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 고난이 피어나는 계절.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5월 3일.
오디는 서류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미아님, 이건…? 대체 뭘 어떻게 하시려고…?”
??한스란 녀석, 상당히 의타적이야. 아니, 그렇게 변했다고 해야 할까? 청소년기에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서 성격이 결정되기 마련인데, 한스 같은 경우는 워낙 괴롭힘을 많이 받았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 상당히 소심하고 의타심이 짙어.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성격이지. 상당히 안 좋아.”
??그래서요?”
??자신감을 길러주려고. 의타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야. 뭐든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리고?”
??저항하는 것.”
나미아는 집무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책상 앞에는 이켈라인상회의 결재서류가 놓여 있었고, 오디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결재정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항이라뇨?”
??한스는 타인 의존적 성격으로 기울어지기가 상당히 쉬운 아이야.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현저히 떨어지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 처음부터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주어지지 않은 셈이야. 게다가 사관학교의 규율상 시키는 일만 해야 하잖아? 한스는 워낙에 성실해서 시키는 것만 안심하고 할 수 있게 길들여져 버렸어. 집단교육의 폐해지.”
??그래서요?”
나미아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서류에 사인을 하고는 잘 마르도록 습지로 두들기며 말했다.
??위에서의 명령은 확실하게 들어야 하겠지만, 그것에 대해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해봤을 거야. 명령체계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해 저항도 하지 못했지. 그러다보니 주변 상황에 저항하지도 못한 거야. 한스 녀석, 뭐라더라? 어머니를 욕하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다고? 그래서, 참을 수 없어서 스스로 뭘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분노만 했을 뿐이지.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고 절망으로 알아서 기어들어간 녀석일수록 이상하게 악과 깡이 세단 말이야. 복수심도 그렇고. 그런 주제에 쉽게 좌절해버리지.”
??게다가 그런 타입이 힘을 가지면 제일 먼저 복수를 하려 들죠.”
??그래. 그리고 자신을 괴롭힌 자식들을 제일 처절하게 응징하지. 사실, 역사상 폭군이나 그런 존재들은 어렸을 때 괴롭힘을 당한 기억이 많아서 그래.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한스도 그래.”
??그래서 한스를 무인도에 던져놓은 거예요?”
오디는 다른 서류들 사이에 끼어 있는 비밀서류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한스를 대륙의 서쪽 바다에 있는 어떤 무인도에 성공적으로 던져두고 왔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이켈라인상회에서 비밀리에 행한 일이기에 사실을 아는 관계자도 몇 없을 것이다.
나미아는 서류를 모아 똑바로 정리하면서 말했다.
??혼자서 살아보라 그래.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지 되돌아보고. 그리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뿐이라고, 상황에 순순히 따라가면서 시간이란 녀석의 땜질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보라고 해.”
??하지만 한스는 몸이 약하잖아요? 버틸 수 있을까요?”
??아, 그 녀석 병들어 있던데?”
??예?”
나미아는 오디에게 보고서 하나를 내밀었고, 오디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보고서를 받아서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헤― 벌리면서 놀라기 시작했다. 근육성장에 필요한 영양소가 전부 배출되어버리는, 근육성장저하증이라는 희귀한 병명이었다.
??이거… 정말인가요?”
??그래, 이켈라인상회 디렌너스 지부에서 스미스 가문 담당자가 직접 조사한 거야. 그런 병을 안고 있었으니 근육이 자랄 리가 있나. 하여튼, 어린 시절에 좋은 곳에서 살았어야 했어.”
??고쳐주셨어요?”
??응. 이제 한 달 정도 무인도에서 살다보면 야성미가 넘치는 근육을 달게 될걸? 게다가 무인도에서 알아서 깨달았으면 그 세발트인지 코발트인지 하는 녀석들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될 걸. 그리고… 남은 한 달 동안은,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내가 좀 훈련시켜야지.”
보통의 학교도 아닌 사관학교라면 무단결석으로 퇴학당할 수도 있지만, 때마침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가 있던 곳에 지진이 발생해 꽤 많은 건물들이 무너지게 되어서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는 갑작스럽게 휴교를 하게 되었다.
한스가 학교에 무단결석을 한 지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라서 한스의 장기결석은 아예 사라지고 없는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 휴교 예정이 약 두 달 정도의 날짜라서 나미아의 계획에 딱 들어맞는 일정이 되었다.
오디는 그러려니 하고 서류를 읽다가 한 부분에 눈을 고정시켰다. 약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오디는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나미아에게 물었다.
??학생들의 피해가 이상하게 없네요?”
??아, 그거야 미진(微震)부터 시작해서 학생과 교직원을 비롯해 내부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직후에 강진이 닥쳤거든. 교사(敎舍)와 기숙사가 대부분 대파해서 재건축에 들어갔다지.”
??그러고 보니 엊그제 포튼렌에 다녀오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포튼렌은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를 포함하고 있는 도시의 이름이었다. 오디는 나미아의 얼굴에 떠오른 작은 미소를 보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질렀구나.
??대체… 이젠 학교를 무너뜨리시면 어떻게 하세요?”
??내, 내가 뭘?!”
??휴우, 마침 좋은 보고서도 있네요.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 재건축에 사용될 자재와 인력 등의 납품담합에 총 23개 기업이 참여해 본상회에서 5할의 기득권을 얻었다…라. 때마침 회장이신 나미아 이켈라인님의 명으로 건축자재를 입고하던 중이라 타 상회에 비해 높은 우선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 뭔가 더 하실 말씀은?”
??아니, 저기… 난 말이지…….”
우물쭈물하는 나미아를 보면서 오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이켈라인상회의 좌우명이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해도 이건 조금 너무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오디는 결국 총무의 자격으로 납품하는 자재들의 가격을 소폭 인하하라고 결재서류에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항상 사고 수습은 오디의 일이었다.
같은 시작, 어떤 무인도에서는 높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져 새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한스는 소리를 지르면서 우거진 수풀 속을 달려 나갔다. 잔가지에 얼굴이 할퀴고, 온몸이 긁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 누구라도 뒤에서 자신의 몸보다 큰 표범이 달려들기 시작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사, 사람 살려! 누가 좀 도와줘요!”
한스는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질렀지만 며칠째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것은 이곳이 무인도라는 불길한 예감뿐이었다.
분명 그가 잠든 장소는 여관 WISH의 5층 객실이었지만, 눈을 떴을 때는 파도가 일렁이는 백사장의 한가운데였다.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그의 눈에 띈 것은 하나의 자루와 나미아의 메시지가 담긴 쪽지 하나뿐이었다.
[한 달 뒤에 보자. 지금은 5월 1일이야. 그럼 잘 살아남아봐.
― 나미아 이켈라인.]
쪽지에 쓰인 이름 뒤에 성이 왠지 모르게 상당히 거슬렸고,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것이라는 생각이 슬그머니 솟아올랐지만 그는 이내 그가 처한 기막히고 어이없는 상황 때문에 이름에 대한 고찰 따위는 그냥 넘겨버렸다.
…라기 보다, 일단 살아야 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자루 안에는 기껏해야 3일치 식량뿐이었고, 나미아의 말대로 정말 한 달 뒤에 데리러온다면 남은 27일 동안 알아서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옷가지 몇 개와 모포, 단검을 비롯한 몇 개의 서바이벌 도구들은 한스가 사관학교에 들어갔을 때 받았던 생존훈련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더욱이 오늘로 주어진 식량도 끝이 나버렸는데, 때마침 산등성이에서 심히 굶주려 보이는 표범을 한 마리를 만나게 되어 이렇게 추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야아! 난 네 먹이가 아냐!”
??캬아아아오!”
한스의 목소리는 표범에게 있어서 맛 좋은 소시지의 외침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스는 자신이 표범의 눈에는 맛 좋은 한스 소시지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했다.
예부터 식탁 위에 올라가는 메뉴들은 모두 자신이 어떤 형태로 조리되어져 올라갈지 모르는 법이었다. 그것은 유사 이래의 절대적 진리였다. 그것이 진리이든 진미이든 한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으아악! 대체 왜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야!”
한스는 자신이 나미아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차마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도 보이지 않는 섬에서 굶주린 표범에게 쫓겨 다녀야 하는 일을 자신의 일생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표범의 입김이 목덜미에 와 닿을 듯 느껴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등을 찍어버릴 것만 같았다.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자루를 안고 뛰어가면서 끊임없이 수풀에 할퀴어져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스의 꿈은 자유무역 비공정의 정장이 되어 세계를 상대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죽으면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고향에 있는 그의 어머니, 그녀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병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받고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서도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제대로 펴지도 못했다.
??여기서! 죽을 것 같으냐!”
그리고 그의 앞에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끼룩! 끼룩! 끼르륵!
이름 모를 바닷새가 날고, 청량한 바람이 땀 맺힌 한스의 이마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한스는 얼른 다른 곳으로 도망가기 위해서 뒤를 돌았지만, 이미 그의 3야드 앞쪽에 표범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면서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당히 수척해 보이는 표범의 모습은 많이 굶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캬아아아!”
??으, 으으…!”
표범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한스는 그의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한스의 발은 이내 절벽의 끄트머리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발에 채인 돌멩이가 절벽에 부딪히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투둑! 툭! 타악!
한스는 옥죄여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입을 힘겹게 열었다.
??누, 누가 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소리 높여 도움을 요청하려고 할 때, 그의 귀로 나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그가 여관에서 자기 직전에 나미아와 나누었던 대화였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아, 아무도…요?”
??네 삶이잖아? 선택과 행동은 네가 하는 거야! 그걸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가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해!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는 게 두렵다거나 못 미더우면 그대로 죽어버렷! 눈앞에 장애물이 떡하니 있는데 저항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어! 저항해! 저항해야 살 수 있는 거야!”
??하, 하, 하지만… 그 녀석들은 강해요. 제 힘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한스를 보면서 나미아는 혀를 찼다. 패배주의에다 의존주의가 찌들어 일찍이 자포자기해버리는 타입이었다. 세상 살기 가장 어려운 타입이 바로 한스 같은 타입이었다. 뭘 하든 금방 포기하는 의욕 없는 성격이니까.
나미아는 그의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든지. 지금 당장 죽는 거하고 그리 다를 것 없겠지만 말이야. 너 말이야, 꿈을 이루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뭔데요?”
??너 같은 녀석이 두려운 나머지 버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자신을 믿는 마음!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 장애물에 대한 저항정신이야! 너는 뭐야?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잖아?!”
한스는 더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나, 나는…….”
??그럼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든지.”
한스는 품에 안았던 자루를 내려놓았다. 손에는 날을 번뜩이는 1피트 길이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난…….”
??너는 뭐야?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잖아?”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던 한스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자신을 먹이로 취급하는 장애물이 있었다. 다가오는 대로 계속 도망쳤던 두려움이 눈앞에 형상화되어 있었다.
??나는…, 나는…!”
??저항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어!”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표범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표범의 눈에 잔뜩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한스가 있었다.
??살?고? 말? 거?야!”
절벽 위로 소년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5월 14일.
한스는 움막에서 기어 나오며 기지개를 폈다. 그의 팔, 배 그리고 가슴과 등, 다리에서 예전에는 보지 못한 근육이 꿈틀거리면서 용트림을 했다. 어제오늘 다르게 그의 몸에는 근육이 척척 붙기 시작해서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몸을 가지게 되었다.
한스도 요 2주간 있었던 자신의 성장에 상당한 의심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꾸역꾸역 먹어대는 그것이 모두 근육으로 가고 있었다. 훈련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많은 거리를, 훨씬 격렬하게 뛰어다녀도 크게 지치는 것이 없었고, 다음 날에도 피곤하지 않았다.
??크르르르…!”
??여어, 안녕.”
한스는 자신을 보자 몸을 움츠리며 경계태세를 취하는 표범을 보고서는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이미 표범에게 있어서 자신의 서열이 훨씬 높다고 생각했는지 표범은 그 날 이후로 한스만 보면 겁을 내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 무인도의 무법자인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전락한 모습을 보면 조금 우습기도 한 한스였다.
그날, 절벽 위에서 한스는 단검을 들고는 미칠 듯한 기세로 표범에게 달려들었었다. 그리고 표범은 다소 질린 듯한 모습으로 내키지 않는 듯한 격투를 벌였고(물론 한스에게는 생사를 건 혈투였다), 한스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진 표범은 숲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그리고 한스는 처음으로 승리라는 것을 맛볼 수 있었다.
섬에는 표범 이외의 맹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표범도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표범이 더 있을 거란 생각에 한스는 며칠 동안 잠자리를 옮겨 다녔고, 표범이 접근하지 못할 것 같은 자리에서 불편한 잠을 잤다. 그의 몸이 몰라보게 건강해지지 않았더라면 바로 병에 걸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표범 이외의 표범이 보이지 않게 되자 한스는 완전히 안심하게 되어 움막을 세울 여유까지 가지게 되었다.
??자, 이거나 먹어라.”
한스는 땅을 파서 만든 저장고에서 어제 잡아놓은 토끼의 반쪽을 표범에게 던졌고, 몸을 움찔하면서 가죽을 벗긴 토끼의 시체를 피한 표범은 그것의 냄새를 맡더니 그것을 물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스는 그것을 보고 씨익 웃고는 과일 몇 개를 꺼내놓고서 모닥불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마른 풀로 시작해서 작은 가지를 넣고, 불이 충분히 커질 때면 큰 장작을 넣어서 큰불을 붙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던 한스는 피식 웃었다. 혼자서 살아가야 했기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정했고,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서 해쳐나가야 했다.
도구는 충분했다. 자루에는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눈에 빤히 보인다는 듯 필요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고, 생활을 함에 있어 필요한 물건들은 엉성하나마 그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물론 너무 엉성하고, 기본도 안 되어 있어서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새로 만들었고, 어느 정도의 손재주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표범과의 혈투 이후로 한스는 자신을 믿는 방법과 일단 도전해보는 과감함을 갖출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참거나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고맙습니다. 남은 16일 동안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날이었으면 좋겠군요.”
한스는 하늘을 보면서 나미아에게 작게 읊조렸다. 이 섬에서 나가게 되면 꼭 전해주고 싶은 말도 있었다. 덕분에 자신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이다. 한스는 15일 전에 처음 나미아를 찾아갔을 때의 자신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너무나도 먼 과거의 자신처럼만 느껴졌다.
??학교는… 어떻게 될까? 무단결석 한 달이라. 잘리지나 않았으면…….”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전전긍긍하고 있었겠지만, 지금의 한스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탁! 타닥!
모닥불이 힘차게 타올랐고, 한스는 표범에게 주고 남은 반쪽의 토끼를 불 위에 올렸다. 여러 가지를 도전했지만 표범처럼 생식을 하는 것만큼은 해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구분을 잘하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남은 고기를 그늘에 널어서 말려 비상식량으로 사용한다. 섬을 돌아다닐 때 도시락이 되어주기도 한다.
현대인은 참기 힘든 궁핍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지만, 한스는 자신의 성장과 주어진 환경에 감사와 만족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편하니까 몸까지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6월 1일.
??기본부터 시작해볼까? 이제 슬슬 쓸 만해 졌으니까 말이야.”
??저기…, 정말 괜찮을까요?”
??뭐가?”
??그러니까… 한 달 전보다 훨씬 강해져서… 나미아 씨한테 해가 되지 않으려나 싶어서요.”
한스는 자신보다 약간 큰 키를 가졌지만 몸무게는 훨씬 적을 것 같은 나미아를 보면서 망설였다. 아무리 봐도 힘을 쓸 것 같아 보이는 몸매는 아니었고, 절세미녀를 상대로 격투를 벌이라는 말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미아는 한스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면서 그 이유를 눈치 채고는 곧바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얌마. 무인도에서 고작 한 달 살았는데 강해져봐야 얼마나 강해져? 그리고 내가 아무리 가냘프게 생긴 여자라고 해도 내가 진짜 힘쓰면 넌 한 방이야.”
나미아는 팔짱을 낀 채 거드름을 피우며 한스를 내려다보았고, 그래도 한스는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나미아는 쉽게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미아는 그런 한스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는 그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래그래. 여성존중의 정신은 높이 사주지. 하지만 말이야, 네가 지금 그런 거 가릴 때냐!”
나미아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한스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가 가볍게 밀쳤다. 그러자 한스의 몸이 공중으로 부웅 뜨더니 5야드는 밀려나가서 땅에 처박혔다. 그러고서 뒤로 데굴데굴 구른 한스는 바닥에 누워서는 끙끙대기 시작했다.
쿠당탕!
??으그그그…!”
??봤지? 네가 진심으로 덤벼봤자 내 힘의 1푼도 못 넘을 거다. 알았으면 일어나서 덤벼! 힘만 세졌지, 싸울 의지도 없는 주제에 무시당하지 않고 살리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그리고 상대의 힘을 무작정 속단하지 마라.”
나미아는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한스를 향해 비난 어린 말들을 뱉었고, 한스는 얼굴과 속을 동시에 일그러뜨렸다. 함부로 속단했다가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한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오디가 서류들을 들고 여관 안에서 걸어 나왔다. 오디는 잠시 한스가 서 있는 곳을 보고는 자신이 만든 화단과의 거리를 측정했다. 아무리 나미아라고 해도 이 너른 뒤뜰의 끝까지 한스를 날려 보내지는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서 화단이 망가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 그녀는 한결 안심하고는 나미아를 불렀다.
??저, 나미아님.”
??응? 뭐야?”
??말씀하셨던 추가 자재내역에 관한 것입니다.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 재건축을 위한 자재반입과 인력소모의 중간 결산입니다.”
??예? 저희 학교가 어쨌는데요?”
한스는 공군사관학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을 치켜뜨면서 오디에게 물었고, 오디는 나미아의 눈치를 살폈다. 관계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사업 이야기이기도 해서 말을 해도 될 지에 대한 여부를 살피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오디에게서 서류를 받아들고서 한스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아, 네가 나오고 나서 이틀 뒤에 갑자기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서 말이지. 미진이 먼저 발생해서 교내의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그 뒤에 닥친 강진으로 교사들이 폭삭 주저앉았어. 우리 상회에서 재건에 사용된 건축자재와 인력을 공급 중이거든. 그 결산보고서야. 그런데 안 덤벼? 나 배고파. 빨리 아침 먹고서 일해야 한단 말이야. 흙도 개어야 하고. 그리고 너도 할 일이 있어.”
??예? 저도…요?”
??학교가 다시 문을 여는 때는 7월 1일이야. 그때까지는 여러 가지 가르쳐서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게 해야지. 자기 고난은 스스로가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위한 방법론이나 마음가짐을 깨우쳐두지 않으면 나중에 어렵게 되거든. 자, 빨리 덤벼. 늦어지면 아침밥 없다.”
??아, 예엣!”
한스는 재빨리 사관학교에서 가르쳐준 군인무술의 기본자세를 취하고는 곧바로 나미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미아는 서류를 읽으면서 날아오고 있는 한스의 손과 발을 피하거나 쳐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오디와 함께 결산보고의 내역을 다루고 있었다.
??흐음, 목재 가격이 갑자기 올랐잖아?”
??예, 해당 지역에서 외부로 반출하는 물품에 대한 세금을 올리는 바람에 같이 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 물량도 줄어든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좀 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정책이 아닐까 싶은데요.”
휘익! 탓! 파밧!
한스는 정석대로의 정권지르기를 넣고는 올려 차기를 했다. 그라나 나미아는 손바닥만으로 가볍게 주먹을 막아내고는 몸을 살짝 뒤로 움직여서 가볍게 올려 차기를 피했다. 오기가 발동한 한스는 재차 돌격을 감행했지만, 나미아의 시선을 끌어오지는 못했다. 나미아의 시선은 서류에 못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서류를 보며 생각하다가 오디에게 말했다.
??조사원을 보내서 정확한 현지사정을 알아봐. 그리고 더 싼 곳을 수소문하고. 여기 이 수송인력의 지출이 왜 이래?”
??중간에 도적단에 의한 습격을 받아서 생명수당과 상여금이 붙었습니다.”
??도적단?”
“예, 보고서에 적힌 대로 ”봄제비??라는 도적단의 습격이라고 합니다. 신생인 것 같은데요.”
나미아는 옆과 뒤, 앞에서 공격해오는 한스의 엉성하기 그지없는 공격을 마치 숨 쉬듯 피해내고 있었다. 공격에 연계성이 없어서 너무나도 엉성한 모습이었다. 아무리 약골이었다고 해도 사관학교에서 군인무술을 배웠으면 모양이라도 나와야 하겠지만, 지금의 한스에겐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도중 슬슬 배가 고파진 나미아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미아가 한스의 주먹을 잡고는 그대로 반대쪽으로 내동댕이치자 한스의 몸뚱이는 그대로 딸려나가면서 재차 땅을 뒹굴게 되었다.
쿠궁! 털썩!
??으아아! 크으, 아프다…….”
??갑자기 없던 곳에 도적 떼가 나타났다는 거야?”
??아마도요.”
??…낌새가 이상하군. 적당히 몇 명 보내서 도적단을 추적하게 해. 그리고 나머지는 별것 없는 것 같군. 들어가자. 나 배고파.”
??예.”
오디는 나미아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들고서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여관 안으로 총총히 들어갔고, 나미아는 여관의 입구로 향하는 계간을 오르다가 땅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한스를 보며 말했다.
??한스, 빨리 안 오면 아침 없다. 식당에 들어오기 전에 가볍게 씻고 와.”
??좀… 부축이나…….”
??남한테 의지하지 마!”
한스의 마지막 말은 깨끗하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점심하고 저녁은 이곳에서 먹고 오도록 해.”
??예?”
??아, 물론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도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그러니까 웨일즈 씨. 마음껏 부려먹어 주세요. 이래 봬도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의 생도거든요. 쓸모 있을 거예요.”
나미아의 말에 껑충한 키가 약간 말라 있는 몸을 더욱 말라 보이게 만들며, 작은 안경을 쓰고 있어서 더더욱 말라 보이는 남성이 작게 웃었다.
??그래요? 이거 큰 도움이 되겠는걸요? 하핫.”
??자, 잠깐 나미아 씨!”
??그럼 수고. 저녁 먹고 돌려보내주세요.”
나미아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뱅그르르 턴해서 자리를 벗어났고, 웨일즈에게 어깨를 잡힌 한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총총 걸어 나가며 점점 멀어지는 나미아와 생긋 웃고 있는 웨일즈를 번갈아 보았다.
??이름이 뭔지?”
??예?”
??난 웨일즈라고 하지요. 힐텐펜스 안스란교단 직속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관리인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하, 한스 스미스라고 합니다…만, 대체 이건…?”
웨일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어보고 있는 한스를 보면서 빙긋 웃었다. 키가 2야드에 달하면서 남자치고는 메마른 몸매에 안경까지 쓴데다가 눈도 작아서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유약한 느낌을 주는 웨일즈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자신 같다고 한스는 생각했다.
??아, 이야기를 못 들었나요? 앞으로 한 달 동안 이곳 일을 도와주기로 나미아 씨가 말씀하시던데요?”
??예. 예에?”
??그러고 보니 공군사관학교 소식이라면 저도 알고 있어요. 앞으로 한 달 뒤에 다시 문을 연다고 했으니까 나미아 씨의 말씀대로 한 달 동안 잘 부탁합니다.”
웨일즈는 말이 모두 정해진 것처럼 말했고, 한스는 어이가 없었다. 기껏 몸도 튼튼해지고 언제라도, 몇 번이라도 세발트 일파를 깔아뭉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미아는 그녀의 말대로 상당히 강한 것 같았기에 한 달만 잘 배우면 세발트 일파는 물론이고 그 할아비까지 감당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나미아는 오전 중에 모든 것을 끝내놓고서 아침 먹은 배가 꺼지기도 전에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한스는 분명 그녀를 따라오면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따라 나온 것이지만 기껏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고아원의 잡역부(雜役夫)라니! 설마하니 일을 돕는 것으로 체력을 길러줄 계산이었다면 완전히 틀린 계산이다.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한스의 체력은 몰라보게 늘었기 때문이다.
??아…, 음, 저기…….”
??당혹스러울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앞으로 한 달 동안 일꾼이 없어서 말이죠. 신전에서도 일꾼을 보내는데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해요. 조금 일찍 올 수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좀 부탁하면 안 될까요?”
한스는 문득 웨일즈의 뒤로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고아원이 아니라 부랑자 수용소가 들어서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황량한 곳이다. 그의 생각에는 외곽지역 방향으로 꽤나 많은 거리를 온 것 같았는데, 이런 곳이라면 손도 많이 가고 힘도 들 것이다. 지켜주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게다가 이곳의 관리인이라는 웨일즈는 남자 주제에 빼빼 말랐으면서 성격도 생긴 모습대로 유약한 성격 같았다. 이런 사람이 이런 뒷골목에서 고아원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알 수 없는 이유였다. 하긴 고아원은 안스란교의 것이니 고아거래소나 마찬가지인 다른 고아원들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 있어서야 운영이 잘될지가 의문이다.
그때 한스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렇구나! 나미아 씨는 나더러 이곳은 지키면서 실전을 연마하라는 소리였어! 확실히 이런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분명 신전에서 보낸다는 일꾼도 사실은 신관전사겠지? 신관전사라면 불러들이거나 기본 교육을 시키는 데 한 달 정도 걸리는 건 당연할 테니까.”
나미아의 깊은 뜻을 깨달은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어서는 웨일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아아. 정말 다행이군요. 한스라고 부를게요. 괜찮지요?”
??아, 예. 그리고 말 놓으세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음…, 알았어. 어, 그러…지.”
반말이 익숙하지 않은 웨일즈는 한두 번 버벅거렸고, 한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이곳을 지킬 책임감이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무인도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담력도 늘었고, 자신감도 엄청 붙었다. 고아들이 있는 곳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군인으로서의 사명감과 막중한 임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의 자신감을 부채질했다.
??자, 그럼 들어가지. 애들을 소개시켜줘야 하니까.”
??예, 웨일즈 씨.”
한스는 웨일즈를 따라서 후줄근한 고아원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인도에 던지고, 일꾼으로 팔아넘기고…….”
??응? 무슨 그런 험악한 소리를.”
??사실이잖아요. 유명한 공방의 도공으로 있던 사람의 제자였던 웨일즈 씨에게 도예를 배우는 대신 한스를 일꾼으로 보낸 거잖아요.”
??나는 단지 웨일즈 씨가 한스로 인해서 남는 시간을 내 쪽에 조금만 할애해 달라고 한 것뿐이야.”
나미아는 찰흙이 올려진 물레를 돌리며 손으로 흙을 만지며 그릇 비스무레한 무언가를 만들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한 점의 의심이나 터럭만 한 후회도 보이지 않았다. 오디는 허리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저기 말이죠, 한스의 노동력과 웨일즈 씨의 도공을 교환한 거죠?”
??응. 그게 왜?”
??세간에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 거래라고 해요. 한 상회의 주인이면서 거래의 개념도 아직 파악 못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아, 그런가? 같은 의미였구나. 뭐, 아무렴 어때. 아, 또 망가졌다.”
나미아는 혀를 차고는 무너진 진흙을 다시 뭉치고 반죽하기 시작했다. 연습용으로 사용하는 흙이라서 이제는 많이 말라 있었지만 나미아는 물을 뿌려가면서 끊임없이 물레질을 하고 있었다. 작업실이라고 꾸며둔 곳에는 그럴싸한 아궁이도 있고 건조대도 있었지만 그것들이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미아가 제대로 된 그릇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렇게 손님을 방관하는 것이 목적이에요?”
??물론 아니지.”
“그럼 대체 ”책임진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어디까지 책임지면 되는데?”
나미아는 열심히 흙을 개어 다시 찰흙 상태로 만들고는 물레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흙덩이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하고, 나미아의 손이 다시 조심스레 움직이면서 그릇의 모양을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예?”
??어디까지 책임지느냐고. 시점이나 거리, 장소. 아무거나 대봐.”
??그야… 끝까지죠.”
??그래, 끝이야. 즉, 결과까지 책임지는 거지. 다시 말해 결과를 책임진다는 것. 결과만 책임지면 의무는 다 되는 거잖아?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
뭔가 논리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오디는 일부러 지적하지 않았다. 나미아의 개념상 저것이 옳은 것이다.
??나미아님.”
??왜?”
??하나의 일을 해결하는 방법에 나미아님의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건 뭐라고 부르시겠어요?”
??내 방식이 아닌 것? 당연히 틀린 방식이지.”
오디는 골이 아파 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한 가지를 밀고 들어가는 성격은 좋지만 제발 다른 사람의 말도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아는 세심하게 불쑥 올라온 흙덩이를 세심하게 매만지면서 말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내가 한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한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해. 물론, 돈이 없으니까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지만. 어쨌든 한스는 스스로 뭔가 한다고 했으니까 스스로 해야겠지. 내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 경험은 직접경험이 최고거든. 뭔가를 느끼고 싶으면 스스로 겪어보는 편이 제일 낫잖아?”
??그래서 고아원에 팔아 넘기신 건가요?”
??팔아 넘겼다니. 오디, 언어순화 좀 해. 상회의 총무라는 애가 왜 그렇게 계산적이니?”
??회장이 이러니까요.”
??응? 뭐지? 나 방금 스쳐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설마요. 기분 탓이겠죠.”
오디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고, 나미아는 물레에서 손을 떼고는 뚱한 표정으로 오디를 보다가 다시 물레로 손을 옮겼다. 그리고 흙을 매만지면서 계속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한스가 알아서 느끼겠지. 내가 제공하는 것은 변화할 수 있는 계기. 변화는 스스로의 경험치를 부어서 이루는 거야. 그러고 나면 괜찮은 소년 하나 탄생하겠지. 변하지 않거나 느끼는 바가 없다면? 느끼도록 해줘야지. 걱정하지 마. 제대로 책임은 질 테니까, 진정하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네, 네. 여관의 모토가 언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지만요.”
??어머? 그런 무책임한 발언이라니. 모토는 말이지, “끝만 좋으면 모든 게 좋다”라고.”
??이런 회장으로 상회가 돌아간다는 게 기적이야…….”
오디는 한숨을 내쉬면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갔고, 물레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나미아는 오디의 뒷모습을 보면서 불평과 협박을 쏟아냈다.
??이번엔 제대로 들었어! 그런 말하고 도망가기야? 야아! 오디잇! 요즘 들어 좀 삐딱해졌는데, 자꾸 그러면 갑자기 방에 쳐들어가 덮쳐버릴 거야! 으와아악?! 또 망가졌어! 꺄아! 흙 튄다! 아악!”
??물레에서 발이나 떼요.”
오디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6월 3일.
그 뒤로 시작된 한스의 일과는 단조로운 일들이었다. 예를 들자면 서른여섯 명의 아이들이 마실 물을 떠온다든가, 빨아놓은 옷가지를 말린다든가, 음식물을 담은 수레를 끌어온다든가 등의 일이었다. 알려주기만 하면 할 수 있는 육체노동이었기 때문에 한스는 상당히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한스, 장작은?”
??조금만 더하면 끝납니다.”
??역시 한스구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그럼 끝나고 바로 식당으로 와.”
??예, 웨일즈 씨.”
한스가 온 뒤로 웨일즈의 부담이 확실하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웨일즈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함께 고아원을 운영하느라 일인다역(一人多役)을 실행 중이었다. 대체적으로 육체노동이 그중 하나였는데, 그것을 한스에게 전담함으로써 고아원의 다른 쪽에 자신의 힘을 돌릴 수 있었다.
휘익! 쩌억!
마른 장작이 도끼에 맞고는 바로 두 동강나서 굴러 떨어졌다. 한스는 쪼개진 장작의 크기를 살펴보고는 자신이 해둔 장작더미 위로 던져놓았다. 기분 좋은 땀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한스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었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휴우! 다 끝냈나?”
한스는 도끼를 내려놓고서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슬슬 배고 고파오는 것이 점심때가 다 된 모양이었다. 먹는 것은 조금 부실하기는 하지만 이런 빈민가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서는 꽤 좋은 편이었다.
??와아! 밥이다!”
??인석들아, 뛰지 마.”
??한스 형! 같이 가요! 응? 응?”
??하핫, 잡아끌지 말라고.”
계단에서 우르르 내려온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한스를 에워싸고는 그의 손을 잡아 식당으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많이 친해져서 애들도 한스를 믿고 잘 따라주고 있었다. 웨일즈로서는 또다시 한숨 돌릴 수 있기도 한 일이었다.
묽은 수프에 호밀빵과 맛있게 먹기에는 조금 날짜가 지난 듯한 과일이 고아원 사람들의 점심식사였다. 대부분이 값싼 곡물로 이루어진 식사였다. 고기는 없었다. 몸이 약하거나 병에 걸린 아이들에게만 고기가 주어지게 되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것을 우려낸 수프가 주어지게 된다.
열악한 식량사정이지만 고아원에 있는 서른여섯 명의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인만큼 서로를 돌봐주는 마음이 더 강한 것이다. 어린아이들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어른들의 모여 있는 곳에서 이런 식의 생활은 많은 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커가면서 받아들인 수지타산의 계산을 반복하며 현실을 직시해 이기적으로 되는 어른들에 비하면 아이들은 훨씬 선량했다.
한스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졸업을 하기 전까지는 일반 군인보다도 낮은 계급을 달고 있는 사관학교 생도들은 건강한 장교가 되기 위해서 상당히 신경 쓴 음식물을 섭취하게 된다. 일반 중산층 가정의 식사보다 조금 더 품질이 좋다. 그런 생활에서 순식간에 빈민가로 곤두박질쳤지만 그래도 한스는 만족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무인도에서의 한 달을 겪었고, 굶주림이나 열악한 식량사정에 대해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웠었다. 이 정도의 식사는 한 달 전의 그에 비하면 만찬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고급스러웠다.
??자. 그러면 우리 모두 일용한 양식을 주신 여신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시다.”
??네―!”
아이들이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안스란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한스 역시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운 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스란에게 기도했다.
??저 헤르키엘과 같이 중간의 위치에서 만물을 굽어 살피어 죽은 자들조차 어여삐 여겨 스스로 신위를 얻으신 위대한 여신이시여…….”
웨일즈의 주기도문(主祈禱文)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스 역시 기도를 드리며 안스란교의 직속 운영 고아원이기는 했지만 꽤나 후원이 열악하다는 사실도 살짝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총본산이 있는 도시의 직속 고아원인데 이렇게 지원이 부실하다는 것은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럼 다들 점심 맛있게 드세요.”
??잘 먹겠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경건한 신자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식사가 시작하고 나자 아이들의 모습은 곧바로 개구쟁이의 그것이 되었다. 매우 활기차고 매우 떠들썩한 식사시간이었다. 아이들의 먹통이 조금 작다는 것이 이럴 때는 큰 위안거리라고 한스는 생각했다.
??늘 그렇지만 아이들에겐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이런 환경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아이들은 정말 대단하지?”
??그러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지원이 빈약한 거죠? 안스란의 총본산이 있는 곳인 만큼 다른 곳과는 좀 많이 다를 것 같았는데요.”
??신의 뜻이겠지. 그래도 이 정도의 지원이라도 있으니까 우리 아이들이 먹고살 수 있는 거야.”
??긍정적이네요. 웨일즈 씨는.”
한스는 딱딱한 호밀빵을 수프에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웨일즈의 말대로 그것은 신의 뜻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신이라면 조금 더 선민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매일 찾아드는 순례자나 신전에 용무가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안스란의 본산이다. 그러니 돈을 벌고 싶지 않아도 벌게 되어 있을 텐데 그것을 사회복지에 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너무나 많은 곳을 도와주다보니 그 많은 돈이 전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받는 것 이상으로 베풀다보면 다른 쪽들은 모자라기 마련이다.
신의 뜻이든, 신관들의 일이든 한스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먹는 것이 약간 부실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편안하고 즐겁기까지 한 생활이었다. 게다가 특별히 보살펴야 할 점도 없어서 책임감을 짊어질 필요도 없었다.
??나미아 씨는 왜 나를 여기까지 보낸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애써서 나미아의 생각을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가는 밀려들어오는 의문의 홍수에 휘말려 혼이 빠져나갈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나미아를 이해하느니 차라리 조각구름을 보고 점을 치는 편이 더 나으리라.
??아, 맞아. 밥 다 먹고서 있다가 지붕 좀 고쳐줘.”
??예, 연장통은 계단 아래 있는 거 맞죠?”
??그래, 부탁할게.”
웨일즈는 어느새 식사를 끝내고는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설거지는 스스로 하는 것이 이곳의 규칙중 하나이다.
한스는 호밀빵으로 남은 수프를 긁어내면서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되려니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는 편안한 나날이 계속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꼭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법은 아니었다.
와장창! 챙그랑!
??그, 그만 두세요! 네?!”
??시끄러! 너희들이 여길 나가지 않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콰당탕! 쿠당!
??꺄아악!”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한스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지만, 고작 4층짜리의 계단이 왜 이렇게 길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영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제일 아래층에서 난동을 피우는 괴한들로 시끄러웠다.
??대체 뭐지?”
한스가 한창 땀을 흘리며 지붕에 널빤지를 대고 있을 무렵, 왠지 좋지 않은 공기를 풍기는 남자 여럿이 고아원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원래 이 지역 부근이 그런 부랑자나 무뢰배들이 많다보니 그러려니 싶은 한스는 다시 지붕을 고치기 시작했는데, 그 사람들이 고아원에 난입해서는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스가 1층에 도착해서 홀을 내려다봤을 때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창문은 산산조각으로 깨져서 유리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부서진 테이블과 의자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아이들은 홀의 한쪽 구석에 몰려서 겁먹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분노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가라고 할 때 나갈 것이지 왜 아직까지 여기서 뒹굴거리고 있는 거야?! 말이 말 같지 않게 들리나 보지? 하긴, 지 애비 어미가 버린 자식들이니 사람 말 오죽 안 듣겠어? 앙?!”
콰작!
팔뚝에 커다란 흉터자국이 있는 사내가 한껏 소리 지르며 발을 들어 둥근 테이블을 내려쳤다. 순식간에 테이블이 쪼개지면서 조각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 소리에 어린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렸고, 조금 큰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행패를 부리는 다섯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그 눈은! 눈 깔아! 새끼들아!”
콰당탕!
남자가 걷어찬 의자는 한스가 있는 계단까지 날아갔고, 그 다섯의 눈에 한스가 들어왔다. 한스는 엉망진창이 된 홀과 겁에 질린 아이들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저런 작자들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당신들… 대체 뭐야?”
??아앙? 뭐냐 저 조그만 녀석은? 저런 녀석도 이 돼지우리에 있었나?”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어쭈? 꼴에 큰소리도 지를 줄 아네?”
다섯 명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는 조금 전 테이블을 박살낸 사내였다. 그는 한스를 보며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치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한스에게 말했다.
??꼬마야, 어른들의 일에 끼어들면 다친단다.”
??어른이면 이렇게 행패 부려도 되는 거야?!”
한스는 깽판을 치고 있는 저 다섯 명의 모습에서 세발트 일파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저 이죽거리는 모습이나 한껏 어깨를 피고 다니는 모습은 사람을 괴롭히길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허어? 거참 기개가 좋군. 어른들의 사정에 함부로 나서지 마라, 꼬마야.”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무작정 때려 부수는 사정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아!”
한스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당당하게 나섰다. 나미아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고아원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위협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무뢰배들로부터 신관전사가 오는 한 달 동안 고아원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여겼다.
다섯 명의 무뢰배들은 자신들의 앞에 당당하게 나선 소년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아이인 것이, 자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꼬마야, 네가 처음이라 모르나본데. 우리들한테 함부로 하다간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거다.”
??고아원에 들어와서 행패 부리는 놈들이 뭐가 잘났다고?!”
이쯤 되면 아무리 꼬마라고 할지라도 봐줄 수가 없다. 팔에 흉터가 난 사내가 상당히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던 다른 사내에게 눈짓했고, 눈짓을 받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한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일에… 함부로 끼어드는 게 아니다, 꼬마야!”
콰앙!
한스는 자신에게 걸어오던 험상궂은 남자가 걷어찬 의자를 황급히 피해냈다. 의자는 그의 뒤로 날아가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뒹굴었고,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한스는 그대로 눈을 부릅뜨면서 자신을 공격한 남자의 품에 파고들어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퍼억!
??크어…억!”
남자는 명치를 감싸 쥐면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고, 한스는 긴장한 나머지 거칠게 뛰는 심장에서 발산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앞에 약한 이들을 핍박하는, 세발트 일파와 똑같은 녀석들이 있었다. 이전까지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히면서 모멸하던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 한스는 쓰러진 남자의 턱을 그대로 올려 차버렸다.
빠악!
??커어… 어….”
남자의 몸이 휘청하더니 풀썩 쓰러져서는 미약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기절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스의 행동에 남은 네 명의 남자는 인상을 구겼다. 고작해야 열여섯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 한 명의 어른이 무력하게 쓰러진 것이다.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말이다.
??허어? 이 자식이?!”
한스에게로 다른 두 명의 남자가 재차 달려들었고, 한스는 그쪽으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시선을 보내었다. 한스의 눈에는 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오는 “적”이 보였다.
??으아아―!”
한스는 길게 소리치면서 그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두 남자의 거리는 한 발자국 남짓이었고, 신장은 한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한사람에게라도 잡히면 그것으로 몰매를 당할 것이 확실했다. 한스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바닥에 앉으면서 앞의 남자에게 다리를 걸었다.
??으윽?!”
뛰어들던 남자가 멋지게 고꾸라지는 사이, 한스는 바닥을 박차듯 지치며 뒤에 있던 사내의 복부에 온 힘을 가득 담은 주먹을 찔러 넣었다. 마치 손이 근육과 내장을 꿰뚫고 빨려 들어가는 느낌의 클린 히트(Clean Hit)가 작열했다.
퍼억!
??흐어…억?!”
달려들던 남자가 멈칫하고서 무너져 내릴 때, 기세를 늦추지 않은 한스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남자의 등위로 팔꿈치를 내리꽂았다.
콰악!
??커억!”
섬전(閃電)과도 같은 엘보 피니쉬(Elbow Finish)에 일어서려던 남자는 바닥에 가슴을 호되게 부딪치고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한스의 주먹에 맞은 사내는 통증 때문에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싸움에서는 기세가 중요해. 한번 기세를 타면 끝까지 몰고 들어가. 그러면서도 신중함을 잃지 마. 몸의 힘도 중요하지만 머리의 힘이 더 중요해.”
나미아의 충고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한스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자신의 기세를 타고서는 단번에 두 명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한 달하고 조금 전의 자신과 비교하자면 이것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발전이었다.
??허, 꼬마가 제법 하는걸!”
??당장 나가! 여긴 당신 같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행패부릴 곳이 아냐!”
한스는 흉터 사내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당당하게 외쳤다. 그의 뒤에서는 고아원의 아이들이 응원의 눈빛과 다소 불안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고, 한스에게 지적 받은 흉터 사내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그의 얼굴 위에 있는 흉터가 더욱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네?”
부하들이 나가려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한 흉터 사내는 한스에게 척척 걸어왔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은 아니었지만 척 봐도 범상치 않은 몸을 가진 사내가 다가오자 한스는 일단 긴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미아가 가르쳐준 대로 “선수필승”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선제공격을 할 때는 소리 없이 입을 다물고 숨을 멈춘 채로 공격할 것. 길게 기합을 내지르는 건 단지 폼만 잡으려는 것뿐이야. 싸움은 격렬한 전신운동이기 때문에 호흡조절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나미아의 충고는 그에게는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그는 나미아의 충고대로 갑작스럽게 달려 나가면 아무런 소리도 지르지 않으며 흉터 사내의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을 질러 넣었다.
우득?!
??으아악!”
한스는 손목이 부서지는 느낌과 함께 뒤로 두어 걸음 밀려났다. 흉터 사내는 배를 툭툭 두들기면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말했다.
??내 부하들이 좀 야들야들해서 네가 기고만장해졌나본데, 원래 너 같은 새끼가 함부로 기어오를 만큼 우리가 만만하지 않단 말이다!”
후웅! 퍼억!
흉터 사내의 다리가 휘둘러지고, 그것에 얻어맞은 한스는 다리가 날아온 반대 방향으로 뒹굴게 되었다. 팔을 세워서 어떻게든 막아내기는 했지만 몸에 일시적으로 닥친 충격은 몸을 가누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커헉! 허억!”
격하게 기침을 하는 한스에게 천천히 다가간 흉터 사내는 주먹을 들어 등짝을 내리쳤다.
콰악!
??으어억!”
한스는 그대로 바닥에 파묻힌 채 꿈틀거리고 있었고, 흉터 사내가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리자 한스의 몸이 잠시 경직하더니 그대로 추욱 늘어졌다. 흉터 사내는 그런 한스를 보더니 혀를 차고는 뒤에 있던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 손짓의 의미는 한스를 완전히 뭉개놓으라는, 이를테면 본보기 같은 것이었다.
두 명의 부하는 조용히 다가와서는 쓰러진 한스를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퍽! 퍼억! 파박! 뻐억!
단조롭지만 둔탁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끔찍한 구타음이 질린 듯한 아이들의 머리 위로 흘렀다. 검은 실루엣이 쓰러진 작은 실루엣을 마구 짓밟는 모습은 아이들의 눈에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쓰러져서 운신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한스는 그렇게 마구 밟히고 채이다가 이윽고 기절해버렸다. 흉터 사내는 기절한 한스를 보고서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퉤! 조만한 것들이 지 주제를 모르고 나댄단 말이야. 야! 너희들도 이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빨리 건물 비워라. 응? 얘들아, 가자!”
흉터 사내는 쓰러진 부하들을 부축하는 다른 부하들과 함께 고아원을 나갔고, 엉망으로 어지럽혀진 홀에 한스가 조용히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고,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상갓집같이 고아원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