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변한 사람, 변하지 않은 사람.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3일.
레리첸트의 남쪽에는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80마일 길이의 산맥이 장벽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거룡의 등뼈”라고도 불리는 이 산맥의 정식 이름은 개성적이면서도 몰개성을 동시에 갖춘 “80마일 산맥”이었다.
그중 제일 높은 산맥은 서쪽에서 4번째 있는 “포릴엔트”라는 이름의 산맥으로, 해발 4,532야드를 자랑하는 험준한 산맥이었다.
산이 높고, 흘러나오는 물도 많으니 자연스레 그 주변에는 우거진 숲이 생기기 마련이다. 80마일에 걸친 산맥 아래에는 3개의 도시가 있고, 그중 하나가 포릴엔트 밑에 있는 안센 영지였다.
대체로 중개무역과 숲에서 나오는 여러 임산물이 주력 상품인 마을은 내부 경제 순환이 잘 되지만 외부 자본 유치에 허약하다는 특성이 있다. 다시 말해, 내버려둬도 잘살지만, 외부에서 눈독 들일 곳은 아니란 것이다.
그런 마을은 지금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축제로 인해 여름의 열기조차 잊고서 활기로 가득했다. 쫓겨난 여름의 열기는 자신의 신세에 억울해하면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마을 사람들의 축제를 향한 열기는 오히려 접근한 더위가 더위를 먹고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흉년이라면 축제가 미뤄지거나 축소되겠지만 올해는 겨우 나기와 봄철 식량도 배불리 먹을 만큼의 풍작을 예상하고 있었다. 엄청난 천재지변만 없다면 풍년을 따 놓은 당상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은 가벼웠고, 가벼운 만큼 축제분위기로 들뜨기 쉬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즐거운 축제를 벌인다. 주변 마을에서도 3년에 한 번 있는 축제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방문했으며, 여러 곳에서 사냥꾼들도 몰려온다. 축제라고는 해도 사냥꾼의 기량을 다투는 일종의 토너먼트 같은 것이었다.
안센 영지에서 “사냥꾼”이라고 하면 상당히 포괄적 의미를 지칭한다. 수렵을 물론이고 채취와 야생생활, 폭넓은 지식과 깊은 경험, 그리고 숲을 아끼는 마음을 두루 지니고 있어야 사냥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이 하는 일은 크게 수렵과 채취로 분류되는데, 안센 영지의 사냥꾼은 거기에 숲을 가꾸는 숲지기의 역할도 포함시켰다. 숲에서 모든 것이 나오니 그곳을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숲을 가꾸는 모습을 보면 엘프에게 배웠다 싶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안센 영지에는 5명의 “사냥꾼”이 있고, 스무 명 가량의 수렵꾼과 비슷한 숫자의 채취자가 있다. 대개 수렵꾼과 채취자는 2인 1조로 일하며 영지에 동물 가죽이나 약초, 산열매 등을 제공한다.
사냥꾼은 각자 정해진 구역만큼의 숲을 관리하고, 몬스터가 들어오지 않도록 적당한 위협이나 사살, 그리고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영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사냥꾼의 숫자는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데, 대개 사냥꾼이 은퇴를 하면 그 제자가 뒤를 이어받는 식이다. 스승이 하던 이를 완전하게 물려받는 제자는 한 명뿐이고, 다른 제자가 있다면 그는 영지 밖으로 나가든가, 수렵꾼과 채취자의 일을 동시에 하는 애매한 직업을 갖는다.
그렇기에 전문직인 사냥꾼에서 한 번 더 전문화가 이루어진 안센 영지의 사냥 축제에는 많은 사냥꾼들이 몰려들고 있다. 사냥꾼이라고 하면 한번쯤 가봐야 하는 축제로 이름이 나 있고, 한 부문에서라도 우승을 한다면 그것은 큰 영광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종목은 개인전으로 이루어지며, 단일 종목 우승과 종합 우승으로 나누어져 시상을 하게 된다. 안센 영지의 축제에서 우승했다는 건 꽤나 실력 있다는 말이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축제 전날인 오늘, 안센영지는 여기저기서 밀려온 사냥꾼들과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서 온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 영지의 북쪽 대로를 가로질러 가는 사람이 있었다. 온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 올리며 주변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 그의 발걸음은 이 분위기가 매우 익숙하다는 듯, 앞에서 미처 비켜나지 못한 사람들을 부드럽게 피해가고 있었다.
약간 수척한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다가 한 번 더 그을린 듯 타 있었지만 눈매만큼은 좌중을 압도하는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노출된 팔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듯한 상처로 무수했고, 그의 얼굴에도 새로 생긴 듯한 상처 여러 개가 나 있었다. 등짐에 컴포짓 보우(Composit Bow)가 꽂혀 있고, 허리에 숏 소드와 몇 개의 대거들을 매달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냥꾼이었다.
안센 영지의 사람들과 타지의 사람들은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듯한 남자 사냥꾼을 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안센 영지의 사람들은 모두 저 익숙한 얼굴에 의문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의 안광이 너무나 강렬해 차마 신원파악을 하기 위해 접근하려 들지 못했다.
그래서 남자가 북쪽 문으로 나간 뒤에야 그들은 그곳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는 한 달 전에 자신의 관리 구역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서 떠나간 사냥꾼인 “가리안 유들레스”였다. 영주의 둘째아들인 크리스와 안젤라를 둔 사랑싸움 덕분에 여러모로 유명해진 사람이 한 달 만에 갑자기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봐… 이번 사냥대회는 정말 재미있겠는데?”
“아. 그러게 말야. 간만에 축제다운 축제가 되겠어.”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각자의 의견을 교환했다. 본인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중압감에 시달릴 것인지, 그간 가리안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적어도 그들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다. 축제를 즐겁게 할 요소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즐거운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카페의 직원이나 주인은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미녀들이 손님으로 와서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에 죄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그들의 유일한 면죄부는 그녀들이 불쾌해하는 대상이 이 카페가 아니라는 것-예의상 해준 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는 말-이었다.
오디가 불편한 표정으로 나미아에게 말했다.
“정말로 있군요.”
“그러게. “이켈라인 상회 안센 지부”라니, 이건 무단 명의 도용이야. 당장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버리고 싶어.”
“참아요. 축제 전이잖아요. 그래도 꽤나 상회다운 일을 하고 있었어요. 이익금의 일부가 영주의 둘째아들에게 바쳐진다는 점을 제외하면요.”
“그런데 상회 정보부에선 왜 1년이 지나도록 사칭사기를 알아내지 못한 거야?”
“그게… 이 지역은 그리 주목할 지역도 아니니까요. 정보의 수배 범위 바깥에 있어요. 대부분의 정보는 레이친을 향해 집중되어 있죠.”
오디는 정보부의 잘못은 아니라는 투로 말했고, 나미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냥 축제로 인해 사람이 많을 뿐이지, 별 메리트가 없는 이런 영지에는 특별한 정보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레이친이 너무 가깝다 보니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 되어 1년이나 이런 곳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일단 저 눈앞에 있는 가짜 상회에 대한 판결은 뻔했다.
“작살.”
문제는 그 시점에 대한 것이었다. 언제쯤 작살내는 것이 저들에게 큰 충격일까 생각하면서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에 기분이 불쾌해지는 두 미녀였다. 일단 나미아는 가장 위에 있는 사람부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보부에서 이미 모든 조사를 끝마쳤으니 물어보는 대로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 크리스라는 꼬맹이에 대해 조사한 거 있지?”
“예. 크리스 본 안센. 나이는 스물 둘이고 레이친의 중앙학술원에서 군주론과 경영학을 일체화시킨 논문을 발표했어요. 상당한 수재라고 알려져 있고, 야망이 없는 이상론자라는 평이 있군요. 야망은 없지만 계략을 치밀하게 꾸미는 성격이라고 해요. 중앙학술원에서 4년 과정의 교육기간을 단 2년 만에 끝내고서 졸업한 사람으로 꽤 유명해요. 어느 정도냐 하면 딸밖에 없는 중소 규모의 영지를 가진 영주들이 데릴사윗감으로 1순위에 올려놓고 있을 정도죠.”
“흐음… 집안에서는 중앙권력에 빗겨나 있지만 꽤나 잘 나가는 인물이란 소리네? 그럼 저 가짜 상회의 자칭 지부장은 누구야?”
“이름은 “인테프 쥐리”이고, 55세의 남성이에요. 학술원에 다니던 크리스와 접촉해 이켈라인 상회의 지부를 이끌고 왔대요. 전직으로는 별 흥미를 끌 만한 점은 없어요.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보부상이었다더군요.”
“사기꾼이란 소리야?”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죠. 하지만 상회 운용은 그럭저럭 하고 있어요. 뭐랄까, 보부상의 경험 덕분에 신입 지부장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요? 장사 감각은 있는 편이에요. 이런 경우는 역시나 네임 벨류(Name value)를 노린 거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나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그 네임 벨류를 노리고 사칭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문제였다. 네임 벨류라는 것은 정당하게 돈을 내고 사야만 하거늘, 그것을 무단으로 도용해 이익을 취득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완벽한 범죄였다.
“오디. 이런 경우 처벌은?”
“뭐, 법적인 절차가 있고, 개인적인 절차가 있어요. 양쪽 다 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사정청취의 기회 따위야 어쨌든 좋으니까 일단 처벌하는 수도 있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듣고 대처한다든가, 침착하게 들은 뒤에 이마에 총구를 대고 빵! 해버릴 수도 있어요. 뭘 하든 나미아 님의 영향력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할걸요. 혹시 모르죠. 다른 대륙으로 간다면요.”
“오와… 말이 좀 무섭다?”
“나미아 님한테서 배운 거예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오디와 볼을 부풀리는 나미아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간단한 진실로 나미아의 입을 막은 오디는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상대는 저희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어요?”
“일단 지켜보는 방법을 쓰지. 일단 이건 우리나 가리안한테 무기로 작용되잖아? 무기를 사용해서 타격을 주려면 한 번에 빠악! 때려야지. “죽어라!”하는 함성도 곁들여서 말이야. 찔끔찔끔 깔짝깔짝 공격하는 건 내 취미가 아냐. 아, 혹시 모르지. 그렇게 공격당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이 생중계로 보인다면 재미있을지도. 오호홋!”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껏 교태를 부리며 웃은 나미아는 기품 있는 동작으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오디 역시 그녀와 같으면 같았지 다를 리가 없다는 듯 의미 불명의 미소와 함께 찻잔을 들어올렸다.
명의 도용이라는 것은 명백한 도발행위이며, 어떠한 것이든 간에 “적”으로 간주한다. 나미아나 오디 같은 아웃사이더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이름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며 고귀한 존재의 지침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차원의 중간을 떠돌아 그 기반이 없는 아웃사이더들은 이름으로서 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름을 도용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기반이 없어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확인하는 아웃사이더들은 그 침해되는 정도가 가히 피해망상이라고 규정할 만큼 명의도용에 대해 신경질적이었다.
도플갱어(Doppelganger)가 대상자와 같은 모습, 같은 목소리로 유일무이한 존재의 영속성을 침해하여 무한의 공포와 겉잡을 수 없는 분노를 야기한다면, 이름을 도용하는 짓은 그 사람의 존재에 지적인 분노를 야기하는 자존심의 상해를 가져온다. 자기가 존재하고자 하는 마음을 상하게 하여 다치게 되었다면 누구라도 화를 낸다.
나미아와 오디는 그렇게 조용히 자신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가짜 상회를 보면서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고 있었다.
카페의 주인은 아까보다 나아졌지만 엄청나게 음험해진 분위기에 뭐라고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10월 4일.
안센 마을에서는 3년 만에 사냥꾼의 기량을 겨루는 “안센 사냥꾼 교류제”가 열리게 되었다. 수도 레이친에서 가져온 폭죽들이 성대하게 파란 하늘 아래에서 흩어지고, 관광객들과 시민들의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영주의 축하인사, 그 뒤를 이어 도움을 준 사람이나 마을의 유지, 은퇴한 사냥꾼들의 축사가 뒤를 이었다,
축제의 모든 먹거리와 음료수는 영지 내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가져온 것들이며, 그것들은 모두 로터리나 광장에 마련된 무대 옆에 풍성하게 차려진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배고프면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른다.
유랑악단의 흥겨운 음악에 맞춰 무대에 올라가 콩콩 뛰는 아가씨의 치마 밑을 보며 껄껄 웃는 아저씨와 호기심 찬 어린아이의 눈빛도 있고, 대낮에 들이 부운 술기운에 마음에 두었던 처녀에게 감히 나서서 춤을 청하는 청년도 있었다. 많은 음식을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먹으면서 끝날 때까지 먹어대겠다는 기세를 보이는 얌전한 폭식가도 그 진면목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고, 살아온 세월만큼 쌓인 경험을 풀어헤쳐 존경의 눈길을 받으며 스스로 고양되지만 그것을 애써 감추고 겸양한 체하는 몇 겹의 속을 가진 늙은이도 있었다.
축제는 매우 시끄럽고, 즐겁게 시끄럽고, 여러 소리가 섞여 시끄러웠으며, 술에, 사람들에, 이야기에, 그들의 행동에 웃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중간에 나서서 사회의 어두운 문제를 제기하여 분위기를 어둡게 만드는 암적인 존재도 없었으며, 애초에 참여하지 않을 사람들은 집 안에 처박혀 냉소를 보내는 식으로 자신의 궁상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었다. 축제는 확실하게 즐길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각오대로 평소의 힘든 일상과 지루한 생활에 잠시 안녕을 고하고 평소라면 그렇게 하지 못할 만큼 신나게 떠든다.
이런 축제의 메인이벤트라면 역시 사냥꾼들의 기량을 겨루는 “교류제”의 일정이었다. 오전에는 예선전, 오후에는 본선전, 저녁에는 결승전을 하는 것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마라톤 플레이가 되기 십상이라 자기 조절이 가장 큰 관건으로 이야기되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과정과도 같았다.
그런 만큼 주민들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교류제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기 아들의 생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남자는 올해 참여하는 유력 사냥꾼의 프로필을 줄줄 읊어대는 것으로 마누라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고, 미혼에 잘생기고 미래까지 있는 엘리트 신랑감 사냥꾼을 발견했다가 이미 애인이 있음을 알고는 좌절하는 처녀의 한숨소리, 영웅을 보는 듯이 반짝이는 눈으로 사냥꾼들을 동경하는 꼬마 아이의 끊임없는 질문들-이 사람은 어때요? 활은 얼마나 쏘죠? 얼마나 빨라요? 얼마나 …해요? 얼마나 …한가요? 네? 네? 네? 알려주세요오!-이 이어진다.
평범한 사람들도 평범한 이야기로 각자의 의견을 살짝 피력하면서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질 수 있다는 의지마저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이번에 저 밑의 사냥꾼 누가 나왔다지? 아, 그 사람? 하지만 난 그 사람보다는 저 사람이 괜찮은 것 같은데? 허어, 이 사람이? 저 사람은 지난번 멧돼지에 채였던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잡았지. 그 점을 높이 사는 걸세. 이보게, 진짜 뛰어난 사냥꾼이라면 채이기 전에 잡아야지 않는가? 호오, 그러면 자네의 안목은 그 사람에게 향하는가? 물론이지. 뭣 하면 이참에 내기라도 걸어볼 텐가? 좋지. 내 꿍쳐둔 비상금을 걸지. 2펜 30길. 좋아. 나도 그렇게 걸지.
그런 사람들의 구설수 속에서 참가하는 사냥꾼들 중에는 중압감에 미치는 사람도 있고, 유희 삼아서 설렁설렁 참여한 사람도 있다. 괜히 폼 잡아서 눈먼 처녀 하나 건져볼까 싶은 사냥꾼도 있고, 진지하게 자신의 기량을 알아보러 나온 사람도 있었다. 십인십색 다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고자 하고, 그것을 보는 이들도 한마음 한뜻으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즐기니 안센 영지의 축제는 가히 진정한 의미의 축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 종목은 뭐래?”
“에… 토끼 가죽 벗기기래요. 빠르기와 정확성을 측정한다던데요? 가죽에 얼마나 살점이 붙어 나왔는가, 얼마나 소량의 출혈로 처리했는가 등의 기량을 겨룬다고 하더군요.”
“흐음… 가리안이 잘할 수 있을까?”
“얼마나 긴장하지 않고 평소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느냐에 달렸죠. 사실 이런 대회에서는 본신의 힘에서 3할 정도는 깎여나간다고들 하잖아요?”
오디는 육포와 함께 2파인트 잔에 담긴 맥주를 쭉 들이켰다. 거의 그녀의 머리와 비슷한 잔을 들고서도 힘든 기색 없이 마시는 모습이 상당히 호쾌해, 순간 나미아와 그녀가 바뀐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미아는 고양이가 털실뭉치에 가지는 욕구만큼이나 큰 욕구를 맛 좋은 호프에게 보이는 오디를 보면서 질겅질겅 사슴 육포를 씹었다. 그녀의 앞에는 오디보다 얌전하다고 할 수 있는 1파인트 잔에 흑맥주가 부글부글 거품을 만들고 있었다. 반 정도 비워진 잔은 2파인트의 바닥을 드러내는 오디에 비해서 극명한 차이를 내 보였다.
나미아는 평소엔 거의 볼 수 없는 호쾌한 모습에 즐거워하면서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기로 했다. 아무래도 즐거울 때 초를 치는 역할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디. 우린 지금 축제를 즐기러 온 게 아니잖아.”
“하지만 저녁까지는 할 일이 없잖아요? 갓 꺼낸 호프만큼 순수하고 맛있는 것도 찾을 수 없어요. 거기에다 축제기간을 위해 특별제조한 공짜 호프예요. 오늘이 지나면 3년 뒤에나 기회가 오잖아요?”
“그렇긴 한데… 어째 너랑 나랑 캐릭터가 뒤바뀐 것 같아.”
“그러려니 하죠.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아요?”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나미아는 조용히 잔을 들어 맥주를 두어 모금을 마셨다. 맥주의 쌉싸래한 맛이 혀에서 느껴지고, 시원한 감각이 목을 자극하고 지나갔다. 이후에 남는 것은 몸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시원함과 안주에 대한 갈망이었다. 목으로 마시고 몸이 살찐다는 맥주가 가지는 고유 패턴이나 다름없는 자극에 나미아도 어느 정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적어도 오디만큼은 아니지만.
“하아! 아저씨! 여기 한 잔 더요!”
“어헛, 아가씨 술이 꽤 세네? 벌써 두 잔이나 비웠잖아?”
“제가 원래 호프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더 주세요!”
쾌활하게 떠드는 오디의 모습이라니… 나미아는 왠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결국 조용하게 있을 수밖에는 없지 않는가. 그녀는 사람들의 함성이 떠다니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속으로 독백했다.
“뭔가 좀 바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체 작가 누구야?”
돌아올 리 없는 대답에 나미아는 다시 흑맥주를 목으로 넘겼다. 아무래도 그냥 맥주를 마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밤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워낙에 손님이 성실해서 자신이 나갈 것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크리스라는 인간의 사주를 받은 사냥꾼이 이기게끔 하지는 않을 작정이지만 말이다. 토너먼트의 대진표를 보면 총 4개의 시드에서 올라오는 16명이 겨루는 결승전까지는 만나지 않는다. 대충 살펴본 바로는 가리안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뭔가 일이 너무나 좋게 잘 풀려나간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름대로 이것도 괜찮지 않은가?
나미아가 흑맥주에 맛을 들여 3잔째를 주문했을 때 든 생각이었다.
케세라세라…….
총 6개의 종목으로 기량을 겨루는 대회에서 가리안은 예선과 본선 연속으로 3종목을 제패하면서 당당하게 결승 진출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다양한 별명 중에서도 “사냥꾼의 황제”라고 불리는 베르힌츠가 짜준 한 달 동안의 특화훈련은 그로 하여금 다른 경쟁자들이 상당히 느리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경쟁자 중에서는 자신보다 사냥꾼 일을 30년이나 먼저 한 구면의 선배도 있었는데, 그의 손길이나 판단력이 자기보다 결코 위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순간 자만심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서 자신을 질책했지만, 그 생각은 곧 고쳐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한 것은 옳은 생각인 것 같았다. 엄청나게 느린 손길과 둔한 판단력을 지닌 사냥꾼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가리안은 베르힌츠가 짜준 연습 메뉴를 죽어라 반복했다. 정해진 횟수보다도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은 시간 날 때마다 했다. 하루에 4시간이라는 극히 짧은 시간만을 자고 가리안은 남은 26시간 동안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로 인해 지금은 상당히 수척해졌지만 이전보다 배 이상 붙은 체력과 명장이 갈아낸 다마스커스(Damascus) 같은 날카로운 감각이 대가로 내려지게 되었다. 물론 평소의 한 달 동안이었더라면 배울 수도 없었던 수많은 지식들도 대부분이 그와 함께 했다.
이건 정말로 하늘의 도움이라고 여기면서, 가리안은 결승까지의 시간 동안 적당히 먹고 휴식해서 체력을 비축하고 감각을 새로이 일깨워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노천 식당으로 들어갔다. 쉬겠다는 목적도 있지만 나미아와 오디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경과를 말해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워낙 많이 변한 가리안의 외모 때문에 몰라보던 사람들은 그가 가리안임을 깨닫고는 적잖이 놀랐다. 생과 사의 결판이 초 단위로 끊어지는 전쟁터라도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고생을 한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연륜이 세 배는 붙은 것 같은 모습이라 쉽게 다가가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가리안?”
“아, 안젤라?”
가리안은 그제야 자신의 연인을 생각할 수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처음 열흘간은 안젤라를 생각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사냥꾼의 피가 끓어오르는 기간이었다. 날카로워진 감각은 야성적으로 변했고, 점차적으로 동물과 몬스터의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자연과 일체가 되는 시간 동안 가리안은 세속의 물욕을 깨끗하게 잊을 수 있었다. 사냥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지만 그 위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베르힌츠의 말 그대로였다.
왠지 모르게 그는 한 달 만에 얼굴을 보는 연인의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단지 연인을 위해서 매진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래서 가리안은 생각에서 지워버린 연인의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건넸을 때 당혹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낯설어 했다.
게다가 안젤라를 향한 마음 앞에는 이상한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단단한 벽이 있었고, 그래서 가리안은 안젤라를 대할 때 다소 서먹함을 느껴야 했다.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아마 자신뿐이 아니었으리라. 안젤라도 약간은 머뭇거리면서 가리안을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투르게 입을 열었다.
“저기… 음… 잘 지냈어?”
“뭐… 별로 그렇게는 안 보이지? 하핫!”
“그, 그렇구나. 아하하!”
가리안의 웃음소리와 표정은 어색해 보였다. 그런 그에게 답하는 안젤라 역시 어색해 보였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할 말이 없어진 가리안이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하려고 했을 때, 안젤라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자기 미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그러시더라.”
쩌적!
가리안의 내면을 둘러싼 그 벽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건 뭘까? 가리안은 약간 불쾌하면서도 시원한 찜찜한 기분을 자신이 애써 억눌러왔음을 알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밑도 끝도 없이 정신의 밑바닥에 봉인되어 있다가 지금 그것을 찢으려 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한 달이나 편지도 없이 멋대로 떠나서… 사실상 약속도 없는 것으로 되는 거라고… 그러시더라.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에겐 각자 한계가 있대. 그걸 인정해야 좀 더 행복해진다고… 그러시더라.”
“그…래?”
“응… 아마도 그 사람이 아버지께 이야기를 한 것 같더라…. 네가 나가고 보름 정도 지나서. 나도 네가 그냥 떠난 줄 알았어. 하지만 이상하게 크리스는 네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더라. 그러면서 우리 아버지랑 길게 무슨 이야기를 했어. 난 듣지 못했지만…….”
쩌적! 투둑! 투두둑!
천천히 깨어지고 있었다. 수직으로 세워둔 얼음벽에 서서히 균열이 가면서 그 조각이 떨어진다. 탁해진 얼음 너머에 보이는 희미한 윤곽이 보이는 듯싶었다. 균열은 그렇게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곧 깨질 것 같이, 매우 약한 진동에도 흔들릴 것 같았다. 마치 목소리의 진동에 반응하는 것 같았다. 안젤라는 계속 그 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현실이 뭘까… 심각하게 고민했어. 대장장이의 딸로… 뭔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내 최고의 행복이 뭘까, 이제는 흔들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너도 많이 힘들다며?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 상가에서 들리더라. 오랜만에 왔는데, 그 소식 못 들었지? 크리스가 영지에 자리를 내어준 이켈라인 상회가 이번에 본사에서 큰상을 받았대. 크리스도 거기 중역이라서 요즘 많이 바쁜가봐.”
쩌저정! 쩌정!
얼음벽이 깨어지고 있었다. 냉기가 틈새로 나오면서 머리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온몸을 휘감아서 오히려 시원한 기분을 주고 있었다. 얼음의 잔재들이 녹아 불쾌한 기분을 끊임없이 주고 있었지만 왠지 가슴이 확 트는 것 같이 시원한 기분이었다.
“나… 흔들리고 있어. 미안해… 나 이러면 안 되는데… 그 사람이 좋아. 계속 좋아지려고 해.”
콰득! 콰드드득!
거대한 조각이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천천히 쓰러지면서 밑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시원하다. 불쾌하다. 끈적거리면서 휘감아오는 물과 시원하게 불어 닥치는 바람.
자신이 알고 있었고, 예견했던 것이 눈앞에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가리안의 눈은 그의 앞에서, 그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안젤라에게 향해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그걸 어째서 이렇게 쩔쩔매고 있을까?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반쯤 드러난 것, 그것은 안젤라의 말에 반을 가리고 있던 얼음벽을 폭파시키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안해! 우리…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콰강! 쿠르르르르!
그렇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감정이었다. 눈앞에 상대에게 미안해할 마음도, 화를 낼 마음도, 상대의 말에 공감할 마음도 없는 완전한 무심.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안젤라에게서 마음이 떠나가 있었다. 그걸 가리안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이미 가리안은 영지에서 발을 돌릴 때부터 자신의 연인에게 향한 인연이 거기까지라는 것을 마음속에 담고 있었다.
힘든 수련, 고된 훈련이 그 위에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른 체하도록 했다. 예전의 기분, 그 애매모호할 정도로 변해버린 과거의 기억을 들춰보며 가리안은 안젤라를 생각했다. 현실에서 결정 내린 결론을 마음대로 유폐하고서 그것이 있었다는 기억조차 잊었다.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안젤라를 가리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리안은 안젤라를 이해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현실과 이상, 약속과 눈앞의 재화. 더 나은 미래.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숭고한 애정은 소설에나 나오는 것이고, 고난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렵게 살아온 평민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가리안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언뜻 들으면 무감정한 어투로 고개를 숙인 안젤라에게 말할 수 있었다.
“마음대로.”
“뭐?”
“네 마음대로 해. 끝내든, 되돌아가든. 그것이 네 결정이라면.”
“너…는? 네 마음은? 응? 크리스에게 들었어. 날 위해서 대회에 참여한 게 아니야?”
은근한 기대. 망설임. 의혹. 의문. 불신. 가리안에게 그것들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와 닿는 상대의 진심이 느껴졌지만 별로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두고 두 남자가 결투를 벌인다는 것에 안젤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생각하며 자신은 가리안의 연인이니 대결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결과에 상관없이 연인에게 가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가리안의 태도에는 자신이 들었던 것 외에 다른 진실이 있는 건가 싶은 의혹이 제기된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것. 그리고 현 상황에 대해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예전까지만 하더라도 가리안은 헌신적인 연인이었다.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가리안은 그녀의 눈과 표정, 말에서 그 모든 걸 읽었다. 그는 순간 눈앞의 상황을 비웃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예전” 연인이었던 안젤라에 대한 예의였다. 그는-최대한 비아냥거리지 않게 노력하며-말했다.
“아아. 그랬지. 그랬었지. 하지만… 목적이 변했어. 네 마음은 네 마음대로 해. 확실히 이젠 먹고살 길이 막힌 사냥꾼보다는 좀 더 자주 만나고, 미래도 확실한 영주의 차남이 좋겠지. 옳은 선택이야. 아무도 널 비난하지 않아.”
“가리…안? 난 둘 다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했을 뿐인…….”
“미안하지만, 난 저울추에 올려진 멧돼지의 간이 아니야. 무게 측정은 사절이야. 늦게 들어온 저울추의 건너편이 내가 올라가 있던 시간의 절반 만에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면, 나머지 절반 동안 그쪽으로 기울겠지. 난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평형을 이루겠고. 난 사냥꾼이야. 노력에 비해 얻을 것이 적은 사냥감은 과감하게 포기하지.”
“그, 그 말은…….”
“저울에서 내려가겠어. 난 “가리안 유들레스”야. 그리고 자존심을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는 정통파 사냥꾼이야. 축하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돼.”
가리안은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더없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안젤라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넉살 좋게 받아주던 연인은 더 이상 안젤라의 눈앞에 없었다. 모든 것을 꿰뚫는 신궁(神弓)의 화살 같은 눈빛을 한 사냥꾼이 그녀 앞에 있을 뿐이었다.
고독하게 숲 속을 누비며, 누구와의 비교도 거부하고,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기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더없이 현실적인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예전의 어눌하고 사람 좋던 사냥꾼은 없었다.
“너… 넌 이대로 좋은 거야? 응? 나, 난 겨우 그 정도였던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야. 우리가 이야기했던 미래는 한 달 만에 변할 정도로 가벼웠던 건가? 난 고작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던가? 어차피 나와 똑같은 이야기야. 예정된 수순이지. 확실히 크리스는 대단해. 저돌적인 추진력에, 목적을 위해서 노력하는 태도도 좋아. 사람을 잘 대하지. 돈도 많고. 좋은 선택이야.”
“비, 비꼬지 마! 그렇게 미소 지으면서 비아냥대지 말라고! 네가 겨우 그 정도로 속 좁은 사람이었어?! 너 너무 많이 변했어!”
가리안은 확실하게 느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했다가는 서로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 좀 더 다정하게, 예전의 친구였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헤어지려고 하는 상황이 순식간에 치졸한 치정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리안은 이쯤에서 이야기를 그만두고자 했다. 더 이상 진행하면 서로가 힘들 뿐이었다.
“너라면, 안 그럴 수 있을까?”
“무슨!”
“여기까지 하자.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다른 길을 갔어. 서로가 보는 길이 달라.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계절이 바뀌고, 동물이 털갈이를 하듯 당연한 거야. 그것에 굳이 의미를 달고 무겁게 치장해서 장식할 필요는 없어. 채색할 필요도 없어. 자연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니까. 이미 자연스러운 것에 토를 달고 의미를 부여해봤자 그것은 단순한 주석에도 미치지 않아. 다리가 있기 때문에 걷는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어.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 그건 당연한 거니까.”
“가리안…!”
안젤라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미 서로가 가는 길이 제각각 달랐다. 과거의 미련 때문에, 미안해서 가리안을 붙잡아두려고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를 떠나가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잡을 수 없음을 알기에, 아무리 잡으려 노력해도 잡히지 않을뿐더러, 설령 잡혔다고 해도 치명적이 될지도 모르는 무수한 상처가 가득 남을 것이 당연한 것이기에 가리안은 쫓지 않는다. 왜냐면 그는 사냥꾼이니까. 무리한 사냥은 하지 않는 진짜배기 사냥꾼이니까.
“사냥대회의 약속이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이건 내 사냥꾼으로서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이니 우승을 놓칠 생각은 없어. 너와는 별개의 문제니까 설령 내가 우승하더라도 크리스에게는 안심하라고 전해줘. 그럼… 안젤라. 행복해야 해. 친구로서 언제나 네가 가는 길을 응원할게. 예전처럼.”
뒤돌아서는 가리안을 보면서 안젤라는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분명 가리안의 말대로 자연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친구로 스스로를 낮춰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과감히 사랑을 포기해주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이건 아니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가슴속에서 울려 퍼졌다.
“예전처럼? 예전?”
예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안젤라는 당황과 의문 속에서 힘겹게 생각했다. 위치가 변했지만 가리안은 예전처럼 이라고 했다. 뭔가 마음 든든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안젤라는 알 수 있었다.
변한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현실과 타협하고, 두 남자를 저울질하고, 그것을 즐거운 양 즐기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건 자신이었다. 단지 가리안은 본분에 충실한… 예전 그대로였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가리안의 모습은 예전과 같았다. 안젤라는 자신이 변한 걸 알지 못했기에 가리안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안젤라는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가리안의 어깨를 붙잡기 위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가리안을 붙잡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을 다시 연인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미 그것은 결정 난 일이었다. 끝난 것이다. 안젤라와 가리안의 연인으로서의 관계는 변해버린 여자와 변하지 않은 남자의 결말로 이미 끝나 있었다.
멀어지는 가리안의 등을 바라보며 안젤라는 하염없이 서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한 번만이라도 뒤돌아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수한 인파의 틈을 헤치고 사라져가는 가리안은 오로지 앞만 볼 뿐,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가리안의 모습도 예전처럼 한결 같았다.
“가리안 씨? 표정이 왜 그래요?”
“하아! 좋다!”
“이야아! 저 아가씨 좀 봐! 벌써 26파인트 째야!”
“세상에… 대체 어디로 저게 다 들어가는 거야?”
“거기에 얼굴도 멀쩡해!”
나미아는 잠시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당황스러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오디의 폭음이 주변으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결승을 위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는 동안 구경꾼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오디는 앉은자리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서 총 13잔의 잔을 비웠다. 간혹 가다 화장실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는 했지만 총 26파인트의 호프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수치가 아니었다.
오디가 넉 잔째를 비울 때, 도전했던 사람이 있지만 이미 그는 일곱 잔째에서 뻗어버렸다. 상당히 큰 몸집을 가진 술고래였는데도 오디에게 맥을 못 추고 격추 당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 털실뭉치 속에서 뒹굴게 된 고양이라는 거죠. 그건 그렇고, 결승이죠? 헌데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요?”
가리안은 잠시 나미아가 오디를 지칭하는 데 사용한 직유법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내 이해할 수 없는 어구는 쫓아가서 사살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나미아의 옆자리-오디의 옆자리는 맥주통이라는 성별 미상의 뭔가가 차지하고 있었다-에 앉으며 약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예에… 뭐, 실연했거든요.”
“에엣?! 왜요?! 어째서요?!”
“뭐… 이미 서로가 같은 곳을 보지 않고, 서로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되고, 서로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으니 헤어지는 거죠.”
“그 크리스라는 사람 때문이에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1파인트의 흑맥주를 주문했다. 나미아는 그 표정이 참 서글프다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보이는 시원함에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분명 실연을 당한 사람이 짓는 표정으로 보기에는 꽤나 어색했다. 무엇보다도 가리안이 나미아에게 찾아와 베르힌츠의 힘든 훈련을 이겨낸 것은 안젤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미아는 속으로 말을 쌓아두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직선적으로 물어보았다. 옆에서는 오디가 한 잔의 맥주를 더 비우고 있었다.
“가리안 씨는 안젤라 씨를 위해서 의뢰를 한 것이 아닌가요?”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무리해서 잡아봤자 서로가 피만 흘리고 상처만 입을 사냥은 하지 않기로 한 것이죠. 무익하잖아요? 아, 감사합니다.”
가리안은 맥주잔을 들고서는 시원하게 들이켰다. 공허한 마음에 술을 들이붓듯 그는 몸과 마음에 흑맥주를 집어넣었다. 몸속도, 마음속도 탁해져서 아무것도 모이지 않게 되길 바라며.
나미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분명 가리안의 표정은 뭔가 막힌 문제를 해결한 사람의 그것이었으나 그의 행동은 완벽한 실패자의 모습이었다. 왜 그럴까 고민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걸 보면 가리안의 정신을 읽었더라도 별반 다를 것 없을 것이다. 가리안의 행동은 현재 정신과 육체의 완전 일치였으니까.
대충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미련과 안젤라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상태로 과연 결승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의심하시고 계시군요.”
“에엣?! 혹시 마음을 읽는 건가요?”
“아뇨. 단지… 왠지 모르게 요즘 날카로워졌습니다. 감이 꽤 발달한 것 같아요. 나미아 씨의 표정을 보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나미아는 그거야말로 무서운 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는 가리안이 베르힌츠에게서 수업을 받던 마지막 날에 베르힌츠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생각했다.
“내가 좋은 학생이라고 했었지? 그런데 그건 잘못이었어. 좋은 정도가 야나. 엄청난 학생이야.”
“어느 정도로?”
“그 특유의 성실함은 말할 필요도 없지. 기본적으로 사냥꾼에 대한 자질이 있어. 감이 뛰어나. 상황 판단력도 그렇고. 요 한 달 사이 가리안의 감각은 비약적으로 발달했어. 오감을 초월한 육감이라고 해야 할까? 주변의 기척이나 생물의 단편적인 생각을 짚어내는 적중력이 너무 뛰어나.”
“사람도 들어가는 거야?”
베르힌츠는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 날카로운 사냥꾼을 만들어낸 것에 비탄해야 할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사냥꾼으로서 거의 모든 일을 마스터한 베르힌츠가 그 정도로 이야기 할 정도라면 가리안은 정말로 뛰어난 거라고 여겼다.
“그럼 좋은 거네. 어차피 성격이 착해서 나쁜 일에 쓸 것 같지 않아. 아마 본인도 사냥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거나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며 겸양할걸?”
“그걸 믿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만히 있는 건데… 만약 그가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하면 위험해져. 가리안이 사냥 대상을 조류나 네발짐승이 아니라 지성이 있는 두발짐승으로 바꿀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지. 아, 물론 현실적 의미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사냥이라면 괜찮지만.”
나미아는 키득거리면서 웃었고, 레이사도 작게 미소 지었다. 감이 발달되긴 했지만 그것을 악용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사람을 보는 눈은 거의 틀리지 않는 두 사람의 결론이었으니 아마도 맞을 것이 분명했다.
나미아는 바로 며칠 전의 일을 생각하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서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렇다는 건 안젤라의 마음도 그렇게 예측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망설이고는 있었지만, 이미 제자리가 없더군요. 그래서 전 이번 축제에서 제 기량을 확인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이런 승부에서 이긴다고 해서 안젤라의 마음이 돌아설 것도 아니니까요. 저기, 듣고 계시는 겁니까?”
나미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중에 귀를 파거나 머리를 꼰다든가 등의 버릇없는 행동을 했다. 쉽게 말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미아는 가리안의 물음에 깜짝 놀란 척을 하며 말했다.(오디가 마신 맥주가 드디어 30파인트에 이르러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 죄송해요. 뭐… 듣고 있자니 조금 지루해서… 그런데, 당신은 그걸로 좋은 건가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아뇨. 본인들이 좋다면야 상관하지 않겠는데, 진짜 그걸로 좋냐고요. 제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신 건 아니시겠죠?”
나미아는 살짝 눈웃음을 쳤다. 가리안은 약간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걸로 좋냐는 질문, 알 듯 하면서도 잘 모를 얘기였다. 가리안은 도움을 청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미아를 보았지만 나미아는 이미 자신의 할 말은 다했다는 듯 천천히 맥주잔을 기울였다.
가리안은 나미아가 맥주잔을 내려놓았을 때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끼어든 오디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푸하! 아, 맛있어라. 그건 그렇고, 슬슬 결승 아닌가요?”
“오옷! 32파인트!”
“사, 사람이 아냐! 술의 여신이 강림하신 건가?!”
주변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가리안은 한쪽 구석에 치워져 있는 괘종시계를 보았다. 슬슬 결승의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1시간 정도 남았지만 가서 몸을 풀고 있으면 금방 지나갈 시간이었다. 가리안은 이야기를 끝마치고 가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제 컨디션으로 대회에 임하지 못할 것 같았다. 가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제게 하신 말씀은…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예. 너무 진지하게는 생각하지 마세용~.”
나미아는 장난스레 손을 흔들며 말했고, 가리안은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또다시 오디의 폭주 행진이 이어지는 시작 환호가 들릴 때, 가리안은 노천 식당의 앞에서 지나가던 크리스를 만날 수 있었다. 실로 절묘한 안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리안은 주변에 안젤라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그런 한숨을 쉬는 자신에 대해 의심스러워했다.
“여어! 4번 시드에서 종합우승을 했다며?”
“많이 노력했지. 결승에서도 지지 않을 거야.”
“안젤라에게서 들었어. 내기는 포기한다며?”
“나보다는 네가 나을 것 같으니까. 결과에 상관없어. 내가 우승하더라 하더라도 안젤라하고 잘 지내봐. 좋은 여자니까.”
가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크리스는 얼굴을 구기면서 의외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지? 왜 그럴 수 있는 거지?”
“뭐가?”
“왜 자꾸 그렇게 이길 수 있는 위치로 가려는 거지? 응? 그렇게 지기가 싫은 거야? 아니면 그렇게 복수가 하고 싶은 거야? 애인마저 차버리면서?”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크리스를 보면서 가리안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크리스가 왜 이러는지, 그의 하는 말이나 그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위치라니…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가리안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 젠장. 애인을 빼앗아서 네가 지는 꼴을 보고 싶었는데, 결국 또 그렇게 이길 수 있는 자리로 가는 건가?”
“이봐!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항상 이기기만 하는 녀석이 뭘 알겠어! 사냥꾼의 제자 자리 경쟁에서 날 이기고, 마을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항상 나보다 앞섰지. 안젤라도 네가 먼저! 그리고 이제야 네가 질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나 싶더니 뭐? 포기?!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네가 실패해서 빌빌 기는 꼴을 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는 크리스를 보며 가리안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경쟁심을 품어왔던 크리스였다. 그는 자신을 이기고 싶어 했고, 자신은 지기가 싫었다. 그래서 언제나 항상 가리안이 이겨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덤벼왔기 때문이다.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기는 것 외에 뭘 할 수 있나? 그래서 크리스의 행동은 억지 같았다.
“그, 그런 억지를! 네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제의하지 않았잖아! 네가 수도에서 쌓은 학식의 깊이는 나 따위가 미치지도 못한다고! 도련님 나으리!”
“그거야 난 귀족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고작 평민 주제에 나랑 같은 학식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내가 수준을 맞춰야 했지. 그런데 왜! 너저분한 네 녀석과 싸워서 자꾸 져야만 했던 거지? 이번에도! 난 이길 수 있었어! 네 녀석의 평정심만 흩트려 놓으면 얼마든지 가능해! 헌데 이게 뭐야? 젠장!”
치졸한 방식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가리안의 눈에 비치는 크리스의 모습은 엄청나게 치졸했다. 이런 식으로 해놓고 이기길 바랐다는 건가?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인 하나였다. 안젤라에 대한 크리스의 마음은? 설마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건가?
“그, 그럼 안젤라는? 그녀는 단지 이용만 한 건가?”
“단지 이용? 그것 말도 할 게 뭐가 있나? 단순한 평민이잖아? 첩으로 삼아줄 만한 용모이긴 한데, 네 녀석 외엔 쓸모가 없잖아? 하긴, 그쪽에서는 날 무척이나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내가 이겼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자네가 승부를 포기했으니 공정한 승부가 아니야. 좌절하는 모습도 없는 게 뭐가 패배야!”
가리안은 이를 뿌득 갈았다. 단지 저런 농간 때문에 지금까지 안젤라와 자신이 겪은 번민을 생각하면 화가 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단순히 자신의 패배와 좌절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고, 크리스에게 원한을 살만큼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순간 가리안은 크리스도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자신을 이기기 위한 순수한 승부욕으로 가득했던 사람이지만, 지금의 크리스는 좌절하여 울고 있는 실패자를 보고 싶어 하는 단순한 악질로 변해버렸다. 대체 왜, 무엇 때문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단순한 승부욕이 패배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로 변질되기 위한 과정은 대체 뭐가 들어갔던 것일까?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이 있었다.
“크으! 좋아… 그렇다면 절대 지지 않겠어. 기필코 이겨주지!”
“뭐라…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는 않겠어. 단순히 그것 때문에 나와 안젤라를 능멸한 거라면 난 너에게 결코 질 수 없어!”
“하,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응? 큭큭큭!”
크리스는 실실거리면서 웃음소리를 흘렸고, 가리안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그에게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아아… 뭐, 네 오두막에 불청객 둘이 있거든. 네가 아는 사람이야. 이름이… 오오, 그래. 안젤라와 보먼이었나? 내 사병들이 자네 오두막에서 나오지 않도록 한 50여 명 정도가 기다리고 있다네.”
“너… 너어!”
“뭐, 한번 열심히 우승해보라고. 크큭! 푸하핫!”
크리스는 그렇게 웃음소리만을 남겨두고는 그 자리를 홀연히 떠나갔다. 가리안은 그 자리에 서서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크리스의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리안의 눈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지만 그 전에 앞서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야만 한다. 아둔한 사람은 아닌지라 크리스가 한 이야기의 뜻을 가리안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을 구하려면 시합에서 져라.
일부러 지는 것만큼 비참한 실패도 없었다. 외력에 의해 억지로 굴복하는 것은 변명을 할 수는 있겠지만 치욕적이고 굴욕적이다. 크리스가 보고 싶은 것은 바로 자신의 그런 모습이었다. 크리스가 보면 아주 좋아하겠지만, 가리안은 지금 좌절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리안은 쌓인 울분을 소리로 토할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그 소리는 여러 사람의 귀로 들어갔지만 축제 때 술에 취해 지르는 소리야 워낙 흔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가리안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근처에 둘이나 있었다.
“오디. 들었지?”
“하아! 예.”
“움직여야겠다.”
“그러도록 하죠. 그럼 여러분! 전 이만 갈게요!”
사람들의 아쉬운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매웠다. 이날부터 오디는 전설의 여인으로서 식당에 오래도록 전해져왔는데, 그녀가 마신 호프는 모두 42파인트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