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ostscript(후기): 각오. (7/49)

Postscript(후기): 각오.

From guest diary of Namia. Page 01.

첫 손님인 한스 스미스는 상당히 재미있는 케이스다.

그의 극적인 변화. 두 달 사이에 일어난 변화 치고는 그의 일생을 바꿀 정도의 큰 변화였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것은 내가 의도한 것이고, “한스 스미스”라는 인물에 대한 파악이 끝난 상태에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장기,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쉽게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일부 청소년들은 어떤 하나의 인물, 현상, 사건, 사상들에 치중하여 “자신이 믿는 것만이 진실이고 진리이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에 빠지게 되어 자신과 맞지 않거나 그 가치관과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매도하고,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

세발트라는 소년, 지금부터 가해자라고 칭할 소년이 그런 경우이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힘은 다른 이들에게 절대적인 것이며, 그것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심리이다. 완전히 평등한 나이에 강한 힘을 가지면 좀 더 우월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생겨나 따르지 않거나 그것에 저항하는 아이들을 괴롭힌다.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사고이며, 학교의 취지와도 맞지 않을 뿐더러 사회 전반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힘센 사람의 주위로는 그 힘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언제나 존재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중심인물은 같이 타락해간다.

그것은 그들의 가치관이 거기에 굳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인식으로 생겨난 잘못된 사상이 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행동하라는 선생님의 설교는 들어 먹히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의 생각에서는 이미 자신들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는다는 감정은 무서운 것이다. 주변의 그 어떤 말도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으며 그들에게 감흥을 줄 수도 없다. 그런 이들의 패러다임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그들이 믿어왔던 현실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다.

한스 스미스는 그런 의미에서 아주 훌륭하게 성장해주었다. 가해자에게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겪게 하였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시켜준다. 그것으로 가해자는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급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걸 천천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경험으로 축적할 수 있다. 때에 따라 책으로 엮어진 경험을 읽거나 다른 이들에게 내용을 읽어줄 수도 있고, 칼이 되어 다른 이를 공격하며, 방패가 되어 자신과 다른 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 경험이 하나의 형체가 되어 그 사람만의 사상을 만들고, 철학을 만들게 하고, 자아를 형성한다.

청소년기의 사회장치 내에서의 집단 이기적 심리는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자아의 삐뚤어진 발로이다. 자아라는 것 자체는 방어본능이 강하기 때문에 한쪽 성향으로 기울게 되면 그 점을 고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청소년기의 심리상태는 자아를 구성하는 데 있어 아무리 미묘한 점일지라도 크게 적용된다.

가해자의 경우 그의 자아가 형성단계에서 무너졌고, 재구축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사람이 성숙해짐에 따라서 자아의 구축도 이루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서 조금 더 나은 사고가 자아에 반영되는 것이다.

대부분 청소년기에 했던 행동을 어른이 되어서 창피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을 젊은 날의 치기라고 부르면서 웃음으로 넘긴다. 왜 그러는 가? 현재의 자신이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나 혹은 그때의 사회 가치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일 때문일 것이다.

자아가 완성되기 전에 벌인 일은 대부분 그런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벌일 수 있으며, 자아를 이루는 절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충동적이다. 미래에서 그것이 오판이었고, 돌발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지금과는 다를 텐데”라는 기분을 느끼면서 멋쩍어 한다.

가해자 역시 그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눈앞에는 자신의 세계를 부순 사람이 있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뼛속까지 그릇되지 않았다면 이로 인하여 그는 변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스 스미스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발생하는 다른 이의 변화는 의도라기보다도 기대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계획했지만 그 다음에 벌어질 일에 대해선 예상하지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나는 한스를 구하면서 동시에 가해자 역시 구한 셈이 된다. 과연 성족의 카르마가 어디까지 예측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최대한 많은 이를 구한다는 나의 바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한스 스미스는 조금 전 말했던 대로 재미있는 케이스다.

깨달음과 잘못을 수정하는 자세가 잘되어 있는 경우라고 할까? 어렵사리 정의를 내려보자면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 동안 따돌림 생활을 하다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너무나 신경 쓰게 된 나머지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웨일즈라는 포석을 배치한 것은 우울한 인생을 딛고 일어선 산증인과 그의 밑에서 크고 있는 긍정적이고 희생적이며 배려할 줄 아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물론, 오디는 단순히 내가 도예를 배우기 위해서 그를 골랐다고 알고 있겠지만, 그건 잘못된 거다. 이래 봬도 하는 일은 확실히 한다고!)

정의 없는 힘은 단순한 폭력이 된다. 절망감에 가득 차서 복수심으로 마음을 허기지게 만든 한스에게 그대로 힘을 주고서 내보냈다가는 단순한 폭력으로 바뀔 뿐이다. 복수심이란 저열한 욕망은 아무리 채워 넣어도 충족될 수 없고, 설령 충족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시적인 기분이다. 공기와도 같은 가치를 충족시켜봤자 금방 허무해질 뿐이다.

복수심에 불을 붙여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내보내는 것은 개인과 대상의 파멸을 불러온다. 오늘의 피해자가 내일의 가해자가 된다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겨버리게 된다. 게다가 그 복수심에 힘이 얹히게 되면 그 파괴력은 더더욱 무섭다.

나는 그 복수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기로 했다. 애초에 복수를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서 한스를 성인군자로 만들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 평범하다. 그래서 차라리 복수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서 그 위에 다른 가치를 살짝 뒤덮는 방법을 사용했다.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한스는 협동과 양보, 절제의 미덕을 알게 되었다. 고아원에서는 모두가 한 식구이고, 서로를 위해서 양보하고 아끼며 상대를 돕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싸움으로 번질 사건도 서로가 한 발자국씩 양보하며 참는 모습은 계급이 적용되는 사회장치 속에 있는 한스의 가치관을 변화하게 하였다. 어린아이들도 하는 것을 자신이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한스는 자신이 가진 마음의 밭에 긍정적인 사고관(思考觀)을 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복수심 전체를 제거하거나 덮을 수는 없지만 복수심을 축소시킨 후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웨일즈의 행동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제 아무리 관용의 미덕을 베푼다고 할지라도 상대가 도통 들어먹지 않으면 힘을 사용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정의의 관철은 그 전에 관용과 절제의 미덕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전 암흑계에서 절대자로 군림하던 암왕(暗王) 웨일즈는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발휘했다.

한스는 그곳에서 추악한 복수가 가져오는 일그러진 면과 과도한 복수로 시작되는 또 다른 힘의 개입을 배웠을 것이다. 웨일즈의 말로는 “강한 마음”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인내와 절제를 뜻하는 말이었다. 강한 몸이라는 점에서는 따로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이번 일에서 한 것은 단순한 계기를 쥐어준 것뿐이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래서 일부러 무인도에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떨어뜨려 의타적인 면을 제거하고 자기 자신 자체의 생존욕구를 부채질하여 “저항”하게끔 했고, 폭력배들의 위협이 있는 웨일즈의 고아원을 찾아(도예에 가장 큰 목적을 둔 건 절대로 아니다. 절대!)서 복수의 허망함과 힘이 있어도 쓰지 않으면서 아끼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 점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경험”이다. 몇 만 단어의 말로도 사람의 움직임은 고칠 수가 없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고, 백 번 보는 것이 한 번 해보거나 겪어보는 것보다 못한 것이 그 이유에서다.

물론 보거나 듣는 것은 훌륭한 간접경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보고들은 것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고서 하나의 결과로 만든다는 전제 하에서 경험의 범주 안으로 넣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경험은 약하다. 수 십 번의 간접경험을 쌓는다고 해도 단 한 번의 경험에 미치지 못한다. 간접경험 보다는 직접경험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경험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 승화되는 경우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행했을 경우이다. 자의적인 경험이야말로 즐거운 마음, 혹은 그것을 받아들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나 느끼는 부분이 질적으로 다르다.

한스에게 필요한 것은 “각오” 이것 하나였다. 성장기 청소년이 어떻고, 자아형성이 어떻고, 인내와 절제나 관용이 어떻다고 하기에 앞서 한스가 필요했던 것은 마로 “각오”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저항할 각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각오, 강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힘을 위한 힘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각오. 전부 그의 마음가짐에 달린 문제다.

한스는 현재 자신이 겪은 것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좋은 학생이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가 다시 역경에 부딪히게 되어 과거의 역경을 이겨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때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행하기에 앞서,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임하겠다는 “각오”만으로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손님이었던 한스 스미스는 “각오”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어준 손님이었다. 그의 극적인 변화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듯 멋진 환골탈태(換骨奪胎)와도 같았다.

다른 손님들도 그렇겠지만, 첫 손님인 만큼 잊을 수가 없겠지.

한스, 잘 지내야 해!

Postscript: 각오. ― 종료.

추신: 의뢰비용은 언제 지불할 것인지 눈여겨봐야지~. 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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