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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est.Supplementary story(외전): 공짜 손님. (13/49)

Guest.Supplementary story(외전): 공짜 손님.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25일.

오늘도 여관 WISH는 붐비고 있었다.

항상 객실의 3분의 2는 차 있는 상태였고, 식당을 겸한 술집도 일찍 문을 닫는다는 리스크(Risk)를 지고 있긴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장점으로 적용되었다. 일찍 문을 닫는 만큼 일찍 귀가할 수 있거나 쉴 수 있었고, 밤새 마실 일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조절이 된다는 점이었다. 바야흐로 주점의 신개념 돌풍이 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장사는 잘되고 있어서 이 정도로 6개월만 더 가면 초기 건설비용을 건질 수 있겠다는 오디의 계산 결과에 나미아는 매우 흡족해하며 종업원의 월급을 올리려고 했다가 그렇게 되면 손익분기점이 2개월 늦춰진다는 말에 흘린 말을 주워 담은 적도 있었다.

힐텐펜스에 생기는 여관 중에서도 손꼽히는 여관이 된 WISH에 대한 위협은 여러 가지였다. 예를 들자면 다른 여관들이 연합해서 가격 인하를 한다든지, 이켈라인 상회의 납품에 대해서 께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그 모든 반응에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리고 무시했다. 체인도 내지 않고, 심심해서 차린 여관에 뭔 태클을 그리 많이 거느냐는 식이었다. 억울하면 이켈라인 상회만큼의 상회를 만들고 여관업을 차려라 하는 배짱 튕기기였기 때문에 힘없는 여관 업자들은 금세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는 내지는 않았지만 이켈라인 상회가 마음만 먹으면 대륙 전체의 상권을 쥐는 것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나미아가 추구하는 것이 공정거래와 경쟁체제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렇게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경쟁자가 있어야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충고를 나미아는 잊지 않고 있었다.

여관 WISH의 식당과 주방은 언제나 바빴다. 수시로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며, 가끔 생활의 시간 기준이 엉망으로 잡힌 숙박객들의 식사를 담당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제대로 쉴 틈이 없었다.

여관의 경우 식사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긴 하지만 추가요금을 낸다면 언제 먹어도 상관없기에 어떤 손님들은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기보다는 마음대로 시간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게 식권을 구입하곤 했다.

비단 식당과 주방뿐만 아니었다. 방에 사람이 나가면 바로 청소에 들어가야 하고,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잠시 양해를 구하고서 방 정리를 한다. 하루에 한 번 침대 시트와 소모품이 교체되기 때문에 직원들은 언제나 분주하게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여관에는 두 개의 계단과 한 개의 비탈길이 있다. 두 개의 계단은 손님들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쓰였고, 비탈길은 직원들이 룸서비스용 수레나 세탁물 수거 수레, 혹은 방 안의 물건을 옮기기 위해 만들어졌다. 계단은 큰 물건을 옮기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여관 WISH에는 정해진 교대시간이 없다. 바쁠 때는 모두가 나서서 거들고, 한가할 때는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돌아가며 일을 한다. 여관이 개업한 지도 벌써 개월 수로만 넉 달째였다. 이미 직원들은 어떤 시간에 손님들이 제일 많이 몰리며, 어떤 시간이 제일 한산한지 꿰고 있었다. 때문에 특별히 나미아나 오디가 나서서 지시할 일도 없었다.

그녀들이 상회의 사저에서 데리고 온 네 명의 사람들은 처음엔 많은 숫자의 부하들 때문에 당황했지만 지금은 훌륭하게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창립자가 경영에 끼어들 곳이 없다는 것이 어찌 보면 처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르게 보다면 훌륭하게 만들어진 시스템의 본보기라고 할 수도 있다.

“으음…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그렇다고 이 여관의 체어맨(Chairman)이 특별히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미아는 물레를 멈추고서 실을 사용해 빚어낸 그릇을 물레에서 떼어내었다. 나미아는 그것을 손으로 들어올리려다가 잘못하면 망가질 것 같다는 생각에 염동력(念動力)을 사용해 들어올렸다.

나미아가 만든 것은 작은 사발이었다. 깨끗한 원을 그리면서도 견고해 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는 사발, 나미아는 그것을 공중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건조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공중에 떠 있던 사발은 건조대로 둥실 날아가서는 안전하게 착지했다.

나미아의 도예는 나날이 성장 중이었다. 취미 하나를 만들면 그것에 몰두하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고, 그 몰두하는 시간에는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서 신경을 꺼버렸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그녀의 학습 속도는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는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어렸을 적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었을 일도 지금은 충분히 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상당한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지금의 도예 같은 일이 그것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나미아는 흙칠을 한 손을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성공적으로 나온 그릇이 세 개나 됐다. 흙을 건조시켜서 가마에서 구워내고 나면 또 생각이 틀려지겠지만, 어쨌든 오늘도 완성품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도예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습관이 생긴 나미아였다. 오디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몇 안 돼는 습관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녀가 세면대로 가서 손을 씻고, 흙이 튄 앞치마를 작업장 한편에 걸어두었을 때,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눈치 챌 수도 없는 발소리였는데, 이 여관에서 그런 발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문을 향해 말했다.

“오디, 무슨 일이야?”

끼이익.

조용히 문이 열리고 흰 옷을 차려입은 오디의 모습이 나타났다. 오디는 작업장을 둘러보고는 자신이 방해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 안도하는 듯했다. 그녀는 한켠에 마련된 건조대에 못 보던 그릇들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는 말했다.

“오늘도 괜찮은 게 나왔나보네요?”

“응! 오늘은 세 점 만들기가 성공했어. 접시하고 사발하고 단지.”

“어머나! 굉장하네요! 축하드려요!”

“헤헷, 고마워.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제 막 올라가려고 하는데.”

오디는 마침 끝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 특별손님이 오셨어요.”

“그래? 호오… 이거 꽤나 자주 오네? 알았어. 갈게.”

“그런데, 저기… 의뢰인이 헤르디스 베올딘 씨인걸요?”

“뭐?!”

나미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오디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들로 하여금 여관을 만들게 한 장본인인 헤르디스 베올딘이 뭐가 아쉬워서 이곳으로 의뢰를 하러 온다는 것인가? 그것보다도 그 이전에 나미아는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잠깐! 그 양반한테도 정해진 카르마가 있어? 우리 같은 아웃사이더라면 몰라도 그 사람은 애드미니스트레이터(Administrator: 관리자)잖아?”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물질계 구현이 어려워서 메신저(Messenger)를 보내왔어요. 지금 5층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하아… 그 사람 또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알았어. 가자.”

나미아는 불안과 의문과 당황한 감정을 한데 어우러지게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오디의 뒤를 따라갔다. 말하자면 여관의 발기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헤르디스가 대체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메신저를 보내온 것일까?

나미아는 그것이 단순한 안부 인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그녀의 아버지 때부터 성족과 얽히면 좋은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속으로 기도하면서 계단을 밟았다.

“아빠. 이 연약한 어린 딸을 지켜주세요.”

라이니시스가 들었다면 황당함에 말문을 잃었을 것이다.

헤르디스 베올딘의 메신저라고 하는 사람은 파란 눈을 가진 금발의 청년이었다. 나미아와 오디가 그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헤르디스의 이미지와 상당히 닮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에릭 안자이”라고 소개했다.

“성족이 직접 나올 수가 없으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심부름을 하고 있죠.”

매우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미아는 그를 얕볼 수 없는 사람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대개의 아웃사이더들은 인간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나미아는 그를 꿰뚫어 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저와 오디 이외의 아웃사이더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당신은 이 세계에 머무르는 조건으로 메신저의 역할을 맡았나보죠?”

“숙박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전 원래 이 차원 저 차원 넘나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곳에 왔을 때는 메신저의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 받았죠.”

“헤에… 플레인 트래블러(Plane traveler: 차원 여행자)군요. 처음 봐요.”

“저 역시 카르마 클리너(Karma cleaner)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서로가 초면이군요. 와하핫!”

에릭은 호탕하게 웃었고, 나미아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그러는 사이 오디가 다과를 준비해서 가져왔고, 그들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미아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런데 그 헤르디스 씨는 무슨 용무로 저희를 찾으시는 거죠? 저희가 하는 일이 또 카르마에 위배된다거나 하는 일은 아닐 텐데요?”

“아, 물론 아닙니다. 헤르디스 씨는 여러분들에게 의뢰를 하고 싶어서 저를 여기까지 보낸 것입니다. 단순히 의뢰 한번 하자고 해서 성지를 개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오오! 이거 참 맛있는 차와 과자군요. 차원 간 여행하면서도 이런 깊은 맛은 처음입니다. 아주 맛있어요.”

“과찬입니다.”

에릭은 허겁지겁 차와 과자를 먹어치우기 시작했고, 오디는 아무래도 과자를 더 가져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식사대접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한 모습이었다.

빠른 속도로 접시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쿠키가 바닥을 드러냈고, 에릭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마지막 찻잔을 비웠다. 나미아는 아직 반도 비우지 못한 자신의 첫 찻잔과 눈앞의 광경을 비교해보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하! 잘 먹었습니다. 에? 두 분 왜 그러지는시?”

“아, 아니요. 저기… 시장하시면 식사라도 준비해드릴까요?”

“예?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오디 씨의 솜씨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일이 좀 많이 밀려서 말이죠. 맛있는 차와 과자를 대접받은 것으로 족합니다. 일이 급하다 보니 먹는 것도 급하거든요. 두 분께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디는 그런가보다 싶어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고, 나미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의 손에는 아직도 반쯤 깨문 쿠키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어지간히 놀랐나보다.

에릭은 나미아와 오디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해주자 더없이 감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성들인가. 오늘 하루만 하더라도 참 복된 날이군요. 아름다운 용모에 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란… 이 에릭 안자이, 오늘에야 행복의 극치를 느낍니다. 와하핫!”

약간 과장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놀리는 것이 아니라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미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일단 이야기를 빨리 듣고 내보내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되어 그를 재촉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가져오신 거예요?”

“아, 이거 숙녀 분들을 앞에 두고 횡설수설이 많았군요. 뭐, 헤르디스 씨가 맡기는 일이니 만큼 힘들고 괴로울 것이란 생각은 버리시는 편이 좋습니다. 어차피 이것도 카르마 클리너인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카르마 클리너든 이레이저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뜸들이지 말고 이야기해봐요.”

이 사람은 쓸데없는 곳에서 말이 길어지는군. 나미아는 이대로 5분만 더 있다가는 짜증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릭은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숙이며 나미아의 말에 따랐다.

“예. 그러면 말씀드리죠. 헤르디스 베올딘 씨께서 말씀하시길…….”

나미아와 오디는 에릭이 쏟아내는 무수한 단어 중에서 수식어와 잡다한 설명을 자체적으로 검열하는 데만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27일.

토타카 연합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 많아서 내륙으로 들어와도 간혹 해양성 기후를 보이는 곳이 있는 특이한 곳이다. 워낙에 파도가 높고 바람이 세서 웬만한 폭풍은 산들바람 정도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우르르르! 콰르릉!

하늘 위로 깔린 불규칙한 무늬의 먹구름은 마치 검은 연기가 자욱한 것 같았다. 그 사이를 가르는 백색의 번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하늘의 눈물을 위한 울부짖음 같았다. 광풍이 몰아쳐 평원의 풀을 흔들고,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는 풀 소리가 낮은 구릉의 밑에서부터 올라가고 있었다.

낡은 고성이 구릉의 꼭대기에서 찢어진 깃발을 나풀거리며 서 있었다. 세월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고성의 벽은 하늘을 가르고 지나간 번개처럼 갈라져 있었고,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더더욱 음침하게만 보였다.

이곳은 토타카 연합의 중추 타실렌이라는 나라의 내륙방향 외곽지역에 있는 “볼렌트라”라는 지역이었다. 최근 이곳엔 5년 전에 생긴 도적 무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토타카의 평의회에서도 군사를 보내 토벌하려 했지만 도리어 연속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그래서 볼렌트라는 아예 평의회에서도 버림받은 지역으로 암묵적인 인정되어 있었다.

한낱 도둑 떼거리가 하나의 지역을 점령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낡은 고성에 머물고 있는 도적단인 “검은 피의 혈맹”은 그 숫자가 2천 명에 달아서 하나의 거대 군사조직이나 다름없었다.

검은 피의 혈맹이 머물고 있는 고성은 예전에는 볼렌트라의 영주가 살았다던 영주관(領主館)이지만, 그 가문이 멸문하고서 2백 년 가까지 방치되어 왔던 곳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곳에 둥지를 튼 검은 피의 혈맹은 주변 마을로의 약탈, 무역로의 기습 등을 통해 세력을 넓혔고, 급기야는 토벌하러 온 토타카의 정규군을 쳐부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5백여 명 규모였던 도적단이 토타카의 정규군을 무찔렀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다른 범죄자들로 인해 지금은 4배나 불어나 있는 상태였다. 검은 피의 혈맹에 대해서는 토타카 연합도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단지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과 알 수 없는 막대한 부를 가지고 무기와 식량을 사들인다는 것, 그리고 볼렌트라의 시민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만이 전부였다.

구 볼렌트라 영주관은 세월에 많이 녹슬었지만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구릉 위에 서 있었다. 성문은 자체적으로 보수를 하여 검은색으로 번득이는 철로 테두리를 보강했다. 첨탑과 성벽의 갤러리, 기타 공성전(攻城戰)에서 사용할 만한 장소는 전부 보수를 해서 겉보기에는 허술하지만 내실을 튼튼하게 다진 곳이었다.

구릉에는 마차와 사람의 발, 혹은 많은 통행인들로 인해 만들어진 작은 소로가 있었다. 검은 피의 혈맹의 일원이나, 입단하고자 희망하는 사람이 아니고선 좀처럼 그 길을 오르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몇 번에 걸쳐서 토타카의 군사들이 이 길을 타고 진격했지만, 그들의 흔적은 땅 위에 듬성듬성 꽂힌 찢어진 깃발이 나부끼는 깃대와 꺾여진 창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해골과 칼자루들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 길을, 지저분한 넝마를 걸친 사람이 오르고 있었다. 전신을 망토로 감쌌다고 해야겠지만, 차라리 넝마라고 부르는 쪽이 더 정직할 것이다. 망토에 달린 후드로 얼굴마저 가린 그 사람은 구릉의 아래에서부터 조용히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구릉의 옆으로 돌아오는 소로를 밟지 않고 성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는 그를 발견한 사람은 성벽을 거닐면서 점차 먹구름이 진해지는 것을 보고 있던 한 도적이었다. 도적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성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한참 뒤에야 구릉의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그들도 볼 수 있었다.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넝마 같은 망토가 워낙에 펑퍼짐하다 보니까 원래의 체형은 알 수가 없었다. 성문을 지키는 그들은 간혹 가다 저렇게 조용히 찾아와서는 동료로 받아달라고 하는 사람을 워낙 많이 봐왔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싶어서 반쯤 긴장을 풀고는 그 사람이 오길 기다렸다.

주변의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그 사람은 턱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그 색이 희었다. 남자의 피부치고는 지나치게 하얗다는 생각이 성문지기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무렵, 그는 그들이 3야드쯤 앞에 와서 정지했다.

“이곳엔 무슨 일이지? 이곳은 검은 피의 혈맹의 성이다. 모르고 온 건 아니겠지?”

“어디에서 왔어? 동료로 받아달라는 거면 잘왔다고 해주지. 우린 차별 같은 거 하지 않거든. 그런데 피부 참 하얗다? 혹시 여자야?”

“오오, 여자라면 키라인이 아주 좋아하겠는걸? 여자 부하가 너무 적다고 징징대고 있었잖아?”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시시덕거리느라 눈앞의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반쯤 신경을 끈 상태였다. 게다가 그의 양손은 망토 밑에 있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망토의 후드 아래에서 턱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들이 여태껏 들어보지 않은 미색의 음성이었다. 그는, 아니, 그녀는 말했다.

“아킴 라사인. 사이에그롭에서 강도 3건, 레리첸트에서 살인 2건, 강간 12건, 방화 3건, 레리첸트 국가 교도소에서 24년 간 복역 후 탈옥. 검은 피의 혈맹에 들어간 뒤로 살인 24건, 강간 32건, 각종 범죄를 합쳐 총 56건.”

“어? 어떻게…….”

“하리탄 나카스. 열차 강도로 부하들을 이끌고 레리첸트 동부 특급 2841편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을 합쳐 총 241명을 폭파 살해. 그 뒤 검은 피의 혈맹에 들어와 각종 범죄를 저지름. 그 수는 43건.”

“너… 뭐야?”

아킴과 하리탄은 자신의 범죄 내역을 낱낱이 꿰뚫고 있는 의문의 여성을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성은 그들의 반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망토 속에서 팔을 들어올렸다. 망토는 양팔을 가운데 있는 천의 양옆으로 뺄 수 있는 구조였으며, 그 사이에서 그녀는 교차된 팔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그들이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도구가 들려 있었다.

검은색으로 도장을 한 꺾인 모양의 쇳덩이였다.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검지는 각자 꺾이는 사이에서 튀어나와 있는 걸이에 살짝 얹혀 있었다. 네모난 몸통에는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에는 정교하게 나선 홈이 패여 있었다.

아킴과 하리탄은 그 구멍의 끝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것은 무슨 물건일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이상한 물체를 들고 있는 그녀가 그들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판결. 사형.”

콰강!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흉악범에게로 향한 구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튀어나온 쇳덩어리가 수직으로 회전하며 그들의 미간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쇳덩어리가 관통하고 지나간 그들의 뒤통수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던 성벽은 순식간에 피와 뇌수로 칠해졌다.

그들의 몸은 한번 부르르 떨더니 앞으로 쓰러졌고,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수가 절반 가까이 흘러나간 존재가 살아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어… 어어?!”

성벽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피가 안개처럼 튀어 오르며 두 명의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턱이 빠질 듯 놀라고 있었다. 그런 그를 그녀가 놓칠 리 없었다.

“리만 다스. 50년 생애 중 35년을 범죄에 바침. 흉악 범죄만 21건. 판결. 사형.”

콰아앙!

오른 손에 들린 도구에서 불꽃이 뿜어졌고, 심장을 관통 당한 리만은 눈앞이 까맣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몸은 성벽 밑으로 추락해 부서진 성벽의 잔해와 충돌했다.

콰작?!

피가 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성문의 안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고, 세 사람을 죽인 그녀는 서서히 망토를 벗었다. 그러자 번뜩이는 검은색 가죽 슈트를 입은 여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붉은 머리칼을 검은 끈으로 묶은 그녀는 검은색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자신의 앞에 있는 성문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빗장을 걸어두고서 꽤나 많은 사람의 힘이 있어야만 열릴 그런 문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든 권총을 홀스터(Holster)에 집어넣고 문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녀의 입이 살짝 움직인다 싶더니, 순식간에 캐스팅은 끝나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로지 시동어(始動語)뿐이었다.

“노크(Knock).”

복잡한 장치로 잠긴 문을 여는 데 쓰이는 주문 언 락, 그것의 강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주문이 시전 되자 성문의 안에서는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덜컹! 끼이이이!

“뭐, 뭐야?!”

“성문이 제멋대로!”

“저건 누구야?!”

나미아는 왼손의 권총을 오른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왼손에 착용한 건틀릿, 미스릴 와이어(Mithril Wire)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마법 건틀릿인 시료스를 전개해 그녀의 주변으로 가늘디가는 와이어를 공중에 떠돌게 했다.

나미아는 앞으로 걸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독보적인 힘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우위와 다른 이들은 움츠리게 하는 기세가 바로 그것이었다. 성문의 안쪽에서 웅성대던 수십 명의 검은 피의 혈맹 소속 혈원들은 나미아의 모습에 점차 숨을 죽이고 그녀에게 주목했다.

“목적도 없이, 쾌락을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 세상에서 자신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자들. 그래서 세상마저도 포기해버린 자들.”

누구를 콕 집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모두를 3인칭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고글 뒤에 그녀의 눈이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주위에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떠돌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세상의 의지를 조율하는 이들이 말했다. 그들의 업보가 계속 쌓여나가지 않게 하라 했다.”

나미아의 말에는 알 수 없는 한기와 살기가 얽혀 있었다. 그것을 느낀 이들은 점차 주춤거리면서 나미아에게로 멀어지고 있었다. 나미아는 성문의 안쪽으로 들어와 그들 모두를 앞에 세우고 그들의 앞에서 총을 들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친 그녀의 입술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난 너희들을 동정한다.”

고글 사이로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나미아는 방아쇠를 당겼다.

“잠깐! 어째서!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데요?!”

“으음… 그거야 여러분에게는 그런 카르마가 흘러 들어가게끔 되어 있으니까요. 조율할 수 없거나 손댈 수 없을 만큼 망가진 카르마는 아무리 저 위에서 다른 이의 카르마를 조종한다고 해도 해결하기가 어려워요. 이럴 때는 엉켜 있는 것을 아웃사이더의 손으로 끊든지 지우든지 풀어놓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2천 명의 사람을 전부 죽이라는 거예요?!”

“사실 이 세계의 패러다임으로 보자면 그들은 흉악범들뿐이에요. 나미아 씨가 뽑힌 이유도 나미아 씨라면 그중에서 양심이 남아 있는 사람을 구분해낼 수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나미아는 에릭의 말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범죄자에 대한 처단. 그것이 국가나 단체의 준법정신 때문이 아니라 카르마 차원에서 제거를 해달라는 것이 헤르디스 베올딘의, 정확하게는 성족들의 의뢰였다.

그 숫자는 약 2천여 명. 세계 각지에서 모인 흉악 범죄자들이 모인 곳, 검은 피의 혈맹이라 불리는 거대한 집단이었다.

아무리 흉악범들이라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2천 명의 숫자라고 해도 고대인의 핏줄을 잇고 있으면서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혼합 블러드 스폰인 나미아와 최상급의 퍼스널리티 스톤(Personality Stone)으로 정신의 정령이 되어 인화의 길을 걸은 죽은 신의 파편인 오디의 힘 앞에서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나미아가 따지고 드는 것은 되냐 안 되느냐의 능력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2천 명의 사람들이고 그들을 전부 죽이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도의적인 차원에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양심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나미아였다.

물론, 헤르디스 베올딘이나 성족들의 뜻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은 잉여 카르마나 과도한 종류, 어쨌든 잘못되어 있는 카르마의 청소를 위한 클리너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지금까지 그녀가 두 건의 의뢰를 받아서 해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2천 명의 목숨을 세상에서 전부 지워버리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 정도로 카르마의 조율이 되지 않는다면 성족의 존재 이유가 뭐란 말인가? 자신과 오디에게 일이 생길 때마다 맡기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안 해요. 못해요! 아무리 헤르디스 베올딘 씨의 뜻이라고 해도 이것만큼은 할 수 없어요! 그 정도로 카르마인지 뭔지 어지럽히게 두었으면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죠! 왜 뒷일을 이쪽으로 떠넘기는데요?! 저나 오디가 무슨 강철심장이라도 가진 줄 알아요?!”

“자자, 진정하세요. 제가 말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확실히 그들의 말에도 무리가 있긴 하지만 이건 장차 여러분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빚을 지워두면 여러분이 만의 하나 충동적으로 저지른 실수로 뒤흔들린 카르마가 생기더라도 한 번쯤 슬쩍 넘어갈 계기가 생기지 않습니까?”

“웃기네요. 치사한 거래라도 하자는 건가요? 사람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싶을 때, 게다가 그것이 인도적인 뜻을 넘어갈 때는 본인이 와서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아니, 애초에 그렇게 비인도적인 무차별 살상을 주문하는 것이 이 세계를 관리하는 성족의 일인가요?”

“맞습니다. 저와 나미아 님은 이번 의뢰는 별로 찬동하고 싶지 않군요. 그들의 피해에 대한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모조리 죽이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계도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죽이는 수 외엔 방법이 없나요?”

오디도 나미아의 뜻에 찬동하고 나섰다. 아무리 그녀나 나미아가 사람을 죽이는 일을 별다른 감흥이 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거나 정당한 대의명분이 있을 때였다. 게다가 자신들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을 알아버린 후, 살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지르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녀는 나미아와 마찬가지로 헤르디스와 성족의 의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두 사람의 반발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결국에는 다소 치사한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헤르디스 베올딘이 그녀들이 거부할 경우 실행하라고 알려준 방법이었다.

“헤르디스 베올딘 씨가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여러분의 일가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좀 많다고요.”

“무슨 말씀이시죠?”

“설마… 어머님들과 동생들에 관한 건가요?”

“맞습니다. 두 분의 두 어머님과 여섯의 동생 분들은 사실 이 세계의 존재로서 태어났지만, 라이니시스 씨에 의해 반쯤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이대로 두는 것은 이 세계에도 좋지 않은 일이고… 게다가 에실루나 씨는 엘브스 퀸으로 있으니 엘프 종족의 카르마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여섯의 동생 분들도 그렇고… 확실히 성족 측에서는 골치 아픈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에릭은 담담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그녀들을 교묘하게 협박하고 있었다. 사실 협박하는 주체는 헤르디스를 비롯한 성족들이겠지만, 나미아와 오디는 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자신들은 어찌되든 상관이 없었다. 여차하면 눈앞의 에릭처럼 차원 여행자가 되는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이 휘말리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나미아는 이를 갈며 말했다.

“대체…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지 궁금하네요. 협박인가요?”

오디가 조용히 거들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이건 명백한 협박이군요.”

“아니 뭐… 사실 제가 생각해도 치사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헤르디스 씨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서 맹세했는데, 이번 일 이후에 다신 협박도 하지 않을 것이며,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라고 해도 물질계의 존재에게 말하는 것이니 만큼 성족 전체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도 상관없겠죠.”

나미아는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띠면서 에릭에게 말했다.

“그 맹세는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인지 궁금하네요. 게다가 그 맹세라는 것을 지킬지도 의문이고요. 이런 식으로 요구를 해오면 믿음이 가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 휘말려서 고통을 받고 있을 사람들을… 그들은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위협도 받고 있을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빛을 찾아주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습니까?”

“흥. 기껏해야 피로 물들인 빛깔일 테지요. 헤르디스 베올딘에게 전하세요.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일을 맡길 생각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가 죽여버리겠다고요. 이름에 건 맹세를 어긴 자는 살아갈 자격도 없어요.”

나미아는 독기 어린 눈으로 에릭을 쏘아보았다. 에릭은 다소 억울한 기분마저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메신저의 역할은 발신인의 분노까지 대신 받아주는 것이기에 그는 별다른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에릭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나미아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지요. 아, 교환 조건으로는 가족 분들의 안전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을 다짐하는 맹세입니다. 현물로는 비용이 치러지지 않겠군요.”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공짜 손님이람… 알겠어요. 받아들이겠다고 전하세요.”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평안한 나날 되시길.”

마치 그림을 치워버리듯 에릭의 몸이 사라졌고, 나미아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감히 누굴 자기 마음대로 다루겠다는 거야!”

“참으세요. 이번만이라잖아요.”

“그래도, 그래도! 그 개자식이 감히 우리 엄마들하고 동생들을 가지고 협박을 했단 말이야! 오디는 화 안나?!”

“당연히 화나요. 하지만 이렇게 화내신다고 해결되진 않잖아요?”

오디는 차분한 말투로 나미아를 달래고 있었지만 그녀도 화가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미아는 오디의 전체적인 표정이 사납게 변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미아처럼 바락바락 화를 낸다면 차라리 낫겠지만 오디가 화를 내는 방식은 조용한 폭발이었다. 서서히 감정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상대방마저도 그녀가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게 화를 냈다. 워낙에 자기 절제가 뛰어난 그녀이기에 쉽게 화났다는 것을 드러내진 않지만 몇백 년이나 동고동락해온 나미아는 오디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미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마음속의 화를 밖으로 몰아내었다. 오디의 말대로 화를 내봤자 별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엔 그들 생각대로 놀아나 주는 수밖에.”

“정말로… 하실 생각이세요?”

“별수 없잖아? 그 녀석들 생각대로 놀아나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손에 피를 묻히는 수밖에.”

나미아는 불쾌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오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회를 만들고 나서 피를 보는 싸움은 잘 하지 않았다. 하게 되더라도 실력의 우위가 있기 때문에 간단히 제압하는 일이 태반이라 죽일 일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오디는 조용히 나미아를 불렀다.

“나미아 님.”

“응?”

“어떤 걸… 준비할까요?”

“아빠 레어에 있는 창고에서 권총 두 자루. 검은색 슈트에 검은색으로 코팅한 고글. 홀스터, 그리고 내 방에서 시료스를 꺼내와.”

나미아는 간단하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장비들을 주문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장비들이었다. 나미아가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결심을 다 하고 있다고 느낀 오디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난 성채 쪽으로 가겠어. 너는 볼렌트라에 흩어져 있는 도적 떼들을 상대해줬으면 해.”

“하지만… 성채 쪽에는 약 천오백 명 정도가 버티고 있는데… 그걸 혼자서 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숫자가 문제는 아니잖아. 흩어져 있는 녀석들 찾아다니기 싫어. 네가 맡아서 처리해줬으면 해.”

볼렌트라라는 지역 전체에 흩어져 있는 검은 피의 혈맹 인원은 성채에 집결해 있는 인원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적었다. 전체 인원이 2천 명 가량 되는 혈맹의 인원 중 대부분인 천오백 명 정도는 언제라도 출동할 준비를 한 채 대기하고 있었고, 나머지 5백 명은 흩어져서 모든 것을 관리했다. 만약 군대나 농민들의 봉기라도 일어나면 성채로 연락을 하고, 천오백 명이 출동하는 방식이었다.

어찌 보면 흩어져 있는 혈원들을 공격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인원은 적지만 볼렌트라의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일일이 찾아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미아는 마법을 준비하는 오디를 보며 말했다.

“2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라면… 카르마를 지워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쪽으로 돌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굳이 죽여야 할 이유는 뭘까?”

“모르겠어요. 모든 건 직접 가서 알아봐야 한다는 것이겠죠.”

“역시 그렇겠지? 그럼 잘 다녀와. 아빠나 엄마들 만나면 안부 전해주고.”

“예. 다녀올게요.”

오디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면서 나미아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미아는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래서 공짜 손님은 불쾌하다니까.”

농담을 해도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총구에서 뿜어지는 불꽃 한 송이마다 격중 된 사람의 몸에서는 혈화(血花)가 한 송이씩 피어났다. 번뜩이는 빛이 허공을 가르면 육체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피와 꿈틀거리는 내장을 쏟아내었다.

나미아가 한 걸음 걸을 때마가 다섯 명씩 죽어나가고 있었다. 총에 맞아 심장이 터진 사람, 머리통의 반이 날아간 사람 등 여러 구의 시체가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었다. 그녀는 날카로운 실에 다리가 절단되어 땅 위를 뒹구는 사람의 몸통을 갈기갈기 찢어냈다. 뜨거운 피와 하얀 뇌수가 흐르고 내장으로 점철된 땅 위를 딱딱한 부츠가 짓밟는다. 분노와 공포에 질린 소리가 주변을 메우면서 단 한 사람에 의해 수십 명이 죽어나가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으아아!”

공포와 분노, 어느 것이 먼저일까.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칼을 들고 나미아에게 덤벼온 남자의 몸이 가슴에서 허리까지 비스듬하게 절단되었다. 날아오던 운동에너지로 인해 나미아에게로 날아오던 남자의 몸을 시료스의 미스릴 와이어가 잡아서 던져버렸다.

촤라락!

몸통에서 쏜다져 나온 내장들은 피를 튀기고 긴 꼬리를 그리며 몸통을 따라 날아갔다. 하반신은 쓰러진 채 몇 번 부르르 떨고서는 미동도 없었다.

콰앙!

총구에서 폭음이 들리고, 저 멀리 도망치던 여성의 가슴이 터져버렸다. 흩날리는 핏방울과 흩어지는 살점들이 악마를 보는 듯한 공포를 가득 담은 어떤 남자의 얼굴에 가득 튀었다.

“아, 아아아, 악마! 커…!”

주저앉은 채 오줌을 싸면서 엉금엉금 뒷걸음치던 그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흐읍!”

침착한 표정으로 허점을 노리던 여자의 몸도 세로로 쪼개졌다.

죽을 때는 모두가 평등하다. 어떻게 죽든 결과는 항상 같다. 평등과 조화의 이데올로기는 죽음이라는 구현 아래 피의 꽃을 피우며 도래하는 것이다.

나미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 성채를 나가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필사적인 표정으로 성벽 위를 내달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로 다가오는 날카로운 미스릴 와이어를 피하는 일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미아의 손에 들고 있는 괴상망측한 무기는 백발백중이었고,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 살려줘!”

“악마, 악마다!”

“마, 마녀! 누가 좀 살려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나미아는 묵묵히 그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워하는 그들의 정신과 더불어 자신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자들을 죽이거나 배신하는 장면이 보였다. 모두가 같았다. 모두가 살인자요, 강도요, 흉악범이었다.

나미아는 왼손을 치켜 올려 시료스에 명령을 했다. 묵묵히 명령을 실행하는 시료스는 하늘을 향해 수십 가닥의 와이어를 쏘아 보냈고, 팔꿈치 언저리까지 와 있던 건틀릿이 순식간에 손목까지 줄어들었다.

카라라랑! 카라랑!

와이어들끼리 부딪치며 번뜩이는 빛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하늘 높이 솟은 와이어들은 보일 듯 말 듯한 빛과 함께 투명한 소리로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풍경이 되었다.

피육! 파밧! 피비빗!

날카로운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위에서 내리쳐진 수백 가닥의 와이어는 그들의 몸을 세로로 몇 조각, 혹은 몇십 조각으로 나눠놓았다.

투드드득!

제일 먼저 팔이 손가락에서부터 잘게 토막 나 땅으로 떨어졌다. 다리로 버팀을 받고 있던 몸통의 중간이 서서히 밑으로 함몰되면서 피로 흥건한 단면이 드러났다. 얇게 저며진 육체는 주저앉듯이 흘러내렸다.

후두두둑!

사방에서 들려오는 시체가 무너지는 소리에 나미아는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이들의 죽음을 관장하는 입관인으로서 그것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흐, 흐아아아!”

그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얼떨결에 사람을 죽이고는 죄책감에 못 이겨 도망쳐온 사람이었다. 나미아는 시료스를 거둬들이면서 염동력으로 그의 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어, 어어?!”

끌려오는 남자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저항하려고 했으나 나미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남자의 얼굴은 점점 공포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목소리도 잠겨 버렸다. 나미아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해.”

나미아는 마법으로 그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피로 얼룩진 장면을 전부 지워버린 그녀는 그의 기억을 각색해 지금까지 검은 피의 혈맹에 투신하려다가 잡혀서 갇혀 있었다는 기억을 주입했다. 갑작스런 기업의 개조에 남자는 그만 기절해버렸고, 나미아는 모든 작업을 끝마친 후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다신 만나는 일 없길. 텔레포트.”

남자의 몸이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이 근방 어디에선가 쓰러져 있을 것이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성의 안쪽에서 뭔가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도 들렸다. 그 목소리들로 인해 나미아는 성문에 접한 외성에 있는 모든 이들을 학살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미아는 천천히 걸어 내성으로 진입하는 성문에 다가갔다. 성문의 안쪽에서는 각종 물건들로 보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성의 성벽 위로는 나미아의 총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걸. 너희들의 카르마는 오늘 나에 의해서 지워지도록 되어 있으니까.”

나미아의 어투는 조용하고도 싸늘했다. 그녀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손바닥으로 내성의 성문을 겨냥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앞에서 파란색의 불꽃이 구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인페르노 플레임… 인챈트(Enchant) 퓨어 애시드(Pure acid)!”

촤라라락!

인페르노 프레임의 위로 투명한 액체가 가득 생성되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무엇이든 녹여버릴 수 있는 강력하고 순수한 산성액이 파란 인페르노 플레임과 함께 얽혀들고 있었다.

나미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성된 1피트 크기의 구체는 불과 산이 어우러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미아는 오른손으로 총을 꺼내 들며 왼손으로는 앞을 향해 그것을 쏘아 보냈다.

촤라라락! 파르르륵!

단 1피트 크기의 구체였지만 그것은 성문에 닿자마자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얇게 펴 바른 듯 퍼진 산성과 불은 성문을 녹이면서 불태우기 시작했다. 흰 연기가 나면서 산성액이 성문의 나무와 금속 테를 녹였고, 한번 불이 붙으면 재가 될 때까지 꺼지지 않는 인페르노 플레임이 활활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성문은 순식간에 녹아 내려서 이미 건너편까지 보일 지경이 되었다. 불과 산의 비례에 따라 건너편이 보이는 부위가 있는가 하면 아직 녹지 않는 부위도 있었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녹고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끼이이… 끼이이익!

녹아서 뚫린 구멍의 틈새로 테두리를 이루던 금속이 사라진 나무문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져가는 나무들과 그 건너편에 보이는 각종 물건들이 나미아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사람들의 모습도 간혹 보였다.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 활을 꺼내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아직 싸울 의지가 있었다. 나미아는 그런 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그래. 그렇게 자신의 삶에 집착해야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남이 삶을 파괴시켜온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치고는 사치지만.”

그녀는 총신을 왼손으로 쓰다듬듯 매만졌다. 이 세계에는 등장하지 않은 다른 세계의 무기라고 라이니시스가 말했었다. 그것은 생소한 것에 공포를 겪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무기였다. 그리고 라이니시스가 만든 무기답게 마법을 걸 수도 있었다.

“윈드 커터(Wind cutter)!”

초급에 속하는 바람의 칼날 마법이 총에 사용되었다. 정확하게는 총이 장전 중인 총알에 부여된 것이다. 적잖은 방동을 예상한 나미아는 양손으로 총을 꼭 붙잡고는 서서히 조각들이 떨어져 내리는 성문을 향해 발사했다.

콰앙! 콰지지직!

윈드 커터를 담은 총알이 명중하자 그대로 마법이 성문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한 성문이 안쪽으로 부서졌고, 윈드 커터는 그러고도 힘이 남아 성문 앞에 몰려 있던 장애물을 관통하듯 지나가며 깨끗하게 치워버렸다.

“으억?!”

“뭐야!”

“마법이다!”

먼지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고, 안쪽에서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미아는 총을 오른손으로 비껴들고는 왼손의 시료스를 전개해서 그녀의 주변으로 수백 가닥의 와이어가 출렁이게 했다.

안쪽에서 무슨 준비를 하고 있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막 외성에 있던 200명을 죽였을 뿐이다. 나머지 1300명은 아직 이 안에 있고, 그녀는 그들을 죽여야만 한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먼지가 얼굴을 간질이며 불쾌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 먼지에 섞인 공기에는 수많은 상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저분한 삶의 영위, 죽음에의 공포, 도망가고 싶은 마음, 추잡한 변명, 자기변호, 궤변, 이기심, 절망, 얄팍한 희망, 의지의 박약까지…….

그들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먼지구름 뒤에 도열해 있을 천 명이 넘는 인간들이 발하고 있는 기운이 하나의 문을 타고, 단 하나의 목표에게로 흘러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미아는 그것을 피부로 고스란히 느끼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자신에게 당당함도 없었다. 비열함으로 가득한 머릿속에서는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만큼의 범죄를 저지르고 살았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악당으로서의 의기도 없었다.

단순히 쾌락을 추구하며, 순간순간의 충동이었다고 자신에게 변명하면서도 살인, 강도, 강간, 방화 따위의 흉악 범죄가 가져오는 쾌락에 빠져들었던 이들이 지금은 자신의 몸이 중요해 살겠다는 의기로 뭉쳐 있었다. 자신들이 죽였던 것처럼 나미아 한 사람만 죽이면 예전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얄팍한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큰소리의 외침으로 구현되어 모두를 움직이게 했다.

“저기다! 쏴라!”

피비비비빙! 쐐에에에에에!

직선사, 곡선사, 정면사, 측면사, 좌위방사, 우위방사… 각종 측면에서의 탄궁법(彈弓法)이 나미아에게로 쇄도하고 있었다. 얼추 잡아도 몇백 개는 될 듯한 화살이 먼지구름을 뚫고 나오는 단 하나의 거무스레한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공기를 뚫으면서 찢어발기고, 그 기세를 몰아 상대의 살을 찢고 뼈에 박혀 끝나지 않을 고통을 줄 것 같은 화살들이 날았다.

나미아는 그들의 행동이 들어가기 전부터, 거대한 외침의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이미 왼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화살이 쏘아지기 전부터 그녀는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바바박! 파박! 티디딕! 파파팍!

수백 개의 화살이 땅에, 벽에, 또한 부스러져가는 성문과 장애물의 잔해에 박혀들었고, 상당수의 화살은 그들이 노렸던 대로 나미아의 육체를 꿰뚫은 것 같았다. 먼지구름 사이로는 고슴도치의 형상이 된 한 인간의 그림자가 쓰러지듯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활을 당긴 혈원들은 모두 바짝 긴장하며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휘이이이이!

그들의 긴장감이 만들어냈을지도 모르는 바람이 먼지들을 거둬 날아가고 있었다. 먼지 구름이 서서히 걷히자 그 안에서는 시료스의 와이어 다발로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잡아낸 나미아가 있었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화살을 사방에 둘러친 시료스로 잡아낸 것이다.

시료스는 화살촉을 붙잡고는 전혀 놓아주지 않았고, 덕분에 나미아의 모습은 마치 들을 화살대로 장식한 고슴도치 같았다.

나미아는 조용히 냉소했다.

“흥, 어차피 부질없는 일.”

나미아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올렸고, 화살들이 박힌 시료스의 줄기가 화살과 함께 휘몰아쳐 그녀의 머리 위로 나선 기둥을 세웠다. 군데군데 화살들이 보이는 것이, 매우 가는 실을 꼬아둔 밧줄의 틈 사이에 화살이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생전처음 보는, 그리고 들어본 적도 없는 장면에 공포와 호기심을 얼굴에 가득 담고는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선의 실이 서서히 풀리면서 거기에 얽힌 모든 화살이 발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는 경악과 공포의 표정으로 얼굴을 가득 메워야만 했다.

“선물은 필요 없으니 돌려주겠어. 가라!”

나미아의 외침에 의해 염동력으로 들려진 보이지 않는 활 대에 걸쳐 있던 일백 개에 달하는 화살들이 일제히 미스릴 와이어의 탄성을 받고는 날아가기 시작했다. 화살들이 향하는 방향은 화살 하나마다 조금씩이지만 차이가 있었다.

그 화살들은 정확하게 그녀를 노린 이들 중에서 그녀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선별한 이들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결과는 백발백중이었다.

퍼버벅! 파바바박!

“어억!”

“으어!”

“커!”

“흐허… 어!”

일격에 일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뒤로 나자빠지면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끄르륵 소리와 함께 듣기 싫은 피거품 소리만이 고요한 공간을 울리면서 마지막 죽는 사람의 인사를 대신했다. 흰자위를 내비치며 벌레처럼 몸부림치던 이들은 모두 혀를 빼문 체 괴로워하며 죽거나 화살이 명중된 순간 피를 흩뿌리며 즉사했다.

잠시간의 정적. 비명이 잠식한 것은 그 직후였다.

“흐아아아아!”

“사, 살려줘!”

“인간이 아니야!”

“마, 마녀! 마녀다! 붉은 피의 마녀다아!”

혼돈, 혼란, 공포는 모두 소란스러움과 함께 그들을 점령했다. 700명에 달하는 사람들 사이사이에서 100명이 죽어나갔다. 아무리 멀다손 쳐도 자신과 여섯 사람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사람 한둘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고, 또 죽여본 적 있는 사람들이지만 100명이 넘는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모습은, 그것도 쏘아 보낸 화살을 원리조차 짐작할 수 없는 방법으로 되돌려 쏘아 죽인다는 것은 현실을 뛰어넘은 초자연적 공포로 다가왔다.

나미아는 그런 이들의 모든 목소리를 무시했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그들의 기운과 함께 어울렸다가는 자신도 같은 부류가 되어버린다.

나미아는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귀로 똑똑하게 들으면서 오른손에 든 권총을 들어올려 격철(擊鐵)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말했다.

“폭렬탄(爆裂彈) 장전.”

철커덕!

총의 내부에서 뭔가가 바뀌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총 전체의 모습이 붉은 피 색으로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지의 존재가 가져오는 생경한 공포 속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군중들을 보며 측은한 미소를 보내었다.

그녀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돋우며 말했다.

“나는!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의 살해욕을 충족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폐기처분될 수밖에 없는 너희들을 동정한다. 너희들을 처분하는 사람이 나이기에 그것 또한 동정한다! 다음 생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죄 없이 살아가라… 이것이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요, 최대한의 관용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뭐라는 거야?

“왜 저러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알 수 없다는 말들. 공포에 질린 그들에게 나미아가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의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나미아가 무슨 소리를 한다 해도 이들이 죽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나미아가 말하는 것은 결국 자기 위안을 벗 삼아서 이 일을 끝내보려는 수작일 뿐이었다.

앞으로 죽어야 될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미아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 위로 또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닦아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난… 정말로 너희들을 동정한다… 가엾은 쓰레기들아!”

나미아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를 조금 옮기고 또 당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당겼다. 팔을 움직이며, 몸통을 돌리며, 다리를 움직이며 당기고, 당기고, 또 당겼다.

폭렬탄에 맞아 움푹 팬 신체의 내부에서 시뻘건 화운무(火雲舞)가 뿜어지면서 희생자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탄환의 운동 에너지 때문에 살짝 떠서 뒤로 날아가던 희생자의 몸은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날리며 폭발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가 있었던 자국을 바라보는 이들의 뒤통수로 또 다른 폭렬탄이 날아들었다.

갈가리 찢긴 팔다리가 빗물에 튀어 오르는 물줄기 같았다. 머리통의 반이 날아가서 뇌수를 질질 흘린 채로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도 있었다. 오른쪽 허벅다리가 날아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이미 그들이 있는 곳은 고깃덩어리와 피가 난무하는 지옥의 분수대와도 같았다.

열두 번의 총성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멈췄을 때, 폭렬탄이 가져다주는 경악이 비로소 그들의 의식을 점령했다. 끔찍한 광경에 넋을 잃은 채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던 이들은 이제야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흐아아악!”

“꺄아아아아!”

“으아악! 으아아!”

“아, 아아… 아아아!”

나미아는 털썩 주저앉거나 천천히 뒷걸음치는 이들,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들, 뜨거운 피가 차갑게 식으며 얼굴과 팔,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사람의 조각들에 몸을 팔로 문지르며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포,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나미아는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오른손으로는 홀스터에 꽂힌 총을 뽑아내 탄창을 비운 총을 꽂아 넣었다. 마법으로 재장전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3초. 그 틈에 그녀는 새 총을 꺼내들어 폭렬탄을 장전했다. 뻗어진 왼손에서는 시료스가 뻗어나가 제멋대로 그들의 몸을 절단하고 있었다.

쉬리릭! 취릭! 파바밧!

날카로운 파공성(破空聲)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사람의 몸이 한 번 절단 났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피는 두 번째의 파공성을 낳았다. 어떤 이도 세 번 이상의 파공성을 들을 수는 없었다. 옆 사람이 도망가며 목이 절단되는 것을 본 이는 그 직후 머리의 절반이 비스듬하게 절단 났다.

뱀이 내는 듯한 소리는 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소리였다. 도망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있는 자리에서 세 발자국 이상 도망간 이도 없었다. 다가올 죽음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은 사람은 차라리 행복했다. 안구가 가로로 갈라지며 순간적으로 물컹한 기분인 든 후 죽은 이들도 있었다.

콰앙! 콰앙! 콰앙!

총구가 번뜩이며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이 터져나가 죽은 이들. 피를 흩뿌리며 날아오는 미스릴 와이어에 의해 몸이 절단 난 이들. 누군지 모를 몸이 절단된 부위를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려는 머리는 그것이 자신의 몸임을 깨닫지 못한 채로 죽어갔다.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비명의 무게에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미아는 울었다. 진심으로 그들의 운명을 동정하며 눈물 흘렸다. 도망치고 싶다. 이 현시에서 도망가고만 싶었다. 간단히 마나를 충돌시켜 자신의 집을 떠올리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고통을 겪는 것은 자신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녀의 두 어머니가 그랬듯이. 자신으로 인해 더 이상 남이 힘들거나 괴롭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고, 왼손을 움직였다.

콰앙! 쉬익!

총성과 파공성이 동시에 들려오고, 각기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소리에 맞는 형태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총을 교환하면서 왼손의 시료스를 거둬들였다. 살아서 움직이는 이들도 없었다. 치열한 살육의 뒤에 남는 비명이나 신음소리도 없었다.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 죽음을 그들에게 주었다.

육신을 이루고 있던 조각들 수천 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냥 이 성채 위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강력한 마법을 사용해 몰살시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의인이 있을 터였다. 가엾게 끌려 들어온 그런 이들이, 타락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천 명 중 단 한 명이라고 해도 그녀는 그를 위해서, 그런 이들을 위해서 쉬운 방법의 죽음을 내리지 않았다.

나미아는 그만 끝내고 싶어졌다. 목구멍에서 차오르는 욕지기를 삼키면서 그녀는 공포의 기운이, 그녀의 소식이 번지고 있는 성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이 열리면서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이야… 더 많이… 남아 있어…….”

죽일 사람도, 구해낼 사람도…….

아직 많이 남았다.

황량한 바람이 메마른 평원을 쓸고 지나갔다. 오디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이 향하는 직선거리로 백 야드 앞에는 검은 피의 혈맹이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이 보였다.

그녀는 나미아처럼 특별한 옷을 입지도 않았고, 누더기로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평상복 그대로 바람에 흰 머리카락이 흩날리도록 내버려두며 파란 눈과 붉은 눈으로 그 건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걸음은 마치 유령이 걷는 그런 걸음과도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나갔다.

저 앞의 건물은 이미 어떠한 저항의 형태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오디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려 건물을 겨냥했다. 그녀의 단순한 의지에 따라 손 앞에서 붉은색의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공기는 타버릴 듯한 열기가 생겼고, 그녀는 열기에 의해 일그러지는 건물을 바라보며 의지를 건물로 보내었다.

화염구(火焰球)로 구현된 의지는 건물을 향해 날았다. 1야드 크기의 지름을 가진 화염구는 바짝 마른 대지를 더욱 더 마르게 하며 날아갔다.

파르르르르! 콰아앙!

건물에 닿자마자 거대한 화염이 치솟아 건물을 감싸고 돌았다. 숨 막힐 듯한 열기가 건물을 감쌌고, 50야드까지 좁혀진 거리에서도 오디의 귀에는 건물 안의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뭐, 뭐야?!”

“불이다! 불이야!”

“콜록! 콜록! 다들 나가!”

오디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올렸다. 그녀가 보낸 의지가 다시금 왼손에서 구현되었다. 이번에는 수십 개의 크고 날카로운 얼음의 창이 되어 오디 앞에 전개되듯 늘어서서 그녀가 걷는 걸음에 맞춰 앞으로 나아갔다.

건물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쏟아지듯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오디는 그들이 모두 검은 피의 혈맹에서 내보낸 흉악 범죄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매가 살짝 좁혀지면서 몇 개의 얼음 창이 날아갔다. 그것들은 모두 그들의 심장을 노리면서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쐐애애애액!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이들은 모두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심장에 박힌 얼음 창이 그들의 몸을 달고서 몇 야드 밖까지 날아간 다음에야 멈추었기 때문이다.

얼음 창은 심장에 박히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어 폐 기능을 정지시키고, 차갑다는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숨이 끊어지게 했다.

“뭐, 뭐야?!”

“저기! 저기다!”

불에 타오르는 건물 밖으로 나온 이들은 경악하며 오디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흉흉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는 수십 개의 얼음 창과 그 뒤에 있는 흰 머리칼의 여자가 흰색 옷을 입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오디는 30야드 안까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왼손이 잠시 움찔거린다 싶더니 밖으로 나온 다섯 명에 맞춰진 다섯 개의 얼음 창이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심장에 꽂히게 되었다.

건물은 조금 전에 불이 붙은 것답지 않게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에 있다가는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승에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해 온 사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오디가 있었다.

오디는 가늘게 비웃는 미소를 띠었다. 나미아의 당부대로 저들의 정신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치는 사람이나 억지로 가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살려줄 생각이었다. 모두 죽이라는 성족들의 결정에 대해 임의로 대처하여 그들에게 약간의 반항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녀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의 정령인 오디는 나미아처럼 복잡한 힘의 전개과정 없이 숨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의 정신을 볼 수 있었다. 특수한 힘의 작용이 아닌 단순한 생리작용의 일환으로 정신 깊숙이, 그 내면까지를 볼 수 있었다.

의인은 없었다. 단 한 명도.

티끌만치라도 죄를 뉘우치는 이들은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당당하고 뻔뻔한 이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경멸스럽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할 거울이 없는 곳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없는 이상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보지 못하기에 느낄 수도 없었다.

“이대로… 죽는 편이 더 나을 테지요.”

오디는 자신의 의지를 얼음 창들에게 전달했다. 오디의 의지를 받은 얼음 창들은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건물을 뚫고 들어가 안에 있는 자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억!”

“흐어!”

“아악!”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단발마, 생에 마지막 소리로 남겨두는 이들의 보이지 않는 몸부림이 느껴지고 있었다. 건물은 검은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고, 더 이상 불에 당황할 자들은 없었다. 이미 전부 죽어서 황야에 누워 있거나 불에 타고 있었기에 오디는 그 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메마른 황야 위로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오디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입구에서부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사적인 항쟁은 처음의 일이었을 뿐, 이후는 도망자를 찾아가서 죽여야 하는 피곤한 일의 연속이었다. 건물은 오래된 성답게 아는 이들이 아니면 꼼짝없이 내부에 갇히게 될 것 같은 구조였다. 어느 것이 기둥이고, 어느 것이 주축인지 알 수 없었던 나미아는 출입구에 속하는 것만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루한 추격전이 건물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살려줘! 으아악!”

“커헉! 커억!”

“주, 죽어라! 어억!”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들은 다른 쪽에서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는 채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들어서 밀착하기라도 했다면 아무리 나미아라도 약간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에서 많아봐야 다섯 이상의 무리가 없는 흩어진 혈원들은 나미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한 쫓아가서 죽이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나미아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몸을 빼내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나미아의 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또한 건물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건물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1야드 두께의 독구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포이즌 크라우드(Poison cloud)를 개량시켜 일정 지역의 방어막을 설치하는 마법이었고, 공기 중독뿐만 아니라 접촉형 중독까지 가능하게 했기에 도망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미아는 한 명도 도망가지 못하게 올가미를 씌워두고는 천천히 수색해서 하나하나 주살(誅殺)했다.

성 내부에는 생각보다 잡혀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타의에 의해 끌려온 사람들이고, 그중에서는 타락하지 않고 타협만으로 자신을 챙겨온 사람들도 있었다. 흉악 범죄에 온몸이 찌든 이들 사이에서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있었고, 그러면서도 조금밖에 더렵혀지지 않았다.

나미아는 검은 피의 혈맹과 이들이 관련되었다는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고 바깥으로 텔레포트 시켰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악인에게 물든 이는 여지없이 처단했다. 거짓말도, 선량한 얼굴도 필요 없었다. 그녀는 한번 흘깃 보는 것만으로 모든 판별을 할 수 있었기에 의인들을 골라내는 일에는 큰 시간을 쏟지 않았다.

“파, 파이어 볼!”

이들 중에는 당연하게 마법사도 있었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캐스팅을 시도했고, 무사히 끝마쳤다. 그의 손에서 완성된 파이어 볼은 곧장 나미아에게로 향했고, 나미아는 앞에서 날아오는 파이어 볼에 쓰이는 마나의 충돌을 어김없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미아의 왼손이 움직였다. 오른손을 쓸 것도 없이 왼손의 수인과 간단한 마법 수식을 구현하는 것으로 파이어 볼의 작용방향에 대한 마나의 충돌 전개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파이어 볼은 나미아의 바로 2야드 앞에서 멈춰서더니 방향을 바꾸어 마법사에게 날아갔다. 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마, 말도 안 돼! 으아악!”

마법사의 몸은 순식간에 타오르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매캐한 살 타는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매웠다. 나미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올라오기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이 건물 안에 없었다. 총 15층에 달하는 거대한 성채였고, 그녀는 이제 10층에 있었다.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총 천 명은 넘었을 것이다.

정오쯤에 시작한 일도 이제 시간이 지나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이 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5층. 남은 사람은 150명 정도였다. 성채에 있는 인원 중에서 9할을 잡아 죽인 것이었다.

“계단도 귀찮으니… 그냥 가볼까.”

나미아의 생각에 반응하여 시료스가 움직였다. 그녀가 잔해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에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구멍이 뚫리면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뭐지?!”

나미아는 곧바로 몸을 날려 구멍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올라간 자리에서는 곧 총성과 함께 비명이 울렸다.

콰앙!

“으아아악!”

나미아는 또다시 무료한 살육을 반복했다. 이렇게 죽어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동정심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통을 줄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미아는 더욱 슬펐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먼저 반달이 보였고, 보름달 두 개가 그 뒤를 이어 떠올랐다. 엘가, 피지, 스톤이라는 이름의 세 자매 달은 창백한 얼굴로 삼각형을 그리며 밤하늘의 별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오디는 꽁꽁 얼어버린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건물은 내부가 까맣게 타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발 옆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을 보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우울한 눈빛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작 다섯… 뿐인가?”

열 군데가 넘는 곳을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구해낸 사람은 이걸로 다섯 명뿐이었다. 오디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5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단번에 죽였다. 불로 태워 죽이는 식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안겨주지 않았다. 나미아의 뜻대로 일격에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얼음 창을 심장에 박아 넣든가, 마법을 사용해 찰나에 목숨을 끊어버렸다.

이것으로 볼렌트라 지역에서 고통 받던 사람들은 모두 해방될 것이다. 토타카 연합에서도 검은 피의 혈맹 증발로 인해 목에 드리워진 칼을 치워낸 기분이 들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모두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이 가득하겠지만 나미아와 오디는 목격자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이 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고 오디는 확신했다.

오디는 발치에 쓰러진 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기억 속에서 검은 피의 혈맹에 대한 정보와 그에 얽힌 자신의 과거를 모두 지워버렸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 피의 혈맹에 관련된 증표를 모두 파기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깨어났을 때는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스스로 생각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디는 들을 리 없는 한 여성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이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는 그들의 문제였다. 또다시 범죄에 빠져든다고 해도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면책을 당했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카르마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카르마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디는 하늘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족을 향한 일종의 투정이라고 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미아가 있을 성채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이고, 워낙에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서 보일 리가 없었지만, 오디는 나미아가 겪을 슬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많은 피가 흐를 것이고, 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이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목숨들이…….

정신의 정령이기에 애당초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오디는 정신작용의 근간이 되는 감정이라는 요소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서적에서 배운 사회적 관습이나 그들의 이야기, 지식,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으로 상황에 따른 대처법을 잘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니니까 어느 순간이라도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미아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지금의 신들이 만든 인간이 아닌 인간, 자기들의 잘못된 전쟁으로 인해 문화마저 말살시켜버려 지금은 고대(古代)라고 불리는 제3문명기의 인간이라고 해도 나미아는 최소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을 모든 정신작용을 가지고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강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하며,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힘들 때 절망하지만 꿋꿋하게 일어서는 끈기와 기상을 지닌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또한 아직도 여린 마음을 지닌 처녀였다.

그런 나미아가, 아무리 겉으로는 강한 척을 해도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오열하면서도 그들을 죽이기 위해서 방아쇠를 당기고, 시료스를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신들의 뜻에 의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이들. 갱생조차 불가능하다 여겨 아웃사이더의 손으로 죽여 카르마를 없애려고 하는 이들. 세상에서 버려진 줄도 모른 채 욕망을 채웠을 이들. 더없이 가엾고 가엾어서 동정 받아 마땅하지만 경멸만 받는 이들. 진정 불쌍한 이들.

오디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미아를 떠올리면 더욱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속으로 울면서 사람들을 처단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쌍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서 손을 거들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죽이지 못하게, 더 이상 그녀의 손을 더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미아는 그것을 말릴 것이다. 정말로 싫지만 나미아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손에 피를 묻힐 사람이었다. 또한 모든 죄를 스스로가 짊어질 사람이었다.

우습게도, 양녀인 나미아는 아버지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녀들의 동생들보다도 더 측은할 정도로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원래 나미아는 성채와 외부에 흩어져 있는 모든 검은 피의 혈맹의 혈원들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미아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려면 하루 안에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오디가 상기시켰다.

오디는 며칠이고 괴로워하면서 일을 질질 끌고 싶지 않은 나미아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그녀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가 밀집되어 있는 성채를 나미아가 맡기로 하고, 오디 자신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외부의 혈원들을 죽이러 다니는 것이다.

“나미아 님. 이제 끝을 내셨나요?”

오디는 허공을 향해 질문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나미아는 조용히 말하며 한 발자국 내딛었고, 그녀의 말에 얼굴에 공포를 깔아놓은 거구의 피투성이 남자가 주저앉은 채로 뒤로 기어가고 있었다.

막스밀 하일튼. 71세의 남성이며, 거대하게 부푼 몸에 근육 반, 지방 반을 달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육식을 즐겨하며,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자식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며, 지금까지 벌인 각종 범죄의 숫자만 해도 1000건은 충분히 넘는 희대의 대악당이었다.

대륙의 모든 나라에서 최소 1만 펜 이상의 현상금이 걸려 있고, 그 현상금을 모두 합치면 20만 펜은 너끈히 되는 자였다. 하루를 강간으로 시작해 살인으로 끝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범죄에 대한 죄의식은 티끌도 찾을 수 없고, 공기로 숨쉬는 사람이 아니라 범죄의 기운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사람이었다.

어마어마한 괴력과 무시무시한 배짱을 자랑하며, 맷집은 바위와도 같았다. 그가 한 손으로 휘두르는 투 핸디드 소드(Two handed sword)는 검풍(劍風)만 맞아도 일반인은 기절할 것 같은 위력을 내뿜었다. 그는 2천 명이나 되는 흉악범들의 우두머리가 될 자질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생긴 것답지 않게 머리도 꽤나 비상했다. 군사학과 전략, 전술에 깊게 파고든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검은 피의 혈맹을 쉽게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군부에 투신을 했더라면 지금쯤 귀족의 작위를 받아 장군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한번 범죄의 쾌락에 빠진 이는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다.

“대, 대체 넌 누구야!”

덩치에 맞지 않게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앉은걸음을 걷던 막스일은 등이 벽에 닿자 큰소리로 외쳤다. 나미아는 시료스로 만들어진 검은 휘둘러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무감각하게 말했다.

“널 죽이러 온 사람.”

“왜, 왜! 무엇 때문에! 현상금 때문인가?! 그거라면 배는 더 줄 수 있…….”

콰아앙!

총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왜 알현실과 비슷한 공간이 최상층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구조의 방이었기에 천장은 높았다. 나미아는 허벅지 아래가 산산조각 나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막스일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끄아아악! 으아아아!”

“힐!”

나미아는 상처가 낫도록 마법을 사용했다. 폭렬탄에 맞아 산산조각 난 다리는 다시 붙지 않았지만 고통은 멈춰주어 나미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미아는 애초에 막스일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난 돈을 좋아하지. 하지만 네 현상금은 애초에 내 목표가 아니야. 내 목표는 너의 죽음이다. 이유가 뭐냐고? 세상이 너를 버렸기 때문이지.”

“크으윽… 세상이…라고?”

“이 세상은 관장하는 일곱의 빛의 신들. 그들을 받드는 성족이 있다. 난 그들의 의뢰로 너와, 너의 혈맹을 죽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미친! 그런 개 좆같은 이유가 어디 있어!”

콰앙!

나미아는 총을 들어 막스일의 오른팔을 쏘았다. 다리와 마찬가지로 오른팔이 산산조각 나면서 벽에는 구멍이 뚫렸다. 매서운 바람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끄아아아악!”

“힐. 믿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최소한 이 일의 원인이 된 너에게는 이유를 알려주고 싶었어. 넌 이 혈맹에서 유일하게 네가 죽는 이유를 알고 죽는 사람이야.”

“내가 죽는 것이… 사실인가?”

“그래. 지금은 입 닥치라는 뜻으로 고통을 주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니까. 너의 부하들 모두, 그들이 살아온 인생과는 상관없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었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몸통을 가르고, 심장을 쪼개고, 머리를 자르고, 산산조각 내었지.”

나미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고, 막스일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거물다운 태도를 보이기로 했다. 고통 없이 죽인다고 하니 차라리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막판에 몰리고서야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막스일은 말했다.

“부하들은… 하나같이 막돼먹은 놈들이었지.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줘서 고맙군. 나 역시 고맙다고 해야겠지? 아마도 너와 대화하고서 죽는 것도 내가 처음일 것 같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빌어먹을… 악당이면 악당답게 죽으란 말이야!”

나미아는 방아쇠를 걸친 손가락에 힘을 주었고, 막스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미아는 점점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막스일을 죽이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죽여야만 했다. 뉘우치는 감정도 없이, 마지막까지 폼을 재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미아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막스일은 한참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천천히 눈을 떴다.

“마지막인데…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나?”

나미아는 왼손의 시료스를 거둬들이고는 고글을 아래로 내렸다. 막스일의 얼굴은 정욕과 음흉함으로 가득했다. 그의 인생에서 만나보지 않은 미녀였기에 오히려 기쁜 마음도 들었다.

“기쁘군. 저승사자가 이런 미녀라니. 지옥에 가서 자랑할 수 있겠어.”

“빌어먹을…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고 있으면서! 잘난 체 하지 마란 말이야! 희대의 대악당이라면 끝까지 악당답게 죽어!”

“난 대악당이거든. 보통 악당과는 틀려서…….”

많은 피가 빠져나갔지만 나미아가 사용한 마법 덕분에 안색마저 덤덤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그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에서 덤덤한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막스일의 말이나 감정은 모두 마지막이 될 테니까.

나미아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떨리는 눈동자로 눈물을 흘리며 오른손으로는 천천히 총을 들어올려 막스일의 머리를 겨냥했다. 나미아는 말했다.

“별로 믿지 않겠지만… 난 너를 동정해.”

“아니. 난 믿어. 너느…….”

콰앙!

막스일의 미간에 폭렬탄이 박혔다. 이마 뼈를 부수면서 들어간 총알은 머리의 중심에서 그대로 폭발했고, 그의 머리는 아래턱을 남기고서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나미아는 날아오는 피와 육편(肉片)이 얼굴에 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받아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죽인 자의 최후를 똑똑하게 바라보았다.

오른팔과 왼 다리가 없어져서 뭉글뭉글한 부위만 남아 있는 7피트의 거구는 이내 6피트 가까이로 키가 줄었다. 혀를 빼문 것은 마치 장난스럽게 메롱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나타낼 것 같은 얼굴은 거대한 핏자국만 남긴 채 사라졌다.

나미아는 흐르는 눈물과 달라붙은 피와 살점을 전부 쓸어내며 창문으로 걸어나갔다. 그녀는 걸어가는 도중 폭렬탄을 닥치는 대로 쏴서 그 벽을 전부 날려버렸다.

휘이이이이이!

스산한 광경의 밤하늘이 바람과 함께 밀려들었다. 나미아는 멍한 얼굴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랐어도 멈추지 않고 걸었다. 나미아는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쉬이이이!

바람이 귓가를 할퀴면서 지나가는 하니, 그녀는 마저 눈물을 닦아내었다. 멍한 눈에 다시 빛이 들어오고, 허망한 표정에는 생동감이 생겨났다. 나미아의 몸은 떨어지는 속도 그대로 성채와 멀어지고 있었다. 성채에서 적당히 멀어진 나미아는 땅 위에 착륙했고, 세 개의 달이 걸린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 같은 성채를 보면서 우울하게 웃었다.

나미아는 남은 홀스터에 총을 꽂아두고서 오른손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수인을 맺어 입 앞에 두고서는 조용히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아라 하즈라 사아 나스 피리에…….”

보통의 마법은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리 진지하게 캐스팅을 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나미아가 사용하려는 마법이 보통의 마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미아는 천천히 왼손을 움직이면서 수인의 모양을 바꾸었고, 왼손이 천천히 돌면서 큰 원을 하나 그렸을 때 캐스팅을 멈추었다. 마나를 충돌시키는 술식(術式)을 세상에 구현하는 영창과 구동동작이 멈추고, 남은 것은 시동어뿐이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내리면서 성채를 가리켰다. 그녀의 입에서 피맺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티어 폴(Meteor fall)!”

쿠르르릉… 쿠르릉!

하늘이 찢어질 듯 울리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열두 개의 별이, 주위의 다른 별빛보다 몇십 배 이상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에 의해 마나에 이끌려서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강렬하게 빛나는 별은 점점 커졌다. 마치 이 땅과 충돌할 듯, 굉음을 내면서 하늘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열두 개의 별들은 이내 하늘을 붉은 빛으로 가득 메우면서 성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탑을 무너뜨리고, 건물을 관통하면서 떨어진 운석들은 각자의 시간차를 두면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 쿠구구궁! 콰가가강!

대지는 격통에 의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성채는 운석에 맞아 지진에 흔들리면서 붕괴했고, 그 안에 있는 시체들도 그와 함께 짓이겨지면서 타올랐다. 잔해 위로 또 다른 운석이 떨어지고, 돌은 녹아서 흘러내리다 폭풍에 의해 사방으로 흩날렸다. 운석과 땅이 충돌하면서 내는 힘에 흙과 바위, 건물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다. 낮은 각도의 것은 대부분 성벽이 막아주었지만, 그 성벽마저도 진동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쿠그그! 쿠르르르르!

나미아는 자신의 머리 위로 실드를 전개해 낙석에 대비했다. 반경 1마일 내로는 어떤 마을도 없었고,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낙석은 기껏해야 몇백 야드를 날아가다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다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미아는 울먹이면서도 끝까지 불타오르는 성채를 바라보았다. 운석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미아의 얼굴은 불꽃의 빛깔로 발간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열리며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잘한 걸까? 응? 오디야… 아빠, 엄마… 대답해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 왜…! 내가… 나는…! 으흑…! 흐아아앙! 으아아아앙!”

나미아는 마치 어린애처럼 오열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목놓아 울었다. 참아왔던 감정이 일시에 터지면서 봇물이 터지듯 눈물이 흘러 그녀의 볼과 턱을 적셨지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미아는 더욱 크게 울었다. 누가 좀 들어달라는 듯, 누가 좀 구해달라는 듯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나미아는 그렇게 오디가 올 때까지 한참을 울어댔다. 그리고 오디가 도착했을 때, 그녀의 품 안에서도 한참을 울었다.

“난… 이래서 공짜 손님은 싫어! 싫다고! 싫어어! 으아아앙!”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르면서 울고 있는 나미아를 오디는 조용히 감싸 안을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품에서 울라는 듯 오디의 태도는 조심스럽고도, 자애로웠다. 오디는 조심히 나미아를 끌어안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예. 그래요. 저도 싫어요. 정말로…….”

오디의 눈에서도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밤하늘은 조용했고, 달은 청명했다. 저 멀리 유성이 긴 꼬리를 이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살육과 슬픔의 밤이 깊어갔다.

외전: 공짜 손님-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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