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uest. 02: 보이지 않는 손님.-Part1: 영체 레이라인. (8/49)

Guest. 02: 보이지 않는 손님.

Part1: 영체 레이라인.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5일.

여름이 시작되자 슬슬 기온이 올라가고 있었다. 나무들이나 풀들의 푸름은 한결 더해지고, 나다니는 사람들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소매가 짧아지면서 노출되는 부위도 약간씩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여름이 가깝긴 한 것 같다.

첫 특별손님을 보낸 후 “WISH”에는 별다른 특별손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나미아는 지하실에서 열심히 그릇을 만들다가 책을 들고 테라스로 나와 각종 티와 함께 망중한(忙中閑)을 즐겼고, 오디는 취미인 원예를 더욱 갈고 닦고 있었다.

정원에서 자라는 큰 호두나무와 각종 허브들, 그리고 꽃들은 여름을 준비하면서 부쩍부쩍 크기 시작해 잎사귀도 무성해지고, 색도 한층 살아나고 있었다. 이게 다 그 주인이 잘 보살피기 때문일 것이리라. 사나흘 정도의 망중한을 보낸 나미아는 슬슬 그릇 만들기도 실력이 붙어가면서 즐거운 기분이었다. 오늘은 때마침 만들고 싶던 그릇의 모양내기에 성공해서 매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1층에서 4층까지의 여관업은 성업 중이었다. 나미아와 오디는 자신들이 만들어두고서도 그 시스템이 알아서 잘 돌아가는 상황이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다.

한스가 돌아가고 나서는 직원들에게 첫 월급도 주었고, 결산 장부에는 흑자로 기록되어 나미아의 기분도 매우 상승되어 있었다. 기분이 너무나도 좋은 그녀는 오디가 시장을 보러나간 사이에 매우 기특한 일을 하기로 했다. 빗자루를 들고 뒤뜰로 나간 것이다.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빗자루를 움직여 여관 뒤뜰에서 직원 숙소 건물까지 놓아둔 포석의 표면을 잘 쓸어내고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정원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은은한 미소와 함께 빗자루를 움직이는 붉은 머리 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오디를 놀래게 만들었다.

??어머? 나미아님?”

??오디! 어서와.”

??어쩐 일이세요? 갑자기.”

??응? 아니. 그냥 왠지 기분이 좋아서. 좋은 일도 좀 해보려고.”

오디는 두툼한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서는 별일 다 본다는 식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미아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열심히 빗자루를 움직였고, 오디는 자신을 지나쳐가면서 다시 부르기 시작한 콧노래 소리와 나미아의 매우 너그러운 듯한 미소에 불현듯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여관의 뒷문에서 나오고 있는 한 여성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직원이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직원 교육이 저렇게나 좋지 않았던가 생각하던 오디는 나미아가 자신의 시선을 따라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오늘은 대대적인 직원 정신교육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나미아는 오디가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울 정도의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뭔가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나미아는 해맑은 웃음과 깨끗한 목소리로 그 여자에게 인사했고, 문 앞에서 주춤거리던 여자는 조심스럽게 뒤뜰로 내려왔다.

상체는 딱 달라붙고 하체는 시원스럽게 뻗은 긴 원피스를 입고서 가슴에는 푸른색 브로치를, 머리는 정갈하게 다듬은 듯한 티가 역력하게 나는 포니테일(Pont Tail)이었다. 옷 색깔에 맞춰서 흰색 샌들에 빨간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들어오는 손님의 모습은 영락없는 귀족이나 부잣집 처녀의 모습이었다.

나미아는 손님이 앞에까지 오길 기다렸다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희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찾고 계시나요?”

“저기, 그러니까…… 여관의 주인을 찾고 있어요. ”환상여관??이라는 글자를 읽고 왔는데요.”

나미아의 눈이 번뜩였다. 한스가 간 지 사흘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두 번째 손님이 온 것이다. 나미아는 더더욱 해맑은 웃음으로, 이보다 더 밝을 순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잘 오셨어요. 제가 이 여관의 마스터입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저, 정말이세요?”

??네. 전 거짓말은 안 해요.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오디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나미아의 말에 잠시 심각하게 과거의 시간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시작했다.

손님인 여성은 잠시 불안해하다 나미아의 미소가 신뢰를 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뒤에서 고민하는 오디의 표정에는 신경 안 쓰는 편이 좋다. 어쨌든 그녀는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단숨에 내지르듯 외쳤다.

??저, 절 살려주세요!”

??하아?”

오디는 하마터면 봉투를 떨어뜨릴 뻔했다.

나미아는 기묘하게 입을 벌린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그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듯 펼쳤다. 자신을 살려달라는 이상한 말을 한 여자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면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미아는 연속적으로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힐(Heal). 리커버리(Recovery). 큐어 디지즈(Cure disease). 리무브 포이즌(Remove posion). 리저렉….”

각종 치유마법의 세트라도 할 수 있는 마법들이 나미아의 손에서 뻗어져 나왔고, 오디는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확실히 살려달라는 요구에 부합하는 마법조합이긴 한데……. 그러다가 그녀는 마지막에 나오는 마법의 이름을 듣고는 기겁해서는 나미아의 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그런 걸 산 사람한테 쓰면 어떻게 해요?!”

오디는 필사적으로 나미아의 마법을 중단시켰고, 당황한 손님의 주위로 피어난 하얀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정 확률로 죽은 자를 살려낼 수도 있는 주문인 리저렉션(Resurrection)은 산 사람에게 쓰면 그 효과가 반대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일정 확률로 죽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오디의 필사적인 개입에 힘입어 나미아는 리저렉션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실패하였고, 손님은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었다.

??에? 에?”

??에… 그러니까…….”

나미아는 자신의 손을 보다가 죽을 위기가 닥쳤던 것을 모르고 있는 눈앞의 손님을 보았다. 더 이상의 혼란을 피하고 싶어진 나미아는 빗자루를 던지듯이 오디에게 맡기며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용무가 끝났다는 듯 딱딱하게 말했다.

??치료 끝. 살려줬죠? 요금은 공짜로 해주죠. 그럼 이만.”

??자, 잠깐만요! 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나미아는 그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형체를 뚜렷했지만 그녀에게는 존재하는 매우 특이한 개성이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한 명암(明暗). 그림자라고도 부르는 것은 광량이 어지간히 낮지 않는 이상 조막만 한 빛이라도 있으면 그 빛의 반향으로 생기게 된다. 그것은 사람의 몸에도 마찬가지인데, 광원(光源)이 어디냐에 따라서 그림자 역시 다양하게 생긴다. 특히 옷을 입으면 더더욱 그 그림자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한데 자신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 앞면이든 뒷면이든 위든 아래든 어디든 그림자 한 점 없었다.

나미아는 아까보다는 훨씬 생동감 있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에엑?! 그림자 어디에 갖다 팔았어요? 전당포? 경매장?”

??그러니까! 저는 지금 살아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오디는 약간 질린 표정으로 손을 뻗어서 그녀를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오디의 손은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쑤욱 들어가버렸다. 오디의 손이 들어간 그 주위로 둥그런 파문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손을 꺼내서 냄새를 맡아본 오디는 즉각 손님의 상태를 판별할 수 있었다.

??저, 나미아님. 이분은… 영체(靈體) 같은 데요?”

나미아는 흰 원피스의 손님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자신조차도 자신의 상태가 익숙하지 않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뒤에 지나가는 직원들을 보면 그녀의 모습은 자기들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손님에게만 반응하는 여관의 간판 때문이 아닐까 나미아는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카르마로 엮어져서 자신들에게 온 사람의 영체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인다는 말이다. 아마도 여관 밖으로 나가면 자신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하아, 이거 보이지 않는 손님이라니. 이래 가지곤 종업원들도 접대를 할 수가 없잖아?”

나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체 치고는 약간 생동감이 있었고, 죽은 사람 특유의 한기라든가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유령은 아니지만 뭔가 다른 복잡한 사연을 달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굴려 생각하다가 자신에게는 손님을 거부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거 참 복잡한 손님이네? 에휴, 하는 수 없지. 손님, 들어오세요. 오디, 빗자루 두고 너도 들어와.”

나미아는 가게 문을 열고서 그대로 들어갔고, 흰 원피스의 손님은 쭈뼛거리면서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디는 빗자루를 뒷문의 문간에 기대어 세워두고는 봉투의 내용물이 흘러나오지 않게끔 조심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영체까지 손님으로 오네? 너무 계층이 다양한 것 아냐?

??먼저 이름하고 사는 곳부터 말해봐요.”

??저는 레이라인 라이나 뉴먼이라고 해요. 사는 곳은 데린너스고요.”

레이라인은 자리에 나미아가 권한 의자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앉았다. 그것을 본 나미아는 점점 눈앞의 존재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대개 영체의 상태라면 반투명해야 정상이 아닌가 싶은 편견에 가까운 생각도 들었다. 사실 영체를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미아는 뭔가 음식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레이라인의 상태를 생각해내고는 다급히 생각을 바꿔 물었다.

??으음…. 먹고 마시는 일은 필요 없죠?”

??아, 예. 사실 벽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는데, 이곳은 특이하네요.”

??여기가 좀 특별한 장소니까요. 알고 오셨을 텐데요?”

??그래요. 사실 소문을 들었을 때는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싶었는데, 정말 이런 곳이 있기는 하군요.”

나미아는 레이라인의 말을 단순한 감탄으로 받아들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쁘게 들으면 여관에 대한 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이라고 치부했다.

??여기 차 가져왔어요. 그런데 손님은 정말 괜찮겠어요?”

??아, 괜찮아요. 이래 봬도 아무것도 안 먹은 지 4주가 넘었으니까요.”

??그럼 필요하실 때 얼마든지 이야기하세요.”

오디는 나미아가 마실 것만을 내려놓고서는 나미아의 뒤에 섰다. 나미아는 머그 컵(Mug Cup) 위를 가득히 덮은 휘핑크림을 보면서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라인은 잠시 머그 컵에 집중하는 나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인 자신이 볼 때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였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와 장신구들도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머뭇거렸던 것은 나미아가 너무나 즐겁게 청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성이 즐겁게 뭔가 하고 있는데 그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미아가 문득 눈을 들어 레이라인을 보았을 때, 그녀는 나미아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응, 왜 그래요?”

??예? 아, 아니에요…….”

??왜 그런데요? 말씀해보세요.”

??저, 저기…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풉!”

나미아는 그만 커피를 내뿜고 말았다. 오디는 이미 여러 번 있는 일이라는 듯 침착하게 행주를 가져와서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고, 나미아는 한참 동안 캘록거려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새빨개진 얼굴을 숙이고 있는 레이라인에게 말했다.

??저기, 콜록! 난 동성연애에는 관심 없어요.”

??에엣?! 그,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발끈하면서 화를 내는 레이라인을 보며 나미아는 자신의 용모가 정말 쓸데없는 일만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제 3 문명기에 죽은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예쁘게 자랄 수 있게 해준 지금의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에휴, 절세의 용모도 남녀 가리지 않고 반하면 귀찮기만 하다니까.”

??본인의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왜? 장점이잖아? 장점을 알고 있으면 이용할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으면 가끔 피곤해진다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오디는 샐쭉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닦아내고서는 나미아의 커피 잔을 들고서 새 커피를 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레이라인은 그런 오디를 보면서도 황홀함에 가까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기, 두 분은 어떤 관계세요?”

??응? 여관 주인과 관리인, 몇 백 년 동안 같이 해온 친구, 주인님과 애완 고양이, 상회의 주인과 총무, 아주 멋지고 자상하고 착한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두 명의 자매. 개인적으로 마지막 것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에?”

레이라인은 도중에 나온 몇 백 년이란 숫자나 “애완 고양이”라는 대목에서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미아는 담담한 사실을 이야기한 것 같았는데 그녀가 그것을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나미아는 듣는 상대의 이해력은 따지지 않기 때문에 멍한 표정의 레이라인을 보고는 그녀를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고 의뢰를 받기로 했다.

??이제 슬슬 사정을 들어볼까요?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영체 상태가 되어서는 떠돌고 있어요? 게다가 이름하고 사는 곳을 듣자하니 렌디너스 왕국의 귀족 같은데요?”

??예, 예에…. 저는 제이슨 하이윈 뉴먼 백작의 첫째 딸이에요.”

나미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인데 그다지 정감 있게 들리는 말은 아니었다. 마치 아버지의 이름을 무슨 식당이나 상점의 이름을 대는 것 같이 말하는 것으로 들렸다. 레이라인은 그런 나미아를 보면서 살포시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가 좀 이상하죠? 사실 저는 첫째이긴 한데… 진짜 첫째는 아니에요.”

??아아, 알겠어요. 정실이 아니라는 소리군요?”

??예. 저희 어머니는 그러니까… 귀족가(貴族家) 잘난 아들의 불쏘시개 상대였죠.”

레이라인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미아는 오디가 새로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우는 옛날부터 많았다. 최근은 조금 사라진 것 같았지만 아직도 그런 경우의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에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역력했다.

??저는 그냥 변경의 마을에서 보통의 소녀로, 처녀로 자랐어요. 스무 살 되던 해에 갑자기 아버지라는 작자가 와서는 저를 데려갔죠. 외모가 워낙 곱상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아버지인줄 몰랐어요. 갑자기 찾아온 그 사람은 어머니에게는 큰돈을 던져주고는 억지로 저를 끌고 왔죠. 어머니는 힘없이 무력하게 끌려가는 딸을 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다음은 짐작하겠어요. 사교계(社交界)에 데뷔하게 되었죠? 그 백작인지 뭔지 하는 인간은 사교계의 화제가 되어 다시금 뛰어오를 생각으로 당신을 데려 온 것이고요.”

??정확하세요. 저는 완전히 한 벌의 드레스 같은 역할이었어요. 저희 어머니는 마을에서도 소문난 미녀였는데, 제가 어머니를 쏙 빼닮았죠. 도시에서도 저에게 추근덕거리는 남자는 많았어요.”

나미아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난 여자들은 어딘지 모르게 천박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많지만 대개는 도시의 험악한―시골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기 속에 노출되고, 귀족들 사이에서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얼굴 위로 가면 한두 겹 정도는 씌워지게 마련이다.

그런 반면에 공기 좋고 인심 좋은 곳에서 살다온 레이라인은 그야말로 가면 따위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이미지 그대로이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아버지의 혈통도 어느 정도 미모 구축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이니 사교계에 데뷔하면 매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어요. 처음 1년간은 각종 예법을 배우느라 눈코 뜰 새 없었고, 사교계에 데뷔해서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서 추파를 받아도 적당히 응대하고 절대 확답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사이에 아버지는 저를 빌미로 여러 가지 일을 꾸미셨고, 당신이 말하는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죠.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짐작하실 수 있나요?”

??흐음, 남은 일이라고는 유력(有力) 가문의 자제와 혼사를 상담해야겠군요. 또는 유력 가문의 가주(家主) 그 자체. 아무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세력과의 결합을 추진하겠죠.”

??맞아요. 그게 1년 전의 일이에요. 전 그때까지 제 인생을 포기하고 있었어요. 혼담이 오가는 상대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죠. 제가 여기서 반발이라도 하다가는 어머니에게 해가 갈 것이고, 아버지의 권력이 강해져서 제 고향에 어떤 해가 갈지 몰랐어요. 그래서 제 한 몸 희생해서 평화가 지켜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런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와의 혼담이 오가던 사람은 건실하다고 소문이 난 후작의 아들이었다. 그런 상대인 만큼 자신을 잘 대해줄 것 같았고, 사정을 이야기하면 최대한 아버지와 만나지 않게 해줄 것 같았다.

??지금 제 나이는 서른이에요. 한창 결혼 적령기죠. 제가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제가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자신을 위해 사교계에 나가길 바랐지만 혼담이 진행되고 그쪽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전 그렇게 팔려가게 될 운명에 처해 있었죠. 결혼 날짜도 잡혔어요. 그게 4개월 전이에요. 하지만… 지금 저는 미혼이랍니다.”

??응?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예. 상대 남자가 갑자기 사망해버린 거예요. 사냥에 나갔다가 뱀에 물리는 바람에 응급조치도 할 새 없이 급사(急死)했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결혼식은 취소되었고, 제 가치는 사교계에서 뚝 떨어졌죠. 약혼까지는 파혼이 되어도 괜찮지만 결혼식 날짜까지 잡혔다가 취소된 여자는 그리 좋은 시선을 받지 못해요. 설령 그 원인이 남자의 사망이라고 해도 말이죠.”

레이라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미아는 갑자기 필요 없는 물건 신세가 된 그녀의 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다시 또 최악의 전재가 벌어진 것이다.

??저는 제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알 수 있었어요. 제가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간청했죠. 이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하지만 그는 화를 냈어요. 최후의 최후까지 저를 써먹을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정말 눈물로 하소연했어요. 고향에는 제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고, 절 사랑해주는 남자도 있어요. 제 인생이 모두 그곳에 있는데 그는 저를 도시에서 말려죽일 작정이에요. 저는 팔려가듯이 어떤 부호의 첩으로 시집가게 될 운명이었어요.”

??저런…….”

??저는 정말 여태까지 하지 않았던 반항을 시도했어요. 그 부호와 만나던 날에 저는 아낌없이 그를 모욕하고, 일부러 실례를 저질렀어요. 당연히 파혼이었죠.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고, 제게 독약을 먹였어요.”

??예, 예엣?! 뭐 그런 아버지가 다 있어!”

탕!

나미아는 커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화를 내었다. 핏줄이라는 자각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것은 물건 이하의 취급이었다. 아끼는 물건이라면 이런 식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나미아는 씩씩 화를 내면서 아직 끝나지 않은 레이라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정신을 잃고 나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런 모습이었어요. 아무도 제 모습을 보지 못했죠. 저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한참을 울었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를 찾았죠. 그 작자는…! 저를 자연사로 위장해 죽일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장례를 치르고, 이것을 빌미로 최소 1년간은 자신의 입지를 또 펼칠 수 있다고 자랑스럽게 부인과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도저히, 도저히 인간 같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이렇게 죽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서 저는 사교계에서 주워들은 소문을 따라 이곳으로 온 거예요. 오는 동안 아무도 절 보지 못했는데… 여러분은 절 볼 수 있었어요.”

??저… 그런데 육체는 아직 살아 있나요?”

??아, 예. 첫 번째 약혼 상대가 왕실의 핏줄이었기 때문에 절 예쁘게 봐주시던 그 집의 안주인께서 어전 의사를 보내왔거든요. 어전 의사는 제가 독을 마셨다는, 쉽게 말해 자살기도를 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는 계속해서 치료하러 다니고 있어요. 그 덕분에 그 아버지란 작자가 손을 못 쓰게 되었어요. 덕분에 제 육체는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어요.”

그래도 아직 육체가 살아 있다는 말에 나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어 있는 영혼의 의뢰라면 의뢰비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몇 백 년간 상회일로, 그녀는 뼛속까지 장사치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카운슬러의 모습에서 클라이언트의 호출을 받는 호스트의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깍지 낀 손을 팔걸이에 얹고는 말했다.

??자아, 어쨌든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찾아오신 당신은 행운아예요. 저희 소원의 여관에서는 그 어떤 소원이라도 고객의 희망대로 이루어드립니다. 그럼 손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부활? 유혈이 낭자한 복수? 그 백작이란 작자에게 재기불능의 피해를 주는 것?”

레이라인은 갑자기 사무적으로 바뀐 나미아의 태도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그것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또 다른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했던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말했다.

??절 살려주세요. 그리고 제가 살던 고향으로 보내주세요. 제 아버지가 제 고향에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게 해주세요. 전 제 고향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에에? 고작 그거예요? 복수는? 신나고 통쾌하면서 상대의 타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거예요? 설마 본 여관의 능력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으음…. 물론 그건 아니에요. 두 분이 절 보실 수 있다는 것부터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제 아버지에게 언젠가 내려질 천벌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면 언젠가 벌을 받을 것이 분명해요. 저는 그 일에 저 자신과 제 고향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인이 복수를 거절한 이유는 그녀가 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예 모른 체하겠다는 소리였다. 관계를 완전히 끊고서 그가 파멸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말이었다.

자신이었더라면 그런 상대는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야금야금 그의 기반을 갉아먹은 다음에 커다란 일격으로 후려쳐서 산산조각 내고 흩어진 조각을 꼼꼼하게 밟아 부숴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게끔 마음까지도 짓밟을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원하는 바가 틀리기 때문에 나미아 같은 경우는 철저한 복수를 꿈꾸는 것이고, 레이라인은 자신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것이다.

??좋아요. 그 의뢰, 받아들이도록 할게요. 그런데 요금 체계는 알고 오셨나요?”

??예? 요금이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요?”

??뭐, 지금 유체의 상태이시니까 숙박비하고 음식값은 지불하지 않으셔도 되겠네요. 아, 여기선 실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숙박비는 받아야 하나? 아무튼, 저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군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데 공짜일 리가 없죠. 왠지 처음부터 골수상인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어요.”

??푸엣?!”

레이라인의 솔직한 감상에 나미아는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분명 자신이 대륙의 상권의 큰손 중 하나인 이켈라인상회의 총수라고는 해도 골수상인이라는 어찌 보면 솔직한 감상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평가 중에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돈벌레”였다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테이블을 잡아서 떨어지는 것을 막은 나미아는 헛기침을 하면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오디는 그녀의 뒤에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쟁반을 입가까지 들어 올렸고, 레이라인은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다시 자세를 잡은 나미아는 이미 망가진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서, 가격책정은 어디까지나 저희의 마음입니다. 수고비로 생각하셔도 좋고, 인생 고치는 값으로 봐도 상관없어요. 가격은 일만 펜입니다.”

??예에?!”

레이라인의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미아는 한스 때처럼 자신의 의도대로 되려나 싶어서 생긋 미소 지었다. 한스 같은 경우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기에 일부러 높은 가격을 부른 다음 그것을 차감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그다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레이라인이 직접 움직이는 부분을 추가해서 오천 펜 정도로 차감하면 괜찮겠다 싶은 생각을 하던 나미아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오히려 그녀가 경악해버렸다.

??그거밖에 안 돼요?”

??에…?”

??휴우, 다행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나름대로 챙겨둔 패물이나 여러 현물이 오만 펜 정도인데 그걸로 처리 할 수 없으면 어쩌나 싶었어요. 정말 일만 펜이면 되는 거죠?”

??아, 네에…….”

이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나미아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레이라인을 보면서 형식적인 웃음으로 입술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오디는 입을 막고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7일.

힐텐펜스에서 데린너스까지는 비공정을 타면 길어야 하루였고, 마차를 이용할 시에는 일주일, 철도를 이용하면 3일 거리였다. 나미아는 그 세 개의 교통수단 중에서 어느 것을 탈지 고민하기 위해서 하루의 시간을 소모했다.

오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쓸데없는 고민으로 보낸 무가치한 하루”였지만 나미아는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의뢰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시작부터 철저하게 나가야만 한다―를 들어서 그 시간을 “매우 유용한 하루”로 정의했다. 옆에서 보는 레이라인으로서는 속이 탈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지만 나미아는 그런 그녀의 생각을 과감하게 무시했다. “의뢰인을 무시하면 어떻게 해요”?라는 오디의 발언 역시 무시했다.

결국 그녀가 택한 수단은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이동 수단인 철도(鐵道)였다.

아우레스력 1625년, 안스란력 185년에 공사를 시작한 새로운 운송수단인 “철도”는 과학과 마법의 일체로 만들어진 매우 훌륭한 육상 운송수단이었다. 약 1세기 전에 만들어진 비공정보다도 더 많은 물류를 운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발명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철도는 현재 아이리펜 대륙의 중요 지역을 모두 잇고 있고, 점차적으로 민간에 확산, 현재는 대중적 교통수단 중에서는 고급에 속하는 수단이었다.

아이리펜 대륙은 아우레스력 1500년 부근에서 여러 가지 급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과학과 마법, 각종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는데, 그중 극치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이 이 철도와 비공정이다.

레일(Rail) 위를 달리기 때문에 갈 수 있는 장소의 제약이 따른다는 약점이 있지만 마차나 도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와 안전성을 자랑한다. 그리고 주변 경관을 보면서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은 너무나도 큰 요소이다. 나미아는 그런 점에서 철도를 이동수단으로 꼽았고, 오디는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단지 관광하고 싶은 거라고 솔직하게 말하시면 어디가 덧나나요.”

??응!”

이쯤 되면 아무리 오디라도 말할 기운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레이라인은 여관에 사용된 각종 마법이 작동하는 지역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나미아와 오디의 눈에마저 희미하게 보이는 형태가 되고 말했다. 그것은 나미아는 간단하게 “유령”이라고 칭해서 한때 그녀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오디가 사용한 마법 덕분에 나미아와 오디의 눈에만 원래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다른 이들, 특히 무임승차에 대해서 알레르기 비슷한 반응을 일으켜야 할 차장의 눈에마저 보이지 않고 있다.

객실의 옆으로 차장이 지나가고서, 나미아는 양팔을 펼쳐 푹신한 소파에 폭삭 몸을 기대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약간의 지루함과 상당량의 안락함이 배어 있었다. 오디는 그런 나미아를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데린너스까지 가셔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 가서 상태를 봐야겠지. 레이라인의 원래 몸 상태와 그 뉴먼 백작이라는 작자를 말이야.”

나미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이젠 창틀에 기대어 흐르는 풍경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공정에 타서 내려다보는 경치도 좋지만 이것도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태평한 표정을 보면서 의뢰인인 레이라인은 태평해할 수가 없었다. 남의 일이라고 저렇게 무신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초조함을 참다못해 말했다.

??가서 조사하고 그러기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가서 조사할 게 뭐가 있어?”

??예? 그거야 나미아 씨가 말씀하신 대로…….”

??괜찮아. 그러고 보니 내 성을 안 알려줬구나?”

??예?”

나미아는 몸을 끌어당겨서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고는 손 위에 얼굴을 얹어 레이라인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레이라인은 갑자기 나미아의 시선을 받자 움찔해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저께 통성명을 하긴 했지만 레이라인은 “나미아”와 “오디”라는 이름 외에는 알지 못했다.

나미아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난 ”나미아 이켈라인“. 그리고 쟤는 ”오디 미아 싸이 이켈라인??. 공통점은?”

??에… 자매시죠? 이켈라인이라는 성을 쓰는…? 이켈라인?”

??그래. 들어본 적 있지? 아이리펜 대륙 어디든 함께 하는 모든 계층의 친구! 저희가 있는 곳에서의 부족함이란 죄악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켈라인상회! 내가 거기 총수야. 오디는 거기 총무고. 그제 말했잖아?”

??아, 그러고 보니…….”

레이라인은 분명 그런 소개도 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전에 워낙 난잡한 소개라서 반쯤 잊어먹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지만 요 사흘간 파악한 나미아의 성격상 별로 지적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말했다.

??이래 봬도 우리 꽤 발이 넓어. 조사는 힐텐펜스 지부에서부터 연락해두었으니까 우린 데린너스에 가서 그 결과를 받아보면 되지.”

??그래서 철도를 이용하시는 거예요?”

??그런 이유도 있는 거야.”

??그거라기보다 철도 이용하고 싶어서 내신 즉흥적 발상이에요. 일일이 감탄하실 것 없어요.”

감탄할 준비를 하고 있던 레이라인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버리는 나미아의 표정을 보면서 역시나 싶었다. 오디는 조용하게 찻잔을 들어 올려서는 특등실 승객에게 지급되는 홍차의 향을 즐겼고, 나미아는 그대로 소파 위에 쓰러지면서 바둥대기 시작했다.

??우에엥! 뻐길 기회도 안 줘―! 오디 너무해! 아빠한테 이를 거야! 우에에에!”

??일러보세요. 아버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오디 냉혹해! 냉정해! 어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래서 제 말이 틀렸나요?”

??우…, 우우…! 흐아앙! 정말 너무해!”

나미아는 소파에 얼굴을 부비작대면서 하소연할 데 없는 자신의 신세를 토로하기 시작했고, 오디는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면서 기품 있게 홍차를 음미하는 관록을 내비쳤다. 그래서 당황하는 것은 레이라인이었다.

??저기, 내버려둬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일상이니까요. 나미아님은 언제나 뻐기고 싶어 하기 때문에 간혹 쓸데없는 곳에서도 그러시거든요. 그럴 때는 조용히 눌러주는 편이 좋아요. 이건 아버님이나 어머님들도 인정했거든요.”

레이라인은 그런가보다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오디의 호칭이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고 느꼈다. 성이 같은 자매 사이인데 어째서 오디는 나미아에게 “―님”이라는 극존칭을 붙일까? 그리고 그 어머님들은 뭐지? 후자의 경우는 말실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매우 당연하게 부르고 있어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었다.

??저기…, 자매지간이죠?”

??네. 그런데요?”

“음…. 언니한테 사용하는 호칭이라고 하기에는 ”―님??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은 상회의 총수와 총무이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아. 그거요? 으음… 레이라인 씨도 들으셨잖아요? “주인님과 애완 고양이”라는 말이요. 그것 때문이에요.”

레이라인은 그런 말도 들었다는 것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님과 애완 고양이라는 말에서 지금의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상당한 양의 재료가 부족했다.

하나의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사고를 뒷받침할 재료들이고, 재료가 없을 때는 그곳에 가정을 끼워 넣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꺼내놓았다.

??저기, 고양이세요?”

??네, 맞아요. 전 고양이에요.”

순간 레이라인은 오디의 머리 위에 솟은 두개의 뾰족한 하얀 귀와 치골(恥骨)에서 뻗어 나와 복스럽게 살랑거리는 하얀 꼬리를 생각했다. 나름대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나미아의 무릎에 기대어 골골거리는 목울림을 내는 데까지 생각하고는 부지불식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푸후후…!”

오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붉은 눈과 푸른 눈으로 레이라인을 보았다. 자신의 말이 어디가 이상한지 검토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담담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 사실이라는 점을 그녀와 몇몇 특정인들만이 안다는 사항에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오디의 말을 이상하게 듣지 마. 쟤 정말 고양이 맞으니까. 우연한 기회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후우…. 예? 그런 거였어요?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너무 큰 실수를 했나보네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어쨌든 저와 나미아님이 같은 아버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그 이전에 전 나미아님의 애완 고양이였거든요. 제가 아버님의 딸이 된 것은 인간의 모습이 되고 난 다음이에요.”

??아아, 알겠어요. 그나저나 그 아버님이란 분을 한번 뵙고 싶네요. 나미아 씨도 극찬을 하시는 것 같은데, 상당히 멋있는 분이실 것 같아요.”

??물론이지! 우리 아빠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데!”

특유의 빠른 회복력으로 금세 기운을 차린 나미아는 아버지인 라이니시스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얼른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레이라인은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미아를 응시했고, 한껏 고무된 나미아는 그녀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생기신 것도 잘생기셨고, 게다가 마음도 착해. 문무겸비에다가 나하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인데, 그런데도 검소하시지. 게다가 마음도 넓고 얼마나 겸손하신데! 동생들하고도 정말 잘 놀아주시고 어머님들이 서로 싸우려고 하면 얼른 가서 중재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일에도 눈물 흘리실 줄 안다니까. 근면성실하고, 요리도 잘해! 아아! 얼마나 가정적인데! 그런 아빠를 만난 건 행운이야. 그때 붙잡고 딸 삼아달라고 하길 정말 잘했지. 음음.”

??에? 양녀세요?”

??어, 그래. 오디랑 난 양녀야. 그래도 친딸 이상의 사랑을 주시고 계셔서 얼마나 기쁜데.”

??와아, 정말 좋겠어요. 저도 그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레이라인의 표정에 그림자가 졌고, 나미아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버지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해서 도망치려하는 사람 앞에서 대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떠들어댔던 것인가.

나미아와 오디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레이라인은 혼자서 기운을 차렸다. 나미아의 사정은 나미아의 사정이고, 자신은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을 굳게 먹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라면 정말 나미아와 오디 씨의 어머니란 분도 행복하시겠네요.”

??그렇지? 우리 엄마들도 너무나 착하다니까. 아빠가 날 처음 주웠을 때 마음도 넓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하실 정도였다니까. 큰 엄마나 작은 엄마나 두 분 다 착하고 좋은 분들이야. 정말로.”

??…예? 저기, 혹시 어머니가 두 분이세요?”

??아, 이야기 안 했던가? 맞아. 아빠는 한 명, 엄마는 두 명에 오디 밑으로 여섯 명의 동생들이 더 있어. 정말 화목한 가정이지. 지금은 난 독립했지만.”

레이라인은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자신의 가치관에 뭔가 알 수 없는 혼재(混載)가 찾아오는 듯싶었다.

아무래도 눈앞의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으로 측정했다가는 상당한 무리가 닥칠 것 같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양녀로 들어간 사람이 어머니 둘을 가진 아버지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화목한 가정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상당한 의문이다.

레이라인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는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이켈라인상회의 총수이고,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을 해왔다면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저기, 그런데 제가 몇 번째 손님이에요?”

??두 번째. 첫 번째 손님은 네가 오기 사흘 전에 돌아갔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헤에, 그렇군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응? 별 이야기는 없는데?”

??저한테 도움이 될 이야기일 수도 있잖아요?”

나미아는 팔짱을 끼면서 잠시 생각했다. 한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과연 이것이 레이라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일까. 그러다가 그녀는 할 이야기도 별로 없으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다면야. 첫 번째 손님은 말이지, 한스 스미스라고 하는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의 생도인데…….”

나미아의 이야기보따리가 풀려 나왔고, 레이라인은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미아의 이야기 솜씨는 꽤나 뛰어난 수준이라서 레이라인이나 오디, 그리고 이야기하는 나미아마저도 시간을 잊을 수 있었다.

평원을 가르는 레일을 타고 열차는 그렇게 데린너스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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