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03: 성실한 손님.
Part1: 그는 정녕 성실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9월 1일.
아이리펜 대륙의 1년은 16개월이고, 한 달에 30일씩 총 480일이다. 8달이 지나서 9번째 달의 첫날이 되자 1년의 반이 지난 것을 느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여전히 계절은 여름이었고, 게다가 그 중간이었다.
세상을 모두 말려버릴 듯 내리쬐고 있던 태양은 오늘도 보는 사람이 화가 나게끔 태평하게 작열하고 있었다. 펜스텐 호수 근처는 이미 시원한 그늘에서 호수 바람을 맞으며 피크닉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찼고, 여관 WISH의 도로 건너편 호숫가에는 노천 호프가 생겼다.
“오늘도 듬뿍 걷어봅세나~. 랄라라~.”
나미아는 테라스에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가지고 나가서는 호수에서 불어 닥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테라스는 북쪽을 향해 호수 쪽으로 열려 있었기에 시원한 바람이 곧바로 들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휘날리게 했다.
공짜 손님을 받은 이후에 별다른 손님이 오진 않았지만, 나미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예에 심취해 있었다. 아직 주방에서 사용하거나 시중에 내다 판다든가 하기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개인의 취미생활이라고 보기에는 썩 괜찮은 것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에는 노천 호프에서 거둬들이는 추가 수입을 보면서 흡족해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낮에는 식사와 차를 파는 야외 식당으로, 밤에는 시원한 호숫가에서 호프를 즐길 수 있게 만든 노천 호프로. 이런 2중의 이용 방식은 매출의 급성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덕분에 바쁜 것은 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한해 임시 직원도 고용해서 어찌어찌 인력을 맞추고는 있었다. 복장도 여름에 어울리도록 짧고 시원한 복장으로 교체한 지 오래였다. 나미아 역시 얇은 치마에 어깨에서 묶는 매끈한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채 창가에서 풍광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여관 WISH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미아일 것이며, 제일 바쁜 사람을 꼽으라면 오디일 것이다. 두 사람이 여관의 최고 관리자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상당히 불공평한 처사라고 할 수 있지만 불평하는 사람도 없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나미아에게 뭐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녀가 제일 총애하는 오디였지만, 상회의 주인이면서 모든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냐는 질문이야 이미 150년 전에 그만두었고, 여관 경영에 대해서도 아무 말 하지 않게 된 지 한 달이 넘었다.
나미아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그다지 뭐라고 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오디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상회의 총무와 여관의 관리인 역할을 착실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겉으로는 귀찮으니 번거로우니 해도 나미아는 나름대로의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서 해야 할 일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 그것은 오디가 450년 가까이 되는 삶에서 얻은 진리였다.
오후 4시쯤 되자 여관은 점심을 먹은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산한 느낌이었다. 노천 식당에는 파라솔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아직도 사람들이 많고, 앞으로도 많을 예정이지만 그들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손님이 느긋하면 직원들 역시 느긋한 법이었다. 게다가 건물 내부에는 사람들이 적었기에 더욱더 한산했다. 홀을 차지한 사람들 중에서 반은 쉬고 있는 직원들일 정도였다.
프론트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플로어 매니저인 페네디와 홀 매니저인 샹그렐이 직접 나와서 업무를 볼 정도로 한가했는데, 그녀들은 현재 직권 남용으로 프론트에 있던 부하 직원들에게 ??쉬고 싶지? 쉬고 싶지? 쉬고 싶지? 쉬고 싶을 거야. 쉬고 싶어야만 해??라는 식으로 자리를 빼앗아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업무라고 해도 대기 상태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델리스 요리장이 뭐라고 했는데?”
“식당에 내놓을 새 메뉴가 있어서 그걸 좀 맛봐달라고 하시더라고. 새우 필라프였는데, 상당히 맛있었어.”
“어머나! 그것도 마침 생일날에?”
“응.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었지. 아마도 요리장님은 별 생각 없이 마침 지나가던 사람을 부른 거라고 했거든. 그러려니 싶었지.”
“아하하… 그래?”
샹그렐은 페네디의 표정을 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바로 3일 전에 그녀는 델리스 요리장의 부탁으로 페네디에게 적당한 구실을 주어 그의 앞을 지나가게 했기 때문이다.
생일날에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요리사로서 당연한 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하태평, 무사 안녕의 대명사인 페네디는 감을락 말락 한 눈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가 둔감하니 구애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샹그렐은 델리스 요리장에게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는 충고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뒤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먹고 있을 때 아무 말도 안 하시더라. “마침 생일이라는 말이 들려서…”라는 말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알고 있었어?”
“하지만, 무드가 없었는걸?”
페네디는 태연자약하게 웃었고, 샹그렐은 처음으로 보는 페네디의 면모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이런 타입이 제일로 두려운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속을 알면서도 애태우게 놔두는 타입. 순간 샹그렐은 자신의 교우관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남은 시간을 계속 고민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어서오세요!”
“응? 아… 어서오세요!”
활짝 열려진 여관의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남루한 복장의 남자였다. 꾀죄죄하고 지저분한 복장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를 보면서 그녀들에게 생리적인 혐오감이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손님은 왕이었다. 어떤 복장을 하고 있더라도 왕은 왕으로 대접해야 함이 옳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돈 없는 손님은 거지 이하이기 때문에 펜스텐 호수에 집어 던져도 된다는 나미아의 말이 떠올랐다. 페네디는 심각하게 “오물 투척의 벌금은 꽤 비싸던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말했다.
“여관 WISH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투숙하실 건가요, 아님 식사를 하실 건가요?”
“케… 쿨럭! 쿨럭! 크흠! 저기, 간판에 “환상여관”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왔는데요…….”
샹그렐의 눈이 크게 떠지고, 페네디의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눈동자가 가늘게 떠진 눈 사이에서 잠깐 번뜩였다. 샹그렐은 “특별손님”이 왔다는 생각에 확인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오른쪽 상단에 있는 글씨 말씀이시죠?”
“왼쪽 상단이었는데요?”
땟국이 줄줄 흐르는 남자의 표정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척 보면 걸인이라는 생각 외엔 들지 않지만, 특별손님은 돈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들은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그렇기에 샹그렐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진짜 “손님”이시군요. 페네디. 마스터는?”
“5층에. 안내할게. 프론트를 부탁해. 손님, 이리로 오세요.”
“아, 예.”
페네디가 상냥하게 웃으며 남자를 안내했고 그 남자는 쭈뼛한 태도로 페네디의 뒤를 따랐다. 문득 그녀는 “특별손님”이 대체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오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온 특별손님은 모두 두 명이었고, 한 명은 소년, 한 명은 청년-레이라인은 그녀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이었다. 그리고 여기 또 남자가 찾아왔다. 그러면서 페네디의 머릿속에서는 뒷골목에서나 통용될 생각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일하는 여관의 마스터가 실은 알려지지 않은 최고급 창부였다던가 하는 생각이 스르륵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게다가 하프 엘프인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하겠냐는 반론이 치고 올라왔고, 어느새 두 개의 세력으로 갈린 페네디의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손님은 잠시 관자놀이를 지 누르는 페네디를 보며 그녀가 피곤한 것인가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상기하고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동상이몽이라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에 깊게 빠져들어 갔다.
나미아는 4층의 문을 열고 올라온 손님을 보고서는 단번에 이렇게 말했다.
“손님 전용 방은 저쪽, 욕실은 안에 있습니다. 갈아입을 옷은 옷장에 있고, 치수는 아마도 맞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기, 저는…….”
“예예. 급하신 것 알지만 일단 차분하게 여독을 풀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저쪽, 5G1호입니다.”
“아, 예.”
일리가 있는 말, 그것도 미녀가 정색을 하며 말하는 내용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남자는 무형의 기운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객실로 들어가서는 한 시간 뒤에 말쑥해진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물기가 남아 있는 짙은 색의 피부는 오랜 여행 동안 씻지 않아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팔이 훤히 노출되는 의상은 잘 단련된 남성의 근육을 보여주고 있었고, 군데군데 나 있는 여러 상처는 험난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게 하였다.
면바지로 감싸여 있는 다리는 길고 곧게 뻗어 있었으며, 크게 부풀리기보다도 날렵한 사슴 같은 근육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체와 하체의 조화, 그리고 걸음걸이와 골격 등을 대충 살펴본 나미아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봤지? 저런 체형을?”
나미아는 어디선가 저런 모습을 많이 봤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단련된 형태를 보면 상당히 익숙한 체형이었다. 손님이 반대편에 앉고서야 나미아도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서는 한참을 생각한 끝에 마침내 한 사람을 짚어낼 수가 있었다.
“베르힌츠!”
“예?”
“아, 아니. 체형을 보니까 딱 사냥꾼 타입이시네요? 혹시…….”
“안목이 좋으시네요. 맞습니다. 사냥꾼을 업으로 삼고 있지요. 한 5년 정도 되었군요.”
이마에는 이제 막 생기기 시작한 주름살이 한 줄 그어져 있었고, 왼쪽 눈썹 위로는 세 갈래의 작은 흉터가 있었다. 팔과 얼굴만 보더라도 아마 온몸에 자잘한 상처로 가득 뒤덮여 있을 것이 확실했다.
사냥꾼은 원래가 험난한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자가 되면 나이에 상관없는 은퇴를 감행하는 것이 사냥꾼이다. 자잘한 상처야 얼마든지 많아도 상관없지만 사지가 멀쩡하지 못하면 정적 속의 폭풍이 몰아치는 숲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그 숲을 지키는 정령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제를 약식으로나마 치르고 들어간다. 자신은 숲의 일원으로써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강하면 먹고 약하면 먹힐 수밖에 없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따른다. 그래서 그들이 가져오는 물건들에는 항상 목숨 값이 들어 있다.
사냥감에 대해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숲과 그 구성에 대해 언제나 경배하고 존중해야 숲도 자신의 행위를 존중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모든 종족은 자연의 자식들이니 그 또한 존중해 마땅하다고 믿고 있다. 사냥꾼의 대부분은 그 성정이 착하고 대담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직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한번 일을 나갈 때마다 죽으러 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고도 살아 돌아온 그들에게 사람들이 경외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선망 받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베르힌츠 역시 그런 면에서는 보통의 사냥꾼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엘프를 아내로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을 경배함에 있어서 다른 사냥꾼들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워낙에 가까이 알고 지내온 사이기에 나미아가 무의식중에 베르힌츠의 이름을 외친 것도 그리 큰 비약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황야에서 그대로 들어오셨나보죠?”
“예, 그렇습니다. 덕분에 꼴이 영 말이 아니었죠.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직업의 특성 정도를 무시할 만큼 교양 없는 여자는 아니에요. 아참, 아직도 소개를 안 했네요. 전 나미아라고 해요.”
“저는 가리안이라고 합니다. 레리첸트 중부에서 사냥꾼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리안은 미남형이라기보다는 호남형이었다. 이마나 몸에 난 상처는 사람이라면 선입견을 가지고 대할 것 같았지만 그 상처가 주는 위화감 대부분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인상이었다. 사냥꾼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과의 친화력도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어지간히 심한 상처나 흉한 얼굴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냥꾼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다.
나미아는 대충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서는 뭔가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디를 부르려고 했지만, 현재 그녀는 막중한 업무량에 치여 있는 실정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오디에게 마실거리를 가져다 줬다는 생각을 떠올린 나미아는 손수 마실 거리를 준비하기로 했다.
“뭔가 마시겠어요? 아니면 식사라도?”
뭔가 마시겠냐는 질문에 가리안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도 특이한 음료를 좋아한다든가, 그 지방에서밖에 안 나는 특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미아의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면 자연산 계곡물일지도… 그러나 가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미아의 예상을 한참 뒤엎는 것이었다.”
“에… 우유 있습니까?”
“우유요? 예. 물론이죠. 아침마다 갓 짜온 우유를 받고 있으니까요. 차게 해드릴까요?”
“예.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냥꾼 일을 한 지 5년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성인으로 인정받기 1년 전, 그러니까 17세에 시작한다. 그러니 최소 22세라는 말인데, 그런 남자가 우유를 찾고 있었다. 나미아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아마도 다른 여관이었다면 주문 받는 쪽이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선입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냥꾼들의 보편적인 음료는 과일즙이다. 혹은 시원한 계곡물이나 지하수, 이슬 정도이며 몸을 생각한다면 우유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밤에 선술집에 들어가면 호프나 에일(Ale), 조금 독한 쪽이면 진을 시키기도 하지만 낮에 먹는 음료라면 역시 우유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완전식품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사냥꾼들에겐 딱이었다.
나미아나 오디는 주로 밀크 티를 마실 때 우유를 사용하는 편이라 양은 적지만 우유 정도는 항상 구비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잔뜩 만들어둔 레모네이드를 길쭉한 잔에 적당히 담고서 얼음을 몇 개 띄웠다. 그리고 가리안의 체격과 직업을 고려해 조금 큰 잔에 우유를 가득 담아서 응접실로 돌아왔다.
“품질은 꽤 자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나미아는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입술과 목을 축일 음료수도 준비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의뢰를 듣는 것이다. 나미아는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했다.
가리안이 1파인트(약 0.57리터)는 되어 보이는 우유를 단숨에 비우지만 않았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푸하! 이 우유 정말 맛있군요. 한 잔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응접실 옆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그냥 병째 가져다주는 편이 좋지 않으려나?”
가리안이 새로 가져온 우유를 반쯤 비우고서 입술을 훔쳤을 때야 나미아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에… 그런데, 저희 여관에 대한 말은 어디서 듣고 오셨어요?”
“제가 살고 있는 “안센” 영지의 선술집에서요. 처음에는 그냥 떠도는 뒷골목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발길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있을 줄은 몰랐군요. 아, 이거 실례되는 말이었군요.”
“아뇨. 다들 그렇게 반신반의하면서 찾아오는걸요. 괜찮아요. 자연스러운 이끌림이 발걸음을 인도한 것이니까요. 어쨌든, 그렇다는 것은 가리안 씨는 어떤 곤경에 처해 있다는 말씀이시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나미아는 이젠 그런 표정에도 담담해졌다. 환상여관의 5층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글픈 미소나 다소 어두운 표정. 그것은 마치 거대한 진실에 접한 안스란의 신관들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나미아는 최대한 분위기를 편하게 유도하고자 했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상담을 하더라도 고민을 감추려고 드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이야기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두지 않으면 나올 이야기도 안 나온다.
“소문을 듣고 오셨으면 아시겠군요. 제가 이 여관의 마스터이고, 고민을 해결해주는 사람이에요. 원하신다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드리죠. 무슨 불행한 일이 있었는지, 가슴 아프시겠지만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나미아의 위로하는 듯한 표정은 미녀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 하나로도 남녀노소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동정하는 표정까지는 아니지만 편안한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가리안은 나미아의 표정에서 신뢰를 발견할 수 있었고, 한두 번의 심호흡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을 다질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죠? 레리첸트 중부라고.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레리첸트의 수도 레이친에서 남쪽으로 60마일 정도 가면 나오는 소규모 영지입니다. 수도에 가깝지만 수도로 가는 길목에 여덟 봉우리로 된 산맥이 있어서 사실상 시골이나 다름없지요.”
“아, 거기 알아요. 80마일 산맥이죠? 거룡의 등뼈라고도 불리는 그곳이요. 안센 영지라면 아마 제일 높다는 제4봉우리의 밑에 있는 곳이었죠?”
“잘 아시는군요. 예, 저희 마을은 말씀하신 대로 제4봉우리인 “포릴엔트”의 밑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형도 험하고, 숲도 꽤 우거진 편이라서 그리 많이 발전되지는 않았지요. 5천 명 정도가 모여서 사는 중소규모의 영지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5인의 사냥꾼 중에 한 명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살고 있었죠.”
가리안은 말을 멈추고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나미아도 그에 맞춰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차분하게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저는 아직 풋내기라서 그렇게 많은 돈은 벌지 못합니다. 하지만 활 솜씨와 가죽 벗기기는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 자부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스승님께 15년 전부터 가르침을 받았거든요. 스승님의 후광 덕에 먹고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5년 이내로는 그 후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아, 이거 좀 건방진 말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니에요. 몇 년 뒤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미래에 대한 계획을 확실하게 세워두시고 계신 것 같네요. 목표를 가지고 정진하는 성실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요즘엔 1년 뒤도 장담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어쨌든 생활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약속한 여자도 있고, 일가를 꾸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돈도 모았지요. 하지만… 어째 행복해지기 직전에 다가오는 불행이 제일 무섭다고, 지금의 그런 상황입니다.”
표정을 천천히 굳히는 가리안을 보며 나미아는 이제야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그녀는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들을 마음가짐을 가졌다. 약간의 망설임과 과거 회상 뒤에, 가리안이 입을 열었다.
“저희 영지를 다스리시는 영주님의 성함은 “페이넨드 진 안센”이라고 합니다. 남작의 작위를 받아 56년 전부터 저희 마을을 다스리고 계시지요. 몇 번 만나뵌 적이 있는데, 상당히 성실하시고 사리가 밝으신 분입니다. 단점이 있다면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맹목적이라는 점이죠.”
“음… 제 짐작이지만, 혹시 그 영주의 자제 분에 관련된 일인가요?”
“그 한 사람의 일만이 아닙니다. 1년 전, 영주님의 둘째아들인 “크리스 본 안셀”은 레이친의 귀족 학술원에서 여러 영지 경영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익혀 돌아왔습니다. 워낙 영주님이 자식에게 맹목적인지라 제멋대로이지만 영지를 아끼는 마음은 크기 때문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영지의 계승자인 그 형을 도와 영지를 부흥시킬 인재로 평가받고 있어서 영지의 사람들은 그의 귀환에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자신의 목표와 능력과는 별개인 사람이 있다. 크리스라는 남작의 아들은 아마도 형제 간에 사이가 좋기 때문에 영지를 다스리는 사람의 보조 역할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사람이라는 걸 나미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가리안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 점은 명확했다.
잠시 말을 멈춘 가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척 보기에도 좋은 일을 했습니다. 영지의 경제를 위해서 상회를 들여오고, 조세제도를 개선하는 데 일조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영지 시찰을 돌면서 주민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노력했죠. 그의 인격이 시켰다고 하기보다는 그의 지식이 그렇게 시켰을 것입니다. 저는 저하고 그리 마주칠 일도 없는 상대라서 그러려니 하고 사냥꾼의 일을 계속했죠.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 때, 그는 제 애인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어머나. 애인이 꽤 미인이신가봐요?”
“저에겐 축복이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재앙에 가까울 정도로요. 크리스는 제 애인이었던 안젤라에게 반해버렸습니다. 그녀는 제가 물건을 대고 있는 가죽점과 정육점 근처에 있는 대장장이의 딸이었죠. 거칠게 자라났지만 매우 예뻐서 제 또래나 주변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헤에… 행운아시네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5년 전에 제가 막 사냥꾼 일을 시작했을 때, 숲으로 산나물을 캐러 온 그녀가 길을 잃은 것을 발견하고는 제가 그녀를 안전하게 데려다주게 되었죠. 그것을 계기로 저희는 서서히 가까워져서는 미래를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나미아 씨의 말씀대로 저는 참 행운아입니다. 저는 그녀에게 제 열과 성을 다했죠. 그녀 역시 저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참 잘 어울리는 사이라고 했죠. 하지만 크리스의 눈에 그녀가 띄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나미아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종류는 늘 있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지만 나미아는 가리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도록 했다.
“영주의 둘째아들이고, 후계자도 아니니 아내의 선택에는 자유로운 편이지요. 게다가 미래도 확실하고요. 크리스는 그것을 장점으로 안젤라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안젤라를 둘러싼 그와 저의 사랑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쪽으로 가기로 했죠. 저 또한 처음에는 성실하게 승부에 임할 생각이었습니다. 안젤라가 정말로 절 사랑하고 있고, 절 믿고 있다면 좋은 미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크리스가 저에게 따로 승부를 제의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승부요?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저희 영지는 4년에 한 번씩 사냥꾼의 기량을 겨루는 대회를 엽니다. 숲과 가까운 데다가 사냥꾼의 인기도 좋아서 축제와도 같은 일입니다. 그 대회에서 우승하는 사람이 안젤라의 마음을 가져가는 것으로 정하자는 것입니다.”
“예? 뭔가 이상한데요? 영주의 아들인데 사냥꾼 대회에 나간다고요?”
가리안은 나미아의 의문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 * *
“영주님의 아들이 사냥꾼 대회에 나간다고?”
“아, 물론 내가 가는 건 아냐. 그 대회 이전에 우리는 안젤라를 놓고 겨루는 사냥꾼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목표는 하나밖에 없는 안젤라의 마음. 사냥꾼은 가진 바 기량을 다해 사냥감을 포획해야 하지. 나는 사냥터를 그 대회로 하자는 말을 하는 걸세. 알다시피 나는 사냥꾼의 능력은 없네. 하지만 나의 기량을 발휘하면 사냥꾼을 고용할 수는 있지. 그 사람이 날 대신하겠다는 거야. 물론 이 영지의 사냥꾼은 아니야. 축제에는 타지 사냥꾼도 참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 그렇지.”
크리스는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곳에서 결판을 내고자 하는 걸세. 안젤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는 사람은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영지를 떠난다는 조건까지 함께 말이야.”
“상당히 과격하군.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은 조용히 터를 떠나라는 소리인가?”
“그런 셈이지. 조건은 양측에 평등하다고 할 수 있어. 안 그래?”
가리안은 사심 없이 이야기하는 크리스를 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적에는 자주 놀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신분의 차이가 크다. 그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지금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안젤라를 건 승부라면 크리스라고 해도 비겁한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대 남자, 자신이 가진 기량을 다하는 승부. 이 정도라면 할 만한 일이었다.
“좋아. 하지. 약속은 확실하게 지키겠지?”
“자네야말로. 실패하면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 지는 쪽은 순순하게 안젤라에게서 손을 떼는 거야.”
“알겠어. 그럼 대회에서 결판을 짓지.”
“잘 생각했어. 이걸로 겨우 자네와 겨뤄볼 수 있군.”
크리스는 생긋 웃으면서 그의 오두막을 나갔다. 가리안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일생일대의 큰 사냥이 될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 * *
“그런데, 정정당당하지 않은 일인가보죠?”
“그렇습니다. 그렇게 경쟁을 하기로 정한 후로, 제가 사냥한 동물의 가죽이나 약초들이 전혀 팔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미 마을의 경제는 크리스가 귀향하면서 차린 상회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쪽에서는 제 물건을 받지 않았죠. 저는 하는 수 없이 다른 마을이나 영지로 팔러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안젤라와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그녀는 그럴수록 크리스를 만나게 되더군요.”
“이제야 알겠군요. 모든 게 그 크리스라는 사람의 계략이군요?”
“맞습니다. 저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죠. 속았다는 것을. 애초에 상회가 그의 손아귀에 있으니 제 밥줄도 끊겼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되고, 실패자에 가까워졌지요. 안젤라는 그런 저를 위로했지만 몇 달 지나니 그녀의 마음도 크리스에게 기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정진했습니다. 대회에서 우승하면 되니까요. 그러던 도중… 우연하게 크리스가 끌어들인다는 사냥꾼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미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듣지 않아도 뻔한 내용이었다. 이야기 속의 크리스는 치밀한 사람 같았고, 그런 사람이 준비한 일이라면 뻔한 결과였다. 아마도 그 주변에서 실력 좋기로 유명한 사냥꾼일 것이다.
“그 사람은 “크릴 도슨”이라고 80마일 산맥을 자유자재로 누빈다는 최고의 사냥꾼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크리스와 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크리스의 초대로 이번 축제에 참가한다고 하더군요. 경력도 70년이나 되는 무서운 상대입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경력만큼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제 스승님의 라이벌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랬군요. 그래서 이곳으로 찾아오신 건가요?”
“예. 실력도 부족하지만, 이곳으로 온다면 제 일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이대로라면 저는 그 크릴은 물론 크리스나 이켈라인 상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잘 듣고 있던 나미아는 마지막 얘기에서 깜짝 놀랐다. 이야기 속의 그 불공정한 상회가 바로 이켈라인 상회라고?
“예? 이켈라인 상회요?”
“믿을 수 없으시죠? 저도 그 이름에 안심했었지만, 대륙에 퍼진 평판만큼 좋은 상회는 아니더군요. 여러모로 실망했습니다.”
“그런, 세상에… 믿을 수 없군요.”
가리안은 나미아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거래처가 그곳인가 싶은 생각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미아는 왠지 처음부터 자신의 풀 네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이켈라인”이라는 성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미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정한 상회의 수칙 중에서는 모든 거래를 공정하게 한다는 말도 있었다.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거래와 거래로써 고객을 대한다는 것은 이켈라인 상회의 철칙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정경유착은 어디로 보나 상회의 수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가리안은 나미아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그것이 이켈라인 상회와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미아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아, 아아! 물론이죠! 당연히! 돕게 해주세요! 이런… 이거 참… 실례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미아는 어리둥절해하는 가리안을 두고서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켈라인 상회에 그런 녀석들이?!”
그녀의 집무실 바로 옆에 있는 오디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간 나미아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는 들어갔다.
“나미아 님?”
오디는 남은 서류들의 마무리를 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면서 나미아를 보았다. 나미아의 표정에는 배신과 불신이 가득 차 있었고, 오디는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생각했다. 최근의 서류 처리에서 시작해 오늘 아침 직접 준비한 식사와 간식에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와 같다는 결론밖에는 얻을 수 없었다.
“오디! 나 지금 무! 척! 짜증내고 있어!”
“네, 네엣! 무, 무슨 일이세요?”
“레리첸트 중부의 “안센”영지, 거기 지부의 지부장이 누구야?! 어떤 놈이야? 아니면 년이야? 간 크게도 감히 회장이 정한 수칙을 과감하게 어기는 그런 놈이 누구야?!”
오디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미아의 말이 무슨 뜻인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나미아의 설명을 요구하기보다는 일단 그 문제의 사람을 찾는 것이 나미아의 화를 삭이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녀는 서둘러 상회의 인사기록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빨리 찾아! 진정할 때까지 못 찾으면 더 크게 화낼 거야.”
“알겠습니다!”
오디는 바짝 긴장해서는 그녀의 주인이 큰 화를 내기에 앞서서 인사기록부를 뒤졌다. 지역별로 나와 있는 인사기록부에서 레리첸트 지역을 펼치고, 중부에 속하는 도시의 명단에서 “안센”이라는 지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디는 급하게 주르륵 훑어 내려가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앞쪽 페이지에서부터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나미아는 오디가 뒤진 곳을 계속해서 반복해 뒤지면서 점점 울상이 되어가는 걸 보며 의아해했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람? 표정은 또 왜 저래?
“뭐야? 왜 그러는데?”
“어, 없어요.”
“뭐라고?”
“그, 그런 지부는 없는…데요? 안센이란 곳에는 지부가 세워지지 않았어요.”
나미아는 이게 무슨 오크 트림하는 소린가 싶었다. 오디가 가진 인사기록부는 본사에서 쓰는 것으로, 한 달마다 내용이 교체되고 있었다. 그 크리스라는 작자가 이켈라인 상회를 안센 마을에 들여온 것이 1년 전의 일인데, 그 내용이 없다는 건 여러모로 이상했다. 나미아는 재차 물었다.
“확실한 거야? 지역을 잘못 본 거 아냐?”
“아니에요. 확실해요. 제 머리카락에 걸고 맹세하는데, 레리첸트의 안센이란 곳에는 지부가 없어요!”
“그럼 난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나미아는 신경질적으로 엄지 손톱을 깨물면서 생각에 잠겼고, 오디는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나미아가 안 하던 상회의 일에 관심을 보이나 싶었다. 그러나 저런 나미아의 상태를 보고서는 쉽게 손을 댈 수 없다고 생각해 그냥 바짝 긴장한 채로 나미아의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가락이 머리카락과 엉켜서 한참을 끙끙대던 나미아가 입을 열었다.
“오디. 지금 하고 있는 거 언제 끝나?”
“아, 1시간 이내로 끝나요.”
“그래? 알겠어. 다 끝내면 응접실로 나와. 손님 오셨어. 아마도… 아빠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 정확하게는 그 아래지만.”
“손님이요? 알겠습니다. 30분 이내로 끝낼게요.”
오디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는 황급히 서류를 속독하기 시작했고, 나미아는 엉킨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응접실로 돌아가자 그곳에는 매우 불안한 표정의 가리안이 있었다.
“어머, 죄송해요. 급하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가리안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미아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으음… 일단 먼저 말씀드려야겠군요. 제 이름은 나미아 이켈라인이에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이지요.”
“예…에?! 회, 회장이요?!”
“못 믿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이걸 보시겠어요?”
나미아는 이켈라인 상회의 회장의 표식으로 널리 알려진 “움직이는 펜던트”를 꺼내어 가리안에게 보여주었다. 가리안의 표정에 당혹이 서리더니 불신이, 그리고는 경악이 이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음에 나미아는 슬슬 질릴 지경이었다.
“아무튼, 조금 전에 총무가 확인해봤는데, 안센 영지에는 저희 상회의 지부가 없다는군요. 아무리 늦어도 한 달 전의 인사기록부니까 확실할 거예요.”
“예? 그렇다면… 저희 영지의 그건 뭡니까?”
“아무래도…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가 장난친 거라든가, 혹은 저희 상회 쪽에서 일부러 실수를 저지를 만큼 간 큰 인물이 있다는 말이겠죠. 아무튼, 가짜이긴 해도 저희 상회의 이름에 손해를 보신 분이니 상회를 대표에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나미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리안은 대륙을 뒤흔드는 공전의 상회의 회장이 이렇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믿어지지도 않고, 송구스럽기도 해서 황급하게 나미아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지나가는 상단도 없나보죠. 어떻게 가짜 상회가 영지에 일 년이나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아, 축제는 며칠 뒤죠?”
“남은 날짜가 한 달 정도입니다. 10월 4일에 축제가 시작됩니다.”
“10월 4일이라… 빠듯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네요. 그럼 그때까지는 제가 최선을 다해서 가리안 씨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100펜 되겠습니다.”
돕겠다는 말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가리안은 맨 마지막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미아가 내민 손과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 그녀의 말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고 있었기에 가리안은 어렵사리 말을 꺼내야 했다.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의뢰비용이요. 세상사 공짜는 없죠. 원래라면 기본요금이 1만 펜인데, 저희 상회의 네임 밸류 때문에 입으신 손실이 막대하니 99%를 차감해서 100펜입니다. 무이자 장기분할 납부도 된답니다.”
“잠시만요.”
가리안은 자신의 금전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100펜이라면 자신이 모아둔 돈의 절반이었다. 몸으로 먹고사는 사냥꾼이기에 또 벌면 된다지만, 100펜이란 돈은 미래를 위해 모아둔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결심을 굳혔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투자하는 돈치고는 아깝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좋아요. 고향에 가면 곧바로 지불하겠어요.”
“OK! 거래 성립! 내일 해 뜨는 대로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상쾌하게 결론짓는 나미아의 표정은 돈을 내는 쪽에서도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가리안은 그러다 문득 어디로 출발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설마 곧바로 돈을 받기 위해서 안센 영지로 가겠다는 것인가? 그는 나미아의 표정에 주의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로… 말입니까?”
나미아는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엘 타칸리스의 산맥으로요.”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9월 2일.
시간이 촉박하다는 전제 하에, 나미아와 오디는 가리안을 데리고서 엘 타칸리스의 산맥에 위치한 엘브스 퀸의 성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어차피 성의 주인은 나미아의 어머니 중 한 명인 에실루나 지오덴틱이었고, 수양딸이긴 해도 그녀가 퀸의 딸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기에 엘프들도 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손했다.
“프린세스(Princess) 나미아, 오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 잠시 근처에 일이 있어서요. 엄마 계세요?”
“퀸께서는 현재 부군과 함께 계십니다. 기별을 넣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참, 베르힌츠 어디 있는지 아세요?”
“순살궁(順殺弓) 베르힌츠 님이라면 자택에 계십니다.”
“예.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가리안은 이 무지막지한 전개에 차마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가 아무리 마법에 조예가 없더라도 순간 이동의 마법이 고난이도의 마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시전 하는 사람도 그렇거니와, 엘프들에게 극존칭을 들으며 대접받는 사람이라는 것은 더더욱 놀라웠다. 게다가 나미아가 찾는 사람은 사냥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목표로 하는 속사의 대명사가 아닌가?
“저, 나미아 씨? 베르힌츠 님을 알고 계십니까?”
“베르요? 물론 알고 있죠. 그 녀석 기저귀도 갈아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런 적은 없어요.”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
오디는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리안은 앞서 가는 두 여성의 뒤를 쫓으면서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켈라인 상회라는 거대 조직의 회장과 총무인 데다가 엘브스 퀸의 따님들이며, 그 유명한 베르힌츠를 옆집 꼬맹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에”라는 말마저 나오지 않았다.
엘브스 퀸의 성이 있는 마을은 그렇게 격식을 차린 곳 같지는 않았다. 단지 마을 한가운데에 잘 지어진 성이 있다는 것 외에는 보통의 숲 속 마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성을 대하는 엘프들의 태도도 무슨 마을 한가운데 있는 관광 유적지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프린세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프린세스. 안녕하셨습니까.”
“어머! 장로님! 이게 얼마 만이죠?”
“언니! 오랜만이야!”
“와아! 체이르! 되게 오랜만이다!”
나미아는 지나가는 모든 엘프들의 인사를 받았고, 몇몇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듯싶었다. 오디 역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면서 굉장히 편안한 미소를 띠었고, 결국 이곳에서 벌쭘한 표정을 짓는 것은 가리안 혼자뿐이었다.
엘프와도 상당히 친하다고 볼 수 있는 직업인 사냥꾼은 자신들이 일하는 일터를 생의 장소로 삼고 있는 숲의 정령의 현신(現身)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가리안 역시 그런 사냥꾼이었고, 그 경외의 대상이 눈 닿는 곳 어디에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오디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그는 마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버리는 추태를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리안. 괜찮으세요?”
“예?! 아, 괘, 괜찮습니다. 아하하! 이켈라인 상회의 주인이 하프 엘프라니… 사실이었군요. 게다가 엘브스 퀸의 따님일 줄은…….”
“뭐, 엄마는 한 명 더 있지만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 뭐라고요?”
“아저씨! 신수가 더 훤해지셨는데요? 안녕하세요! 와우! 오랜만!”
나미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엘프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엘프들은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는 나미아에게 인사를 했고, 나미아가 지나간 후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을 재개했다.
엘브스 퀸의 딸이라서 공경을 하긴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친딸이든 양딸이든 상관없이 엘프들에게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존경과 신뢰의 대상은 퀸이었지 프린세스들이 아니었기에 나미아도 부담 없이 그들을 대할 수 있었다.
가리안에게는 혼란과 경악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서 그들은 숲길을 걷고 있었다. 가리안은 어느샌가 자신들이 엘프들의 마을을 벗어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숲과 마을의 경계가 모호한 엘프 마을의 특성 때문이었다.
몬스터가 많기로 소문난 엘 타칸리스의 산맥답지 않게 주변을 무서우리만치 고요했다. 몬스터가 아닌 보통 동물들과 새소리, 약간 멀리 있는 듯한 계곡의 소리만이 숲의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가리안은 그 모습을 보며 엘 타칸리스의 숲과 산맥이 어째서 대륙 3대 위험지대에 속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와서 수렵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런 가리안의 속을 읽었다는 듯이 나미아가 가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용하죠?”
“그렇…군요. 엘 타칸리스의 산맥이 왜 금역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브스 퀸의 성이 있고, 엘프의 마을이 있고, 베르힌츠가 있기 때문이에요. 원래 몬스터 부락이 많은데, 그들은 유사인간의 마을 주변으로는 침범하지 못해요. 그리고 여긴 그들을 잡아먹는다는 속사의 대명사, 엘프들에게는 고통을 주지 않고 죽이는 화살이라는 뜻의 순살궁 베르힌츠 투플레인이 살고 있죠. 게다가 여긴 엘 타칸리스의 영역 중심이랍니다.”
“아, 그렇… 뭐요?!”
나미아의 평온한 말투에 “그렇군요”라고 대답하려던 가리안은 뜨악 하는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엘 타칸리스의 영역 중심이라는 건 결국 드래곤의 레어가 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나미아는 멈춰 선 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가리안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위험하면 엘프들이 미리 경고해주었겠죠. 더없이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절 못 믿으세요?”
“예? 아, 아니… 하지만…….”
가리안은 주변을 불안한 듯 둘러보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영 갈피를 못 잡는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는 희고 곧게 뻗은 그 손가락에 자신이 꿰뚫린 듯한 표정을 지었고, 나미아는 그 표정을 향해 그의 가슴을 꿰뚫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우시면 그대로 돌아가셔도 상관없어요. 엘프 분들께 말씀드려서 안전하게 나가는 길을 안내해드리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어제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냥꾼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지 않아요? 안젤라라는 여성과 행복한 미래를 꾸미고 싶지 않아요? 크리스라는 그 망나니 남작 도련님한테 한 방 먹이고 싶지 않아요?”
“무,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그럼 따라오세요. 다리를 움직여요. 숨을 쉬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하세요. 제가 가는 길을 따라오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날 믿어요.”
“예. 알겠습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가리안은 마음을 굳힌 듯 다리를 움직였다. 나미아는 칭찬을 하듯 대견하다는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오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긋 웃었고, 아름다운 두 여인의 인도 아래 가리안은 아무런 사심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세상이었다. 자신의 힘듦을 알고 성심 성의껏 도와주려는 사람들을 믿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지금 처한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없었다.
눈앞에 빛이 있으니 빛을 따라 간다. 눈앞에 희망이 있으니 희망을 쫓는다. 그리하면 바라던 미래가 눈앞에 있을 것이다.
가리안은 그렇게 믿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9월 12일.
“베르힌츠. 가리안 씨는 어때? 괜찮은 학생이야?”
“괜찮다마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야. 덕분에 가르치는 보람이 생겼어.”
“이이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카르티나 돌보는 것도 잊어먹을 지경이야. 그 사람 덕분에 이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나에게도 고맙지.”
베르힌츠의 아내 레이사는 젖을 빠는 카르티나를 안은 채 방긋 웃었다. 베르힌츠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나미아와 오디는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리안이 베르힌츠에게서 사냥꾼 수업을 받은 지 10일째. 지금 그는 베르힌츠가 지정한 사냥터로 가서 사냥을 하는 중이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하루에 두어 번 찾아와서는 가리안을 만나거나, 혹은 레이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상태를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말했다시피 활 솜씨는 매우 좋아.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도 고쳤어. 어지간한 광풍만 아니라면 자기 생각대로 활을 당길 정도는 돼.”
“뭐, 속사의 대명사 베르힌츠가 말씀하시는 거니 어련하겠어? 다른 거는? 예를 들자면 가죽 벗기기나… 아, 레이사. 미안.”
“응? 아냐. 괜찮아. 남편의 직업에 대해 이해해주는 건 아내의 역할인걸. 그리고 엘프라고 해서 고기를 안 만지는 건 아니니까. 나도 산후조리 할 때만 해도 하루 세끼 꼬박꼬박 고깃국을 챙겨 먹었는걸? 미리안 언니나 퀸께서 라이니시스 오빠한테 해주는 티본스테이크 울트라 레어에 비하면 멀었지만. 아직 근육의 섬유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종류는 비위가 상해서…….”
레이사는 카르티나가 적당히 먹었다고 생각되자 입에서 젖을 떼고는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그리고는 카르티나가 트림을 할 수 있게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미아는 귀여운 아기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잠시나마 중단된 대화를 잇기 시작한 건 오디였다.
“그래서, 가죽 벗기기나 다른 일은 잘되는 편이니?”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일이라고 했는데, 역시나 잘하고 있어. 상당히 잘 배운 것 같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할 거리가 없었어.”
“호오… 그럼 사냥꾼으로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다는 소리네?”
“응. 좋은 스승한테 잘 배운 것 같아. 문제는 다양한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경험이나, 변종 약초와 기형 생물에 관한 지식이 여러모로 많이 부족해. 경험은 여기서 최대한 익힌다고 쳐도, 지식은 어떻게든 주입시켜야 하지 않겠어?”
사냥꾼으로 생활해온 시간이 긴 만큼 베르힌츠는 경험의 정수라 부를 만한 일을 가리안이 겪게 하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면 보통 사냥꾼이라도 적잖은 경험을 쌓을 수 있겠지만, 베르힌츠의 수업은 그를 그 몇 배, 몇십 배에 달하는 경험을 몸에 축적시키게 하였다. 사냥꾼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나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문제라면 역시 지식이었다. 연륜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지식은 책을 암기한다고 해도 그 십 분지 일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보통 사냥꾼의 일이라면 지식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경험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베르힌츠의 특별수업은 그 중요한 부분을 한꺼번에 채우는 효과를 노린 것이기 때문에 문제는 지식이었다.
“뭐, 사냥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네가 더 낫잖아. 내 손님이라고 해도 나는 이번엔 손 떼고 지켜볼 수밖에 없어. 괜스레 귀찮은 일 맡긴 게 아닌가 모르겠네.”
“무슨 소리를. 누나하고 나 사이에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아. 누나 손님이 곧 내 손님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쪽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천천히 준비 중이야. 적어도 의뢰를 실패로 끝마칠 생각은 없어.”
나미아는 찻잔을 들어올리며 가늘게 미소 지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남을 위해 함정을 파는 사람은 자신 또한 다른 이가 판 함정에 걸려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안센 영지에서 대회가 열리는 그날, 그 간단한 진리는 만인의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헉! 헉!”
가리안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하루에도 주어지는 수십 개의 사냥 목표는 그를 쉴 틈 없게 만들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야 겨우겨우 시간 안에 끝마칠 일이었다. 그러나 가리안은 불평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으윽!”
손에 잡힌 물집이 터져서 살갗이 벗겨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숏 소드(Short sword)를 놓칠 뻔한 그는 핏물이 배어 나오는 손에 쑥을 잘 씹어서 붙였다. 하루에서 몇백 발씩 화살을 쏘고, 몇십 번이고 베르힌츠와 검을 겨루었다.
활줄이 끊어진 것만 몇십 번이요, 그 활줄에 할퀴는 것 또한 예사였다. 어렸을 때 잡혔던 물집보다 그 배는 되는 물집이 손에 잡혔고, 터지고, 다시 잡혔다. 그래도 가리안은 활을 당겼고, 화살을 날렸다.
연습, 오로지 연습뿐이었다. 연습은 몸에 녹아들어 경험이 되고, 경험은 가리안과 그의 상대가 될 자들에게 견줄 수 있는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노력한 만큼이 전부 몸으로 배어 들지는 않는다. 그중 1할도, 1푼도 제대로 몸에 배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하는 건 위로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노력과 노력, 그 이상을 해내야만 비로소 경험이 몸에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리안은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활을 당길 때는 숨을 멈춥니다. 목표와 자신의 사이에 화살이 나아갈 길을 그리십시오. 온몸으로 자연을 느끼고, 정신을 일체화시키면 그 길이 보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엉뚱한 방향으로 쏜 화살이라도 그 길을 따라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다.”
베르힌츠의 조언을 뼛속 깊이 새기면서 가리안은 화살을 당겼다.
“사냥꾼에게 숏 소드는 번거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시겠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자연에 달려 있다고 해도 스스로가 지키지 않으면 자연은 그저 내버려둘 뿐입니다. 대거요? 고작해야 1피트(약 30.48cm)짜리 날붙이는 죽음의 잔재물을 처리할 때나 유용하게 쓰입니다. 1야드(약 91.44cm) 1피트의 롱 소드는 발을 잡아챌 뿐입니다. 도끼는 발을 무겁게 하고, 창은 거치적거립니다. 메이스는 말할 것도 없고요. 사냥꾼에겐 자신의 한팔 길이와 비슷한 2피트의 숏 소드가 제격입니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으면서, 그는 숏 소드를 휘둘렀다.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휘둘렀다.
“자신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자신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렇다고 과신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 아셔야 합니다. 그 한계를 넘으면 또 다른 한계가 생기고, 그것을 점점 돌파해나가면서 그 위에 겸손함을 쌓으십시오.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 순응하는 사냥꾼은 자연을 경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자가 입으로만 경배한다고 하면 그건 위선일 뿐입니다.”
물과 과일, 사냥한 동물의 심장을 자연에 바치며 그는 경배했다. 위대한 자연 앞에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경배하고, 또 경배했다.
“사냥감에 대한 예의를 가지십시오. 그들은 당신을 상대로 힘겨운 삶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동물일지라도 세 발을 맞춰서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건 당신의 패배입니다. 곱게 돌아서십시오. 최종적인 목표는 처음 한 발로 그들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을 사용하실 때도 단번에 숨통을 끊으십시오. 단발마가 여러 번 나오게 하지 마십시오. 사냥꾼은 살육자가 아닙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서서 용사들을 맞이하는 용사입니다. 이 세상 누구나 사냥꾼이고 사냥감입니다. 자기 자신을 대하듯 존중하세요.”
한 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 뒤로 더 이상의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한 번의 칼질이 지나간 뒤에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도 없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가리안의 몸은 피로에 지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였다.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상하게 해선 안 됩니다. 몸을 혹사시켜서 한계를 측정하십시오. 그리고 그걸 조절하는 법을 깨달으십시오. 당신이 자연에 대해 예의를 갖추고 대한다면 당신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빨리 가르쳐줄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나면 녹초가 된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보람된 표정으로 웃었다. 뿌듯한 성취감과 몸 안에서 잔잔히 끓어오르는 감동이 가리안의 몸을 떨리게 했다. 몸이 피로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푸르고 푸른 대자연 속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였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생과 사의 교차. 몇백 번씩 시위를 떠나는 화살. 흩날리는 땀방울을 베어버릴 듯 공기를 가르는 숏 소드.
모든 것이 일체화되는 순간, 가리안은 사냥꾼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또 믿었으며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는 모든 일에 진실되게 임했고, 최선을 다해 생활했다. 그랬기에 가리안은 정녕 성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