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2: 나미아의 우울. (23/49)
  • Part2: 나미아의 우울.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16일.

    나미아가 싫어하는 상황을 꼽으라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세상사라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데, 나미아가 바로 그런 사람의 경우에 속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미아가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녀가 이룰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대부분 성취하면서 살아온 보기 드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그런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 중에 하나였다. 다른 외압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또한 그 외압이 부당한 것이기에 더더욱 짜증이 나는 그런 상황이었다.

    나미아는 날카롭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허용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에디킨츠의 국방장관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오. 이 에디킨츠 왕국 내에서는 어떤 다른 무력 집단도 행동할 수 없소.”

    “그렇다면 왜 직접 해결하시지 않고 무수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만 계시는지 여쭙고 싶군요. 세인젠트 공작 각하.”

    세인젠트 공작은 자신의 벗겨진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얼굴 전체로 웃으며, 그러나 눈은 웃지 않은 채 나미아에게 말했다.

    “이건 국내문제라오. 아무리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라고 해도 알 수 있고 없고의 정도가 있는 법이오.”

    올해로 120세를 막 넘긴 노련한 국방장관인 그는 나미아의 한계를 명확히 정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사람을 은근히 깔보는 식이라 나미아의 눈썹은 불쾌함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에디킨츠의 경제 역시 이켈라인 상회의 활동이 한몫 거들고 있는지라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영향력이 어떻게 발휘될 예상 못하는 것도 아닐 것인데 이렇게 자꾸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화가 나기 시작한다. 나미아는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모든 인력과 비용을 저희 이켈라인 상회에서 지불한다고 했습니다. 단지 해적 소탕 후의 포로 인계와 법적 처벌 절차만 밟아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항구가 묶여있으면 제일 불편한 것은 저희 상회입니다만, 에디킨츠의 무역에도 별 도움은 되지 않을 텐데요?”

    “그 말은 여기 에디킨츠 해군을 무시하는 말씀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오. 아무리 이켈라인 상회에서 아이리펜을 통틀어 한 대밖에 없는 비공정 그랜드 크로스와 고성능 전함인 “화이트 캣”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에디킨츠의 바다에서 일어난 문제는 에디킨츠 해군이 처리해야 하지 않겠소?”

    “그게 대체 언제인지 말씀해달라는 것 아닙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간신히 활로를 열게 된 대륙 간 무역에 큰 차질이 빚어집니다. 단순히 저희 상회뿐만 아니라 이건 대륙 간에 발생될 수 있는 미묘한 문제를 자극하…….”

    “그 정도야 알고 있소. 굳이 회장께서 선생 노릇을 해야 할 필요는 없소. 지금 각료회의에서 해적토벌을 위한 정벌군의 논의가 한창이라오. 적어도 반년 이내로는 결정이 나서 책임자를 선임하고, 함대를 소집해 출병할 생각이 있으니 안심하시구려.”

    세인젠트 공작의 말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도 빠른 것 아니냐는 태도에 나미아는 기가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야기할 기분이 싹 달아난 나미아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서는 국방장관실을 나왔다.

    “캬아아악! 뭐 저딴 사람이 다 있어?!”

    이곳이 아나 복도가 아니라 방음 잘된 여관방이었다면 그녀는 속에서 지른 소리를 그대로 토해냈을 것이다.

    지나가는 국방부 직원들이나 잡역부들은 신경질적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걸어가는 나미아를 보고서는 흠칫하면서 등을 벽에 바싹 기대며 길을 비켜주었다. 나미아 같은 미녀가 화를 내면 더욱 무섭다고, 그녀의 기세는 흉흉함을 넘어서 살기를 뿌릴 정도였다. 아마 그 기세가 현실화가 된다면 세인젠트 공작은 이미 열세 번은 죽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돈 대고, 사람 대고, 훗날 보상 처리까지 다 해준다고 하는데 왜 허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인가? 게다가 다른 무력집단이 국내에서 횡행하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편협하고도 급조된 티가 팍팍 나는 변명을 유들거리면서 하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나미아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아악! 성질나! 그냥 이딴 나라 따위 뒤집어버릴까?!”

    그러다가 나미아는 자신을 조절하면서 일단 뒤집는 것은 보류하기로 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을 비켜준 사람들은 순식간에 에디킨츠의 운명이 왔다 갔다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지나가는 나미아의 등과 출렁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서 감탄하기 일쑤였다.

    나미아가 그렇게 씩씩거리며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나가니 타이밍 좋게 입구에 그녀가 타고 온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마부석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마부는 얼른 내리고서는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회장님. 나오셨습니까?”

    “그럼 나오지, 들어가? 시끄럽고, 마차나 몰아! 에디킨츠 지부!”

    “옙!”

    마부는 윗사람들의 변덕이야 실컷 겪어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서 정중하게 문을 닫아준 뒤 마차를 몰아 국방부 건물 앞에 있는 큰 분수대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나미아는 잘근잘근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오디가 있었다면 뭔가 좋은 말을 해주었을 것 같은데, 지금 오디는 시론트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바쁜 상태였다.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라서 도로 불러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무능력함을 나타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할수록 그녀는 상회의 일이나 다른 복잡한 일을 전부 오디에게 떠넘겼었다. 나미아가 활약하면 할수록 오디가 많은 애를 써주었기에 그 활약상이 빛났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디와 따로 행동해 자신의 능력도 드러내 보일 겸해서 일주일 동안의 별개 작업으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두 곳에서 동시로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하아… 이걸 어쩐다?”

    일단 나미아는 모든 피해를 끌어안는다고 해도 거부하는 국방부의 반응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사건건 세상에 시비를 걸고 불신하는 그런 악질적 성격은 아니거니와 국방장관 세인젠트 공작의 말도 억지가 다분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는 법이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집단에서도 그대도 드러난다. 더러운 일은 하기 싫지만 거기서 생기는 실속을 챙기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힘든 일도 누군가 해야 하지만 자기는 하기 싫은 그런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그 힘들고 지저분한 일을 대신 해준다면 그들은 좋아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이 더럽혀지지 않아도 코를 풀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은 그것을 좋게 받아들인다. 거절하는 사람이 멍청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세인젠트 공작이 멍청이 짓을 하고 있었다. 이켈라인 상회에서 댈 수 있는 무력과 자금력을 총동원해서 상회의 이익을 방해하는 불법적 조직인 해적단을 처리하고, 그 후유증까지도 치료한다는 말을 단순히 자국방어보다도 더 낮은 개념으로 퇴짜를 놓는 것이 나라의 이익을 생각할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 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슬슬 드는 생각은, 세인젠트 공작이 국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미아는 모든 손해를 떠안으면서까지 에디킨츠에게 실속을 넘기려고 했는데,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나라가 이익을 입으면 안 되는 일로 그가 이익을 얻고 있음을 뜻한다.

    “으음… 다소 흑백논리인가?”

    조금 비약적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나미아는 자신의 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세인젠트 공작도 탈탈 털어보면 분명 수북이 쌓일 먼지가 나올 것이다.

    나미아는 씩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그 수북이 쌓인 먼지 속에서 그녀가 원하는 것이 나올지는 의문이지만, 단순히 그 먼지만으로도 충분히 쓸모는 있었다.나미아는 자신이 만들어놓고 그 존재를 까먹어버려 자구지책으로 알아서 성장해버린 정보부가 있다는 것이 새삼 즐겁다고 여겼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모두 사용하는 그녀는 이번에도 그것을 사용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호호! 감히 라이니시스 루 이켈라인의 딸인 이 나미아 이켈라인을 무시해? 당신이 뭘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붙어보자고요. 공! 작! 각! 하!”

    나미아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회장님. 화이트 캣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어디래?”

    “예. 사이에그롭 서남해 중간을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에디킨츠 영해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사흘에서 나흘까지라고 합니다.”

    고성능 기동전함 화이트 캣(White Cat)은 이켈라인 상회가 보유한 최고의 운송수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전함이었다. 주목적은 일단 전투에 초점을 두었지만, 수송에 있어서도 보통의 범선보다는 훨씬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 붙이는 이름치고는 상당히 이상하지만, 배의 소유권은 오디에게 있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나미아가 그랜드 크로스를 건조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오디는 함선을 만들겠다고 했고, 막대함 자금과 인력을 들여서 건조한 것이 이켈라인 상회의 양대 운송수단이다.

    그랜드 크로스가 따른 이동과 많은 물류 수송을 위해서 만들어진 비공정이라면, 화이트 캣은 고속기동과 고성능 함포로 무장한 바다의 패자를 노리고 만들어진 배라는 점이 다르다. 나미아와 오디의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건조물에 의아해하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화이트 캣은 만들어진 지 150년 정도 되는 낡은 함선이었다. 범선만 하더라도 반세기 가량 지나면 폐선으로 취급해야 정상인데, 아무리 철로 만들어진 함선이라도 150년 정도 지나면 그 성능에 대해서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동해 부근을 주유(周遊)하는 화이트 캣을 보는 사람들은 절대 그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화이트 캣이 이뤄낸 전설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토타카 연합조차도 골머리를 썩고 있었던 대해적단 “바다사자”를 상대로 화이트 캣 단 한 척이 출항했을 때, 그리고 그 뱃머리에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들고 있는 오디를 본 모든 사람들은 그 배와 한 사람이 일주일간에 걸친 격전 끝에 12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괴멸시킬 줄은 아무도 몰랐다.

    동남해의 패자인 데베스 왕국의 항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대해수 “블루 서펀트”가 이켈라인 상회의 무역선을 수차례에 걸쳐 파괴했을 때도 아마 그 거대한 바다생물은 선주도 타고 있지 않은 새하얀 배의 주포에 맞아 붉은 피를 뿌리며 가라앉을 줄 몰랐을 것이다.

    북해의 폭군이며, 그와 동시에 툰드라 늑대들의 숙적이었던 거대 고래 “딕비모” 역시 블루 서펀트와 같은 길을 걸었다. 툰드라 늑대들의 왕의 아버지였던 라스킨의 부탁으로 인해 출동한 화이트 캣은 수많은 늑대들이 보는 앞에서 딕비모를 죽여 그 피로 검은 북해를 붉게 만들었다. 그 외에 수많은 전설의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무적의 함선인 화이트 캣은 그 주인이 있든 없든 최강의 배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조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도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흰 바다제비처럼 새하얀 빛을 발하며 동해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신사이 해적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함선에 대항해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점은 아마 에디킨츠의 관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해군이라고 할지라도 화이트 캣을 공격 대상으로 삼거나 나포 대상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음… 일단 신사이 왕국에는 에디킨츠의 영해 부근에서 화이트 캣이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전해줘. 아니, 그냥 신사이 왕국의 외교관에게 화이트 캣이 신사이 해적단을 물리치기 위해서 에디킨츠의 영해에 들어갈 예정인데 도중에 길이 막혀 있으니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식의 연락을 넣어. 그러면 알아서 여기로 찾아오겠지.”

    “예.”

    “정보부에 세인젠트 공작에 관한 모든 자료를 3일 이내로 조사해 올리라고 해. 공작의 최근 행적, 수상한 기미, 뒷거래 같은 걸 중점으로 조사하라고 해. 당분간은 엘킨에 있을 생각이지만, 상회 운영에 참견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괜히 축하연이다 뭐다 하는 거 싫어하는 편이야. 알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세요.”

    에디킨츠 지부의 지부장으로 있는 파슬란 베일은 머릿속에 생각했던 회장님 방문 축하연의 계획은 아예 없던 것으로 돌려버렸다. 듣던 대로 겉치장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 용모나 몸매는 같은 여자라도 질투가 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모습이었다.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기에 파슬란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은 용모에 큰 신경을 쓰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것은 나미아를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는 생각이기도 하다.

    일단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당분간은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 명령이라는 것이 대부분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므로, 나미아는 남은 시간 동안 지루한 기다림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생각해 보았다.

    “으음… 여기서 도공 일을 하기도 그렇고… 책이나 읽을까? 별로 읽을거리도 없어 보이지만… 뭘 하지? 오디나 만나러 가볼까?”

    마법을 사용하면 1초도 안 걸리는 시간에 오갈 수 있으니 오디를 만나러 가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디를 만나러 간다고 해도 특별히 할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디와 나미아는 지금 현재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서 최선의 일을 한 다음에야 합류하기로 결정이 나 있는 상태였고, 그 의견을 이야기한 것도 다름 아닌 나미아였다. 오디가 만나러 온다면 모를까, 그녀가 만나러 가는 건 한입으로 두말하는 무책임한 짓이었다.

    “휴우… 조만간 신사이의 외교관이 찾아올 테니 그 사람이나 기다려야겠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겪는 기다림은 전혀 나미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정보수집기간을 3일로 책정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좌절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정도로 했으면 까마득하게까지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오디가 없으니 자신의 판단력도 많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오디이… 보고 싶다.”

    나미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버렸다.

    심심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18일.

    시론트 마을은 이제 생기를 되찾았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생기와 활기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며, 따라서 생기가 생겼다는 것이 마을의 활기가 돌아왔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보편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는 오디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에 띄게 사라져가는 곤궁을 보며 기뻐했지만, 눈에 띄게 커져가는 걱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잡혀간 사람들의 안위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다를 뒤집어버릴 듯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저 거대한 폭풍우 때문이었다.

    폭풍이 시론트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바닷가라서 수평선이 가깝게 보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유능한 바닷사람인 시론트의 주민들은 저 폭풍이 이곳까지 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저 수평선 부근이 그들의 어장이라는 점이었다.

    그랜드 크로스가 하늘에 떠 있기 시작한 지도 어언 나흘째였다. 절실한 심정에 믿었던 구세주 전설도 슬슬 희미해져갈 시점이었다. 진정한 구세주라면 그랜드 크로스에서 식량과 함께 잡혀간 사람들을 내려줬어야 했다는 것이 사람들 사이의 농담거리였다. 그래도 그들이 진정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오디가 그들에게 반드시 사람들을 구해내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어장을 완전 뒤집어놓을 듯 발생하고 있는 폭풍우를 오디가 일으켰다는 것은 쥬리아와 오디만의 비밀이었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변덕을 부리는 정도라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서였고 그런 노력 덕분에 사람들은 우려의 눈으로 바다를 보며 제사라도 지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잠겨들 때가 많았다. 물론 그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주로 남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남은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껴야 했고,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했다.

    오디는 그 무력감의 표출이 꽤나 이상한 형태로 자신에게 향했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제사장?”

    “예. 바다의 신께 지낼 제사를 위해서 오디 씨가 제사장이 되어달래요.”

    “…….”

    오디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지금까지 계속 오디의 메신저를 담당하고 있는 쥬리아도 오디처럼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저 험악한 날씨를 일으킨 장본인과 그것을 바로 옆에서 본 사람이니 당혹감은 오죽 할까?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부탁하는 거야? 난 바닷사람도 아니고, 해신을 믿는 사람도 아니야.”

    “대게 제사는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맡거든요. 그런데 그 높은 사람인 촌장님이 해적들에게 잡혀나가셨어요.”

    “난 마을 사람도 아니라고 말씀드려야 하니?”

    “저도 그렇게 말했는데요, 꼭 해야겠다고 하시던데요?”

    “하아… 정말이지…….”

    오디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에 대해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사를 지내자고 하다니,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물에 경배하는 경우가 없었고, 마법사의 경우 그 원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마법을 경배하지는 않는다.

    오디 역시 훌륭한 마법사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만든 현상에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은 안심시키기 위해 제사를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명히 그녀는 폭풍의 시작점부터 꿰뚫고 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것도 거짓된 마음에서 시작될 것이며, 거짓된 마음으로 올리는 제사야말로 해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미안해. 아무래도 난 못하겠다. 아니, 이 참에 이렇게 전해드려. 난 헤르키엘의 신도라서 해신께 제사를 지낼 수는 없다고.”

    “예. 알겠어요.”

    쥬리아가 나가고서 오디는 아까부터 계속했던 일을, 그러니까 자신에게 온 편지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일을 계속했다. 매우 깨끗한 옷을 입고 시론트의 주민보다 잘 먹은 것 같은 말을 타고 온 남자가 건넨 편지는 앞으로 2시간 뒤에 이 지역을 총괄하는 영주인 마일드 애드렌 백작이 찾아온다는 말을 담고 있었다.

    그랜드 크로스가 출몰하고서 3일 뒤에 취하는 행동치고는 꽤 느린 편이라고 볼 수 있는 이 행동에 대해 오디는 뭐라고 하기보다는 어디서 접대를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나미아의 의견에 따르자면 배고파 죽어가는 주민의 의견을 묵살한 영주 따위는 돼지우리에 처박아서 3일 동안 뒹굴게 해야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제아무리 이켈라인 상회일지라도 에디킨츠 전역에서 철수할 각오를 해야 하기에 그 의견은 못들은 것으로 취급했다. 그리고서 생각 중인 것은, 시론트에서 가장 깨끗한 곳을 마련하여 접대를 하게 하는 것과, 그랜드 크로스를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랜드 크로스에서 대접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영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랜드 크로스는 나미아와 오디의 가족과 지인들과 “소중한 손님”만을 위한 승용물이었다.

    인간적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은 영주 따위를 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그랜드 크로스는 접대장소에서 제외했지만, 정작 그랜드 크로스가 아니면 영주의 지위에 걸맞은 격식 있는 접대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그랜드 크로스에서 접대하지 못한다고 했을 경우 변명이 여러모로 궁색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상대편도 은근히 그랜드 크로스에 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기분 정도는 띄워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랜드 크로스의 소유자인 나미아가 있었더라면 어떤 대답이든 해주었을 것 같지만, 지금 그랜드 크로스는 오디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 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던 오디는 결국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허허! 이거 참 아쉽군요.”

    “저 역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랜드 크로스의 상태가 영…….”

    “그 고충 이해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서 저 유명한 그랜드 크로스를 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자랑거리가 생겼군요. 허허허!”

    마일드 애드렌 백작은 한창 외부 수리가 진행 중인 그랜드 크로스를 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점잖은 표정으로 시론트에 도착했을 때, 그랜드 크로스는 고정 훅을 마을 곳곳에 박아두고서 공중에 뜬 채로 수리 중에 들어가 있었다. 비공정에 대해 모르는 백작일지라도 겉면에서 용접작업 중인 비공정이 무엇을 하는지는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저 그랜드 크로스가 서 있었는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군요. 수리는 언제쯤 끝난다고 합니까?”

    “상회의 본사에서 기술자를 불렀는데, 나흘쯤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나흘씩이나… 빨리 고치길 바랍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오디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속으로는 찢어져라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랜드 크로스에는 항상 예기치 않은 상황을 대비해 많은 전문인력이 탑승하게 된다. 그중에는 당연히 정비반이 있는데, 오디는 비공정에 대해선 아무런 지식도 가지지 않은 백작의 우둔함을 이용하여 그랜드 크로스가 무리한 운행으로 고장이 나 복잡한 수리에 들어가 있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정말로 비공정이 고장 났더라면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없겠지만, 그런 사실조차 알 리가 없는 백작은 아쉬운 표정만을 지었을 따름이고, 꽤나 높은 고도의 상공에서 하릴없이 용접질을 하던 정비원들은 피식 웃고 싶은 지경이었다. 워낙에 그랜드 크로스에 타는 사람을 가리는 일이 많았던지라 별의 별 위장 수단이 사용되곤 했었기에 이번 일은 그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오디에게 있어서 접대는 흔한 일 중에 하나였다. 나미아는 실질적으로 이익이 나는 행동, 결재 인가라든가 수취인계 같은 작업을 좋아했기에 여러 가지 사업 이야기로 자신을 대단한 사람인 양 치켜세우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오디의 일이었다.

    지금 찾아온 애드렌 백작의 경우도 오디가 상대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는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그랜드 크로스가 떡 등장하니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다.

    오디는 백작과 그 수행원을 촌장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나마 시론트에서는 제일 격식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을 장소라서 나미아는 그곳 안주인의 허락을 받고는 그랜드 크로스에서 가져온 집기들로 내부를 장식했고, 귀족을 맞이하기에 큰 무리가 없는 장소로 탈바꿈해두었다.

    백작은 그랜드 크로스가 아니지만 시골 마을에서 받을 수 있는 대접치고는 꽤 괜찮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내심 만족하고 있었고, 오디 역시 그 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단 대화를 하기 위한 마음가짐 정도는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데 그녀는 안심했다.

    접대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그녀가 직접 차를 타게 되었고, 첫째로 상대방을 높여준다는 접대의 기본 사상에 백작은 크게 만족했다. 어딜 가더라도 이켈라인 상회의 총무가 타주는 차를 마셔봤다는 걸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디로서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그것을 파악하거나 드러내기 전까지는 접대등급의 조정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가 그냥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끝날 경우엔 끊임없이 이 태도를 유지하고 다음 문제는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맛있는 차군요. 솜씨가 아주 뛰어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차향이 잠시 그들의 머리 위를 떠돌면서 그 맛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의 향기에 정신을 내맡기기에는 목적한 바가 뚜렷한 애드렌 백작은 천천히 그 속내를 드러내고자 했다.

    “오늘은 참 좋은 하루가 될 것 같군요. 깨끗한 차향이 코를 시원하게 하고, 깔끔한 차가 입을 시원하게 하고, 또 아름다운 미녀가 눈앞에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하니 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백작님 역시 용맹하고 사리분별이 뚜렷하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쓸데없이 돌진하는 멧돼지의 용맹함에 반대 방향으로 뚜렷한 사리분별력이지.”

    오디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전개하면서도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미아처럼 대놓고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뱉지는 않지만 적어도 속으로는 솔직하게 할 이야기를 전부 했다. 오디가 입으로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심기도 건드리지 않고 고차원적인 사고 과정도 필요로 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들리기에 백작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크게 만족했다.

    “하하하! 이거, 허명이 참 여기저기 퍼졌군요. 당혹스러울 따름입니다.”

    “진실된 모습이 알려지는 것뿐입니다.”

    “알려지는 걸 바라지도 않겠지만. 허명이 더 좋잖아?”

    “그건 그렇고… 이런 시골에서 이켈라인 상회의 저 유명한 그랜드 크로스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시게 된 건지…….”

    “몰라서 물어?”

    오디는 슬쩍 창밖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접근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영주님을 보겠다고 몰려드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래도 간혹 가다 오디가 있는 곳을 흘깃 쳐다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소소한 시선에 신경 쓸 정도로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디는 다시 시선을 거두고는 말했다.

    “이켈라인 상회에서 사회 환원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희 상회는 신사이 해적단의 출몰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은 다른 사람들이 남 같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중에서 이곳 시론트는 첫 번째 피해 장소이고 제일 큰 피해 장소이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

    “허허! 그러시군요. 하지만 그전에 영주인 저에게 언질 정도는 주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도 주민들의 일인지라 손놓고 있을 수가 없지요.”

    “영주님의 공정한 행정에 대해서 의심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가끔 사람의 목숨이 서류의 결재 속도보다 빠르게 처리되는 상황도 종종 발생하니까요. 당장이라도 돕지 않으면 굶어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신이 굼벵이 같다는 말을 하는 거야. 당신하고 상의하면 할수록 1분에 한 명씩 굶어 죽었을걸?”

    “그러잖아도 주민들을 돕기 위해 나설 참이었습니다만, 어렵게 구입한 식량들도 처치 곤란이 되었군요.”

    슬슬 본론인가. 색깔이 다른 오디의 양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녀는 일단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그것 참 곤란하게 되셨군요.”

    “그렇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거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처치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서…….”

    이미 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대강 틀이 잡혀 있었다. 오디는 애드렌 백작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고 있었고, 애드렌 백작은 오디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다. 서로의 의중을 잘 알기에 그것을 피해가려는 대화가 진행되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수박 겉핥기 이상의 깊이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구입처에 다시 환불하시는 것은?”

    “다른 물건이라면 몰라도 식량 아닙니까? 음식물은 금방 상하기 마련입니다. 제 값도 받지 못하죠.”

    “심려가 크시겠군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원래는 이걸 구입가 그대로 주민들에게 판매할 의향이었는데…….”

    오디는 위로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한껏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주민들이 굶어 죽든 말든 당장 식량창고를 안 풀던 사람이 원가에 식량을 제공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주민들의 배고픔이 악에 받혀서 뭐든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해질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그랜드 크로스에서 식량을 주고 마을의 어려움을 해결하니 한몫 거둬보려는 애드렌 백작의 심려가 커진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오디에게 자신이 구입한 식량을 어서 구입하라는 식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디가 계속 표면적 의미만을 고집하면서 대화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는 대화를 오래 끌고 가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오디는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자신으로서는 저 영주가 사왔다는 식량의 양이나 품질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 부르는 값을 줘야만 한다. 거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은, 영주가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영주는 상식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아슬아슬한 상한가를 제시할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이켈라인 상회에 유용자금이 남아돈다고 해도 품질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식량에 시중가의 몇 배 되는 돈을 줄 수는 없었다.

    애드렌 백작은 오디가 왔기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입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황을 유리하게 몰아가려고 했다. 거기서 생기는 변제의 의무를 오디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주민들을 상대로 긁어모으지 못한 이익을 챙기겠다는 속셈을 오디는 읽을 수가 있었고, 그에 대해서 충분히 대응을 할 수도 있었다. 오디는 표정을 바꾸지 않을 채 말했다.

    “해적 때문에 여기저기서 문제가 많더라는 말이 들리더군요. 생각해보니 신사이 해적단은 영주님의 영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던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중앙의 결정이 있어야 해군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에디킨츠의 편제에 대해서 제가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만, 이건 생활의 안전을 위협하는 집단의 거동인 만큼 자율적인 군사행동도 가능할 텐데요?”

    “육군이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해군은 나라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죠.”

    “하나도 골치 아픈 모습이 아닌데? 오히려 잘됐다는 식이잖아.”

    오디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대신 눈썹만 살짝 움찔거리고는 찻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영주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이리펜 대륙에 있는 나라들의 편제를 대부분 꿰뚫고 있는 오디는 에디킨츠에서는 유일하게 육군만이 각 영주들이 자의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였다. 모으기도 쉽고, 운용하기도 비교적 쉬운 편이라 육군에 있어서는 어떤 나라든지 지방 유지의 자율 권한에 맡겨져 있었다. 부족사회를 이루는 사이에그롭을 제외하곤… 그러나 그 해군이라는 군대를 움직이는 방법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당한 사유를 엘킨의 국방부에 서면 제출하면 길어야 3일 정도 걸리는 심사 뒤에 해군 출동이 결정된다. 해적이 나타나서 무역과 마을에 피해가 갔다고 하는 이유라면 해군의 출동은 당장 이루어질 수 있다. 오디는 일단 그것부터 제대로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해군의 출동을 요청하신 적이 있습니까?”

    “해군의 출동이라기보다는… 그냥 상황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습니다. 판단은 중앙정부에서 해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해군의 출동에 대해서 언급이라도 하셨는지요?”

    “별로 그쪽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보고는 다른 곳에서도 올라가고 있겠지요.”

    “아아, 그러시군요. 어차피 영주의 성이야 내륙에 있고, 해적의 습격에서 자유로운 데다가 아무런 피해도 없으니 상관없다는 식이로군. 무슨 통치자가 이딴 식으로 살아간대?”

    오디는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이렇게까지 주변머리 없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대체 해적이 날뛰면서 피해를 입히는데 그걸 생각 못하고서 안이하게 대처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장 1년 뒤만 생각하더라도 이로 인해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가 올지는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가?

    “그렇군요. 그럼 해적 토벌은 당분간 요원하겠군요.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라면 역시 계속해서 주민들의 피해가 닥칠 거라는 점입니다만, 식량은 계속 가지고 계시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듭니다.”

    “그, 그게… 관리가 취약해서…….”

    “그거야 구입한 사람의 문제입니다. 제 상인의 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이런 사태가 계속 되면 그 시간 동안은 지속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할 것 같군요. 계속 가지고 계시는 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먹지도 못할 식량,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썩히라지. 정말이지 바보 아냐? 수탈하려고 해도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오디의 말투는 다소 싸늘했고,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였다. 실수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애드렌 백작은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밝혀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싸구려 식량-오디는 그렇게 간주했다-을 비싼 가격에 팔아먹고자 하는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이 너무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하려면 좀 더 치밀하게 생각을 하고 덤볐어야 했다.

    관할 영주에게 예고도 없이 그랜드 크로스를 들여온 일이나, 임의로 구휼식량을 풀어 영주의 수고를 헛되게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거기서 자신의 허물을 드러내는 건 바보나 할 짓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오디는 반쯤 식은 차를 가볍게 들이켜면서 생긋 웃었다.

    “하지만 역시 여분 식량의 관리가 문제라고 한다면 그 점은 저희 상회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며칠이나 지난 식량이라 그런지 구매가 꺼려지는군요. 아시겠지만, 저희 이켈라인 상회에서는 상품(上品)의 상품(商品)만을 취급한답니다.”

    “푸, 품질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넌 걸렸어. 장사경력 400년이 넘는 날 등치려 해?”

    오디는 중간에 애드렌 백작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래요? 그러면 다행이군요. 품질 조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저희 상회가 알아서 영주님이 거래하셨던 상회나 상단에 접촉해보도록 하지요. 일단 먼저 상품에 대한 사전 조사가 먼저니까요. 그리고 물건은 빠른 시일 내로 시론트까지 가져다주셨으면 합니다. 파손되거나 상한 물건에 대해서는 그때 따로 이야기를 해보지요. 아, 실례하지만 그랜드 크로스의 수리 때문에 이만 가봐야겠군요. 그럼 쉬다 가세요.”

    오디는 완전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버렸고, 애드렌 백작이 뭐라고 하기 전에 차를 마저 마시고는 자리를 일어나버렸다. 애드렌 백작은 뭔가 물건이 팔렸다는 점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오디가 나가고 한참 뒤에야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아무리 귀족의 비호를 받는 상단이라고 할지라도 이켈라인 상회에서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원가가 공개되고, 최대한 물건을 실어온다고 해도 2할에서 3할 정도가 상하는 건 막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손해로 모든 것이 다가오게 된다는 걸 깨달은 애드렌 백작은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얕은꾀에 자기가 넘어가 버린 경우였다.

    같은 시각, 나미아 역시 꽤나 높은 직위에 있는 손님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둘 사이에 알 수 없는 공통점이 있는 것인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본인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들 모두가 그녀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전제로 하자면 오늘 하루 동안 그녀들에겐 무언의 공통점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디킨츠의 국왕 “캐트스나일러 오르펜 바일나하 에디킨츠”는 자신의 아래에 있는 수많은 귀족들에 대해서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이기에 측근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특별히 박해하거나 편애하는 귀족도 없이 평이한 정치성향을 유지 중이었다. 그런 그는 오늘 왠지 한 명의 귀족을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주고 싶은 욕망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폭력적 성향이라든가 그의 가계 속에 숨겨져 있던 폭력의 피에 눈을 떴다거나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에게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을 안겨준 원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센 한숨을 내쉬면서 소파에 등을 묻고는 나미아에게 말했다.

    “푸후! 언제 알았어?”

    “얼마 되지 않았어. 그저께 세인젠트 공작하고 만나본 다음에 조사하라고 한 거였거든. 그런데 의외로 잭팟(Jack pot)이 터질 줄은 몰랐지.”

    “이걸 사실이라고 규정하면, 나는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니?”

    “알아서 해결해. 정보원한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본다. 이봐, 스나일. 왕이면 이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라고.”

    나미아는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는 빨대로 아이스티를 빨아올렸다. 아이스티의 수위가 줄어들면서 얼음들이 무너지며 카랑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캐트스나일러, 일명 스나일이라고 불리는 에디킨츠의 국왕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여러모로 도와주던 친구가 건네준 정보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왕으로서 다른 귀족을 음해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고, 그 대부분이 현실이 아니라 신뢰가 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인 나미아만큼은 그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국방장관인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은 특별히 위험하다거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과 이익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면이 왕실에 대한 반역 행위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신임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렇게 화려한 뒤통수치기에 크리티컬로 당해버렸다.

    “정보력이 닿는 대로 조사를 해봤어. 신사이 해적단의 일부가 신사이 해군이라는 점은 또 몰랐지만 말이야. 그리고 신사이 해적단과 밀리언 세인젠트가 연루되어 있다는 점은 의심하고 있던 바였는데… 생각보다 큰 수확이었어.”

    “너무 커서 머리가 흔들릴 지경인걸.”

    “에에. 고작해야 69세밖에 안 된 청년이 왜 그러시나. 역사에서 역적모의가 어디 하루 이틀이었니?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문제야. 사실 이 세계는 너무 조용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고. 뭐, 요즘에는 과학이나 마학(魔學)의 발전 덕분에 그쪽으로 눈 돌리느라 다른 생각이 안 나는가보지만.”

    “한 나라의 왕한테 너무 압박 넣지 말아줄래?”

    나미아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스나일은 자신이 조금만 더 성질이 급했더라면 당장 궁성수비대를 이끌고 세인젠트 공작가로 쳐들어가서 그의 목을 효수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현재 유일한 증거라고는 나미아의 조사 보고서밖에 없었고, 이것은 단순한 뒷조사일 뿐이었다. 정확한 정황을 나타내는 증거가 없으면 아무리 역적처단이라고 할지라도 왕의 변덕에 의한 살인으로밖에 남지 않는다. 또한 그렇게 되면 귀족들이 왕에 대한 불신을 하게 되고, 서서히 왕을 반대하는 세력도 생겨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에디킨츠라는 나라 자체가 불신이라는 해머에 얻어맞아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 모든 최악의 사태는 결국 단 하나의 요소가 부족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스나일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그의 생각 도중에 나온 그 요소를 놓치지 않았고, 그것을 나미아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으로서는 그녀가 유일한 해답을 가진 해답처였다.

    “끄응… 나미아. 뭔가 좋은 증거 없어?”

    “증거? 흐음… 글쎄?”

    “이보세요. 난 네가 일을 허술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애초에 있느냐 없느냐만 말해줬으면 좋겠어. 부탁이다.”

    “으으으음… 스나일. 내가 누누이 너한테 말하는 게 있었는데… 이번에도 잊어버렸구나?”

    “에? 뭐, 뭐를?”

    “하아… 역시. 두 번 말 안 할 테니까 잘 들어. 난 상인이야.”

    짧고 강렬한 한마디였다. 스나일은 비로소 눈앞에 있는 이 오래 산 친구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인이라는 사람들은 가치와 가치를 교환하는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가치를 올리고 상대가 가진 가치를 깎아서 거래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다는 말을 생활의 철칙으로 삼는 사람 중 하나였다.

    스나일은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말문을 열었다. 어째 일국의 왕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후우… 원하는 게 뭐야?”

    나미아는 히죽히죽 웃고는 손가락 두 개를 들어올렸다.

    “하나는 화이트 캣의 영해 진입과 전투행위 허가. 다른 하나는 신사이 해적단이 모아둔 보물에서 9할!”

    첫 번째 조건이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분이지만, 두 번째 부분에서 스나일은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9할이라니, 이건 그냥 날로 먹겠다는 소리잖아? 그 비용이면 차라리 해군을 출동시키는 편이 나았다.

    “안 돼! 반으로 분할해.”

    “뭐? 야! 해치우는 게 이쪽인데? 화이트 캣은 물 먹여서 움직이는 줄 알아?”

    “보석 먹고 움직이는 배는 아니잖아. 이쪽도 피해 입은 게 있다고. 물론 너네 상회에서도 타격이 크겠지만, 솔직히 그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이쪽에서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 건도 처리할 건데? 너 합법적으로 그 일 해결할 수나 있어? 6할. 많이 봐준 거야.”

    “어쭈? 허 참! 야, 전투는 이쪽에서 한다고. 피 흘려도 이쪽에서 한다는 거야. 내가 역적모의 정보까지 알려주고, 골칫덩이까지 해결한다는데 고작 6할이야? 좋아 마음 썼다. 8할.”

    “사후 처리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지 알아? 솔직히 말해서 너네는 장사나 하면 그만이잖아? 통치자의 고뇌 따위 네가 알기나 해? 7할. 더 이상 부르면 없던 거래로 하겠어.”

    “우쒸! 그래 7할. 하여튼 손해 보는 것도 싫어해요. 칫!”

    나미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한 분할은 자신 쪽이 6할이었는데, 일부러 높게 부른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흥정의 기본은 일단 상대가 힘들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쪽에서는 선심 쓰듯 천천히 그쪽의 최소 구색만 맞춰두면 흥정 성공이었다.

    스나일은 그래도 나미아를 상대로 3할이나 얻어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저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의 막무가내를 그나마 거기까지 후퇴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서는 잠시 멈췄던 거래를 진행시켰다.

    “자, 이제 증거를 줘.”

    “아, 그거? 없는데?”

    나미아는 천연덕스레 말했고, 순간 스나일은 사기당한 사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미아가 너무나 당연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스나일은 너무 많은 말이 한 번에 나오려다 속에서 꼬여버렸다.

    “뭐라고?”

    “이제 찾아와야지. 세인젠트 공작의 집무실에는 비밀금고가 있다고 하더라. 오늘 가서 털어 올 생각이야.”

    나미아는 대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 어느 시점을 넘어가면 떠올리는 생각이 있었는데, 스나일 역시 오랜 친구라 하더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이 여자 제정신이 들어 있긴 한 거야?

    “잠깐, 지금 왕 앞에서 귀족의 자택을 털어버리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어머! 그러네? 그럼 어떻게 하실래요, 폐하? 소녀를 잡아가실 생각이시옵니까? 아아! 이대로 잡혀가면 난 후궁으로 들어가서는 눈물로 옷자락을 적시면서 평생 나올 수 없는 감금생활을…….”

    “사양하겠어. 왕국 말아먹을 후궁은 들이고 싶지 않아.”

    “나도 이런 소국의 왕한테 첩으로 팔려가고 싶지 않아.”

    “그 소국 소리 좀 그만둘래? 이래 봬도 잘살고 있다고.”

    “어머나, 소심해라.”

    스나일은 눈을 부라렸고, 나미아는 딴청을 피웠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나미아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 정도면 빨리 눈치 챈 정도지만 그는 재차 멈췄던 얘기를 가동시켰다.

    “털 땐 털더라도, 공작이 모르게끔 해.”

    “에? 그래야 해? 나 지금 예고장 문구 생각하고 있었는데. 데뷔 명은 ‘신기한 바람의 괴도’ 정도로 하면 어떨까?”

    “그만둬. 내가 당했다는 것도 모르게 당한 만큼 공작한테도 당한 줄도 모르게 당했다는 기분을 안겨주고 싶어서 그래. 친구로서 부탁이다. 응? 제발 우리나라 좀 조용하게 살아가게 해줘.”

    스나일의 태도는 정중함을 넘어서 간곡하기까지 했다. 나미아는 어린 친구를 놀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이라 할지라도 너무 가지고 놀면 망가지니까. 그래도 이 장난감은 복원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며칠 놔두면 다시 가지고 놀기 좋은 상태가 된다. 나미아의 입장에서는 매우 즐거운 상대인 것이다. 스나일의 생각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녀는 무엄하게도 에디킨츠 국왕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부탁이니까 들어줄게. 에구, 불쌍한 스나일. 왕이 되더니 아주 깐깐해졌어요.”

    “아, 그러려니 해. 너도 왕이 피곤한 직업이란 것 정도는 알잖아? 세계의 왕들과 전부 친하면서 말이야.”

    “그렇지. 내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기도 하고. 그럼 해결은 너에게 맡길게. 오늘밤은 외롭겠지만 독수공방하고 있어라. 중요 서류들 들고 찾아갈 테니까.”

    “왕궁에 방은 많은데, 자고 가지?”

    스나일은 순수한 의도로 친구를 초대했지만 나미아는 그가 느끼지 못한 만큼 짧은 순간 동안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가끔 사람의 호의가 순수하다는 걸 알면서도 거절해야 될 때가 있었기에 그녀는 생긋 웃으며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왕궁에 늑대들 사이에서 잘도 자겠다. 파하핫! 난 괜찮아. 그러니 네 침실로 칼 든 암살자가 들어가지 않게 주의나 하셔.”

    “여전하구나. 일 전부 끝나면 파티라도 열 테니까 그때는 참석해줄 수 있지?”

    “물론이지! 그때는 꼭 갈게. 정식으로 초대장 보내줘.”

    “약속한 거다? 그럼 난 다시 왕궁으로 가서 귀족들과 따분한 뜬 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어야겠다. 왕이라는 직업은 정말이지 피곤해.”

    스나일은 일어나면서 벗어둔 망토를 입었다. 나미아는 그가 망토를 입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긋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스나일은 씩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힘들겠지만, 아무튼 힘내. 힘든 일 있으면 도와줄게.”

    “고맙다. 자주 놀러와. 언제든 환영이니까.”

    “그럴게. 아, 배웅은 안 할게. 스캔들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야. 잘 가.”

    나미아는 손을 놓고 오른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스나일은 오른손을 한번 슥 들어주고는 안경을 쓰면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친구라는 건 좋은 것이다. 나미아는 한 건 해결됐다는 즐거움에 찬 미소를 지으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소리 소문 없이 공작의 금고를 터는 일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역시 밤이 돼야 괴도의 기분이 나지 않을까?

    나미아는 스스로의 생각이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19일.

    에디킨츠 왕궁에서는 각료들이 모여서 아침마다 회의를 한다. 오늘도 그런 취지로 모여서 회의에 들어가기 전 각료들끼리의 잡담이 계속되고 있는 평범한 날이었다. 한 가지 좀 덜 평범한 점이 있다면 회의의 호스트인 국왕이 상당히 늦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따라 폐하가 늦으시는군.”

    “그러게 말이오. 평소엔 이러시지 않으시던 분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료들은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특별히 오늘 아침부터 그들의 식단이나 가족들의 행동에서 별다른 기미-고기 위에 뿌려진 소스로 씌어진 “죽어!”라는 글자나 실수를 가장하여 화병을 떨어뜨리거나-도 보이지 않았던 이들은 국왕의 등장이 늦어질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회의 시간에서 30분 정도 늦은 시각에 캐트스나일러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도착했을 때는 서로 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법한 각료들이 모두 침묵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캐트스나일러는 혹시나 나미아의 일이 실패한 것은 아닐까 싶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일국의 왕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평온함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과인에게 갑작스런 일이 생겨 늦고 말았소이다. 헌데 왜 그리 다들 표정이 어두우시오?”

    “잘 모르겠사옵니다. 왠지 모르게 오늘 아침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 들더군요.”

    “신 역시 그렇습니다. 왠지 오늘 회의는 잊혀지지 않을 회의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만 드는군요.”

    법무장관과 내무부장관이 어눌하지만 그래도 희망적 관측을 위한 미소를 띠는 것으로 각료들의 말문이 트였다. 특별한 공기를 의도한 것도 아니지만 캐트스나일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마법처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캐트스나일러는 어젯밤 나미아가 찾아와서 주고 간 문서들을 담은 봉투를 자리 앞에 올려두었다. 국왕인 그가 서류를 들고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흔하디흔했기에 다른 이들은 모두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저 속에는 신사이 해군과 연계되어 있는 신사이 해적단과 거래를 맺고서 에디킨츠의 해상 무역로를 봉쇄해 모종의 이익을 챙기는 밀리언 세인젠트의 이름이 써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캐트스나일러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가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한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정기 회의의 시작을 선언했다.

    회의에서는 예산의 사용이나 행정 업무, 범법자 발생 등 에디킨츠 전역에서 올라온 중요 안건들의 처리와 각종 관공서에서 올라온 기획서의 예산 검토 등 평소와 다름없는 말이 오고갔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는 2시간 반 뒤, 각료들은 그들이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느꼈던 위화감을 기억할 수 없었다. 캐트스나일러도 국방부장관과 매우 친밀한 회의를 거쳤고, 아무도 아침에 있었던 불안한 공기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회의는 말다툼도 없이 평화롭게 끝을 보게 되었고, 내무부 장관의 폐회 인사로 회의가 끝나려는 시점이었다.

    “이것으로 정기 조례 회의를 마치도록…….”

    “아, 마지막 안건이 남았소이다. 이거 시간을 끌게 되어 미안하오. 어차피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짐을 탓하지 마시구려.”

    캐트스나일러는 더없이 인자한 얼굴로 말해서 행여나 느낄 수 있는 불안감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는 뭔가 즐거운 소식을 전하는 얼굴로 봉투에서 서류들을 꺼냈고, 그것을 직접 읽기 시작했다.

    “짐이 말하는 안건이란 이것이오. 최근 본국의 서해에 출몰한 신사이 해적단이 사실 신사이 해군과 접점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는 조사요.”

    “아니 그런!”

    “흉측한 작자들입니다!”

    “감히 위대한 에디킨츠에게 그런 수작을!”

    각료들은 국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리고 개인적 분노의 표출을 위해 에디킨츠의 남쪽에 있는 신사이라는 나라를 성토했다. 당연히 그 사람들 중에는 뻔뻔하게 신사이를 성토하는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이 있었다. 한참 동안 각료들이 떠들게 내버려둔 캐트스나일러는 손을 들어 그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감히 본국에 대해 그런 맹랑한 도발을 걸었으니, 당연히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어떻소? 밀리언 세인젠트 국방부 장관?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당연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무력 경쟁이 되더라도 에디킨츠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그대의 생각이 참으로 옳소. 헌데 이걸 어쩌오? 참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또 하나 벌어지고 말았다오. 경들은 무슨 일인지 아시겠소?”

    각료들은-심지어 밀리언조차도-모두 어리둥절해하면서 대체 국왕이 무슨 말을 할까 의아해했다. 캐트스나일러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척 올려두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 신사이 해적단과 연계한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있소. 그 이름은 밀리언 세인젠트이고 경들도 잘 아시는 공작님이시오.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이까? 안 그렇소?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

    “그, 그건 무, 무슨?!”

    경악하는 밀리언과 각료들에게 캐트스나일러는 자신이 가지고 온 서류를 내밀었다. 그것을 꽤 두꺼운 분량의 서류였는데, 일종의 계획서 같았다. 캐트스나일러는 말했다.

    “다들 이 서류를 보시오. 과인이 보기에도 가히 좋은 거래라고 할 수 있소. 해군을 묶어두는 대신 상당한 재화를 약속 받았소. 그리고 여기에는 에디킨츠가 신사이에 항복할 것을 여념에 두고서 작성된 부분도 아주 많다오. 그 첫 번째로 해군을 출정시켜서 해적단과 신사이 해군과 싸우게 해 전멸시키고, 그것을 추궁 삼아 왕권의 약화. 그 뒤에는 자연스러운 반란. 반란의 수괴는 신사이에 지배권을 양도한다는 계획이오. 문서가 좀 길어서 그렇지 꽤나 구체적이라 놀라울 따름이라오. 이걸 보자면 아마도 한패를 만들었거나 끌어들일 생각이라고밖에 볼 수가 없구려.”

    “폐, 폐폐폐, 폐하! 이건 모함입니다! 이런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서류를…….”

    “출처? 출처라면 매우 확실한 곳이오. 세인젠트 경의 집무실에 있는 비밀 금고라고 하더외다. 간밤에 경은 경의 집무실이 털린 줄도 몰랐소? 그리고 여기 협정서에 있는 인장은 당최 누구의 것이오?”

    “폐, 폐하!”

    “변명은 나중에 심문 받으면서 하게나. 이봐라! 이 반역자를 당장 무장해제하고 감옥으로 호송하라!”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은 모든 것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밝혀지자 차마 저항할 수단도 생각하지 못한 채 경비병들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각료들은 무슨 생각의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국왕이 혼자서 결정해버린 일에 불만 제기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세인젠트 공작에게서 어떤 반역의 기미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몇몇은 어두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캐트스나일러가 언급하지 않은 내부 조력자들이었다.

    “물론 반란엔 조력자가 있어야겠지. 오늘 정오까지 시간을 줄 테니 알아서 나와주시기 바라오. 법무부 장관 존 타일러 후작! 경은 속히 궁성수비대 1소대에서 3소대를 데리고 반란을 도모한 주모자인 밀리언 세인젠트 공작의 저택으로 가서 그의 가족과 사용인 모두를 체포하고 내부를 수색하여 또 다른 반역의 증거를 가져오시오! 외무부 장관 악시드 악타일러 백작! 엘킨 소재 신사이 대사관으로 궁성수비대 4소대를 데리고 신사이 대사를 체포하고 대사관 직원을 모두 체포하시오! 그 직후 신사이 대사관을 폐쇄하고 모든 외교채널을 통해 신사이의 악행을 전 대륙에 알리시오!”

    ??예! 폐하!”

    “예! 폐하!”

    “다른 각료는 이 일을 입 밖으로 절대 내지 말 것이며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누설하는 자는 똑같은 반역행위로 처단할 것을 명심하시오! 이만 조례 회의를 마치겠소.”

    캐트스나일러는 서류를 법무부 장관에게 맡기고서 회의장을 나갔다. 그제야 각료들은 아침에 떠돌던 불안감이 이런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국왕이 국방부 장관의 역모 정보를 어디서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역행위에 가담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물론, 그중 몇몇은 정오까지 수비대에 출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자. 여기.”

    “와우! 의외로 빠르네?”

    “범법행위 적출에는 빠르지. 이 식별 번호로 해군과 연락을 취하면 별 마찰 없이 올 수 있을 거야.”

    “알았어. 고마워. 이걸로 나도 슬슬 이동할 수 있겠네?”

    나미아는 캐트스나일러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제 이걸로 오디가 있는 시론트로 거침없이 향할 수 있게 되었다. 캐트스나일러는 너무나 좋아하는 나미아를 보면서 그녀의 기분에 맞춰주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고 생각했다.

    “기분에 초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3일 뒤에 무도회를 열 작정이야.”

    “뭐엇?! 왜? 갑자기 무슨 이유야?!”

    “당연히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반역의 무리를 휩쓸게 되어 나라에 안정이 찾아옴을 기념하는 무도회지. 나중에 참석해준다고 했지? 그때 참석해줘.”

    “자, 잠깐만! 3일 뒤면… 22일이잖아!”

    22일이면 오디가 화이트 캣과 함께 해적을 물리치러 갈 날이었다. 나미아는 그때 꼭 따라갈 것이라는 다짐을 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게다가 파티에 한번 꼭 참석하겠다는 말을 자기 입으로 했으니 무를 수도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캐트스나일러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나미아를 압박하고 있었다. 짐을 지워준 자의 득의양양한 웃음이었다.

    “참석해줬으면 좋겠어. 대대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지만 이번 일의 주역이잖아?”

    “우… 하, 하지만 난… 나안…….”

    “그럼 내 후궁이라도 되어주든가.”

    “갈게. 가면 되잖아. 말도 안 되는 조건 붙이지 마. 칫!”

    나미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히죽 웃는 캐트스나일러의 얼굴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팩 젖혔다. 정작 재미있는 일은 해적소탕인데, 그날 빠지게 되면 지금 가서 21일까지 시론트에 있어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시론트에서 자신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갈 필요도 없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친다는 생각에 나미아는 그만 버럭 화를 내고야 말았다.

    “아아악! 짜증 나! 너! 국왕이면 다야?! 나이도 어린 게!”

    “약속은 약속이야. 지켜. 나미아가 친구와의 약속도 못 지킬 값어치의 여자였냐? 이야, 그거 참 싼값이네?”

    “우우… 우우우! 스나일 나빠! 너 정말 나빠! 싫어! 미워 죽겠어!”

    “맘대로 해. 그럼 초대장은 나중에 보낼 테니까 그때 보자고.”

    유들거리는 웃음을 지은 캐트스나일러가 유유히 방을 빠져나가고 문이 닫혔다. 나미아는 씩씩거리면서 하이힐을 벗어서 그대로 문짝에 던져버렸고, 애꿎은 하이힐만 문짝과 충동해 카펫 위로 떨어졌다.

    나미아는 이제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목 놓아 소리를 질렀다.

    “으아앙! 왕 따위 질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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