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대탈주!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 거지, 유모?"
"죄수가 탈출해서 이렇게 호들갑이랍니다. 폐하!"
"죄수?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제국 기사단이 모두 총출동 할 정도로 난린 법석을 피운단 말이죠?"
"그게 기사들이나 병사들도 잘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앙뜨네트 여제가 무심한 눈길로 성내를 험악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뛰어 다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숙부께서 또 뭔가를 꾸미고 계시는 건가?"
"무녀들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폐하!"
유모의 재촉에 그녀는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몸을 돌려 걸어 나가자 수많은 수행원들이 따라서 움직였다. 로베니아 제국의 앙뜨네트 여제의 행차 치고는 무척 조용하고 작은 인원이었다. 그 말은 앙뜨네트 여제가 자신의 행보를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최소의 수행원들만 대동하고 성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는 앙뜨네트 여제의 눈동자는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작은 불꽃이지만 언제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몽셀 공작의 꼭두각시 노릇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지아비의 목을 베고 앉은 자리다. 이미 그녀는 예전의 앙뜨네트가 아니었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몽셀공작이 멸족시키려 한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을 불러들여서 일을 꾸미고 있는 그녀가 왠지 무서워 보였다. 그녀가 몸을 홱 돌려서 나가자 찬바람이 불었다.
"젠장, 8써클의 대 마법사가 뭐 이래요?"
"조용히 하지 못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이 못된 놈이 한다는 소리가!"
호크와 싸이클론이 말다툼을 하자 핸들러가 두 사람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싸이클론님도 어찌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저택에 걸려 있는 보호마법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싸이클론님도 최선을 다하셨지만 잔디밭에 까지 알람마법이 걸려 있는 줄은 예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잔디에 걸린 마법이라니 정말 대단한 놈들입니다."
핸들러가 밖을 내다보며 안색을 굳히자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도 입을 다물었다. 제라드 백작이 알버스크 왕국의 로크남작 일행과 술자리를 벌이는 동안 싸이클론과 이지중대는 무사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 때 방심한 나머지 집사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집사를 이용해서 담 밖을 넘었어야 했는데 싸이클론이 자신하는 바람에 모두들 마법으로 담을 넘기 직전에 잔디에 발을 들여 놓자 저택 안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이 난리가 나고 말았다. 결국 일행은 꼬랑지를 감추고 도망쳐야만 했다. 뼈만 남아 앙상해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호크는 낡은 축사에 몸을 숨긴 일행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뭐하려고 이렇게 몰려 온 거야, 나 같은 놈 그냥 두지, 이건 전투력 손실이야 전투력 손실!"
"그런 말도 안돼는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장군님이 이렇게 희생되신 다면 그거야 말로 진정한 전투력 손실 아닙니까?"
"끄응!"
핸들러의 말에 호크가 앓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민망함을 감추려 했다.
"그것보다 나름대로 대단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수확?"
"네, 알버스크 연맹과 로베니아가 손을 잡았습니다."
"뭐?"
호크가 깜짝 놀라 목소리가 커지자 얼른 핸들러의 손이 호크의 입을 막았다. 핸들러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개자식들!"
몸이 성했다면 벽이라도 내리쳤겠지만 지금은 그저 욕설만 내뱉을 뿐이었다. 맥없이 욕만 해대는 호크를 보며 싸이클론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몸이 힐링 마법이 듣지를 않아. 포션을 몇 병이나 쏟아 부었는데도 겨우 상처 아무는 정도라니 하여간 네 녀석은 별종이다."
싸이클론의 말에 호크가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 해보면 안간힘을 썼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몸 회복하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영감은 길이나 뚫어요. 아무래도 대륙이 또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생긴 거 같아요. 서둘러 복귀해야죠."
호크의 말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핸들러의 이야기를 듣고 전운을 예감했다. 로베니아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대륙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어정쩡한 세력구도는 불안정했고 그것은 패권을 노리는 야심가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서서히 대륙은 또 다시 야심의 불길로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낡은 축사의 고약한 냄새가 숨쉬기 힘들게 했지만 호크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한시라도 급히 몸을 회복해야만 했다.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로 인한 탈진이니 명상을 통해서 태극심법을 극성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다소 몸이 상하더라도 지금은 소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 이곳을 탈출해서 두 세력의 동맹에 대비해야만 했다 게다가 또 하나 중요한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괜찮아요?"
가부좌를 튼 채 입만 여는 호크를 보며 싸이클론이 코를 막고 대답했다.
"일찍도 물어본다. 걱정마라 아주 건강하니까, 네 놈 돌아오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 여길 빠져나갈 궁리나 해!"
싸이클론이 냄새가 난다며 코를 막고 손을 흔들어 부채질을 했다. 혹시라도 추격을 당할까봐 마법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호크는 내심 안심하며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고마워, 두 사람 무사해줘서 금방 달려갈게.'
잠시 명상을 멈춘 호크의 마음속에 밝게 웃는 캐더린과 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호크의 몸 주위로 은은한 광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호크 또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참회의 방에서 깨달은 영혼들의 슬픔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이런 멍청한 일이 있나. 도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몽셀 공작의 주름진 얼굴이 말 그대로 엉망이 되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 불찰입니다. 설마 놈들이 구조대를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입을 벌리는 거냔 말일세!"
역정을 내는 몽셀 공작의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가득 울려 퍼지자 실내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제라드 백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베니아의 새로운 지략가 루베르 백작이 나섰다.
"조사해 보니 저택의 집사가 정신마법에 걸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저희 제국의 마법사가 풀지 못한다고 하다군요 6써클의 궁정 마법사 풀지 못할 정도라면 더 고위 마법사가 구조대에 포함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루베르 백작의 조리 있는 설명에 몽셀공작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슨 뜻인가?"
"케린버그의 싸이클론이 지금 로베니아에 와있다는 뜻입니다."
"싸, 싸이클론!"
몽셀 공작의 몸이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벌떡 일어섰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들을 사로잡는다면 저희는 정말 아주 커다란 무기를 얻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와 최고의 검사를 손에 넣는 다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도 적의 주력을 없앤다는 것은 대단한 전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루베르 백작의 말에 몽셀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드러냈다.
"또한 저의 로베니아 제국은 아시다시피 마법진이 이동이 정해진 곳 이외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시고 계실 겁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대지 특성상 제국 내에 위치한 게이트를 이외에는 마법진을 이용한 원거리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제국을 빠져나갈 방법은 두 다리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에게 아주 유리한 조건입니다. 그들을 찾아내어 사로잡을 수 있다면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루베르 백작이 득의에 찬 표정으로 열변을 토하자 몽셀공작도 만족해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이지?"
"네, 각하!"
다시 자리에 몸을 앉힌 몽셀 공작의 또 그 여우같은 머리를 쓰고 있는지 턱을 매만지며 눈이 가늘어 졌다.
"하지만 상대는 8써클의 대 마법사! 우리 제국의 전설적인 마법사 말도르 공 마저 이긴 자다. 방법이 있는가?"
몽셀공작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은 루베르 백작은 전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몽셀공작도 그와 똑같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좋아, 이 일은 루베르 백작에게 일임한다. 모두들 루베르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도록!"
몽셀 공작의 명령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지만, 이 일의 당사자인 제라드 백작의 주먹 쥔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혁명세력의 중추였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치고 올라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몽셀 공작이 대놓고 자신을 내치지 토사구팽兎死拘烹이 따로 없었다. 몽셀공작이 나가고 회의실의 귀족들이 루베르에게 몰려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제라드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늙은 사자가 젊은 사자에게 왕좌를 내주고 물러난 꼴이었다. 아무도 제라드 백작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언제 그가 회실에서 사라졌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은 루베르 백작에게 쏠려 있을 때 제라드 백작에게 앙뜨네트 여제의 유모가 조용히 뒤를 따르는 것 역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제국을 다시 일으키고자 소리 높였지만 시작부터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좀 이상합니다. 대령님!"
밖으로 정찰을 나갔던 대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오자 모두들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
"저기, 그것이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도 어떻게 이야기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 우리를 돕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처에 로베니아의 경비대들이 모두 죽어 있습니다."
"그럴수가!"
급히 정찰을 나갔던 대원과 함께 밖으로 나간 핸들러가 잠시 후에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싸이클론님 사실입니다. 근처에 군인들의 시체가 많이 있습니다."
"이거 놀랍군. 누가 우리를 돕는단 말이잖아."
"네, 시체를 잘 보이지 않고 숨겨둔걸 보며 우리를 도우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해가가지 않습니다. 로베니아 제국 내에서 저희를 돕는 세력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갑자기 혼란에 빠진 일행들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이 누군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니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고립된 신세였고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 깊숙한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도와주는 손이 어떤 얼굴을 가졌을지 궁금하면서도 불안하기만 했다. 호각소리 한번만 울려도 제국군들이 벌 떼같이 달려 들것이 뻔한데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는 넓게만 느껴지던 축사 안이 좁게만 느껴졌다. 싸이클론의 얼굴이 어두워지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거 완전히 꼭두각시 놀음이구만!"
저 위에서 줄을 잡고 자신들을 이리저리 휘두르려고 하는 존재가 신경 쓰여서 싸이클론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몰랐다.
"흐흐흐흐, 이거 정말 재미있는걸, 천년동안 너무 심심했는데 요 근래 들어서 정말 사는 재미가 솔솔 하단 말이야!"
크리시앙이 손바닥을 비비며 즐거워하자 그의 영원한 종복인 루스펠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점점 더 그의 주인의 인성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통곡의 벽 전투이후로 크리시앙은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비록 영원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괴로워하기는 했어도 인간의 본성을 잃지는 않았는데 구원자가 나타난 이후로 그의 인간의 본성을 버렸다. 그러더니 마치 신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 이후는 그는 지난 천년동안 해온 훨씬 더 많은 살육을 저질렀다. 차라리 그 때 몽셀 공작의 말을 전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호크 일행이 숨어있는 낡은 축사의 맞은 건물의 창가에 걸터앉아서 즐거워하는 크리시앙을 보며 루스펠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뒤로 로베니아 제국 병사들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호크 일행을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이 아니라 크리시앙이었던 것이다.
"후후후, 구원자 나리 어서 기운차리시고 마지막 예언을 이루셔야죠. 어서, 이 지겨운 내 삶을 끝내주시게 어서! 크하하하하하!"
천년을 넘게 들어온 웃음소리이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루스펠의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결국 나중에는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천 년 전 여신 미르네보를 만났던 천막에서의 일이 기억났다.
'그런데, 예언은 스스로의 운명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했는데. 이렇게 누군가 개입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상관없는 걸가? 그렇다면 혹시...?'
문득 끔찍한 상상을 한 루스펠은 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너무나 아무소리도 나자 않았다. 그저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러 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루스펠은 실성한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두렵게 만들었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심한 눈길로 루스펠에게 한 번 바라보았던 크리시앙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다시 축사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친구 같으니라고, 이제야 눈치 챘나? 순진하기는, 나는 이미 예전에 알고 있었다고. 이 빌어먹을 놀이가 더러운 속임수라는 것을 말이야.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는 거야!"
크리시앙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바람이 크리시앙의 머리카락을 흔들려고 왔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급히 달아났다. 그 바람에 창문이 크게 흔들렸다가 잠잠해 졌다. 바람마저 놀라게 만든 크리시앙이 두 눈을 감자 제국의 수도에 어둠이 찾아왔다. 깊은 밤 제국의 수도는 잠들지 못하고 팽팽한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저희를 지켜보는 눈이 있지만 어쨌든 우리를 돕는 것같으니 서둘러 움직여야겠습니다. 아마도 본국에서도 국경지대에 병력을 대기시켜놨을 겁니다."
"좋아, 이제 움직이자. 돼지똥 냄새에 먼저 죽겠다."
"장군님!"
싸이클론에게 의견을 제시하던 핸들러는 등 뒤에서 호크의 목소리가 들리자 크게 기뻐했다. 게다가 호크의 안색이 아주 좋아졌기에 그 마음이 더했다.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죽다 살아난 것처럼 보이잖아."
사실 그랬으면서 호크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 싸이클론에게 다가온 호크는 확실히 몸이 좋아져 있었다. 눈동자에는 은색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참회의 방에 받은 고통은 그에게 많은 깨우침도 주었다. 아직은 파리한 모습이었지만 뭔가 범접할 수 없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이제 호크는 반 봄멜 공작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일행들 모두 그것을 느끼고는 힘을 얻었다. 이전에도 절대 적인 지휘관이었던 호크가 더욱 안정되니 그에 대한 믿음도 더 두터워진 것이다.
"루크! 길을 터라. 이 냄새나는 제국에서 빠져나가자!"
"네, 장군님!"
얼굴에 검은 숯뎅이를 바른 대원들이 축사에서 빠져나와 어둠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이 움직이자 건너편 건물에서도 지붕을 타고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제국의 수도는 깊은 밤이었지만 잠들지 못하고 수많은 횃불이 어둠을 밀어냈고 눈빛이 무서운 병사들이 길목들을 막아서서 호크 일행을 찾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척후병들이 돌아오면서 고개를 흔들자 호크의 얼굴이 낭패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길이란 길은 모두 막혔습니다. 장군님!"
"빌어먹을! 성벽만 넘으면 어떻게든 되겠는데."
"장군님, 저 건물 뒤쪽 길은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핸들러와 호크가 낙담하고 있을 때 루크가 나타나 반가운 소식을 전했지만 호크는 그 길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없다?"
"네, 개미새끼 한 마리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호크가 안력를 돋우어 어두운 골목길을 살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여인숙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골목길에 위치한 건물중에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은 단 한곳도 없었다.
'함정이군!'
호크는 직감적으로 자신들을 유인하는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갈 곳은 없었다. 싸이클론의 강력한 마법으로 공격한다면 어떻게 길이 생기겠지만 이곳은 로베니아 제국이었다. 제아무리 싸이클론이라고 하지만 제국에는 기간테스들이 있었다. 기간테스 앞에서는 검사도 마법사도 무기력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호크는 눈을 감고 골목길 안으로 마음의 실끈을 흘려보냈다. 호크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온 실은 뱀이 그리하듯 흔들거리며 골목길 안을 살피며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잠시 후 눈을 뜬 호크의 손이 앞으로 향했다. 그의 수신호에 따라서 모두가 움직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대원들이 스패로우를 장전하자 호크는 핸들러가 찾아온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의 손잡이를 잡고 검을 꺼내 들었다. 처음부터 두 개의 검을 모두 꺼낸 호크는 천천히 어두운 골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휘이이이이~
바람결에 어느 집 빨래가 길을 잃은 새처럼 스쳐 지나갔다. 삐걱거리는 여인숙의 간판이 흔들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뭔가가 저 어둠의 반대편에서 호크를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 수천 개가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힘을 내 뿜을 수 있는 놀랍기만 했다. 여인숙 건물을 지나치자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호호호호!"
갑자기 꽃밭이 나타나며 여인네들이 반라의 상태로 즐겁게 노니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이 손을 잡고 뛰어 놀며 호크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뒤의 동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방심하는 순간 이 아름다운 환상들이 독이 되어 목을 움켜쥘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게?"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크게 들렸다. 싸이클론과 이지 중대원들도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두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크게 놀라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짜다. 언제 저 아이가 괴물로 변해 너희들을 해칠지 모르니 긴장해!"
호크의 경고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모두들 헤벌어진 입을 다물고 긴장했다. 아이들이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움찔거리며 스패로우를 겨누었다. 일반 병사들과 달리 이지중대원들은 수많은 기현상을 많이 경험한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데 온 신경을 썼다.
'뭘까? 이건 또 무슨 함정이지?'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스몰스몰 한 느낌이 여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주변의 공간이 사라지며 온몸이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뒤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중대원들이 환상의 늪에 빠져서 질러대는 비명이었다. 그러나 호크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을 보며 크게 소리쳤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 거리듯 표범이 포효하듯이 낮으면서 우렁찬 외침이었다. 호크의 소리가 지나가는 곳 마다 물결이 파랑이 일듯이 공간이 일그러지며 물결치다 견디지 못하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환상이 깨져버렸다.
"헉! 헉! 도대체 그게 뭐였지?"
늪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자신들이 서있던 길바닥이었음을 안 중대원들은 낯빛을 굳히며 자세를 바로했다. 호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에 흐트러진 것이 창피해서 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횃불이 올라오며 어둠을 밀어냈다.
"젠장, 함정입니다!"
핸들러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호크는 함정임을 알고 들어왔다. 소드마스터인 자신과 8써클의 대마법사인 싸이클론이라면 충분히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에서 느껴지는 압박은 대단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이곳이 고대 국가들의 유물을 이어받은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제길 할!"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횃불의 수가 많아지자 골목 안을 훤히 비추었다. 그러자 호크를 자극하던 괴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마치 틀에 황금을 녹여서 만든 것처럼 빛나는 모습은 주변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서릿발처럼 한기가 스며들게 만드는 한기 때문이었다. 중무장한 황금 조각상에서 나오는 살기殺氣가 골목안의 순식간에 한겨울로 만들었다.
짝! 짝! 짝!
조롱 섞인 박수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대단 하군 마법결계를 무사히 통과하다니 군신軍神 마레스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박수를 치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루베르백작이었다. 그가 몽셀 공작에게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이유는 군신 마레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고대의 시간에 여신 미르네보와 약속을 맺었던 인간들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드래곤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몇 남지 않은 군신 마레스는 파괴되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춰졌지만 그의 조상들은 하나를 집안 대대로 숨겨왔던 것이다. 군심 마레스는 황금빛이 나는 금속 조각상이었다. 뿔이 달린 커다란 투구에 어깨부터 발끝 까지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호구들도 보호된 갑옷에 오른손에는 철퇴와 왼손에는 커다란 방패를 들고 서있는 조각상이었다. 크기는 보통 성인들 만했지만 그 기세는 기간테스 이상이었다. 싸이클론이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군신 마레스....세상에, 저 괴물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후후후, 자 마지막 경고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아무리 대단한 소드마스터에 8써클의 마법사가 있다지만 군신 마레스가 있는 이상 바람 앞에 촛불일 뿐이야."
루베르가 서릿발 같은 눈으로 으름장을 놓자 마레스가 으르렁 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다.
고어어어!
우우웅!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들리며 군신 마레스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내디디는 것만으로 호크와 일행들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큭!
헛바람 삼키는 소리와 함께 호크가 이를 악물고 기운을 끌어 올렸다.
"괴물이군!"
"항복하자! 군신 마레스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은 바보짓이야!"
싸이클론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호크는 이를 악물고 웃어 보였다.
"제가 원래 바보라는 거 모르세요?"
온 몸에 기운을 끌어올려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손에 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울부짖었다. 군신 마레스가 깨어나자 그에 반응한 것이다.
번쩍!
어두운 밤하늘에 갑자기 천둥이 내리쳤다. 그것도 바로 군신 마레스와 호크사이에 떨어져 땅이 파였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달을 가려버렸다. 제국군들이 횃불을 더 밝혔지만 스산한 분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웅웅!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갑자기 멈추는 순간 호크의 몸이 빨랫줄처럼 당겨지며 군신 마레스를 베어갔다.
캉!
귀청을 찢을 듯한 소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동작이 이어졌고 군신 마레스의 철퇴와 호크의 검이 불꽃을 튀기며 부딪쳤다. 검의 오고가는 사이 빈틈을 발견한 호크의 검이 마레스의 철퇴를 피해 가슴을 노리고 찔러 갔지만 어느새 방패가 제로를 막아섰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호크의 몸이 주르륵 밀려 나왔다.
"세상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여! 내게 부여된 권능과 자유의지로 말하노니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절대적 힘을 주소서!"
싸이클론의 힘겨운 목소리와 함께 양팔을 높이 펼쳐든 두 손 위에 불새가 나타났다. 불새는 사람들이 귀를 막고 주저앉을 정도로 울부짖으며 날갯짓을 했다. 그리고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군신 마레를 향해 날아가 마레스를 산산조각 낼 기세로 충돌했다.
푸하아악!
불꽃이 사방으로 튀며 뜨거운 열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모든 이들이 두 팔로 얼굴을 가리며 피하기 급급했다.
"세상에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누가 보아도 엄청나게 강한 마법이었다. 주변으로 튄 불똥이 건물에 옮겨져서 불이 타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군신 마레스는 긁힌 상처하나 없었다. 싸이클론의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고대 유물의 특성상 마법에 반응하는 힘이 공격마법을 시행한 싸이클론에게 상처를 준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가 기간테스 이상이었다. 달리 군신이라는 호칭을 썼겠는가? 깜짝 놀란 일행들과 달리 싸이클론은 자신을 부축한 핸들러를 밀쳐 내고 마법 지팡이에 마나를 더욱 많이 불어 넣었다.
"영감 그만해!"
호크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단단히 마음을 먹은 싸이클론은 주저함이 없이 마법 지팡이를 군신 마레스에게 향했다.
"물과 바람의 힘이여! 대지의 기운들이여! 그 힘으로 멸하라!"
천지가 창조될 때가 이러했을까? 사방팔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눈을 뜰 수가 없었고 하늘에서는 물방울들이 생겨나더니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에서는 작은 난쟁이 형태의 흙 인형들이 쉴 새 없이 튀어 나왔다. 흙 인형들이 꿈틀거리는 사이 하나로 뭉쳐진 물방울들은 서서히 창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리고 주변에 태풍처럼 몰아치던 바람은 점점 작아지더니 여러 개의 바람개비로 변했다. 싸이클론의 얼굴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생명을 담보로 무리하게 힘을 끌어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호크가 악을 썼지만 이미 마법을 시전 한 후였다. 마법지팡이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파멸의 힘이여! 모든 것을 소멸시켜라!"
마법의 지팡이 끝이 빛나다 사라지자 싸이클론의 몸이 한쪽으로 힘없이 무너졌다.
바람이 칼날이 되어, 물이 창이 되어, 흙이 전사가 되어 군신 마레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 나갔다. 싸이클론이 가지고 최고의 주문을 사용했다. 그 모양을 보고 사색이 된 루베르 백작과 제국군들이 기겁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군신 마레스는 방패와 철퇴를 두드리며 더욱 기세 좋게 소리쳤다.
콰콰쾅!
양쪽 옆에 있는 건물들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호크와 싸이클론등이 서있는 길바닥이 거미줄 형태로 갈라졌다. 그리고 군신 마레스와 싸이클론의 마법이 충돌하자 엄청난 후폭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일행들은 서로를 붙잡고 검을 땅에 꽂아 넣어야했다. 들썩이는 몸을 고정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아야만 했다. 잠시 후 바람이 지나가고 피어올랐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초토화였다. 건물들로 가득했던 골목길은 거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무너져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 많던 제국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호크 일행들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구겨지고 말았다. 군신 마레스가 황금빛을 더욱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농담하는 거지?"
이지 중대원 중 하나가 얼이 빠져서 소리쳤다. 물론 장난은 아니었다. 기가 막혔던 탓일까 누군가는 웃음소리도 낸 것 같았다. 그러나 더 허탈한 사람은 싸이클론이었다. 건재한 군신 마레스를 보고 싸이클론의 고개 꺽였다.
"영감!"
호크가 기겁해서 달려오자 핸들러가 싸이클론의 상세를 살피고 안심시켰다.
"힘이 다하셔서 기절하신 겁니다. 상태가 좋지 않지만 위급한 상황은 아닌 거 같습니다."
싸이클론이 쓰러지자 일행들의 분위기는 크게 가라앉았다. 침통한 표정의 중대원들을 돌아본 호크의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영문도 모르게 사로잡혔다가 죽을 고생을 하며 갇혀 지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겨우 깨어나서 이제 만나러 가려 하는데 또다시 욕심에 사로잡힌 인간 같지도 않은 자들이 앞을 가로 막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게다가 호크가 분노를 터뜨리는데 한술 더 뜨는 이까지 있었다.
"후후후, 아직 기회는 있다. 무릎을 꿇고 애원하면 저 늙은이와 네놈들의 목숨은 살려주마! 대신에 우리 제국을 위해서 애를 써주셔야 하겠지만 말이야."
아까 싸이클론의 마법에 기겁을 하고 도망갔던 주제에 언제 나타났는지 득의한 얼굴로 나타난 루베르 백작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기름에 불인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네 이름이 뭐냐?"
가래 끓는 쉰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리자 자신만만해 하던 루베르 백작이 움찔 거렸다. 무인은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살기를 느낀 것이다.
"무엄하다! 감히 대 제국 로베니아의 루베르 백작님에게 그 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루베르 백작의 수행기사가 제 딴에는 제 주인을 위한 답시고 나섰지만 오히려 백작의 원망이 담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루베르 백작은 결코 녀석에서 이름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저렇게 살기등등해 있는 자에게 누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겠는가?
"루베르...루베르라 넌 내가 반드시 죽여주마! 아주 천천히 최대한 고통스럽게 기대해도 좋아. 아니 네놈도 그 참회의 방인지 그곳에 넣어주마. 기한은 어디보자 한 백년쯤?"
꿀꺽!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루베르 백작의 얼굴이 빨개졌다. 스스로 창피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쳤다.
"군신 마레스, 저들을 없어버려라!"
루베르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한 줌 흠집도 나지 않은 마레스가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은 네놈부터 시작하지!"
다시 한 번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의 검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제 주인의 분노한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울음소리마저 서늘했다. 호크의 몸이 뛰기 시작하자 군신 마레스도 뛰었다. 마레스가 쿵쾅 거리며 뛰기 시작하자 땅이 흔들렸다. 호크가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자 군신 마레스도 믿기지 않게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철퇴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가 호크와 가까워지자 거칠 것이 없이 휘둘러졌다.
가가각!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철퇴의 기둥을 타고 흘러 내려가면서 불꽃을 만들었다. 검이 철퇴의 기둥을 타고 그대로 떨어지자 깜짝 놀란 마레스가 방패를 들어 막았다. 그러나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빛을 내뿜으면서 방패를 베어갔다.
"저, 저, 저!"
루베르 백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어쩔줄 몰라 했다. 무적이라고 여겼던 군신 마레스의 방패가 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드래곤의 브레스도 막아냈다던 그 단단한 방패가 고작 인간의 검에 두 쪽이 나자 루베르 백작은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방패를 베어 버리고 교차해서 서로 반대편 자리로 떨어진 호크와 군신 마레스는 착지하자마자 다시 몸을 돌려 맞붙었다. 신경질적으로 방패를 집어 던지 마레스는 두 손으로 철퇴를 잡아 휘둘렸다. 휘두를 때 마다 나는 소리가 무시무시했다. 호크는 그 철퇴를 맞받아치지 않고 교묘하게 흘려버리며 가까이 접근했다. 검이 닿을 거리에 이르지 지체 없이 두 개의 검에 힘을 실었다. 제가가 크게 검명을 토해내며 울부짖을 만큼 호크의 힘을 가득 머금은 제로가 번개처럼 빠르게 군신 마레스의 몸을 난도질 했다. 루베르 백작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몸을 베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진정하던 루베르 백작의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8써클의 마법에도 멀쩡하던 군신 마레스의 신체 여기저기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깨진 등불처럼 빛이 새어나오며 조각조각 나더니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하. 하. 하!"
실성한 사람 마냥 넋을 잃고 웃음을 흘리는 루베르 백작 대신에 수행기사가 서둘러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가 고함을 지르자 싸이클론의 마법공격을 피해서 물러났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다, 다음은 너다 루, 루베르..."
그러나 호크는 힘이 다했는지 검에 의지한 채 한쪽 무릎이 꺽이고 말았다.
"장군님을 보호해!"
호크가 위태로워지자 핸들러가 소리쳤고 루크와 이지 중대원들이 스패로우를 연사하면서 호크를 부축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에도 언제 도착했는지 제국군이 철통같이 막아서고 있었다. 게다가 무너지지 않은 양쪽건물 지붕에도 궁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루베르 백작을 향했고 수행기사는 루베르 백작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자신이 판단을 내렸다. 수행기사가 팔을 내밀어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국군들은 지체 없이 호크 일행들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지붕위의 궁수들이 날카로운 화살촉을 번뜩이는 화살을 쏘아 보냈다. 수백발의 화살이 호크 일행에게 향했다.
"장군님을 보호해!"
핸들러의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이지 중대원들이 몸을 던져서 호크와 싸이클론의 몸을 덮었다. 정말로 눈물겨운 전우애였다.
투퉁투두퉁!
".......?"
자신들의 몸에 꽂혀서 비명소리를 자아내야할 화살들이 무언가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헉! 기, 기간테스?"
붉게 타는 노을처럼 어두운 한 밤중에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색 기간테스가 제국군의 화살을 막아낸 것이었다. 금세 웅성거리는 소리가 제국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제국 수도 안에 출현한 기간테스라면 제국군 소속이어야 말이 맞았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적을 방어하는 기간테스라니 잠시 전투가 멎고 혼란이 제국군 사이에 엄습했다.
웅성거림이 점차적으로 퍼져 나갈 무렵 호크 일행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을 막고 서 있는 기간테스는 연합군내에도 없는 기체가 분명했다.
"대령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확실한 것은 우리 연합군 소속은 아니라는 건데, 왜 우리를 보호 하는지 모르겠군. 혹시? 낡은 축사에서 우리를 돕던 자인가?"
핸들러와 루크가 궁금해 하는 사이 붉은색 기간테스가 갑자기 움직이자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제국군들도 긴장하고 뒤로 물러났다. 루베르 백작이 군신 마레스만 믿고 따로 기간테스를 준비하지 않았기에 제 아무리 제국군이라고 하지만 기간테스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알아서들 뒤로 물러서는 제국군들을 보며 핸들러는 서둘러 일행들을 재촉했다. 기간테스가 걸음을 옮기는 속도를 따라서 이동했다. 제국군들은 호크 일행을 잡고 싶었지만 서슬 퍼런 기간테스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다. 창이라도 던져다가는 저 거대한 기간테스의 발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기간테스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수많은 제국군이 우르르 내몰리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루베르 백작의 수행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으...으...젠장 할!"
루베르 백작의 정신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수행기사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자신의 책임지기에는 사태가 너무나 심각했기에 자신의 상관인 루베르 백작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사태가 심각합니다. 백작님!"
"으..머리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헉! 뭐, 뭐야 저게?"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선 루베르 백작은 길을 딱 막고 하늘 서 있는 거대한 붉은색 기간테스를 보고 기절초풍했다. 분명히 자신은 기간테스를 동원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발아래 몰래 빠져나가는 호크 일행을 발견한 루베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놈들을 죽여라!"
그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국군이 호크 일행을 향해서 거센 공격을 퍼붓자 성난 기간테스의 팔이 루베르 백작이 소리친 건물의 테라스를 짓뭉개버렸다.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가 나며 건물이 쓰러지자 제국군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가만히 있던 기간테스가 갑자기 공격을 시작하자 제국군은 이내 혼란에 빠져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앞을 막고 있던 제국군들이 모두 도망치자 기간테스는 그 큰 발로 성큼 성큼 뛰어가서 성벽을 몸으로 들이 박았다.
쿵! 쿵!
여러 차례 어깨로 들이박자 결국 한 쪽 귀퉁이기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기간테스가 무너뜨린 성벽 틈으로 호크 일행이 빠져나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화살을 몸에 꽂은 채 힘들게 빠져나가는 호크 일행을 지켜보던 기간테스는 몸을 돌려 성벽을 막아섰다. 살아남은 제국군들이 몰려들었지만 누구하나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저 무기를 들고 주춤거릴 뿐이었다. 그들을 지휘해야할 루베르 백작이 있던 테라스는 이미 흔적조차 없어진지 오래였다. 몽셀공작에게 작전의 성공을 장담했던 루베르 백작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같았다.
[네 번째 낙인-성스런 돌이 샹그릴라를 떠나지 아니하매, 폴렌시아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길 바라고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리하여 4개의 낙인이 모일 때 하늘이 열리고, 아나무나크의 저주가 쥬(Ju)의 바람을 실천하리니, 창조자께서 자신의 자식을 멸하시매 이를 막을 자 아무도 없으리라.]
'어서 가시게나, 어서 가서 내 꿈을 이루어 주게. 이제 하나 남았어. 마지막 하나!'
크리시앙의 희열에 찬 음성이 기간테스 밖으로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린 기간테스가 호크 일행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제국군들은 멍하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벌어진 한 밤의 소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