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Guest.04: 반가운 손님.-Part1: 까치가 울면 찾아온다. (22/49)
  • 환상여관 WISH 3권

    Guest.04: 반가운 손님.

    Part1: 까치가 울면 찾아온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24일.

    여름이 지나가려 하고 있는 10월 말이었지만 여전히 태양은 무덥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면 다시 다가올 여름을 생각하면서 처량하게 가을과 겨울 동안 별로 뜨겁지도 않은 빛을 비춰야 한다는 생각에 서운해서인지 늦여름은 한여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깍! 깍깍!

    나무를 포개어 비스듬하게 만든 지붕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서 꼬리를 흔들며 두어 번 울다가 푸드덕 날아갔다. 나미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라도 오려나.”

    “무슨 말씀이세요?”

    오디는 갑자기 보고서를 읽다 말고 중얼거리는 나미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미아는 억지로 손에 들고 있었던 보고서를 테이블 위로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힘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빠한테 들은 말이야. 그… “지구”라는 곳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있잖아? 아빠가 환생하기 전에 살았다던 곳. 그곳의 속설이래.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하던걸.”

    “그래요? 이상한 이야기네요. 까치가 무슨 집 지키는 새도 아니고…….”

    “그렇다는 소리지. 뭐, 까치의 습성에 기댄 옛말이라는데, 그야말로 말로만 전해져 내려온다나봐.”

    “갑작스럽지만, 한번 그 지구라는 차원에 가보고도 싶어요. 어떻게 생긴 곳이기에 아버님이 비공정을 보면서 느리다고 코웃음을 치시는 걸까요?”

    우르르르릉!

    열어둔 창문에서 정류장으로 향하는 비공정의 엔진음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처음에 비공정이 대대적인 운송수단으로 등장했을 때, 라이니시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던 적이 있었다. “뭐냐 저거, 느려도 한참 느리군.”이라는 말과 함께.

    나미아는 유리컵에 따라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게다가 아빠 말로는 거긴 차원이 아니라 “행성”의 개념이라고 하던데? 아빠도 정작 그 행성 바깥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어서 지금 와서는 의심스럽다고도 하지만 말야. 흐음… 헤르디스 그 양반이라면 차원 좌표를 알지 않을까?”

    “아버님이 극구 반대하실 거예요. 차원 이동이라는 게 그리 쉽지 않잖아요? 카르마에서 벗어나 있는 나미아 님과 저라면 별 무리 없을 테지만, 시간 개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저곳의 1초가 이곳의 100년일 수도 있는 노릇이죠.”

    “나 역시 돌아와 보니 이미 아빠가 죽어있더라… 이런 식의 설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뭐, 그 얘긴 그만두자. 그냥 단지 까치가 울기에 해본 소리일 뿐이야.”

    “예에. 그럼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요.”

    오디는 나미아가 던지듯 내려둔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아이리펜 대륙의 서부 해안지대에 있는 “에디킨츠”라는 나라에 있는 상회에서 날아온 보고서에는 나미아가 한숨을 내쉴 만한 내용이 간결하지만 긴급을 요하는 필체로 적혀져 있었다.

    “해적단 북상…이라.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보고서에 적혀 있는 대로 원래는 서남해 부근에서 활동하던 해적단이 사이에그롭 해군에 의해 북쪽으로 도망쳤다는 거죠. 문제는 그들이 정착한 곳이 저희 상회의 무역로라는 점이에요.”

    “나도 알아. 다 적혀 있잖아. 하아… 이걸 어쩌면 좋지?”

    나미아가 고민하는 문제는 해적단의 소탕 문제였다. 현재 무역선이 지속적으로 약탈당하고 있어서 현재는 무역을 중단한 상태였다. 서해의 무역로의 끝에는 교류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다른 문명이 있어서 현재 독과점 무역 중인 이켈라인 상회로서는 그곳이 막히면 거대한 돈줄이 끊기는 상황이었다. 또한 에디킨츠에 있는 이켈라인 상회의 주요 수입원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다가는 기껏 물꼬를 튼 무역로가 끊길 수 있다는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예전에는, 적어도 5년 전이었다면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해적단의 배를 몽땅 부숴서서 다신 영업을 못하게 만들고, 해적은 관할 치안대에 넘겨 일시적 치안 부재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해적단이 취한 보화는 개인 창고로 모두 쓸어 담았을 나미아지만 지금은 그 카르마라는 복잡하고 예민한 사항에 걸려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카르마라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니 상회에서 거금을 들여 해전 전용 용병을 있는 대로 고용해 몽땅 쳐부순다거나, 해당 국가의 해군과 왕실에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로비를 벌여 토벌한다는 식의 간접적 해결도 못하고 있었다. 나미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소극적인 방법에 매우 당황하겠지만,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안위가 달린 문제이니 만큼 함부로 손을 쓸 수 없어 나미아의 짜증이 배가되는 상황이었다.

    오디도 나름대로 걱정이 많았다. 문제가 벌어지면 단번에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미아의 성격상 시간이 오래 가면 갈수록 그녀의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자신의 괴로움도 커질 것이고, 나아가서는 상회 전반적인 업무 처리에 지대한 악영향으로 다가올 것이다.

    작게는 개인적으로, 크게는 전 대륙으로 퍼질 문제가 지금 막 등장한 것이다. 해적단의 출몰이 12일 전이고, 무역을 중단한 지 1주일 정도 되었다. 이 정도야 기상악화나 물자 준비 등으로 얼마든지 미룰 수 있는 시간이다. 상대측에서도 충분히 이해를 해주고 있지만, 그 일주일의 시간이라면 목적지까지 이미 1할은 전진했어야 하는 거리이다.

    대규모 공간이동 마법진이라도 사용하면 되겠지만, 상대편 대륙의 마나 상태와 마법 체계는 아이리펜 대륙과는 판이해서 전송 확률이 배로 가는 것보다 낮았다. 게다가 정상적인 무역을 해야 밀수의 위험이 적다는 이유로 해당 국가에서 허용을 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라면 흙을 만지면서 평상심을 유지하거나 그렇게 보이려 가장이라도 할 나미아는 이미 3일 전에 흙을 던져버리고는 하루하루 올라오는 보고서만 읽으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태반이었다. 차라리 히스테리라도 부리면서 스트레스를 발산하면 편하련만, 이렇게 조용히 쌓아두고만 있으니 오히려 불안해지는 사람은 오디였다.

    그런 오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미아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 말했다.

    “그냥 히스테리나 부릴까?”

    “차라리 그렇게 하세요. 그게 더 편해요.”

    오디는 차마 말로 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역시 이럴 때는 자중하고 있어야지. 언제고 짜증 내는 소녀 분위기로 있으면 안 되잖아?”

    “그게 더 편하다니까요.”

    “오디.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예? 아…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디의 시치미 떼는 솜씨 나날이 그 내공이 깊어지고 정순해져가고 있었다. 나미아는 의심도 없이 오디가 그렇게 말하면 그럴 거라 고개를 끄덕였다.

    “믿으니 다행이네요.”

    오디는 때때로 자신의 성취에 자신조차 놀라곤 한다. 한담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닌지라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미아가 흙 만지기를 포기한 요 3일 동안 상당히 친해진 정적의 존재는 익숙하게 둘 사이에 비집고 앉아 있었다.

    오디가 서류를 정리하느라 사각거리는 종이소리가 나고, 나미아가 마시는 아이스커피의 얼음이 잔 안에서 짤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밖에서 작게 들리는 사람들의 인기척소리를 빼면 그녀들이 앉아 있는 응접실은 완전한 정적의 공간이었다.

    나미아가 불같이 이글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숙녀의 흉내를 내고자 잠시 외출복으로 호숫가나 거닐어볼까 하는 고상한 생각을 떠올리고, 그것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면서 뭇 남성들의 마음에 불이나 지펴볼까 하는 불순한 목적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질 때쯤, 5층의 입구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찰칵. 끼이이!

    매우 조용한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무슨 일인가 하는 표정으로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루한 복장을 하고 이리저리 헝클어진 모습을 한 소녀였다. 소녀의 뒤로는 익히 익숙한 얼굴인 홀 매니저 샹그렐이 있었는데, 그녀는 소녀의 뒤에서 따라가며 소녀를 5층의 응접실 앞까지 올려 보내고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말했다.

    “마스터, “손님”이십니다.”

    나미아의 눈과 표정이 한순간에 확 밝아지면서 주변을 세 배는 밝게 만들 듯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는 즐거워 죽겠다는 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으래? 잘했어!”

    “감사합니다. 손님? 이쪽 분이 마스터이시고 저쪽 분이 관리인 되십니다.”

    “아… 가, 감사해요.”

    샹그렐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서는 계단을 내려갔다. 나미아는 매우 밝은 얼굴로 별로 밝지 않은 얼굴의 소녀에게 다가가서 양어깨를 붙잡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안녕? 이뻐 보이는 아가씨? 난 나미아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아, 저기… 예에…….”

    소녀는 눈앞에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미녀가 밝은 웃음으로 자신을 맞이하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막막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마침 기분도 엉망일 때 찾아와준 손님이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미아는 해쭉 웃고 소녀의 등을 툭 치며 자리로 인도했다.

    “자, 일단 앉으렴. 오디? 마실 것 좀 준비해. 시원한 걸로.”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오디는 서류를 뒤집어서 테이블 위에 두고서는 손님이 왔다기보다도 나미아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주방으로 향했다.

    나미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자리에 소녀를 앉혔다.

    “자자, 편안하게 앉아. 무서워할 것도 없어. 편안하게, 집보다 열두 배는 편안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쉬어.”

    “예, 예에…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아냐 아냐. 손님인데 당연한 일이잖아? 까치가 울더니 정말로 손님이 오셨네?”

    “예?”

    소녀는 고개를 갸웃 하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미아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헤죽 웃었다. 소녀는 나미아의 반짝거리는 미소에서 눈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응접실이었고, 그것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나 초라했다. 순간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드는 소녀는 더욱 더 움츠러들었고, 나미아는 이래 가지곤 의뢰 내용을 듣기도 힘들 것 같았다. 완전히 쭈뼛해져버린 소녀가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을까.

    “이름이 뭐니?”

    “예? 아… 저기, 저는 쥬리아 피셔라고 해요.”

    “예쁜 이름이구나. 꽤 먼 길을 온 것 같네? 많이 피곤하지? 따스한 물이 있는데 좀 씻지 않으련?”

    “저… 네에… 감사… 합니다.”

    쥬리아는 쭈뼛거리는 태도로 인사를 하고는 나미아가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갔다. 목욕이라도 하고 나오면 조금은 편안해져서 뭐라도 얘기할 기분이 날 것이다. 일단 한번 기분이 좋아진 나미아는 오디가 평소보다 다소 늦더라도 웃음으로 맞이하는 여유까지 보여줄 수가 있었다.

    “어? 손님은 어디 가셨어요?”

    “응. 일단 목욕부터 하라고 보냈어. 앉아. 같이 마시자.”

    “아, 예.”

    오디는 너무나 친절해지고 배려심이 많아진 나미아에게 적응하지 못해 조금은 쭈뼛한 태도로 나미아의 건너편에 앉아서는 원래 손님의 것이었던 레몬주스를 마셨다. 나미아의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이것이 평화로구나.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많고 많은 신들 중에서 어떤 신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디는 신에게 감사하며 일용할 양식을 음미했다. 평화의 맛은 레몬처럼 상큼했다.

    나미아는 즐거웠다. 더없이 즐거웠다.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었다.

    쥬리아에게서 사연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야만 했지만 계속해서 얼굴의 근육이 움직이려 드는 즐거움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기쁜 나머지 우울한 사연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그래서… 찾아왔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해적들에게 잡혀간 저희 가족을 구해주세요!”

    “그래…. 힘들었겠구나. 잘 견뎠어.”

    나미아는 쥬리아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고 이내 참아왔던 즐거움을 얼굴 가득 내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더없이 자상하고 따스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렇게 먼 길을 왔구나. 에디킨츠에서 말이야. 어린아이 혼자 오기가 너무 힘들었을 텐데… 잘 왔어. 네가 바라는 대로 우리가 그 일을 해결해줄 테니까 큰 걱정하지 말렴.”

    “고마워요. 흑!”

    쥬리아는 홀로 걸어온 힘들 길을 생각하면서, 사람의 따스함을 느끼자 그대로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미아는 천천히 쥬리아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조용히 흐느끼는 울음을 받아주고 있었다.

    오디는 저렇게 즐거운 표정도 보이지만 않으면 상대에겐 큰 공감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깨닫게 되었다. 표정이야 상대에게 보이지만 않으면 그 행동으로도 충분한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심오한 상황이었다.

    나미아는 손님이 왔을 때보다 더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면서 따스한 어조로 쥬리아를 달랬고, 쥬리아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미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직은 사람의 품속이 그리울 열네 살의 소녀였다.

    오디는 텅 빈 주스잔을 내려놓으며 이 시기 적절한 손님에 대해 깊은 고찰을 해보았다.

    “정말로 반가운 손님이 오셨네. 까치가 운다는 일이 그렇게 영험한 일인가?”

    목욕을 끝마치고서 쥬리아는 오디가 그녀의 체구에 맞춰서 꺼내놓은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적갈색의 곱슬머리가 물기에 반짝였고, 붉게 상기된 얼굴과 몸은 약간 그을려 있었다. 사는 곳이 태양광에 많이 노출된 곳인 모양이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자리에 앉은 쥬리아는 나미아가 특별히 만든 트로피컬 프루트주스를 마시고는 이내 완전히 마음을 놓았고, 그제야 얘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디는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쥬리아가 워낙 말하는 걸 어려워하고 있는지라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을 하고 있었기에 나미아가 억지로 웃고 싶은 걸 참고 있다는 걸을 말이다. 그래서 지금 저렇게 속 보이는 연극으로 쥬리아를 달래고 있는 것이다.

    나미아가 저렇게 자상한 언니 흉내를 내면서까지 숨기려 한 즐거운 소식이 바로 쥬리아의 사연이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그것이 단순히 기분이 울적할 때 찾아온 손님이라 그런 것이 아니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었고, 나미아가 어른스러운 체하면서 억눌러둔 화에 대해 오디가 전전긍긍하던 그 문제였다.

    쥬리아는 에디킨츠의 앞 바다에 나타난 해적단의 피해자였다.

    그녀가 사는 곳은 “시론트”라는 어촌인데, 규모는 500명 정도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어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관할 영주의 수탈이 심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 바로 위쪽에는 대륙 간 무역선이 오가는 항구가 있는 “무데칸”이 있어서 오히려 수탈은 적은 편이었다. 워낙 대물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소소한 어촌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까운 거리라는 것이 지금은 그들에겐 원망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무역선과 오가는 상선을 털고 있는 “신사이 해적단”은 섣불리 무데칸에 진입할 수가 없었다. 도시를 점령할 것도 아니고 단순한 약탈을 위한 일에 거대 도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데칸 주변에 있는 작은 어촌들을 습격해 약탈하기 시작했고, 그중 첫 번째로 당한 곳이 시론트였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일을 하러 바다에 나간 사이에 쳐들어와서는 약탈을 자행한 해적단은 이내 남자들이 돌아오는 것에 맞춰 그들을 모두 끌고 가버렸다. 시론트의 모든 인력과 재화가 순식간에 털렸고, 마을에 남은 노인과 아이, 여자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한 번의 습격으로 모든 것을 가져간 탓인지 해적단이 찾아오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지만, 이미 중앙 행정부는 그들의 사연을 외면했고, 살아갈 길도 막혀버린 남은 사람들은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와 함께 살던 쥬리아는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버렸다. 집에 남겨진 식량이 어느 정도 있었기에 연명은 할 수 있겠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되지 못했다. 해적에게 붙잡혀간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고, 설령 에디킨츠의 해군이 출동해 해적 토벌에 나선다고 해도 해적의 끄나풀이 되어버린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를 살려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쥬리아는 무데칸에 조개껍질로 된 장신구를 팔러 나갔을 때 들은 이야기에 모든 것을 의존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준다는 여관으로 힘들게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집에 남아 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쥬리아는 국경까지 가는 철도편을 구했고, 야밤을 틈타 몰래 국경을 넘었다. 시민증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그녀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경을 넘기란 불가능했기에 그녀는 한밤중에 산을 타고 국경을 넘는다는 목숨 걸린 일을 했고, 국경을 넘어 렌디너스로 들어와 열차를 훔쳐 타고 힐텐펜스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오디는 다른 것보다도 이곳까지 오기 위해 들였던 열네 살 소녀의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기그지없었다. 밤에 국경을 넘고, 열차를 훔쳐 타는 등의 불법적인 일을 했지만 그건 결심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개 어촌에 사는 여성들은 강인하게 자란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나미아의 품에 안겨서 훌쩍이고 있지만, 그 행동력만큼은 거의 나미아와 동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려본 지도에 의하면 쥬리아는 시론트에서 힐텐펜스까지 완벽에 가까운 직선을 그리며 왔던 것이다.

    “카르마를 조작했다고 해도 이건 보통 행동력이 아닌데? 아무리 카르마라고 해도 없는 행동력을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까.”

    카르마는 원동력이라기보다도 지표에 가깝다. 어떤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그 인연을 엮어나가는 일종의 지표와도 같은 것이다. 그 지표에 따라가면서 발휘하는 행동력은 그 사람 본신의 능력이다. 결국 쥬리아는 그 대담무쌍한 일을 충분히 저지를 행동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었다. 고작 열네 살의 소녀가 말이다.

    “어찌 보면 절묘한 시간의 안배보다는 이런 행동력이 더 놀랍단 말이야.”

    오디는 세상은 참 넓고도 많은 사람들이 살며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정신의 정령인 그녀라고 해도 실제로 적용되는 정신작용에 대해 때때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래저래 많은 잡생각이 들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나미아가 싱글벙글 웃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오디에겐 가장 큰 가치였다.

    “이걸로 폭풍은 지나갔구나. 하아… 다행이야.”

    그래서 오디는 무척이나 기뻐하는 나미아에게 매우 안심한 표정으로 마주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참으로 경사로운 일이다.

    “쥬리아는요?”

    “잠들었어. 피곤한가봐. 하긴, 저 나이에 그 먼 거리를 4일 만에 왔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저 아이, 나중에 레인저나 그쪽 계열로 나가면 크게 성공할 재목 같아.”

    “뭐, 본인의 미래야 본인이 정하도록 하고요… 이미 결정 나셨죠?”

    “물론이지! 요즘 성족들이 참 이쁜 짓을 많이 하네? 아주 다행이야. 간만에 힘쓸 일이 좀 생겼어. 와하하핫!”

    나미아는 숨기지 않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꽤나 참고 있었던 웃음이라 한번 터지면 봇물 터지 듯 나올 줄 알았던 오디는 소리가 금세 그치자 의아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웃는 도중에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듯 아까의 즐거움이 사라진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미아 님? 왜 그러세요?”

    “아니,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거든.”

    “어떤 생각이요?”

    “오디. 너는 그런 생각 안 들어? 이곳에 오는 손님들 말이야.”

    나미아는 인격이 바뀐 듯 진지한 표정으로 오디를 대하고 있었다. 오디는 워낙에 변덕이 심한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능숙하게 그런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나미아는 지금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디는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뭐가 문젠 데요?”

    “그때, 성지에서 헤르디스가 말했잖아? 성족이 손대기 힘든 꼬여 있는 카르마의 사람들을 보낸다고 말이야.”

    “예에… 그랬죠.”

    “근데 지금까지 우리를 거쳐 간 손님을 봐. 한스의 경우는 학교라는 집단에서 있을 수 있는 흔한 경우야. 약자에 대한 괴롭힘. 레이라인은… 글쎄… 영체로 왔다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렇게 꼬인 경우는 아니잖아? 얼마 전에 해결된 가리안의 경우는 그야말로 평이한 경우지. 이게 성족들의 우리에게 보내려는 것일까? 정말로 꼬인 카르마라면, 그 검은 피의 혈맹같은 경우가 아닐까?”

    검은 피의 혈맹은 나미아에게 많은 심적 부담을 주는 말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었지만, 정말 처음에는 오디도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오디는 나미아가 말한 내용에 대해 생각했다. 확실히 한스나 레이라인, 가리안의 일도 그렇거니와 지금 찾아온 쥬리아 역시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스의 경우는 정말로 평이한 경우였고, 레이라인이나 쥬리아는 그 규모가 조금 클 뿐이며, 가리안은 개인의 생각이 얽힌 일이었다. 특별히 카르마가 꼬였다고 보기엔 너무나 평범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이런 일을 굳이 저희들에게 맡길 필요가 있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아니면 정말로 꼬여 있는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한 건가? 사실 카르마라는 건 우리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의 그 무언가잖아?”

    “그렇죠. 하지만 이건 좀 틀리다는 느낌이 들어요. 세계를 조율하는 성족들의 해결하지 못할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데요?”

    “그치? 그치? 흐응… 역시 모르겠어. 물론 일이 재미없다거나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웃다보니까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정말로 카르마가 꼬였는데 너무 쉽게 해결되어 왔다.” 이런 생각이 팍 드는 거야.”

    카르마가 꼬여 있다는 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온 손님들의 사연은 평이한 경우였다. 생각 가능한 예상의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그녀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그런 경우였다. 게다가 그녀들이 사용한 힘은 대부분 이켈라인 상회가 가진 재력과 그녀들이 가진 인맥이었다.

    아웃사이더로서의 그녀들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들처럼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각각의 계열에서 그녀들보다 훨씬 약한 힘을 지닌 사람들의 카르마만 만져도 별일 없이 끝낼 수 있는 그런 일이었다. 굳이 그녀들의 손으로 카르마를 배제하면서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오디는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저희가 정말로 꼬여 있는 카르마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사건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친다면… 그렇게 해서 발생하는 잉여 카르마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잉여… 카르마?”

    “예. 카르마의 생성이나 소비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부분밖에는 모르지만, 카르마는 “생성”된 뒤에 “배정”을 거쳐서 사람들에게 “부여”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 과정에 저희가 끼어들게 되면 카르마는 부여되지 못하고 공중에 뜬 상태가 돼요. 그건 아시죠? 저희들이 과거에 인가 받지 않고 벌였던 선행 덕에 카르마가 날뛰었다는 걸요.”

    “응. 알지.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런 일을 하는 거잖아?”

    나미아는 헤르디스 베올딘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들로 인해 카르마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는 투의 말이었다. 일단 미안한 기분도 있기에 지금의 일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오디는 나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는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 나가기로 했다.

    “저희가 손님들의 의뢰를 해결하기 시작하면 그에 얽힌 사람들의 카르마는 잉여상태가 되어버려요. 아웃사이더의 개입으로 정해진 인연이 아니게 되어버리죠. 그렇게 되면, 카르마가 남잖아요?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결국 이건 나미아 님과 제가 세상을 떠돌면서 사람들을 도와준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어요.”

    “어머? 정말이네? 생각해보니 그렇잖아? 그렇다면… 그 잉여 카르마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제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는 거죠. 알고 보면 간단한 문제지만, 그걸 카르마로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복잡하더라는 식의 성족들만이 알 수 있는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 예상이 맞다면… 나미아 님과 저는 잉여 카르마를 발생시키기 위한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겠군요. 그들이 대체 어떤 이유로 그 잉여 카르마를 발생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음…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네? 에휴… 대체 그 녀석들이 우리에게 뭔 짓을 시키려는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까. 찾아가서 물어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잖아?”

    나미아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순순히 따라간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들을 찾아온 손님들의 일을 해결하지 않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우리는 계속해서 잉여 카르마를 발생시켜야 한다는 건가?”

    “나중에 가다보면 뭔가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손님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앞으로는 좀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겠네요.”

    “응. 그래도 찜찜한 기분이야.”

    석연치 않지만 손님과는 별개의 문제였기에 그녀들이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족이라는 이름으로 대체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는 일인지라, 그녀들은 이번 일이 끝나더라도 뒤끝이 별로 편하진 않을 것이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15일.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강미가 돋보이는 쥬리아는 올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비공정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국경을 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해결되었다는 말에 그간의 고생이 믿어지지 않았다. 권력과 재력의 존재는 그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 전용 비공정 “그랜드 크로스”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십자형이며, 고도 1만 피트에서 시속 300마일의 속력을 내는 세계 최고급의 비공정이었다. 이는 “움직이는 펜던트”와 함께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을 나타내는 물건 중에 하나였다.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지고 더럽혀져서 지저분한 옷은 쥬리아가 벗은 후에 수선 불가능 판정을 받고는 바로 폐기처분되었다. 그래서 현재 쥬리아는 그녀가 열네 살 평생 입어보지도 못한 실크 드레스를 입고 의외의 안정감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이미 쥬리아는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당위성의 의문도 고도 1만 피트의 공기처럼 희박해진 상태였다.

    사람은 보통 여러 가지 놀라운 일이 한 번에 벌어지면 대개 의문조차 가지지 못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마치 소공녀처럼 대접을 받은 쥬리아는 제국의 현재 황제조차 세 번을 타본 적이 없다는 그랜드 크로스에 탑승해 에디킨츠를 향해 날고 있는 중이었다.

    고오오오오!

    이미 구름은 저 밑에 깔려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은 더없이 깨끗했고, 그 아래 하얗게 빛나는 구름들은 마치 새하얀 눈이 한가득 깔린 설원 같았다. 그 위로 날고 있는 그랜드 크로스의 그림자는 말 그대로 커다란 십자가였다.

    쥬리아는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너무나도 하얀 주변 풍경에 눈이 아파와 실내로 고개를 돌리고서는 눈을 적응시키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오로지 귀로 비공정의 소리만이 들려왔다. 낮은 음이 끝없이 흘러나왔지만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은 고요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그랜드 크로스가 다른 비공정들과 다르게 분류되는 원인 중 하나였다.

    고오오오오!

    보통의 비공정들이 커다란 기구를 매달아 다니든가, 소규모의 기구와 마법적 처리를 한 양력 장치, 그리고 프로펠러를 이용해 운항을 하지만, 그랜드 크로스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효율 마나 순환엔진을 이용한 기계마학(器械魔學)의 집결체(集結體)라고 했다. 그래서 다른 비공정들이 내는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나 압축증기를 이용하는 터빈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거의 무음(無音)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랜드 크로스는 조용히 파란 창공에 떠다니고 있었다.

    “쥬리아. 괜찮니?”

    “예? 아, 괜…찮아요.”

    쥬리아는 나미아를 보며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랜드 크로스의 내부를 안내 받긴 했지만 대부분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내부 압력의 척도라든가 상향식 마나 순환엔진 같은 건 쥬리아의 관심 밖이었다. 그나마 반쯤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연료로 사용되는 것이 마정석이라는 간단한 이야기뿐이었다. 물론, 마법적 지식이 없는 쥬리아가 마정석에 대해 알 리는 없지만.

    쥬리아는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객실을 둘러보았다. 마치 어떤 귀족집의 거실을 그대로 재연한 것 같은 객실에는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최대 수용 인원이 500명에 달한다는 나미아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덜컥! 들들들들!

    “마실 것하고 먹을 것 좀 가져왔어요.”

    “와아!”

    오디가 그녀의 허리 높이까지 오는 카트(Cart)를 끌고 뒤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왔다. 나미아는 환호성을 지르며 카트로 다가가서는 이것저것 골라 품에 안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만세! 가토 오 쇼콜라! 아앙! 오디!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서 살찔 것만 잔뜩 넣어 두고오! 미워!”

    “어련하시겠어요. 쥬리아도 이쪽으로 와서 먹을 것 좀 골라봐.”

    “예… 시, 실례할게요.”

    나미아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주로 살찔 것만 골라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살찔 것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몸속을 활보하는 드래곤의 피는 쓸데없는 군살을 만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은 단순한 농담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쥬리아는 신기한 표정으로 생전처음 보는 것들이 반은 되어 보이는 카트를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아는 것이라고 해봐야 평소 먹었던 것과 모양이 비슷한 빵이나 쿠키 종류, 생일 이외엔 먹어본 적도 없는 초콜릿들뿐이었다.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도저히 고르지 못하겠는지 쥬리아는 반쯤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고, 골라주세요.”

    “그래? 음… 쥬리아는 어떤 거 좋아하니? 단 거 좋아해?”

    “예, 예에.”

    “그럼… 아이들 혀에 괜찮은 단맛이 좋겠네. 자. 이거. 초콜릿 쿠키. 마실 거는 우유도 괜찮고, 과일 주스도 괜찮고. 적당한 거 골라.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예… 감사합니다.”

    쥬리아는 쭈뼛거리면서 쿠키접시와 과일주스를 집었다. 쿠키는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고, 초콜릿은 생일 때나 되어야 아버지가 사준 기억밖에 없는 쥬리아에게 지금의 상황은 호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쥬리아는 쿠키 몇 개를 먹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한참 행복한 얼굴로 단것을 잔뜩 늘어놓고 먹던 나미아는 얼굴에 그림자가 좀 심하게 드리워져 있는 쥬리아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 행복? 쥬리아? 왜 그래?”

    “저기… 이거, 가져가면 안 될까요?”

    “응? 안 될 것도 없는데? 왜?”

    “저희 마을에… 아이들이 굶고 있어요. 짐도, 맥스도, 팀도, 수잔나도… 다들 배고파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 혼자만 먹는 건…….”

    나미아는 쥬리아의 마음 씀씀이에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나이라면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다른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쥬리아는 용케도 가족도 아닌 마을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오디를 불렀다.

    “오디.”

    “예. 나미아 님.”

    “그랜드 크로스의 화물칸에 뭐가 있지?”

    “품목은 다양하지만 종류는 하나니 따로 나열하지 않고 이야기한다면 약 1만 파운드 가량의 “식량”이 실려 있습니다.”

    오디는 사무적인 말투로 보고를 했지만 이미 나미아의 의중 정도는 알고 있었다. 쥬리아는 눈을 크게 뜨면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두 여성을 보았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쥬리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기… 그, 그건?”

    나미아는 소녀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며 더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물론 시론트에 보내는 구호물자지. 아, 돈은 걱정하지 마. 네 의뢰비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정 마음에 걸리면 이켈라인 상회의 사회환원계획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줘.”

    “아… 가, 감사… 감사합니다!”

    “아냐. 손님의 일인걸? 그러니까 마음껏 먹어도 돼.”

    “예… 예에!”

    쥬리아는 진정 기쁜 표정으로 쿠키를 집어먹었다. 나미아는 그 모습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오디에게 잔을 내밀었다.

    “차 한 잔 더.”

    “예. 나미아 님.”

    오디는 이렇게 넉넉한 나미아를 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의뢰비용을 공짜로 해주겠다는 말에 더욱 놀랐다.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젓는 쥬리아도 참으로 대견했지만, 99.99%를 차감한 나미아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국 쥬리아는 단 1펜의 돈으로 이켈라인 상회의 최고급 권력을 움직이게 된 것이다. 나미아 역시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지금같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미아가 누구인가? 그 특유의 인맥과 수완으로 굴지의 기업 이켈라인 상회를 세워서 대륙 상권의 49%를 점유하고, 합법적 한도 내에서 돈이 된다 싶으면 어떤 사업도 마다하지 않고 추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번 손에 들어온 돈을 쉽사리 놓지도 않는다. 그에 대한 증거로, 가족들에게 선물한 적을 꼽자면 지난 400년간 단 네 차례뿐이었다. 1세기가 지날 때마다 선물을 증정한 게 전부라는 말이다.

    그런 나미아가 지금 아무리 손님을 위한 것이라지만 엄청난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만 파운드에 달하는 구호 식량도 그렇거니와 앞으로 벌어질 모든 계획을 알고 있는 오디는 그 비용을 생각할 때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켈라인 상회가 전 대륙에서 거둬들이는 총 수입의 한 달치를 이번 일에 사용할 것 같은 계획서를 생각하자면 총무로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나 나미아의 기분이 급변했고, 무척이나 넉넉해졌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하자면 이 정도의 지출이야 크게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오디는 나미아에게 귀속된 존재이고, 상회의 금고보다도 나미아의 기분이 훨씬 중요했다.

    [회장님. 앞으로 20분 뒤 에디킨츠의 수도 “엘킨”의 비공정 정류장에 도착 예정입니다.]

    나미아는 20분이라는 너무나 애매한 시간 동안 눈앞의 간식을 모두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케이크 세 개와 쿠키 한 접시, 푸딩 두 개. 아무래도 체할 것을 각오하지 않는 한 무리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을 머금으며 케이크 한 접시를 제외한 모든 간식을 물러야 했다.

    “오디. 그럼 그 일은 너에게 맡길게. 아앙! 내 간식들… 우우!”

    “예. 알겠습니다. 틈나는 대로 다시 대접해드릴게요.”

    “그래. 부탁해.”

    나미아는 결국 가토 오 쇼콜라밖에 먹을 수 없었다.

    모두가 행동을 같이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쥬리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엘킨에서 나미아가 내리고서 오디가 1시간 동안의 외출을 한 뒤에 그랜드 크로스는 다시 날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아해하는 쥬리아에게 오디는 나미아가 나름대로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이야기만 건네주고는 곧바로 쥬리아가 살고 있던 마을이자 신사이 해적단의 첫 번째 희생지였던 시론트로 향했다.

    그랜드 크로스의 속력이 워낙에 빠른지라 쥬리아가 며칠에 걸쳐 왔던 거리를 몇 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대략 3시간 뒤면 시론트에 도착한다는 말에 쥬리아는 거의 기겁할 듯 놀랐다. 푸른창공을 날고 있으면 비공정의 속도가 그렇게 눈에 띄진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비공정은 무리 없이 시론트로 향했고, 그 사이 쥬리아는 한결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미아와 오디의 성의를 거절하는 건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마을의 사람들은 덜 자극하기 위해서, 그리고 쓸데없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수수하게 갈아입기로 한 것이다. 오디는 보면 볼수록 열네 살 아이의 행동이라 볼 수 없는 속 깊은 행동에 감탄했다.

    원래대로 가자면 근처의 비공정 정류장이 있는 도시에 비공정을 세워야 하지만 오디는 그런 시간낭비를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해당 지역의 관행이나 법률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고, 대체적으로 지키려고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까지 지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디는 그런 생각으로 조종실로 연결된 통신석에 대고 말했다.

    “무데칸의 관제는 무시하고 내가 건네준 그 허가서만 인증 받은 뒤에 바로 시론트로 향하도록. 일체의 시간 낭비는 불허한다.”

    [예. 오디 님. 그럼 무데칸 정류장 관제탑과 연락을 시작하겠습니다.]

    “10분 주겠어.”

    [언제나 엄하시군요. 하핫! 알겠습니다!]

    쾌활한 어투의 정장의 말이 끝나고 비공정이 잠시 무데칸의 정류장에 멈추었다. 쥬리아는 상당히 익숙한 풍경을 접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나 비공정이 빠르다는 것을 새삼 느꼈던 것이다.

    “오디 씨. 그런데 어떻게 해적단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주실 생각이세요?”

    “흐음, 글쎄… 한 일주일만 기다려보렴. 그러면 알 수 있을 테니까.”

    “일주일이나 걸려요?”

    “정확하게는 일주일 뒤가 시작이야. 그때까지는 궁금해도 참고 있으렴.”

    쥬리아는 아무래도 이켈라인 상회나 나미아가 벌이는 일이 관련이 있는가보다 싶었다. 자신이 의뢰인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만 해도 의뢰비용에 비해 턱없이 많은 것들을 받았는지라 추궁할 자신도 없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일주일만 기다리면 된다니, 참아야만 했다.

    잠시 후, 그랜드 크로스는 다시 이륙하여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략 운행거리가 짧아서 최고 속력을 낼 수 있는 고도까지는 못 가고 2천 피트 가량의 높이에서 날겠다는 정장의 방송이 있었다. 최고 속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20분이었다.

    평소에는 짐마차를 타고서 두세 시간, 배를 타고서 한 시간은 걸리는 길을 단 20분에 간다는 말에 놀랄 법도 했지만, 이젠 그랜드 크로스의 속력에 익숙해진 쥬리아는 그냥 그런가보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잘 있을까요?”

    “흐음… 관할영주는 식량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아뇨. 설령 해주더라도 이자가 너무 많을걸요. 그래도 다들 낚시 같은 건 곧잘 하니까 생으로 굶어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집안에 돈이 좀 떨어져가겠지만 죽을 정도는 아닐 것 같아요.”

    “그렇구나. 그런데 뭘 그리 걱정하니? 해적들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그게 걱정이니?”

    쥬리아는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노동 인구를 빼앗아갔기에 무력한 마을이지만 재침의 여지는 분명히 있었다. 어쩌면 해적들이 붙잡아간 사람들에게서 좀 더 쉽게 노동력을 갈취하기 위해 그들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다. 가족과 친지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붙잡힌 사람들은 열심히 일할 것이 분명했다.

    오디는 안심하라는 듯 쥬리아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그들은 다른 곳을 습격하느라 바빠서 너희 마을엔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가는 이상 그들은 움직일 수 없을걸?”

    “예? 그게 무슨 뜻이세요?”

    “글쎄… 역시 그것도 보면 알게 되겠지? 후훗!”

    푸른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가 수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쥬리아는 한순간이지만 오디의 그 파랗고 빨간 눈이 번뜩이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의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오디는 지금, 주인의 품을 떠나 밖에서 자유로이 나다니게 된 고양이와 같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의미의 미소가 살짝 걸쳤다.

    그 미소에 얹힌 것은 고양이 특유의 교활함이었다.

    워낙 자신의 생활에 충실한 사람은 구세주 전설 같은 혹세무민(惑世誣民)적 성격이 가득한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믿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충실한 편에 속하는 시론트 마을의 사람들은 그런 성격답게 자신들의 어려운 상황을 구제해줄 구세주 따위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구세주는 정말로 있었다. 하늘 저편에서 하얗게 빛나는 십자가가 다가온다는 상당한 구체성을 가진 채 그들에게 다가온 구세주의 모습은 파란 눈과 붉은 눈의 오드 아이를 가진 흰 머리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는 표정으로 모두에게 식량을 주겠다고 말했으며, 아마 그들에게 쥬리아가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진심으로 오디에게 머리라도 조아리며 그녀를 숭배했을 것이다.

    “쥬리아! 세상에!”

    “어, 어떻게?”

    “아저씨! 아주머니! 다들 무사하시죠?!”

    쥬리아는 놀라는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서는 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여기저기 지저분하고 수척한 모습의 사람들이었지만 쥬리아에겐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오디는 한참 동안 그들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다가 슬슬 그 열기가 허기짐으로 인해 가라앉을 때, 모두에게 말했다.

    “저는 이켈라인 상회의 총무인 오디 이켈라인이라고 합니다! 이번 해적단 출몰로 인해 저희 상회도 일련의 피해를 입었고, 해적단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적극 노력하고자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이켈라인 상회는 저희의 의뢰주이기도 한 쥬리아의 마을인 이곳 시론트에 사회환원제도를 적용시켜 작으나마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식량과 생필품은 모두 무상으로 제공되니 직원의 인솔에 따라서 질서 있게 물건들을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물자는 넉넉하니 안심하시고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아아… 감사, 감사합니다!”

    “세상에 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이제, 이제 살았구나!”

    마을사람들은 죽었다 살아난 표정으로 오디의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곧 이어 그랜드 크로스에서 승무원들이 나와 사람들을 유도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물자가 넉넉하다는 말에 배고픔 따위야 얼마든지 견뎌주겠다는 태도로 줄을 섰다.

    오디는 자기가 먼저 받겠다는 식의 혼란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온 쥬리아에게 말했다.

    “쥬리아. 혹시 여기 바다에 가까운 높은 곳이 있니?”

    “에… 아, 있어요. 저쪽에 보이는 소나무 절벽이 이 근방에서 제일 높아요.”

    쥬리아가 가리키는 곳에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나 있고, 뒤로는 완만한 경사가 진 절벽이 있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전망이 좋은 장소 같았다. 오디는 자신이 찾던 그런 장소라는 생각에 딱 좋다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쥬리아는 왜 그런가 싶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때 그랜드 크로스에서 한 직원이 검고 긴 직육면체 가방을 들고 왔다.

    “총무님. 말씀하셨던 물건입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데 수고 좀 해주세요.”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쥬리아는 그 가방을 물끄러미 보았다. 길이는 7피트 정도로 매우 길쭉하고, 높이는 1피트, 폭은 6인치 정도 되는 상당히 특이한 모양의 가방이었다. 검게 번득이는 가죽으로 된 외장에 금속으로 테를 둘러 딱딱한 느낌을 주는 그런 모습이었다.

    오디는 그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는 가볍게 들어올린 뒤 쥬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안내 좀 해주겠니? 소나무 언덕으로.”

    “예? 아, 네. 이쪽이에요.”

    쥬리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오디를 안내해 마을의 외곽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언덕까지 올라가면 무슨 일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쥬리아는 다소 서두르면서 오디를 안내했다.

    30분쯤 뒤, 그들은 언덕의 꼭대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언덕의 꼭대기는 꽤 넓은 편이었고, 바로 앞에는 파란색의 직선이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쭉 그어져 있었다.

    파도는 절벽에 부딪쳐서 부스러졌지만 그런 소리는 아스라이 들릴 수준이었다. 파도가 세차게 부딪쳐오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하지만 그 소리가 올라오기엔 절벽의 높이는 너무 높았다. 그 위에서 오디는 세찬 바닷바람에 일렁거리는 흰 머리를 움켜쥐고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구나. 생각보다 더 좋아. 평소에 자주 오니?”

    “예. 일몰이 꽤 멋지거든요. 종종 해가 지기 직전에 와서 일몰을 보고 들어가곤 했어요. 그리고 친구들이랑 놀러오기도 했어요.”

    “그래? 일몰이라…. 나도 보고 싶은걸? 수평선 너머로 바다를 새빨갛게 물들며 들어가는 일몰은 이런 서쪽 해안에서밖에 볼 수 없거든.”

    “저희 마을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정말 예뻐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오디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쥬리아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오디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난 볼 수가 없겠는걸?”

    “예?”

    의아해하는 쥬리아를 내버려두고서 오디는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녹색의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 있는 언덕은 사박거리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굳이 조심스럽게 내려놓을 필요가 없었지만 오디는 내부의 물건이 받는 충격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가진 조심성을 발휘해 가방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오디의 하얀 손이 움직여 잠금쇠를 풀고, 상자를 여는 모습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던 쥬리아의 표정은 당황스러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면 조심스럽게 다루겠지만 가방 안에 있는 것은 6피트 길이의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 같은 철제 스태프였다.

    첨단부는 뾰족한 가시처럼 날카롭게 깎여 있었고, 그 아래로 1피트에 약간 못 미치는 것 같은 고리가 있었다. 그 아래로는 철제로 된 자루가 곧게 뻗어 있었다. 윗부분에 고리에는 조금 더 작은 고리들이 양쪽에 3개씩 달려 있었고, 오디가 그 스태프를 들어올릴 때 고리들은 서로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오디의 키보다도 큰 스태프는 매우 무거워 보였지만, 오디는 그것을 들어올리는 일에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강보에 싸인 아기를 들어올리듯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스태프를 들어올린 오디는 그것으로 땅을 짚었다.

    마치 무슨 주술의식 같은 일련의 동작에 쥬리아는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건… 뭐예요?”

    “마법사의 지팡이라고 들어봤지? 이건 내 지팡이야. 조금 크지? 내 아버님이 만들어주신 거란다.”

    “아버님이요? 결혼하셨어요?”

    “응?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의 양아버님. 난 존중과 경외를 담아서 그분을 그렇게 부른단다. 아무튼, 그분이 나와 나미아 님이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 주신 소중한 선물이지.”

    오디는 왼손으로 고리들의 매달려 있는 고리를 쓰다듬었고, 고리에선 작게 윙윙거리며 울리는 소리를 내었다. 오디의 손길에 기분 좋다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쥬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마법사인가 싶었다.

    “저어… 정말로 마법사세요?”

    “그래. 사실 나미아 님도 마법을 사용하시긴 하는데, 그분은 근접전투가 더 성격에 맞으시는 분이야. 그리고 나는 그런 그분을 돕는 마법사란다. 아버님은 우리의 성격을 보시고는 각자에게 맞는 물건을 선물하셨어. 나도 매우 마음에 들지. 설명하자면 복잡하지만 마법사에게 자신의 지팡이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단다.”

    “간단하게 말하면 어떻게 중요한데요?”

    “으음… 마법을 조금 더 쉽게 사용해줄 수 있게 해줘.”

    쥬리아는 간단 명쾌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지팡이는 정신집중의 매개체이며, 마법의 발현소가 되기도 하고, 오디가 말하는 것처럼 마법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나의 순환을 안정적이면서도 평소보다 빠르게 가속시켜 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시약을 필요로 하는 일부의 마법에서 그 조건을 배제해준다든지, 마법에서 필요한 조건을 다소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워낙 몸이 둔한 마법사에겐 별로 필요 없는 기능이지만, 인위적으로 마나를 순환시키게 되어있는 마법사의 지팡이는 근접전투를 벌여도 잘 부러지지 않는다. 또한 어딘가에 두고 왔다고 해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어 도난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아무 걱정 없는 물건이다.

    고위급 마법사라면 지팡이 없이도 시약을 생략한다든지 빠른 캐스팅이 가능하기 때문에 양손을 자유롭게 비워두는 경우가 많지만, 마법에 입문한 초심자에겐 마법의 지팡이는 마법의 기초를 완성하는 것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고위급 마법사도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마법에 달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지팡이는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니라 어느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고 봐도 상관이 없다. 지팡이가 자체적으로 담고 있는 마법을 상황에 따라 자유로이 쓸 수도 있다.

    오디의 지팡이는 후자의 경우에 여러 가지 부가적 기능을 집어넣은 물건이었다. 마법의 대종사인 드래곤의 힘으로 만들어진 저 물건은 고위급 마법을 행할 때에 생기는 리스크를 모두 해소시켜주고, 피로해진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등, 평소의 2배 가까이 되는 능력을 발휘하는 증폭기의 역할까지 한다.

    이미 최상급 퍼스널리티 스톤으로 정신의 기반을 이룬 오디에게 마법이란 숨쉬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지금 그녀가 하려는 일은 자신의 한계에 미치는 일이었다.

    오디는 쥬리아에게 말했다.

    “쥬리아. 조금만 물러나주겠니? 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

    “네? 아… 네.”

    쥬리아는 오디가 마법을 사용하려 한다는 걸 알고는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최소한 지팡이가 휘둘러질 경우 거기에 맞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물러난 쥬리아는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는 호기심에 오디가 한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다소 불안감을 느끼면서 오디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디는 지팡이를 수평으로 들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낭떠러지까지 세 걸음 정도 남겨두고서 오디는 자리에 멈추었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서는 이 세상을 이루는 근간요소인 마나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언어가 튀어나왔다.

    “라 에킬란 나오루스 리스파이 디엔…….”

    쥬리아는 오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는 걸 물끄러미 보면서 그녀의 행동을 관찰했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단지 지팡이를 든 그녀의 팔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고, 지팡이는 그에 따라 세워졌다가, 한 바퀴를 돌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큰 고리에 매달린 작은 고리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크고 작은 소리들을 뱉어냈다.

    오디의 영창은 길고 길었다. 평소에는 보통의 마법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캐스팅도 없이 시동어만으로 사용할 오디였지만, 지금 그녀는 지팡이의 힘을 빌리고서도 길고 긴 캐스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꽤나 놀라고 있을 테지만 오디의 실력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는 쥬리아는 복잡한 말을 하고 있으니 복잡한 일이 벌어지겠거니 싶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오디를 볼 뿐이었다.

    징조는 수평선에서 일어났다. 쥬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수평선을 가르는 흰색 줄기는 분명 번개였다. 그리고 그 번개를 치게 만든 구름은… 3초 뒤에 생겨났다. 바다를 보면서 14년을 살아온 소녀에게 저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바다의 별의별 횡포와 보상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저런 광경을 처음 보았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 봐왔던 폭풍은 천천히 시작해서 천천히 끝나고 있었다. 지금 오디가 일으켰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폭풍처럼 갑자기 생겨나지는 않았다. 먹구름이 마치 꽃이 피듯 피어났다. 하늘에 누군가 갑자기 물감을 뿌려 장난을 친 듯 점점 그 폭풍의 구역이 넓어지고 있었다.

    “하라드 라사! 엘도르 쥬핀! 라 파사하라 오네이드!”

    영창을 끝낸 오디는 자신의 오른쪽에 보이는 수평선 끝에 지팡이의 끝을 고정시켰다. 자신의 키보다 긴 지팡이를 들었으면 그 손이 떨릴 만도 하지만 그녀의 팔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오디는 그대로 수평선을 따라 지팡이를 횡으로 휘둘렀다. 그녀의 입에서는 벼락같은 시동어가 튀어나왔다.

    “익스텐시브 체인지 웨더(Extensive Change Weather)!”

    지팡이의 끝이 지나간 수평선 위로 검은 먹구름이 생겨났다. 그것은 하늘을 덮고 거센 파도와 바람을 만들어냈다.

    마치 “폭풍”이라고 씌어진 크레파스를 들고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위를 두껍게 칠하는 것처럼 수평선에 맞닿은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한 치도 빗나가지 않고 휘두른 지팡이로 인해 바다는 평소에 보이지 않는 그 분노를 드러내야만 했다.

    오디는 지팡이를 짚고는 검게 어두워진 바다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수평선의 끝에서 끝까지 먹구름이 낀 폭풍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쥬리아는 자신의 시작부터 봤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광범위한 폭풍을 단 10분 만에 만들어낼 수가 있다니!

    “마, 맙소사!”

    “어머, 많이 놀랐니?”

    “어, 저기, 저, 저…….”

    “내가 만들어둔 거야. 저걸로 해적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겠지? 저 폭풍은 약 일주일 동안 저 해역에 머물러 있을 거야.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 격렬하게 포효하며 그들을 방해하겠지. 우리는 이걸로 시간을 벌 거야.”

    쥬리아는 저것이 단순한 시간벌기용이라는 말에 기절할 것 같았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쥬리아가 지금까지 겪은 바다의 경험에 의하면 저 폭풍에 걸리면 웬만한 배는 그대로 뒤집혀버릴 것은 분명했다.

    “시, 시간을 번다고요?”

    “그래. 시간을 버는 거야.”

    “왜, 왜요? 이런 능력이라면… 곧바로…….”

    “그게 궁금한 거구나? 사실 이 정도라면 곧바로 해적단을 처리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은 좀 사람들에게 납득가지 않는 결론이겠지. 순식간에 나나 나미아 님이 괴물 취급을 당할 수도 있거든. 그래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이끌어내야만 해. 미안하구나, 쥬리아. 곧바로 도와줘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만 끌고…….”

    오디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쥬리아는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비롯해서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달라면서 자신들을 찾아왔었다. 그런 그녀의 정성을 봐서라도 당장 그 사람들을 구해줘야겠지만, 이번 일은 무작정 가서 때려 부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미아가 엘킨에 남았던 것이고,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쥬리아는 오디의 표정에서 미안해하는 감정 이외에 다른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쥬리아는 조심스럽게 오디에게 물었다.

    “저… 구해주시는 건 확실하죠?”

    “물론이지. 하지만 잡혀간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네게 정말 미안하구나.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렇고…….”

    오디는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지팡이를 다시 가방 안으로 집어넣었다. 쥬리아는 저렇게 힘을 가진 사람도 때로는 무력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에 약간 놀랐다. 그러면서 날씨를 바꿀 정도의 힘을 가졌으니 분명 방법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아니에요. 도와주셔서 감사한걸요. 그리고 전 믿어요. 두 분께서 반드시 모든 일을 좋게 끝내줄 것이라는걸요.”

    “그렇게 믿어주니 고마워. 자, 내려가자. 아쉽지만 저 폭풍우 때문에 일몰은 못 보겠구나.”

    오디는 진정 아쉽다는 표정으로 수평선을 가리고 있는 폭풍의 벽을 보았다. 그러다 이내 쥬리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고, 두 명은 거대한 십자가의 보호 아래 있는 시론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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