. 볼이 볼록해질 정도로 가득 베어 물어 우물거리는 나미아를 보며 오디는 그녀의 생각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회의에 참석할 동안 누군가 쇼핑을 하긴 해야겠네요. 그런데 선물로는 어떤 걸 해주시려고요?”
“으음… 여직원들에겐 향수를, 주방직원들에겐 좋은 개인용 요리기구, 남직원들에게는 회중시계가 어떨까?”
“선물과 동시에 정신차리라는 의미인 셈이네요.”
“선물증정은 뜻깊은 물건을 줘야지. 알면 더 좋겠지만 몰라도 상관없잖아?”
몸단장에 신경 쓰고, 좋은 요리를 만들고, 시간에 신경 쓰라는 의미가 담긴 선물을 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면 오늘의 질책도 헛짓거리다. 설령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다른 직원들이 귀뜸을 해줄 수 있고, 일회용이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다보면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오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상표는 어디로 할까요?”
“먹으면서 생각해보자.”
“네. 그러죠.”
오디는 나미아의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은은한 차향이 머리를 상쾌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체리랑스는 어려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다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다른 형제들과 태어난 시간이 길어야 12분이라는 차이 때문에 막내가 되긴 했지만 그런 걸로 시비를 걸 정도로 불만이 많은 아이도 아니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17세나 16세로 보이는데 반해 체리랑스는 처음으로 폴리모프를 했을 때와 같이 13살 외모 그대로였다. 덕분에 가족과 모두에게서 엄청난 귀여움을 받는다는 것에도 그리 감흥을 내비치는 아이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낳아놓은 어머니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아이였다.
워낙 조용한 성격을 가진 체리랑스는 모든 일에 달관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표정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아버지인 라이니시스나 어머니인 미리안과 에실루나도 체리랑스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을 지경이니 오죽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듬뿍 받는 꼬마숙녀는 휑한 거실 한편에 마련한 아담한 거실에서 라이니시스가 싱글벙글 거리며 입혀놓은 검은 바탕에 하얀 레이스가 있는 고스 드레스를 입고 바닥에 앉아 흑표범 모양으로 변한 스틸 스퀄에게 등을 기대고는 책을 읽고 있었다.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은 ‘고등마법의 마나활용을 위한 이론정립’. 마법사들에겐 죽음의 저서와도 같은 난해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켈라인 집안의 막내 아가씨는 어렵다는 표정도 띄우지 않은 채 열심히 정독하는 중이었다. 겉모습은 어려 보여도 400살에 가까운 해츨링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 책에 빠져있던 체리랑스는 갑작스런 마나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거실의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나의 충돌을 느낀 체리랑스는 약간의, 아주 약간의 의문을 띄우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앵두 같은 입술이 벌어지면서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귀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텔레포트?”
화아악!
보나마나 텔레포트였다. 누가 오는 걸까. 체리랑스는 레어에 설치된 결계가 열리면서 텔레포트의 마나를 끌어들여 내는 빛무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하얗게 폭사된 빛의 너머로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여자 같았다.
“…변태 아빠 같으니. 결국 입혔잖아?”
나미아였다. 오디는 그 옆에서 나미아의 말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동의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체리랑스는 여전히 그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거, 맘에 들어.”
“…어, 그래.”
상당히 어울린다는 점에서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나미아였다. 검은 폭포수 샅은 매끄러운 머릿결에 또랑또랑한 눈망울, 하얀 피부와 앳되 보이는 모습은 고스 드레스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미성년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최적의 고스 로리였다.
나미아와 오디는 체리랑스에게 다가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나미아는 의문을 담은 눈동자로 체리랑스를 보며 물었다.
“다들 어디갔니?”
“아빠하고 엄마는 데이트. 엄마는 큰언니랑 작은 언니 데리고 퀸즈 캐슬(Queen’s castle). 오빠들은 베르힌츠 오빠 네로 놀러갔어.”
“넌 같이 안 갔어?”
“스퀄이랑 집보기.”
“…애한테 별걸 다 시키네.”
애라는 말에 발끈하기에는 체리랑스의 정신은 많이 성장해있었다. 체리랑스는 할 말 없다면 책이나 읽겠다는 식의 무관심을 표명하면서 책으로 눈길을 돌렸고, 나미아는 스퀄에게 다가가서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스퀄은 기분 좋다는 듯 게으르게 귀를 움직이며 그르렁거렸다.
심부름을 시키기에는 맏이인 라르딘이 제일 든든하기에 내심 점찍고 찾아온 나미아는 막내만 남겨두고 모두 외출이라는 말에 고심했다. 베르힌츠 네로 쳐들어가서 라르딘을 끌고 나오는 것도 꽤나 매력적인 일이지만, 학교나 다름없는 베르힌츠네 에서 끌고 나오는 것은 교권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여동생을 중에서 나가있는 애들을 끌고 오면 두고두고 원망할 것이 틀림없었을 뿐더러 에실루나가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미아는 결국 남은 사람이 체리랑스 하나 뿐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무표정하긴 해도 똑똑한 아이였다.
“체리야. 언니랑 같이 안 갈래?”
“어디?”
“언니 심부름 좀 해줘.”
“뭐?”
“언니들이 바빠서 물건 주문을 못하겠거든? 그러니까 대신 가게들 좀 돌아다니면서 주문 좀 해주지 않을래?”
나미아는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체리랑스를 대했다. 그러나 체리랑스는 그런 보기 드문 모습에도 불구하고 감흥 없다는 듯 짧게 말했다.
“귀찮아.”
“…아빠 닮아가는구나.”
“아빠니까. 나 아빠 좋아.”
“그래. 나도 좋아. 그래도 언니 부탁 좀 들어주라. 응?”
체리랑스는 책에서 눈을 돌려 나미아를 보았다. 절실하다는 느낌이 바로 와닿는 표정이었다. 나미아가 지은 수많은 표정 중에서도 이런 표정을 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한 체리랑스는 입술에 왼손 검지를 얹고 생각해 보았다. 이내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이 몇 배는 큰 책의 겉표지를 닫았다.
“할게.”
“정말? 와아! 역시 우리 막내가 최고야!”
체리랑스를 껴안고 볼을 부비작대던 나미아는 그 다음 자신의 귀로 들려온 목소리에 잠시 굳어버렸다.
“대신에 사탕 사줘야 해? 많이.”
‘아빠, 애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예요?!’
프레빌에서 미리안과 데이트 중인 라이니시스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체리랑스에게 주어진 것은 10개의 막대사탕과 2파운드 가량의 각종 캔디였다. 게다가 체리랑스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힐텐펜스 최고급의 사탕가게를 거론했고, 나미아는 잔뜩 뜯긴 듯한 기분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작은 바구니에 사탕들을 담은 체리랑스는 그 위에 나미아가 건네준 주문서들을 올려두었고, 거래에 임하는 사람답게 막대사탕 하나를 꺼내 끝부분부터 핥으며 만족을 얻은 다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쁜 사람들 조심해야해.”
옷을 갈아입으라고 해도 듣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치마길이만 조금 짧게 하는 것으로 조정을 본 나미아가 건넨 말이었다.
나미아의 말뜻에는 체리랑스가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에게 조심해서 힘을 쓰라는 우려가 섞인 말이었다. 체리랑스의 대련은 형제지간에서도 가차없기 때문에 체리랑스에게 수작을 걸 나쁜 사람들이 더 걱정되었다. 또한 체리랑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탕 준다고 하며 끌고 가면 끌려갈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괜찮겠어요?”
“뭐, 약한 애는 아니니까. 추적기도 붙여 뒀잖아.”
“그렇네요. 그럼 가요. 늦겠어요.”
“그래. 알았어.”
나미아와 오디는 차분하게 걸어가는 체리랑스를 보며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회의도 급한 일인지라 서둘러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체리랑스는 혼자서 와보는 마을의 모습이 생경한 듯 이리저리 힐끔힐끔 살펴보고 있었다. 나미아의 만류로 인해서 치마는 무릎 아래까지만 오는 짧은 것으로 바꿨고 어린이용 밴드 부츠를 신었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손에 들려있는 얼굴 반 만한 둥그런 막대사탕이 마음에 들었기에 싫은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 아이지?”
“길을 잃었나?”
“저렇게 다니면 위험할텐데….”
주변의 어른들은 겉보기에는 유년기 어린 여자아이인 체리랑스를 보면서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표정 없는 얼굴과 그걸 절반 가까이 가린 사탕,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의 부조화에 차마 다가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기에 체리랑스는 나미아가 일러주고 보여준 약도대로 향수를 취급하는 상점으로 종종걸음을 걸었다.
나미아가 일러준 향수가게는 힐텐펜스에서 귀족층이 애용하는 최고급 향수점이었다. 이곳에서 유명한 상품은 ‘달의 눈물’이라는 3종 향수 세트로서 각각 엘가, 피스, 지톤이란 이름이 붙은 향수였다. 은은한 향과 희귀성으로 가격도 꽤 비싼 축에 드는 물건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켈라인 상회의 유통망을 사용하는 가게였다.
체리랑스는 입구에서부터 향수냄새가 풍겨오는 가게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인공적인 싸구려 향도 나고 있어서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거래의 대가를 받은지라 안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체리랑스는 사탕의 윗부분을 오도독 깨물고는 그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걸로 만족하고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 향은… 어머.”
“세상에… 어느 집 딸이지?”
“너무 귀엽다!”
귀족가의 아가씨들과 그 하녀들, 직원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으면서 체리랑스는 또박또박 걸음을 옮겼다. 넓은 향수 매장에서 달의 눈물을 파는 코너는 눈에 띄는 곳에 있었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었다.
달의 눈물을 담당한 사람은 가게의 점장인 ‘세리아나 버진’이었다. 그녀는 입구에서부터 눈을 사로잡는 꼬마 아가씨가 오는 걸 보고서는 어느 조숙한 귀족집 아이가 소문을 듣고 찾아왔나 싶었지만 그녀를 돌보는 유모라든가 경호원이 없다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그러나 귀여움은 모든 의문을 배제하기에 충분했기에 세리아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코너 앞에 멈춰선 체리랑스에게 말했다.
“안녕. 귀여운 숙녀 분. 어쩐 일로 왔니?”
‘구경왔어요.’라든가, ‘누구 찾아요.’등의 말을 기대한 세리아나는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달의 눈물 12개.”
“응? 뭐라고?”
“달의 눈물 12세트. 파세요.”
“…그게 얼만지 아니?”
“몰라요. 하지만 주세요.”
체리랑스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는 식의 도도함을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세리아나가 자신에게 그걸 팔아야 한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녀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세리아나는 체리랑스가 든 바구니에 돈이라도 잔뜩 들어있을까 싶었지만 바구니의 뚜껑 사이로 삐져 나온 것이 막대사탕의 막대라는 걸 깨닫고는 타이르듯 말했다.
“얘야. 달의 눈물은 무척 비싸단다. 그런데 그걸 12세트나 달라니, 돈은 가지고 있니?”
“없어요.”
“그럼 어떻게 사려고?”
“언니가 이거 보여주래요.”
체리랑스는 막대사탕을 왼손에 옮겨들고 오른손으로 왼손에 매달린 바구니를 뒤졌다. 이내 고사리 같은 손에는 잘 접힌 종이가 들려나왔고, 세리아나는 의아함 속에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거기엔 매우 간결하고 확고한 필체로 단숨에 쓴 듯한 문장이 써있었다.
[ 잔말말고 팔아.
- 나미아 이켈라인 ]
그리고 당당하게 찍혀있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의 인장. 세리아나의 표정이 굳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이 수수께끼의 소녀의 정체였다.
“어… 너… 누구니?”
“동생이요. 파실 거죠?”
“어…, 응. 그래야지. 팔아야지….”
판다는 확답이 나오자 체리랑스는 다시 사탕을 핥고는 말했다.
“8시까지 여관 WISH로 보내 달래요. 각각 세트는 포장. 나무상자에 솜 깔고 어디서 보냈는지 모르게 수신인만 써서 배달해 달래요.”
워낙 정신이 없던 차에 세리아나는 체리랑스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미안한데, 다시 한 번만 말해주겠니?”
“…….”
그녀는 어린아이로부터 한심하다는 표정을 본다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떠올릴 정도로 부끄럽다는 걸 생애 처음 알았다.
체리랑스는 그 뒤로 두 군데의 가게를 더 돌았다. 가는 곳마다 희귀한 물건을 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별로 기분 좋지도 않았고, 어떤 느끼한 아저씨가 말을 거는 통에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사탕의 값어치를 전부 했다는 생각에 나미아의 여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 체리랑스는 2개의 막대사탕을 오물거리며 먹었고, 3개째의 캔디를 꺼내들었다. 그때 자신에게 향해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꼬마야. 어디를 가니?”
“언니한테.”
“오, 그래? 거기가 어딘데? 어린아이 혼자 다니면 위험하단다.”
“괜찮아요.”
체리랑스는 조용히 말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말을 걸어온 키 큰 사내를 뻘쭘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잠시 할 말을 찾다가 체리랑스의 옆으로 붙었고, 이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세상엔 위험한 사람이 많아요. 꼬마 아가씨가 다니기에는 너무 험해. 부모님은 어디 가셨니?”
“엄마랑 아빠는 데이트. 엄마는 언니들 데리고 외출.”
사내는 체리랑스에겐 덤덤한 진실이 될 수밖에 없는 말을 듣고는 대략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이내 어린아이의 별 뜻 없는 말이겠거니 치부하고는 다시 말을 걸었다.
“이런. 부모님이 두고 다니다. 그래서 나온 거니?”
“심부름 나왔어요. 큰언니가 시켜서.”
“그래? 그럼 지금 집에 가는 길이니?”
“큰언니네.”
“그렇구나. 어딘지 알려주지 않겠니? 아저씨가 안전하게 데려다줄께.”
“끈질기네.”
“….”
“저리 가요.”
체리랑스는 무덤덤하게 사내의 접근을 차단했다. 사내는 처음으로 어린아이에게 끈질기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태껏 많은 아이들을 만났지만 대부분이 경계하던지 멋모르고 집에 대해 떠벌리는 경우 외엔 겪지 못했다. 그래도 어떤 경우든 그는 자신의 프라이드를 걸고 그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긴 했었다. 그 과정에서 부모나 보호자에게 다소의 요금을 받긴 했지만.
“당돌한 아이구나. 하지만 세상은 꽤 무서운 곳이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귀찮으니 저리 가요.”
도도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체리랑스의 말에는 그런 어조의 변화조차도 담겨있지 않았다. 너무나도 무감각한 말에 사내는 순간 마법사가 만든 귀여운 시종 인형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체리랑스는 옆에서 떠벌거리는 사내보다도 이삿짐을 나르는 마차가 앞을 완벽하게 막고 있다는 것에 더 큰 불편함을 느꼈다. 좌우를 살펴보던 체리랑스는 왼쪽의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을 갈 생각이었다는 듯한 당연한 걸음걸이였다. 체리랑스가 다소 깊숙이 골목길로 걸어갈 때, 어김없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야. 이런 골목으로 다니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나타나서 잡아가요.”
“아저씨 같은?”
“그래. 나 같은… 뭐?”
체리랑스는 멈춰 서서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사탕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아저씨가 제일 위험해.”
그러면서 체리랑스는 사탕으로 다섯군데 정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저기. 숨어있는 사람들 누구?”
“…꼬마가 감이 꽤 좋구나. 전부 나와!”
사내의 표정에선 여유가 반쯤 사라졌다. 사내의 호령에 체리랑스가 가리킨 곳에서는 비릿한 웃음을 짓는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여태껏 많은 유괴행각을 벌였는데 이런 식으로 동료들의 위치가 까발려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애를 상대로. 그는 체리랑스의 감이 날카롭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서 동료들을 탓했다.
“어떻게 숨은 거야? 애가 다 보잖아!”
“평소처럼 잘 숨었다고!”
“우리가 그렇게 어설펐나?”
“쳇, 산통 깨는 군.”
유괴범들은 투덜거렸고, 체리랑스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는 표정으로-애초에 표정이 없었지만- 사탕의 위를 오독 깨물었다. 그러다가 다시 사탕으로 다섯 명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물건을 주문하러 다니는 중간에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사내였다. 체리랑스는 거기에 짤막한 평가를 곁들였다.
“바보.”
“…너 때문이냐?”
“난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사내들은 서로 탓을 하기 시작했고, 체리랑스는 바보들의 만담을 보는 것보다도 지루한 표정을 떠올리면서 사탕을 핥았다. 그들을 정리한 것은 아까부터 말을 걸어온 사내였다.
“조용히 해! 우린 사업해야한다고!”
“아, 맞아. 사업이 먼저지.”
“자, 꼬마 아가씨. 순순히 같이 가면 다치지 않게 해줄게.”
“…죽고싶어?”
체리랑스는 무표정하게 어린 소녀가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을 꺼내놓았다. 많은 귀족집 어린 아이를 유괴했던 사내들은 순간 얼이 빠져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 강해. 다 죽을 걸.”
“얼마나 센데?”
“많이.”
“파하핫! 우리들도 많이 세단다. 우린 다섯이니 우리가 이기겠네?”
한 사내의 말에 다른 사대들도 와하고 웃어대었고, 체리랑스를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순간 머쓱하게 만들었다.
체리랑스의 표정엔 정말로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조금 전 말을 한 사내는 남들보다 더 큰 머쓱함을 느꼈기에 그것을 지우기 위해 자신들의 소위 ‘사업’을 강행하기로 했다.
“자! 꾸물거리지 말고 잡자!”
“그래!”
“가만히 있으렴….”
사내들은 천천히 다가왔다.
체리랑스의 뒤는 2야드 높이의 벽이 있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어린아이가 도움닫기를 해도 올라갈 수 없는 높이였고, 좁은 골목에 들어찬 어른 다섯 명 사이를 지나가는 것도 요원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꼼짝없이 체리랑스의 위기였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끼여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봐!”
여섯 명의 사내는 의아해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둥근 모자를 눌러 쓴 지저분한 소년이 있었고, 그 소년의 손에는 검은 공 같은 물체가 들려있었다. 이쯤 되면 서로의 정체를 묻는 이야기가 오가야겠지만 소년은 친목 다지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손에 든걸 그들의 머리 위로 집어던졌다.
퍼억!
“푸엑!”
“뭐, 에츄! 뭐야!”
“후엣취! 눈! 내 눈!”
“으아악! 따거워!”
검은 공에서 강렬하게 터져 나온 후춧가루는 사내들의 감각을 괴롭혔고, 소년은 냅다 달려서는 제일 앞에 있는 사내를 밀어붙였다.
퍼억!
“으어어어?!”
우당탕탕!
사내들은 서로 얽혀서 쓰러졌고, 소년은 재빨리 그들을 밟고서 체리랑스에게로 달려가서 사탕을 든 손을 잡았다. 소년은 다급하게 외쳤다.
“자, 가자!”
“어딜?”
“도망가야지!”
“왜?”
“위험하잖아!”
“…?”
위험하다는 말에 체리랑스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그 멍한 행동에 소년은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기껏 구해주려고 보니 백치가 아닌가?
“유괴 당할 뻔했어! 도망가야지! 잡혀갈 거야?!”
“나 알아?”
“…뭐?”
“기억이 안나. 난 너 본적 없어.”
체리랑스는 살짝 눈썹사이를 찡그리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번 나미아의 여관이 오픈 할 때 이외엔 바깥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그때 본 건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기억이 안 났다. 소년은 그런 모습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외쳤다.
“그런 거 나중에 생각하고 빨리 와!”
“아, 도망가는 거?”
“그래!”
“이미 늦었는데?”
소년은 흠칫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후추로 눈이 시뻘게진 사내들이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앞에 잇던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이 소년의 목을 붙잡았다.
“커억…!”
“흐흐흐… 이 조그만 놈이 감히 어른들의 일을 방해해?”
짜악!
우악스러운 손이 소년의 얼굴을 쳤다. 소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안이 터지고 코피가 흘러나왔다. 소년을 붙잡은 손이 한껏 뒤로 당겨졌다가 내밀어졌고, 소년은 그대로 벽과 충돌해서는 땅바닥에 구겨져 버렸다.
퍼억!
“크억…!”
소년은 고통 때문에 몸을 뒤틀면서 피 섞인 침을 입가에서 흘렸다.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어 숨쉬기도 곤란해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체리랑스는 구타한 사내와 구타당한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사내가 말했다.
“흐흐… 계집애가 맹해서 기껏 도와줄려는 사람도 헛수고하게 만들었군.”
“도와?”
“푸하핫! 이거 걸작인데?! 이러니까 혼자서 비싸 보이는 복장으로 거릴 쏘다니지! 이봐 꼬마야, 저 애송이는 널 도우려고 했단다. 우리가 널 유괴해가서 부모님께 돈 뜯어내는 걸 방해했다 이거야. 우리 사업을 훼방 놓은 거지.”
“….”
체리랑스는 침묵하면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자신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는 소년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날, 올해 초봄에 이곳에 왔을 때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거란 모호한 의식 외에는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을 도와주려다가 저렇게 맞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평소 체리랑스는 부모로부터 이런 교육을 받아왔다. ‘은혜는 반드시 갚아라.’ 체리랑스는 소년을 향해 걸어갔다.
“이거 받아.”
“크…으?”
“으음…. 아, 맞아. 그래. 도와줘서 고마워.”
체리랑스는 소년에게 먹고 있던 사탕과 바구니를 맡기고는 도움을 받았을 때 건네는 인사말을 떠올렸다. 소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체리랑스를 보았다. 궁금해하는 표정 외에 다름 표정이 떠오르지 않은 소녀의 얼굴은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도 여전히 무표정했다. 체리랑스는 말했다.
“잠깐만.”
체리랑스는 고개를 숙인 채 사내들에게로 다가갔다. 사내들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체리랑스가 드디어 포기했구나 싶어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들은 뭔가 무거운 공기가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 무거운 공기는… 체리랑스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아빠가 그랬어. 은인의 적은… 나의 적.”
체리랑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제일 앞에서 소년을 패대기친 사내는 눈앞의 소녀가 웅얼거리자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체리랑스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눈빛에는 변화가 있었다. 흉흉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나랑 놀자♡”
체리랑스는 날카롭게 웃었다. 그리고 그 몸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어엇?!”
“뭐야? 커억!”
쿠왁!
맨 뒤에 있던 사내가 허파 꼬이는 소리를 내었다. 사내들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부츠의 딱딱한 뒷굽으로 사내의 이마를 내리찍는 체리랑스의 뒷모습이 있었다. 사내의 목은 기이하게게 뒤로 꺾여있었고, 순간적으로 경추에 가해진 충격 때문에 사내는 체리랑스가 그를 발판 삼아 도움닫기 하여 뒤로 뛰었을 때 거품을 물고는 기절하며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커…허….”
털썩. 타악.
사내가 쓰러지는 것과 체리랑스가 공중에서 한바퀴 회전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치마를 누른 채 착지한 체리랑스의 뒤에 있던 소년은 순간적이지만 매우 귀중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하얗고 통통한 허벅지와 검은 실크 팬티, 그리고 허벅지 중간까지 올라와 있는 스타킹과 검은색 가터 벨트.
‘저, 저 나이에?’
절대 나이와 맞지 않는 의상조합이었다.
체리랑스는 호흡과 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착지하자마자 힘을 모은 소녀는 그대로 뛰어오르며 제일 앞에 있던 사내의 턱을 걷어찼다.
빠각!
“케엑!”
턱뼈가 두 쪽 나는 느낌과 이빨이 쪼개지는 느낌, 그리고 눈앞에 튄 번갯불을 본 사내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고, 체리랑스는 그 남자의 배를 밟으며 착지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현실을 인지한 사내들은 곧 험악한 표정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 새파란 계집애가…!”
“말 안 했어.”
“또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한 사내가 체리랑스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체리랑스는 자신의 가냘픈 몸을 껴안아서 으스러뜨리겠다는 듯한 자세로 달려오는 사내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팔꿈치를 높게 세워들어 명치에 엘보 블로를 먹였고, 주먹으로 복부에 3연발을 넣은 뒤 화려한 섬머솔트로 마무리했다.
빠악!
마찬가지로 턱에 강렬한 일격을 먹은 사내는 눈이 풀리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바퀴 돌아 안착한 체리랑스는 잔악한 웃음을 띄우면서 즐거운 듯 말했다.
“나 꽤 강해.”
“하, 한 번에 덮쳐!”
“으와아아!”
“이야아아!”
남은 사내들이 일제히 체리랑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체리랑스는 자리를 박차고 올라 다시 벽을 박찼고, 반대쪽 벽을 한 번 더 박차서 2야드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그 즉시 공중에 한 바퀴 돌아서 낙하지점을 잡고는 헛손질을 한 사내들 뒤로 낙하했다. 낙하지점은 한꺼번에 덮치라고 명령한 사내의 바로 뒤였다.
“위?…!”
체리랑스의 위치를 알리려던 사내는 소녀가 팔을 어깨 뒤로 뻗어서 자신의 목을 잡는 것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체리랑스는 낙하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머리를 축으로 삼아 사내의 목을 뽑아버릴 듯 들어올려 단번에 패대기쳐 버렸다.
쿠웅!
입에서 거품을 문 사대의 몸이 짧게 경련 했다. 이미 눈은 흰자위밖에 없었다. 체리랑스는 천천히 일어나서 옷을 툭툭 털고는 경악해이는 두 사내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천진무구한 미소를 지은 체리랑스는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더 놀아줄 거야?”
“이, 이 썅년이!”
차칵!
한 남자가 분을 참지 못하여 체리랑스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허리 뒤춤에서 대거를 꺼내들고는 달려들었다. 체리랑스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으로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쉬이익!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섬뜩한 소리를 내었다. 체리랑스는 무릎을 굽혀 목을 향해 치닫는 칼날을 피하고는 오른손의 장심으로 칼을 쥔 손가락을 올려쳤다. 사내의 손가락들이 순식간에 부러지는 순간이었다.
우드득?!
“허억?!”
헛바람을 삼킨 사내가 큰 소리를 지르게 하지 못하겠다는 심산인지, 체리랑스는 그대로 허공으로 떠올라서는 온몸을 돌리는 360도 풀 회전으로 오른 발을 남자의 오른쪽 뺨에 박아 넣듯이 질렀다.
쿠웅!
사내의 머리와 벽이 부딪히며 거대한 소리를 내었고, 착지한 체리랑스는 벽에 머리를 박은 채 경악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떠는 사내를 톡 밀었다. 앙증맞은 손가락에 밀린 사내는 그대로 뒤로 쓰러져 버렸다.
털썩.
체리랑스는 혀를 살짝 내밀어 손가락을 스윽 핥았다. 그리고는 끈적한 시선으로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남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체리랑스의 입에서는 여전히 귀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속 놀아줄 거야?”
“으, 으, 으아아아! 살려줘!”
사내는 도망갈 길이 앞에 있기에 체리랑스를 향해 전력 돌진하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체리랑스가 그걸 놓칠리는 없었다. 옆으로 살짝 비켜선 체리랑스의 다리가 잔상을 그리며 움직였고, 달려가던 사내는 허공에 걸린 로프에 채인 듯 부웅 떠서는 털썩 가라앉았다.
쿵!
사내는 찍소리도 못하고 기절해 버렸다.
여섯 명의 성인 남성을 모두 처리한 체리랑스는 손을 탁탁 털고는 머릿결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것으로 체리랑스는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는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갔다. 그곳에는 여전히 바구니와 사탕을 든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맡아줘서 고마워.”
“어… 너… 저… 그….”
체리랑스는 형편없는 소년의 얼굴을 보더니 바구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어 얼굴을 닦아주었고, 세심하게 코도 풀어주게끔 도와주었다. 그런 도중에 암암리에 마법을 사용하여 상처를 낫게 해주는 체리랑스였다. 소년의 얼굴이 깨끗해지자 체리랑스는 손수건을 보더니 그걸 소년의 포켓에 찔러 넣었다.
“가져.”
무덤덤한 말투에 소년은 조금 전 화사하고 생기발랄하게 웃으며 어른들을 유린했던 소녀의 흔적을 찾으려고 해도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누가 본다면 성격이 다른 쌍둥이였다고 했을 것이다.
체리랑스는 사탕과 바구니를 들고는 뒤를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사탕을 입에 물고서 바구니를 뒤져 캔디 세 알을 꺼내었다. 그걸 소년의 손에 쥐어준 체리랑스는 다시 막대사탕을 오른 손에 쥐고는 말했다.
“난 체리랑스. 체리랑스 킷 라이엔츠.”
“어, 나, 나는… 스티브. 스티브 맥클레인.”
“고마워 스티브.”
쪽.
체리랑스는 웃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스티브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스티브의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체리랑스의 입술이 닿았던 볼 위로 손이 올라왔다. 체리랑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생긋 웃고는 다시 표정을 굳히며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스티브가 말했다.
“저, 저기!”
“…?”
“다시… 만날 수 있을까?”
“600년 뒤에, 살아있다면.”
무감정한 말이 스티브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인간인 스티브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체리랑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른 손에는 사탕을, 왼손에는 바구니를 든 채 여기저기 얻어맞아서 기절해 있는 사내들을 밟으며 체리랑스는 그렇게 골목을 나갔다.
“600년 뒤? 무슨 뜻이지? 살아있을리가 없잖아….”
체리랑스의 모습이 사라지고서 스티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하게 맞은 것치고는 몸이 멀쩡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소년의 손에는 체리랑스가 쥐어준 3개의 캔디와 포켓에 밀어 넣은 손수건만이 남아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쓰러진 유괴범들을 피해서 골목을 나왔지만 체리랑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손안의 사탕을 내려다보던 스티브는 씁쓸하게 말했다.
“계피 맛… 싫어하는데.”
이래저래 아쉬울 따름이다.
나미아와 오디가 돌아와서 주문 받은 물건들을 들고 올라왔을 때, 체리랑스는 소파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자기 전까지 읽었던 모양인지 고등 세무 해법서인 ‘세무해법’이 놓여져 있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동생의 모습에 나미아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차마 깨울 수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아…. 역시 동생은 귀여워…!”
“심부름도 제대로 했네요. 기특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벌써 다 컸어.”
“성룡이 될 때까지는 아직 600년 남았지만요.”
나미아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오디는 살며시 체리랑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15월 14일이 애들 생일이잖아요. 올해로 400살이 된다고요. 뭔가 특별한 선물이라도 준비해야겠네요.”
“그래그래. 아유, 이쁜 것. 자는 거 깨우기 싫으니까 이대로 데려가자.”
“예.”
나미아가 체리랑스를 깨지 않게 업고서 오디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녀들은 라이니시스의 레어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라이니시스가 근심하는 표정으로 나미아가 두고 간 쪽지([체리 빌려가요! - 나미아])를 쥐고 있었다. 나미아가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아버지였지만 대면하게 된 사람은 어머니들이었다.
“너는 대체….”
“어쩜 그리….”
““배려라는 게 없니?!””
미리안은 체리랑스를 빼앗듯-하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안아 올렸고, 잠들어 있는 체리랑스는 본능적으로 따스한 어머니 품속으로 안겨들었다. 나미아는 두 어머니에게서 코러스로 듣게되는 질책에 목을 움츠렸다. 그 와중에도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착실하게 자기 무덤을 팠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언제 오디가 흉계 꾸미는 거 봤니?”
“예.”
“…말대답하긴!”
“흑. 엄마 너무해.”
미리안은 우는 체 하는 나미아를 흘겨보고서는 라이니시스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체리랑스를 보여주었다. 라이니시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눈 사이를 천천히 문질렀다.
“나미아야.”
완전히 팍 쉰 피곤한 목소리였다. 나미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빠.”
“내일 저녁에 다시 오너라. 저녁이나 먹으며 이야기하자꾸나.”
“예…. 죄송해요.”
라이니시스는 체리랑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나미아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리안과 에실루나는 라이니시스가 ‘아직’ 별 말 하지 않자 일단 질책을 미루기로 했다.
“내일 저녁때 보자꾸나.”
“네. 엄마.”
나미아는 완전히 기가 죽어서는 오디와 함께 여관으로 텔레포트했다.
여관의 5층 응접실로 온 나미아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그렇게 크게 잘못했니?”
“으음… 사람마다 보는 관점은 다르겠죠.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있다면?”
오디는 나미아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내일은 각오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나미아의 얼굴이 대번에 새파래졌다.
외전: 막내의 심부름. -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