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53화 (53/55)

Chapter 53.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길

"루베르!"

몽셀 공작의 성난 고함소리에 회의실 탁자가 들썩거렸다. 어지간히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이 틀림없었다. 몽셀 공작의 새로운 참모로 떠오른 루베르 백작은 예전의 당당함과 총명함 대신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입은 굳게 닫힌 채 말이 없었다. 수많은 대신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몽셀공작의 비난을 받고 있는 그를 아무도 두둔하지 않았다.

"입이 있으면 뭐라고 말을 해봐!"

몸을 움찔거린 루베르 백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공작님! 계획은 완벽했습니다만 일을 하는 인간들의 실수가 결정적인 실패의 원인이라고..."

"닥쳐라!"

결국 참지 못한 몽셀 공작이 집어 던진 찻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대신들은 찻잔이 자신에게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회의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야심차게 계획했던 일들이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몽셀 공작으로서는 속이 뒤집힐 만도 했다. 기껏 힘들게 붙잡았던 북부 연합군의 알렉스 호크 공작과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삼국 연맹과 북부 연합군을 대립하게 하여 자멸하게 만들려던 계획마저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달콤한 세치 혀로 그럴 듯한 계획을 늘어놓았던 위인이 저렇듯 나몰라라하며 운이 없음만 탓하고 있으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혁명에 성공한 후 몽셀 공작은 의도적으로 군부의 힘을 줄여 나갔다. 이 전의 발렝 황제가 집권하던 시기의 잘못을 다시 반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문신들은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이는 모든 일에 적용되는 기본적인 문제였지만 몽셀 공작은 이를 너무 간과한 것이 자신의 발등을 찍고 말았으니 후회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이제 와서 제라드 백작을 다시 부르기에도 보기가 좋지 않았다. 사냥이 끝나고 필요 없어진 사냥개를 버리듯이 내친 제라드 백작을 다시 불러 온다고 해도 그의 마음이 쉽게 풀어질리 없고 그렇게 되면 혁명세력은 와해될 수도 있으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쥔 몽셀 공작은 대륙의 정세가 점점 혼탁해 지는 것에 생각이 이르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두통이 심해졌다. 게다가 멍청하게 서있는 루베르 백작을 보니 삼국연맹에 지원해준 아까운 전투장비들 특히나 만약을 대비에 제국의 비밀기지에 깊숙이 숨겨두었던 기간테스들을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자신이 기사였다면 아마도 진즉에 검을 뽑아 루베르의 목을 잘라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회의실을 둘러본 몽셀 공작은 문득 이 혁명정부가 무척이나 불안하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자신의 신념대로 제국을 새롭게 탈바꿈 시키고는 있었지만 발렝 황제를 따르던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이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고 다른 귀족들의 원성도 차츰 높아만 가고 있었다. 그것은 몽셀 공작이 지나치게 시민 편의 위주의 정책을 펼쳐서 귀족들의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사들마저 문관들에게 관직을 빼앗기고 변방으로 내 몰리고 있는 터라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몽셀 공작이 어렵게 이루어 놓은 혁명정부를 허술하게 운영할리는 없었다.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문관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며 불만세력을 제거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를 이룩해 낼 수가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몽셀 공작은 지금의 모든 어려움을 감수해고 있는 것이었다. 과도기는 말 그대로 과도기였다. 과도기가 지나가서 무질서와 불확실성을 극복해내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국가가 살아남는 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몽셀 공작은 그 때까지 자신의 수명이 남아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몽셀 공작의 근심어린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의 발밑에 따로 마련된 좌석에 금발의 치기어린 청년이 의욕을 불태우며 회의실 안을 살피고 있었다.

샤를리앙 드 에쉬뜨! 몽셀 공작이 끔찍이도 위하는 조카였다. 바로 지금은 명분과 정통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앙뜨네트 황후를 황제로 옹립하고 있지만 그의 숙원은 바로 그의 친 혈육을 황좌에 앉히는 것이었다. 앙뜨네트는 친조카가 아니었다. 사실 촌수를 따지기도 애매한 관계였고 그런 그녀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몽셀 공작은 불안했다. 서둘러 불안한 국정을 안정시키고 조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륙의 정세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래서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오히려 북부 연합군의 세력을 더욱 넓혀주는 계기만 되었으니 속에 열불이 터지는 것은 당연했다. 삼국 연맹과 북부 연합군이 피터지게 싸울 때 로베니아 제국은 그 사이를 조율하며 두 세력이 상잔하기만을 기대했지만 시간과 돈, 인력과 장비 모든 것을 허공에 날려버린 셈이었다. 사실 삼국 연맹과 북부 연합군은 그 많은 장비를 선듯 내놓은 로베니아의 저력에 놀라고 있었지만 그 것은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비축물자였던 것이다. 그 오래전 고대 문명 이후 드래곤들과의 최후의 전쟁에서도 쓰지 않고 아껴 두었던 것이었다. 선조들의 유지에도 대대로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는 칙령이 금기처럼 내려오고 있던 것을 몽셀 공작은 제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사용한 것이다. 누가 있어 그의 심정을 알겠느냐마는 조카를 바라보니 그런 근심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루베르 백작을 보니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손을 들어 그를 자리로 돌려보낸 몽셀 공작은 조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치가 어떠하더냐?"

그 동안 대신들의 회의 때마다 참석해 왔던 예비 황제의 의견을 물어보는 몽셀 공작은 그저 어린 조카가 뭐라도 보고 배운 것이 있을까 싶어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어린 조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예리한 질문들에 몽셀 공작은 물론 회의실의 대신들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왕족의 혈통이란 태어날 때부터 다르다더니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샤를리앙 드 에쉬뜨는 자신의 의견을 주저하지 않고 털어 놓았다.

"그리하여 저의 소견으로는 지금 모두가 중대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있나 싶습니다. 왜 알버스크 인가? 또 왜 알버스크는 움직이지 않았나? 거기에 북부 연합군은 왜 알버스크만 공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알버스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린 조카의 거침없는 이야기에 모두들 망연자실해 있을 때 몽셀 공작은 무릎을 쳤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지 노련한 정치가들이 모였다지만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던 것을 어린 조카가 들춰내자 대견스러우면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 혹은 북부 연합에서 알버스크가 가장 멀고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던 몽셀 공작은 일련의 사건들에 뭔가가 빠져 있음을 직감했다. 어린조카가 던진 화두에 골몰하던 몽셀 공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왜?..."

몽셀 공작의 두 눈 속에 담긴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이다. 알버스크를 자신들이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는 몰랐다.

"고생이 많았다. 백작!"

앙뜨네트가 미소를 머금고 치하하자 제라드 백작은 한 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최대한의 예의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위해서 무엇이든 못하겠사옵니까? 언제든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심장 쪽에 주먹을 대며 제라드 백작이 앙뜨네트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졌다.

"제국의 부활을 책임질 장군은 오로지 제라드 백작 그대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명심 하겠나이다 폐하!"

그녀는 찻잔의 차를 비우고 천천히 내려놓았다.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던 그녀는 제라드 백작을 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알버스크 왕국은 잘하고 있겠죠?"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에 있는 시간의 틈에 이미 도달했을 겁니다."

머뭇거림없이 대답하는 걸로 보아 따로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 했다. 앙뜨네트는 별다른 말이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창밖의 햇살을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어떤가요? 그대가 보기에는?"

선문답 같은 그녀의 질문에도 제라드 백작은 여전히 거침없이 대답을 했다.

"알버스트 왕국의 테렌스 공작은 뛰어난 군인이지만 생각 또한 아주 깊고 현명한 자이옵니다. 할란 연방과 스베인 왕국을 충돌 질하여 일을 이렇게 만든 것만 봐도 머리는 괜찮은 자라고 봐도 무방하실 듯합니다. 게다가 근성 있는 군인이라서 신성도시 마이란스를 처리하는 것 또한 신속하고 깔끔하게 해냈습니다. 그의 성정으로 볼 때 성산(聖山) 마르히바도르에 남아 있는 시간의 틈은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과 테렌스 공작의 능력이라면 폴렌시아의 지팡이를 찾아 시간의 틈을 열고 일을 벌일수 있을 겁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장담하듯 단언하는 제라드 백작을 보고 앙뜨네트는 무척이나 근엄한 표정을 했다.

"일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사람도 있겠죠?"

앙뜨네트의 서늘한 시선을 제라드 백작은 주저함이 없이 받아들였다.

"네, 황제 폐하! 시간의 틈이 열리는 순간부터 일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빠짐없이 지켜보고 그것을 이곳으로 보내올 마법사들이 테렌스 공작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제라드 백작은 자신만만했다. 지나친 자신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반감을 불러오게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제라드 백작이 보여주는 자신어린 태도는 오만이라기 보다 당연한 일의 결과에 대한 보고를 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 어떤 교만이나 오만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그제 서야 앙뜨네트도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좋아요, 우리 덕에 북부 연합군으로 부터의 공세를 면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감사해야지. 어쨌거나 테렌스 공작이란 자가 잘해주어야 할 텐데."

그녀의 시선이 멀리 어느 한곳으로 초점이 흐려져 갔다. 더 이상 그녀의 입에서 아무 말이 없자 제라드 백작은 조용히 뒷걸음질 쳐서 황제의 방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서 황제의 별궁을 빠져나오자 그의 수행 기사들이 따라 붙었다.

"알버스크에서 연락은?"

"시간의 틈을 찾아서 의식을 준비 중이라는 연락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좋아, 몽셀 공작 쪽은 어떤가?"

"회의실에서 대신들을 모아 놓고 탁상공론이 한 창입니다."

수행 기사의 보고에 제라드 백작의 입술이 삐뚤어졌다. 그것은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당신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야 몽셀 공작! 그대가 허수아비로 내세운 앙뜨네트 황제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왜 제국의 안주인들에게 이 무서운 안배가 전해 내려온 지 이제야 알겠어!'

별궁을 완전히 빠져나와서 조용히 수도를 빠져나오자 점점 더 많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몰려들었다. 그들은 앙뜨네트 황제의 개인소유지의 땅으로 사라졌다. 제라드 백작이 언덕을 넘어 울창한 숲을 통과하여 나오자 넓은 호수와 함께 널따란 군영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기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수도 근처에 이런 비밀 시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몽셀 공작의 정책에 반하는 이런 시설이 버젓이 수도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 상층부의 비호가 있었다는 이야기고 제라드 백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당연히 황제 앙뜨네트의 묵인과 비호아래 이곳이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몽셍 공작과 혁명정부의 문신 우대 정책에 따라서 버려진 기사들과 오로지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요받는 것에 반발한 세력들이 집결해 있었다. 발렝 황제의 지나친 기사 우대와 그로 인해 귀족들이 설자리를 잃고 강력한 군사정부 아래에서 신음하던 혁명세력들은 당연히 그들을 힘을 줄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따로 힘을 모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제라드 백작을 내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신가문의 신생 기사들로서는 이 비밀 캠프에서 검을 갈고 있는 경험 많은 이들을 상대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제라드 백작이 제일 큰 천막으로 들어서자 시종 하나가 얼른 시원한 와인을 잔에 따라서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찬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머릿속 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황후들에게만 시간의 틈 속에 존재하는 그 엄청난 비밀을 전해준 이유는 바로 황권에 욕심을 내는 자들이 나타날 때를 대비했던 것이다! 제국의 황제는 들은 결코 어리석지가 않았어. 이렇게 되면 몽셀 공작이 나를 내친 것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나?'

씁쓸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제라드 백작은 초록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급히 뛰어 들어오자 마시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마법사에게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이유를 묻자 마법사가 지체하지 않고 그의 귓가에 입술을 움직였다.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는 바람에 테이블위의 적포도주가 피가 흐르듯 테이블 위로 그림을 그렸다.

"드디어 시작이군!"

천막의 휘장을 손으로 쳐내며 밖으로 나온 제라드 백작이 검을 꺼내들자 주변의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비밀 캠프는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에 사로 잡혔다. 수백 개의 검들이 제라드 백작을 따라서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발렝 황제 폐하를 위하여!"

"황제 폐하 만세!"

기사들의 불타는 충정이 호수 가를 뜨겁게 만들었다. 기사들을 무장을 하며 전투 준비를 하는 동안 제라드 백작은 초록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앙뜨네트 황제 폐하께 알려 드려라! 알버스크 왕국이 시간의 틈을 열었다고."

마법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사라지자 제라드 백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이 수도를 향하자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뜨겁게 타올랐다.

"몽셀 공작,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겠소."

시종이 끌고 온 말에 제라드 백작이 오르자 수백 명의 중무장한 기사들이 따스한 오후의 햇살에 갑옷을 반짝이며 말을 달렸다. 그 숲의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병사들이 수도를 향했고 그 선두에는 제라드 백작이 있었다. 혁명이 피가 아직 채 마르지도 않는 초겨울 어느 날 오후의 일이었다.

"테렌스 공작님 의식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마법사들이 이마에서 진땀을 흘리며 바닥에 진을 그리고 재물을 죽여 피를 받아 바닥에 온갖 기이한 도형과 그림을 그려 넣고 있었다. 테렌스 공작은 자신에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왕실 수석 마법사의 말에 굳은 얼굴을 잠시 풀었다. 테렌스 공작이 손가락을 튀기자 하얀 신관의 제복을 입은 신관들이 줄에 엮인 생선들 처럼 밧줄에 묶여서 우르르 딸려 나왔다.

"자 모두 준비 해놓았으니 자네들이 힘을 슬 차례야 더 이상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어서 문을 열어라!"

서슬퍼런 테렌스 공작의 명령에 신관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이미 신성 도시 마이란스에서 지옥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도시가 짓밟히고 신관들이 모조리 죽어나가는 끔찍한 광경을 보고 의지를 상실한 이들은 그저 공작의 시키는 일에 무의식적으로 움직일 따름이었다. 더 이상의 신을 섬기며 신성력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던 모습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순백을 상징했던 하얀 제복은 온통 핏물과 땟물로 엉겨 붙어 모양새가 형편없었다. 십여 명의 신관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테렌스 공작의 발밑에서 애걸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 더 이상 그 조잘거리는 입을 놀린다면 모조리 목을 잘라버리겠다."

테렌스 공작의 고함에 신관들의 울부짖음이 가라앉았다. 옆에 있던 노 마법사가 시간이 없음을 재촉하자 테렌스 공작이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병사들은 신관들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고 한 명 한 명 마법사들의 안내에 따라서 신관들을 위치에 세웠다. 준비가 끝나자 마법사는 온통 바닥을 가득 메운 마법진의 맨 마지막 퍼즐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웅! 웅!

순식간에 바닥에 그려 넣은 마법진들의 그림과 숫자 도형이 살아서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신관들은 살기위해서 죽어라 기도문을 큰 소리로 외쳐댔다. 마법진을 이루고 있던 도형과 그림, 숫자들은 머리 위로 떠오른 다음 하나 둘 비눗방울이 터지듯 툭! 툭!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 때 지팡이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웬 노파가 나타났다. 그녀가 마법진 가까이 다가가자 병사들이 그녀를 제지하려 했지만 테렌스 공작이 눈짓을 보내자 이내 물러났다. 그녀 뒤로 다른 여자들 대 여섯 명이 뒤를 따랐고 초록색 로브를 입은 낯선 마법사들은 묵묵히 그 모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베니아에서 보내온 자들인가?"

테렌스 공작의 무뚝뚝한 말에 궁중마법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덧붙였다.

"사라진 걸로 알려진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입니다."

"으음...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밖에 기간테스만 30여기가 대기하고 있고 정예 기사들만 이백 명입니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드마스터 이신 백작님도 계십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6서클의 마법사인 저와 궁중 마법사들이 다수가 있습니다. 허튼 짓거리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석 마법사의 말에 다소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로베니아 제국이었다. 처음에 제라드 백작이 찾아와 내놓은 제안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고 너무 놀라서 테렌스 공작과 알버스크의 국왕은 고심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삼국연맹을 깨고 두 동맹국을 희생시켜야만 하는 일이었고 극단적으로는 자칫 잘못하면 파멸로 치다룰 수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위험이 크면 클수록 그 댓가는 달콤하기 마련이었다. 로베니아의 여황제는 알버스크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 유혹을 던졌고 결국 알버스크는 모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설 속에 내려오는 절대 힘의 상징 폴렌시아의 지팡이! 그것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준 로베니아 제국의 여황제가 원한 것은 삼국 연맹을 깨고 몽셀 공작과의 손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황제가 제국을 찾은 이후로 로베니아는 대륙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실패하지만 않는 다면 결코 손해 볼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문제는 알버스크로서도 큰 희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는데 얻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작은 것이었고 단 하가지 걸리는 것은 시간의 틈을 연다는 문제였다. 알버스크 왕국 이상하게도 고대 문명의 유적들이 많았다. 불운하게도 로베니아처럼 무기들이 아닌 신전이나 미술품,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뿐이었기에 무척이나 통탄했음이 자명했다. 대신 알버스크 왕국은 로베니아 제국보다 고대 문명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앙뜨네트 여황제가 제안한 일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날들을 고민한 알버스크의 두 수뇌는 결국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고대 문명의 비밀과 로베니아 제국의 여황제가 제시한 것은 어긋남이 없었고 그 동안 고대 문명의 비밀을 풀기 위해 수대에 걸쳐 노력해온 자신들의 성과를 이뤄야 할 시기를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박은 승부를 거는 시기를 놓치면 다 잃는 거야!]

이것이 알버스크 발렌시아 국왕이 밤새 고민을 끝내고 테렌스 공작에게 한 말이었다. 그 말이 지금 테렌스 공작이 이 자리에 서게 만든 것이다. 로베니아에서 보내온 무녀들이 진행하는 의식을 알버스크 왕국의 마법사들과 학자들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알버스크의 정예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번뜩이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바닥에 그려진 모든 마법진의 문자들이 공중으로 떠오르자 신관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수석 마법사가 지시를 하자 병사들이 양동이를 들고 나타나 바닥에 양동이속의 액체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마법진 말고도 미세한 홈이 파여 있었고 양동이속에 흘러나온 액체는 그 홈을 따라서 움직였다. 양동이 속의 액체는 붉은 피였고 어느새 바닥은 붉은 피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바닥을 가득 채운 붉은 피가 실처럼 가는 줄이 되어 신관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서 누에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윽고 바닥에는 십여 개의 인간 누에만 남아 있었다.

드드드드드!

바닥이 흔들리고 천정이 먼지를 풀썩거리며 세상이 움직였다. 그리고 태초의 고요가 찾아온 듯 세상이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정적만이 남았다. 그것은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었고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정지한 듯 했다.

아아아아아~

그 때를 기다린듯 아크나무아의 무녀들 입에서 간드러진 미성이 흘러 나왔다. 그러자 누에가 된 신관들이 꿈틀꿈틀 거렸다. 오뚝이 마냥 쓰러질듯 쓰러질듯 하며 좌우로 움직이던 누에들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둥글게 모인 누에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기이한 현상에 모두들 숨을 죽이고 눈만 움직였다.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이 천천히 발을 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이 누에 곁으로 한발 한발 다가갈 때 마다 벼락 치는 소리가 신전 내부를 뒤흔들었다. 나약한 병사들은 귀를 막고 바닥을 나뒹굴었고 마나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마침내 무녀들이 누에고치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들도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에 휩싸이며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제 막바지입니다. 고대 문서에 의하면 문을 열려고 하는 이여 아크나무아의 달빛이 신을 따르는 이들의 몸을 빌려 시간의 틈을 열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테렌스 공작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시간의 틈에 폴렌시아의 지팡이가 없다면 우리는 곧 들이 닥칠 북부 연합군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 반드시 신물이 있어야만 한다. 신들이 우리 알버스크를 버리지 않았기를 빌 뿐이야."

탁하게 가라앉은 테렌스 공작의 말에 궁정 수석 마법사의 턱수염도 가늘게 떨렸다. 무모하리만큼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운명이 칼날 위에 맨발로 올라선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그도 전신을 엄습하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저...."

갑자기 신전의 광장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악하며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커다란 누에로 변해버린 정체불명의 물체가 점점 형체가 흐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결국 완전히 투명해졌고 점점 주변의 색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다가 완전히 빛을 흡수해버렸다.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해버리니 그곳은 완전한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얼핏 절대영역에 들어서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바라보는 기분 나쁜 눈동자처럼 느껴지자 테렌스 공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공작님 드, 드디어 시간의 틈이...시간의 틈이 열렸습니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수석 마법사마저도 손을 덜덜 떨면서 말을 더듬기 바빴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공간은 주변과 경계가 흔들리며 일렁거렸다. 확실히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가 틀림없었다. 테렌스 공작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수석 마법사가 공작의 팔을 붙잡았다. 의문을 표시하는 공작에게 수석 마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테렌스 공작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지만 그는 확고부동했다. 아마도 발렌시아 국왕에게 그를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밀명을 받은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공작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테렌스 공작은 국왕의 배려에 감동했지만 이 일 실패하면 어차피 왕국은 끝이었다. 수석 마법사의 손길을 뿌리친 테렌스 공작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간의 틈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숨을 멈춘 테렌스 공작은 신에게 잠시 기도를 한 후 발을 시간의 틈으로 들여 놓았다. 몸의 절반은 현실 세계에 몸의 절반은 신의 영역에 들여 놓은 테렌스 공작은 신비한 체험에 전율했다. 몸과 정신이 따로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두 눈을 감은 테렌스 공작의 몸이 시간의 틈 안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이제는 잿더미로 변한 샹그릴라의 잔해 속에 묻혀있던 운명의 시계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명을 희생하고서 겨우 멈추게 만들었던 운명의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대주교의 말처럼 신이 정해 놓은 운명의 길은 결코 막을 수가 없는 것일까? 테렌스 공작이 사라진 시간의 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비밀이 열리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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