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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3: 시끄럽고 재미없는 파티. (10/49)

Part3: 시끄럽고 재미없는 파티.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 올해로 71세가 되는 청년기의 남성이다. 그는 대대로 이어져온 유력 귀족가였던 뉴먼 가문이 가문적으로 죽어갈 때 즈음 태어난 사람이다. 그의 지금까지의 모든 행적은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일과 그에 관련 있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성격은 건실하고 착하면서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모든 이를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대한다는 모 왕실 인사와는 거의 반대에 속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믿음을 주게끔 만들지만, 그의 진짜 표정은 본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어릴 적에 가문 때문에 받은 박해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집요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이슨이 뉴먼가문의 백작위를 잇게 되면서부터 뉴먼 백작가의 태동은 시작되었다. 그는 먼저 유력 후작가의 딸이었던 비앙키 세이른과 결혼해 처가를 등에 업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남다른 화술과 어릴 적부터 열심히 배워온 펜싱 솜씨가 있었기에 뉴먼 백작과 결투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 패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개인의 능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힘은 미약해 개인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권력을 위해 처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자 했지만, 뉴먼 백작과 비앙키가 결혼하고 몇 년 뒤에 사업에 실패해 투자금을 날리게 된 세이른 후작가도 흔들리게 된다.

그때 당시 뉴먼 백작은 관개수로 사업에 투자를 할 결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수완이 만들어낸 비정규 정보였었다. 약 1년 후에 투자자 발주를 시작해서 공사에 들어가고, 이것이 완공되면 몇 배의 이익금이 꾸준히 들어오게 된다는 확실한 정보를 잡은 것이다. 그래서 뉴먼 백작은 자신의 하룻밤 상대였던 여성이 낳은 자신의 아이를 불러들이게 된다. 이것은 마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불려온 딸은 뉴먼 백작이 예상한 대로 자신과 그 여성의 피를 이어받아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백작은 그녀를 교육시켜 사교계에 진출시켰고, 레이라인 데어렌 뉴먼의 주가는 연일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뉴먼 백작은 그녀를 볼모로 사용하여 투자금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슬쩍 혼담이 오갈 것 같은 분위기만 그의 혀로 조장해두면 눈먼 돈이 여기저기서 굴러 들어왔다. 뉴먼에게 있어서 레이라인은 매우 훌륭한 도구 그 자체였다.

투자는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뉴먼은 투자액의 몇 배를 거둘 수 있었다. 레이라인의 가치는 나날이 올라가서 뉴먼 백작은 단숨에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뉴먼 가문이 다시 일어선 것이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뉴먼 백작은 매우 칭송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을 빙자한 여러 거래 같은 일은 흔했고, 레이라인을 좋은 곳으로만 시집보내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뉴먼 백작은 다른 몰락 귀족들의 귀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약자였던 자가 힘을 얻었다. 실상은 약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문이 약해서 칼을 갈고만 있었을 뿐, 가문까지 힘을 얻은 이상 그의 복수의 칼은 당연하게도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저한 계략과 깨끗한 배반, 그리고 상대가 순식간에 몰락하는 모습을 보며 뉴먼 백작은 복수심을 충족했다. 당하는 당사자들은 기억나지도 않는 어릴 적의 일로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몰락해갔다.

그 뒤 뉴먼 백작은 귀족들이 서로 끌어들이려는 인사가 됨과 동시에 기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라도 웃는 얼굴로 파멸시킬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 그는 지금, 첫째 딸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나미아는 누워서 보고서를 읽다가 거의 끄트막에 다다라서야 한숨을 내쉬면서 짤막하게 평했다.

??흐음, 보고서 어디에도 좋은 소리는 안 써 있네.”

??그래요? 정말 나쁜 사람인가 보네요.”

??그런가봐. 그의 자식들도 하나 같이 착한 아이가 없대. 역시 가정교육이 중요한 거야. 그러고 보니 동생들은 잘 크고 있으려나? 아아. 다들 보고 싶다. 쓰다듬어주기라도 하고 싶어.”

??다들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요.”

오디의 담담한 말에 나미아는 굳은 표정의 얼굴을 보고서로 덮고는 조용히 훌쩍였다.

??키잉―! 훌쩍! 다들 귀여운 동생들인데…! 오디 때문이야!”

??제가 뭘요. 애들 어릴 때에 버릇 들인다고 험하게 대한 사람이 누군데요? 그래도 실상은 다들 나미아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테지만요. 그래도 라르딘하고 체리랑스는 나미아님을 스스럼없이 대하잖아요?”

??라르딘이야 첫째니까 여러 상황에 일찍 익숙해져서 그래. 그리고 체리는… 아빠와 엄마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비슷한 반응을 보일걸.”

나미아와 오디의 여섯 동생들은 대개 나미아를 무서워하고 오디를 잘 따른다. 그 이유는 오디의 지적대로 버릇을 들인답시고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할 때부터 너무 엄하게 다뤄서 그렇다. 오디는 그런 나미아의 반대 급부로 상냥하게 아이들을 돌보았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그녀들의 동생들은 나미아에 대해서 무서워하긴 하지만 좋은 누나, 언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나타내고자 하면 오디의 말대로 상당한 용기가 필요로 할 것이다.

현재 베닌은 다도린에게 최근에 열릴 왕실 주최 파티에 나미아가 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있었다면 나미아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사관학교 생활로 굳을 대로 굳어 고지식한 그 머리를 연기 나도록 굴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만담을 하고 있을 때, 레이라인이 문을 뚫고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안녕하셨어요.”

??어, 왔구나.”

??어서오세요. 가셨던 일은?”

??제 몸은 잘 있어요. 하지만 아직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더라고요.”

레이라인은 약간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오디 옆의 소파에 걸터앉았다. 나미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힘차게 말했다.

??괜찮아! 소원의 여관 주인을 얕보지 마! 모든 것은 해피 엔딩으로!”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어요. 휴우…….”

기껏 힘차게 말한 것도 소용없게 되자 나미아는 뻘쭘해져버렸다. 오디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아니면 위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라인은 잡시 천장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저기, 정말로 가능해요?”

??응? 뭐가?”

??모든 일이 끝나고 제가 더 이상 아버지의 위협을 받을 일이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어요? 제가 살던 그 작은 마을에서요.”

레이라인의 눈은 슬픔에 젖어 나미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그 눈을 보면서 장난으로 대답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

??살다보면 불행이라는 것은 언제나 생겨.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행복해질 기회가 생기지.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좀 더 빨리 행복을 주려는 사람이야. 네가 물어 본 것들, 전부 가능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네가 복수심을 가지지 않고 스스로를 파멸시키려 하지 않으며 매사에 긍정적이고 성실하게 지금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면 가능한 일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인과율을 중요시하고 있어. 사람에게서 당연히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내리는 것이 내 역할이지. 괜찮아. 일이 끝나면 다신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이 너와 네 가족, 네 마을에 손을 댈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날 믿어.”

레이라인은 사뭇 진지한 나미아의 눈빛을 마주보았다. 그곳에서는 평소에 느껴지던 장난기나 느슨함이 사라져 있었다. 깨끗한 붉은 눈동자에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런 의지가 있었다. 레이라인은 그 눈빛을 믿기로 했다. 나미아를 믿기로 했다. 그녀는 말했다.

??예, 믿을게요.”

믿기에, 믿을 수 있기에, 그래서 그녀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9일.

이켈라인상회의 영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몇 권의 책이 완성될 수도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대륙의 상권의 절반 가까이를 장악하고 있는 상회이니 만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상회의 회장이 데린너스 22구역의 이데른 여관에 있다는 소식이 상계와 권력층에 퍼지면서 그녀를 만나보기 위한 사람들이 수시로 이데른 여관을 방문해서 나미아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대변인이라는 베닌은 이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회장님께서는 현재 아무도 만나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정말인가?”

??예. 방문자가 누구이든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허허. 지금 이 윌켄 다리스 공작보고 헛걸음을 하란 소리인가?”

??조금 전 메이아 공주님께서도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베닌은 자신이 평생 걸려서 만나려고 해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에게 퇴짜를 놓는 일에 어느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나미아를 만나기 위해서 온 가계각층의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를 내기도, 때로는 애원하면서까지 나미아를 만나고자 했지만 대변인으로 이야기되는 나미아의 뜻은 요지부동이었다.

??날파리가 너무 많아. 완연한 여름인가.”

??자기가 쫓겨난다는 것에 화를 내고 있으니 날파리보다도 시끄럽네요.”

??그러게 말이야. 다들 자기가 뭔가 특별한 사람인양 착각하고 있어. 그래봤자 귀족 주제에 말이야. 고작 상인 한 명 만나려고 별별 짓거릴 다한다니까.”

??돈 앞에서는 계급이고 뭐고 없는 거잖아요.”

여관 앞을 떠나는 마차를 보면서 나미아와 오디는 거절당한 방문객들에 대한 혹평을 늘어놓았다. 소문이 퍼질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일찌감치 여관 측이나 베닌에게 축객령을 내려놓았고, 현재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가고 있었다.

??여관 측에서도 상당한 문제 아닐까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많긴 한데 대부분 돌아가니까. 아마 조금 있으면 여관에서도 ”초대받지 않은 자 오지 말라??라는 식의 경고문을 붙이겠지. 뭐, 잘나신 귀족 양반들이야 아랑곳하지 않을 테지만.”

나미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녀들과 함께 창밖을 보고 있던 레이라인은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와아. 저 문장은 제가 아는 가문이에요. 속절없이 돌아가네요?”

??전 대륙에 걸쳐 있는 이켈라인상회의 회장직은 어지간한 공작보다도 높다고. 내가 심심해서 내린 명령에 당장 자금줄이 박살난 인간들이 수두룩하니까.”

대륙의 상권의 절반이라는 말은 귀족들의 자금원 절반을 뜻하는 말이다. 귀족들도 나름대로의 상회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상회의 사업을 거들면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나미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 명은 그들을 당장 파산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유력인 에게는 얼굴이라도 보이고서 좋은 인상을 심어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에 기댄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에휴. 대체 돈이 뭐기에……. 오디. 내려가서 베닌한테 오늘 저녁 왕실 주최 파티에 내가 나간다고 전해둬. 초대장은 없지만 들어간다고 해도 아무 말 못할 거야. 렌디너스 국왕은. 아니, 그냥 호텔 지배인에게 그렇게 말하고 베닌하고 같이 올라와. 걔도 좀 쉬게 해줘야지.”

??예, 알겠습니다.”

오디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서 방을 나갔고, 레이라인은 국왕마저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마치 국왕을 이웃집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나미아는 오디가 나가자 가방을 열어서 붉은색 실크 드레스를 꺼내었다.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전체적으로 달라붙는 느낌에 오른 쪽 허벅지에서부터 옆트임이 나 있는 과격한 디자인이었다. 그녀는 그것과 한 세트로 되어 있는 검은색 반 스타킹과 가터벨트까지 꺼내놓았다. 그런 조합을 보던 레이라인이 한마디 했다.

??왕실 주최 파티에 나가는 옷치고는 너무 경박한 것 아닌가요?”

??차라리 천박이겠지. 괜찮아. 나정도 미모가 되면 이런 거 입어도 아무 말 못할 거야. 귀족 집안 규수들이 뭐라 뭐라 떠들겠지만 아무려면 어때? 나에게 쓴 소리 할 수 있을 정도로 담이 큰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국왕이나 왕족이라면 가능 할지도요.”

??무슨 소리를. 국왕은 아마 와줘서 고맙다고 할걸. 렌디너스만 해도 이켈라인상회가 과반수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어. 그런 단체의 회장에게 무슨 말을 해서 불이익을 사려고? 내 말 한마디면 상회 철수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그쪽도 잘 알고 있어.”

나미아가 쥐고 있는 권력은 그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나미아에게는 뭐라고 똑바로 이야기할 수가 없다. 가끔 대놓고 그녀에게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럴 경우 나미아의 반응은 두 가지다. 상대를 몰락시키거나 아니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서, 혹은 만용을 부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가하는 경우 나미아는 지체 없이 상대를 후려친다. 그리고는 간신히 재기할 만큼의 힘만 남겨두고 아무렇게나 내버려둔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논리적으로, 모임의 목적에 맞지 않아 그 점을 지적하는 경우는 호감을 가지고 대한다.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을 대하는 방법이 판이한 것이 나미아의 특징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거까지 넣으면 의상 세팅은 끝.”

나미아는 팔꿈치까지 오는 실크 장갑에 검은 장비가 수놓인 붉은 머플러, 검은 색의 헤나 무늬가 복합적으로 새겨진 붉은 접선(摺扇)을 꺼내놓았다.

옷 이외에 별다른 장신구는 없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는 장신구가 원체 뛰어난 예술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목걸이나 귀걸이, 서클릿에 이어 반지나 팔찌 등은 그녀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똑똑.

두 번의 노크소리가 들리고서 오디와 베닌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미아는 오늘 저녁에 입을 옷들을 늘어놓고서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그녀들을 맞이했다.

??어서와. 힘들었지, 베닌?”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귀족이라는 사람들은 정말 피곤한 사람들이더군요.”

??그건 그렇지. 몇 백 년이 지나도 절대 변하지 않는 거라니까.”

베닌은 다시 의상 세팅을 감상하는 나미아를 쳐다보았다. 분명 이켈라인상회의 역사는 작은 상점에서부터 시작해 400년 정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런 사이에 회장이 바뀌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이켈라인상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오래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절대 바뀌지 않는 회장의 자리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

생물은 죽는다. 다만 그 차이가 다를 뿐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다른 유사종족들에 비해서 일찍 죽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후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뒤를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자신의 생애에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이 이루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후계자 분쟁 또한 이런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켈라인상회가 단일 상회로서 대륙의 절반의 상권을 가지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후계자 분쟁에 단 한번도 휩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회장인 나미아 이켈라인이 아직도 현역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미아가 자식도 없이 상회를 운영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곧 나미아가 늙어가기 시작하면 후계자 분쟁에 휘말려서 상회의 규모가 작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앞 다투어 나왔다. 그러나 100년이 지나고 200년이 지나도 나미아의 모습은 예전과 그대로였고, 나미아가 늙어서 상회가 갈라질 것이란 예상을 했던 사람들이 먼저 죽어버렸다.

이에 대한 많은 추측이 생겨났다. 나미아는 인간이 아니다, 마법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내린 사자다 등등 수많은 억측에 가까운 추측들이 뒤따랐고, 나미아는 그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가장 유력한 설은 나미아가 하프 엘프(Half Elf)일 것이라는 설이었다. 처음에는 엘프가 아닌가 싶은 추측도 있었지만 그녀의 성격이나 하는 행동은 엘프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종족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귀는 인간의 그것 같이 짧고 뭉툭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그들은 하프 엘프라는 설을 채택했고,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고 있었다.

현재 공공연한 비밀로 나미아는 하프 엘프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고, 베닌 역시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대로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니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나미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저… 회장님?”

??왜?”

??회장님은… 저기, 그러니까… 하프 엘프(Half Elf)이신가요?”

나미아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왜 그런 의문을 가지는지 특별히 캐물어볼 생각도 없던 그녀는 그냥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프 엘프? 그게 항간에 떠도는 말이야? 하긴, 엄마가 엘프(Elf)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가 제3문명기의 생존자이며 아웃사이더이고, 드래곤을 아빠로 둔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말에 베닌은 역시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엘프라는 말은 그녀에게 엘프의 피가 섞였다는 말이다. 그녀의 미모나 길고 긴 수명에 대한 의문이 이제야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미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종족을 가지고 멋대로 가지고 노는 쪽이 마음에 안 들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는 편이 더 나았다.

??오디, 오디도 파티 나갈 준비해. 그리고 베닌 너도.”

??예? 저도요?”

??넌 당분간은 내 수행원이잖아? 네가 안가면 어떻게 해?”

??하, 하지만… 전 옷도 없고…….”

베닌은 나미아와 오디에 비해서 볼품없는 자신을 보았다. 키도 작고, 얼굴도 그리 예쁜 편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나미아와 오디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었기에 그녀는 한사코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막무가내가 평소의 행동과 일맥상통하는 사람이었다.

??옷? 그렇구나. 오디! 마차 준비시켜! 지금부터 쇼핑이다! 조금 서두르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예에엣?! 하, 하지마안…….”

베닌의 목소리는 이미 나미아의 귀에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나미아는 벌써부터 베닌의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 눈길에 베닌은 흠칫 떨어야만 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레이라인은 나미아가 마치 먹이를 노리고 있는 고양이 같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무쪼록 희생양인 베닌이라는 사람에게 행운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영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새삼 지금의 상태가 편하다는 것을 느끼는 그녀였다.

렌디너스 왕실주최 파티는 오후 6시부터 열린다. 이번 파티의 목적은 왕자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하는 파티이기 때문에 각지에서 선물을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온다. 왕실에 잘 보여서 출세를 도모하는 사람이나, 이미 눈에 들어서 이미지 관리를 하는 사람이나, 혹은 파티에 참가한 다른 귀족들이나 유력가들과 잘 얽혀볼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렌디너스 각지에서 꾸역꾸역 몰려들면서 궁전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줄줄이 늘어선 마차들은 느릿느릿 앞으로 가고 있었다.

왕궁에 들어가는 길은 셋으로 나뉜다. 하나는 일반 손님들을 위한 마차도로, 하나는 경비대나 급한 일로 사용되는 마차와 도보를 겸한 도로, 그리고 특별손님을 위한 도로로 나뉜다. 세 번째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왕실의 권력과 가장 가까운 제1측근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숫자는 매우 적었다. 세력이 별로 없는 귀족들은 엄격한 심사 때문에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는 일반 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오디, 특별도로로 가라고 전해줘.”

??예, 알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일방적으로 통보만 보냈는데…….”

베닌은 나미아와 오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레이라인에 의해서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진 상태였다. 하얀 색에 레이스가 다단으로 들어가 있고, 전체적으로 반짝거리는 느낌을 주는 드레스에 공들여서 화장을 하고, 신경 써서 장신구를 착용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이켈라인상회의 경비직원이 아니라 어떤 귀족가의 규수처럼 보이기 딱 좋았다.

??괜찮아. 우린 당당하게 들어가면 되는 거야.”

나미아는 이미 꺼내두었던 옷으로 입은 채였다. 빨간색에 도발적이고 약간 선정적이기도 한 옷과 붉은 립스틱, 그리고 붉은 하이힐은 그녀 자체를 붉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만들어주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옷은 등 부분도 시원하게 파여져 있었고, 검은 끈을 꿰어 입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른쪽 허벅지는 매우 과감하게 트여져 있어 가터벨트가 보일 지경이었다.

??초대장이 오지는 않았지만 저희의 이름은 명부에 기재되어 있을 걸요.”

오디는 두 사람과는 다르게 단정한 복식이었다. 흰 블라우스에 스카프를 입고 그 위에 제복을 걸쳤다. 그리고서는 흰색의 바지를 입어 마치 의장용 군복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맞게 만들어져 있어 몸의 굴곡도 투박하긴 하지만 드러나 있었다. 허리에는 장식용 레이피어(Rapier)를 차고 있어서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위 역을 자처하고 나선 오디의 모습이었다.

레이라인은 영체가 된 이후부터 계속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설령 벗는다고 해도 남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나미아는 영체에 옷을 입히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예쁜 옷이 입혀지는 인형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하하, 제가 있으니까 그다지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도린은 매우 잘 어울리는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의 턱시도와 금줄로 이어둔 외눈안경은 매우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다도린의 경우 렌디너스 왕국에 있는 모든 이켈라인상회를 관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도로를 이용할 자격이 있었다.

마차가 궁전의 외성을 감싸는 성벽의 성문 앞에 도착하고서, 경비원의 검문이 시작되었다. 마부와 마차의 겉면을 살피고, 내부의 책임자를 만나서 명부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아, 여기…….”

??이켈라인상회의 회장 나미아 이켈라인입니다. 초대장은 없고요.”

다도린의 말을 중간에 끊고서 나미아가 경비원에게 살짝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눈에 확 뜨이는 미모에다가 매혹적인 미로를 보내오자 잠시 멍하니 있던 경비원은 이내 고개를 뒤흔들며 정신을 차리고서는 검문소의 명부 담당에게 말했다.

??이봐! 이켈라인상회의 회장이 기록되어 있나?!”

??에…. 아, 있어! 무조건 통과시키래!”

??알았어! 통과입니다. 즐거운 시간되시길.”

??감사합니다. 후훗.”

나미아는 경례를 하면서 문을 닫는 경비원에게 생긋 미소 지어주었다. 허둥지둥 닫히는 문 사이로 붉어진 경비원의 얼굴이 보였고, 마차는 이내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미아님. 그렇게 함부로 유혹하시면 안 돼요.”

??유혹 아니야. 친절이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문제지만. 그런데 초대장도 없이 잘도 들여보내준다. 아무리 내가 이켈라인상회의 회장이라고 해도 말이야. 보안이 엉망이네?”

??그렇다기보다도 감히 회장님을 누가 사칭하겠습니까? 그것도 왕궁을 들어오는 상황에서 말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을 회장님께서 가만히 둘지도 의문이군요.”

??후후훗. 당연히 난 그런 꼴 못 보지. 장소가 어디든 상관하지 않고 바로 쳐들어가서 가짜를 두들겨 패고 말지. 그런 일 여러 번 있었어. 하나같이 내 미모에는 못 미치는 자들이었지만. 오호홋.”

나미아는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는 오만한 웃음을 짓는 척을 했다. 나미아의 말에 마차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다도린은 경비원에게 주려던 초대장은 다시 주머니 속에 넣고서는 살짝 커튼을 걷어 바깥쪽을 보았다. 왕궁의 정원이 창밖으로 보이고 있었다.

??곧 있으면 대연회장이군요. 그런데 왕자님의 선물은 정말 그걸로 되겠습니까?”

??이거면 충분하지요. 이래 봬도 마법물품이니까요.”

나미아는 겉면을 벨벳으로 감싼 가로 1피트, 세로 4야드 길이의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왕자의 생일 선물이라고 챙긴 마법의 단검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막무가내로 쳐들어왔다고 해도 생일 파티를 나가는데 선물도 들고 가지 않으면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녀는 예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것은 행하는 성격이었다.

성문을 거쳐 한참을 들어간 마차는 대연회장의 입구 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제일 먼저 다도린과 오디가 내린 뒤에 베닌과 나미아를 에스코트하여 연회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다도린은 베닌을 대동하고 먼저 초대장을 제시한 뒤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미아는 오디를 뒤에 세우고는 똑바른 걸음걸이로 안을 향했다. 잔잔한 음악소리와 약간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목소리들이었다.

??이켈라인상회 데린너스 지부의 지부장이신 다도린 슈인님이 드십니다!”

나미아의 앞에서 먼저 다도린이 두 번의 소개호명과 함께 들어갔다. 나미아는 다도린과 베닌이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에서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소개호명과 손님확인을 담당하는 궁내부원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초대장은 없습니다만, 이켈라인상회의 회장 나미아 이켈라인과 총무 오디 이켈라인이 왔다고 해주시겠어요? 아마 명부에는 적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미아는 눈 꼬리를 살짝 내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명부를 담당한 궁내부원이 황급히 명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눈에 대지급으로 도착한 추가 손님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져 있었다. 초대장은 없지만 확실히 그녀는 이곳의 손님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개호명을 하는 궁내부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저, 정말이십니까?”

??초대장이 없으니 대접이 까다롭군요. 앞에 들어갔던 사람과 같은 마차를 타고 왔는데요? 이만 들여보내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궁내부원은 문을 세 번 두드렸고, 안쪽에서 문을 여는 궁내부원이 천천히 문을 열기 시작하자 큰 소리로 쩌렁쩌렁하게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게끔 외쳤다.

??이켈라인상회의 회장이신 나미아 이켈라인님과 총무, 오디 이켈라인님이 드십니다!”

나미아가 두 걸음을 더 걸었을 때 한 번의 호명이 더 있었고, 그녀가 다섯 걸음을 걸었을 때 세 번의 호명이 끝났다. 세 번의 호명을 받는 사람은 그야말로 일등급의 중요 인사임을 뜻한다. 게다가 이켈라인상회의 회장이라는 말에 연회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지며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미아에게로 향했다.

먼저 들어갔던 다도린이 자신에게 다가온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베닌과 함께 걸어가 매우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신원은 확실하게 밝혀졌다. 나미아는 살짝 목례하는 수준의 인사만으로 고고함을 내비쳤다. 그녀는 조용히 다도린에게 말했다.

??이른 시간인데 사람이 많군.”

??예, 요즘의 풍속입니다.”

??뉴먼 백작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듣자하니 오늘은 약간 늦을 거라 하더군요.”

??알겠어. 그럼 편히 즐겨.”

??예, 뜻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다도린이 뒷걸음으로 두 걸음 물러나고서야 나미아에게 등을 보이는 것으로 인사치레는 끝났다. 그 뒤 나미아는 천천히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움직임에 따라 나는 발자국소리는 홀을 크게 울렸다.

연회장은 약식 왕좌가 있는 높은 계단식 단상이 북쪽 중앙에 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 너른 무도회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창가로는 음식을 먹거나 편히 쉴 수 있는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었다. 음악이 흐르기는 하지만 춤을 출시간은 아니라서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에 모여 있었다.

파격적인 의상에 예고 없는 등장은 귀족들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게다가 모든 여인들을 제압하는 빼어난 용모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지위였다.

이켈라인상회의 회장.

이 말이 가진 무게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일개 지부장인 다도린도 함부로 대할 사람이 되지 못하는데, 그 회장이라면야 오죽하겠는가? 전 대륙에 걸친 영향력 덕분에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이켈라인상회이다.

??오디, 어째 조용해졌네.”

??늘 있던 일이잖아요.”

??여러분은 늘 이런 일을 겪고 계셨어요?”

나미아와 오디 이외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레이라인은 옆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그녀들을 보았다. 귀족들은 놀라거나 혹은 나미아의 미모에 매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테이블로 걸어가면서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듯 들어 올렸다. 이 행위는 쓸데없는 시선은 보내지 말라는 무언의 거부 표시로 통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보내오던 시선 중 상당수가 거둬졌다. 그렇게 효과적으로 입을 가린 상태에서 나미아는 말했다.

??레이라인.”

??예?”

??이 중에서, 조심해야 될 사람들을 불러봐.”

??아, 예. 저기 오른쪽 끝에 있는 배불뚝이는 디켄 남작인데 직위답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곧 자작이 된다는 소식이에요. 관할 영지에서 금광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아무 탐욕스럽게 변한 사람이고, 저기 중간에 있는 파란 드레스는…….”

나미아는 힐끔힐끔 보는 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레이라인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레이라인은 귀족가에 흐르는 소문에서부터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까지 다양한 평가를 나미아에게 들려주었고, 나미아는 그것을 모두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나미아는 바깥쪽 열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와인을 한 잔 집어 들었고, 홀을 둘러보면서 레이라인의 설명을 계속 듣고 있었다. 오디는 나미아의 오른쪽 한 걸음 뒤에서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미아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향하고 있었다.

지적인 얼굴에 보통을 찾아볼 수 없는 하얀색 머리. 한번 접어서 클립으로 고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리까지 오는 머리 길이는 엄청나게 긴 머리임을 과시하고 있었다. 약간 두꺼운 듯한 옷감도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올 곳과 들어갈 곳이 확실하게 구분된 글래머러스(Glamourous)한 몸 형태는 나미아보다도 뛰어나 보였다.

그런 그녀들에게는 당연하게도 그 외모에 꼬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미아는 자신의 왼편에서 의상을 가다듬고 걸어오는 미청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레이라인의 설명이 들려왔다.

??아르엔 백작가의 장남인 데이간트 아르엔이에요. 난봉꾼으로 아주 유명하죠.”

레이라인의 서명이 끝나자 그 아르엔이라는 청년은 매우 우아하고 절도 있으면서도 시원한 동작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아르엔 백작가의 장남인 데이간트 아르엔이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켈라인상회의 회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우신 레이디께서 파티에 참여해주셔서 이곳도 한결 밝아지는 느낌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나미아 이켈라인입니다.”

나미아는 허리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그런 나미아를 데이간트는 천천히 훑어보았다. 여자로서 최상급의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잘만 꼬신다면 이켈라인상회의 권력까지 쥐게 되는 행운아가 되는 것이다.

??한데 파트너도 없이 오셨습니까? 뒤에 계신 분은 호위인 것 같군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저에게 파트너의 영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비단 이곳뿐만 아니라 저는 데린너스의 여러 명소들을 잘 알고 있고, 명사들과도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래 머무실 거라면 제가 안내를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나미아는 저 혀에 무엇을 발랐기에 저렇게 매끈거리는가 싶어 궁금해졌다. 입 안에서 혀를 잡아 빼서 살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시킨 나미아는 생긋 웃으면서 데이간트에게 말했다.

??능숙하신 언변이시군요.”

??이런. 나미아 씨의 말씀이니 어떤 말도 저에겐 천상의 목소리 같습니다.”

??실례지만 올해로 나이가…?”

??예, 올해로 갓 서른을 넘겼지요. 자랑은 아니지만 왕실 기사단의 4부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괜찮다면 저의 분대원들의 용맹스런 훈련 모습도 구경시켜드리고 싶군요.”

한마디를 물으면 몇 가지로 늘려서 답하는 데이간트를 보면서 나미아는 싫증을 느꼈다. 가지고 놀기에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미아는 미소 지은 채로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제 나이는 400을 넘은 이후로는 세 보지 않았답니다.”

??…예?”

??그래서 귀공 같은 사람은 질릴 대로 겪어보았지요. 제가 볼 때는 그 언변도 아직 어설프네요. 언감생심 엉뚱한 생각 품지 말고 당신의 말을 필요로 하는 머리 빈 규수들에게 가시는 편이 훨씬 더 즐거울 것입니다. 그리고 벌이 할퀴고 간 꽃잎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서른이나 되시고 반듯한 기반도 있으시면 슬슬 정신 차리셔야 할걸요.”

나미아의 표정은 말과는 다르지 않게 매우 상냥하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듣고 있는 데이간트에겐 뒬 곳이 쭈뼛 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었다. 나미아의 말이 잠시 멈추자 그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완전히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어, 저기…….”

그러나 나미아는 그가 마저 말하길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녀는 부채를 소리 나게 접고는 아까 인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즐거운 파티 되시길.”

??에… 아, 저…. 예에. 즐거운 파티 되시길.”

데이간트는 모래 씹은 표정으로 나미아에게서 멀어졌고, 나미아는 승리자의 웃음을 띠면서 와인을 머금었다. 레이라인은 정말로 세월이 연륜으로 쌓여 실력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실감했다. 나미아의 언변은 데이간트보다 몇 배나 더 능숙했던 것이다.

나미아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고는 표정을 굳히면서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이내 그녀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대로 된 사람은 없는 건가?”

??그런 사람들은 정시에나 되어야 올 거예요. 지금은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나 찾아올 그런 시간이거든요.”

??그래? 그럼 조금 늦게 나올 걸 그랬나?”

나미아가 슬쩍 눈길을 보낸 곳에서는 다도린이 서너 명의 사람들과 함께 한껏 열심히 웃으면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베닌은 그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질문이 들어오면 짤막하게 답하고 있는 중이었다. 표정 관리를 잘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당황해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나타났을 것이다.

??오디. 이 중에서 우리 상회와 관련 있는 사람들 있어?”

??예, 있어요. 다도린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들 계시네요.”

??뭐, 저 사람들이야 알아서 다도린이 소개시켜주겠지. 레이라인, 그 외에 건실하거나 성실한 그런 정말로 사람 없어?

??가면 한두 개쯤 덮어쓰지 않으면 귀족 일을 못하죠. 오히려 가식 없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요. 지금은 그냥 가만히 계시면서 오는 사람만 상대하시는 편이 좋아요. 여자가 스스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 경박한 행동이라는 거 아시죠?”

??물론이지. 경박하기보다도 값어치 떨어뜨리는 행동이지.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아니면 스스로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는 4세기 이전에도 상식이었어.”

나미아는 와인을 마저 삼키고는 빈 잔을 내려 두었다. 그러자 테이블 사이를 오가면서 끊임없이 청소를 하고 있던 궁내부원이 와서는 조용히 잔을 가져갔다. 나미아는 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서 새 잔을 들어 올렸다. 품질이 좋은 포도주를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아낌없이 내놓은 것을 보고 있으면 역시 왕실 주최의 파티구나 싶었다.

차려진 음식들도 괜찮았다. 요리사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연회식이니 만큼 일반 식당에서는 맛볼 수 없는 뛰어난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미아는 개인 접시에 고기 몇 점과 야채 몇 조각을 얹어두고서는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쓸 만한데 사람들은 영 쓸모가 없군.”

여기저기 시선을 보내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미아는 쓸데없는 사람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뒤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오디를 불렀다.

??오디.”

??예, 나미아님.”

??어중이떠중이들의 접근이 기분 나빠. 네 선에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오디는 살짝 앞으로 나와서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 방패막이가 되었다. 나미아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오디라는 장벽을 넘어 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나미아를 언어 공격으로 침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래서 나미아는 한결 편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나미아에게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전부 오디에게 가로막혀서 시도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끝나게 되었고, 나미아는 그런 사람들을 전부 무시하면서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은 전부 정복하겠다는 듯 조금씩 덜어서 붉은 입술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을 무렵, 나미아가 찾는 사람이 들어온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 내외와 자제분들 드십니다!”

같은 말이 한 번 더 반복되고서, 연회장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과 비앙키 뉴먼이라는 그녀의 아내, 그리고 레이라인의 동생들이라고 하는 두 명의 처녀와 한 명의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나미아는 포크를 입에 문 채로 뉴먼 백작을 보았다. 과연 레이라인과 많이 닮은 모습이었지만 조금 더 차가운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은연중에 발하는 압도적인 기운, 그리고 치켜 올라간 눈 꼬리와 싸늘한 미소를 띤 얼굴은 그녀가 들었던 대로다. 포크를 입에서 떼고 음식물을 삼킨 그녀는 레이라인에게 말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잘생긴 얼굴이네?”

??네, 저도 그것만큼은 인정하니까요.”

??확실하지?”

??예, 맞아요. 아버지와 그의 아내예요.”

제이슨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구분이 확실한 것을 보면서 나미아는 정말로 보고서 내용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한창 진행된 복수가 슬슬 끝나갈 시점이었다. 복수의 대상을 적으로 삼고 있는 자들과 동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재주는 비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미아는 다도린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때마침 다도린도 나미아에게 시선을 돌리다가 둘의 눈이 마주쳤고, 무언의 지시가 다도린에게 전해졌다. 다도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미아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뉴먼 백작과 다도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됐어. 알아서 오겠지. 모든 일은 뉴먼 백작과 만나보고서 진행시켜야겠지. 그런데, 레이라인. 정말로 복수는 바라지 않아?”

??예. 그냥 두 번 다시 저와 제가 살던 마을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해주시면 돼요.”

??좋아, 그럼 복수는 제외하지. 일단 내 눈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봐야겠어.”

나미아는 그렇게 말하며 왼손 약지와 오른손 약지에 낀 반지를 빼내었다. 오디가 눈을 동그랗게 끄는 것을 무시하고는 두개의 반지를 오디에게 건넸다.

??잃어버리지 마.”

??예.”

살짝 감았다 뜬 그녀의 홍채가 검붉어진다 싶더니 이내 원래의 선홍빛으로 되돌아왔다.

오디는 두개의 반지를 외투의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나미아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장신구들은 단순한 사치욕구를 충족시키는 저급한 용도의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 붙어 있는 장신구들은 그녀가 조절할 수 없는 힘을 억누르기 위한 봉인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통은 봉인구를 한 상태에서 평범한 사람과 같이 살아가지만 힘이 필요로 하는 경우 편의상 벗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각 장신구마다 봉인을 한 힘도 제각각 틀려서 모든 장신구를 풀게 되면 그녀의 모든 힘이 개방되는 것이다.

나미아는 연회장 전체를 한번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문자화된 형태도 아니고 색상화된 형태도 아니다. 사람들의 전신에서 보이는 일그러지는 기운이나 또는 머리 위로 슬쩍 떠오르는 생각들이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그녀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떤지 알 수 있다.

??어설픈 계획을 꾸미는 사람. 넘어가는 척하면서 도리어 속이려는 사람. 서로 모르고 있지만 이미 같이 밤을 보내기로 합의한 사람. 왕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려는 사람. 좀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 개인적 원한을 누르며 웃는 얼굴 되로 지독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 과연, 정말로 착하고 성실한 사람은 보이지 않아. 그나마 다도린과 베닌이 제일 낫군.”

나미아의 입술 끝은 기분 나쁘다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리 좋은 힘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뉴먼 백작이란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수많은 대화와 오고가는 가식 속에서 상대를 읽어내는 피곤한 짓보다도 이편이 더 편리하다.

오디는 조용히 말하는 나미아를 보면서 그녀와 자신의 주변으로 나미아의 압도적인 힘이 새나갈 수 없도록 마법 결계를 만들었다. 나미아의 힘이 가진 문제는 주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 그녀가 힘에 휘둘리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차라리 블러드 스폰 폼(Blood Spawn Form)으로 변신하는 쪽이 더 수월하다. 인간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그때는 제정신이고, 힘의 조절도 자유로워지니까.

??오디, 조금 심하잖아. 대마법결계(對魔法結界)에 대원소결계(對元素結界), 대이력결계(對異力結界)까지?”

??만일을 위한 조치예요. 이편이 더 편하실 텐데요?”

나미아는 자신과 오디를 둘러싼 3야드 영역에서 부자연스럽게 충돌하며 떠도는 마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미아의 능력 중에서 놀라운 것이 있다면 바로 마나를 볼 줄 아는 힘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어떤 마법이라도 약점을 간파해 곧장 해제시켜버릴 수도 있으며, 다른 마법사들보다도 훨씬 쉽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본신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마법을 별로 쓸 일이 없다. 마법은 주로 오디의 몫이었다.

그녀가 아이 오브 트루 마인드(Eye of true mind: 진실한 마음의 눈)에 이어 마나 아이(Mana Eye)까지 개방한 것은 혹시라도 뉴먼 백작의 카리스마가 마법물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문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로 주변을 장악하고 복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눌려왔던 사람이 카리스마를 발한다고 해서 과연 쉽게 될지 의문이다. 원래부터 그런 카리스마를 숨겨왔다면 말이 되겠지만, 그러기엔 그 웅크리고 있었던 세월이 꽤 길다.

이윽고 다도린이 뉴먼 백작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다도린은 생각보다 쉽게 일을 끝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고, 뉴먼 백작은 매우 아름다운 나미아의 용모에 놀라면서 그녀의 직위에 대해서 한층 더 놀라고 있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훨씬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아들과 어떻게 이어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게 남자들이란……. 언감생심 누굴 노리는 거야?”

나미아의 마음속에서 가소롭다는 생각이 절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게다가 나미아의 예상대로 그는 마법적인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대화하는 상대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어 자신의 말을 듣도록 만드는 아티팩트(Artifact)였다. 그녀는 그것이 뉴먼 백작의 목에 걸린 펜던트라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대충 판독을 끝내고 있을 때, 다도린과 뉴먼 백작이 바로 앞까지 왔다. 다도린은 먼저 뉴먼 백작을 나미아에게 소개했다.

??회장님. 이쪽은 저희 상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계시는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입니다. 백작님. 이분께서는 저희 상회의 회장이신 나미아 이켈라인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전설의 회장님을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미아는 내키지 않다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으면서 손을 내밀어 뉴먼 백작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뉴먼 백작 역시 흠 잡히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나미아의 손을 마주잡고는 두어 번 흔들었다.

둘의 인사가 끝나자 다도린은 오디에게도 같은 소개를 했다. 뉴먼 백작은 나미아와 오디 중에서 과연 누가 실세일지를 판단하느라 바삐 생각을 굴리고 있는 중이었다. 너무나도 훤히 보이는 그의 머릿속에 나미아는 피식 비웃고 싶은 심정을 꾸욱 눌러야만 했다.

이어진 인사는 뉴먼 백작의 아내와 아들, 딸들이었다. 나미아는 그들의 이름이 뭐라는 것만 듣고는 머릿속에서 싸악 지워버렸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특별히 볼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이 있었다면 뉴먼 백작의 혈통답지 않게 그 아들은 의외로 성실한 면이 보였다는 점이다.

나미아는 가족의 소개가 끝나자 천연덕스럽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백작님께는 따님이 한 분 더 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렇지요. 레이라인이라고 합니다.”

??근데 오늘 그 따님께서는 나오지 않으신 것 같군요.”

??딸아이가 몸이 좀 아파서……. 도저히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머나, 이런 좋은 파티에도 나오지 못한다니 가엾기도 해라. 괜찮다면 제가 좀 봐도 괜찮을까요?”

나미아는 그야말로 다른 이들을 걱정하는 순진한 사람의 얼굴을 하면서 뉴먼 백작을 대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에 다도린과 베닌은 표정관리를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미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접대용의 미소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먼 백작은 이켈라인상회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들어왔다. 그리고 그 회장이 하프 엘프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세상에 다시없을 용모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그 성격에 대한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단지 이켈라인상회가 벌이는 사회사업이 대부분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중 어디에도 의술에 조예가 있다는 말은 없었다.

??혹시 의술에 능하십니까?”

??아니요. 아니, 예. 의술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쌓아뒀지요. 하지만 제가 자신 있는 종목은 좀 다른 분야이거든요”

??다른 분야라면…?”

??마법이요. 제 혈통이 혈통인지라 마법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자부합니다. 따님이 걸리신 병이나 혹은 현재 상태의 원인까지 짚어내고 치료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나미아는 생긋 미소 지었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뉴먼 백작이 속에서 진땀이 나도록 이 위기를 어떻게 회피할까 고민하는 걸 전부 보고 있었다.

자신이 억지로 독약을 마시게 해 쓰러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래서 나미아는 더더욱 아무런 사심도, 흉계도 없다는 표정을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립한 뉴먼 백작이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제는 나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일부러 회장님께서 고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뉴먼 백작은 자신이 가진 아티팩트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나미아의 주변에 펼쳐진 대마법결계는 그 효력을 중화시켰고, 나미아는 그의 말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받을 수 없었다. 어차피 나미아가 가진 자체 마법 저항력으로만 따져도 마법의 영향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나미아는 그냥 그것에 당해주는 체했다.

??그래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딱히 뭐라 드릴 말은 없네요. 따님의 쾌유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식을 전해주면 제 딸도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뻔뻔한 뉴먼 백작의 말에 레이라인은 그의 앞으로 가서 분노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그녀의 분풀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 나미아는 형식적인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고, 중간 중간 뉴먼 백작은 아티팩트의 힘을 발동시켜 나미아에게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게끔 유도하고 있었지만 나미아는 더 이상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도 않은 채로 의아해하는 뉴먼 백작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며 속으로 실컷 비웃었다.

잠시간의 이야기 는 국왕 내외와 왕자가 등장하고서야 끝낼 수 있었다. 뉴먼의 신경이 단번에 왕족으로 쏠리는 것을 본 나미아는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고, 쌍방의 합의 하에 매우 원만한 대화의 중단이 이루어졌다.

그제야 나미아는 오디에게서 반지를 받아 양손에 낄 수 있었고, 왕족들에게로 움직이는 뉴먼 백작의 등을 보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목표에 성실하게 임하는 사람이긴 하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몰두한다. 게다가 은폐공작능력도 뛰어나 그가 저지른 불법적인 일은 대부분 그와는 관련 없는 곳에서 추적이 끊어진다. 이른바 도마뱀의 꼬리 끊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웬만한 사람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수중에 넣고 조종할 수 있으니 그의 계획이 추진되는 것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 일단 한번 만나기만 하면 알 수 없는 그의 기세에 눌려서 설득 당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들의 희생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레이라인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도구 이외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미아에게 그런 상대에게 보내줄 호의 따위는 항목에서 영원히 삭제되어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말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미아는 이것으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미아는 뒤를 돌아서 오디와 레이라인에게 말했다.

??당장 내일부터 일을 시작해보도록 할까?”

??내일부터요?”

??그럼… 언제까지 해결하실 수 있어요?”

나미아는 레이라인이 화색만면이 되어 물어오는 말에 잠시 생각했다. 시간은 약간 넉넉하게 잡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5일. 앞으로 5일 이내로 모든 것을 끝내겠어.”

나미아는 펼쳐들었던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사전 작업은 이걸로 끝이었다. 이제 그녀가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나미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개발한 개구쟁이의 그런 미소였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10일.

렌디너스 왕실의 최고 정점에 있는 렌디너스의 국왕 로렌드질리안 아이페사르 바이커스 3세는 아이리펜 대륙에서도 꽤 큰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귀족제가 존재하지 않는 제국과는 달리 세습제의 귀족들이 있는 이곳에서는 기득권이 대를 이어 왕가에 충성하는 식이기 때문에 한번 정권을 잡으면 대체적으로 수월하게 운영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많은 손님이 온다. 여러 나라에서 국경 간의 분쟁이나 외교적 마찰을 비롯해 수입과 수출의 세율을 의논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그를 알현하러 찾아온다. 대부분의 일은 왕인 그가 지시하여 끝나는 일이고, 그가 직접 칙령으로 강제적으로 해결할 일도 있다.

왕이 된 이후로 그에게는 많은 요청이 들어왔고, 그는 그것들 중에서 해결해도 될 것, 해결해야만 할 것, 해결하면 안 될 것, 해결 안 해도 될 것을 구분하여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국왕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맞게 실행하고 있었는데, 대체적으로 그건 옳은 판단들이었다.

왕이라는 직위에서 보기에 바이커스 3세는 폭군은 물론 아니었지만 성군의 자질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체질적으로 다른 이들 위에 서서 커다란 단체를 이끌 수 있는 운용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각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우스갯소리 삼아서 그에게 정군(正君)이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한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신껏 한 나라를 이끌고 몇 억의 인구를 조율하는 역할은 쉽지 않은 것이다. 왕 역시 사람이기에 편애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고, 최대한 그것을 줄이고는 있지만 그와 생각이 맞는 신하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찬동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찬동한다는 전제 하에 과연 그것을 듣지 않았을 경우 닥칠 불이익이 얼마 정도일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해줄 거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생각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나미아 누님. 정말로 너무하십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경우도 없이…….”

??얼씨구. 머리 위에 좀 비싼 게 올라가 있다고 지금 개기냐? 네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네 아버지 부탁을 받아 심심찮게 도와줬거늘, 이제 와서 열네댓 번은 쌓인 네 목숨값 중 하나도 갚지 못하겠단 말이야?”

나미아는 자신이 즐겨 입는 평상복 차림으로 바이커스 3세와 독대(獨對)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 특히 충직한 신하나 왕실 근위대가 본다면 눈을 까뒤집으면서 “불충하다!”라는 말과 함께 칼이든 창이든 꼬나 쥐고 차지(Charge)를 걸어올 언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님. 뉴먼 백작은 이 나라에 매우 필요한 인재입니다. 그런 그를 몰락시키겠다니요?”

??몰락이 아냐. 난 단지 그가 받을 당연한 인과를 조금 앞당기겠다고 했어. 아마도 그가 여태까지 벌인 일에 대해서 생각했을 때, 그의 파멸이 확실하지만.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사람 보는 눈도 없어졌구나? 나 같으면 뉴먼 백작 같은 사람은 여기 궁전에 한가득 담아줘도 안 가진다. 내가 언제 사람 잘못 본 일이라도 있니?”

나미아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타이르듯 바이커스 3세에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65년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기에 바이커스 3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분명 나미아의 말은 사실이다. 나미아의 사람 보는 눈은 왕이 되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자신과는 수준이 다를 정도였다. 그녀는 작은 행동만으로도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다.

나미아는 고민하고 있는 바이커스 3세에게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본인으로서도 꽤나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는 코흘리개 어린 동생이겠지만 저렇게 보여도 일국의 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아, 맞아. 네 아들 녀석 있잖아. 만나걸랑 머리통은 두 세 대만 쥐어박아 줘라.”

??예? 그 아이가 무슨 실례라도 저질렀습니까?”

??내가 웬만해선 그런 자리에서는 춤 안 추는데, 엄연히 파티의 주인공이잖아? 그래서 못이기는 척 댄스 요청에 응해줬지. 그런데 춤을 추면서 이 녀석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당신의 재력과 나의 권력이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떠하십니까? 저와 함께 이 나라를 다스려보는 것은???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녀석이 했던 말 너랑 어째 그렇게 똑같으냐? 하여튼 부자가 대대로 참 멋진 말하고 있더라.”

??그, 그랬습니까…?”

바이커스 3세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은 사랑하는 왕비도 있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부족하지 않게 대하고 있지만 그런 그도 과거에는 나미아에게 청혼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나미아는 아주 기막힌 말로 그 말을 거절했었다.

“그래, 그래서 너한테 했던 말 한 번 더했지. ”그 말, 현 제국의 황제한테 80년쯤 전에 들었다. 정신 차려라. 꼬맹이.?? 네가 청혼했을 때는 아마 30년쯤 전에 들었다고 했을 거야. 하여튼 왜 이렇게 나하고 결혼 못해서 안달난 사람이 많을까? 돈 많으면 편하긴 해도 이런 건 참 싫단 말이야.”

??하하하…. 애가 좀 어려서 그렇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참에 제가 말해두지요.”

??그래, 그렇게 해. 하지만 그 애가 왕이 되었을 때 내가 도와줄지에 대해선 별개의 문제라는 걸 알아둬. 난 렌디너스 왕국 하나만 보고 장사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알고 있겠지?”

??예, 물론이지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 아들 녀석은 그래도 꽤 분별력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님께 청혼을 한 것도 그 분별력의 발휘 때문이죠. 나라가 강력해지는 방법으로 택한 것일 겁니다.”

일국의 왕이라도 한 아이의 아버지인 이상 자식 자랑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그 정도는 봐주기로 하고서 훨씬 완화된 분위기에서 그녀가 꺼낸 말을 다시금 밀어붙여보기로 했다.

??자아!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요청, 어떻게 해줄 거야?”

??휴우…. 별수 없군요. 누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신다면 옳은 일이겠죠. 알겠습니다. 누님께서 말씀하신 것만큼만 하겠습니다.”

??고마워, 아이페. 내 귀여운 의동생.”

나미아는 어릴 때의 애칭으로 바이커스 3세를 부르며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은 믿는 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이제는 훌쩍 커버려서 더 이상 귀엽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미아는 그를 끝까지 어린 날의 아이페로 대하고 있었다. 바이커스 3세에게 그것만큼은 변함이 없는 일이었다.

바이커스 3세는 기왕 이렇게 된 것 예전의 아이페로 되돌아간 기분으로 나미아에게 투정부리듯 말했다.

??귀엽다니, 그 말은 좀 듣기 뭐합니다. 의젓해졌다고 하면 안 되나요?”

??파하하핫! 글쎄? 네가 죽기 전에는 한 번쯤 들을 날이 있겠지. 그럼 이만 간다. 즐거웠어! 다음에는 편한 자리에서 식사라도 하자.”

??예,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일은 부디 조용히 처리해주세요.”

??귀여운 의동생의 나라인걸! 내가 그렇게 큰 소란을 피울 리가 없잖아? 다시 만날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

말을 마친 나미아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신출귀몰하게 나타나서는 거침없이 사라진다. 마치 바람 위에 얹혀진 불꽃 같이 이리 번뜩 저리 번뜩 하는 것 같았다. 바이커스 3세가 어릴 때는 그런 모습의 나미아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한 그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작게 웃었다.

손을 떼었을 때 그는 아이페가 아닌 바이커스 3세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미아가 제시한 제안과 그것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물밑 작업은 몰래 벌여야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표정 위로는 잠깐이지만 장난을 벌이려는 아이페가 머물렀었다. 지루한 왕궁 생활에서 떠들썩한 사건은 그만큼의 유희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나미아의 물밑 작업은 거의 완료되었다. 남은 것은 레이라인을 해방하기 위한 실행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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