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Guest.01: 첫 손님.-Part1: 그의 이름은 한스 스미스. (3/49)

Guest.01: 첫 손님.

Part1: 그의 이름은 한스 스미스.

아우레스력 1875년, 안스란력 435년 4월 30일.

개점하고서 첫 달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나미아와 오디가 물건을 나르느라 밖에서 보낸 몇 시간은 탁월한 광고 효과를 가져와 개점일부터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게 하는 성과를 보였다.

그전까지 교육을 확실하게 마친 종업원들은 입고 이는 유니폼의 가슴에 금색의 필기체로 “WISH”라는 네 글자를 수놓고서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아름답다는 두 여성을 보기 위해서 왔지만 나미아와 오디는 그 날 이후로 바깥출입을 삼가고 행여나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기면 알아볼 수 없게 후드를 눌러쓰는 등의 변복(變服)을 했다.

그래서 처음 일주일은 얼굴 마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사람들로 분주하게 되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슬슬 여관의 영업이 되기 시작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문을 연지 한 달도 안 되는 여관 치고는 매우 성과가 좋다는 점이었다.

여관 “WISH”의 장점으로는 질 높은 서비스에 비해 싼 가격이었다. 즉 다른 여관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비해 좋지만 가격은 더 싸다는 것이 장점으로 적용되었다. 애초에 이켈라인상회가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소모품을 구입하는데 있어서 원가로 제공받기 때문에 식사류나 술값 등은 자연스럽게 값이 싸지게 된다.

음식값이 싸지면서 숙박요금은 자연스럽게 할인되어 실제로는 다른 여관에 비해 서비스 요금을 덜 받는 것도 아니지만 전체적인 가격이 내려간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로 인해서 일순간이지만 힐텐펜스의 숙박업계가 요동을 치게 되었다. 압도적으로 싼 소모품의 가격과 똑같은 질의 서비스만 놓고 보자면 사람들이 어디로 가게 될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힐텐펜스의 여관업체 연합에서는 이켈라인상회의 물건을 받지 말자는 식의 강경책도 나왔으나, 그 자리에 난입(!)한 나미아 이켈라인이 “체인점을 낼 생각도 없고 확장할 생각도 없다. 그냥 돈 많은 사람의 변덕 정도로 생각해주길 바란다”라는 뜻을 직접 말했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각서까지 썼다.

이켈라인상회의 인지도가 조금 떨어질 뻔한 이 일은 상계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대로, 그러니까 변덕 많은 나미아 이켈라인이 자기 없이도 돌아가는 상회에 질린 나머지 뛰쳐나와 초심(初心)으로 돌아간 거라는 말을 사람들이 그대로 믿기 시작하면서 상회의 인지도는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물론 나미아가 차린 여관이기 때문에 상회의 물건을 원가 수준으로 들여와서 상대적인 가격이 싸다는 점에는 다들 불만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는 장사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더 나은 상품 혹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장사의 원칙 중 하나였고, 나미아가 사용하는 것 역시 자신의 능력으로 차린 상회였기 때문이다. 불법적인 일도 없고, 오히려 상인이라면 눈여겨봐야 할 경영 방식이었다. 여관에서 한 업체를 택하면 계약기간동안 고정적으로 물건을 제공하여 고정 이익을 챙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상회는 물건을 도매가격으로 넘기게 되어 자신의 메리트를 과시하게 된다. 여관 쪽에서도 입찰경쟁으로 더 싸고 좋은 쪽을 고르게 되는 일이고, 상회 쪽에서는 고정이익처가 생기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둘의 이익을 감안한 것이기 때문에 상회는 동화 한 닢이라도 더 벌려고 아우성이고, 여관에서는 동화 한 닢이라도 깎으려고 아우성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샌가 둘이 원하는 바가 틀려지게 되면서 불화가 생기기도 한다.

이것을 단방에 해결한 것은 나미아였다. 바로 여관 자체를 상회의 하부로 두는 것으로, 가격경쟁을 심화시키면서 때때로 불법자금이 움직이게 하는 상회 선출작업을 제외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여관 측에서는 상회에서 들여오는 원가의 물건 덕분에 전체 서비스 이용료를 싸게 책정할 수 있고, 손님 측에서는 다른 곳과 비슷한 서비스에 전체 요금이 내려간 금액을 지불하게 되어 훨씬 경제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식사비를 따로 지불하는 것이 아닌 숙박비를 합산해서 지불하는 후불제일수록 이런 시스템은 더욱 빛을 발한다. 나미아는 그것을 노린 것이다.

일주일간 사람들이 몰리면서 그 끝내준다는 미인은 보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훨씬 나은 서비스라는 점에서 “WISH”는 사람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처음에 한번 바쁘게 일했던 직원들은 그 일주일 동안의 최고 바쁜 사이클을 몸에 익히게 되었고, 그 사이클이 끝나고서 손님이 천천히 오가는 상황이 되자 지금은 여유 있는 표정과 몸짓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직원의 숫자를 약간 모자를 듯하게 배치했기 때문에 그들은 집단이라는 틀 속에 있으면서도 반목하려 해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분쟁이 일어날라치면 금세 그것이 생업의 지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자 지금은 서로가 알아서 친해져 한마음 한뜻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만들게 된 장본인 나미아는 그녀와 오디가 머무는 5층에 만들어진 테라스 테이블 위로 추욱 엎드렸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는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웅…. 따분하다….”

봄의 한가운데에 있는 날씨라서 그런지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햇살이 참 따사로웠다. 적당히 흔들의자라도 가져다놓고서 기대어 잠을 자기에 딱 좋을 날씨였다. 정말이지 이래저래 휴식을 취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지만, 나미아는 따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이스티를 가져다놓고 쉬고 있는 것이 그녀에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미아는 상체를 일으켜서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철푸덕 엎드렸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붉은 머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르륵.

뚱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보던 나미아는 그것을 가지고 빙글빙글 꼬면서 무료함을 달래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으아앙! 심심해!”

??나미아님, 또 왜 그러세요?”

??왜냐니? 심심하잖아! 개점한 지 벌써 25일인데 우리 쪽으로 오는 손님이 아무도 없어!”

??그거야 저희 여관이 특별한 여관이니까 그렇죠.”

“WISH”의 주인과 관리인은 운영에 대해선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총 지배인인 아이덴에게 대부분의 운영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버벅거리던 그도 이내 훌륭하게 적응해서는 매일 밤 저녁식사가 끝난 후 하루 결산을 외워서 보고할 정도까지 되었다.

여관의 간판에 숨겨진 글자를 보고 5층으로 찾아오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종업원들에게는 지시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냥 여관인 “WISH”가 아닌 [환상여관 「WISH」]를 보고 찾아온 사람을 5층으로 안내하라는 것이 그 지시였다.

여관 간판의 특성상 인연이 닿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글자였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나미아의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이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개점식을 치른 지 23일이 지나도록 “특별손님”은커녕 날아드는 새 한 마리도 없었다.

쿠르르르르….

길쭉한 타원형의 부상구(浮上球)를 가진 테트로타입 비공정(飛空艇)이 꽤 높아 보이는 상공에서 천천히 기계음을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미아는 고개만 살짝 들어서 정류장을 향하는 비공정을 보며 한탄했다.

??아아, 저기에 우리 손님이 타고 있었으면 좋겠다.”

??마냥 기다리시지 말고, 나미아님도 뭔가 취미를 길러보시는 편이 어떠세요?”

??취이미이?”

오디는 1층 뒤뜰 한편에 마련된 화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직원 숙소와 딱 붙어 있는 부분에 만들어진 화단엔 아직 꽃봉오리를 닫은 채 피어나지 않는 꽃들과 이른 봄의 햇살을 받아 피어난 꽃을 비롯해 여러 화초들이 아름답게 나 있었다.

??저 화단 네가 만들었지?”

??예, 그런데요?”

??그럼 됐어. 남이 만든 거에 손대고 싶지 않아.”

오디가 만든 화단에 괜히 초보자가 들어서서 망치고 싶지 않았던 나미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째 올해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작년 이맘때만 하더라도 제국 남부에서 이켈라인상회의 지부를 하나 더 세우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상회의 전반적인 운영에서는 손을 떼고서 이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라 다시 상회의 일을 건드리기가 꺼려지고 있었다.

현재 그녀와 오디가 하는 일은 상회의 최고 중요사항들에 대한 결재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보고서만을 받는 것이었다. 나미아는 차라리 상회에서 일할 때가 더 활동적이라는 생각에 지루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디는 그런 나미아의 표정을 보면서 뭔가 나미아에게 흥미가 있을 만하면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생각했다. 나미아는 내세우길 좋아하는 성격이라 아는 사람이나 곁에 있는 사람이 먼저 시작한 일은 손대지 않았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자신이 먼저 시작해 다른 이들에게 뻐기는 기분을 내면서 그 일을 하는 힘을 얻곤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오디는 여러모로 고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번 시작한 일은 달인이 되다시피 할 때까지 연마한다는 것이었다. 흥미를 가지고 한 가지에 매달리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이 그것에 달인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다는 근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나 어머니들에게 현저하게 못 미치는 요리실력을 끌어올렸고, 검술이나 마법도 죽어라 파고들었다. 상회의 경영 역시 수십 권의 경영학 책과 수백 번의 실습을 통해 감각을 익히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긋하게 시간을 들여 익힐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한 오디의 머리에서 반짝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럼, 도공(陶工)은 어떠세요?”

??도공?”

??예, 사이에그롭 같은 데는 도자기를 빚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서 도자기를 굽는 일에 매진한다고들 해요. 취미로 배우신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나름대로 집중할 수 있는 일이래요.”

??정말? 그거 괜찮겠다! 만약에 부엌에서 접시나 그릇을 깨먹어도 새로 만들어 둘 수도 있겠네!”

??예시가 조금 이상하지만…….”

??응? 뭐라고 했어?”

??아니요, 아무것도.”

오디는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대답했고, 나미아는 조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뻔뻔하기까지 한 오디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낼 수는 없었다. 나미아와 함께 살아온 지 어언 400년이 넘은 오디의 표정 숨기기는 그야말로 천하일품이라 할 수 있었다.

오디는 나미아가 더 이상 의심을 하기 전에 얼른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럼 그걸로 하실래요?”

??어…, 응. 그러지. 여관 지하에 공간이 많이 남으니까 그곳을 이용하면 되겠네. 지하실을 크게 지어두길 잘했지. 음음.”

??단지 그걸 위한 거예요?”

오디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의 숙소와 여관을 이은 지하통로까지 될 큰 규모의 지하실이 단지 그녀의 취미를 위해 만들어진 거란 말인가? 오디는 차마 생각을 말로 꺼내지는 못하고는 나미아의 흥미가 식기 전에 그녀가 활활 타오르도록 얼른 재료와 도구를 준비하고자 했다.

??그럼 상회로 가서 필요한 걸 구해볼게요.”

??아, 나도 같이 가!”

나미아가 막 캐스팅(Casting)을 시작하려는 오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고, 빛 무리가 그녀들을 감싼다 싶더니 그녀들의 몸이 테라스에서 사라졌다.

따스한 햇살만이 테이블 위의 아이스티를 비추고 있었다.

이래저래 방만 한 운영태도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본 비공정 테트로―AS31345호는 10분 뒤 힐텐펜스 정류장에 도착하겠습니다. 본 비공정의 운행은 힐텐펜스까지이며, 다른 지역으로 가실 분들은 표를 확인 후 다른 비공정이나 교통수단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아, 벌써 왔나?”

??느리긴 해도 편안했지 ?”

??거기 내 가방 좀 내려줘!”

??여보, 그만 일어나요.”

승무원의 안내방송과 함께 비공정에 탑승했던 승객들은 내릴 채비를 했다. 서서히 비공정이 땅으로 향하면서 약간의 진동이 있었지만 내부의 수직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강과 상승을 하는 비공정이었기에 승객들은 평지에 있는 것과 같이 움직일 수 있었다.

??어머? 학생. 안 내릴 거야?”

??아, 아니요. 내려야죠.”

한 여성의 채근으로 창밖의 힐텐펜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한 소년이 일어나서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안스란교를 믿는 신사라면 일생에 한 번을 와야 한다는 힐텐펜스였지만, 소년은 그런 것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도시의 상공에 들어서자마자 보였던, 전 대륙에서 단 한 그루밖에 없기에 힐텐펜스를 유명해지게 만든 여신수(女神樹)를 보면서 감동을 받기엔 그의 마음은 너무나 어두웠다.

한창 꿈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즐겁게 웃고 떠들 학창시절을 보내야 할 소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승객들의 흐름 속에 밀려나가듯 나가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착륙 준비를 위해 다소 흔들릴 수 있으니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나온 후에 비공정을 고정시키는 훅(Hook)이 부상구 바로 아래쪽에서 발사되어 땅으로 내려갔다. 비공정 고정소에서는 직원들이 그 훅을 준비된 고리에 걸어서는 단단히 고정시켰고, 훅의 고정을 확인한 뒤 고리와 연결되어 있던 훅의 줄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줄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카르르르르륵….

비공정이 서서히 고정소로 내려앉으면서 비공정의 선체 아래에는 거대한 바퀴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것이 땅에 닿은 후에 비공정의 해치(Hatch)가 열리면서 승객들이 쏟아져 나오듯 우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너무 밝아.”

승객들에 의해 떠밀리듯 내려온 소년은 하늘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구두, 나막신, 부츠를 보면서 어깨를 늘어뜨린 소년은 천천히 걸어갔다. 여신의 증거를 만나러, 혹은 유명한 관광지인 펜스텐 호수를 보기 위해서, 다른 여러 이유로 즐겁고 밝은 표정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소년의 얼굴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힐텐펜스에 온 것일까? 소년의 발걸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승강장에서 표를 확인하고 내려선 소년은 우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해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허황한 소문을, 그것도 뒷골목의 점 집 같은 곳에서나 들려올 법한 소문을 믿어봤자 손해라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 울리고 있었다.

소년이 들었던 소문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힐텐펜스를 유명하게 만드는 또 다른 하나의 요소인 펜스텐 호수와 근접해 있는 제1블록의 12가에 가면 쭈욱 늘어선 건물들 중에 [WISH]라는 여관이 있다. 그 여관의 간판에 작게 [환상여관]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그것을 종업원에게 말하고서 안내해주는 대로 따라가 그곳의 주인을 만나라. 그리고 그 주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 사람이 고민을 해결해줄 것이다.”

소년은 정말 만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특정한 사람을 상대로 글자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되는 마법은 이미 개발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에게 그런 식의 환각 비슷한 마법을 보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조건 또한 애매한 것이었다. 고민은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척도는 개인이 느끼기에 따라서 다르다. 어떤 사람이 가진 사랑의 고민은 다른 사람이 가진 고민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초라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고민이라는 건 상대적인 관점에서밖에 바라볼 수 없는데, 그것을 판별해서 간판의 숨겨진 글자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다.

??정말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나도 참 바보 같아. 그런 소리에 혹해서는 이런 먼 곳까지…….”

소년은 다시금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한심해 빠진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그는 힐텐펜스 안내도를 집어 들고는 착실하게 1번 블록 12가의 입구를 찾고 있었다. 큰 덩어리로 나누어진 블록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거리를 찾기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었지만, 소년의 착실함은 그것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호숫가에 있는 거리이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도 훨씬 쉽게 눈에 띄었다.

??가도 될까…?”

전혀 확신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누군가 자신이 갈 길을 대신 정해주었으면 하는 의타심(依他心)이 짙게 배인 말을 내뱉은 소년의 발걸음이 힘없이 움직였다.

여관 WISH의 지하실은 상당히 컸다. 일단 건물 크기만 한 지하실이 3층이 있고, 지하 2층에는 여관의 토지와 같은 크기의 지하실이 들어서 있다. 이것은 직원 숙소의 지하실과도 이어져 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나미아와 오디뿐이다.

뒤뜰의 크기만 해도 너비는 건물의 길이와 같고 폭은 20야드로서 한쪽에는 우물이 있고, 직원 숙소로 향하는 길목에 포석을 징검다리처럼 깔아두었다. 항상 딛고 다니는 직원들은 그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직원들이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물의 밑에 있는 지하 1층뿐이다.

그 지하실에, 마법으로 만든 파란빛만이 천장에 고고하게 떠 있는 지하 2층에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빛은 폭발하듯 생성되어 주변으로 흩어졌고, 몇 초 지나서 사그라지었는데, 빛이 있었던 자리에는 나미아와 오디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사이로는 꽤 많은 분량의 상자들이 있었다.

??흐음, 이걸로 대충 다 가져왔나?”

??아마도요. 이 정도면 입문자가 사용할 만한 재료와 도구 일체예요. 하지만 도예 같은 걸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는데, 잘하실 수 있겠어요?”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든다. 기본은 같잖아?”

??저기, 뭔가 좀 틀린데…….”

??응? 뭐라고 했어?”

나미아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오디는 또다시 표정을 평소의 표정으로 고쳤다. 그렇게 시치미를 뚝 뗀 오디는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요. 관련서적도 있으니까 잘될 거예요. 잘 모르겠으면 나중에 사이에그롭에 견학 가죠. 그건 그렇고, 슬슬 짐 옮기세요.”

??아, 그래야지.”

나미아는 이켈라인상회의 현재 총 책임자인 회장 대리 유레인을 들볶아서 가져온 흙을 비롯한 일체의 도구들이 담긴 나무상자들을 지하실에 있는 여러 개의 방 중에서 제일 가까운 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 지하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밑으로의 확장이 용이해 만약 나미아가 취미를 몇 개 더 가진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흐음, 어떻게 하면 될까?”

오디는 이켈라인상회에서 받아온 도자기 가마의 설계도와 여관의 청사진을 비교하면서 새로이 만들 굴뚝의 장소를 정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지하실 전체를 공방으로 쓰기는 조금 큰 것 같으니 서너 개로 분리해서 사용하면 쓸 만한 것도 같았다. 나미아가 취미를 늘릴 때마다 지하실을 추가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다. 그 전에 미리 공간을 나눠두면 훨씬 편리할 것이다.

??이래가지고는 대장장이에 목수까지 하겠다고 하실 것 같은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지만 확률이 높으므로 준비해두는 편이 좋다고 여기는 오디였다. 이켈라인상회가 지금까지 커올 수 있던 것은 일정한 기반을 잡은 뒤부터 발휘되는 오디의 유비무환 정신 덕분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가능성이 있는 미래에 대한 대책을 준비했고, 그중에서 정말 딱 들어맞았던 적은 그리 많지는 않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자, 짐은 다 들여놨고, 가마를 만들기 전까지는 열어볼 일 없겠네. 그만 올라가자.”

??아, 예에.”

나미아와 오디는 계란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지하 1층에 통로 쪽에는 식료품창고가 있었고, 나미아와 오디는 훌륭한 보관상태를 자랑하듯 여러 야채와 훈제고기들이 내뿜는 신선한 냄새를 확인하고서 1층으로 올라갔다.

나미아가 1층으로 올라가자 마침 그 앞을 샹그렐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미아는 히죽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샹그렐, 일은 할 만해?

??아, 마스터. 처음엔 어려웠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런데 언제 내려가신 거예요?”

??응? 아, 조금 전에 말이야. “손님”은 없어?”

??예, 아직은 없네요.”

샹그렐은 눈 꼬리를 내리면서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나미아는 볼을 약간 부풀린 쀼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오디는 그런 나미아의 등을 보며 피식 웃고는 샹그렐에게 말했다.

??아, 크게 신경 쓰지는 마세요. 심심해서 저러시는 거니까요.”

??예, 그럼 수고하세요.”

??그쪽도요.”

오디도 계단을 타고는 위로 올라갔다. 샹그렐은 정말로 언제 저 두 사람이 내려갔는지 보고를 받은 기억도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생각하는 걸 그만 두었다. 저들이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 새삼스런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샹그렐은 여관의 정문으로 가서 프론트에 있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점심시간. 교대시간이야.”

??와아! 기다렸어요!”

??그럼 팀장님 수고하세요!”

프론트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두 명의 홀 서비스 팀의 여성은 꽤나 배가 고팠는지 폴짝폴짝 뛰듯이 기뻐하며 식당으로 달려갔다. 샹그렐은 두 사람의 행동이 여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그냥 눈감아주기로 했다.

여관의 점심시간은 조금 늦거나 일찍 시작한다. 왜냐하면 식사시간은 손님들에게 있어 가장 편안한 시간이 되지만 편의를 제공하는 측에서는 손님들이 제공받는 편의만큼 자신의 노동력을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관의 식사시간은 항상 피크(Peak)가 되는 시간에서 한 시간 앞이거나 뒤이다.

비단 여관뿐만이 아니라 어떤 가게에서든 마찬가지가. 한가한 시간에 식사를 하고 그 기운으로 피크타임(Peak time)을 견디는 지혜는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 있었다. 이곳의 경우 식사를 일찍 하는 편이기 때문에 샹그렐은 그들보다도 더 일찍 먹고 나와서 직원들의 점심시간을 봐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녀가 점심시간 때 모두를 지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풍 전의 고요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피크타임 직전은 왠지 모르게 고요하다. 가끔씩 드는 생각으로는 손님들이 시간을 분배해서와줬으면 싶은 것이다. 그러면 대접하는 쪽에서도 천천히 대접할 수 있을 것이고, 서비스를 받는 쪽도 여유 있는 모습의 점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이 가게의 사정까지 일일이 봐줘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아무튼, 그 폭풍 전의 고요함은 말 그대로였다. 손님도 별로 오지 않는 그런 시간에 교대를 맡아서 생색을 내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샹그렐은 생각했다. 지금 같은 한산한 시간은 여관의 운영 측에서는 좋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환영이었다.

또한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한 한 두 명의 손님도 환영이었다. 여관 측에서는 어떤 이유일지라도 손님은 환영이었으니까. 그녀는 여관의 간판을 한참 보다가 어색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오는 소년에게 생긋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관 ”WISH??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 저… 안녕하세요.”

??투숙하시러 오셨나요? 아니면 식사를 하러 오셨나요?”

??저기, 그러니까…, 간판에 환상여관이라는 글씨를 보고 들어왔는데, 저…….”

“환상여관”이라는 말에 샹그렐의 미소가 흠칫하고 잠깐 동안 굳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서 안 나미아의 성격상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사람에게 뭔가 일을 시킬 때에는 항상 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여관을 차리면서 전 직원에게 명한 “환상여관”이라는 말만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특정조건을 완료하는 면식 없는 소수를 상대로 하는 환각마법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확고한 얼굴로 “손님은 온다!”라고 이야기 한 나미아에게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3주 정도 지난 지금에는 이미 그 “환상여관”에 대한 대목을 완전히 잊어버리기 직전이었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고서 재빨리 대처방안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 나미아가 지시한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오른쪽 하단에 써 있는 글씨 말씀이시죠?”

??예? 그곳에도 뭔가 써 있나요? 제가 본 것은 왼쪽 상단이었는데…?”

눈앞의 소년의 말을 듣자 샹그렐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진짜 “특별손님”이었다. 그녀는 일단 고개를 숙이면서 그에게 사과를 했다.

“진짜 ”특별손님??이시군요. 죄송합니다. 본 여관에서는 일종의 식별방법으로 사용하고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이쪽으로 오세요. 마스터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샹그렐은 지나가는 부하 직원을 붙잡고는 교대가 올 때까지 프론트를 맡게 했다. 그리고는 소년을 데리고서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소년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4층에 이르러 계단이 끝나자 샹그렐이 말했다.

??마스터께서는 5층에 계십니다.”

??예? 하지만 계단이…?”

??계단은 405호의 문고리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리면 문이 열리는데, 그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응접실이니 그곳에서 마스터를 찾아보세요.”

??예에, 감사합니다.”

샹그렐은 깍듯하게 예를 갖춰서 “특별손님”에게 인사했고,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405호를 향해 걸어갔다. 4층은 다른 층에 비해서 문의 간격이 상당히 넓었는데, 그 중에서 405호는 절묘한 위치에 의심사지 않을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소년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문고리를 잡고는 오른쪽으로 세 번 돌렸다.

찰칵.

자물쇠가 풀리면서 문이 안쪽으로 조금 벌어졌고,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의 안에는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본 계단보다 폭이 세배정도는 되어 보이는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은 양쪽에서 갈라져 다시 반대편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덜컹.

소년이 계단을 둘러보는 사이 문이 닫혔고, 어깨를 흠칫한 소년은 문을 다시 열려고 하다가 이내 자신의 목적을 상기하고는 계단을 밟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카펫이 다단이 깔린 계단을 하나씩 오르기 시작했다. 딱딱한 부츠를 신었지만 그의 발소리는 모두 계단에 깔린 카펫이 흡수하는 것 같았다.

계단을 타고 5층으로 오르자, 바로 앞에 응접실처럼 꾸며진 장소가 있었다. 소년은 이곳이 종업원이 말한 곳인가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티 테이블과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있었고, 벽에는 장식장 안에 도자기가 놓여져 있었다.

창문으로는 펜스텐 호수의 정경이 눈에 다 차지 않을 만큼 크고 가깝게 보이고 있을 정도의 절경이었다. 소년은 투명한 호수가 반짝거리는 빛으로 부서지고 있는 것 같은 광경에 넋을 잃고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텅.

여관의 마스터인가 싶은 소년은 조심스레 소리가 난 곳으로 다가갔고, 그곳에는 거의 바닥에 쓸릴 듯한 긴 머리를 한 여성이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서 목소리를 내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에?”

처음 듣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오디의 귀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는데, 개점한 지 25일 만에 처음으로 드는 타인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리라.

오디가 놀라면서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빛바랜 공군사관학교의 제복을 입고 있는 소년이 쭈뼛쭈뼛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년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채 놀라 굳어 있었고, 오디는 그 얼굴과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는 사람이던가?

??에, 그러니까… 초면인가요?”

??예? 아, 그렇습니다만…….”

??초면이라면… 처음 뵙는 분이라는 소리군요. 그런데 어쩐 일로…?”

오디는 평소에 단련된 표정관리 때문에 지금 매우 혼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상대인 소년은 고개를 저으면서 무슨 소리인가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소년은 눈앞에 긴 흰머리를 가진 생전 처음 보는 미녀가 방문목적을 묻고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간판을 보고 왔는…데요?”

??소문이오? 저기, 혹시… 특별손님이신가요?”

??특별손님이오? 아… 그런 것도 같네요.”

소년은 응접실에 들어온 것이 소문을 듣고서는 일을 처리해주길 바라는 차원에서 왔으며, 일반손님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으니 자신은 특별손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끄덕거리는 모습과 특별손님이라는 단어는 오디의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가면서 잠시 약간의 생각회로를 뒤엉켜놓았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특별손님이 올 줄은…!”

“나, 나미아님! 손님이에요! 손님 오셨어요!”

오디는 집무실에 대고 소리를 질렀고, 높낮이를 전혀 절제하지 않은 그 목소리는 마치 비명과도 같았다. 그래서 소년은 혹시나 자신이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도로 나갈까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오디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은 순간 그의 사고는 아예 정지해버렸다.

“시, 실례했습니다! 어쩌지…? 이, 일단 앉으세요! 에, 또… 짐은 이리 주시고, 그 다음에는… 뭐지? 아아, 맞아! 잠시 기다리세요. 마실 것을 내오겠습니다!”

이미 오디의 표정관리와 행동관리는 정지한 상태였다. 준비하지 못한 시작에 예기치 않은 손님이 들어섰으니 그 당황함은 오죽하랴. 오디는 소파에 쑤셔 박듯이 소년을 앉혀놓고서는 그 앞에서 잠시 안절부절못하고서 이내 주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어, 어?”

어느새 홀의 푹신한 소파에 앉게 된 소년은 하얀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은 것과, 세상에 둘도 없을 아름다운 여인이 허둥지둥 대던 모습을 되새기면서 황홀경에 들어섰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사관학교에 들어가 있던 그에게 방금 전의 여성은 상상 속의 인물이었으며, 언제나 도도한 콧날을 세우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의 앞에서 허둥지둥 대고는 그를 대접해주기 위해서 주방을 갔던 것이다.

소년의 눈에서 갑작스럽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무나 궁상맞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닦아내려고 해도 그 배가 되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하…, 하!”

죽을 둥 살 둥 고민을 해가면서 왔는데 기껏 이런 일에 기뻐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어느 여관에든지 가면 볼 수 있는, 초보 직원의 허둥지둥 이었다. 손님이 자신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심을 다해 대접하려는 마음이 담긴 접대는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소년은 그런 작고 평범한 것에 기뻐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라? 손님…? 뭐 하고 있는 거야?”

소년은 조금 전 여성이 부른 사람이 올라왔나 싶어서 눈물을 닦으면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긴 붉은 머리를 곱게 묶고 몇 권의 책을 품에 안은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며 서 있는 절세미녀가 있었다.

약간 굵은 뿔테안경, 품에 안겨진 빛바랜 책들, 여기저기 먼지가 묻은 옷 등 그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런 요소들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에 다시없을 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아, 당황해하지 마. 손님은 대접받아야 하니까 당당해야 해.”

??그러니까… 네.”

소년은 그녀의 말대로 당당한 척이나마 해보기 위해서 사관학교에서 배운 앉는 자세로 앉았다. 그러나 그것이 당당한 것인지, 굳어 있는 자세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고, 그것은 나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당하게 있으라는 말이 굳어 있으라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던 나미아는 문득, 소년의 내면이 들여다보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아하, 그런 거로구나.”

나미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소년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먼저 책들을 가져다둬야겠네.

??아, 예.”

나미아가 서재로 총총 걸어가고서 오디가 쟁반에 물과 메뉴판을 들고는 5층에 따로 만들어진 주방에서부터 걸어 나왔다. 그녀는 물컵을 소년 앞의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기,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별말씀을…….”

??여관이 문을 열고서 23일 만에 오신 첫 특별손님이라 많이 당황했었거든요.”

??아아…. 그렇군요.”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손님이 오지 않는다면 오디의 반응이 확실히 이해가 가는 것이었다. 소년은 그의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입을 가져갔고, 시원한 느낌이 입안과 목을 자극하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소년이 물 한 잔을 다 비우고 컵을 내려놓았을 때 세면실에서 나미아가 걸어 나왔다.

??아, 마스터.”

??오디도 나와 있었네. 아, 그래. 난 가디스 티(Goddess tea).”

??예, 손님께서는 뭘 드시겠습니까?”

??에… 그냥 물 주세요.”

??알겠습니다.”

오디가 다시 주방으로 걸어갔고, 나미아는 소년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소년은 나미아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 절세의 미녀답게 많은 장신구를 하고 있었다.

양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역시 양 손목에 채워진 약간 두꺼운 팔찌, 앙증맞은 귓불에 매달려서 달랑거리는 귀걸이와 머리에 얹혀진 서클릿(Circlet)까지 하나같이 고가의 물건처럼 보였다. 만약 소년이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겼더라면 나미아의 양 발목에 채워진 발찌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의 여성이 그렇게 하고 다닌다면 귀금속의 빛에 눌려서 천박해 보이는 인상을 줄 수 있었지만, 나미아는 오히려 귀금속의 빛을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여성이 앞에 앉아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마주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던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는 물 컵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미아는 엉겁결에 봉인구(封印具)를 뚫고 새어 나온 자신의 능력으로 볼 수 있었던 소년의 내면으로 그 성격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말을 꺼내지 전까지는 침묵만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해 먼저 말을 하기로 했다.

??나는 나미아. 나미아 이켈라인이라고 해. 네 이름은?”

??예?”

??이름말이야. 부모님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해주기 위한 최초의 산물. 없어?”

??아, 예. 저기, 그러니까… 한스 스미스라고 합니다.”

나미아는 여유 있게 자세를 잡으려다 그만 휘청할 뻔했다. 어떻게 저런 평범한 이름이 있을 수가! 잠시 나미아는 오른쪽 관자놀이를 짚고는 꾹꾹 눌렀다. 저런 평범한 이름은 350년 전 이후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집안이 대장장이야?”

??예. 저희 집은 데린너스에서 13대째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데린너스의 스미스 가문이라고?”

나미아는 그제야 데린너스에서 제일 유명한 장인을 배출하고 있는 스미스 가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장장이임을 뜻하는 성인 스미스(Smith)는 상당히 서민적이면서 흔한 성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 성들 중에서도 벌써 1500년이 넘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데린너스의 스미스 가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이켈라인상회에서도 상당한 거래량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나미아는 잠시 진정하기 위해서 심호흡을 했다. 거물급 집안의 거물급 인사가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조금 진정이 된 나미아가 말했다.

??데린너스의 스미스 가문이라면 꽤 유명한데 말이야. 헌데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렌디너스 공군사관학교 교복이잖아? 집안을 잇는 서열은 아닌가보지?”

??네. 저희 형이 가문의 장인이 되기 위해 도제로 들어가 있고,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대장장이의 기질은 아니라서…….”

??흐음, 그렇군.”

나미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사관학교의 훈련을 간신히 버틸 수 있을 체격이었지만, 아무리 봐도 대장장이의 도제로서의 수행을 버틸 몸은 아니었다. 애당초 허약한 몸에, 그 성격까지 있으니 대장장이 일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나미아는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더불어서 왜 오디가 이렇게 꾸물대는지 궁금해졌다.

??오디! 아직 멀었어?!”

??지금 가요!”

??왜 이렇게 꾸물거려! 특별한 사정 설명이 없으면 신속하게 음식을 내와야 하잖아!”

??죄송합니다!”

한스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악덕주인과 어쩌다 휘말리게 된 순진한 여급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오디는 재빨리 티포트와 찻잔, 물병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걸어왔고, 그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미아는 오디의 모습을 보면서 팔짱을 끼고는 한마디 했다.

??너무 느려. 좀 단축시켜봐.”

??예, 예엣.”

??아…, 감사합니다.”

한스는 다시 물컵을 잡고는 반 정도 비웠고, 나미아는 오디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걸 보다가 한스를 보았다. 약간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뭔가를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한스, 소문을 듣고 온 거지?”

??아, 예. 그… 조금 길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의 소문이라…….”

??여기저기 퍼지기는 했나보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한 것 아냐?”

??네….”

나미아는 찻잔을 들어서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럼 말을 해야지. 물론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의지에 위배되는 강제적 수단이지. 그러니까 네 입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해봐. 들어올 때 간판 봤지?”

??네, [ 환상여관「WISH」]라고…….”

“그래, 보통의 여관이지만, 소문대로 ”환상여관??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이들에겐 그들의 소원[Wish]을 들어주는 곳이야. 막바지에 몰린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이 걸린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지. 세상 누구나 행복해질 수 없겠지만 불행한 사람을 최소한으로 만들고자 하는 장소야.”

나미아는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댔다. 따뜻한 느낌이 입술에서부터 퍼져나갔고, 향긋한 냄새가 부드럽게 후각을 자극했다. 나미아가 그렇게 차향(茶香)을 즐기며 한 모금의 차를 목으로 넘겼을 때까지 한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과연 말해도 될지, 말하면 어떻게 될 지에 대한 걱정이 수없이 자리 매김을 하면서 뒤엉키고 있었다.

그리고 생겨나는 의심.

과연 저들에게 말을 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태가 해결되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되는 일일까? 저들이 과연 그런 능력이나 가지고 있을 것인가? 말을 해서 일을 벌려놓고서는 만에 하나 잘못되면 어찌할 것인가? 실패할 것이 두렵다. 말해서 변화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겠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의심나지?”

??예?”

??흐음,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에 목매달고 와보니 있는 것은 미모밖에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여자 둘. 자신의 고민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살고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말해봤자 과연 그것을 들어줄 것인가? 그럴 능력이나 갖추고 있는 것일까? 소문은 그냥 소문일 뿐이잖은가? 이 사람들에게 말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설사 해결해준다고 해도 일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스는 나미아가 짚어내는 자신의 속마음을 딱딱하게 굳은 채로 듣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하고 있던 생각 그대로였다.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나 표정으로 드러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아는 완전히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한스의 표정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말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아. 네가 그렇게 끙끙대면서 속으로 삭이고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시간? 시간은 무력해. 시간이라는 녀석의 사건해결방식은 언제나 하나야. 자신의 존재로 묻어버리는 것.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사건을 완전히 매듭지어서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면 네가 말을 해야만 해.”

??저,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나미아는 방긋 웃었고, 그 웃음에는 아무런 사심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신뢰가 가는, 자신감에 넘치는 웃음. 한스에게는 너무나도 부럽기만 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자신도 가지고 싶었기에. 말하면, 말을 하면 손닿을 곳에 있는 웃음이었다. 한스는 그 웃음을 보이는 사람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한스 스미스는 올해로 16세 되는 소년이다. 2년 뒤에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비공정을 조종하는 심화 과정을 배우기 위해 공군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성적은 양호하여 한눈팔지 않고 정진한다면 대학합격의 안전선에 놓여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사관학교의 생활은 규칙적이었고,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입학한 지 6년째 지난 지금은 훈련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몸이 많이 약해서 단련되어온 지금이라고 할지라도 격한 훈련을 겪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지게 된다. 다른 친구들처럼 훈련 뒤에 또다시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러 간다든가 하는 일은 자신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사관학교 남자생도의 판박이 같은 모습이라면, 크든 작든 그 몸을 다부지게 보여주는 근육이다. 건강한 사람의 상징임과 동시에 혹독한 수련과 자기 자신을 이겨냈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남는 것이다. 그러나 한스만큼은 거기서 예외였다. 호리호리한 몸에 근육이 잘 붙지 않아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은 가진 한스는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에게 있어서 놀림의 대상이었다.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은 그를 단련시키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을 했지만, 어떤 먹을거리에도, 어떤 약에도 한스의 몸에 좀처럼 근육이 붙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한스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갔다. 어렸을 때부터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2년 전이었어요. 사관학교의는 교육과정의 반을 끝마치면 각자 자신의 계열을 선택해서 서로서로 갈라지게 되죠. 저는 비공정의 정장(艇長)계열로 갔어요.”

비공정의 정장은 배의 선장과도 같이 비공정을 움직이는 조타수(操舵手)와 동력부(動力部)를 비롯한 비공정 하나를 담당하는 직위였다. 이른바 장교 과정이라고도 부르는 그 과정은 경쟁률도 높아서 연간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보인다. 한스는 그 시험에서 체력검정이 다소 불안했을 뿐, 나머지 과정에서 평균치 이상의 점수를 받아 합격하게 되었다.

한스는 앞으로 사관학교에서 지내온 나날만큼만 더 있으면 그는 코흘리개 어린아이 시절부터 꿈꿔오던 목표를 붙잡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는 정진정명(正眞正銘)하여 비공정의 정장이 되기 위한 모든 과정을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사관학교의 저학년 시절부터 틈틈이 봐오던 비공정 관련서적은 그의 밑거름이 되어 그가 속한 클래스 내에서 두각을 보이게 했다.

체력이 다소 약했지만 뛰어난 이해력과 탄탄한 기본지식을 갖춘 한스는 이전과는 다르게 클래스 내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가 있는 학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그것이 즐거웠다.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한스는 그것이 정말 즐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약했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고,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가? 그를 감싸주기 위해서 장인의 도제가 되기로 결심한 그의 형은 이미 두각을 드러내서 점점 비교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몇 년이나 집에는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한 장면이 살아 있었다. 디렌너스에 있는 그의 본가에 번듯한 비공정의 정장이 되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금의환향이었다. 지금처럼만 나가면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무슨 일이 생겼군?”

??예, 그 녀석들… 빌어먹을 세발트 일파…!”

그가 속한 클래스에서 합의되지 않은 대인맨손운동을 즐기는, 그러니까 싸움을 즐겨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클래스마다 꼭 한둘씩은 있는 학생들이었는데, 그의 클래스의 세발트 쿠스리를 포함한 세 명의 일파는 특히 악질적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들은 사람을 괴롭히면서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남의 괴로움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는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한스의 사상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악인 쓰레기들이었다.

한스는 그들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모른 체했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으니 괜히 나설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그리고 세발트 일파의 새로운 표적이 한스가 되었다.

??그 녀석들은 허구한 날 저를 괴롭혔어요. 책을 보고 있으면 그것을 빼앗아서 창밖으로 던져버리는 것은 예사였고, 점심을 먹을 때는 가까이에 붙어서 밥을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그래도 전 참았어요. 하지만… 그 녀석들은 그게 더 재미있었나 봐요. 화장실에서 매일 얻어터졌고, 어머니가 피땀 흘려 번 돈도 빼앗아갔어요. 언젠가는 학교식당에서 그들이 먹다 남은 쓰레기를 제 머리 위로 들이부었는데, 식당 안의 모든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죠. 그렇게 전 웃음거리가 되었어요.”

??저런…….”

??1년 가까이 전 그들의 장난감으로 있었어요. 어떤 날은 실컷 두들겨 팬 다음 얼굴에 침을 뱉었고, 쓰러져 있는 저에게 오줌을 갈겼어요. 구역질을 하는 저를 보면서 그들은 소리 높여 웃어댔고요. 그런 일을 겪고서도… 저는 제 꿈이 있기에 죽으려는 시도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저희 부모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희 어머님이 절 얼마나 고생하시면서 키우셨는데… 친족들의 따가운 눈초리 속에서도 정말 훌륭하게 절 키워주셨어요! 한데… 그걸 욕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 녀석들의 장난감으로만 남아버릴 거예요!”

한스는 어깨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홀에는 한스가 토한 고백의 잔영(殘影)이 물끄러미 남아서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미아는 어느새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삼키고는 한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어요. 내가 당했던 고통을 전부 되돌려주고 싶어요! 그 수모! 그 나날들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그깟 녀석들한테 짓밟히면서 살아온 비참함을 그대로 겪게 하고 싶어요!”

분노와 복수심이 타오르고 있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소년의 눈에서 타오르는 것은 눈물과 처절한 복수심이었다. 나미아는 그 눈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첫 손님이라서 기뻐해야 하겠지만 상당히 귀찮은 꼬리를 달고 왔다.

??복수를 하고 싶니?”

??예! 여기라면… 제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한스는 분노와 확신을 담은 눈으로 단정 짓듯 말했다. 나미아는 첫 번째 손님이 찾아준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이런 기세로는 뭔가 하기도 어려웠기에 그녀는 일단 한스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녀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여긴 소원들 들어주는 곳이야. 귀로만 듣는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주는 곳이지. 그런데 말이지, 세상은 공짜가 아니란다.”

??예?”

한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눈에는 얼굴을 약간 찌푸린 채로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여 있는 나미아의 모습이 보였다.

??이래저래 고민하긴 했지만, 지금부터 의뢰가 받아들여져서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확실하게 바뀔 거야. 사람들의 소원 중에는 대부분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는 요소가 대부분이지. 그렇지? 우리는 그런 긍정적 변화를 줌으로써 사람의 인생을 바꾸게 해. 원하는 방향으로. 그런 가격이 과연 헐값일까?”

??아, 아니요….”

??그래,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높은 가격을 받지.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것 중에서 제일 뒤끝 없는 것이 돈이거든. 그 외에 마음을 받는다, 꿈을 받는다, 심하게 가면 영혼을 받는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하지만 그건 현물이 아니잖아. 여관장사는 현물장사라고. 동전이나 어음이나 수표가 오가는 장사.”

한스는 진지한 나미아의 표정을 보면서 잔뜩 긴장했다. 이 사람은 대체 얼마나 부를 생각으로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끔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한스는 질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얼마인데…?”

??십만 펜.”

??예! 예엣?!”

한스는 나미아가 너무나도 가볍게 말한 무시무시한 액수에 놀라버렸다. 한스가 다니는 사관학교의 1년 예산이 백만 펜인데, 나미아는 그중 10%에 달하는 금액을 요구한 것이다. 아무리 한스의 집안이 세계 최고의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할지라도 무리인 금액이었다.

1펜이라고 하면 보통 여관에서는 10일 정도 머무를 수 있는 가격이고, 이런 고급 여관에서는 못해도 5일이나 4일까지 머무를 수 있는 돈이다. 일반 노동자들이 공사현장에서 일하면서 하루에 1펜의 십 분의 일 정도 되는 “길”이라는 화폐로 5길을 받는다. 사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도 17펜 40길인데, 십만 펜이라니,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스는 경악한 표정으로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마, 말도 안 돼…!”

??인건비와 우리가 사용할 인맥비용, 차후 일어날 같은 사건의 방지들을 종합했을 때 나오는 비용이고, 네 인생을 구제하는 비용이잖아. 네 인생의 가치는 십만 펜도 안 되나보지?”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돈으로 따지기 싫어한다. 무한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하나의 기준으로 인해 평가받는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한스도 당연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은 나미아가 제시한 것보다 비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더듬거리면서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애썼다.

??하, 하지만 그런 돈이…!”

??가난뱅이로군. 아아, 슬퍼라. 첫 손님이 이렇게 가난뱅이일 줄이야…! 뭐, 하는 수 없지. 할인율을 적용해볼까?”

나미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한탄했고, 한스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주목했다. 금액을 깎을 수도 있는 길이 있다는 소리였다.

??할인율이오?”

??그래, 특정조건을 완수하면 금액을 백 분의 일까지 내려주지. 어때?”

??백 분의 일이면… 천 펜으로요?”

??그래, 어떻게 하겠어? 이건 네가 좀 움직여야 하는 일인데. 아, 천천히 갚아도 상관없어. 일시불이긴 한데 지불기간만 넘기지 않으면 해가 없을 거야.”

한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백 분의 일로 줄어들었을 때 그 돈은 그가 나중에 비공정의 정장이 되어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가 목표한 꿈을 이룬다면 충분히 가능한 금액이었다.

??좋아요. 제가 뭘 하면 되지요?”

나미아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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