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55화 (55/55)

Chapter 55. 태양은 그대 품안에!

우욱!

시간의 틈으로 들어서자마자 호크는 무척이나 메스꺼워진 뱃속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다. 소드마스터 씩이나 되어서 겨우 울렁거리는 증세 때문에 이런다는 것을 남들이 보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호크가 들어온 세계는 중간계가 아니었다.

'시간의 틈'

어떤 세계든지 반드시 존재하는 시간! 신이라 할지라도 되돌릴 수 없는 절대 성역 같은 존재 시간! 바로 그 시간들이 흐르지 않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틈새가 시간의 틈이라고 불리는 마의 공간이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곳은 조용하지도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공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란스럽고 복작했다. 여러 차원에서 빠져나온 시간의 잔상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호크는 짧은 시간동안 신비로운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단순히 상상하던 것보다 더 많은 세계와 생명체들이 각자의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흥미롭게 경이롭기 까지 했다. 하지만 호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여러 세계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남은 시간의 찌꺼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 중에는 이미 사라진 문명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사라질 운명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도 있었다. 잠시 폴렌시아의 운명은 어떤지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바람처럼 스쳐가다 사라지는 시간의 잔상들을 붙들 수는 없었다. 그러다 앞에서 아주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환상의 세계에 빠져있던 호크의 눈빛이 사나워 졌다.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대상들을 찾았다고 생각한 호크가 아주 빠르게 내달렸다. 가까워질수록 소란스런 소리는 커졌고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 소리는 검과 검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였다. 호크를 못가게 하려는지 수없이 많은 시간의 잔상들이 앞을 가로 막았지만 그가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꺼내들자 시간의 잔상들은 무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호크에게서 멀리 달아났다. 혼돈의 블레이드고 시간의 틈에 노출되자 웅웅, 거리는 공명음을 크게 내질렀다. 그 어느 때 보다 흥분한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내려보던 호크는 제로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정말 악마가 쓰던 검이었고, 얼마나 많은 피를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만 명심해라 지금은 내가 너의 주인이라는 것! 부디 네가 내 뜻에 따라 싸워주길 바란다!"

마치 사람을 대하듯 진지하게 속삭인 호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웅웅, 거리던 소리가 점차 조용해 졌다.

검과 검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이처럼 경쾌하고 듣기 좋은지 호크는 처음 깨달았다.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듣지 좋은 소리라고 생각한 호크는 무한의 공간에서 곧 그들을 찾아냈다. 원수라도 되는 냥 싸우는 존재는 바로 알버스크의 테렌스 공작과 로베니아의 제라드 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철천지 원한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싸웠다. 이미 서로의 몸에 많은 상처를 내고 있는 두 사람의 뒤로 웬 여인들이 조용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의 모든 상황이 자신들과 상관없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호크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앙뜨네트 황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사투를 벌이는 머리위로 낡아빠진 나무 지팡이가 위태롭게 떠있었다. 장내에 호크가 나타나자 두 사람의 결투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앙뜨네트 황제도 고개를 돌려 호크를 바라보았다. 테렌스 공작은 당황했지만 제라드 공작과 앙뜨네트 황제는 오히려 호크의 등장을 반기는 눈치였다. 호크도 그것을 느꼈다. 비웃음을 흘려주자 앙뜨네트 황제도 입술을 움직이며 웃었다.

"이제야..."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의 귀에 들릴 만큼 아주 똑똑하고 선명하게 메아리쳤다. 이 이상한 공간에서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오랜 세월 반복되어온 굴레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위대한 소멸을 맞이할 때가 왔군."

앙뜨네트 황제는 조금 흥분한 듯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러나 호크에게 그런 것은 전혀 관심 밖이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 시커먼 뱃속에 숨겨놓은 이야기를 얌전하게 꺼내 놓는 것이 네 신상에 좋을 거야. 내가 지금 너무 열이 받아서 여자라고 봐줄 생각이 전혀 없거든!"

호크가 거친 말을 마구 뱉어 내는데도 앙뜨네트 여제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유모가 그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자 앙뜨네트는 잠시 주저하며 상자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들어 상자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위대한 신 쥬(ju)께서 이룩한 아름다운 세계를 불완전한 피조물들이 망쳐 놓았다. 이것은 창조주에 대한 불온이며 배신이다. 나는 이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나는'이라고? 네가 뭔데 세상을 용서하고 말고 하는 거지 마치 네가 신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구나!"

조롱섞인 호크의 비아냥에도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해 나갔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창조주를 넘어서려 했고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신의 위대함을 알려야 했고 그것은 파멸이었다."

그녀의 말이 계속되자 어느새 호크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하는 말은 폴렌시아 대륙의 역사였고 그녀가 말하는 것은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저지를 일을 독백하듯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독백이 계속되자 양손의 움켜쥔 혼돈의 블레이드가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원수를 대하듯 앙뜨네트 황제에게 달려들려고 했고 호크는 제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했다.

"그러나 자애로운 주신(主神)이시며 모든 신들의 아버지이신 쥬(ju)께서는 오히려 나를 벌하셨다. 나는 분노했다. 나는 슬펐고 고통스러웠다. 그분만을 사랑하는 나보다 그분은 자신의 창조물들을 더 사랑하셨던 것이다. 나는 인간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중간계에 드래곤이라는 조정자를 만드셨지만 그런 것이 나의 복수심을 막지는 못했다. 난 당신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멸하는 것을 그분께 보여드림으로서 당신의 창조물들이 얼마나 우매하고 얼마나 추악한지 보여드리려고 했다. 그래서 난 나 스스로를 시간의 틈에 내던졌다. 나는 영원히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이곳에서 그분의 피조물들이 소멸하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옳았다는 것을 그분께 보여드릴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지난 폴렌시아 대륙의 점철된 역사가 왜 이렇게 굴곡져 왔는지 정말이지 아니러니 하게도 저 삐뚤어진 여신 하나 때문에 그토록 많은 생명들이 고통 받아 왔다는 것에 호크는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개소리하고 있네, 정말이지 아무리 참고 들어주려고 해도 도저히 못 참겠다. 야, 이 미친 할망구야! 미치려면 좀 곱게 미쳐! 어디서 지금 노망난 짓거리를 하는 거야."

호크의 고함을 지르자 앙뜨네트의 눈썹이 한쪽으로 심하게 치켜 올라갔다.

"똑똑히 들어, 딱 한번만 말한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인간은 다 제각각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는 거야. 네 말대로 위대한 신께서 우리를 만들고 이 땅위에서 살아가게 만들면서 생각이라는 선물을 준거는 말이야, 니들끼리 알아서 잘 살라는 거야, 그런데 그런 위대한 신께서도 인간끼리 지지고 볶고 살든지 말든지 관여 하지 않는데 네가 뭐라고 나서서 지랄이 지랄이야!"

호크의 궤변에 앙뜨네트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유모의 몸이 꿈틀거리며 변하기 시작하더니 등에서 날개가 솟아나고 머리에서 뿔이 튀어나오더니 하늘 높이 날아올라 손에 든 창을 호크에게 집어 던졌다. 호크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이용해서 창을 없애버렸다. 녀석은 창이 어디서 무한 공급되는지 던지기만 하면 손에 다시 창이 나타나 쉴 새 없이 던져댔다. 화가 난 호크가 제로를 잡아 하늘을 날고 있는 녀석에게 집어 던졌다.

"이터널 체인 크로스!"

손목에서 황금사슬이 제로의 손잡이에 연결된 채 무한대로 늘어나며 도망치려는 녀석의 몸통을 휘감았다. 녀석이 날개 짓을 하며 도망치려 하자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와 연결된 영혼의 사슬이 팽팽해졌다. 그 순간의 호크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

"앱솔루트 라이트닝!"

호크의 손목에서 번쩍이며 눈부신 빛이 튀어나와 영혼의 사슬을 타고 뱀이 먹이를 노리고 덤벼들듯이 뇌전이 녀석을 덮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소멸하자 오히려 앙뜨네트가 비명을 질렀다.

"어, 어떻게 그 검의 봉인이 풀렸지? 절대로 그럴 수 가 없는데 어떻게?"

앙뜨네트인지 여신 미르네보인지 정체가 헷갈리는 그녀가 몸을 비틀거리자 난데없이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하하하하! 미안해 미르네보. 게임이 너무 편파적이어서 내가 봉인을 좀 풀어줬어, 이해하라고."

손을 들어 미안함을 드러낸 이는 차원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였다. 환하게 웃으면 미소 짓던 얼굴이 반대편으로 돌아가자 늘 화만 내는 또 다른 얼굴이 짜증을 냈다.

"시덥지 않은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끝내자! 난 이곳에 있으면 숨쉬기가 힘들단 말이야!"

다시 얼굴이 급히 돌아가며 예의 밝은 얼굴이 어색한 표정을 했다.

"하. 하. 하 다들 이해하라고 워낙에 심통이 많은 녀석이라서 신계와 차원계의 잘난 것들이 모두 이일의 결과에 관심이 많아서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 대표로 오게 됐다. 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자자, 어서 하던 일 계속 해!"

표독스런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미네르보의 눈길을 능청스럽게 피한 야누아리우스는 딴청을 피웠다. 결국 그녀의 분노의 불길은 호크에게 향했다.

"좋아,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네 손으로 폴렌시아를 끝장내게 되어 있으니 어서 시작해라!"

"무슨 소리야?"

호크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앙뜨네트가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파멸을!"

그녀가 두 손을 들어 올리자 호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호크의 몸속에서 그동안 호크가 모아온 세 개의 낙인이 천천히 빠져 나오고 있었다. 호크는 전신의 모든 혈관이 터져나가는 듯한 고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낙인 들이 빠져나가자 호크의 무릎이 꺽였다.

우욱!

검붉은 피가 한 움큼 흘러나왔다. 검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지탱하고 고개를 들어 앙뜨네트를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교만하게 웃고 있을 뿐 이었다.

"네게는 거부할 권리도 힘도 없다. 그저 숙명에 따르면 되는 거야. 자 알버스크의 테렌스 공작 네 놈도 다 쓸모가 있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안배한 한 편의 시와도 같은 것이다."

그녀의 손이 테렌스 공작을 가리키자 그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테렌스 공작은 몸부림치며 그녀의 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호호호 어리석은 놈, 왜 너는 어릴 때부터 고대 문명에 자신이 집착하는지 그 이유도 생각해보지 않았겠지? 그것은 네가 바로 오늘을 위해 내가 탄생시킨 재물이기 때문이다. 이 폴렌시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륙의 정기를 품고 있는 세 개의 징표와 시간을 관장하는 시간의 지팡이 그리고 소멸시킬 대륙에서 자라난 나의 분신이 필요하지, 너는 내 귀한 피로 태어난 나의 분신 이란다 아가야, 이제 이 어미를 위해서 네 생명을 다오 호호호호!"

아름다웠던 앙뜨네트의 모습도 서서히 변해갔다. 온통 검은색 일색의 마녀로 변신을 했다. 붉디 붉은 입술이 아니라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모든 것이 그녀가 계획한 일이라니 정말 분통 터질 노릇이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었다. 호크는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킨 다음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며 즐거워하는 차원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저 여자가 정말 여신 미네르보가 맞는겁니까? 아니면 로베니아 제국의 앙뜨네트황제가 맞는 겁니까?"

호크의 질문에 야누아리우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호크는 감을 잡았다.

"정신은 어떤지 몰라도 몸은 인간이라는 뜻이군!"

호크의 말에 야누아리우스가 제법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자신의 표정만 보고 눈치를 챈 호크에게 야누아리우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보였다. 여신 미네르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녀가 시간의 틈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된 이유는 그녀 스스로 원했다기 보다는 주신 쥬의 미움을 샀기 때문 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자신의 피조물를 사랑하는 주신의 성격으로 볼 때 그녀가 저지른 짓은 그의 분노를 사고도 남았을 것이 분명했다. 당연히 그녀에게도 처벌이 내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보의 성격을 보아 그녀가 순순히 주신의 처벌을 달게 받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주신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이곳 차원의 틈새 사이에서 그녀가 존재하는 방법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서 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고대 전쟁 당시 로베니아 제국의 선조들과 맺은 인연으로 미네르보는 제국의 황실 여인들 몸을 빌려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견뎌 왔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의 미네르보의 육신은 인간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한 번 싸워 볼만은 하다는 뜻이었고 그것이 호크가 남은 기운을 짜내어 힘을 끌어 모으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녀가 폴렌시아를 파멸시키기 위해 힘을 끌어 모으자 시간의틈에서 흐르던 시간의 잔상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개의 낙인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고 어느새 천사의 모습을 변한 테렌스 공작은 이지를 상실한 채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제라드 백작은 은빛을 찬란하게 빛내는 창을 들고 호크 앞에 다가왔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차례네, 그것은 자네의 숙명이고 자네의 의무이기도 하네. 이미 오염된 폴렌시아 대륙을 정화하고 그 위에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하는 것은 나의 소명이네!"

아주 엄숙하게 말하는 제라드 백작의 말이 무척이나 이율배반적으로 들렸다. 호크가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을 바닥에 내 뱉었다. 죽은피와 뒤섞여서 검은 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입가를 소매로 문지른 호크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허튼 소리! 미치려면 너 혼자 미쳐, 괜히 엉뚱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조심스럽게 힘을 끌어올린 호크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구도 사람들의 인생에 간여할 수 없다. 그것은 신도 마찬가지야, 그렇기 때문에 주신조차 중간계 폴렌시아에의 일상을 간섭하지 않은 것이다. 중간계가 썩어 들어가든 몰락을 하던지 간에 그것은 인간들 스스로가 풀어가야 할 숙제이고 그네들의 삶이다. 그것에 대해서 누구도 옳다 그르다 할 자격은 없는 거야. 뭐, 세상이 오염되었으니 싹 쓸어버리고 새 세상을 만든다고? 뭐 이런 나치 같은 놈들이 또 있어?"

호크의 욕설에 제라드 백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리석은 놈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고 가야할 길이라고 그리 일어주었건만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기만 하구나."

자신 스스로도 인간임을 부정하는 제라드 백작은 이미 미네르보에게 정신을 제압당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제라드 공작은 로베니아 제국의 제라드 공작이 아니라 여신 미네르보의 시종인 얄탄이었다. 그 또한 정신체의 상태로 오랜 시간을 시간의 틈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왔다. 이제 그 모든 것의 끝을 볼 때가 온 것이다. 제라드 공작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얄탄은 비틀거리는 호크의 몸을 강제로 끌고 가서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데려가 집어 던졌다. 호크가 낙인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그 중심으로 떨어지자 낙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순간 낙인들의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낙인인 눈의 결정체 모양과 이사벨라 여왕의 죽으면서 나타난 목걸이 세 번째 어린 스톤의 자각이후 얻은 세 번째 낙인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눈을 뜨지 못할 만큼 번쩍이는 빛이 터져 나왔다. 호크는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려야만 했다. 고역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호크는 기겁하고 말았다. 낙인이 천사로 변한 테렌스 공작의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테렌스 공작은 몸은 다시 한 번 변신을 했다. 잠시 후 테렌스 공작이 있던 자리에 아주 귀여운 어린 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이가 크게 웃자 공중에 남아 있던 마지막 징표인 폴렌시아의 지팡이가 저절로 아기의 손에 쥐어졌다.

"아, 안돼!"

호크는 그 즉시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 깨달았다. 저 아이가 지금의 폴렌시아에서 생명이 멸종한 뒤 새로운 폴렌시아에서 살아가 새 생명이었던 것이다. 바로 여신 미네르보의 현신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주신 주(ju)가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주신의 대한 그녀의 집착이 얼마나 지독한지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미네르보가 빠져나간 앙뜨네트의 육체는 생명이 빠져나가 빈 거죽만 남아 보기 흉하게 버려져 있었다. 그녀의 진실한 계획을 알게 되자 호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제 그녀가 폴렌시아의 지팡이로 시간을 비틀게 되면 폴렌시아의 모든 생명체들은 소멸할 것이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낙인을 모아온 구원자의 영혼이었다. 제라드 공작 아니 미네르보의 시종 얄탄의 은빛 창이 날을 번뜩이며 높이 치켜 올라갔다.

"새로운 신세계여 어서 오라!"

은빛 창이 호크의 심장을 향해 날아 들었다.

푹!

"크흑.....끄으으으!"

"아직은 아니야!"

"혼돈의 블레이드가 각성을 .... 어째서 우리의 소명은... 인정받지 못하는 거지?"

바람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오며 제라드 공작의 몸을 빌렸던 얄탄의 정신체가 서서히 소멸해갔다. 봉인이 풀린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정신체 마저 소멸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옛날의 신들의 전쟁에서도 제로는 수많은 신들을 소멸시킨 마병기였다.

[안돼! 이 간악한 놈! 왜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냐? 이것은 모두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몸은 어리나 표독스런 미네르보의 음성이 주변을 울렸다. 호크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제로를 곧추세우고 아기의 몸을 하고 있는 미네르보에게 다가갔다.

[이...이....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푸하하하하! 그런데 왜 당신은 하찮은 인간으로 태어나려고 하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고 있네. 솔직히 말하시지 희노애락를 삶을 사는 인간들이 부러웠다고 그렇지 않나?"

호크의 그녀의 속마음을 들춰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다, 닥쳐! 그 따위 궤변이나 늘어놓다니 어서 스스로의 운명을 깨닫고 영혼을 내 놓으란 말이다!]

"너나 닥쳐! 내 영혼은 내 꺼고 폴렌시아도 그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소유도 네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못돼! 이제 내가 너의 그 집착의 고리에서 해방시켜 주마. 소멸되거든 부디 그간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길 바란다."

호크가 천천히 다가가자 미네르보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아기의 몸속으로 들어갈 것을 후회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버둥거리며 폴렌시아의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호크의 영혼이 없이 지팡이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호크의 검이 아기의 심장위에 놓였다.

[아, 안돼! 너무 억울해!]

"너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안 해 봤나? 잘가라!..........으악!"

호크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호크의 몸도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얄탄이 들고 있던 은빛 창이 호크의 등을 관통해서 가슴으로 뚫고 나왔다. 가슴을 뚫고 나온 창을 바라보던 호크는 결국 한쪽으로 쓰러졌다. 헐떡이는 호크의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 졌다.

"쯧 쯧 쯧! 구원자 나리는 구원자 노릇이나 할 것이지 웬 영웅 행사야, 그러니 그런 꼴이 되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호크의 눈으로 통곡의 벽에서 전투에서 갑자기 끼어든 주인공이 들어왔다. 크리시앙과 루스펠이었다. 미네르보에게 얻은 영겁의 삶을 끝내기 위해 기다리다 못해 시간의 틈까지 쫓아 온 것이다.

"왜?"

호크의 눈을 보던 크리시앙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겹거든 이 지루한 삶이, 나는 자유롭고 싶다. 이 지겨운 삶에서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저 여유의 계획이 실행되어야 하거든 네가 죽어서 너의 영혼이 지팡이를 움직이면 나와 여기 루스펠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이 더러운 삶을 끝내고 영원히 쉴 수가 있다. 뭐, 너도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이대로 조용히 잠들어라!"

숨쉬기도 힘들었다. 몸에서 점점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슬퍼서 그런지 어떤지 조차 호크는 몰랐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리고 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귀찮아졌고 그저 덧없게 느껴졌다. 그 동안 힘들게 잡고 있던 끈을 서서히 놓고 있었다.

'으아앙!'

"....."

귀청을 찢는 듯일 커다란 아기 울음소리가 아득히 멀어지는 호크의 정신을 일깨웠다.

'울지마! 울지마 아가야!'

호크가 애타게 우는 아기를 달랬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아기 울음소리에 때문에 호크는 정신을 차렸다. 놓았던 끈을 다시 꼭 붙들자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호크를 되살린 아기는 바로 멀리 잉글햄에서 애타게 호크를 기다리고 있는 호크의 아이였다.

"허억!"

정신이 돌아오자 창에 꿰뚫린 고통에 전신의 신경세포가 비명을 질러댔다.

"끄으윽! 씨 팔! 으, 으아아악!"

벌떡 일어선 호크가 가슴을 반쯤 뚫고 나온 창을 잡아당기며 괴성을 지르자 미르네보와 계약을 종결지으려던 크리시앙과 루스펠이 깜짝 놀라서 뒤 돌아 섰다.

"괴, 괴물이로군!"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것 같던 크리시앙 마저 당황했다.

[죽여! 저놈을 어서 죽여!]

겁에 질린 미네르보가 악을 쓰자 크리시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후, 네 놈도 참 질기구나! 쉽게 갈수 있는 길을 굳이 돌아가려 하다니! 제대로 죽여주마!"

크리시앙이 검을 꺼내들고 낯빛을 굳혔다. 그의 손에 든 검이 붉은 색으로 뒤덮혔다. 소드 마스터니 하는 그런 차원의 힘이 아니었다. 차원의 중간지대인 시간의 틈도 크리시앙의 힘을 두려워하는 듯 했다.

"시끄러! 입 다물란 말이다!"

끼아아!

시간의 틈이 거칠게 흔들렸다. 차원과 차원 사이의 시간은 빈 공간이 호크의 고함에 균형이 흔들려 깨어질 뻔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사태를 관망하던 차원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 마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서 정도였다. 야누아리우스가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가, 각성한다! 혼돈의 악마가....성스러운 돌 이카나두스르바가 억겁의 잠에서 깨어나는가? 영원히 잠들었던 혼돈의 마성이..... 이거 더 큰 파멸을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

야누아리우스가 두려움에 떨며 뒤로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으아아아!"

호크가 내지르는 괴성에 바닥에 떨어진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미친 듯이 공명하며 울어대더니 하늘을 날아올라 호크의 손으로 찾아 들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광명의 신이 지닌 단죄의 검처럼 투명하게 빛이 났다.

"어, 어째서 혼돈의 악마이며 성스러운 돌인 이카나두스르바가 각성했는데 그의 검인 제로가 저렇게 선한 빛을 내는 걸까?"

야누아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호크가 크리시앙에게 뛰어 들었다. 창에 꿰뚫린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크리시앙을 몰아쳤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크리시앙은 뒤로 내몰리다 결국 호크의 검에 몸이 두 동강 나버렸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

주인의 몸이 두 조각이 되자 깜짝 놀란 루스펠이 크리시앙에게 뛰어갔다. 몸이 분리 되었으니 죽어야 마땅했지만 영원히 죽지 못하는 크리시앙은 그저 고통에 악이 받쳐서 욕설을 토해냈다. 그러나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호크의 몸이 미네르보에게 향했다.

[아, 안돼! 제발 살려줘! 나는 이대로 소멸 할 수 없어! 너의 힘이라면, 그래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중간계를...아니 차원의 모든 세계를 점령하자! 어때? 난 너에게 많은 신들의 비밀과 창조의 비밀도 알려줄 수 있어! 네가 바로 신의 자리에 오르는 거야! 솔깃하지 않아!]

벼랑 끝에 내 몰린 미네르보가 결코 말하지 말아야 할 것 까지 이야기 하자 야누아리우스조차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네르보 너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할 거다! 천상의 비밀을 감히 입에 올리다니!"

[닥쳐 내가 존재 하지 않으면 그런 것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미네르보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기의 몸속에 들어가 목숨을 애걸하는 그녀의 몸부림은 정말 애처롭기까지 했다.

"너야 말로 닥쳐! 너 하나 때문에, 너의 어리석은 질투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쳤다. 이제 너의 죗값을 내가 대신 받겠다."

[아.....]

그것이 중간계와 차원의 질서를 어지럽힌 여신 미네르보의 최후였다.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현신의 본래의 주인이 불어넣어준 힘으로 여신 미네르보를 소멸시켰다. 너무나 허무한 종말이었지만 일을 끝마친 호크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멍청한 놈!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뭐가 아쉬워서 폴렌시아를 지키려 하는 거냐? 이깟 세상 따위 없어져도 또 생겨나는 걸, 내 안식을 방해한 이유가 고작 보잘 것 없는 땅덩어리 때문이냐?"

몸이 두 동강 났지만 여전히 그 입심만은 녹슬지 않은 크리시앙의 입에서 분노의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호크는 피식 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듯 했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며 피식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 앞으로 차원의 문지가 야누아리우스가 다가왔다.

"그래 저 녀석 말대로 그럴 가치가 있었나? 이 일에 자네의 모든 것을 걸만큼 이미 자네는 신 이상의 힘을 얻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호크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야누아리우스를 보고 씨익 웃었다.

"나, 나의 아이가 뛰어 놀고 자라날 땅이다. 결코 값어치 없는 일은 아니야, 아버지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숨 쉬고 살아갈 터전이야 그런 곳을 지켜준 일이 결코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게 내 운명이고 그게 내 소명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사랑하는 일. 내게 주어진 최고로 멋진 일이지!"

차원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한 동안 말없이 호크를 내려 보았다. 무척이나 고심을 하는지 두 개의 얼굴이 자주 바뀌며 의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보게 친구!"

차원의 문지기는 신들 마저 경외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호크를 친구라고 불렀다는 것은 호크를 동격으로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크리시앙마저 깜짝 놀라서 그 입을 다물었다.

"자네가 나를 감동 시켰어! 그래서 선물을 하나 주지. 원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자네가 나를 감동시켰으니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하지."

"선물?"

호크가 의아해하자 야누아리우스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보내주지!"

"집?"

"그래, 원래 자네 집. 자네가 온 곳으로 말이야."

야누아리우스의 말에 호크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가 말하는 집이란 잉글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차원의 문을 임의로 여는 것은 그로써도 자신의 수명을 잘라내어야 할 정도로 크게 모험을 하는 일이었지만 그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호크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것 이었다.

"이곳에 남든지 돌아가든지 그건 자네의 선택이네."

'집으로 돌아간다!'

순간 호크의 입 밖으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투어 나올 뻔 했다. 그러다 다시 한 번 호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결정을 했나?"

다시 한 번 대답을 재촉하는 야누아리우스를 향해 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씨, 뭐야 이거?"

"우씨 뭐야 이거라니 허, 참 맹랑한 녀석 일세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행패를 부리는 게냐. 크게 벌 받기 전에 어서 가거라, 어서!"

땟물이 줄줄 흐르는 소년이 만류하는 병사의 호의에도 기세를 수그리지 않고 씩씩대며 길을 가로 막고 서있었다.

"하나~ 이거야 원!"

소년의 돌발 행동에 결국 병사들을 비롯해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까지 몰려들었다.

"무슨 일인가?"

제복을 입은 군인이 갑자기 나타나 물어오자 병사들과 장교들이 당황해서 얼른 경례를 올렸다.

거수경례를 받은 제복의 군인이 소년을 바라보자 기세등등하던 소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변했다.

"그게, 어이없게도 요 맹랑한 녀석이 말입니다. 호무관에 입관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어서 아주 난처하던 참입니다."

"입관을?"

"네, 제 주제도 모르고 말입니다."

병사는 마치 자신의 잘못인냥 고개를 연신 숙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병사들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던 소년은 사내가 쳐다 볼 때 마다 눈길을 피했다.

"언제부터 호무관이 사람을 가려서 뽑았던가?"

"네? 아니 그게 뭐냐 하면..."

궁색한 변명거리를 찾으려는 병사를 제지시킨 사내가 소년에게 물었다.

"호무관은 왜 찾아 온 거냐?"

"그...그게 사실은.."

"훗! 사내자식이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 어떻게 호무관에서 수련을 받겠다고 한 거지?"

사내의 비웃음에 발끈한 소년이 작은 주먹을 힘껏 쥐고 크게 소리쳤다.

"나, 나는 알렉스 호크경을 뛰어 넘는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푸훗!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져 나왔다. 소년의 포부가 너무나 황당했는지 체면을 지켜야할 장교들마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기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소년을 유심히 살피던 사내는 진지하게 질문을 했다.

"좋다, 네 소원이 그렇다며 내가 도와주마, 대신 도중에 힘들다고 도망치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 그럼요 제가 이래보여도 저기 하크 시장 골목에서는 알아주는 놈이라고요!"

"그래, 그럼 네 녀석이 호무관을 무사히 졸업 한다면 왕립군대에 들어 갈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마."

"저, 정말요?"

대륙 최고의 군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에 소년의 눈에는 희망으로 가득 찼다.

"해리슨 관장, 이 녀석 좀 씻기고 신입부원으로 등록시키게!"

"알겠습니다."

소년을 인수 받은 해리슨 관장이 소년을 데리고 사내를 따라서 호무관 정문을 넘어서자 우렁찬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내가 수련장을 지나가자 관원들을 훈련시키던 사범이 일제히 구령을 붙였다.

"충 성!"

관원들의 경례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인 사내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기, 저분은 누구세요?"

소년의 물음에 해리슨 관장의 얼굴이 황당해졌다.

"너 지금 나랑 장난 하냐? 너의 꿈이라며 저분보다 훌륭해지는 게, 아니냐?"

해리슨 사범의 말에 소년의 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 그럼 저, 저분이 바로 알렉스 호크 공작님!"

소년의 반응에 해리슨 사범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래 저분이 바로 폴렌시아 대륙을 구원하시고 대륙 제일의 군대를 만드신 위대한 군인이자 영웅이신 알렉스 호크경이시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우상을 눈앞에 보고도 몰라 봤으니 스스로 뺨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년의 눈이 이미 사라진 호크의 뒷모습을 찾았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어머,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응, 캐더린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호호호 거짓말인줄 뻔히 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요."

"미안해, 난 정치는 질색이라서 말이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니, 로베니아의 합병 문제로 머스탱 수상께서 골치깨나 썩고 계시지."

자다가 깨어난 사내아이가 달려와 호크의 품에 안겼다.

"웃차! 이 녀석은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진단 말이야."

아들을 품에 안은 호크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이제 대륙의 주인은 북부 연합군이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도 북부 연합군은 로베니아 처럼 폭정을 일삼지 않고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있으니 모두가 나름대로 기뻐하고 있어요."

"그래 이 평화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해야지"

아이를 높이 들어 올린 호크는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며 자신의 결정이 옳았음을 느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알렉스 호크는 대한민국 권혁의 인생을 포기하고 폴렌시아에 남았고 미르네보의 계략에 휘말렸던 모든 왕국과 로베니아 제국은 결국 자멸하여 북부 연합군이 대륙의 평화를 유지했다. 물론 그 중심에 호크가 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고 미르네보의 엄청난 저주에서 인류를 구원한 호크의 무용담은 세대를 넘어서 전해질 이야기였다.

붉은 노을이 지는 창밖을 보며 호크는 지나온 날들을 떠올렸다.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값진 삶이었다. 붉은 노을 속에서 차원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다시 물어보는 듯 했다.

[후회하지 않나?]

호크가 크게 웃었다.

"후회 하지 않소. 나의 결정은 옳았으니까."

아이를 안고 창문을 닫고 사라지자 붉은 노을이 호무관을 물들이며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알렸다. 사람들은 때때로 선택의 갈림길에서 강요를 받는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본인의 결정이며 자유의지의 선택이다. 결과가 나쁘다고 자신을 탓하지 말고 더 노력하지 않았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호크가 폴렌시아에서 영웅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운 투혼 때문이었고 오늘도 그의 영웅담을 듣고서 꿈을 꾸는 아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모험을 기다리며.......

< 끝 >

-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제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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