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est.02 보이지 않는 손님-종료.
Postscript(후기): 욕망
From guest diary of Namia. Page 07.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성체(知性體)를 움직이게 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욕망만큼이나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계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욕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욕망의 노예라고나 할까?
대부분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부터 생긴다. 부정할 필요도 없이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성교하고 싶고, 말하고 싶은 그 모든 것. 그것이 욕망이 되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제이슨은 그런 욕망을 스스로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불운한 과거라는 고전적 장치에 따라 자신 스스로는 분노에 옭아매고, 분노에서 생기는 욕망으로 자신을 비롯한 주위를 타락시켜간 검은 잉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레이라인이 물들지 않고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복수 같은 저열한 감정 따위는 가지지 않았고, 소박한 행복 그 자체를 원하고 있었다. 나와의 접촉으로 인해 복수의 기회와 힘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복수를 꺼렸다.
레이라인의 그 소박함을 꿈꾸는 욕망은 복수가 내뿜는 진득하고 달콤하지만 지독한 독이 되는 욕망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도 그녀가 10년 동안이나 사교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상황에 적응해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래서 그녀의 카르마가 나에게로 향한 것일지 모른다.
이번 일에서 의뢰인이 할 일은 없었다. 일단, 돈을 지불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개인의 마음가짐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뉴먼 백작은 강압적인 권력자 타입이다. 자기 주변을 억누르고 그 사이에서 홀로 우뚝 서서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독불장군인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다른 사람의 기분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혹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해 주변을 움직인다.
뉴먼 백작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욕망의 포로임과 동시에 사람이 움직이게 되는 계기, 욕망을 자극해서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욕망의 조율자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것이니 만큼 잘 알 수 있었던 것이지 않을까?
레이라인은 척 봐도 미인이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도시의 혼탁한 공기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지냈고, 심지어 그 혼탁한 공기의 중심부에서 10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오염되지 않을 정도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뉴먼 백작은 순수한 것일수록 더럽히고 싶고,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검은 욕망을 자극해 그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시간에 기득권을 잡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가 복수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으며, 그와 동시에 몰락의 길도 만들었다.
레이라인을 이용한 기득권 얻기는 이미 예전에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복수의 욕망이 내뿜는 독기에 취해서 마음 가는 대로 행동을 하고 말았다. 가문을 일으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 욕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이후 그를 파멸로 몰아간 것은 같은 욕망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복수라는 욕망의 노예였기 때문에 복수를 완료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때까지 그의 등을 떠밀어온 추진제는 그의 손을 잡고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고,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뉴먼 백작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끌려 다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자신을 이끌고 지탱해준 것이 순식간에 파멸로 몰아넣는 원흉이 되다니.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크기와 욕망에 심어진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무엇이 심어졌든 간에 욕망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뭔가를 하게 만드는 행동의 제일 요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뜻하지 않은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소위 말하는 충동적인 일들이 그것이다.
욕망에는 한계치가 없다. 자신의 유한함을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무한함을 바라서 스스로가 모순에 빠져들어서는 예정된 수순인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마로 욕망이다.
단순한 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을 상상할 수가 있는가? 원하는 것이 없고, 목표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멈춰있는 것, 정적이나 다름없다.
욕망은 활동적이다. 움직여야만 성취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살고 싶기 때문에 그들은 먹고, 즐기고 싶기 때문에 놀며, 쉬고 싶기 때문에 잔다. 뭔가가 하고 싶다는 마음,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구가 바람이 되어 욕망으로 거듭하면 사람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이 움직이게 된다.
욕구는 본능적인 개념이다. 이성적으로 조율하지 않아도 생물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개념, 생존을 바탕으로 한 자기 보호까지 곁들인 모든 본능적인 행동의 발로가 욕구인 것이다.
욕망은 그 욕구에 이성을 얻은 것이다. 욕구가 채워지면 비로소 욕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평생가도 자신의 욕구를 챙길 수 없는 지성 없는 동물들은 욕망을 가질 수가 없다. 욕망은 지성체들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개념이다.
단순히 살고 싶다는 생존욕구가 한층 발전하면 어떤 식으로 살고 싶다는 식의 삶의 질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이다. 또한 단순히 먹고 싶다는 음식에 대한 욕구가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고 싶다는 식으로 구체화된다. 그것 역시 더 나은 먹거리에 대한 욕망이다.
욕구와 욕망이 다른 것은 욕구는 최소한의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것만 만족시키면 된다. 욕구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일정량만 충족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욕망은 그 위, 한 층 더, 더, 더, 더, 라는 비교급 가치가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바라는 것은 많아지고, 그만큼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크다.
분에 넘치는 욕망을 가진 이는 끝없이 나아가다 결국 파멸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대책 없이 밀고 나가는 사람 역시 파멸한다.
욕망이라는 것은 지성체가 사회를 통해 더 나은 것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집단이라는 것은 수많은 욕망의 덩어리들이 오가는 곳이다. 자신의 욕망이 남의 욕망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가차 없이 적이 되는 것이 이 알량한 사회다.
이른바 뜻이 맞지 않는다는 이름 아래 스러져간 욕망들은 얼마나 많던가.
이번 일은 결국 부녀간의 욕망 대결이었다. 한쪽은 더 나은 권력과 복수를, 다른 한쪽은 그저 평화로운 삶을 바란 것이다. 워낙에 상반되는 이 두개의 가치는 양립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든지, 아니면 서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지든지 둘 중에 하나다.
뉴먼 백작은 레이라인을 멀어지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뼛속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욕망대로 움직여야만 마음이 풀릴 것이었다. 합의점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의뢰인의 욕망은 들어줘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자연스럽게 올 수밖에 없는 욕망의 붕괴를 직접 손으로 실행시켜야만 했다.
남을 상하게 하는 사람치고 오래 가는 꼴을 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은 누군가의 손이 아닐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멸망하게 되어 있다. 나는 그 시간을 인위적으로 조종한 것일 뿐이다. 나의 힘을 동원해 다른 이들의 욕망을 살짝 건드려준 것뿐이다. 뉴먼 백작을 벌하고 싶은 그들의 욕망을 말이다.
수많은 욕망이 얽히고설켜서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허무함과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하지만 나의 의뢰인이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는 것에 기뻐할 뿐이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단지 그것을 위한 것이니까. 결국, 나도 레이라인의 욕망에 의해 움직인 사람이다.
레이라인, 다시는 이런 일 겪지 말고 잘 살았으면 해.
Postscript - 종료.
추신: 돈 벌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