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 욕망을 쫓는 사람들!
"음, 이거 생각 보다 뒤가 아주 많이 구린 놈이구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핸들러가 싸이클론이 인상을 찌푸리자 깜짝놀라서 되물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주변의 마나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저, 저택에는 대단위 보호 마법이 걸려있어. 그것도 아주 엄청나다네. 케린버그의 로이든 성에도 저 정도 보호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은데 말이야."
"네에? 그 정도란 말씀입니까?"
입을 쩌억 벌리고 다물지 못할 정도로 크게 놀란 핸들러를 보며 루크 소령이 얼른 말을 보탰다.
"네, 맞습니다. 그 동안 주변 시민들에게 탐문을 해 본 결과 저 저택은 제라드 백작 이전에 발렝황제의 소유였다고 합니다. 저 저택을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당연히 모른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루크는 약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개미지옥이라고 부른답니다."
"개미지옥?"
"네,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고 그런다는 군요."
루크가 입을 다물자 이내 방안이 조용해 졌다. 아무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고 조용히 제라드 백작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서로 묻지 않아도 호크가 저 저택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조사는 할 만큼 했다. 철통같은 경비에 웬만한 나라의 왕성보다 더 엄청난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무시무시한 저택으로 들어가서 호크를 구하고 이 로베니아에서 탈출만 하면 되었다. 말은 간단하지만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이지 중대와 싸이클론이 굳은 얼굴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응, 뭐야?"
마부가 급히 말고삐를 당기자 큰 소리를 내며 짐마차가 멈췄다.
"무슨 일인가?"
중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짐마차가 멈추자 얼른 뒤에서 달려 나왔다. 그러자 마부가 얼른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요. 나으리! 길 앞에 저런 것이 막고 있어 서리."
마부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 곡식자루를 가득 실었던 마차 넘어져 길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짐마차의 인부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는 통에 길이 막힌 것이다. 마차의 운송 경비를 책임진 기사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예년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광경이었다. 어디서 감히 제국의 수도 내에서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다 새로운 정책 때문이었다. 그 정책이 시민들을 배부르게 만들지는 몰라도 제국을 망치고 있다고 기사들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들 하는 게냐? 어서 저것들을 치우지 못해!"
성난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리자 병사들이 움찔하며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기사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말고삐를 잡아챈 다음 몸을 돌렸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는 넘어진 짐마차를 사이에 두고 싸움을 하고 있는 인부들의 복장이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아울러 이런 소동이 벌어졌는데도 경비대가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심해 보았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장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등을 돌린 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소리 내면 죽는다. 움직여도 죽는다."
차가운 칼날이 목덜미에 소름을 돋게 만들고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잠시 후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기사가 머리를 얻어맞고 기절한 동안 병사들도 돌변한 인부들의 기습에 반항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제압당했다. 이지중대의 실력을 일반 병사들이 막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핸들러 대령님, 상황 종료 됐습니다."
루크의 소령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한 핸들러는 골목길의 치워지는 것을 보며 짐마차와 화물을 확인했다. 며칠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 제라드 백작의 저택안으로 침투하는 방법은 이것이 유일했다. 워낙에 철옹성 같은 요새라서 도대체가 들어갈 길이 없었다.
일단 저택의 정문을 넘는 것조차 험난했다. 이지 중대가 미리 주변을 탐문하며 파악해 놓은 정보를 토대로 매일 한 번씩 드나드는 짐마차를 이용하기로 정한 일행은 화물 마차가 오가는 길목을 파악해 두었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싸이클론이 기절한 병사들과 기사를 처리하는 동안 이지중대원들은 병사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핸들러가 기사의 갑옷을 벗겨서 모두 착용하자 골목 안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싸이클론님, 이제 가야할 시간입니다."
"좋아, 핸들러! 사자굴로 들어가 볼까?"
씨익, 웃어보이는 싸이클론의 등 뒤로 거대한 제라드 백작의 저택이 보였다. 보급품을 잔뜩 실은 화물마차 일행은 로베니아의 제국의 병사들에서 이지중대원들로 완벽히 바꿔치기가 된 후였다. 좁은 골목에서 커다란 대로로 나오자 시민들이 서둘러 길을 비켜주었다. 일단 시민들은 속여 넘겼지만 눈앞에 다가온 정문의 경비들이 문제였다. 한 눈에 봐도 화물마차를 경비하던 일반 병사들과 기도 자체가 틀렸다. 이지 중대원들은 투구를 깊이 눌러썼다.
"정지!"
정문 경비를 담당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평소에 드나드는 일상적인 출입 임에도 불구하고 검문이 철저했다. 마차의 짐 덮개를 모두 들춰보며 세세히 검사 하는 폼이 보통 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마차를 검사 하는 동안 정문 경비를 담당하는 기사들은 마차를 경호하고 온 병사들과 인부들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폼이 영 불안해 보였다. 이지 중대도 그것을 느꼈는지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 소속이신가?"
기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핸들러를 쏘아 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핸들러는 투구 가리개를 열며 능청 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성의 지구대 소속입니다. 저야 뭐 허드렛일을 하는 견습기사 일뿐인데 제 얼굴을 알아보실 리가 없죠."
넉살 좋은 핸들러의 입담에 기사의 얼굴에는 그를 조롱하는 빛이 역력했다. 정식 임명 기사들의 자부심이랄까, 그런 쓸데없는 자존심을 드러내 보이며 굽신거리는 핸들러의 태도에 만족했는지 거북하던 눈빛을 거둔 기사가 화물을 검사한 병사들을 바라보자 병사들이 이상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좋아, 통과 시켜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고 있을 테지 조용히 머물다 떠나라!"
거만하게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으름장을 놓는 기사의 행동에 핸들러는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만 흘렸다. 일행들이 정문을 통과하자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났다. 그러나 짐을 실은 마차가 행렬이 정원을 통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언제 왔는지 이 저택의 시종들이 나타나 행렬을 안내했다. 정원 뒤 쪽으로 난 길을 따라서 저택의 후원 쪽으로 들어가자 더 많은 인부들이 나타나 마차에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핸들러는 인부들의 표정을 보이 하나같이 어둡고 두려움에 가득 차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성으로 가져갈 물건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저택에서 머무시고 내일 아침에 물건이 준비 되는대로 짐을 부리겠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집사가 작업 상황을 지켜보다가 행렬의 책임자로 보이는 핸들러에게 다가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지만 오히려 이쪽에서는 환영할 말이었다. 집사는 기사가 짜증을 내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오히려 기뻐하니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 예전부터 누구하나 이곳에서 머무는 걸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이렇게 물건이 준비가 되지 않아서 하루 묶어야 할 일이라도 발생하면 대개가 무척이나 싫어하며 어떻게든 밖에서 하루 묵고 다시 들어올 정도였는데 새로운 기사라서 선임자에게 이곳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 했다. 어쨌든 기사의 짜증을 듣지 않게 된 집사도 얼굴이 한결 편안해 졌다. 그 덕에 이지중대원들은 이례적으로 좋은 층의 방을 집사로부터 배정 받았다. 집사가 특별히 배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친절을 베풀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밤이 지나기 전에 뼈저리게 후회를 해야만 했다. 자신의 침실에 검을 들고 침입한 이들이 바로 친절을 베풀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짓이오!"
"미안하지만 나도 사정이 급해서 말이야."
"읍...읍!"
집사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자가 비켜서자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의 손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흠, 이 저택의 지하에 그런 시설이 있는 줄 짐작도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개미지옥이라고 불렀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갇힌 건가?"
로브의 후드를 벗은 싸이클론이 심각한 표정으로 집사에게 물어보자. 눈의 초점이 풀린 집사는 입가에 침을 흘리며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황제파의 모든 귀족들이....."
더 듣지 않아도 알만 했다. 공식적으로는 피의 복수를 하지 않은 평화적인 혁명이었지만 실상 몽셀 공작은 이 숨겨진 감옥을 이용해서 반대파들을 잔인하게 숙청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파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든 장소에 자신들이 갇힌 꼴이니 권력의 무상을 사뭇 느끼게 만들어주는 순간 이었다.
"좋아, 그건 그렇고 제일 중요한 것을 물어봐야지. 이 사람도 이곳에 갇혔나?"
싸이클론에게 정신을 제압당한 집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싸이클론이 원하는 대답을 했다.
"네, 제라드 백작님이 직접 데리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습니다. 올라오실 때는 그자가 없었으니 틀림없이 지하 감옥에 갇혔을 겁니다."
집사의 말에 모두들 안도의 빛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핸들러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있는지 집사를 어깨를 잡아 돌렸다.
"자네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 물어보지 왜 그 자를 황제의 성에 있는 감옥에 가두지 않고 이곳에 가둬 두었는지 알고 있나?"
집사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가자 핸들러는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호크를 구해내는 것이 우선이야."
싸이클론이 핸들러의 어깨를 잡아끌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시 뭔가 생각난 듯이 집사에게 더 물었다.
"혹시 이곳에 중요한 손님이라도 와 있는가?"
"네, 누군지는 모르지만 무척 중요한 손님들이 와 계십니다. 그 분들이 올 때 시종들마저 모두 나오지 못하게 해서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저는 차를 대접하기 위해 잠시 보았습니다."
"어떻던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외국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귀족입니다.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뭔가 서늘한 것이 마음을 뚫고 지나가자 핸들러는 몸을 떨었다. 머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몸은 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핸들러의 눈빛을 보고 싸이클론이 한 숨을 쉬었다.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몸조심하게나!"
대답대신 웃음과 함께 싸이클론을 끌어안은 핸들러가 루크에게 싸이클론을 부탁하고 집사가 이야기한 제라드 백작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던 싸이클론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자, 집사 양반 우리는 지하의 감옥으로 가볼까?"
"네!"
몽유병 환자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앞장서는 집사를 따라서 싸이클론과 루크가 이지 중대원들을 데리고 움직였다.
복도의 희미한 등불아래에서 고양이처럼 조용하고 날렵하게 움직이던 핸들러의 몸이 벽에 달라붙었다.
'셋, 아니 넷인가?'
손님들이 머무는 층을 벗어나자 경비가 삼엄해지기 시작했다. 핸들러가 걸어준 투명화 마법덕에 겨우겨우 이곳 까지 올라왔지만 이곳은 사정이 달랐다. 층계에서부터 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계단을 막고 있는 바람에 핸들러가 지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원숭이 처럼 난간에 매달려서 계단을 벗어났다. 땀이 비옷듯 흘렀지만 잠시도 쉴수가 없었다. 투명화 마법이 영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층계에 올라오니 마스터 급의 기사들이 복도의 의자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들은 눈만 가린다고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핸들러는 서둘러 호흡을 가라앉혔다. 오감이 발달한 마스터급의 기사들에게 작은 소리라도 들킬 염려가 있었다. 경비가 엄중한 것을 보니 제라드 백작의 방이 아니면 그 중요한 외국 손님들이 틀림없었다. 핸들러는 호크에게 배운 명상을 떠올리며 최대한 자신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얼마 후 시간이 흐르자 투명화 마법을 떠나서 어둠과 하나가 되어 기척조차 사라져 버렸다.
"응?"
"왜그러나, 앙드레?"
"아, 아무것도 아니네. 내가 좀 신경이 예민해졌나 봐!"
"원, 사람도 싱겁기는."
핸들러가 있던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동료 기사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연일 계속되는 경호 업무로 지쳐 보이는 앙드레에게 동료 기사가 와인을 한잔 건넸다.
"자네, 너무 피곤해 보이네. 한잔 들게나."
"그래도 될까?"
"뭐,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이 저택에 침입을 하겠어. 게다가 오늘은 백작님의 회의도 길어질 듯하니 한잔 하고 눈 좀 붙이게 우리는 어제 좀 쉬었으니까."
동료들의 배려에 앙드레는 가까운 침실을 찾아가 몸을 뉘었다. 조금 전에 느꼈던 이질감은 머릿속에서 털어내 버렸다.
"저 친구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야?"
"후후후, 어쩔 수 없을 거야. 그의 숙부가 황제파 였어. 두 배 세배 노력을 해야만 이겨낼 수 있겠지."
"앙드레 저 친구 안됐군."
잠을 청하러 간 앙드레의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그들은 희끄무레한 영상이 벽에 붙어서 움직이는 것을 눈치 못했다. 예민한 감각을 가진 앙드레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핸들러가 이렇게 복도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 앙드레는 와인을 마시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핸들러는 무사히 기사들을 통과해서 커다란 문을 가진 방 앞에 도착했다. 방문에 귀를 대어 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고요한 걸로 보아 아무래도 싸일런스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고 시간이 많지도 않은 핸들러로서는 조바심이 났다.
끼이익!
핸드러는 하마터면 심장이 멎을 뻔 했다. 귀를 대고 있는 문이 갑자기 열렸기 때문이었다.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지만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고 버텼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차 시중을 위해 들어갔던 하녀들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핸들러는 몸을 굴려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죽였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제라드 백작의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핸들러는 정말 죽었다고 느끼기 위해 눈을 감았다. 호크가 말한 몰아일체沒我一體 자연일체自然一體가 되기 위해 정신을 가라앉혔다.
"무슨 문제라도?"
"아닙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들만 남았으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제라드 백작이 찻잔을 내려놓자 후드를 쓰고 있던 인물이 깍지 낀 손을 풀었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를 부른 것이 장난이었다면 로베니아는 큰 각오를 해야 할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동맹을 맺을 사이인데 추호도 거짓이 있으면 안되겠지요."
"물건은 언제 볼 수 있소?"
후드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조바심을 내자 제라드 백작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가락을 튀겼다. 뒤에 서있던 마법사 얼른 테이블위에 수정구하나를 올려놓고 그 위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점점 빛이 나더니 나중에는 손으로 가리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마법사가 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나자 투명했던 수정구가 탁하게 변하며 어떤 영상을 보여 주었다. 수정구 안을 들여다 본 후드의 사내는 옆 사람을 돌아보았고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게 눌러쓴 자가 수정구 안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뭔가를 그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좋소, 일단 맞는 것 같으니까 조건을 이야기 해 봅시다."
후드 사내의 말에 제라드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제라드 백작이 얼른 준비해 두었던 두루마기를 건네자 후드의 사내는 천천히 두루마기를 풀어내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간혹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걸로 보아 꽤 충격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듯 했다.
"다 좋은데 말이오. 한 가지가 걸리는 걸."
두루마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고심하는 사내를 보고 제라드 백작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대체 어떤 점이 미흡하신 겁니까?"
이해가지 않는 다며 두루마기를 집어든 제라드 백작이 몇 번이고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고개를 흔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사내가 손을 들었다.
"미흡한 것이 아니고 삭제해야만 하는 조항들이 있소."
이번에는 제라드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들이 감히 대 제국인 로베니아가 이 정도 양보를 했으면 됐지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속에서는 욕설이 들끓었지만 겉으로는 웃어야만 했다. 자신이 이 동맹을 깨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느 조항을 삭제했으면 하시는 겁니까?"
마지못해서 입을 여는 제라드 백작의 눈을 보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로베니아와 알버스크 연맹의 동맹조약은 양측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혈맹관계로 한쪽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파기 할 수 없다!"
사내의 외침에 제라드는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조약의 첫 번째 조항이며 동맹관계를 확인하는 조항인데 이것을 삭제하자면 동맹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표정이 험악하게 변한 제라드 백작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동맹을 깨자는 말입니까?"
방안의 공기가 금세 냉랭해 졌다.
검이라도 꺼내들고 드잡이질을 할 기세인 제라드 백작과는 달리 사내는 여유로웠다. 사내는 답답한지 영원히 벗지 않을 것 같던 후드를 벗어 젖혔다.
"무슨 소리? 북부 연합군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우리의 동맹은 필요하오. 단 그 기간이 문제가 되지 않겠소? 무엇이든 오래가면 좋지 않은 법이지. 조약의 문구를 바꿉시다. 동맹의 기간은 북부 연합군을 쓰러뜨리는 날까지로 동의하시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사내를 보고 제라드 백작도 굳어진 인상을 풀고 손을 맞잡았다.
"좋습니다. 그 정도 수정이 문제가 되지 않겠죠. 그럼 로베니아와 알버스크 연맹이 성사되었다고 보고를 해도 되겠습니까?"
"이르다마다요, 저희 국왕전하께서 아주 흡족해하시더라고 전해 주십시오."
"후후후, 몽셀공작 각하께서 곧 선물을 보내실 겁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제라드 백작을 보며 사내도 웃음을 흘렸다. 테이블위의 수정구를 들어 올려 수정구 안의 화면을 다시 보았다.
"저희 알버스크 연맹에게 아주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웃음이 방안에 크게 울렸다.
"자, 자 로크 남작님 홀에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의 동맹을 미리 자축해도 되겠죠?"
"하하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마음껏 취해봅시다."
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벽에서 흐릿한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하녀들이 나올때 몰래 숨어든 핸들러였다.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 있었기에 핸들러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죽은 듯이 있었다. 방안에 혼자 남자 숨을 몰아쉬며 테이블로 기어갔다. 로베니아와 알버스크 연맹의 동맹도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동맹의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였다. 테이블위의 수정구를 들어본 핸들어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빌어먹을..."
수정구에는 빈 공간에서 혼자 몸부림치는 호크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보여 지고 있었다. 동맹에 대한 선물은 바로 호크였던 것이다. 로베니아 제국이 호크를 포로로 잡고도 케린버그에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었다. 이들의 음모에 핸들러는 몸서리 쳤다. 북부연합국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호크는 반드시 구해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의 음모에 북부연합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어떻게 호크를 이용하던지 간에 연합군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빨리 이 사실을 본국에 전해야 했다. 싸이클론과 합류하기 위해 핸들러는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멈춰라!"
탁한 음성이 계단을 내려오는 일행들을 제지하려 들었다. 그렇지만 어눌한 목소리가 익숙한 동작으로 철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아는 체를 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접니다."
"아! 이 시간에 웬일이오?"
검을 꺼내 들었던 기사들과 창을 곧추세웠던 병사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자 적이 안심하며 무기들을 내려놓았다.
"백작님이 시키신 일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백작이 시킨 일이라고 말하니 기사들의 표정에 긴장감 서렸다. 게다가 어두운 조명 탓에 그들은 집사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 못했다. 익숙한 사람이란게 이래서 무섭다. 단지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긴장의 끈을 풀고 경비를 서는 이들이 자신의 의무를 잊고 무장해제를 해버리기 때문이다. 검을 검집으로 돌려보낸 기사가 집사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이 길래, 이렇게 야심한 밤에 여기까지 왔소?"
"네 놈들에게 지옥 구경을 시켜주러 왔지!"
느닷없이 집사의 등 뒤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튀어 나오자 기겁을 한 기사와 병사들이 대비를 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어느새 집사 뒤에 숨어있던 이지 중대가 그들을 제압해 버렸다.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던 이들에게 기습은 무서운 것이었다. 기사가 검의 손잡이를 채 잡기도 전에 그의 목에는 서늘한 칼날을 느껴야 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알거 없어!"
제압당한 병사들과 기사들은 싸이클론이 잠재웠다. 주변이 정리 되자 굳데 닫힌 철문을 싸이클론이 노려보았다.
"마법 결계가 쳐져 있다. 보통 결계가 아니야. 고대 마법이다. 이건 어떻게 열지?"
싸이클론이 철문을 매만져 보더니 금세 문의 정체를 밝혀냈다. 깜짝 놀라 집사를 돌아보자 집사는 무표정으로 철문의 문고리를 잡고 두드렸다. 싸이클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집사를 돌아볼 때 철문 안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은 문을 열 시간이 아닙니다요."
"나, 집사장이요. 백작님의 명령이니 어서 문을 여시오!"
집사가 말을 끝내고 손바닥을 철문의 사자 문양에 가져가자 사자 이빨이 덥석 집사의 손을 깨물었다. 놀라운 현상에 모두들 깜짝 놀랐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때 집사의 피를 빨아들인 철문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피 빠는 것을 멈춘 철문이 집사의 손을 놓아주자 쇠붙이로 벽을 긁는 소리가 나며 철문이 안쪽으로 서서히 열렸다. 문이 열리자 짐승 가죽옷을 덧대어 입은 간수들이 달려 나왔다. 비천한 신분들이라서 그들에게 저택의 집사란 대단한 존재였다. 이 지하 감옥에 들어오면 2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보수가 좋아서 하는 짓이지만 그들 스스로도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며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벌써 십 수 년을 해오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집사란 대단한 존재였다. 그들의 봉급이며 가족들의 생활이 저택의 집사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도 이들은 단 한번 보았던 집사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중이었다.
"백작님이 이번에 데려온 죄수를 데려오라고 하시는데 어디 있소?"
"최근에 데려온 죄수라면... 아!"
기억이 나는지 간수 하나가 손뼉을 쳤다. 다른 간수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얼른 앞으로 나가서 집사에게 설명을 했다.
"그자는 '참회의 방'의 갇혔습니다."
참회의 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들 어두운 얼굴로 변했다. 이지 중대원들만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집사가 몸을 돌려 싸이클론을 돌아보았다.
"참회의 방은 일반 감옥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공간이며 저주 받은 방이기도 합니다. 어지간한 죄수가 아니면 절대로 들이지 않는 곳입니다."
집사의 설명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이야기지?"
싸이클론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러나 정신을 제압당한 집사가 싸이클론의 기분을 알 리가 없었다.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이 계속 흘러나왔다.
"죽기도 살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 받습니다. 매일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또 죽습니다. 쉬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보고 또 보고 매일 매일 다른 죽음과 고통에 시달립니다. 결국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짓입니다. 참회의 방은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시 살려 내고 다시 제정신으로 돌려 놓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수레바퀴인 셈이죠."
감정 없는 음성이 이렇게 사람에게 공포를 줄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 싸이클론은 자신도 모르게 집사를 죽여 버릴 뻔 했다. 집사가 호크를 가둔 것도 아니건만 순간의 분노를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밉기로서니 그런 곳에 집어넣다니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에 간수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싸이클론은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루크 소령의 손길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에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간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후~ 좋다. 어서 참회의 방을 열어서 그자를 꺼내라 데려가겠다."
싸이클론의 말에 간수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죽으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처럼 바닥에 엎드려 통사정을 했다.
"아이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다. 저희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간수장님만 아시지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요."
싸이클론이 집사를 바라보자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수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뜻 이었다.
"간수장을 불러라!"
싸이클론의 싸늘한 명령에 간수들은 앞 다퉈 달리기 시작했다. 눈치가 여차하면 자신들 목숨이 오늘 끝이 날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구차한 목숨을 건지려면 재빠르게 움직이는 길 뿐이었다. 잠시 후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간수장을 간수들이 들쳐 업다시피 해서 나타났다.
"꺼으윽! 아이고 이게 누구야 집사 나리 아니십니까?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 십니까요?"
간수들이 손짓발짓 해가면 간수장에게 알려 주었지만 술에 취해 몽롱한 그에게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그 보다는 차가운 검의 감촉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어주자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헉! 왜, 왜이러십니까?"
어느새 꼬부라졌던 혀는 사라지고 없었다.
"죄수를 다루는 간수들의 책임자가 이렇게 취해 있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루크가 제법 기사다운 말투를 써가며 눈을 부라리자 간수장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닙니다요. 나으리! 그냥 한 모금만 마셨을 뿐입니다. 헤헤헤헤!"
금세 고개를 숙이며 비굴해지는 간수장을 보며 싸이클론은 또 한 번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그런 싸이클론을 보며 루크 소령이 서둘렀다.
"참회의 방을 열어라! 죄수를 꺼내가야 겠다."
"네에?"
깜짝 놀란 간수장의 몸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나서는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차, 참회의 방을 열다니요. 그랬다가는 모두 죽습니다. 제발 다시 생각하십시오. 고위 마법사가 없이는 절대로 열수가 없습니다."
간수장은 고개를 도리질 하며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 했지만 싸이클론이 재주를 부리자 금세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가 라이트 마법으로 어두웠던 지하 감옥을 대낮같이 밝게 만들었기 때문 이었다.
"이제 열겠느냐?"
간수장을 입을 크게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위 아래로 끄덕일 뿐이었다. 이렇게 넓은 공간에 대단위 라이트 마법을 펼치는 마법사를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간수장은 집사가 데려온 이 노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순순히 말을 듣기로 했다. 서둘러 일행들을 참회의 방으로 안내했다. 지하의 광장은 사방이 감옥이었고 수많은 죄수들이 병마와 외로움속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밖에서 시민들은 새 세상이 왔다며 기뻐하고 있을 때 지하에서는 이렇듯 수많은 이들이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던 것이다. 이율배반적이라고 해도 누구하나 이들의 고통을 아파 할 사람은 없을 것이 틀림없었다. 황제를 따르던 귀족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을 시민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싸이클론은 애써 그들을 외면하고 발길을 서둘렀다. 지금은 호크의 구출이 최우선이었다.
"저곳입니다. 저주받은 공간 참회의 방입니다."
간수장의 떨리는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녹 슬은 청동 기사 동상들이 길목을 가로 막고 있었다. 호크를 가두어둘 때처럼 간수장이 주문을 외우자 청동 동상들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청동 기사 동상들은 데려갈 죄수가 없자 크게 화를 내며 고약한 고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모두가 귀를 막고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싸이클론만 마법으로 몸을 보호하고 겨우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싸이클론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자 청동기사 동상들이 검을 높이 들고 싸이클론을 해치려 하였다. 루크는 싸이클론을 돕고 싶었지만 청동 기사 동상들이 내는 소리에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청동 기사 동상들이 싸이클론에게 검을 내려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싸이클론은 이곳으로 오면서 간수장이 해준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 자신도 그곳에서 죄수 꺼내는 것을 단 한번만 보았다고 말했다. 그 때 고위 마법사가 와서 주문을 외우자 청동 기사 동상들이 길을 열어주고 문까지 열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주문이었을까? 청동 기사 동상들에게 걸어가는 순간 까지 싸이클론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청동 기사 동상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서 그 마법사가 한 일을 싸이클론은 알 수가 있었다. 베를로니아의 지하 도시에서도 그런 문양을 가진 청동 기사 동상들을 보았다. 이곳은 바로 고대 문명의 유적이었던 것이다. 다행이도 베를로니아의 지하 도시에서 고대문명에 대해서 드래곤들로부터 많은 지식을 전수 받은 덕택에 싸이클론은 청동 기사 동상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싸이클론의 마법 지팡이를 꺼내들고 고대의 주문을 읊조리자 마법 지팡이가 크게 요동치며 빛을 퍼트렸고 빛 무리에 휩싸인 청동 기사 동상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동상들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눈앞에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문에도 역시나 고대문명의 문양과 글이 적혀 있었다. 싸이클론은 손으로 문양과 문자를 더듬어 가며 읽어 내려갔다.
'참회하는 자만이 자유롭게 되리라! 참회하는 자만이 자유롭게 된다? 참회하는 자만이 자유를....'
싸이클론은 문에 적힌 문구를 되뇌이며 사자문양의 조각에 마법 지팡이를 가져다 대고 마법 주문을 외웠다. 싸이클론의 마법이 펼쳐지자 문이 빛을 내 뿜으며 크게 요동쳤다. 삐걱거리며 참회의 방문이 힘겹게 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안으로 싸이클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갔다. 동상들의 소리가 나지 않자 벌떡 일어선 이지 중대와 루크 소령이 어찌 해버리기도 전에 싸이클론이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모두들 낭패한얼굴이 되어 버렸다.
"싸이클론님은 어디 계신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핸들러를 보고 루크 소령은 쓰게 웃었다.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길!"
벽을 주먹으로 내리친 핸들러가 이를 악물었다. 일이 점점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이 밝기 전에 이 저택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날이 밝으면 제라드 백작의 호크를 꺼내서 알버스크 연맹에 호크를 넘길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낀 핸들러는 이제 동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깨를 무겁게 누르는 것을 느끼면 이를 악물었다. 정말 커다란 위기였다. 핸들러의 초조한 눈빛이 싸이클론이 사라진 참회의 방문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으아아악! 하아! 하아!"
두 팔로 몸을 끌어안은 호크가 몸을 몹시 떨었다. 추레한 몰골에 벌벌 떠는 모습이 측은하기 까지 했다.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죽어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었다.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는 동안의 기억과 고통이 정신이 들 때마다 고스란히 떠올랐다.
"우욱~"
먹은 것도 없는데 속에서 구역질이 올아 왔다. 어제는 숲속이었는데 오늘은 기암괴석이 즐비한 산악지대로 바뀌어 있었다. 또 어떤 괴물들이 덤벼 올지 호크는 두려웠다. 괴물들에게 잡아먹히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지 고통스러운 기억만큼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괴롭혔다. 몸의 떨림이 멈추자 옆에 있는 나무창을 집어 들고 바위산을 살폈다. 온몸이 털복숭이가 되어 원시인처럼 변했지만 여전히 호크는 의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한 호크는 이 잔인한 저주의 공간 속에서도 자아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었다. 호크가 강하게 반발 할수록 참회의 방은 더 큰 고통으로 호크를 괴롭혔다.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가라앉힌 호크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 찌는 암석지대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또 다시 참회의 방이 하루를 시작했고 호크는 또 다시 하루를 견뎌 내야했다.
드드드드!
처음에는 바위가 흔들렸고 나중에는 산 전체가 흔들렸다. 호크는 고래 등에 붙은 새우처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두 발로 서는 것은 커녕 엎드려 있기도 버거웠다. 손을 놓쳐서 떨어진다면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 분명했다. 참회의 방이 선택한 오늘의 형벌은 바로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손아귀가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 나왔지만 호크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딱히 누구에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대상을 선택하라면 세상을 향한 응어리의 표출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때로는 분노했고 때로는 울분을 토해냈으며 또 비명을 지르기도 했지만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점점 손가죽이 벗겨지며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지만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하늘이 점점 흐려지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래, 빌어먹을 놈들 어디 퍼부어 봐! 더 퍼부어 보라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이것들아 난 절대로 안져!"
미친 듯이 외치는 호크의 고함소리도 천둥소리에 묻혀서 모기소리만큼이나 작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호크의 몸도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면 끝도 없는 낭 떨어지였다. 그럼 끔찍한 고통을 맛보고 또 다시 이곳에 매달리고를 반복할 것이었다. 호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휘둘리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났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벌써 스스로 몇 번이나 목숨을 끊었을 테지만 호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이 거대한 시험 앞에서 의지를 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만큼은 그의 의지도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무쇠 같던 그의 의지도 힘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천둥소리처럼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참회하는 자만이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윽!"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고막이 찢어지는 줄 알았던 호크는 하마터면 그 소리에 손을 놓칠 뻔했다.
[참회하는 자만이 자유를 누리게 되리라!]
"으윽! 이것들이 정말! 난 잘못한 게 없어! 잘못한 게 없단 말이다!"
이를 가는 호크를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목소리가 더욱 애절해졌다. 그 목소리는 호크를 강압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하고 있었다. 그것도 간절히 애원하는 듯 했다. 호크도 계속 반복되는 목소리에서 그 것을 알아차리고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참회하는 자만이 자유를 얻는다고 하지만 난 참회할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어! 잘못한.....잘못...."
절대로 잘못한 일이 없다면 이를 갈던 호크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동공이 커지며 그 안에서 수많은 영상이 구름처럼 흘러 지나갔다.
"나는 ...나는...괴물이었어."
호크의 고개가 꺽였다. 그의 눈으로 온갖 전쟁의 잔상이 스쳐지나갔다. 모두 자신이 서있던 전쟁터였다.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고 그 위에 호크가 우뚝 서있었다.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전쟁을 통해 호크는 수없이 많은 생명을 빼앗았다. 두 손에 피를 묻힌 자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셈이었다. 그 동안 그의 손에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이 지친 얼굴로 주위에 모여 들었다. 모두가 원망을 하지는 않았지만 귀에 들리지 않는 마음속을 울리는 슬픔이 호크에게 전해졌다.
"모두 미안해! 나도 곧 뒤따라가겠지 그 때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호크의 얼굴이 편안해지며 눈을 감고 바위틈을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다. 평화로움이 가득한 표정은 그가 번민을 털어 버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때 그의 손을 누군가 급히 잡았다.
"누구...?"
감았던 눈이 떠지자 주변의 공간이 유리거울이 깨지듯 갈라지며 사라져버렸다.
"영, 영감!"
싸이클론의 얼굴을 보자 웃음을 터뜨린 호크의 몸이 그의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만신창이가 된 호크를 끌어안은 싸이클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신은 끊임없이 호크를 시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호크는 신에게 시험당하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했다. 싸이클론은 호크를 꼭 끌어안았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는 온데간데없었고 털복숭이가 되었던 호크도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마법이 깨진 참회의 방은 겨우 두세 사람이 서있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그 동안 호크가 겪은 모든 것은 환상이었다. 호크는 있지도 않은 환상의 세계에서 끔찍한 고통을 속에서 몸부림 친 것이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호크의 얼굴을 매만지던 싸이클론은 상념을 그만두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부터 로베니아 제국을 빠져나가는 중대한 일이 남은 것이다. 문을 열고나오니 핸들러와 루크소령이 달려온다. 이지 중대원들도 호크의 얼굴을 보고 모두들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집으로 간다!"
정작 목숨을 걸어야 할 험난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모험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두려움을 모르는 남자들의 대탈주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