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54화 (54/55)

Chapter 54. 운명? 그건 내가 만들어 가는 거야!

"쉿!"

핸들러가 지친 싸이클론의 몸을 끌어당겨 눈 덮인 바위 뒤로 급히 숨었다. 왜 그러냐는 싸이클론의 눈길을 받은 핸들러가 눈보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앞을 가리켰다. 눈앞을 어지럽게 만드는 눈발 사이로 검무스레한 물체의 형태가 드러나 보였다. 그것은 바로 알버스크 왕국의 기간테스들이었다. 좀 더 눈 사이를 좁히자 기간테스들 뒤로 거대한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의 정상에 오연하게 서있는 날라이옴바나 신전 대륙어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신전이었다. 신성하지 못한 자는 발을 들여 놓지 말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폴렌시아 대륙의 절대 성지였다. 샹그릴라와 마이란스 이 두 신성도시가 파괴된 이상 이 곳이 이제 대륙의 유일한 성지가 되었다. 핸들러와 싸이클론이 최대한 몸을 낮추고 어떻게 저곳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전 입구를 지키는 기간테스들도 문제였지만 거센 눈보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저 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의 살벌한 모습들을 보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안에서 대륙의 운명을 뒤 바꿀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 밖에서 고개만 내밀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싸이클론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애만 태웠다.

"빌어먹을! 이일을 어떻게 한다. 도대체가 방법이 없어 방법이!"

답답한 마음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바위를 후려친 싸이클론은 손을 타고 밀려오는 통증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싸이클론은 추위에 언 주먹에 일어난 통증 따위는 금세 잊어버리고 눈 덮인 바위의 눈들을 훔쳐냈다.

"설마?"

"갑자기 왜그러십니까?"

적의 동태를 살피던 핸들러는 갑작스럽게 싸이클론이 흥분하여 몸을 숨기고 있던 바위의 눈을 쓸어내리는 것을 보고 기겁하였다. 다행이 눈보라가 거세게 불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러다가는 적군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싸이클론님 제발 진정하시고 가만히 계십시오!"

핸들러의 만류에도 싸이클론은 좀 체로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가뜩이나 손에 감각이 없을 것이 분명 한데 저렇듯 무리를 하고 있으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싸이클론 이제 그....아, 아니?"

싸이클론의 손을 막아서던 핸들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싸이클론이 눈을 걷어내자 드러난 것은 게이트를 움직이는 조정석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게이트가 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데로 얽혀들자 말은 없었지만 서로의 뜻이 교환되었다. 두 사람은 이내 바위인줄 알았던 석판에서 멀어진 다음 핸들러가 마나 통신기로 본국을 연락을 취했다. 고대의 이동 게이트가 맞다면 아직은 기회가 있기에 두 사람은 조급한 마음을 진정하며 통신기에 불이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는 마나의 흐름이 일정치가 않아서 마법이나 마법무구들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기간테스야 고대의 유물이니 상관없지만 마나 통신기는 그렇지 못했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가며 핸들러는 애타가 마나 통신기가 작동되기만을 기다렸다. 그 사이 싸이클론은 실루엣만 보이는 날라이옴바나 신전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고 그 사이 고대의 봉인을 깨뜨린 알버스크 왕국이 그 안에서 무엇을 꺼낼지 두려웠다.

초겨울 날씨 답지않게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성벽 위에서 보초을 서던 경비병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처음에는 하품으로 인해 눈가에 맺힌 눈물 때문에 잘못 본 줄 알았다. 얼른 두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급히 망루의 비상 경계종을 울리려 줄을 잡아당기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뭔 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입에서는 바람 빠진 숨소리만 속절없이 흘러 나왔다. 손을 뻗어 기울어지는 몸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거꾸로 움직이며 인해 모든 것이 정지했다. 더 이상 그의 숨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성벽 망루 초소에 있는 경비병들을 모두 제게 하라!"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피 묻은 검을 잔인하게 휘두르며 성문을 열었다.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지자 불쌍하게 죽어간 경비병이 모두에게 알리려고 했던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성안에서 경비병들을 해치운 기사들이 성문으로 뛰어가 성안으로 들어오는 제라드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퍽!

제라드 백작의 발길질에 기사가 땅바닥을 굴렀지만 금세 일어섰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걸로 충격이 보통이 아닌 듯싶었지만 결코 내색하지는 않았다.

"정신 똑 바로 차려!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다. 절대로 계획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서둘러라! 제국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리는 일이다. 목숨을 걸어야 해!"

제라드 백작의 핏발선 눈이 아니더라도 이미 수도 성안의 분위기는 전쟁터였다. 열린 성문으로 병사들이 봇물처럼 밀려 들어왔고 사전에 약속된 장소를 향해 병력들이 갈라지며 달려 나갔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들은 자신들이 맡은 구역을 정리하기 위해 병사들을 독려 했다. 일상생활을 위해 밖으로 나섰던 시민들은 겁에 질려 모두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자고 일어나니 또 다시 세상이 뒤집어 지려고 하고 있으니 그저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숨소리를 죽일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 내일 먹을 양식과 가족들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누구도 자신들을 잘살게 해주었다고 혁명 정부를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설 시민들은 없었다.

"막아라! 별궁과 내성으로 들어오는 성문들을 모조리 닫고 흙주머니로 문을 막아서 적들이 내성으로 들지 못하게 하라!"

성을 수비하는 수비대장의 목청이 찢어져라 울려 퍼지고 당황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이리저리 뛰어 다녔지만 이내 독려하는 장교들의 노력 덕택에 내성의 망루부터 수비 병력들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겨우 성내가 진정되자 수비대장을 맡고 있는 테일로스 자작도 망루로 올라갔다.

"이, 이럴 수가! 세상에!"

으득!

테일로스 자작의 입안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수도의 외곽 수비성을 점령하면서 내성을 공격하는 이들이 다름 아닌 아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선명히 새겨진 문장이 너무나 크게 눈에 들어왔다.

"자작님 저길 보십시오!"

부관이 헐레벌떡 뛰어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테일로스 자작의 눈이 다 시 한번 크게 떠졌다. 그곳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인물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라드 백작!"

그의 목소리가 하도 커서 성 망루에서 수비를 하던 병사들의 고개가 돌려졌을 정도였다.

"왜?...도대체 무엇 때문에!"

상층부의 이해관계를 알지 못하는 테일로스 자작으로서는 혁명세력의 주체인 제라드 백작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반란군의 뒤에서 거대한 공성무기들이 늘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완전 무장한 병사들과 기사들이 투구를 내려쓰며 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도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들렸다.

"이 혁명정부는 이제 끝장이야!"

이미 그에게 성을 수비하겠다는 의지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꽉 틀어쥔 주먹이 몹시 떨렸지만 테일로스 자작은 결국 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부관, 백기를 걸어라! 부질없는 전쟁이야. 이런 의미 없는 전쟁에서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자, 자작님!"

놀란 부관의 어깨를 힘껏 누른 테일로스 자작은 처연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군의 손에 죽고 싶지는 않다. 적군이라며 얼마든지 죽어 줄 수 있지만 로베니아 제국군의 손에 개죽음하기는 싫어 어차피 우리야 소모품 아닌가? 저들이 황제가 되든 혁명 정부가 황제를 내세우든지 간에 우리가 로베니아 제국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무기를 내려놓고 백기를 올리게 이미 끝난 싸움이야. 몽셀 공작께서 실수를 하셨어, 제라드 백작에게 등을 돌리다니 어리석었어!"

말을 마치고 터덜터덜 내려가는 자작을 등을 바라보던 부관은 공성무기가 작동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백기를 내걸었다. 테일로스 자작의 말대로 개죽음을 할 필요는 없었다. 수비대 병사들도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얼굴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표정과 자작의 결단에 감사하는 마음이 함께 묻어 나왔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법이었다. 내전이 발생할 경우 이러한 점이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서로가 친한 친구일 경우 그 갈등은 더 괴로운 것이었다.

"에밀리앙! 그만 포기해! 개죽음을 할 참인가?"

"닥쳐! 너야 말로 지금이라도 빨리 무릎을 꿇고 반역에 대한 처벌을 받아라!"

별궁으로 들어가는 작은 규모의 성벽을 사이에 두고 기사 두 명이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성벽위에서 방어를 하는 에밀리앙은 지금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친구 샬란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온몸을 떨었다.

"감히 황제폐하를 배신하다니 천벌이 두렵지 않은가? 군인은 결코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법이야!"

에밀리앙의 격한 외침에 샬란은 투레질 하며 고개를 흔드는 말의 고삐를 당기며 한 바퀴 돌았다.

"어리석은 놈!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 뿐이야! 우리가 누구의 명령을 받고 궐기 했겠나? 바로 앙뜨네트 황제께서 저 간악한 몽셀 공작을 물리치라고 하셨단 말이네! 제발 내가 자네를 해치지 않게 해주게!"

"설마...?"

샬란의 말에 에밀리앙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제서야 그는 샬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고지식한 군인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의 그의 상관은 몽셀 공작이었고 그의 명령이 없이는 결코 반군들을 성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잠시 갈등은 있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우선이었다.

"미안하네, 친구! 자네의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어!"

에밀리앙이 유언을 하듯 말을 마치고 몸이 감추자 샬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에밀리앙 제발!"

에밀리앙은 필사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죽마고우였다. 북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도 함께 했던 전우이자 친구를 자신의 손으로 해칠 수는 없었다.

"샬린 단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지체 되는 것을 제라드 백작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하의 충고에 샬린은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오도록 세게 깨물었다. 부하의 단호한 눈빛에 오히려 샬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차마 친구를 죽이라고는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부하도 그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대신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갈라지며 방패로 보호를 받으면서 초록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에밀리앙은 망루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감았던 두 눈을 뜬 에밀리앙의 입에서 거센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공격하라!"

에밀리앙의 힘찬 명령과 달리 병사들의 입에서는 푸념 같은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제길, 이제 우리는 죽었다!"

에밀리앙의 부하들이 쏟아 내는 화살은 반군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법사들 머리위로 커다란 불덩이 수십 개가 만들어지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퍼버벙!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고기 타는 냄새와 더불어 불에 붙은 수비병들이 높은 성벽 망루에서 떨어져 내렸다. 끔찍한 참극이 벌어졌고 반군들도 고개를 돌리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에밀리앙이 서있던 망루는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정도로 파괴 되었다. 재가 되어 사라진 성문을 통과하는 샬린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날 오후 로베니아 제국의 수도에서는 이런 일이 여러 곳에서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현명한 지휘관 덕에 목숨을 건진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고 한쪽에서는 친구나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해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수도 곳곳에서 피어 오른 검은 연기가 찬란한 역사와 문명을 자랑했던 로베니아 제국이 기울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제국이란 명칭은 로베니아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몽셀 공작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후후후,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내 꿈은 겨우 여기까지 인가 보군."

씁쓸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몽셀공작은 그랜드홀에 모인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미안하구만 노망난 늙은이 말을 들었다가 이런 꼴이 되었으니."

대신들은 몽셀 공작의 눈물 섞인 말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이제야 겨우 자신들의 사상을 마음껏 펼쳐서 진정한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려 했건만 세상이 그것을 두고 보지 않음을 한탄했다. 저주스러워하는 이도 있었고 벽을 내리치며 욕을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몸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문 밖에서 반군들이 밀려오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들은 전혀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마지막 남아 있는 자부심이었다.

와지끈!

거친 소리와 함께 대전의 문이 박살나며 반군들이 밀려 들어와 대신들을 거칠게 바닥에 내던졌다.

"제라...드 백작!"

"오랜 만이오, 공작나리!"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나?"

제라드 백작을 보는 몽셀 공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원망, 후회, 배신감등 복잡한 감정이 한테 실린 그의 눈빛을 보고 제라드 백작은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

"그 이유를 내게 묻다니 당신 미쳤군!"

"다, 당신?"

이렇게 된 마당에 자신의 목숨 따위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모욕을 받아야 할 만큼 자신이 잘못 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몽셀 공작은 너무 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제라드 백작은 그랜드 홀을 거칠게 가로질러 몽셀 공작의 멱살을 잡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노구의 몽셀 공작이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제라드 백작의 힘을 이겨낼 리가 없었다. 수수깡이 쓰러지듯이 카페트 바닥을 나뒹구르는 몽셀 공작을 대신들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별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자신들도 결박당해서 옴짝 달싹 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구를 동정할 처지가 못 되었다.

끄으윽!

제라드 백작이 바닥에 쓰러진 몽셀 공작의 배를 밟자 가래 끓는 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대신들은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보다 못한 대신중 하나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너무하는 처사가 아니오! 그래도 일국의 공작이오, 그만 하시오!"

"푸하하하하!"

웃음을 멈춘 제라드 백작의 서릿발 같은 눈길이 그자에게 향했고 은빛을 내는 그의 검의 바람을 갈랐다.

서걱!

뭔가 잘라지는 소리와 함께 곧은 소리를 냈던 대신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건방진 놈! 또 그 잘난 세치혀를 놀리고 싶은 놈은 지금 나서라! 귀찮게 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잘라주마!"

제라드 백작의 목소리에는 맺힌 한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발렝 황제의 선대 때부터 오로지 제국을 위해서 일해 왔다. 그러나 발렝 황제 때는 늙었다는 이유로 변방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고 뜻을 품고 혁명에 가담한 후에는 토사구팽처럼 버려졌다. 무려 30년의 세월 동안 맺힌 한이 오늘 이 자리에서 터져 나온 제라드 백작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대전안의 모든 대신들의 목을 친다고 해서 그 울분이 쉽게 가라앉을 리가 없겠지만 서도 적어도 분풀이는 해야 겠다는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회의실에 웃음거리야 되어야 했던 그 모욕을 떠올리자 제일 크게 웃었던 대신들의 얼굴이 하나둘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제라드 백작의 시선을 받은 대신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야 했다. 그의 검이 다음의 화풀이 대상을 찾는 동안 제라드 백작에게 얻어맞은 몽셀 공작이 쉬어터진 목소리로 제라드 백작을 불렀다.

"나...나 하나로 .... 대신해 주게나! 모든 죄는 내가 짊어지고 가게 해주게. 부탁이네! 제..발!"

우뚝!

신기하게도 그 토록 참을길이 없던 울분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몸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채 입가에 검붉은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몽셀 공작의 모습을 보면서 제라드 백작은 인생무상의 참뜻을 깨달았다. 검을 집어넣은 제라드 백작이 무릎을 꿇고 몽셀 공작 곁에 앉았다.

"편히 가시오, 더 이상 피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오."

제라드 백작의 얼굴에서 살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몽셀 공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입을 달싹이는 몽셀 공작을 보면서 제라드 백작은 그가 고맙다고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 새는 소리가 몽셀 공작의 입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제라드 백작이 그의 부릅뜬 눈을 손을 들어 감겨주었다. 제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야심가 몽셀 공작의 최후는 그가 마지막 생명을 거두게 한 발렝 황제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죽은 그 자리마저 똑 같았다. 발렝 황제의 피가 채 마르기전에 그 위로 몽셀 공작의 피가 흘러 내렸다. 제국의 황제를 죽이고 혁명 정부를 세우며 야심차게 자신의 정치 야망을 실현하려던 몽셀 공작은 채 그 꽃을 피우기도 전에 그와 함께 혁명을 주도했던 제라드 백작에게 죽임을 당했다. 우습게도 제라드 백작은 제국의 수뇌를 연이어 죽게 만든 장본인이 되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 또 누구의 피가 이 바닥을 계속해서 적실 것은 분명했다. 역사는 항상 피를 부르고 피는 역사를 기록하는 증인이었다. 제국의 그랜드 홀은 씻을 수 없는 피의 역사를 반복했다.

"황제폐하 납시오!"

우르르 발길이 구르는 소리가나며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앙뜨네트 여제가 천천히 그랜드 홀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피를 본 것이 두 번째였다. 한번은 지아비였고 이번에는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숙부라고 부르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몽셀 공작을 내려 보다가 자신의 하얀 손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새하얀 손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붉은 피로 더렵혀져 지워지지 않는 손이었다. 그녀는 손에 피가 묻기라도 한 것처럼 손을 문질렀다. 정신없이 손을 문지르는 그녀를 유모가 다가와 따스한 손으로 붙잡았다.

"폐하..."

"아!"

유모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앙뜨네트는 유모의 손길을 뿌리치고 몽셀 공작이 앉아있던 단상의 의자에 앉았다. 제라드 백작이 검을 높이 쳐들고 앙뜨네트 여제를 위해 만세를 부르자 반군에서 이제는 제국의 권위를 다시 되찾은 영웅이 된 이들이 검을 들어 제라드 백작을 따라서 앙뜨네트를 연호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반군들의 성원에 화답했다.

"제라드 백작!"

"예, 황제폐하!"

제라드 백작은 몽셀 공작의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서 각성을 한 후여서 행동이나 말투가 사뭇 달라 있었다. 그런 그의 변화를 눈치 챈 앙뜨네트는 기분 좋은 미소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와 호위기사에게 검을 건네받았다.

"제라드 드 빠이유이 그대가 로베니아 제국를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보여준 그 용기와 희생정신에 대한 보답으로 그대를 제국의 영원한 세습작위인 공작의 지위에 임명하노라!"

"폐, 폐하!"

격동의 감동이 온몸을 통과하자 제라드 백작, 아니 이제는 제국의 공작이 된 제라드 공작은 감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로서 그들의 반란은 정당화 되었고 반역자가 아닌 제국을 구한 정당한 과업을 완수한 제국의 명예로운 군인이 된 것이다.

"신 제라드 드 빠이유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황제폐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의 어깨서 검을 거둔 앙뜨네트는 몸을 굽혀 감격에 울고 있는 제라드 공작을 일으켜 세웠다.

"공작,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추된 제국의 명예와 감히 제국에 도전했던 어리석은 대륙의 왕국들에게 제국의 무서움을 알게 해주어라!"

"네, 폐하!"

어느새 제라드 공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지 채 얼마 되기도 전에 이들은 벌써부터 대륙을 운명을 손에 틀어쥐기 위해 쉬는 것을 포기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초록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 급히 들어와 제라드 공작에게 속삭였다.

"폐하, 알버스크의 테렌스 공작이 시간의 틈을 열었다고 합니다."

"예언이 이루어지겠군."

"네, 폐하!"

"하지만 그것은 로베니아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해!"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제라드 백작의 단호한 말에 앙뜨네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도 시간 틈을 열어야 할 때가 되었군. 이제 진정한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지 온 세상에 알릴 때가 왔어,"

그녀가 찬바람을 날리며 그랜드 홀을 빠져나가자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있던 제라드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대신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고 전 군에 전쟁준비를 알려라!"

제라드 공작이 공작의 작위에 오르고 나서 처음 내린 명령은 또 다시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후의 소멸의 순간을 위해 소용돌이는 무섭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제 폴렌시아 대륙은 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이미 대륙은 그 중심에 서있었다.

대전을 빠져나간 앙뜨네트가 시녀들과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을 데리고 제국의 성지를 향해서 떠났다. 그녀를 호위하는 군사의 세가 어마어마했다. 예전에 비밀리에 도둑질하듯 드나들었던 길을 그녀는 당당하게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갔다. 그런 앙뜨네트의 행진을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후후후, 모든 것이 내가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는 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크리시앙을 보고 루스펠은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 어르신 일이 점점 커져가는 것 같은데 두렵지 않으십니까?"

"이런 루스펠? 자네는 뭐가 그리 두려운가? 자네나 나나 잃을게 없는 사람들 아닌가? 아니지 아니야 우리는 여원히 죽지 못하는 운명을 가졌으니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해야 하나 큭큭큭!"

스스로를 자학 하면서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크리시앙에게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루스펠이 주인에게 급히 물었다.

"주인님 어쩌시려고요? 혹시라도..."

"혹시 뭐? 나도 내 마음을 모르는데 자네가 뭘 안다고 감히 나서는 건가?"

크리시앙의 눈매가 무서워지자 루스펠은 감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호크가 폴렌시아의 지팡이를 찾기만 하면 운명의 속박은 끝이 나는 것이었지만 엉뚱하게도 주인인 크리시앙이 뭔가를 꾸미는 듯 하자 그는 무척이나 불안해 졌다. 굳이 앙뜨네트 황제가 시간의 틈을 열 필요는 없었다, 루스펠은 시간의 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져리게 알고 있었다. 양 날의 칼 같은 시간의 틈이 열리는 순간 마다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잘 알고 있는 루스펠은 또 다시 이 땅에 서 벌어질 참극을 머릿속에 그려 보다가 너무 두려워 몸을 떨었다. 로베니아를 세운 선조들이 드래곤들과 전쟁을 치르다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내세운 것이 시간의 틈을 여는 방법이었다. 시간의 틈이 열리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들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저주스러운 여신 미르네보였다. 인간은, 시간의 틈을 열어서는 안되었다. 그 공간을 열고 신의 세계와 폴렌시아를 연결하는 순간 또 다시 미르네보의 흉계에 인간들은 흔들릴 것이다. 루스펠은 시간의 틈을 열려고 성지(聖地)로 들어가는 제국의 여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문득 과연 자신들의 이 영원히 삶을 지속해야하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 또한 여신의 장난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루스펠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앙뜨네트 여제가 성지로 들어가자 샹그릴라의 지하에 숨어있는 운명의 시계는 이제 눈금을 하나만 남겨두고 멈췄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밀어부쳐! 적 기간테스를 반대 방향으로 밀어내라, 신전의 입구를 확보해! 밀턴 대위, 소대 단위로 적들을 상대해!"

호크의 거친 목소리가 통신기를 울리자 케린버그의 기간테스 기동 전대들이 일사 분란하게 눈보라 속을 헤치고 알버스크의 기간테스를 산 아래로 밀어냈다. 알버스크 역시 마찬가지로 기간테스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북부 연합군을 따라 갈수가 없었다. 이쪽은 목숨을 건 전쟁을 수없이 치룬 베테랑들이었으니 로베니아에게 공급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알버스크의 기사들이 노련한 북부 연합군의 기동전대를 막아내기란 애초에 무리였다. 당연한 결과로 반대편으로 밀려나며 알버스크 기간테스들이 패퇴하자 북구 연합군의 보병 부대가 들이 닥쳤다. 알버스크의 군대는 신전 입구를 목숨을 걸고 사수했지만 뒤에 이미 침투해 있던 특임대의 후방 교란으로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늘마저 그들의 편이 아니어서 짙은 눈보라 속에서 나라오는 석궁의 위력에 알버스크의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다. 하얀 설원 위로 인간의 따뜻한 피가 뒤덮으며 비릿한 냄새로 성지를 더럽혔다. 성지가 인간의 피로 얼룩지자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가 울부짖듯이 눈보라가 더욱 거세게 불어 닥쳤다. 그러나 인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생을 멈추지 않았다.

"알파 중대 진입로를 확보했습니다."

마나 통신기를 통해서 신전 주변이 정리 됐음을 알려오자 호크가 이지 중대와 함께 설원을 내달렸다. 그 뒤로 싸이클론과 핸들러가 바짝 뒤를 쫓았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니 미친 여자의 귀곡성처럼 귀를 울리던 눈보라소리가 뚝 그치며 고요했다.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몸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진입했다.

"기분 나쁜데, 이런 고요함이라니..."

호크가 투덜대자 싸이클론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어깨를 으쓱거린 호크가 수신호를 보내 부대에게 수색 명령을 내렸다. 안으로 들어온 이지중대와 알파 중대가 신속하게 산개하여 신전 안으로 흩어졌다. 거대한 고대의 신들이 하얀 석상으로 재현되어 오연하게 발아래 인간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이렇게 눈보라가 심한 산위에 어떻게 이런 거대한 신전을 세웠는지 놀랍기만 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아도 아찔할 정도로 높은 천정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만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신상(神像)들을 지나서 긴 복도를 지나치자 온통 코발트 빛으로 가득한 돔 형태의 방이 나타났다.

잠시 수색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모두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들어오자 코발트 빛의 둥근 천장은 금세 밤하늘의 모습을 그리며 아름다운 별자리를 나타내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곧 별자리가 밝아지며 신들이 나타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더니 나중에 검과 창 방패를 들고 치열한 전투를 시작했다. 언듯 언듯 그 모습들이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아름다운 그림에 빠져 들었다.

"아름답다..."

호크마저 지금 자신의 임무를 잊고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나 싸이클론이 소리치자 모두들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 차려라, 혼돈의 방이다. 정신을 잃고 있으면 모두들 여기서 죽는다. 어서들 움직여!"

과연 싸이클론의 말대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곳곳에 인간의 해골로 보이는 뼈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잘못 했으면 자신들도 저런 꼴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자 몸서리 쳐졌다. 한참을 낯선 신전을 수색한 끝에 수색조들이 돌아왔다.

"장군님, 싸이클론님! 저쪽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핸들러가 급히 보고를 하자 모두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뛰어갔다. 온통 거울만 가득한 방이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거울이란 거울은 다 모아 놓은 듯 신비한곳이었고 빛도 없는 곳의 거울들이 빛을 반사해서 눈이 부셨다. 겨우 겨우 거울의 방 끝에 다다르자 벽 전체를 거울로 장식한 곳이 나타났다.

"귀를 한 번 대보십시오!"

이곳을 발견한 병사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하자 호크가 얼굴을 돌려 귀를 바짝 대어 보았다.

"음..."

이어서 핸들러와 싸이클론도 귀를 대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있는 게 확실해!"

싸이클론이 확신을 하자 호크가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꺼내들었다. 호크의 행동을 보고 모두가 뒤로 물러섰다. 호크의 의지를 느꼈는지 양손에 움켜쥐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웅웅, 거리는 소리를 크게 냈다. 검신이 노랗게 물들자 호크는 지체하지 않고 블레이드를 교차하며 거울 벽을 베어버렸다.

쩍!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거울 전체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

투둑!

거미줄이 그려지듯이 사방으로 균열이 발생하더니 결국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벽이 무너져 내렸다. 벽이 사라지자 반대편에 아주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온통 하얀 석회벽으로 이루어진 광장이었고 둥근 광장은 낯선 문자로 가득 채워져 신비한 분이기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그들이 찾던 알버스크의 기사단과 병사들 그리고 마법사들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그들도 놀랐고 유리벽이 깨지며 바로 코앞에 적들이 나타나자 북부 연합군도 멀뚱하게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초간 어색한 정적이 지나가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충돌했다.

우와와아!

함성과 함께 북부 연합군의 스패로우가 광장으로 날아들었고 기습을 받은 알버스크 왕국의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강력한 석궁인 스패로우는 알버스크 왕국 군대의 방패를 조롱하듯 꿰뚫어버리며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깜짝 놀란 기사들이 방패를 들고 나서자 북부 연합군들도 검과 도끼를 꺼내들고 접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병력의 수에서는 알버스크가 앞섰지만 전투력에서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게다가 북부 연합군에게는 소드마스터와 소드마스터에 준하는 호크와 핸들러가 있었다. 충돌이 시작 된지 채 얼마가 되지 않아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것은 대부분 알버스크 왕국의 군대였다. 그리고 호크의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에 힘을 싫어 알버스크 군대의 한 가운데 뛰어 내려 블라인트 커터를 사용하자 두 발로 서있는 적군이 거의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패배했다. 검을 거둔 호크가 주변을 정리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사이 싸이클론은 겁에 질린 알버스크 왕국의 마법사들을 다그쳤다.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에서 마법사는 힘없는 인간에 불과했다. 제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그들은 이지 중대원들에게 잡혀서 싸이클론 앞에 무릎 꿇려 졌다.

"저것이 뭐냐?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싸이클론이 닦달을 했지만 알버스크 왕국의 마법사들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화가 난 싸이클론이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마법사의 뺨을 후려쳤다.

"이 어리석은 것들! 너희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아느냐? 자칫 잘못 하다가는 세상이 끝장 날수도 있단 말이다!"

그러나 뺨을 얻어맞은 노 마법사는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는 테렌스 공작을 시간의 틈으로 들여보낸 알버스크 왕국의 수석 마법사였다.

"허! 이거 참!"

그들의 태도에 질려 버린 싸이클론이 기가 막혀서 혀를 차자 핸들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신성도시 마이란스의 폐허 속에서 아이들에게 들은 대로라면 이들은 폴렌시아의 지팡이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온것이 틀림없었다. 동맹국을 버리고 모든 것을 걸 정도라면 대단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핸들러는 시간이 부족함을 느끼고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마법사 하나의 로브자락을 움켜쥐고 끌어냈다. 나이어린 마법사는 끌려오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기사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스르릉! 거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피 묻은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린 마법사의 목에 검이 닿았다.

"긴말 하지 않겠다. 대답하지 않으면 하나씩 죽인다. 폴렌시아의 지팡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라!"

차디찬 핸들러의 말에 마법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어린 마법사는 눈물 콧물이 뒤섞여 수석 마법사를 애타게 바라보았지만 그는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핸들러 역시 이를 악물었다. 핸들러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소름끼치는 소년의 비명소리와 함께 귀를 막고 싶은 울부짖음이 광장 안을 울렸다.

"그, 그만! 그만하시오 다 말해주겠소!"

뚱뚱한 중년의 마법사가 손을 번쩍 쳐들고 다급하게 외쳤다.

"랜돌! 닥치지 못하겠느냐?"

궁정 수석 마법사가 깜짝 놀라서 랜돌이라는 마법사를 제지하려 하자 이지 중대원 하나가 스패로우로 머리를 후려쳤다. 수석 마법사가 조용해지자 마법사 랜돌이 모든 것을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말할 테니 그 아이를 살려 주시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요."

핸들러 역시 어린 아이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이 랜돌이라는 마법사가 나서준 것이 속으로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핸들러가 검을 떼자 동료 마법사들이 어린 마법사의 상처를 돌봤다. 랜돌이라는 마법사도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수석 마법사의 상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한 것은 ......"

싸이클론과 핸들러가 마법사들을 취조하는 동안 주변을 정리한 호크는 광장의 제단위에서 일렁이는 검은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들어오라!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노라!]

"헉! 뭐, 뭐야?"

느닷없이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호크가 뒷걸음질 치며 검을 꺼내들었다. 호크의 행동에 중대원들도 긴장하며 무기를 앞세우고 호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장군님 무슨 일입니까?"

루크소령이 다가와 호크의 안색을 살피자 호크는 당황한 얼굴로 루크를 바라보았다.

"이봐 루크 소령 자네는 아무 소리도 못들었어?"

"네?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루크가 중대원들을 바라보자 모두들 어깨를 들어 보일 뿐이었다. 결국 호크는 자신만 그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천천히 조심스럽게 신기루처럼, 북극의 오로라처럼 흔들리며 일렁거리는 검은 공간 앞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라, 구원자여! 이제 예언을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헉!"

또 다시 소리가 들려오자 호크는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처음 보다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무척이나 조심하며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어둠을 들여다보며 묘한 흥분을 느끼고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안돼!"

호크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잠시 자신이 정신을 홀렸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영감! 저게 나한테 말을 걸었다구?"

호크가 호들갑을 떨자 싸이클론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저건 시간의 틈이다!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돼!"

"시간의 틈이 뭔데요?"

호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싸이클론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며 하고 싶은 않은 말을 꺼냈다.

"그 옛날 이 지긋지긋한 예언을 만들어진 고대의 전쟁, 드래곤과 인간의 전쟁을 만들어낸 여신 미르네보를 불러내는 시간과 공간을 여는 문이야!"

"네!"

호크 역시 깜짝 놀라서 크게 소리쳤다.

"예언이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어!"

"말도 안돼! 네 번 째 예언이 뭐였지?"

'성스런 돌이 샹그릴라를 떠나지 아니하매 폴렌시아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길 바라매,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네 번째 예언을 떠올린 호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성스러운 돌은 스톤을 말하는 거잖아요. 스톤은 지금 북구 연합 내에 영감이 만들어 놓은 결계 안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요. 나머지 낙인은 저 한테 있고 폴렌시아의 지팡이를 테렌스 공작이 갖는다고 해도 반쪽짜리라서 예언은 이루어질 수가 없단 말이에요!"

호크가 악을 쓰며 소리치자 싸이클론도 혼란스러웠다. 호크의 말대로 그 동안 호크와 싸이클론은 예언을 막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왔고 낙인들도 일부러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공간으로 흩어 놓았고 성스러온 돌 성자 스톤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공간에 그것도 궁극의 결계라는 드래곤의 절대 공간에 가두어 놓았다. 이 만 하면 준비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듯이 흔들리는 시간의 틈을 보자 그런 자신감이 사라졌다.

"장군님! 로베니아의 마법사가 숨어 있었습니다."

주변을 수색하던 병사들이 초록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끌고 오자 싸이클론의 눈이 빛났다. 씩씩 거리며 분해하는 로베니아의 마법사에게 싸이클론이 물었다.

"네 놈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로베니아 제국이 알버스크와 동맹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째서 이 중요한 곳 까지 함께 한거지?"

그에 대한 답변은 랜돌이라는 알버스크 왕국의 마법사가 말해주었다. 기왕지사 모든 것을 털어 놓기로 했는지 그는 로베니아에서 마법사와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을 보내왔고 그녀들도 의식에 참여해 시간의 틈을 열었다고 말해주었다. 랜돌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초록색 로브를 입은 로베니아의 마법사에게 쏠렸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 그저 시키는 일을 했을 뿐..."

애써 말을 더듬으며 변명을 하던 로베니아의 마법사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뭔가 결심을 한 듯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절대로 네 놈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로베니아 만......큭!"

혀를 깨물고 자살하려던 마법사는 호크의 발길질에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렇게는 안 돼지,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가 궁금한 것은 말해주고 가야겠어!"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응, 좋아! 잠시 뒤에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호크의 장담대로 광장 안은 한동안 인간인지 짐승인지 모를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호크의 잔인한 고문에 같은 편들조차 고개를 돌렸을 정도였다.

"자, 이제 얘기 할 마음이 생겼나?"

씨익, 하고 웃어주는 호크를 보며 로베니아의 마법사는 공포에 떨며 진저리쳤다.

"네, 네놈은 악, 악마다 악마야!"

자신을 악마라고 부르는 소리에도 호크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희들이면서 누굴 탓하는 거야? 자, 다시 시작해 볼까? 아직도 시험해 보지 않은 기술들이 꽤 남아 있거든."

호크의 협박에 결국 로베니아의 마법사는 헛바람을 삼켰고 그 순간 그의 의지도 무너져 내렸다. 일단 허물어진 의지는 쉽게 회복되지 못한다. 결국 그는 고통 앞에 무릎을 꿇었고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응? 뭐야, 그러니까 로베니아 제국의 앙뜨네트 황제가 시킨 일이란 말이야?"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사의 눈을 살핀 호크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적이 뭐지?"

"후우~ 후우~ 나도 모두를 아는 것은 아니오, 다만 여기에 있는 시간의 틈이 열릴 때 로베니아의 성지 메종 아트리아에 있는 시간의 틈도 열린다는 사실만 알 뿐이오."

"설마 앙뜨네트 황제가 ....설마....."

싸이클론이 몸을 벌벌 떨자 호크가 싸이클론을 진정시켰다.

"영감 왜 그래요? 진정하라고요!"

"큰일 났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뭘요?"

호크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성스러운 돌은 스톤이 아니었다."

"네에?"

"진짜 성스러운 돌은 ....바로 너였어!"

"하. 하. 하!"

호크는 뚱딴지같은 싸이클론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지만 진지한 그의 눈빛을 보고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네 검을 다오!"

싸이클론의 떨리는 손에 혼돈의 검 블레이드를 쥐어 주자 싸이클론은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다시 살폈다.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세린디아의 베를로리아 지하 도시에서 만난 차원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검에 걸린 봉인을 풀어 준 뒤 변해있었다. 매끈한 검날 대신에 낯선 문자들이 가득하게 음각되어 있었는데 전에는 전혀 그 뜻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그 문자들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싸이클론은 검을 매만지며 음각된 문자를 손으로 읽어 내렸다.

"나도 몰랐다. 그런데 조금 전 로베니아의 마법사가 말한것을 듣고 또 이곳으로 오기 전에 별자리와 환상을 보여준 방에서 나타난 영상을 통해서 깨달았다."

싸이클론의 말에 호크는 모두의 정신을 홀렸던 코발트 빛의 돔 천장을 떠올렸다. 별자리가 환상적으로 빛이 났고 신들의 검을 들고 싸우는 장면들이었다. 그런데 좀 더 기억을 떠올려 보니 그중 하나가 들고 있던 검이 바로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였다. 그것을 깨닫자 호크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혼돈의 방에서 보았던 그 신의 모습이 자신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스러운 돌.... 이카나두스르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들고 세상을 혼돈으로 이끌었던 악마였다. 너무나 잔인하고 파멸을 일삼는 것에 빗대어 그를 성스러운 돌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가 살육을 일삼고 나서 늘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돌에 갈았기 때문이지 그 때 깍아 낸 산이 바로 이곳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서던 호크가 악을 썼다.

"거짓말이야! 내가 그럼 악마란 말이에요?"

악다구니를 쓰는 호크에게 싸이클론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너는 그의 힘을 이어 받았을 뿐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앙뜨네트 황제가 왜 그 저주스런 시간의 틈을 열려고 하는 이유야!"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것 힘들게 싸운 것이 무엇 때문이지 허탈하기 까지 했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해도 운명이란 괴물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시간이 되었다! 구원자여! 어서 오거라!]

또 다시 기분 나쁘게 일렁거리는 시간의 틈이 호크에게 소리치자 호크가 싸이클론의 손에서 검을 도로 가져와 시간의 틈 앞에서 섰다.

"오냐, 내가 가주마! 이제 이 지긋 지긋한 싸움을 끝내자!"

호크의 돌발 행동에 모두가 깜짝 놀라서 만류했다.

"안되다! 저 안에는 미르네보의 어떤 흉계가 숨어 있을지 몰라! 네가 죽을 수도 있다."

싸이클론이 애타게 매달렸지만 호크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감도 알잖아요. 내가 가야 한다는 거, 그래야 이 폴렌시아도 구할 수 있어요. 내가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내 의지가 휘둘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요."

호크의 단호한 의지에 싸이클론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운명은 거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얘야!"

싸이클론이 마지막으로 붙잡았지만 호크는 고개를 저었다. 핸들러 마저 호크의 손을 붙잡았지만 매몰차게 뿌리쳤다.

"운명? 그런 것은 내가 만들어가 가는 거야! 누가 정해준 게 아니라고!"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두에게 하는 말인지 크게 소리친 호크는 핸들러의 어깨를 잡아 당겨서 귀에 속삭였다.

"캐더린과 내 아이를 부탁한다. 만약에 내가 잘못되면...."

차마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한 호크가 시간의 틈으로 몸을 던졌다.

경악하며 호크를 부르짖는 이들을 뒤로 하고 호크의 몸을 시간의 틈이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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