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4: 소년이 얻은 소중한 기억. (6/49)

Part4: 소년이 얻은 소중한 기억.

??으음…?”

??아, 정신이 들어? 한스 다시 봐야겠는걸! 목숨까지 걸고서 아이를 구해내다니 말이야.”

??나미아님. 그럴 때는 먼저 정신을 마저 차린 다음에 이야기하셔야죠.”

??이미 다 듣고 있을 텐데 뭘?”

??제발… 듣는 쪽 생각도 좀…….”

한스는 자신을 내버려둔 채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나미아와 오디를 정지시켰다. 그나마 오디가 나미아보다는 낫지만 크게 다를 것은 없다.

한스는 몸을 일으켜서는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낯선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르는 곳의 모르는 천장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나미아와 오디뿐이었다.

??여긴…?”

??아, 힐텐펜스 시립병원. 마침 7블록 외곽과 가까이 있었거든. 상처는 다 낫게 했어. 꽤 심한 상처였지만 마법으로 치료했으니까 별 이상은 없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뭘, 고객에 대한 당연한 서비스지. 그건 그렇고, 고아원에 화재가 났다며?”

한스는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서는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아서 고아원의 화재가 꿈이라 생각했지만 당연한 듯 이야기를 걸어오는 나미아에 의해서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고아원은 정말로 불타버린 것이다. 한스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미아는 팔짱을 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지? 힐텐펜스 제7블록 재개발건과 관련해서 관련자 전부 처벌상태일 텐데? 불지를 놈들이라고는 행패 부리던 녀석들 외엔 없잖아? 분명 선금도 받았을 테니 돈도 넉넉할 테고 말이야.”

??방화…인가요? 우연히 난 화재가 아니라?”

??화재현장을 보고 왔거든. 발화지점이 꽤 묘한 곳이더라고. 아무것도 없는 창고에서 불이 일어날 이유가 얼마나 되겠어?”

??그, 그런…! 방화였다니…!”

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문득 그는 언제나 미소를 담은 말라깽이 고아원 관리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웨일즈 씨는요?”

??무사하셔. 지금쯤이면 고아원 터에 가 계실걸.”

??그, 그럼 저도!”

??아, 잠깐…….”

한스는 부리나케 일어서서는 득달같이 병실의 문을 열고 나았다. 나미아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한스의 뒷바람을 맞으며 그 상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그녀는 이내 오디의 무릎에 엎드려 징징대기 시작했다.

??우에에! 오디! 나 무시당했어―!”

??네, 네.”

나미아를 토닥이는 오디는 숙련자의 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둘이서도 잘 노는 콤비다.

한스는 등과 어깨에 입은 화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증도 없었고, 후유증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달려가는 일에 있어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고, 그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쯤에야 그는 전소된 고아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좌절하고 있는 웨일즈를 볼 수 있었다.

??웨일즈 씨…….”

이미 밤은 천공을 장악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가로등 불빛을 받은 웨일즈의 모습은 거리 위에서 툭 솟아 나온 석상처럼 너무나도 잘 보였다.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가운에 웨일즈는 언제인지 모를 시간부터 그렇게 계속 좌절하고 있는 채였다.

??웨일즈 씨, 괜찮으세요?”

??…….”

웨일즈의 표정은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섰다가 완전히 타버린 고아원을 보았다. 복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완전히 타버려서 무너진 잿더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스는 문득 걱정이 되었다. 알렉을 용케 구해내기는 했지만 다른 아이들 중에서 죽은 아이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웨일즈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다.”

??예?”

웨일즈는 가슴을 몇 번 치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서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난 뒤에 한스에게 말했다.

??알렉을 구해줘서… 고맙다.”

??뭘요. 그런데… 혹시 죽은 아이라도…?”

??아니, 알렉이 마지막이었어. 모두 무사해.”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웨일즈는 고아원을 올려다보았다. 맨 위층이 완전히 무너져서 2층 정도로 줄어 있는 크기였다. 그런 그의 눈은 어제까지만 해도 낡지만 포근하게 서 있었던 고아원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난 말이지….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 없었어. 나도 고아였지.”

??아, 그러시군요.”

??어렸을 때는 내 처지를 비관도 하고, 부모가 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지.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고. 당연히 나는 여러 가지로 삐뚤어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었어.”

웨일즈는 거기에서 잠시 과거를 생각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 한스는 왜소한 웨일즈의 몸을 보면서 분명 그렇게 삐뚤어진 과거에서도 많은 괴로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웨일즈는 눈을 한번 크게 깜빡거린 다음에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삐뚤어진 채로 살아가다 어느 날 귀족 아가씨를 건드리고 말았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 단지 그때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나의 적 같았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 집 아가씨는 엄청난 권력을 자랑하는 집의 처녀였던 거야. 하인들과 호위들 몰래 빠져나와 거리구경을 하는 아가씨를 나는 말단 귀족 아가씨로 본 것이지. 그날부터 나는 쫓기기 시작했어.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고, 여러 사람을 죽였지.”

한스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왠지 웨일즈의 이야기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왜소한 체격에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웨일즈가 말하는 태도가 너무나 진지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경청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사이에그롭에 들어갔어. 국경을 넘기 직전에 겪은 싸움에서 큰 상처를 입고는 국경도시였던 레이안에 들어갔지. 그곳에서 피로에 지쳐 어느 집 앞에서 쓰러졌는데, 그곳은 도자기 공방이었어. 이방인이었던 나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않고 상처를 치료해줬지. 그때 나는 얼마간의 인간성이 남아 있었는지 그곳의 일을 돕기 시작한 거야. 상처를 치료하고 재활훈련을 한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일단 은혜는 갚고 싶었으니까. 그러던 도중 나는 그곳에서 도예를 익혔어. 나중엔 시장에 내놔서 먹고 살 만큼의 실력이 됐지.”

한스는 웨일즈가 나미아의 여관에서 그녀에게 도예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웨일즈가 만든 그릇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웨일즈의 말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저 그런 작품이 아니라 매우 뛰어난 수작이라는 점이었다.

??흙을 만지면서 점차점차 생각했어. 세상에 원한이 있든 어쨌든 전부 부질없는 일이라고. 세상이 날 괴롭히고, 짓밟아도 살아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자고. 언젠가 내가 일어서서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원한을 접어두자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어. 그게 그 공방에서 신세를 진 지 10년쯤 되던 때의 일이야. 나는 그때 공방을 나올 결심을 했어. 그리고 그 귀족 아가씨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자고 생각했어. 날 죽이겠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건 내가 뿌린 씨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북상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아니, 사죄하기 위해서.”

웨일즈는 고개를 들어 별을 보고 있었다. 그가 옛날 북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게 별을 보면서 길을 찾곤 했었던 아련한 기억이 들었다. 한스는 잠시 과거의 눈을 하고 있는 웨일즈를 보며 자신도 같이 아련한 기분이 드는 착각이 들었다. 웨일즈는 그렇게 별을 보면서 과거의 기억을 풀어나갔다.

??난 내가 범한 아가씨를 찾으러갔다. 그런데 그 집이 반란혐의로 인해 완전히 멸문(滅門)했다는구나. 어찌어찌 수소문해서 그 아가씨의 행방을 찾았지. 어린 딸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고 하더군. 딸…. 딸이었다. 그때 내가 충동적으로 범한 아가씨가 내 딸을 낳은 것이야. 난 아주 필사적이 되어서 그녀를 찾아다녔단다. 그리고 3년쯤 지났을 때, 난 겨우 그들을 찾을 수 있었지.”

??어디…서요?”

??힐텐펜스의… 공동묘지에서. 수소문해보니 그녀는 이곳으로 오자마자 죽었고 내 딸은 고아로 전전하다가… 폐병이 들어 죽었다더군.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얼굴도 본 적이 없지만 내 딸이 분명했는데… 그 아이가 그렇게 고아로 전전하다 죽었을 줄은 몰랐다. 찾아다니면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만나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하지만 그 아이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어머니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있더구나. 불쌍한 내 딸! 살아갈 날이 더 많았는데……. 신께서는 가혹하게도 그 꽃봉오리를 꺾어가셨지. 불쌍한 것. 강간범의 자식으로 태어나 집안에서도 멸시받았을 것이고, 지어미가 죽은 뒤로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한스는 손을 떨면서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는 웨일즈를 보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저토록 이나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해한다고 하는 말이야말로 최고의 모욕이 될 것이다. 웨일즈는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내 딸아이의 친구들을 찾았다. 그 아이들 말로는 대 딸은 ”도르핀??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고아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출생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밝고 착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었지. 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었어. 나는 그 순간 내 인생이 얼마나 비웃음거리인지 알게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닌데 나 혼자만 그런 줄 알고 비참해하고, 막나가고, 말도 못할 만큼 흉악한 짓까지 했던 것을 생각하니 내 자식에게 정말 부끄러웠단다. 그래서 나는 고아원을 세우기로 했다. 내가 내 딸아이에게 해주지 못했던 일을 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공방을 퇴직할 때 가지고 온 돈으로 낡지만 크고 아늑한 건물을 사서 고아들을 모았단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지….”

어두운 밤거리에 퍼지는 한 사나이의 독백은 침묵의 거리를 더더욱 조용하게 만들었다. 가로등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레들의 날갯짓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자시 후, 웨일즈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깨고 거리 위로 흘렀다.

??처음엔 어려웠다. 많이 부족했지. 아이들을 어떻게 돌보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진심으로 아이들을 대했고, 나의 진심은 곧 아이들에게 통하더구나. 그래서 난 아이들과 함께 고아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난 고아원의 관리자이긴 하지만 주인은 아니었어. 주인은 나와 다른 모든 아이들이지. 난 도르핀에게 쏟지 못한 애정을 다른 아이들에게 전해주었고, 그 아이들은 나에게 사랑과 신뢰로 답해주었지. 내 인생에서 제일 따스하고 제일 아름다운 나날이었는데… 그랬는데…!”

웨일즈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차가운 포석 위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웨일즈는 손바닥으로 땅을 짚다가 점점 고개를 숙여갔다. 이윽고 땅에 엎드린 그의 입에서 한 맺힌 고함이 터져 나왔다.

??왜! 그런데 왜! 어째서 그 아이들이 또 고통 받아야 하는 거야! 내 과거의 죄 때문이라면 나를 단죄할 것을 왜 선량한 아이들에게까지 고통을 안겨주느냐고! 세상이 공평하다면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이제 아이들은 어디서 잠을 자야 할까? 어디서 밥을 먹어야 할까? 어디서 편안하게 웃고 떠들 수 있을까?!”

??길바닥의 아이들이야 길바닥이 제격이지 않겠어?”

??누구야?!”

한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을 때려눕히고 짓밟은 장본인들이 이죽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한스는 득달같이 일어나서 경계자세를 취했고, 웨일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야아. 이거 참 눈물겹구먼. 고아들을 위해서 오열하는 한 남자라. 연극해도 되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이깟 낡은 건물 하나에 목숨 걸 것까지야 있나.”

??내 말이 그 말이야.”

다섯 명의 불량배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이죽거리고 있었고, 한스는 이를 갈았다. 웨일즈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대체… 대체 왜 이런 겁니까? 여러분들께 이득이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허어? 이 사람 보게. 세상일이 그렇게 말만큼이나 쉬운 것이 아니지.”

??고럼, 고럼.”

흉터 사내가 웨일즈에게 다가가서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웨일즈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비릿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것 보셔. 아무리 우리 의뢰주가 잡혀갔다고 해서 이제까지 하던 일은 멈출 수 없는 것 아니요? 이 바닥에서 그렇게 쉽게 물러나주면 어디 살아남기야 하겠소이까?”

??그, 그렇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체면 구겨지면 끝장이라 이거지. 얕보이게 되거든. 그러니까 순순히 물러나줬으면 얼마나 좋아?”

흉터 사내는 웨일즈의 머리를 가지고 비비적거리다가 혀를 차고서는 일어났다. 한스는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고아원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저들에겐 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일까?

한스가 분에 받혀 뛰쳐나가기 전에 웨일즈가 말했다.

??그러면… 고아원을 새로 세우면… 그때는, 그때는 괜찮습니까?”

??하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쪽 체면을 구겨버린 상대가 재건하게 둘 것 같아? 이 형씨 참 세상 순진하게 사셨구먼? 그깟 지저분한 꼬맹이들이야 내가 알 바 아니니 어디 거리에서 죽어 넘어지든 맘대로 해보쇼.”

??그러지 마시고… 제발, 갈 데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정말로 불쌍한 아이들의 터전을 빼앗지는 말아주십시오.”

??닥쳐!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말했지? 그런 비렁뱅이 자식새끼들이 어찌되는 내 알 바 아니야! 퉷!”

흉터 사내는 거칠게 침을 고아원 잔해에 뱉고는 낄낄대는 부하들과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흐느끼는 것을 완전히 멈춘 웨일즈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스는 뭔가 착 가라앉은 분위기의 웨일즈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아이들도…….”

??허? 또 그놈의 아이들 타령이냐?”

??아이들도 이만큼 말하면 알아듣거늘!”

잇사이로 내는 낮은 소리라서 한스 이외의 다른 사람은 잘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을 끝마친 웨일즈는 한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한스가 놀라서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릴 때, 거리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쩌억!

쿵. 털썩.

웨일즈의 주먹이 흉터 사내의 턱을 올려쳤고, 흉터 사내는 뒤로 몇 피트쯤 날아가더니 곧바로 기절해버렸다. 주먹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가만히 있는 웨일즈에게 모든 시선이 향했다. 그는 서서히 주먹을 내렸고, 숙였던 얼굴을 들었다. 웨일즈는 잔뜩 분노하여 평소와는 전혀 다른 흉악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어른이 못 알아들으면… 패서라도 가르쳐주는 수밖에!”

웨일즈의 기세에 남은 남자들의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한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으, 으아아!”

한 남자가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도망치고 있었다. 전심전력으로 도망가기 위해서 다리를 놀렸지만 그의 앞에는 어느새 웨일즈가 낮은 지르기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커지고, 웨일즈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을 때, 웨일즈의 섬전 같은 주먹이 공기를 갈랐다.

쉬이익! 파악!

??커…허억!”

명치를 깊숙하게 파고든 주먹에 남자의 허리가 완전히 꺾였다. 더불어 땅에서 발이 살짝 띄워지기까지 했다. 웨일즈가 주먹을 거두자 남자는 명치를 부여잡고 신음소리마저 빼앗긴 듯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웨일즈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무릎치기로 안면을 공격했다.

콰악!

??카하악!”

일순간에 숨통이 트이면서 거기에 고통스러운 소리가 섞여 나오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가 남자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얼굴이 완전히 위로 들린 상태에서 웨일즈는 깨끗한 자세의 옆차기로 그를 뒤로 날려버렸다.

퍼억!

남자의 몸이 거의 1야드 가까이 뒤로 날아가면서 땅바닥을 뒹굴었다. 이미 기절한 듯 꿈틀거림조차 없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웨일즈는 발로 그를 뒤집었다. 이빨이 두세 개는 나간 채 하얗게 질려 있는 표정을 실신해버린 것이다.

??사람이 참고 있을 때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그 말을 들어야 할 상대는 이미 의식이 사라져버렸지만 웨일즈는 할 말을 다했다는 투로 싸늘한 눈빛을 거뒀다.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남자를 뒤로하고 웨일즈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걸어가는 앞으로는 쓰러진 사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가, 강하다!”

한스는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웨일즈를 보면서 압도적인 힘,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장정 다섯을 손쉽게 쓰러뜨렸고, 지금은 전혀 지치지도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스는 순간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웨일즈를 깔보고 있었는가를 반성하게 되었다.

??웨일즈 씨!”

??아…. 한스, 이거 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구나.”

??아, 아니에요. 그런데… 정말 강하시군요.”

??자랑거리는 안 돼. 차라리 애들 돌보기를 싸움만큼 잘했으면 좋겠어.”

웨일즈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 그러니까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골탕먹어가며 옹기종기 꾸려나가는 유약한 모습의 남자로 돌아와 있었다. 웨일즈는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전소된 고아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스는 그런 웨일즈를 보면서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그런데 웨일즈 씨. 이렇게 강하시면, 애초에 저 녀석들을 제압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될 때까지 놔두신 거죠?”

??한스, 사람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을 함부로 휘두르면 아무 소용없어. 힘은 의미 있는 일에 뜻 깊게 써야지. 이런 동네 불량배들을 정리하는 것은 보다시피 간단한 일이야. 하지만 나는 이들이 마음을 고쳐먹길 바라고 있었어. 그렇게 되면 아무로 피 흘리지 않고 끝나잖아?”

??그건 너무 사람 좋은 생각이에요. 지금 같이 험한 세상에 그런 생각은 너무나 위험한 것 같아요.”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가 만약 처음부터 이 녀석들을 제압했다면 일은 더 커졌을지도 몰라. 단순보복의 위협성은 너무나 커. 게다가 그때는 아직 이들은 위협만 했을 뿐, 행동은 하지 않았어. 나는 사람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보고 싶었던 거야.”

??너무 안일해요.”

한스의 지적에 웨일즈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한스는 웨일즈의 성격이 원래 이렇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웨일즈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스에게 말했다.

??그런가? 그래도 난 내 과거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어. 강한 힘을 멋대로 휘두르다보면 언젠가는 뼈저리게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걸. 그리고 자신의 힘에 자신이 책임지지 못하면 애꿎은 주위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는 걸. 한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에?”

왠지 모르게 자신이 깨닫고 있는 이야기 같아서 어리둥절해 있는 한스에게 웨일즈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톡톡 두들겼다.

??마음이 강한 사람이야. 마음이 강하면 자신이 가진 힘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굳세게 먹은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힘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런 마음에서 사용되는 힘이야말로 책임질 수 있는 힘이지. 무릇 사람이라면 책임을 질 줄은 알아야 하잖아? 그리고 머리로만 마음이 강해야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어. 마음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무의식중에 실천하는 사람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가봐. 폭력은 휘두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나도 수양이 많이 부족하지? 하하하하.”

어색한 웨일즈의 웃음소리에 한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스는 자신에게 생긴 힘으로 복수를 생각했었지, 웨일즈처럼 깊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알량한 힘에 자만하여 스스로 불화를 자초하기까지 했다. 그런 어리석을 생각을 하고 있다니, 너무나도 부끄럽다!

문득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쓰라린 과거를 딛고 일어나서 어느덧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의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존경스럽고, 멋있는 모습이었다. 평소에 그를 얕보고 있던 한스는 그렇기에 더 크게 느낄 수 있는 웨일즈의 매력을 알 수 있었다.

웨일즈는 고아원의 잔해를 보면서 거칠게 머리를 긁어댔다.

??그나저나, 고아원을 다시 세우려면 꽤 돈이 들겠는 걸 어쩐다….”

??저 녀석들 현상금이 붙었을 것 같은데, 그것으로 좀 충당해보시는 건 어때요?”

??에…? 그래도 되나?”

??웨일즈 씨의 말씀대로, 저들은 자신의 힘에 정당한 책임을 지는 거니까요.”

한스의 말에 웨일즈는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스는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훗날 그가 스스로 말하게 되는 “자신의 말”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자신도 웨일즈 씨처럼 등을 곧게 펴고 꼿꼿한 걸음걸이로 앞을 보며 걸어가고 싶다 생각했다.

??신심양면으로 강해지자. 웨일즈 씨처럼!”

소년의 마음속에 또 다른 목표가 생겨났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6월 30일.

한스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나미아에게 말했다.

??저기, 감사했습니다.”

??응? 아냐. 손님이잖아? 나중에 제대로 요금 치러야해?”

나미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으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한스는 나미아의 태도에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천 펜, 제가 몇 십 년을 걸려서라도 꼭 갚겠습니다. 제 인생을 산 것 치고는 싼값이니까요.”

한스는 어린 나이게 지게 된 천 펜의 빚이 매우 큰돈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미아는 그 돈의 상환기간을 “죽을 때”까지라고 못 박았고, 이자는 없었다. 장사의 목적이 돈 버는 것이 아닌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한스는 짐작했다. 그는 빨리 훌륭한 비공정 정장이 되어 돈을 꼭 갚으리라 다짐했다.

??한스, 그동안 수고했어. 이거 선물. 창가에 두면서 하루에 물 한 컵 정도만 주면 돼. 가끔 이파리를 닦아주면 더 좋고.”

오디는 생긋 웃으면서 한스에게 허브가 심어져 있는 화분을 건넸다. 오디가 심혈을 기울여 기른 품종이라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매우 상쾌한 향기가 나는 허브였다.

한스는 기꺼운 표정으로 그것을 받았다. 마음으로 치자면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런 좋은 선물까지 받으니 정말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 그거 보면서 돈 갚아야 한다는 것 잊지 말고.”

??저기, 뭔가 틀려요.

??아, 그런가?”

빠지지 않는 둘 사이의 만담도 이제는 익숙해진 한스는 그녀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스는 새로 새워진 고아원의 원장이 된 웨일즈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웨일즈 씨,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응? 아냐. 오히려 한스 덕분에 일이 더 쉬웠지. 다음에 또 찾아와.”

??예, 그럴게요.”

웨일즈의 고아원은 전소했고, 아이들은 시 당국 시설에 머물게 되었다. 그렇지만 갈 곳이 없는 고아들이 언제고 당국 시설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돈은 들어오지도 않으니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온 곳은 이전까지 고아원 문제를 팽개치고 있던 힐텐펜스 주지 안스란 신전 총본산이었다.

안스란의 총본산인 그랜드 트리의 복지과(福祉科)에서는 웨일즈의 고아원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재건비용을 반 이상 부담하고, 차후 지원금도 부족하지 않게끔 주기로 약속을 했다. 웨일즈는 안스란에게 감사해하면서 고아원의 복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미아는 웨일즈의 도예적 재능을 높이 사 그에게 남는 시간 동안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권유했다. 웨일즈는 신전과 고아원 사이에서 많은 다리역할을 수행해준 나미아의 권유에 따라 다시금 흙을 만지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은 상당한 실력의 고급품으로 시장에 풀리게 되었다. 웨일즈는 그 돈을 고아원의 재건 비용에 보태기 시작했다.

고아원의 재건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20일 동안 걸친 공사 끝에 건물의 외형이 완성되었고, 내부 시설은 총 5일의 시간 동안 각종 기술자들이 들락날락 하면서 여러 편의시설까지 완성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고아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시설이 탄생한 것이다.

그랜드 트리의 지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상주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를 보내주었고, 고아원의 관리를 전담하게 하였다.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일정 이상의 학식까지 갖추고 있어서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교육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빈약한 지식의 웨일즈가 혼자하기도 버거웠기 때문에 웨일즈는 선생님으로서 그들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하나의 학교 같은 체계가 잡혀버린 이름 없던 고아원에는 “웨일즈 고아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웨일즈는 정식으로 원장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로 들어온 선생님들과의 관계 설정에 아이들이 헷갈려했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고아원의 재건에서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미아는 애초에 웨일즈에게서부터 마음가짐에 대하여 배우라는 뜻으로 한스를 고아원에 보낸 것이었고,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한스는 웨일즈의 인간됨에 반해 그를 따르게 되어 고아원 재건에 힘을 빌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어디서든 마음 강하게 먹어.”

??예, 웨일즈 씨의 충고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나미아 씨, 오디 씨,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잘 가! 다신 고민 가지고 찾아오지 말고! 놀러오는 건 환영이야!”

??힘내세요.”

두 절세미녀와 인생의 선배이자 목표가 된 남자에게 배웅을 받으며 소년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소년의 표정은 그곳을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자신감이 깃든 믿음직한 표정이었다.

??진짜로 강한 사람은 마음이 강한 사람이야.”

한스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며 비공정에 올랐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7월 1일.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는 두 달 전 대규모 지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애당초 건립할 당시부터 지질학자와 정령사, 마법사와 대지모신 “마아”의 신관까지 불러서 지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장소를 고르고 골라서 지어진 사관학교이기 때문에 내진설계(耐震設計)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 일로 거의 모든 건물이 무너지는 등의 많은 재산 피해가 났지만 천만지일(千萬之一)의 다행으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서둘러 긴급예산을 집행한 군 당국은 원인규명과 함께 내진 설계에 중점을 둔 건물을 재건하고 나섰다.

물론 지진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한스 스미스라는 극히 평범한 학생이 무단결석을 시작했다는 것과, 근처를 지나던 이켈라인상회 소속 상단이 건축자재들을 반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대한 사고의 후,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는 두 달 동안의 휴교를 끝마치고서 다시금 학생들을 불러들여 조회를 하게 될 수 있었다.

??큰 사고가 아닐 수 없었지만 기적적으로 학생여러분과 교사, 교관 분들의 인명사고가 없던 것이 하늘의 도움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학교는 훌륭하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큰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 나라의 인재가 되도록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장의 짧은 축사와 함께 학생들은 새로 지어진 기숙사의 배정과 교실의 배정 및 교내 시설물을 알아보기 위한 안내도를 들고 학교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짐가방을 들고 기숙사로 향하였고, 나머지 학생들은 교내를 돌아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방학 같았어.”

??그러게. 집에 돌아가니까 부모님이 어이없어 하시더라.”

??공부 따라잡기가 어려울 것 같아.”

??들었지? 방학이 두 달 줄었다는 거. 우리에겐 방학이 보름 정도밖에 없대.”

??에에? 하긴, 그럴 수밖에. 하지만 보름이라니, 집에도 못 다녀오잖아? 하는 수 없지. 포튼렌 근교에서 시간 때워야지.”

??그런데 네 방은 어디야?”

??에… 바뀌지는 않았네? 302호. 구조는 비슷하다나봐.”

기숙사로 향하는 학생의 무리들 사이에는 약간 큰 여행가방을 굴리면서 걸어가는 한스가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와 비슷한 크기의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기숙사의 물건이 대부분 부서졌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에서 복원공사를 하면서 비싼 축에 드는 책이나 의류, 기자재 등을 발굴(?)해서 돌려주었다고는 해도 소모품은 거의 소실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국가에서 지원받은 예산으로 학생들에게 보상금을 주었고, 그것은 대부분 소모품의 구입에 쓰였다.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이켈라인상회를 이용했고, 학교에서는 기자재 반입에 상당한 도움과 거의 아슬아슬한 정도까지의 가격 인하로 자신들을 도와준 이켈라인상회의 교내 진출을 허용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물건을 대주는 상회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이켈라인상회의 포튼렌 지부의 매출은 앞으로 급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상회의 인물들은 그런 선견지명을 가진 총수 나미아에 대해 탄복하고 있을 것이다.

??진실은 어둠 속의 일이지.”

한스는 어제 포튼렌으로 오기 전 여관 WISH에서 들은 이야기는 평생 비밀로 남기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워낙 신세를 진 곳에 대한 의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위해서 학교를 무너뜨렸다는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결과적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된 일이라고는 해도 말이다.

??여어, 이게 누군가?”

??어허? 꽤 몸이 좋아졌는걸!”

??그래도 한스는 한스겠지.”

한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심기를 자극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예의 세발트 일파가 비웃음을 띄우면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예전 같았더라면 목소리를 듣는 즉시 몸이 얼면서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곤 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그저 우습게 보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한스는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다.”

??하하! 그래, 오랜만이지. 꽤 컸다?”

세발트의 비웃음 섞인 소리에 나머지 일당도 크게 웃어댔다. 한스는 그 모습이 어쩐지 고아원에서 본 그 무뢰배 일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스는 별로 상대해주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들을 반쯤 무시하는 이야기를 꺼내보기로 했다.

??아, 조금 컸지. 무슨 일이야? 볼일 없다면 기숙사로 가고 싶은데?”

??오오, 그래? 우리도 기숙사에 가는 길이거든?”

??그런데 짐이 좀 많아서 말이지. 우리 방에 짐 좀 가져다줄래? 학교구경 좀 하고 천천히 들어갈 테니까.”

??마침 잘됐잖아?”

한스는 그들이 들고 있는 짐을 보았다. 자신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짐가방 셋을 추가로 들고 간다면 상당히 꼴사나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스는 이미 세발트 일파의 표적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상당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쯤에서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그들의 의도는 그들 자신의 편의와 자신을 격하시켜서 저열한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이다.

??자기 짐은 자기가 옮기지? 나도 바쁘니까 이만.”

한스는 차갑게 쏘아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두 달 동안 기른 자신의 힘은 저 녀석들을 손쉽게 누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렇지만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하는 것이 자신과 그 주변을 위해서도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스가 열 걸음을 채 걸어가기 전에 세발트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야! 이게 좀 컸다고 이젠 개기냐? 엉?”

주위의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한스를 알아본 아이들은 한스가 또 고집을 부리나 싶어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고, 아이들의 시선을 차지한 한스는 걸음을 멈추었다가 돌아보지도 않고 앞으로 향했다. 그러자 세발트 일파의 똘마니 한 명이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저 새끼가!”

탁탁탁탁!

앞으로 나선 소년은 노리개였던 주제에 건방지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버르장머리를 똑똑하게 고쳐주겠다고 생각하며 한스를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그리고 한스는 발소리를 듣자마자 돌아서서는 그 발을 받아내어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나미아에게 배운 체술(體術) 중 반격기(反擊技)를 사용했다.

??흐읍!”

다리를 잡아내어 힘의 방향을 땅으로 향하게 유도하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는 기술이었다. 등을 호되게 부딪친 똘마니는 짧게 숨 막히는 듯한 소리를 내었고, 한스는 훤히 보이는 명치로 주먹을 짧고 빠르게 박아 넣었다.

퍼벅!

??커억!”

순식간에 명치를 가격(加擊) 당한 소년은 그대로 거품을 물며 기절했고, 한스는 손을 털면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발트 일파를 보았다. 한스는 짐가방 위로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올려놓으며 셔츠의 위 단추 두 개를 풀어냈다.

한스는 꼿꼿하게 선 자세로 당당하게 말했다.

??싸움을 건다면 받아주지.”

??무, 뭐어? 야, 쟤가 미쳤나보다.”

??그러게.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황당해하는 세발트는 똘마니 하나에게 눈짓하여 한스에게 달려들게 했다. 한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건장한 체격에 근육질을 가진 소년을 보고는 한쪽 입가를 올리며 비웃음을 던졌다.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한스 주제에! 까부냐?!”

허리를 향해 들어오는 강력한 태클을 한스는 정면에서 받아내었고, 태클은 아주 성공적으로 먹혔다.

터덕! 차악!

허리를 잡으며 발을 굳히는 소년의 모습을 본 세발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한스를 쓰러뜨려서 무자비한 관절기(關節技)를 선사하면 예전대로의 노리개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러나 수초가 지나도 태클을 건 소년의 움직임이 없어서 그는 점차 이상하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한스는 자신의 허리에 매달려서 목이 졸리고 있는 소년이 부들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어떻게 될까 생각했지만 역시 나미아가 가르쳐준 비법이 꽤나 쓸모 있었다. 세발트 일파의 주특기를 알려주자 나미아가 알려준 대응책이 유효한 것이다.

??너무 느려.”

한스는 그대로 몸을 뒤로 던지며 끌어안은 근육 소년의 머리를 땅바닥에 그대로 박아버렸다.

빠악!

상당히 끔찍한 소리가 나면서 근육 소년이 몇 번 경련하더니 그대로 뻗어버렸다.

한스는 그대로 일어나서는 옷을 털었고, 그 모습은 주변의 학생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예전에 약골이 학교의 문제아들을 하나 둘 상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와! 한스!”

??정말 멋져!”

??방금 그거 봤어?”

??그러고 보니 체격도 많이 변했네?”

세발트는 주변을 거칠게 둘러보았다. 학생들이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예전 같은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손댈 수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세발트는 단 한 순간에, 한 사람에 의해 그것이 무너져버렸다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 상대는 자신이 가지고 놀던 한스였다.

??헹! 방심한 틈을 타서 반격이라, 그런 거라면 비실비실한 약골도 할 수 있지. 복수하려고 꽤나 노력했나 보지?”

??복수하고는 상관없어. 그런 거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물론 뼛속까지 삐뚤어진 너한테는 그런 것밖에 생각나지 않을 테지만.”

??웃기시네. 그래봤자 한스는 한스야! 두 달 동안 어딜 도망가 있나 싶었더니 고향 가서 엄마 품에나 매달려서 젖이나 좀 빨고 왔냐? 고작해야 버린 자식 주제에!”

세발트는 더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스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한스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는 웨일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쉽게 격장지계에 넘어가지 말자고 자신을 다잡았다. 한두 번의 심호흡을 하자 한스는 조리 있게 말을 할 정도의 평상심(平常心)을 되찾았다.

??더러운 입에서는 더러운 말밖에 안 나오는군. 그 더러움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거냐?”

??뭐, 뭐엇?!”

??사람이니까 일단 말로 하지. 더 이상 날 괴롭히려 들거나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려고 들지 않는 것이 네 신상에 좋을걸.”

세발트의 표정에 당황함이 머물다가 이내 웃음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세발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푸하하핫! 푸하하하! 바, 방금 뭐라고 했어? 뭐? 내 신상이 어쩌고 어째? 푸하핫! 고작해야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다니던 비렁뱅이 주제에 그런 말이, 하하하! 어울린다고 새, 생각해? 으하핫! 으하하하하!”

한스는 세발트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한 한스는 팔짱을 끼면서 세발트의 꼴사나운 웃음이 멈추길 기다렸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세발트의 웃음을 들으며 불쾌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세발트는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자신의 펑퍼짐한 배를 두들기며 말했다.

??한 번 내 신상을 위험하게 해보시지? 응?”

??정말? 후회할걸.”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지! 이게 두 달 동안 못 보더니 아주 기어오르네? 다시 예전의 관계를 위해 새로이 시작할 필요가 있겠어?”

??그럼, 원하는 대로.”

한스는 세발트가 준비자세를 취하자마자 곧바로 달려들었다. 세발트는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는 근육을 달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어려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견제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쉬익! 파앗!

먼저 주먹을 지르고 지나가며 발차기를 했고, 세발트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그것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주먹을 밀어내듯이 한스를 향해 질렀다.

휘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발트의 주먹이 한스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스는 묘하게도 그 주먹이 느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직후 날아오는 통나무 같은 세발트의 다리를 보면서 원래 저렇게 느렸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한스는 몇 차례 공격을 받아보면서 생각해보자고 결정했다.

??아앗!”

??저런…….”

주변의 학생들은 한스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이자 안타까움이 담긴 소리를 내뱉으면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발트도 주위의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으며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휙! 탓! 파앗! 파박! 휘잉!

얼굴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서 무릎 차기를 쳐낸다. 옷을 잡아채려는 손길을 다른 방향으로 흘리고, 연환(連環)해서 날아오는 발끝을 똑똑히 보고 피한다.

한스는 눈을 부릅뜨고는 모든 공격을 그대로 흘려내고 있었다. 상대방은 무조건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얼굴만을 노리고 다가들었고, 한스는 그 투로(鬪路)를 읽을 수가 있었다. 나미아의 혹독하다시피 한 훈련은 그의 몸에 녹아들어 회피운동을 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흐읍, 하앗!”

세발트의 동작이 점차 느려지면서 기합만큼은 커져가고 있었다. 허세가 많이 들어 있는 공격에 한스는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막아낼 수 있었고, 주위의 시선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싸움을 시작하면서부터 한스는 한 대도 맞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봐 세발트. 이제 그만 하지?”

??흥! 왜? 겁나냐?”

??아니. 아까부터 한 대로 못 때리고 있는 모습이 불쌍해서.”

??뭐, 뭐라고?!”

세발트는 더욱 발끈해서는 한스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패기도 잠시였다. 한스는 세발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능력도 모르고 남을 핍박하는 사람이 가진 인내심의 한계란 결국 얄팍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한스는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은 살아가면서 계속 뭔가를 배운다는 점이다. 오늘도 세발트의 모습을 보면서 함부로 힘을 휘두르는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한스는 씩씩대는 세발트를 보면서 이 싸움을 끝내기로 했다.

??이제 그만 하지.”

한스의 몸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오른 주먹이 턱을, 왼 주먹이 복부를 동시에 올려쳤다.

??허억…!”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세발트가 뒤로 물러나며 주춤거렸고, 그사이 자세를 잡은 한스가 옆으로 살짝 비켜나며 뒤돌려 차기를 세발트의 뒤통수에 먹였다.

콰직!

??크억!”

짧은 비명과 함께 세발트의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굽혀졌다. 한스는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너르고도 너른 등판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퍼억!

??어억!”

쿠웅!

세발트는 그대로 쓰러져버렸고, 한스는 그와 동시에 땅에 착지했다. 그의 밑에서 세발트가 꿈틀거리면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와아! 세상에!”

??한스! 정말 멋지다!”

??세발트가 쓰러졌어!”

??맙소사!”

감탄사와 환호성 속에서 한스는 폭력을 일삼던 자의 말로를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세발트를 뒤집었다. 처음에는 정신을 못 차리던 세발트는 이내 눈앞에 한스가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공포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한스는 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내 원한을 그냥 전부 갚아버리고 싶지만…! 그만둔다. 다른 아이들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 혹시라도 예전 같은 행동을 한다는 말이 내 귀에 들려올 때면, 각오하는 편이 좋아.”

??으, 으으…!”

세발트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한스는 쓰러뜨린 세발트의 똘마니들 사이를 지나 자신이 짐이 있는 쪽으로 가서 가방들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그는 길을 터주는 학생들 사이를 지나쳐 기숙사로 가기 시작했다.

??한스! 너 정말 굉장하다!”

??아, 마틸다. 오랜만이야.”

??응! 나 정말 놀랐어! 굉장히 강해졌구나? 와아…, 이 체격하고 근육 좀 봐!”

한스의 급우인 마틸다라는 여학생은 두 달 사이에 한스의 몸에 벌어진 변화에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한스는 피식 웃으며 그런 행동을 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작 강해진 곳은 거기가 아니야.”

??어? 그럼 어딘데?”

마틸다는 한스를 요리조리 살펴보았고, 한스는 궁금함이 가득한 마틸다의 행동에 살짝 미소 지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 이곳이 강해졌지. 그 사람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응? 뭐야? 무슨 뜻이야? 모르겠어.”

??그러니까…….”

궁금해하는 마틸다에게 설명해주기 전에 한스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힐텐펜스에서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스는 자신의 목표가 되 사람을 떠올렸다.

??웨일즈 씨. 언젠가 다시 찾아갈게요.”

??그러니까 뭐? 응? 말 좀 해봐아!”

??아, 알았어.”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느끼고, 웨일즈에게 들었던 마음가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경험은 그에겐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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