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3: 성실함의 대가. (17/49)
  • Part3: 성실함의 대가.

    안센 영지의 북쪽 숲은 예전엔 보먼이라는 사냥꾼의 관리였다. 보먼은 백발이 성성할 나이에도 현역을 유지하면서 근방에서는 최고의 사냥꾼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자인 가리안이 독립함과 동시에 현역에서 은퇴해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보먼은 잠시 자신이 아침에 먹었던 축제의 여러 음식들 중에서 수면제가 들어 있을 만한 음식의 목록을 꼽아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아침부터 정신을 잃기 전까지 먹은 것만 추려도 대충 열다섯 가지가 넘었다.

    그래서 보먼은 왜 제자의 애인이라는 안젤라가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묶인 상태로, 다시 말해서 자신과 똑같은 상태로-아무리 봐도 제자인 가리안의 오두막이 분명한 곳에서-기절해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역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집의 위치는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곳은 은퇴하기 전까지 자신이 쓰던 집이었으며, 지금은 가리안이 쓰는 오두막이었다. 사냥꾼의 거점이자 보금자리, 돌아올 장소로 여겨지곤 하는 마음 편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자신이 은퇴한 뒤로 가리안이 여기저기 손을 봐서 자신에게 맞도록 고친 부분을 보면서 보먼은 잠시 제자의 성장에 흐뭇해했다. 최대한 옛날의 추억을 보존하면서 고친 느낌이 역력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고아가 되어버린 가리안을 데리고 온 보먼은 할 일이 없어서 하는 일 정도로 가리안에게 사냥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가리안이 예상외로 자신의 기술을 흡수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심심해서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보람 있는 교육생활로 바뀌었고,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여기게 된 것이 7년 전의 일이었다.

    보먼이 그리 멀지도 않은 옛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노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추억에 잠겨 자신의 상황마저 잊어버리고 있을 때, 안젤라가 서서히 눈을 뜨고서는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신체의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읍? 으읍?!”

    “읍! 읍읍!”

    보먼이 진정하라는 듯한 눈길을 보내자 당황하던 안젤라도 이내 눈을 내리깔면서 보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보먼의 모습이 자신의 거울임을 깨달은 안젤라는 이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매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가리안에게 깨끗하게 차이고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 크리스가 다가왔다. 안젤라는 크리스에게 인사를 하고서 가리안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까지 보았다. 그리고는 그가 건네주는 물잔을 받아 마시고는…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았다.

    “설마 크리스가?!”

    안젤라는 심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심 가는 사람은 크리스 한 사람뿐인데, 크리스는 자신을 이렇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맥락에서 추측해보자면 보먼 역시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당했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설마하니 가리안이 자신에 대한 원한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다. 가리안을 분류하자면 어느 정도 인격자의 성향이었고, 절대 원한을 가지고 질질 끌고 가지는 않는다. 오늘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한 번에 결정하고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하다.

    보먼은 혼란스러워하는 안젤라를 보면서 왜 젊은이들의 사랑 다툼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야 기껏 제자 기르기에서 탈출해 편안한 노후를 즐길 생각이었는데, 153세나 되어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보먼은 크리스라는 꼬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가리안이 자신에게 사냥꾼 수업을 받겠다고 했을 때 잠시 비교 삼아서 가르쳐보기는 했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냥감에 대한 존중이나 자연에 대한 존경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사냥꾼의 제일 큰 덕목이 결여되어 있는 아이였기에 영주에게 잘 말해서 집으로 돌려보냈었다. 그 이후 사적인 자리에서 본 일은 별로 없었다.

    올해로 153세인 보먼은 영지의 어른들 중에 한 명이었다. 과거의 전적도 화려하다 보니 꽤나 큰 영향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대체적으로 연륜과 경험을 존중 받아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어른 중에 하나였다.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묶여 내팽겨지다시피 되었다면, 그것은 어지간한 후레자식이거나 외지인의 짓일 것이 분명했다.

    보먼은 거기까지 사고를 매듭짓고는 “범인은 크리스”라고 옆에 살짝 메모를 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냥꾼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사냥감 같이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은퇴했지만 사냥꾼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지. 헐, 어쨌거나 결박의 기초도 모르는 것들이군. 뭐가 이리 허술해?”

    노화되는 몸이었지만 다른 노인들처럼 끙끙대는 몸은 아니었다. 아직도 웬만한 젊은이들과 팔씨름을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보먼의 어깨 근육이 움직이고, 팔고 손목이 교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박술과 포박해제는 묶느냐 빠져나오느냐의 상반된 관계였기 때문에 묶는 걸 오래 한다고 해서 금방 풀려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경험이 100년 이상 지속되다 보면 살갗으로 느껴지는 결박법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그것을 해제하기 위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도저도 상관없이 칼만 있으면 해결 되는 문제였다.

    보먼은 오른손을 움직여 허리 뒤춤, 허리띠 뒷면에 은밀하게 넣어둔 접이형 주머니칼을 꺼내었다. 손 닿는 곳에 도구를 두는 것을 철칙으로 여긴 보먼의 준비성은 은퇴를 해서도 이렇게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보먼은 노인들이 줄곧 짓고는 하는 미소, 자신의 연륜이 최고로 발휘되었을 때 스스로를 칭찬하며 세상을 비웃는 듯한 그런 미소를 지었다.

    사각! 사각!

    주머니칼이-보먼의 생각에는-엉성하게 묶여진 밧줄을 가르면서 작은 소리가 울렸고, 안젤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됐으니 안심하라는 듯한 보먼의 미소가 들어왔고, 안젤라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소란을 피우지 않게끔 주의하면서 보먼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투둑! 툭!

    이내 밧줄이 잘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고, 보먼은 자유로워진 양손과 어깨를 가볍게 운동하듯 돌렸다.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와 함께 결리던 것이 모두 풀린 것을 느낀 보먼은 여유로운 손길로 재갈을 풀고 다리를 묶은 밧줄도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곧 안젤라의 결박도 풀어주었다.

    “허헐! 노인공경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여자한테도 이러는 걸 보면 노약자 공경은 이미 세상에서 말소되었나보구나.”

    “저, 아저씨? 누가 이런 거죠?”

    “누구긴 누구냐? 그 크리슨지 구리슨지 하는 영주 댁 둘째 놈이지.”

    “예에?!”

    크게 소리 지르려던 안젤라는 보먼의 두껍고 투박한 손이 자신의 입을 덮쳐오자 금세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신중한 표정의 보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야.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는 감시 인원이 있을 거라는 추측이 드는데, 네 생각은 좀 틀린가보구나?”

    “우으! 으우우!”

    안젤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귀를 기울였을 때 밖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분명히 들렸기 때문이었다.

    보먼은 안젤라와 자신이 생각의 일치를 보자 과장하듯 기쁜 표정을 띠면서 말했다.

    “그래. 아니까 다행이구나. 난 지금 내 제자 놈의 사랑놀이에 이유도 없이 과격한 출현을 하게 되어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단다. 그러니 아가야, 내가 널 상대로 저 허접스런 녀석들이 해둔 결박과 재갈을 제대로 맞춰두기 전에 조용히 하지 않으련?”

    안젤라는 보먼이 상당히 골이 났다는 걸 깨닫고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보먼은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아니까 다행이구나. 그러니 손을 뗐을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겠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젤라. 보먼은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안젤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죄송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뭐, 죄송해야겠지. 이 나이 되어서 제자의 사랑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는 것도 우습구나. 게다가 조언가가 아니라 이상한 인질 같은 형태로 말이야.”

    안젤라는 마치 거북이 마냥 목을 움츠렸고, 보먼은 잔뜩 질린 모습을 보면서 놀리는 건 그만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노인의 장난기는 거둬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우리가 왜 잡혀왔는지 설명해줄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무작정 탈출해야겠구나. 하지만 바깥에 돌아다니는 녀석들 숫자가 워낙 많은 것 같으니 영 문제다. 그냥 뚫고 나가는 건 여기가 아무리 영지와 가깝다고 해도 무리가 있는 일이로군. 그렇다고 숲으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보먼은 왜 집 안에 감시인원이 없는지를 깨달았다. 어차피 도망쳐도 거기가 거기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당시의 결박 역시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잡혀 있고, 탈출해도 마찬가지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집 안에 있는 도구들을 사용하면 결박 정도야 쉽게 풀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집 안에 던져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기… 보통 이런 곳은 집 안에 나가는 비상통로 같은 거 만들지 않나요?”

    “가리안이 그런 걸 만들든?”

    “아뇨. 그런 말은 못 들었어요.”

    “나도 못 들었다. 그리고 난 만든 적도 없지. 게다가 문 열면 다 내 정원인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누? 집이 꼭 지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은 아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연륜이 살짝 내비치는 말이었지만 상황을 타개하는 것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젤라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보먼 역시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안젤라는 결국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았다. 대답은 몇 개 나오지 않았다.

    “구출을 기다리는 수 외에는 없어요?”

    “아마도 그래야 할 듯싶구나. 아니면 우릴 가둔 녀석의 목적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풀려나겠지.”

    “그 목적이 뭔데요?”

    “헐. 글쎄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너와 나의 공통분모를 생각해보자꾸나. 인간이라는 점과 안센 영지의 주민이라는 것, 그리고 가리안과 관계있다는 점 정도로구나. 적어도 그 녀석의 인질이 되기엔 충분하고도 남는 사람들이군. 그리고 우리가 인질이 될 만한 상황이라면… 역시 사냥꾼 교류제겠군.”

    경험과 연륜이라는 제목의 책이 열리며 귀중한 지혜가 흘러나왔다. 안젤라는 그것을 경청하면서 다음 페이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런 기대감 넘치는 눈에 보먼은 상황도 잊은 채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며 계속 말했다.

    “가리안 녀석이 대체 뭐 하고 온 건지는 모르지만 긴장감 유지만 잘한다면 우승을 노릴 만 하더구나. 대신 아주 뼈를 깎고 살을 태우는 수련을 했을 게야. 녀석 눈만 보면 알 수 있지. 워낙 천성이 우직한 놈이라서 시키는 것 이상으로 했을 게 눈에 선하다. 대체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겠지만 만나면 고맙다고 하고 싶구나. 자세히는 몰라도 요 한 달 간 하루에 한두 번은 죽을 고비를 넘긴 눈이야.”

    보먼은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대견스러운 듯 말을 끝마쳤다. 그 뒤에 슬쩍 본 안젤라의 얼굴은 다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보먼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보먼은 그제야 자기 제자와 안젤라, 크리스의 삼각관계에 대한 소문 몇 가지를 생각해낼 수가 있었다.

    “끌끌… 어쩌다 일이 이리 되었누.”

    보먼의 말은 이미 안젤라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보먼은 절대 허튼 소리를 하지 않고, 과장되게 말하지 않는 정직의 도가 지나친 사람으로 유명했다. 소문뿐만 아니라 안젤라가 겪어보니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으며, 보먼이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진실이었다.

    고령의 노인이 말하는 가리안의 고난은 안젤라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단지 그녀는 산에서 한 달간 사냥만 하다 나오지 않은 것 정도로 받아들였다. 보먼이 말하는 그 “뼈를 깎고 살을 태우는” 수련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가리안은 안젤라를 만났을 때도 자신이 한 달 동안 뭘 했는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안젤라는 고개를 푹 숙이면서 힘없이 말했다.

    “가리안은… 저 때문에 힘든 수련을 한 게 아니라고 했어요. 중간에 목적이 바뀌었다고 하던걸요.”

    “쯔쯔. 어째 너는 니 아비가 두드리는 망치 밑에 모루 대신 머리라도 들이밀었던 게냐? 너희들 대체 몇 년 사귀었냐?

    “예?”

    첫 부분의 과격한 비유를 흠잡을 틈도 없었다. 보먼의 말투는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고 있다는 투였기 때문이다. 보먼은 의아해하는 안젤라의 하얗게 질린 표정을 보면서 말했다.

    “가리안 녀석도 그렇겠지만, 너도 모르다니 문제구나. 그 녀석이 언제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는 적이라도 있던? 그 녀석 딴에는 자신의 생각이 합리적이고 완전한 논리의 사고를 거쳐 완성된 결론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녀석은 말이다, 너와 그 영주 댁 둘째가 결혼이라도 한다면 기꺼이 축하용 멧돼지라도 잡아다 줄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다른 남자 좋다고 떠나가는 연인의 뒤통수에 대고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는 그런 시대 지나간 소리나 하고 있을 것 같으냐?”

    “아, 아뇨…….”

    “하여튼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하나도 맘에 드는 게 없구만. 제자라고 길러놓으니 제 마음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거짓말이나 하고 앉았고, 그 연인이라는 것이 좀 딱 부러진 것인가 싶었는데 눈앞의 황금에 정신을 못 차리고… 에휴! 이것들 걱정돼서 언제 마누라 만나러 하늘로 올라갈꼬.”

    보먼은 안젤라를 외면하면서 독백했고, 안젤라는 몇 마디밖에 하지 않았건만 그녀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짚어내며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안도하는 것은 가리안의 마음이 진실이 아닐 거라는 작은 희망이었다.

    보먼이 제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백발백중이었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여기면서 안젤라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다. 최소한 사과할 용기라도 생긴 것이니까.

    안젤라가 희망적 관측을 하고 있을 때, 보먼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말은 험하게 해도 제자의 상태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를 어쩔꼬. 바보 제자 녀석은 지금쯤 꽤나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정답! 그러니 함께 가줘야겠어요.”

    퍽! 퍼벅! 파바박! 쿵! 털썩! 털썩!

    쾌활한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밖에서는 흰 물체가 휙휙 날아다니면서 감시하는 사람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있었다. 보먼은 먼저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붉은 머리칼을 산발하고 있는 굉장한 미녀를 볼 수가 있었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보먼 씨 되시죠? 환상여관 WISH의 마스터인 나미아입니다. 의뢰인인 가리안 씨의 안정적인 우승을 위해서 구출하러 왔으니 안심하세요. 아, 덤으로 안젤라 씨도 구하러 왔어요.”

    “예, 예에?”

    덤 취급 받아버린 안젤라는 뭐라 항변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관의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가리안의 의뢰를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보먼은 이미 다 정리된 밖의 상황을 보다가 나미아를 보며 말했다.

    “혹시, 가리안이 그쪽으로 간 게냐?”

    “그렇죠. 제가 알선해서 한 달간 멋지게 성장했으니까요. 가르친 사람도 보람된 나날이었다고 그의 스승에게 전해달래요. 워낙에 기반이 좋으니 뭘 가르쳐도 잘 들어간다던걸요?”

    “허, 허허! 그래, 그 가르친 사람이 누구냐?”

    “그건… 비밀입니다! 오디이! 청소 끝났어?”

    나미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밖에서 움직이던 하얀 인영(人影)이 창문으로 걸어왔다. 상당히 지적으로 생긴 약간 차가운 듯한 외모의 미녀가 창문을 열면서 입을 열었다.

    “예. 모두 52명이었어요. 별로 대단한 상대도 아니던걸요?”

    “그래. 수고했어. 그럼 빨리 가자. 가리안이 힘들어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오디는 가볍게 뛰어서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일을 진행시켜버린 두 사람을 보며 보먼과 안젤라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나미아는 보먼의 팔을 잡았고, 오디는 안젤라의 어깨를 짚었다.

    “두 분 다, 마법 경험은 없죠?”

    “없는데?”

    “어, 없어요. 그건 왜요?”

    안젤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이런 걸 위해서죠. 텔레포트!”

    나미아와 보먼의 몸이 서서히 흐려지면서 안젤라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다. 안젤라는 경악하면서 놀라려고 했지만 곧 그녀의 눈앞의 풍경이 흐릿해지면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가리안은 16명의 결승 진출자 중에서 공동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총 7개 종목에서 2개 종목을 제패하며 크릴 도슨과 동점의 순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종목인 궁술 시합을 남겨두고 있었다.

    가리안은 어쨌든 성심성의껏 시합에 응했다. 그러나 막상 마지막 종목을 남겨두고서 그는 크리스의 협박이 마음에 걸렸다. 크리스의 말을 들은 직후에 안젤라와 보먼을 찾아서 마을을 바쁘게 누비고 다녔지만 보먼은 술을 먹다 쓰려진 걸 누군가 데려갔다는 말을 들었고, 안젤라는 크리스가 부축해 그녀의 집으로 데려갔다는 말 밖에는 듣지 못했다.

    안젤라의 집에 갔을 때, 귀찮은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대하던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안젤라는 집으로 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결국 크리스의 협박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종합 순위의 점수가 같아서 결국 우승은 2파전이 될 수밖에 없는 양상이었다. 그런 상황을 두고, 그것도 가장 자신 있는 종목 중에 하나인 궁술 시합을 앞에 두고서 일부러 져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가리안의 컨디션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야 말았다.

    이런 곳에서 져야만 한다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도 없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노력을 해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강기 떠올랐다.

    “무엇을 위해?”

    사냥꾼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해.

    하지만 뭔가 틀렸다. 자신의 자질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면 얼마든지 증명되었다. 자신은 다른 참가자들을 거의 압도하면서 결승에 올랐고, 결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크릴 도슨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번 궁술시합에서 진다고 하더라도 능력시험은 충분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나는 좌절하고 있는 거지?”

    가리안은 좌절의 뿌리를 찾아서 끊임없이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 안젤라의 미소가 서서히 차가워져가고 있는 모습이, 급기야 오늘 그녀가 한 말이 모두 떠올랐다. 좌절의 뿌리는 그곳에 담겨 있었다.

    “왜? 왜 내가 이런 것에 좌절하는 거지? 안젤라와의 일은 이미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린…….”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의심의 벽이 확실하게 허물어지면서 모습을 드러낸 실체는 완벽할 정도의 무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무심이었을까? 가리안은 그걸 확신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뭐, 뭐지? 난 대체… 뭘 원한 거야?!”

    3회전의 시합, 크릴 도슨과는 종합점수에서 2점 뒤지는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한 한계까지만 힘을 조절하여 그보다 낮게 점수를 잡은 결과였다. 이제 마지막 3회전만을 남겨두고 있었고, 가리안이 휴게실로 갈 무렵 그는 크리스가 생긋 웃으며 목을 스윽 긋는 시늉을 하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가리안은 질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기가 싫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패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단순한 승부욕은 아니었다. 조금 더 복잡하고, 이중적인 뭔가가 있었다. 가리안은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의심을 시작했다.

    “그럼… 나의 무심마저도 내가 만들어낸 가짜?”

    좌절의 뿌리는 안젤라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어째서 좌절하는 걸까?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다면 좌절할 이유가 없다. 안젤라가 좌절의 이유가 된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가치가 자신에게 있어 상당하다는 뜻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결국… 그녀를 놓치기 싫다는 말이었다.

    “시합에서 지면 크리스에게 안젤라를 빼앗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욱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이렇게 좌절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힘든 고난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속여왔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상정해서 여러 갈래의 마음을 만들어 의식의 벽 너머에 감춰두었다. 그때 안젤라가 어떤 말을 했든 가리안은 그것에 대한 합리적 태도를 취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본심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몇 년 동안이나 간직했던 마음이 단 한 달 만에 만든 마음으로 감춰지는 것 또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감정의 격한 변화로 잠시 동안 속일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치졸한 속임수에 불과한 그런 얕은 수작은 곧 들통나겠지만.

    아니, 이미 들통나버렸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가리안은 이제야 자신의 본심을 알아버렸다. 그렇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젤라와 스승인 보먼이 크리스의 흉계에 의해서 자신의 오두막에 갇혀 있었고, 이대로 시합을 포기한다면 그것 역시 크리스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다. 시합에 참가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목숨이 그의 손에 있는 이상, 이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3회전이 시작됩니다! 선수 여러분은 경기장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빌어먹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 채, 가리안은 힘없이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활대를 붙잡은 가리안의 손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듯 서서히 떨려왔다.

    씨이잉! 팍!

    와아아아아!

    “9점! 크릴 도슨, 총점 295점!”

    크릴 도슨에게 우레와 같은 함성과 갈채가 쏟아졌고, 큼직한 체격에 덥수룩한 갈색 수염을 가진 사냥꾼이 활을 잡은 손을 높이 들어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잠시 박수가 쏟아졌고, 50야드 밖에서 과녁을 교체하는 동안 그는 퇴장했다.

    경기의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가 크릴 도슨의 자리를 대신에 앞으로 나왔고, 웅성거리던 좌중은 일제히 침묵했다. 그 다음에 소개될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숨을 죽였다.

    “에… 다음으로는! 이곳 안센 영지의 사냥꾼인 “가리안 유들레스”입니다! 지금까지 총 198점으로, 98점 이상을 받을 경우 우승할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이해주십시오!”

    하늘이 떠나갈 함성과 날던 새들이 떨어질 정도의 박수가 함께했다. 가리안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고, 그 신중한 표정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던 관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숨을 죽였다. 역시 결승에 진출해 우승을 겨루는 사람이니 만큼 그 각오가 범상치 않다며 조용히-잘못된-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이곳에 서 있는 걸까?”

    가리안은 화살을 시위에 먹여 천천히 당기며 들어올렸다. 그의 눈앞에는 여러 개의 동심원으로 만들어진 과녁이 있었고, 그의 눈과 몸은 주변의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녁의 중심으로 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온 신경이 움직이고 있었다. 매일매일 수십 수백 번을 쏘아온 터라 몸의 감각은 알아서 과녁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난… 왜 활을 당기는 걸까?”

    피잉! 씨이잉! 팍!

    “10점!”

    원의 중심을 표하는 점을 둘러싼 원 안으로 화살이 빨려 들어가듯 날아가 박혔다. 가리안은 10점이라는 말에도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다음 동작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을 위해… 화살을 날리는 걸까?”

    가리안은 화살을 활줄에 얹어 천천히 들어올리며 당겼다. 흔들림 없는 팔과 다리, 눈은 모두 일련의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 과녁까지 보이는 바람에 받을 영향까지 계산하여 최종적으로 나오는 길이 가리안의 눈에 보이는 듯싶었다.

    오른쪽으로 3도, 위로 15도. 직선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화살은 자신이 최초로 박아 넣은 화살 바로 아래에 박힐 것이다. 이것도 10점으로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겠지.

    씨이잉! 팍!

    결과는 가리안의 생각과 적중했다.

    “지킬 것이 있는데… 난 왜 이러지? 이것으로 지켜지는 것은 뭘까? 난 져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이겨야 하나? 무엇을 한다 해도 난 기뻐할 수가 없어… 내가 왜 안젤라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했을까? 그녀도 혼란스러웠던 것뿐인데…….”

    세 번째 화살을 잡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가리안은 목적을 잃었고, 더 이상 쏠 자신감도 없었다. 그래서 가리안은 억지로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가물가물한 길을 향해서 화살을 날린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귓바퀴에서 맴도는 듯했다.

    “8점!”

    가리안의 생각대로 되었다. 남은 7발 모두 10점으로 명중시켜야만 한다. 가능성의 여부는 생략하더라도 목적이 없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었다. 계속 비기는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비길 겨우 영주나 그의 대리인의 권한으로 우승자를 정하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영주의 대리인으로 나온 크리스는 당연히 그가 데려온 크릴 도슨을 선택할 것이다.

    가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시합을 포기하면… 모두가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리안은 화살을 쥔 손을 떨면서 그것을 놓을 준비를 했다. 지게 될 시합이면… 깨끗하게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난… 난!”

    “가리안! 가리안!”

    가리안은 눈을 떴다. 귀에 익은,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가리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나도 급한 나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 가리안은 끊임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야? 어디냐고!

    “가리아안!”

    그때 가리안은 안젤라를 보았다. 스승인 보먼이 옆에 있었고, 그런 이들을 보호하듯 나미아와 오디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가리안은 긴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은 여행자가 짓는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가리안은 그렇게 기쁨에 휩싸여 소리쳤다.

    “안젤라!”

    “가리안! 미안해! 미안해! 정말로… 미안…….”

    안젤라는 밑도 끝도 없이 사과를 하다가 고개를 숙이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파르르 떨렸고, 가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모든 마음의 번민을 거두었다. 파랗게 치워진 하늘 같은 그의 마음속에서는 단 하나만이 온전한 진실로 다가왔다.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아!”

    가리안은 이제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몇 시간 전, 이별을 위해서 등을 돌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반드시 돌아볼 것이기에 돌리는 등이었다. 또한 기대하며 지켜보라는 의미가 가득한 등이었다.

    가리안은 활을 당겼다. 그리고 그날 가리안은 우승했다.

    시상식을 준비하며 사람들은 새로이 떠오른 전설에 열광했다. 경력 5년의 사냥꾼이 70년이 넘는 크릴 도슨을 누르고 우승을 한 것이다. 이것은 사냥꾼의 능력을 단편적으로 측정하는 시합이라고 해도 사냥꾼으로서 가장 중요한 종목을 겨루는 시합들이었다. 그곳에서 종합우승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기량이 뛰어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으싸으싸 시상대와 우승자를 축하하는 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가리안은 나미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아니에요. 가리안 씨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에요.”

    “우승, 축하드려요.”

    딱히 손님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감사해하는 사람에게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제 가리안이 우승하는 것으로 만사 해결이라는 평안한 표정의 나미아가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예. 요금은 시상 뒤에 지불하겠습니다. 그때까지는 계실 거죠?”

    “물론이죠. 축하파티도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요금 계산은 천천히 하셔도 상관없어요.”

    가리안의 순을 잡고 있던 안젤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요금”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응? 요금? 무슨 요금 말이야?”

    “아, 내 인생을 구입한 값이야.”

    “그게 뭐야? 모르겠어. 얼만데?”

    “100펜.”

    “뭐어?! 너, 너무 비싸잖아!”

    “99% 차감한 금액이야.”

    무덤덤하게 말하는 가리안에 말에 안젤라는 거의 졸도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돈을 주고받는 본인들이 기막혀하기보다는 제삼자가 더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채무관계도 이것으로 청산되었으니 나미아는 이번 일도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시상대의 준비가 끝마쳐졌는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수상자는 시상대로 오세요!”

    “아, 그럼 가볼게요. 보고 계세요.”

    “예에! 잘 다녀와요!”

    나미아는 다소 과장되게 손을 흔들어주며 배웅했고, 가리안과 서로 손을 꼭 맞잡은 안젤라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사람들 사이를 뛰어갔다. 그리고 오디는 그들의 등을 보면서 나미아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 하나를 짚어내었다.

    “나미아 님. 시상식 구경은 안 하실 건가요?”

    “아, 맞아. 오디야, 가자!”

    “예예!”

    오디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나미아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시상대의 근처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다소 고생을 하면서 그녀들은 시상대의 앞까지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웅성대면서 기대감 어린 마음으로 시상대에 오를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관례에 따라 3위부터 소개하겠습니다. 미렌 하르트렌!”

    가죽으로 된 브레스트 아머를 입은 여성이 나와서 기쁜 듯한 표정으로 3등 수상자에게 수여되는 단검을 받아들었다. 오늘 꽤나 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반했는지 상당한 음흉함이 섞인 휘파람과 환호성이 그녀에게 향했다.

    “2위는 크릴 도슨!”

    점잖은 환호와 점잖은 박수가 쏟아졌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박수를 치는 사람들에게 씩 웃어 보인 크릴 도슨은 2등 상품인 롱 보우를 들어 보이고는 모두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는 시상대 아래에서 기대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 가리안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이번 교류제의 종합 우승자는! 안센 영지 출신의 가리안 유들레스입니다!”

    와아아아! 휘이익! 휘익!

    보통 축제 때 나오는 함성에 비해 더 열렬한 함성과 더욱 드높은 박수소리가 그 일대를 가득 메웠다. 새로이 탄생한 신 챔피언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크릴의 손에 이끌려 올라온 가리안은 당황하면서도 주먹을 높이 들어 사람들에게 답했고, 그에 답해 더욱 우레와 같은 박수와 세상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잠깐! 우승에 의의를 제기한다!”

    찬물을 끼얹을 듯 주변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의문과 흉악함이 섞인 시선을 던지다가 흠칫했다. 그들의 시선의 끝이 향하는 곳에는 크리스가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모든 경기를 진행한 진행자는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말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도련님?”

    “겨우 5년 차의 사냥꾼이 우승한다는 것은 이곳 영지의 위신을 깎는 일이야. 대외적으로 이 사실을 공표하면 뭐라고 할 것 같은가? 5년 차의 풋내기도 우승할 수 있을 만큼 안센 영지의 사냥꾼 교류제도 별것 아니라고 할 걸세. 게다가 이런 단편적인 능력 겨룸으로 사냥꾼의 자질을 파악한다는 것 또한 의외일세. 또한 그런 곳에서 너무나 수월하게 우승을 한 가리안의 능력도 의심되는 부분이야. 아무리 해도 크릴에게 이긴다는 것이 이상하군.”

    크리스의 말에 가리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린애도 수긍하지 않을 트집을 잡는 저 망할 경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주변에 그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그러게… 조금 이상하긴 하지.”

    “이런 건 거의 경험인데… 가리안은 너무 경험이 적지 않나?”

    “우승은 크릴 쪽이 더 어울릴 거야. 영지의 대외 홍보도 생각해야지 않겠어?”

    군데군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사람들의 여론을 서서히 조작하기 시작했다. 가리안은 몇 번 둘러보고서야 그들의 표정과 크리스의 표정이 일치를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람잡이를 군데군데 넣어둔 것이다.

    하나가 움직이면 셋이 움직이고, 셋이 움직이면 집단이 움직인다. 사람들의 여론이 서서히 움직이면서 크리스에게 유리하게 작용되기 시작했다.

    “그런 도련님은 어떻게 하시길 원하십니까?”

    “내 생각에는 어떤 마법적인 물건을 구해서 왔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 한 달 동안 그가 돌아다닌 것도 그런 걸 위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부정행위가 아니겠나? 모름지기 본신의 능력으로 겨루어야 하는 대회니까.”

    “일리가 있군요. 헌데 그걸 누가 알아보지요?”

    “이켈라인 상회의 지부장이신 인테프 쥐리 씨가 마침 상회의 루트로 마법적 물건을 탐색하는 물건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 위임하여 알아보는 것은 어떠할까요?”

    이켈라인 상회(가짜)와 크리스의 연계는 이 영지 사람들 대부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동조하는 여론은 금세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좋은 방법이야. 제삼자가 역시 공정하지 않겠어?”

    “크리스 도련님의 명안이시군. 이걸로 흑백이 가려지겠지.”

    “가리안도 이런 의혹을 받는 것보다는 이러는 게 낫지 않겠어?”

    여론에 밀리는 사람들은 가리안이 애초에 무혐의였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나서는 것이 좋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어느새 가리안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정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분명 이것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부정을 저지른 것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똑같은 불명예를 안게 된다. 끝끝내 함정에 올가미까지 씌우는 크리스에게 가리안은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도련님! 인테프 지부장님이 오셨습니다!”

    “오, 그래. 이리 모시게.”

    사람들의 사이가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상자를 들고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이켈라인 상회의 안센 지부 지부장이라는 인테프 쥐리였다. 가리안은 이것으로 올가미가 목을 죄여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걸음이 서서히 이쪽으로 향함에 따라 그는 점점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를 참을 수 없던 사람은 가리안뿐만 아니었다.

    “아아!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나미아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울렸다. 그녀는 오디와 함께 크리스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크리는 생전처음 보는 미녀 둘이 자신에게 걸어오자 무의식중에 헤벌쭉한 표정을 지은 크리스는 금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이런! 이거 눈이 확 떠지는 미녀 분들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고, 저쩐 일이고 간에 네 녀석의 이의라는 것에 이의를 걸러 왔다! 뭐? 부정행위? 이켈라인 상회에? 거짓말에 가짜 상회로 속이려고 드는 주제가!”

    크리스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 위압적인 음성으로 나미아의 말에 맞받아쳤다.

    “허! 무슨 증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지만 허튼 소리 하지 마시지요.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가능성에 의거하여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두 분이야말로 지금 당장 그만두시지 않으면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두시지요.”

    “얼씨구? 이젠 협박이냐? 거기! 지부장 씨! 당신 정말 지부장 맞아?”

    “무, 물론이요! 나는 본사에서 임명받은 지부장이란 말이오!”

    “그럼 회장을 봤겠네? 그 총무도?”

    “당연하지 않겠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면상을 콱 갈겨주고 싶은 나미아는 얼굴 한가득 비웃음을 띠며 인테프에게 말했다.

    “그으래? 근데 어쩌지?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본적 없는데?”

    “그게 무슨…….”

    인테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나미아가 펜던트를 꺼내들고는 일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기 때문이다.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 나미아 이켈라인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해봐! 날 만나서 안센 영지의 지부장에 임명받았노라고!”

    나미아가 펜던트의 버튼을 누르자 겉면에 새겨진 무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약간 떨어진 크리스, 인테프에게 똑똑히 보였다. 유일무이한 상회의 회장이 가진 표식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경악해하며 펜던트에 집중했다. 나미아는 그것을 거두면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눈꼬리가 팍 치켜 올라간 모습으로 말했다.

    “오디! 보고!”

    오디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한 권의 책을 펼쳐 보였다.

    “예. 9월 24일 집계된 이켈라인 상회의 모든 인명기록부입니다. 지역별로 나와 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찾기는 쉬운 편이에요. 이것은 레리첸트의 인사기록부로, 상회의 최고인사에서부터 말단 잡역부까지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지요. 이곳을 뒤져보면… 안센이란 지명은 없습니다. 인테크 쥐리라는 이름도 동명이인조차 없고요. 이상입니다.”

    오디는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나미아는 하얗게 질린 크리스의 얼굴을 보면서 씹어 먹을 듯이 말했다.

    “흥! 깜찍한 것! 감히 우리 손님을 물 먹이려고 해? 실력? 정말로 그게 궁금했던 거야? 그렇다면 지난 한 달간 가리안 씨가 어디서 뭘 했는지 증명할 사람을 불러주지. 베르힌츠! 여기 있지?! 당장 나와!”

    “예에! 나갑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계단형 스탠드에서 여행용 망토로 몸을 감싼 남성이 휘익 뛰어내렸다. 4야드 높이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너무나도 가볍게 땅에 내려앉은 남자가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로 젖히자 약간 앳된 얼굴이 드러났고, 주변에 모인 사냥꾼들이 전부 뜨악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미아는 당당하게 그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대륙 헌터 길드 연합의 현역 마스터인 베르힌츠 투플레인이지. 사냥꾼들 중에서는 알아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이봐! 거기 사람들! 얘가 베르힌츠 맞아 아니야?!”

    “맞습니다!”

    “마, 맞아요! 마스터!”

    “세상에… 어째서 이런 곳에?”

    헌터 길드에 가입된 사람도 있는지 의심조차 할 수 없는 신원증명이 이루어졌다. 나미아는 약간 어려워하는 베르힌츠의 어깨를 툭 쳤고,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가리안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두들겨 격려하고는 품에서 펜던트를 꺼내었다. 그것은 전 대륙에 있는 헌터 길드의 마스터임을 증명하는 황금 매의 펜던트였다. 베르힌츠는 한순간에 침묵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이 제 신분의 증명입니다. 그리고 가리안 씨는 지난 한 달 동안 제게서 여러 사냥 기술을 배웠습니다. 보기 드물게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의 실력은 처음 배우러 왔을 당시보다 한참 진보했습니다. 물론, 이곳의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 만큼이요. 이 즐거운 축제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던 제가 볼 때 충분히 우승할 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마도 그와 겨뤘던 사냥꾼들의 공통적인 생각일걸요?”

    베르힌츠의 말에 가리안과 겨루었던 사냥꾼들은 크릴을 필두로 모두 동의하고 나섰다. 조작된 여론이 아닌 진실에 의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리스는 완전히 구겨진 얼굴로 도망칠 수도 없게 된 자신을 원망했다. 이렇게 될 줄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밑에서 인테프 역시 덜덜 떨고 있었다.

    나미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봐! 거기 영주댁 도련님!”

    “예, 예에?!”

    “시상식에 이상 없지?”

    “이, 있을 리가요!”

    나미아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래야지. 그런데 말이야,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는 거 알아?”

    “예?! 뭐, 뭐가요?”

    “가짜 이켈라인 상회를 들여온 사람이 당신이라며? 물론 그 허가 역시 당신이 냈고, 거기에다 내부 중역이기까지 하네? 딱 걸렸군. 이거 위법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닌걸?”

    “그, 그…….”

    “조만간 아버님께 찾아뵙겠다고 전해. 그때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적은 편지를 일주일 전에 보내도록 하지. 그때 한 번 “진지하게” 상담을 해보자고 전해드려. 그럼 시상식 계속 진행해.”

    크리스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시상식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미 귀족의 위신이고, 영주 대리로 참가한 체면이고 뭐고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크리스는 그렇게 억지에 가까운 축사로 시상식을 진행했고, 가리안은 우승의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

    인테프 쥐리는 그대로 기절해버려 시상식이 끝날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11일.

    페이넨드 진 안센 남작은 쾌적한 실내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의 귀족들도 몇 번 본 적이 없다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업상 교류가 아닌 둘째 아들의 객기가 만들어낸 최악의 상황 덕분인지라 더욱 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매우 여유 만만한 나미아는 향긋한 차 향을 즐기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항은 오디가 처리하고 있었다.

    “일단 가짜 이켈라인 상회에 대한 신속한 폐업과 재산 압류, 관련자 처벌에 감사드립니다. 헌데, 아드님의 이름이 빠지셨더군요. 분명 저희는 “모든” 관련자의 처벌을 바랐는데요?”

    “그, 그렇게 되면 저까지 감옥에 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요. 영주님은 그 상회가 가짜라는 걸 모르고 처리하셨지 않으셨습니까? 문제는 가짜라는 걸 알고 사기를 친 사람들의 문제이지요. 관련자라는 건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 자식의 일인지라…….”

    페이넨드 남작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송구스러워하고 있었다. 오디는 이쯤에서 슬슬 조이기를 그만 할까 싶어서 나미아를 슬쩍 보았지만 그녀는 찻잔을 든 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을 완전히 그녀에게 맡긴다는 뜻이 담긴 제스처이기에 오디는 임의로 일을 진행시켜 가기로 했다. 그녀는 서류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가짜 상회에 대한 관련자의 처벌 권한은 해당 상회에 있다는 걸 알고 계시죠? 이건 그런 조항들을 모아둔 대륙 통합 상법의 일부입니다.”

    “예에… 물론입니다. 그러니 부디 선처를…….”

    “기본 관례에 따르면 지금까지 저희 상회는 모든 사칭 사기에 대해서 관련자 전원을 각 국의 중앙행정부가 관리하는 수용소에 감금하는 것으로 일을 해결했습니다. 이곳은 레리첸트이니 따라서 레리첸트의 국제범 수용소로 가게 되겠군요. 여러 가지로 보면 이건 국제법 위반이니까요.”

    “허억!”

    국제범 수용소라는 말에 페이넨드 남작은 숨이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디는 이런 자리에 크리스 본인이 안 나왔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리지만, 부자에게 가하는 압박은 적당한 수준에서 그치기로 했다. 오디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용의자를 불러볼까요? 크리스 씨를 불러주시겠습니까?”

    “예에. 그, 그러지요. 거기 누구 있는가? 둘째를 데려오게!”

    “예!”

    급한 발소리가 멀어지고서 괘종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미아는 한가하게 차를 조금씩 비우고 있었고, 오디는 알이 작은 안경을 쓰고서 뭐가 적혀 있는지 모를 서류를 검토하느라 페이넨드 남작이 말 한마디 걸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남작에게는 괴로운 시간이 흐르고서 퀭한 얼굴의 크리스가 문을 열고 비척비척 들어왔다. 동정표를 얻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심적으로 괴로워서 저렇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오디는 어쨌든 그 모습을 보고는 위로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상대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으로 수작에 걸린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

    “오랜만이군요.”

    “예에… 안녕하세요.”

    “사람도 다 있으니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켈라인 상회의 수뇌는 회장님이 제시하신 처벌 안건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결론이 난 것은 최근이고, 결론이 나자마자 기별을 드린 것입니다. 도중에 수정되지는 않았음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오디는 영혼만 눈앞에 있더라도 나는 말한다라는 태도로 덤덤하게 말했고, 뭔가를 노린 모양인지 크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미아는 약간 실망하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이 환하게 빛난다 싶더니 그 빛이 크리스에게 옮겨갔다.

    “리커버리. 계속해.”

    순식간에 몸 상태가 회복되는 걸 느낀 크리스는 이런 작전도 무용지물이라는 걸 깨닫고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디는 안경을 한번 추슬러 올리고서는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남작 부자에게 말했다.

    “회의에서는 안센 영지에 이켈라인 상회의 진짜 지부를 만들고 그 지부장에 크리스 본 안센을 내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전 가짜 지부장이던 인테프 쥐리는 여러 사기 혐의가 각종 상회로부터 얽혀 있어서 현재 재판을 준비 중입니다. 상회 운영의 기간은 가짜 상회가 얻은 수익과 명의 도용으로 인하 손해액, 그리고 기타 청구서에 적인 손해사항에 대한 배상 모두를 이익금으로 갚을 때까지이며, 그때까지 크리스 본 안센에 대한 급료는 일체 지불하지 않는다는 방침입니다. 또한 근무태만이나 불성실이행의 태도가 보일 시에는 이 모든 책임을 안센 남작가의 가주에게 청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매년 측정으로 최저 10퍼센트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경우에 역시 가감한 금액의 청구가 남작가로 들어갑니다. 모든 채무는 그가 경영한 상회의 이익으로만 받겠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출처 불분명한 돈은 절대 받지 않습니다.”

    상당히 긴 내용의 말이라서 페이넨드 남작과 크리스는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했다. 오디는 그들의 이해력이 충분히 발휘되기 전까지 기다려주었고, 이윽고 그녀의 말을 이해한 페이넨드 남작이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런! 그건 마치 노예잖소?!”

    오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습니다. 노예입니다. 상회의 운영을 맡지만 책임은 모두 본사로 넘기는 형태입니다. 다른 대안이 있으십니까? 회의에서 제 이차적 수단으로는 국제범 수용소로 보낸다는 것밖엔 없었습니다. 국제형법상 약 15년간 복역하도록 되어 있군요. 사실 결정권까지 드리는 건 꽤 파격적인 행위입니다만, 결정권을 드리지요. 정직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히 운영만 하면 8년이 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영업실적과 태도에 따라서는 저희 상회에서도 정식 고용할 생각이 있고요.”

    솔직하게 수긍하고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오디의 태도에 토를 달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나미아는 귀로는 모든 상황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너무나 뻔한 선택의 기로라서 오히려 이 정도는 간단한 생각마저도 든다. 또한 아무리 가리안의 부탁이라고 해도 너무 쉽게 봐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빠져나갈 구멍도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뻔한 것 아닌가?

    크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며 할 수 있는 단 한마디를 꺼내놓았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시켜주십시오.”

    “크리스!”

    페이넨드 남작은 스스로 자처해서 노예취급을 받겠다는 아들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다른 대안도 없었고, 크리스의 뜻이 너무나 확고하게 보였다. 크리스는 한번 머리를 깊게 숙이고는 오디를 보며 말했다.

    “이게 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신 회장님과 총무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입니다. 회장님의 인가가 떨어져야 모든 걸 시작할 수 있어요. 아시겠지만, 저희 상회에서 회장님의 권한은 절대적이거든요.”

    나미아는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페이넨드와 크리스는 거의 절실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보고 있었다. 크리스는 절대 감옥에 가고 싶지 않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이 정도라면 부정을 저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크리스 같은 사람은 집안이나 영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정직하게 상회를 운영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의욕도 있고, 실력도 나름대로 있는 사람인지라 과거의 경력이 걸리긴 해도 다년간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메리트 있는 인재였다.

    이 모든 걸 생각해본 나미아는 포옥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인가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이 세부적인 사항과 앞으로의 일정 내역으로…….”

    오디는 크리스가 감격해할 틈도 없이 세부사항을 지시하기 시작했고, 나미아는 다시 딴청부리기에 들어갔다. 크리스는 앞으로 향후 몇 년 동안은 딴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일부러 계획을 그렇게 짜놨으니 가리안과 안젤라의 방해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함정을 파놓으면 언젠가는 자신도 똑같이 다른 이가 파놓은 함정에 당하는 법이다.

    “여기, 의뢰비입니다.”

    “100펜 확실하겠죠? 따로 세어보지는 않을게요.”

    나미아는 짤그랑거리는 주머니를 받아 오디에게 넘겼다. 안젤라는 약간 복잡한 심정으로 오디의 손으로 옮겨지는 돈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잘 처신했더라면 가리안이 100펜이나 되는 거금을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어찌 마음이 복잡하지 않으랴.

    안젤라는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가리안.”

    “아냐. 덕분에 골치 아픈 일도 해결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지. 나는 실력도 붙었고, 명성도 얻었고. 베르힌츠 씨의 네임 벨류는 이켈라인 상회보다 훨씬 큰 것 같아요.”

    “헹! 그 코흘리개 기저귀를 내가 갈았는데. 쳇!”

    “그러니까 그런 적은 없다니까요.”

    나미아와 오디의 만담 같은 대화에 가리안과 안젤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이제 서로에 대한 마음도 다시 다잡아서 예전의 사이로 되돌아왔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고, 진심을 보여서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전화위복이라고, 그들의 마음의 결속력은 이번 사건은 계기로 한층 더 강해졌다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가리안은 안젤라의 손을 단단히 잡고는 말했다.

    “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일이 해결된 것 같아요. 베르힌츠 씨에게서 받은 수련으로 훨씬 더 강해졌거든요.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에요. 덕분에 훨씬 더 좋은 사냥꾼이 될 수 있겠어요.”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이라, 나미아는 생긋 웃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베르힌츠한테 배운 건 자랑이겠지만, 그 이름에 먹칠하지는 마세요. 제가 귀여워하는 동생이니까 그 얼굴에 먹칠하는 꼴은 못 보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가리안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가리안의 행동에 있어서 베르힌츠라는 이름은 계속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베르힌츠와 연관될 수 있기 때문에 가리안은 언제나 주의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했다.

    마차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누는 이야기를 그리 길지 않았다. 나미아는 저쪽에서 자신들을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는 마차를 보면서 서운한 표정으로 가리안과 안젤라에게 인사했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가리안과 안젤라는 다소 섭섭한 표정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가리안과 안젤라는 나미아와 오디가 마차에 타고서도 계속 손을 흔들며 배웅을 했고, 나미아는 그런 그들에게 소리 높여 말했다.

    “다신 고민 가지고 찾아오지 마세요! 대신 놀러오는 건 환영이에요!”

    나미아는 마차에 올라타서는 그들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모습이 점이 되어 멀어질 때야 나미아는 고개를 돌렸다. 오디가 동전을 세어보다가 나미아가 제대로 자리에 앉자 슬쩍 말했다.

    “저 사람들… 잘 살겠죠?”

    “그렇겠지. 워낙 성실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말도 있잖아? 하늘이 돕는 자는 스스로 돕는 자다. 알아서 잘 살 거야.”

    “저희가 도왔으니, 저희가 하늘인 셈인가요?”

    “어머? 농담도. 까르륵!”

    즐거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마차가 숲을 향해 달렸다. 오늘도 가리안은 그곳에서 사냥을 하고, 숲을 돌볼 것이다. 성실하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제대로 할 것이다.

    그것을 믿으며, 나미아와 오디는 다시 새로운 손님을 위해 [ 환상여관「WISH」]로 향했다.

    Guest.03 성실한 손님-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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