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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Part4: 그녀가 차지한 행복은…. (11/49)

환상여관 WISH 2권

Part4: 그녀가 차지한 행복은….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것은 청명한 달빛과 흰색의 마법광구가 내뿜는 가로등 빛뿐이었다. 간간이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이 저 멀리 골목에서 소리 없이 천천히 가고 있는 마차를 살짝 비추었다.

검은 색 외장에 흑마 두 필을 맨, 마부 역시 검은 색 변복을 한 마차는 여러모로 수상쩍어 보였다. 게다가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새벽 3시라는 야심한 시각은 더더욱 그 의문을 증가할 만한 요소였다. 이런 야심한 시각은 누구라도 잠들기에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며, 깊은 숙면의 시간이기도 했다.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면서 내는 작은 끼익 거림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말의 편자가 길 위에 깔린 포석을 때리면서 내는 다그락 거림도 전혀 들리지 않는 이상한 마차였다. 마차의 안은 검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밖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부는 검은 로브로 자신을 가린 채 묵묵히 고삐를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지나쳐 가는 가로등 불빛에 로브 밑으로 언뜻 드러난 마부의 얼굴은 갸름한 턱 선에 붉은 입술, 그리고 약간 흰색 머리카락만이 전부였다.

그렇게 마차는 소리 없이 고요한 밤거리의 정적을 존중하듯 자신 또한 정적 속에 몸을 묻으면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일이 시작되면 얼마간은 못 보게 될 거야.”

“그렇겠죠?”

“뭐, 간단한 일들이잖아? 넌 그냥 네가 겪었던 일만 말하면 돼.”

레이라인은 나미아의 자신감 가득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미아의 계획은 일견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그녀를 해방시켜줄 것이라 믿음이 가는 계획이었다.

나미아와 레이라인은 현재 오디가 모는 마차를 타고 뉴먼 백작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찾아가는 손님은 예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기 어려웠고, 또 불청객인 이상 그 점은 더더욱 명백했다. 그러나 나미아는 그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을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어딘가에 정식으로 초대받았을 때 입는 그런 옷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의와 하의는 모두 검은색의 타이즈였고, 머리칼은 쉽게 흩날리지 않도록 한 가닥으로 땋아놓았다. 검은색 가죽에는 부드러운 곡선이 무광택 은실로 그려져 있고, 오른손에는 팔꿈치까지 오는 건틀릿을 착용하고 있었다. 손가락 부분이 노출되어 있는 그 건틀릿은 손등 부분에 녹색의 타원형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를 겸한 봉인구는 양 발목에 착용하는 발찌를 빼놓고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 달려 있었다. 목에 걸린 스카프는 여차하면 위로 올려 복면을 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으며, 허리 뒤쪽에는 작은 가죽 백이 매달려 있었고, 양 허벅지에는 단검이 한 자루씩 가죽 밴드로 고정되어 있었다.

손님은 손님이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며 찾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분노와 허탈함을 금치 못하게 하는 손님의 모습을 한 나미아를 가리켜 레이라인이 간단하게 칭했다.

“그런데 정말로 도둑 같아 보여요.”

“도둑이 맞지. 네 몸을 훔치러 가는 길이잖아?”

“몸을… 훔쳐요?”

레이라인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조용히 되물었고, 순간 마차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뭔가 알 수 없는 어색한 정적이 흐르던 마차 안에서 나미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하핫! 아니, 뭐…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 육신을 그 집에서 빼내온다는 그런 말이지. 아하하, 미안. 말실수야.”

“아뇨. 맞는 말이긴 하잖아요.”

나미아는 고개를 숙였고, 레이라인은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는 뜻을 내보였다. 나미아의 말대로 그녀들은 현재 레이라인의 육체를 제이슨 하이윈 뉴먼 후작의 집에서 빼내오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레이라인의 몸에 있는 독소를 전부 제거해 레이라인이 원래 몸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는 것이 나미아의 계획이었다.

계획이라고 부를 것도 없이 간단한 일이지만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이 문제였다. 표면적으로 “매우 자상한 아버지”인 뉴먼 백작은 레이라인의 소재를 파악하자마자 다시금 열성적으로 그녀를 되찾으려 할 것이고, 별다른 명분이 없이는 레이라인은 당연하게도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미아는 국왕인 바이커스 3세를 만나 직접 담판을 지었다. 국왕으로서는 조금 곤란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건 나름대로의 물갈이 방법이라는 나미아의 억지스러운 논리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결과였다.

나미아는 잠시 몸의 중심이 약간 앞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마차가 멈출 때의 관성으로 인해 몸이 쏠리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뒤에 있는 쪽창을 열었다. 주변의 풍경이 멈춰 있었고, 오디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로브에 가려진 나머지 그녀는 오디의 입만을 볼 수 있었다.

“다 왔어요. 뉴먼 백작가의 동쪽 담이에요.”

“그래. 수고했어.”

쪽창을 닫은 나미아는 약간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라인을 보면서 안심하라는 듯 생긋 웃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네가 우리 여관까지 찾아오고서 우릴 만난 것은 이 일이 반드시 해결된다는 징조니까.”

“예,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나미아는 생긋 웃으며 복면을 얼굴로 올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레이라인은 마차의 벽을 뚫고 머리만 내밀어서 오디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나미아를 보았다. 전체적인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디나 나미아의 표정은 아무런 걱정도 없는 미소였다.

“잘될 거야. 잘되겠지.”

레이라인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녀는 마차의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나미아가 자신의 육체를 되찾아 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주변은 고요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미아는 애초에 투명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동쪽 담벼락에 손을 대었다. 마법에 대한 조예가 깊으면 깊을수록 마나의 움직임이 어떤 방식인지, 그것이 어떤 형태의 마법인지 알 수가 있는데, 그녀가 알아본 것은 뉴먼 백작의 저택에 투명마법을 방해하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레이라인의 말로는 가끔 희귀한 아티팩트를 지닌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희귀한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 왜 도둑질이나 하는지 나미아는 묻지 않았지만, 여하튼 저택 안에서는 투명화(透明化) 마법이 전부 해제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택에는 다수의 경비견이 있고, 역시 많은 숫자의 사병이 있다고 했다. 사람이야 워낙 감각이 둔해 빠져서 그냥 조용하게 들어가면 되지만 경비견의 경우 보통 개보다도 감각이 뛰어나도록 교배를 한 견종이었다.

또한 잘 모르는 장소이니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죽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텔레포트 마법의 실패로 죽는 것은 별로 좋은 죽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리하여 결정된 것이 한밤의 괴도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투시 마법을 사용해 벽 안쪽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경비견의 거리와 경비원의 움직임을 보던 그녀는 이내 손을 떼고서는 세 발자국쯤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점프해 매우 가뿐하게 담 위로 올라섰다. 그녀의 부츠는 충격흡수에 미끄럼 방지와 동시에 발소리가 나지 않게끔 마법이 걸린 부츠였기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서는 담벼락 위를 질풍같이 뛰어갔다.

저택은 정원에서 꽤나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나미아는 최대한 저택의 동쪽 사면과 가까운 거리까지 뛰어갔다. 중간 중간 경비견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그녀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저택의 동쪽 사면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건틀릿의 손등 앞부분에서 가느다란 금속 실이 뻗어 나왔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저택의 지붕을 향했다. 금속 실이 점차 점차 빠져나가자 나미아가 착용한 건틀릿이 팔꿈치 부분부터 미미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 양은 앞으로 뻗어져 나간 실의 양과 같았다.

소리 없이 뻗어나간 금속 실은 지붕에 가까워지자 앞부분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그것이 지붕에 닿자 단단하게 지붕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미아는 팽팽하게 당겨진 금속 실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는 바로 지붕을 박차면서 금속 실의 회수 속도를 높였다. 소리 없이 감겨드는 금속 실과 그에 비례해 나미아의 몸은 큰 곡선을 그리면서 지면에 스칠 듯 말듯 정원을 갈랐다. 그녀가 가는 길에는 다행히 경비견의 시선도, 사병들의 눈길도 닿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빠르게 공중을 달려 건물의 벽에 붙을 수가 있었다. 부츠가 마법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고요한 밤중에 꽤나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나미아는 천천히 실을 끌어당겨 위로 올라가면서 오디의 충고를 떠올려보았다.

“역시 그냥 날아가는 편이 좋지 않았으려나?”

지금까지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볼 때, 상당히 번거롭다는 것을 느끼며 역시 날아가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그저 괴도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지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별로 재미없네.”

나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을 표시했다. 어쨌든 그녀는 3층의 베란다 바로 옆까지 올라갔고, 소리 없는 착지와 함께 베란다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나미아는 자신의 몸을 이끌어준 금속 실을 회수하며 잠긴 창문으로 걸어갔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불은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창문의 앞까지 다가가 잠금쇠 앞에서 조용히 마법을 사용했다.

“언락(Unlock).”

찰칵!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풀렸고, 그녀는 백 포치에서 얇은 주둥이가 달린 기름병을 꺼내었다. 창문을 살짝 민 나미아는 벌어진 창틈으로 보이는 경첩에 조심스럽게 기름을 뿌렸다. 창문 하나에 두 개씩, 총 네 개의 경첩에 세심하게 기름을 뿌린 그녀는 바닥에 낮게 엎드려서 30초 정도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일어선 나미아가 창문을 열었을 때는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후훗,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무슨 일에 있어서 따르는 기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미아는 흡족해하면서 자신의 몸이 통과할 만큼의 틈만 만들어서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커튼의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왔다.

널찍한 방에는 침대와 작은 테이블과 네 개의 의자, 두 개의 옷장이 있었다. 백작의 딸이 사는 방치고는 상당히 썰렁했다. 무엇보다도 3층 한구석에 격리시키듯 사람을 살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레이라인은 가족이 아니라 단지 도구라는 말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일단 먼저 나미아는 약속되어 있던 보수를 찾아보았다. 왼쪽 옷장의 오른쪽 깊숙한 곳에 비밀 공간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작은 보석함이 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레이라인이 눈치껏 모아둔 패물이라는 것이다. 상자까지도 비싼 물건이라서 반드시 상자 째 가져와야 한다는 충고도 들었다.

왼쪽 옷장의 앞으로 다가간 나미아는 경첩에 기름을 뿌리고 30초 정도의 시간을 쟀다. 그리고 옷장을 열자 조금 전 창문을 열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옷장에 자물쇠를 걸어두는 사람은 드물었고, 레이라인은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옷장을 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옷장 안에는 여러 벌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한쪽에는 코르셋이 몇 개 놓여 있었고, 상하의가 나눠진 옷도 몇 벌 있었다. 나미아는 옷들을 흘끔흘끔 보다가 잠시 고민했다. 레이라인과 자신의 몸매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거야 옷의 허리를 줄이고 가슴을 늘리면 될 일이었다. 상당히 예뻐 보이는 옷이 너무나도 눈길을 사로잡았기에 나미아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다가 곧 눈물을 삼키면서 옷들에게서 모든 신경을 거두었다.

쓸데없는 짐만 늘리는 건 나중에라도 빈축을 살 일이었다. 게다가 허락 받지 않은 물건이기도 하니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나미아는 그저 오른쪽 구석을 살피면서 비밀 공간을 찾는 데 열중했다. 그렇게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미아는 오른쪽 모서리가 바깥으로 열리는 구조라는 것을 알았다. 나미아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리며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뭔가가 오른손에 잡혔다. 그녀는 씩 웃으면서 건틀릿에서 여러 가닥 실을 뽑아서 그것을 얽어맨 후, 오른손을 빼내었다.

복잡한 무늬가 그려진 보석함이 그녀의 손가락에 붙어서, 끌려오듯 숨어 있던 공간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나미아는 흡족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레이라인의 말대로 갖가지 색의 보석과 장신구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이거라면 5만 펜이 되고도 남을 터였다.

그녀는 건틀릿에서 실을 뽑아 상자를 허리 뒤춤에 있는 백 포치와 나란히 두었다. 열릴 염려가 있었지만 단단하게 감아뒀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상자가 조금 커서 행동이 불편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미아는 조용히 옷장을 닫고 반대편에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는 레이라인이 팔에 링거를 꽂은 채로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영체의 모습과 다른 부분을 꼽자면 입고 있는 옷과 수척한 얼굴이었다. 나미아는 굳은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다이어트는 확실하게 하는군.”

농담으로 주위를 환기해보려고 해도 레이라인의 주위에 머물러 있는 무거운 공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미아는 레이라인이 정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여유를 부린 것이 상당히 미안해졌다.

나미아는 조용히 레이라인의 왼팔에서 링거 바늘을 뽑았고, 바늘 자국에서 피가 나오지 않도록 치료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레이라인을 막 들어올리려는 찰나,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뚜벅.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아닌 당당한 발소리였다. 나미아는 집 안을 순찰하고 있는 하인인가 싶어서 멈칫했는데, 그 발걸음은 바로 방 앞에서 멈추었다.

“칫!”

나미아는 천장으로 금속 실을 쏘아 보내고는 몸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약간 더 굵은 실이 뽑아져 나와 그녀의 몸을 천장에 밀착했고, 나미아가 천장에 등을 붙이자마자 방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미아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누군가를 확인하고는 의아해했다.

“응? 뉴먼 백작의 아들이잖아?”

그는 의외로 성실한 사람이라서 나미아는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일까. 나미아는 조용히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는 손에 세 개의 초가 꽂힌 촛대를 들고서 레이라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 촛불에 비춰지는 그의 표정은 동정과 연민이 머문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촛대를 내밀어서 레이라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았나.”

나미아는 그의 태도와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 집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저 사람만이 레이라인은 제대로 대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라인은 뉴먼 백작의 가족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미아는 도구로서 존재하는 가치로만 받아들여지는 레이라인이 가족들 사이에는 찬밥 신세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제대로 된 사람이 있구나.”

아마도 레이라인이 다년간에 걸친 착취를 말없이 받아들인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이외에 그나마 잘 대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응? 왜 바늘이?”

“아차!”

레이라인의 모습을 살펴보던 남자는 이내 링거 바늘이 뽑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뽑힌 바늘을 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굳은 촛대를 들고는 창문으로 향했다. 하얀 커튼 뒤로 비치는 달빛이 베란다의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미아는 아무래도 저 남자가 쉽게 방에서 나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레이라인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는 방 안에서 날이 샐 때까지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든 나미아는 차라리 그냥 내려가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였다.

나미아는 소리 없이 천장에서 내려와 그의 뒤통수에 단검을 가져다댔다. 남자의 몸이 흠칫 놀랐다.

“누, 누구…냐?”

“가만히 있어. 다치기 싫으면.”

“여, 여긴 무슨 목적으로…….”

“너에게는 볼일이 없다. 저쪽에 볼일이 있지.”

그는 나미아가 말하는 “저쪽”이라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나미아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미아가 이대로 그를 기절시킨 후, 레이라인은 데려갈까 싶은 충동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와 그 유혹에 몸을 내맡길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빌어먹을 아버지… 이젠 기어코 누나를 죽이려고…….”

“…?”

“시치미 떼지 마. 이미 알고 있어. 아버지가 누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걸.”

“아, 역시 그런가. 곱게 살려둘 생각은 없나보군. 그 얼굴 반반한 백작 나리는.”

“뭐?”

나미아는 단검을 거두었고, 뒤통수에서 날카로운 느낌이 사라진 것을 느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색 타이즈에 검은 복면을 한 붉은 머리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양 허벅지에는 단검을 가죽 벨트로 매달았는데, 그 가죽 벨트는 마치 가터 벨트같이 허리에 있는 벨트와 이어져 있었다.

“당신은?”

“알 거 없어. 아까 목적을 물었지? 레이라인의 구출이다.”

나미아는 만약에 들킬 경우를 대비해서 복면에도 마법을 걸었다. 그것은 목소리를 변조해서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도록 한 것이었다. 덕분에 목소리로는 정체가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나미아는 시큰둥하게 말하면서 단검을 허벅지에 매달린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면서 대화에 응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나미아의 말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나의 구출? 누가 부탁했지? 아니, 그걸 어떻게 믿지?”

“흐음… 어차피 죽이는 것이 목표였으면 같이 죽였겠지. 조금 전 상황에서 내가 단검을 앞으로 슬쩍 내밀기만 했으면 넌 죽었어. 그리고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없었을 거고.”

“그걸 믿으라는 건가?”

“아니. 당연하게 예측되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이야. 어차피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당신이 내 말을 믿을 것 같지는 않군. 믿거나 말거나, 레이라인이 지금껏 받고 있던 고통은 앞으로 4일 이내에 끝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잘 자.”

“뭐라… 커억!”

퍼억!

나미아는 그의 명치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그는 미처 말을 다 하지도 못한 채 앞으로 쓰러졌고, 나미아는 교묘하게 손을 움직여 떨어지려던 촛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기절해 있는 남자의 등을 보면서 방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당신 이야기는 레이라인한테 잘 해둘 테니까.”

나미아는 촛불을 끄고 촛대를 그의 옆에 세워두었다. 이젠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나미아는 서둘러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 남자가 조용히 응대해줬기에 망정이지, 잘못해서 소리라도 질렀다면 일이 시끄러워졌을 것이다. 최소한 내일 아침까지는 뉴먼 백작이 레이라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

나미아는 레이라인의 가냘픈 팔을 들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마치 짚단 인형같이 너무나도 가볍고 속이 텅 빈 모습이었다. 나미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아 올려 어깨에 들춰 메었다. 레이라인의 몸은 마른 장작개비 같이 가벼웠다. 축 늘어진 레이라인의 몸이 나미아의 어깨에 실리고, 나미아가 걸음을 뗄 떼마다 아무 힘없이 요동을 치는 듯 팔다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미아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거둬내고는 창문을 열었다.

한 개의 보름달과 두 개의 상현달이 밤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었고, 그녀는 그 아래에서 검은색 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빙긋 웃자 그녀와 레이라인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면서 이내 사라졌다.

레이라인의 방 안에는 밤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커튼과 쓰러진 남자 한 명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소리 없이 달리는 마차는 디렌너스의 중심부로 향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목적지까지 가기 전에 레이라인의 몸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서 영양실조 상태에 이른 레이라인이었기에 곧 있으면 육체의 기능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고 급박한 순간이었다.

레이라인은 아직도 육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미아가 치료하는 모습을 전전긍긍하며 보고 있었다.

“괜찮겠어요?”

“응. 이제 됐어. 체력은 어느 정도 돌아왔고, 육체로 돌아가도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야. 건강이 제일 걱정이긴 하지만 병 걸린 것은 없나봐. 잘 먹고 푹 쉬면 빠른 시일 내에 몸을 회복할 수 있어.”

“휴우… 다행이네요.”

“그럼 슬슬 육체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지? 아마도 독소가 모두 빠져나가면 자연스럽게 돌아가게 될 거야.”

“예, 고마워요.”

나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레이라인의 방에서 가져온 보석함을 꺼냈다.

“나야말로. 보수는 잘 받았으니 끝까지 서비스해야지? 나중에 일 해결되면 그때 한번 보자고.”

“예. 그럼 잘 부탁드려요.”

레이라인은 생긋 웃으면서 지금까지의 노고에 감사했다. 나미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받고는 연초록빛 손바닥을 레이라인의 이마로 가까이 가져갔다. 레이라인은 두 손을 모은 채 자신의 육체로 다가가는 손을 보며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미아가 레이라인을 보면서 말했다.

“본 여관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스터 나미아 이켈라인이었습니다!”

화아악!

나미아가 레이라인의 몸에 손을 얹자 그 연초록빛이 레이라인의 몸을 감싸면서 한차례 강한 빛을 냈고, 이어 레이라인의 영체는 자신의 육체로 빨려 들어가면서 레이라인의 영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미아는 연속으로 큰 마법을 사용하느라 약간 지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상쾌한 성취감이 가득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었고 열려진 쪽창에서 오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미아 님. 도착했어요.”

“그래. 알았어.”

나미아는 레이라인을 들어서 백작가를 빠져나올 때와 같이 어깨에 들춰 메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똑바로 앞을 보았다.

높은 탑 위에 솟은 장대 위로 펄럭이는 깃발, 그리고 깃발 위에서 이동을 계속하고 있는 초승달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높은 탑 못지않게 경쟁적으로 솟은 탑들과 그것을 받치는 건물들이 복잡하지만 정교한 설계를 통해 드러나는 조형미를 내뿜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나미아의 입가에 초승달을 닮은 미소가 어렸다. 오디는 뒤를 돌아보면서 긴장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조심하세요.”

“응. 다녀올 테니까 조그만 기다려.”

레이라인을 짊어진 나미아의 몸이 밤하늘을 가리며 날아올랐다. 그녀가 향하는 그곳은 렌디너스의 왕궁이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13일.

디렌너스의 치안은 상당히 안정된 수준이었다. 절도와 강도 등의 범죄는 평균 수준으로 벌어졌지만 살인, 방화, 강간, 납치 등 흉악 범죄의 발생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시민 의식 도 높고, 사람들이 살기도 좋으니 범죄 쪽으로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대부분의 사람은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디렌너스에서는 오늘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뉴먼 백작 가문의 장녀인 레이라인이라는 여성이었고, 신고자는 뉴먼 백작이었다. 일반적인 납치 범죄라면 몸값의 요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을 나타내는 단서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정원에서 순찰을 하던 경비견과 사병들의 눈에도 발각되지 않은 범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단순한 실종 사건으로 처리하려 해도 레이라인은 병자였다. 의식을 잃은 채 한 달 정도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이 갑자기 한밤중에 일어나서는 어디론가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뉴먼 백작은 일단 납치 신고를 했고, 이틀 뒤에 레이라인의 신변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연락이 왔다.

뉴먼 백작은 안도한 표정으로 치안대까지 출두했고, 그곳에서 곧 체포당했다. 지금까지 그가 벌여온 수많은 복수에 얽힌 불법적인 행각이 전부 드러난 것이다. 또한 레이라인에 대한 구금과 학대, 독약을 마시게 해 혼수상태로 몰고 간 살인미수를 적용했다. 뉴먼 백작은 그제야 이것이 내부 고발이라는 것을 알고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치안대에 붙잡힌 뒤였다.

“레이라인-!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알았더냐!”

뉴먼 백작이 호송되어 가면서 지른 외침이었다고 전해지지만, 레이라인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이미 모든 일의 사정을 나미아에게서 듣고 난 후였기 때문에 더 이상 뉴먼 백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나미아는 레이라인이 앉아 있는 침대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사과와 과도에 집중되어 있느라 한결 이완되어 있었고, 레이라인은 평소에 그녀가 보여준 행동과는 다르게 섬세하게 움직이는 칼날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사과를 다 깎은 후 공중으로 던진 나미아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빠르기로 사과를 향해 칼을 휘둘렀고, 재빨리 쟁반을 밑에 가져다대었다. 쟁반 위로 떨어진 사과는 정확하게 여덟 조각으로 쩍 갈라져 있었다.

레이라인은 그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사과를 집어 들었다.

“와아! 굉장해요. 정말 재주가 많으시네요?”

“내가 좀 원래 재주가 많지.”

나미아는 칼끝으로 사과를 찔러 올리면서 과육을 한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향과 즙이 입안에서 퍼지면서 절로 몸을 떨게 했다. 시원하고도 상쾌한 맛이었다. 이를테면 일을 끝내고 난 다음의 성취감과 비슷하달까?

“정말이지, 처음엔 놀랐어요. 눈뜨고 나서 사정 설명을 하라는 것에는 무척 어리둥절했는데, 왕궁 정원에 두고 가셨잖아요?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얼굴이 국왕 폐하의 존안이라 얼마나 당황했다고요.”

“하지만 미리 말하면 긴장감이 덜하잖아? 그리고 아이페하고는 이야기가 다 되어 있는 상태였으니까. 잘하면 오늘쯤 네가 살던 비인스 마을의 매각 처분이 끝날 거야. 그렇게 되면 넌 자유지. 법정에서 거리낌 없이 증언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가면 되는 거야.”

“아이페…요?”

“응. 로렌드질리안 아이페사르 바이커스 3세. 유아시절부터 써온 애칭은 아이페. 이래 봬도 나하고는 면식이 있는 사이거든. 그러니까 4만 펜으로 일개 마을을 장원으로 등록한 후에 매각할 수 있었지.”

“아아… 정말이지 대단하시네요.”

레이라인은 국왕의 애칭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나미아의 태도에 새삼 놀랐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돼도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놀랄 거리는 많이 남아 있었다.

나미아는 레이라인을 뉴먼 백작가에서 데리고 나온 후에 그녀의 영체를 육체로 되돌렸고, 그 후 그녀를 왕궁의 정원에 살짝 두고 왔다. 그리고는 “우연히” 밤샘업무를 하던 국왕이 기분전환을 할 겸 산책을 나왔다가 정말로 “우연히” 레이라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마침 눈을 떴을 때는 아침식사 후에 잠시 들른 국왕 바이커스 3세의 모습이 보였고, 레이라인의 얼굴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했기에 그녀는 불법침입자가 아닌 영문 모를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레이라인이 육체로 돌아가기 전에 나미아는 눈뜨게 될 장소에서 뉴먼 백작의 모든 악행을 낱낱이 고하라는 말을 신신당부했고, 레이라인은 일단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에 응했다. 그리고 눈을 뜨자 제일 처음 본 사람이 렌디너스의 최고 권력자의 모습이었다.

레이라인은 의아해하는 국왕에게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뉴먼 백작의 복수에 얽힌 범죄행위에 대해서 고발했으며, 그는 자신에게 억지로 독약이 먹혀 혼수상태에 빠뜨렸노라고 낱낱이 고했다.

나미아를 제외하고서는 다른 이에게 처음으로 해보는 말이었는지라 레이라인은 약간 흥분해 있었지만 바이커스 3세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그 후, 바이커스 3세는 비밀리에 다른 대신들에게 연락을 취해 레이라인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를 밝혀내기 시작했고, 그 조사가 오늘에야 끝나게 된 것이다.

뉴먼 백작의 적이 워낙 많다 보니 그와 관련된 범죄 사실들은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그것들이 무사히 비켜나간다고 해도 레이라인에 대한 구금과 학대, 살인미수에 대해서는 처벌을 필할 길이 없었다.

현재 뉴먼 백작은 왕궁의 지하 감옥에 유폐되어 있었고, 그녀가 독을 마시는 걸 방관했던 그의 아내와 두 딸도 같이 연루되었다.

레이라인은 일단 고발을 하긴 했지만, 뉴먼 백작이 자신의 고향에 끼칠 악영향에 대해서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국왕은 그녀가 살던 “비인스”마을을 3만 5천 펜에 장원으로 만들어 귀족을 대상으로 팔 거라고 했고, 레이라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구매를 결심했다.

장원이란 귀족들이나 유력가가 가지고 있는 개인 부동산을 의미했다. 일정 크기의 땅이나 혹은 마을 하나가 전부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으며, 장원의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즉, 나라의 땅이되 세금을 바치고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장원의 땅은 본질적으로 나라에 귀속되기 때문에 장원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나라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일종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흔한 말로 휴양지나 요양지로 표현되는 곳이니 웬만해서는 건드리지 않았고, 장원으로 간 귀족들은 대부분 중앙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특별한 일 없이는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장원은 뉴먼 백작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녀의 마을에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해서 해코지를 하려고 해도 그 마을은 이미 장원화가 되어 레이라인의 것이 되어버렸다. 장원으로 만들어진 이상 국가에서는 일정의 수비대도 보내주기 때문에 무력 동원이나 암살 역시 어렵다.

“이제 네 아버지는 감옥에서 나올 일이 없을 거야. 네 계모나 다른 자매들 역시 앞으로의 인생은 종 세 번 울렸지. 그래도 뉴먼 백작가에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던데? 네 남동생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 같았어.”

“아… 예. 그 아이는 남달랐어요. 온통 적뿐이던 그곳에서 유일하게 힘이 되어주었으니까요. 진심으로 대해준 것 같았어요.”

“뭐, 가문 하나가 완전히 망하는 건 아니야. 뉴먼 백작에게 당한 사람들이 슬슬 증언을 하고 나서겠지. 그 사람은 이제 정치적으로나 뭐로 보나 완전히 몰락했어. 당장 자기 딸을 독살하려고 한 사람인데?”

“복수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약간 씁쓸하기도 해요. 그 사람에게는 올 수밖에 없는 결말이었겠지만요.”

레이라인은 약간 허망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첨탑과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있는 곳과 성벽 사이에 있는 정원에 깔린 초록 잔디는 그녀의 표정이나 생각과 달리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미아는 레이라인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일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원치 않던 복수를 하게 된 사람의 기분이 그렇게 시원할 리가 없다. 애초에 복수는 바라지도 않았던 사람이니 더더욱 그랬다.

약간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주변 공간을 감돌고 있을 때, 오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미아는 오디에게 비인스 마을의 장원화와 매각에 대한 서류를 챙겨 오도록 심부름을 보냈었다.

“저 왔어요. 장원화와 매각은 잘되었어요. 여기 장원의 매매 계약서와 레이라인 씨가 장원의 소유주임을 증명하는 국왕 친서예요.”

오디는 두 개의 스크롤을 레이라인에게 내밀었다. 오디의 말대로 비인스 마을을 장원으로 정하며, 장원의 소유를 레이라인에게 귀속한다는 국왕의 친필과 함께 옥새가 찍힌 서류였다.

레이라인은 이제야 안도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속에 쌓인 근심과 걱정들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것으로 그녀는 뉴먼 백작의 마수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고, 그녀를 도구로서가 아닌 인간으로 봐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안심하는 표정의 레이라인에게 말했다.

“잘됐네. 뭐, 뉴먼 백작의 일은 신경 쓰지 마. 복수는 네가 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되나요?”

“그래. 내가 징계를 내린 거야. 그 과정에서 네가 이용된 것뿐이고. 뭐, 나도 널 도구로 이용한 건가? 헤헷, 괜찮아. 세상에 죄 안 짓고 사는 사람은 없어. 뉴먼 백작은 네 말대로 시간의 심판을 받은 것뿐이야. 정 이해가 안 갈 때는 날 원망하면 돼.”

“상냥하시네요. 나미아 씨는…. 괜찮아요. 아무도 탓하지 않아요. 자신의 태도를 고치지 않은 그 사람의 잘못이니까요. 기왕이면 지금이라도 그 사람이 잘못을 뉘우쳤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이젠 저하곤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레이라인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미아는 그 미소에서 평화로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몇 년에 걸쳐서 괴롭힘을 받던 그녀의 마음이 서서히 치료되고 있는 듯했다. 당분간은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레이라인은 머물 곳이 있고, 그동안 그녀를 기다려온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런 곳은 이제 끝이었다.

나미아는 이제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장원의 매매 계약서까지 있는 이상 레이라인은 위험하지 않다. 국왕에게도 말을 해두었으니 아마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쓸 것이고, 그녀가 무사히 마을로 돌아가도록 배려해줄 것이다.

나미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제 갈게.”

“가시게요? 조금 더 있다 가시지.”

“아니, 의뢰는 끝이잖아? 이제 남은 것은 네가 스스로의 행복을 잡는 것뿐이야. 나의 도움은 여기까지. 앞으로는 자기 발로 걸어가야 해. 몸도 되찾았잖아?”

“네. 그러네요.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레이라인은 나미아의 가겠다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 세상에는 자신만큼이나 삶에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나미아의 일이었기에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일을 빨리 마무리 짓는 편이 좋았다.

나미아는 레이라인을 보며 방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행복을 잡기 위한 손님의 얼굴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았다. 비록 이번이 두 번째라고 해도 말이다. 나미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잘 있어! 그럼 다시는 고민 가지고 찾아오지 마. 잘 있어!”

“안녕히 계세요. 행복하세요.”

“네. 고마웠어요. 여러분들도 행복하세요.”

레이라인의 눈앞에서 나미아와 오디의 형체가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연기처럼 방 안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환각이나 신기루 같았고, 그녀들의 존재마저도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레이라인의 손에는 두 개의 스크롤이 있었고, 조금 전까지 나미아가 깎던 사과도 있었다.

레이라인은 살포시 웃는 표정으로 사과를 베어 물었다.

아삭!

“이제부터 맛볼 달콤한 행복의 맛이 이런 것이구나”

레이라인은 단물이 흠씬 밴 사과를 씹으며 안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1년 뒤, 한산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나미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레이라인이었다.

“어라? 굉장히 오랜만이잖아?”

“그러게요.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겼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죠?”

“아, 고객의 재방문은 여관 운영에선 좋지만 우리한테는 별로 좋지 않은 거야. 제발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걸.”

나미아는 약간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봉투의 겉봉을 뜯어내었다. 그리고는 일단 내용보다도 글씨를 살펴보았다.

“글씨는 평범하군.”

“여유 있는 필체인데요?”

위급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 “살려줘요! 도와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요!”를 기대했던(?) 나미아는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자신의 그런 생각을 반성했다. 손님이 잘되길 빌어야 하는데 대체 이게 무슨 마음가짐이지?

오디는 나미아가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귀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 하세요?”

“응? 아냐. 아, 편지 읽어야지.”

나미아는 애써 오디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나미아 씨, 오디 씨.

1년 전의 도움은 여태껏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덕분이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을이 장원화가 되어 저에게 귀속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친했던 귀족들도 섣불리 저를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것에도 위협받지 않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수도의 소식이 저에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아무래도 10년간 사교계에 있었던 관록 때문인지 절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주는 친구들도 있거든요. 여러분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의 아버지는 현재 12년 형을 선고받고 구류 중에 있습니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지만 측은한 마음도 드는군요. 아버지의 범죄에 일조했던 새어머니 역시 구금 형에 처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파란이 닥친 뉴먼 백작가는 현재 남동생인 윌리엄에 의해 재평가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닮지 않아 성실하지요. 아마도 그 아이가 뉴먼 백작가를 성실하고 건실한 이미지의 가문으로 다시금 일으켜 세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11년 뒤에 아버지가 출소하셔도 아마 별다른 영향력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동생이 가문의 모든 권력을 잡고 있을 테니까요. 아마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그 뜻에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동생은 지금 아버지가 나오시는 대로 휴양을 권유할 작정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면회를 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야망도 잃어버리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시다고 하시더군요. 나름대로의 변화를 겪고 계신 것 같습니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도 면회를 가보고 싶군요.

처음 제가 마을의 주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많이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마을의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간곡한 설득에 지금은 예전의 레이라인으로 대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지금 제 남편이 될 칼스 하리엔조차도 절 어려워했다는 거죠.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은 귀족에 대한 면역이 없거든요. 워낙 오래 마을을 나와 있다 보니 처음에는 저도 마을 사람들은 대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그러나 지금은 모두 한 식구처럼 살고 있답니다.

제가 편지를 보낸 이유를 이제 짐작하시겠죠? 저는 오는 8월 1일에 칼스와 결혼식을 올린답니다. 그리고 저는 뉴먼 백작가의 레이라인이 아닌 칼스의 아내 레이라인 하리엔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제 일생의 가장 행복한 자리에서 두 분의 축복을 받고 싶습니다. 빈손으로 오셔도 아무런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은 제게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을 주셨으니까요. 그 은혜는 거듭 잊지 않겠습니다.

못 오신다면 그건 나름대로 유감이겠죠. 하지만 여러분은 또 저와 같은 불행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정상 오실 수 없다면 언제고 꼭 한번 들러주세요. 직접 만든 저녁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조만간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항상 행복하세요.

레이라인 씀]

나미아와 오디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이 한 일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해진다?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레이라인의 편지는 그들에게 최고의 기쁨이었다.

“오디. 8월 1일에 별일 없지?”

“예. 특별 손님의 일이 있다고 해도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마법을 배워두길 잘했다니까. 어쨌든 공간을 초월하잖아?”

“예에. 에… 선물은 뭘 준비할까요?”

레이라인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런 경사스런 자리에 곧이곧대로 선물을 사 가지고 가지 않을 그녀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초거대 상회의 주인들이니 만큼 선물 한 두개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준비해보자. 일단… 그쪽에서 필요한 물건이 좋겠지?”

“그렇겠죠? 정보부를 시켜서 알아보게 할까요?”

“사생활에 침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탁해.”

“예. 그럴게요.”

오디는 정보부에 명령을 하려 자리에서 물러났고, 나미아는 다시 한번 편지를 읽었다. 행복해하는 사람의 편지는 보는 이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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