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48화 (48/55)

Chapter 48. 참회의 방!

"무..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물통 입구가 말라붙은 입술에 닿자마자 시원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목을 적셔주었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혹시 정신을 잃은 동안 눈꺼풀이 쇠로 변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몸을 움직여 보려 하자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강한 전기가 관통하고 지나가는 통증이 머릿속을 뒤집어 놨다. 너무 고통이 심해서 입을 크게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어둠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흔들흔들 땅이 흔들렸다. 나무도 하늘도 누군가 머리통을 잡고 흔드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세상이 움직이는 건지 내가 움직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덕분에 속이 울렁거리며 속을 게워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머리통을 어디에라도 매달아 묶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퍽!

'윽, 아프잖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로베니아 놈들과 한 바탕 한 거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이런 빌어먹을!'

흔들거리는 눈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찾아냈다. 숲속의 풍경을 가로막은 하드레더의 가슴팍에 새겨진 장미와 검의 문양을 보자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군 알렉스 호크경!"

금발의 이죽거리는 중년 사내의 얼굴을 한방 날려주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어림도 없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누구를 어찌하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로베니아에 오신 걸 환영하오!"

자신이 했으면 멋있었을 말이었지만 포박당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올려다는 보는 기분은 정말 더러웠다. 그 자의 면상에 침을 뱉어 주려고 했지만 뱉을 침도 없었다.

'이 자식들! 마차에라도 태워주지 뭐냐 이게! 짐 보따리도 아니고 말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꼴이 뭐야.'

차라리 도착 할 때까지 정신을 잃고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랬다면 이런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흔들리는 눈으로 로베니아 제국의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 그나저나 애들은 무사히 빠져 나갔을까?'

꼬치마냥 대롱대롱 매달려가는 신세가 된 호크는 이지 중대가 무사히 빠져나갔는지 궁금했다.

"살고 싶냐?"

저승사자의 목소리인가? 목에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이 한 겨울의 고드름마냥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자 병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였다. 사내가 완전히 두려움에 휩싸여 공포에 절어 있자 비로소 만족했는지 목에 들이대었던 칼을 치웠지만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고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루크 소령님, 호크 장군님을 데려간 자는 제라드 백작이라고 합니다."

"제라드 백작?"

"네, 이번 혁명세력의 주축 인물이랍니다."

호크가 사라진 흔적을 쫓아온 루크와 대원들은 로베니아 북부 국경선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장군님은 무사하십니다."

호크가 무사하다는 말에 루크가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이군. 이제 부터가 문제인데, 어쩐다?"

산등성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루크의 얼굴이 수차례 변화를 거치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장군님 말씀대로 그까짓거 죽기밖에 더 하겠어? 본국에 통신을 넣어라 우리는 로베니아 구경 좀 더 하겠다고."

통신병이 마나 통신기를 조작하는 동안 루크는 이를 악물었다.

"장군님, 포상휴가 넉넉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장가 좀 가게요."

케린버그로 연락을 취하던 통신병이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루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전의를 불태웠다.

똑! 똑! 똑!

"들어오게"

서류 더미 속에 묻혀 있던 머스탱 총리는 들어와서 말을 잃어버린 부관 때문에 서류에서 눈을 떼어야 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세상이 끝장나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은 머스탱 총리에게 부관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총리각하, 비상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호크 장군님이 로베니아로 납치 당하신거 같습니다."

"..........."

"지금 현재 이지 중대가 로베니아 영토 안으로 추격중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됐나?"

"어제 오후의 일입니다."

"왜 이제야 보고가 왔지?"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상황실에서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날 오후 국가 비상소집 위원회가 긴급히 소집되었고 다시금 케린버그는 긴장상태로 돌입했다. 국경선 주변으로 준 전시경계 태세로 돌입했고 혈맹인 레센에서도 반 봄멜 공작이 급히 케린버그로 기사단을 이끌고 달려왔다. 아직 전화戰火가 채 가시지 않은 케린버그와 로베니아 진영사이에 또 다시 뜨거운 전쟁의 기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국경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 잉글햄에서도 힘겨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쾅! 쾅!

"끼아아악!"

뭔가가 부서지고 귀청을 찢는 비명소리가 끔찍하게 울렸다. 굳게 닫힌 문은 금세 부서질 것처럼 들썩였고 나중에는 영주의 성 전체가 흔들렸다. 복도를 서성이던 하워드 백작이 참지 못하고 붉은 물감으로 기이한 문자와 도형이 그려진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안됩니다. 영주님! 참으세요."

"하지만..."

"괴로우신 마음 잘 압니다. 그러나 참으셔야 합니다. 싸이클론님께서 당부하신 것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절대로 문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문이 열리기 전에는 말입니다."

심하게 일그러진 하워드 백작의 얼굴을 보며 핸들러도 이를 악물었다. 호크의 문제로 싸이클론을 찾아온 핸들러는 의식이 진행되기 전에 잉글햄에 도착했다. 싸이클론 이지중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데려온 샹그릴라의 성자 스톤을 건네받고서 핸들러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의식이 끝날 때까지 문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하워드 백작만큼 핸들러의 마음도 타들어갔지만 애써 힘들게 치러지고 있는 의식을 망칠 수는 없었다. 밖에서 느끼는 정도가 이런데 모르기는 해도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견디기 힘들어도 말없이 기다려 주는 것이 싸이클론과 힘겹게 삶에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캐더린과 아기를 돕는 일이었다. 핸들러에게 손을 잡힌 하워드 백작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라고 자신의 딸과 손자가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저 근심어린 눈길로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크흑! 쿨럭!"

대마법사임을 상징하는 하얀 로브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쓰러지려는 몸을 지팡이가 강하게 마루 바닥을 내려치며 중심을 잡았다. 로브로 가려진 몸임에도 불구하고 격하게 떨리는 몸을 감출 수 없었다. 사방이 꽉 막힌 성안의 깊숙한 밀실 안이지만 실내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하얀 방안은 싸이클론이 그려놓은 온갖 마법진으로 벽을 칠해 놓은 듯 했고 그물처럼 둘러쳐진 밀실을 빠져 나가지 못하는 것이 화가 나는지 정체모를 존재가 미친 듯이 밀실 안을 날아다녔다.

"저주의 끈도, 원망의 한도 모두 신 앞에서 사라질 지어다. 쥬ju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악한 원혼이여 가여운 이들에게 떠나 사라지거라!"

[닥쳐! 절대로 안돼! 이 둘의 영혼은 내꺼야! 이미 저주가 내린 이상! 이들의 영혼 없이는 절대로 지옥으로 돌아가지 않아!]

희끄무레하고 투명한 영상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모습이 무척이나 기괴했다. 수많은 영혼들이 들러붙어서 이루어진 영체靈體 같아 보였다. 그것은 호크에게 죽임을 당하기전에 저주를 내린 이사벨라 여왕이 지옥에서 불러낸 죽음이었다. 수많은 원한으로 뭉쳐진 분노의 생명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호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캐더린의 영혼에 들러 붙어서 그녀와 아기의 영혼을 빼앗으려 한 것이었다. 두무지 자신의 힘으로 이 저주를 풀길이 없었던 싸이클론은 호크가 위험을 무릅쓰고 샹그릴라에서 데려온 성자 스톤의 힘으로 캐더린과 아기의 몸속에 숨어든 녀석들을 떼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성자로서 자각을 한 스톤의 신성력은 싸이클론이 기대했던 거 보다 훨씬 대단했다. 녀석들은 마법진위에 누워있는 스톤 곁으로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마치 어둠속에서 태양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밀실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싸이클론이 방 전체에 쳐 놓은 결계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형체가 없는 탓에 괴성을 지르며 싸이클론을 위협했다. 그 바람에 방안은 회오리가 몰아치고 물건들이 날아다니며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싸이클론 영적인 힘에 충격을 받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쓰러지면 모두가 위험했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추스르며 싸이클론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심장의 마나써클을 움직이며 힘을 끌어 모았다. 저주의 영생체를 놓치면 또 다시 기회를 노리다 캐더린과 아기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지금 저 영생체들을 소멸시켜야만 캐더린과 아기가 저주에서 자유롭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의식을 주관하는 싸이클론은 물론 마법진에 신성력을 불어 넣고 있는 성자 스톤마저도 위험했다. 영생체들도 방안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을 눈치 챘는데 아우성을 치며 더욱 저주의 기운을 퍼뜨렸다.

으으으으!

어린 소년이자 성자 스톤이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떨었다. 영생체들의 분노와 원한이 가진 어둠의 힘이 스톤의 신성력을 밀어 내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은 잃은 상태였지만 본능적으로 어둠의 힘에 스톤이 대항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스톤의 힘이 마법진을 더욱 활성화 시키자 싸이클론도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필요한 만큼의 마나가 모이자 싸이클론은 8써클의 절대 주문을 캐스팅하고 마법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위로 들어올렸다.

"흙은 대지로 물은 바다로 불은 지옥으로 모든 것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

마법의 지팡이 끝이 빛을 내며 타올랐고 힘차게 지팡이를 내려치자 빛이 지팡이를 타고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으로 흘러 들어갔다. 빛은 수로를 타고 흐르는 물처럼 밀실의 그려진 그림들로 흘러 들어갔다. 마른 대지에 물이 흘러들어가듯이 빛을 흡수한 결계와 마법진이 한 곳에서 만나자 밀실 안은 태양이 폭발하며 빛이 터져 나오듯이 방안을 밝혔다. 빛은 영생체들이 내 뿜은 어둠의 힘을 태워버리며 방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빛에 내몰린 영생체들은 밀실의 벽을 마구 할퀴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뒤에서 빛이 그들을 덮쳤다. 수백 수천의 원혼들로 이루어진 영생체가 소멸하면서 내는 소리는 그들이 가진 원한과 분노 슬픔이었다. 깊은 산속에서 메아리치듯이 오랫동안 여운이 남겼다.

털썩!

"하아! 하아! 나도 이제는 늙었어. 이 정도로 이렇게 맥을 못 추다니 한심하군."

바닥에 주저앉아서 숨을 헐떡이던 싸이클론의 귀에 스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할아버지 여긴 어디에요?"

통곡의 벽 전투에서 성자로 각성하며 정신을 잃고 기절해서 혼수상태였던 스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깨어난 것이다.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었지만 의외의 결과로 스톤의 생명마저 구한 것이었다.

"이리오너라!"

스톤은 반가움에 달려와 품에 안긴 스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너에게 사과할 것이 있구나."

싸이클론은 캐더린과 아기를 구하기 위해 스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위험한 의식을 한 것에 대해 사과 해야만 했다. 그 때 문이 부서지며 핸들러와 하워드 백작이 검을 꺼내들고 들이 닥쳤다.

"괜찮으십니까?"

영생체들이 소멸되면서 일어난 소동에 결국 참지 못하고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었다. 싸이클론은 어리둥절 하는 두 사람을 보고 껄껄껄!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스톤을 품고 웃는 싸이클론을 보고 핸들러는 겨우 가슴을 쓸러 내렸다. 하워드 백작은 마법진 바닥위에서 땀에 젖은 채 잠들어 있는 캐더린과 아기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노파로 변해버렸던 캐더린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양이 이제 많이 편안해진 모양이었다. 겨우 한숨을 돌린 싸이클론은 핸들러에게 부축 받아서 일어나났다.

"후우, 겨우 어찌 어찌 해냈군. 위험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싸이클론님."

핸들러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을 알아차린 싸이클론이 핸들러를 데리고 둘이서 조용히 방 밖으로 빠져 나왔다.

"무슨 일이 생겼군 그래?"

뜻밖에도 싸이클론이 눈치를 채고 말을 먼저 꺼내자 핸들러가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혼자 가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고집을 피우더니."

의자에 몸을 던진 싸이클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호크가 떠날 때 그 앞에 보였던 불길함을 보고 더 강하게 만류하지 못한 것이 오늘에 와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이야 알고도 막지 않은 자신의 어리숙함을 탓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가자! 가서 데려와야지. 애기를 애비 없이 키울 수는 없잖아."

"네, 싸이클론님!"

싸이클론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자 핸들러가 눈빛을 빛내며 뒤를 따라나섰다. 그 날 밤늦게 잉글햄에서 8써클의 대마법사 싸이클론과 핸들러가 고얀평원을 넘어 로베니아 제국으로 숨어들어갔다.

끼이익!

녹이 잔뜩 슬었는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을 자던 이들이 모두 귀를 막고 몸을 일으켜야 했다. 이곳은 원래 중죄인을 가둬두는 곳이라 문이 열리는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당연히 간수도 깜짝 놀라서 그 육중한 몸을 출렁거리며 허겁지겁 문이 열린 곳으로 뛰어 왔다.

"네놈이 간수장이냐?"

"그, 그러하옵니다. 나으리!"

털썩!

고개를 숙인 간수장의 눈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가 던진 죄수가 들어왔다. 어지간히 다쳤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눈빛을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기사는 지하의 음습한 냄새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코를 막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 자를 참회의 방에 가둬라!"

"차, 참회의 방이라고 하셨습니까?"

뒤룩뒤룩 살이 찐 간수의 볼 살이 심하게 떨렸다. 참회의 방은 제국이 생긴 이래로 단 두 번 사용이 됬던 독방이었다. 참회의 방은 정말 죽이는 것으로는 그 죄가 용서 안되어서 더욱 가혹한 형벌을 위해 만들어진 끔찍한 곳이었다. 사형보다 더 무서운 처벌이 바로 참회의 방에 갇히는 것이었다. 간수장의 비곗살이 떨리는 것을 보며 기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한심한 놈 두 번씩 입을 열게 만들다니. 그래 참회의 방이라고 했다. 그대로 시행하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간수장의 손짓에 간수들이 달려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죄수의 팔을 잡아 질질 끌고 갔다. 뒤를 따라서 걸어가는 간수장은 쫓아가는 내내 궁시렁거리며 투덜거렸다.

"제길, 이제 곧 이 지겨운 간수장 생활도 끝인데 말년에 꼬인다. 꼬여! 하필이면 참회의 방이라니 나이도 많지 않은 놈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참회의 방씩이나 에효, 네 놈 팔자도 참 더럽구나."

긴 창살로 된 복도를 한 참을 지나서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자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냉기가 몸속을 파고들었다. 간수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위로 흘러 나왔다. 먼지가 잔뜩 쌓인 계단을 내려서자 청동 기사 동상들이 검을 들고 지키고 있는 문이 나타났다. 금방이라도 움직여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베어 넘길 기세였다.

"멈춰! 더 이상 다가가면 위험하다. 잘못하면 우리도 참회의 방으로 끌려가게 된다."

간수장의 경고에 죄수를 끌고 가던 간수들도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간수장이 조용히 손을 들어 움직이자 간수들이 죄수를 내려놓고 뒷걸음치며 간수장 뒤로 빠져 나왔다. 가슴 깊숙이 들여 마신 숨을 토해내니 드래곤이 불을 뿜듯 하얀 입김이 복도 안에 가득찼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목에 걸고 있던 하얀 자기병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굳게 잠긴 마개를 힘겹게 비틀어 열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유리병을 거꾸로 뒤집자 손바닥위로 은빛 가루가 흘러 나왔다. 어느정도 은빛 가루가 손바닥위에 쌓이자 마개를 닫은 간수장이 깊이 들여 마셨던 숨을 손바닥위로 토해냈다. 은빛 가루가 입바람을 타고 청동기사 동상들 쪽으로 날아갔다. 가루를 날려 보낸 간수장이 얼른 뒤로 도망치듯 물러서며 계단을 뛰어 오르자 간수들은 영문도 모르고 같이 뛰었다. 계단의 중간쯤 지나자 간수장이 고개를 돌려 외쳤다.

"잠들어 있는 위대한 영혼들이시여! 참회의 방을 열어 이 죄수를 벌하소서!"

소리를 지르자마자 죽을 듯이 달려 나가는 간수장은 그 몸으로 어떻게 그런 속도가 나오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단숨에 계단을 올라선 간수장이 복도의 난간뒤로 몸을 숨기고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며 문을 지켜보았다. 은빛 가루는 날개가 달린 것처럼 공기중으로 날아서 청동 기사 동상들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우드득!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청동 기사 동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익! 끼이익!

괴상망측한 소리에 간수장과 간수들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부자연스러웠던 몸이 훨씬 부드러워지며 청동 기사 동상들이 바닥에 쓰러진 죄수를 향해 다가왔다. 발을 끄는 소리가 지옥에서 걸어 나오는 악마의 소리처럼 들렸다. 바닥에 쓰러진 죄수를 두 개의 청동 기사 동상들이 발을 잡아서 끌어 당겼다. 나머지 청동 기사 동상들은 굳게 닫힌 문의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지하 감옥의 문보다 더 심한 소음을 내면서 문이 열리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와 실내를 공포로 물들였다.

"숨 쉬지 마라! 절대로!"

간수장을 코를 막으며 주의를 주자 간수들은 아예 코아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죄수의 발을 잡아끌던 청동 시가 동상들이 죄수를 문안으로 집어 던졌다. 죄수는 무슨 짐짝처럼 안으로 내던져 졌다. 죄수를 삼킨 참회의 방은 아무 일도 없듯이 문을 닫았다. 청동 기사 동상들도 제자리로 돌아가 처음 그랬듯이 조용해졌다.

"후우우~ 제길 할 아직도 손이 떨리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손이 떨림을 멈추지 않자 간수장은 반대 손으로 떨림을 멈추게 했다.

"가자! 이 엿 같은 곳은 잠시라도 있고 싶지 않아.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불쌍하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을 거야."

간수장과 간수들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아무도 찾지 않던 지하의 감옥은 더욱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청동 기사 동상들만이 이 외롭고 어두운 곳을 지킬 뿐이었다.

"허억!"

바닥에 내던져진 고통 때문에 정신이 든 죄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젤라틴인지 제라드인지 나중에 두고 보자.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네.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숲이었다. 이놈들이 나를 데려오다가 무거워서 버리고 가버렸나 착각했지만 뒤를 돌아보고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등 뒤에는 거대한 문과 글이 적혀 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가서 문을 밀어 보았지만 용접이라도 해 놓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상인 몸상태라도 힘들 판인데 부상당한 몸으로는 더욱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먼지가 잔뜩 쌓여있는 벽을 손을 쓸어내니 글귀가 나타났다.

[죄를 지은 자 이곳에서 참회하라! 참회하지 않는 다면 죽음보다 더 한 고통으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리라!]

끔찍했다. 입에서 재수 없다는 말이 계속해서 튀어 나왔다. 제라드 백작인가 하는 놈에게 얻어맞고 기절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로베니아의 영토 안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로베니아의 수도이며 제국의 성안아리는 뜻이었다. 왜 나를 감옥에 가두지 않고 이런 곳에 놓아두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며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댔지만 어쨌든 이곳에서 빠져 나가려면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가 문인 것은 틀림없어 보이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이 문으로 빠져 나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어 보였다. 적당한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난 다음에 빠져나가든지 다시 이문을 열어 보도록 하던지 해야 했다. 주위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서 목발을 대신했다. 울창한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니 더 깊고 무성한 숲이 반겼다. 열대 정글이라도 들어온 느낌이었고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두꺼운 하드레더는 이런 더운 기온에는 정말이지 고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 둘 옷을 벗어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까의 문을 보면 분명히 건물 안이라는 말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커다란 숲이 존재 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이곳은 그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말이었고 나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놈들이 결코 나를 쉽게 놓아줄리 없다고 생각했다. 마법이든지 주술이던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스톤을 데려간 중대원들이 무사히 케린버그의 잉글햄에 도착했다면 싸이클론 영감이 약속한데로 캐더린과 애기를 무사히 살려 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를 아버지 없이 키우기는 싫다. 나처럼 그렇게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게 할 수 없다.

'힘을 내자. 힘을 내야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외침이었다.

사그락!

'흠짓!'

분명히 뭔가가 수풀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은 아니다. 분명히 나 말고 다른 무엇이 수풀을 건드렸다. 바람은 더 더욱 아니었다. 목발로 사용하던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아니었지만 우선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앞에서만 수풀이 흔들리더니 점점 사방 모두에서 수풀이 흔들리며 가르륵 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아무리 각오를 했다지만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럴 때 싸이클론 영감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그 잘난 마법 한 번 써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뭐, 지금 이렇게 아쉬워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짓이다. 수풀의 흔들림이 점점 가까워졌다.

'제길!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줘야 할 텐데.'

그저 간절히 바라는 마음뿐이지만 정말 힘을 내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마누라하고 자식 놈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까.

'호크야! 정신 차리자, 네 자식 놈 부모 없는 자식 만들지 말고.'

사방에서 흔들리던 수풀이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괴물의 괴성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정적이 숲속을 무겁게 내리 눌렀고 그 정적 속에서 호크는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를.....

"의외로 경비가 허술 합니다. 믿을 수가 없는데요."

"의외가 아니야. 지금 로베니아는 흐트러진 민심과 국력을 되살리기 위해 필사적이네. 만약에 그 몽셀공작이란 자가 온 나라를 폐쇄하고 국민들을 억압했다면 우리 연합군은 로베니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차가운 물을 마시던 싸이클론이 물 컵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익숙하지 않은지 볼을 잡아 당겨 보았다. 얼굴을 바꾸는 마법을 처음으로 사용해 본 싸이클론은 역시나 자신이 변형시켜준 핸들러의 낯선 얼굴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좀 더 멋진 얼굴로 해줄 껄 그랬군."

"네? 참내 싸이클론님은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오십니까?"

핸들러가 낯을 굳히며 정색을 하자 싸이클론은 잔에 든 물을 비우며 웃음을 터트렸다.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싸이클론이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몽셀 공작이란 사람 무서운 작자야, 자고로 혁명을 일으키고도 이런 정책을 펼친 이는 없었어. 사람들 얼굴을 보라고 얼마나 활기차고 행복해 보여, 이대로 두면 발렝황제 때 보다 더 훨씬 강한 나라로 발전 할 걸세. 오늘 와 보길 잘했구만!"

싸이클론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핸들러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보아도 얼마 전 혁명이 일어나 황제를 죽이고 혁명정부가 들어선 나라라고는 전혀 느낄 수가 없을 정도로 활기차 보였다. 그것은 예전에 로베니아 제국에 수없이 다녀본 핸들러가 잘 알고 있는 문제였다. 풀렌시아 대륙의 최고제국이었던 발렝 황제 시절의 로베니아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호크를 구하기 위해서 몰래 잠입해서 본 지금의 로베니아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도무지 자신이 경험했던 그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들이 묵고 있는 여인숙만 하더라도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하고 삭막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하더라도 살기가 훨씬 좋아졌다는 이야기뿐이었다. 병사들도 시민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변해서 위압적이고 고압적이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싸이클론과 핸들러가 아무리 변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여인숙에 있을 수 있는 것도 국경선의 철통같은 경계와는 달리 제국 내부의 검문이 느슨해졌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단꿈에 젖어 있는 케린버그와 레센의 연합국이 이것을 꼭 봐야 한다고 핸들러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지?"

싸이클론이 답답한지 한숨을 토해내자 핸들러가 싸이클론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싸이클론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단 말이지?"

"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쉽지가 않을 겁니다."

"지옥의 대 마왕이라고 해도 찾아가야지 밤이 되면 찾아가 보세."

싸이클론의 눈매가 무척이나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눈앞에 원수라도 있는 것처럼 매서웠고 어스름 달이 고개를 내밀자 밤이 찾아왔다.

"저곳입니다. 낮에 알아본 바로는 사람들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뒤가 구린 놈이 감추길 좋아 하는 법이지."

길 건너편 커다란 저택을 바라보는 싸이클론이 핸들러의 말에 싸늘하게 대답했다. 호크를 잡아간 제라드 백작의 저택을 바라보는 싸이클론은 당장에라도 화염마법을 날려 저택을 불태워버릴 기세였다. 핸들러는 혹시라도 싸이클론이 그럴까봐 전전긍긍했지만 다행이도 싸이클론은 그러지 않았다.

"놈이 집안에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고 백작의 집을 감시하는 놈들이 또 있는데?"

"네? 그게 무슨...?"

싸이클론은 대답대신 손을 들어 백작의 저택 대각선에 위치한 건물의 창문을 가리켰다. 불이 꺼진 창문에 뭐가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싸이클론은 창문 안이 잘 보이는지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눈빛을 번쩍인 싸이클론의 몸이 빠르게 달리자 핸들러도 뒤를 쫓아갔다. 어두운 길목을 밤의 그림자 안으로만 달리자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오르자 복도 끝 방문 앞에 남자둘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핸들러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자 싸이클론이 손을 잡아 내렸다. 고개를 흔드는 싸이클론을 보며 핸들러도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두 남자를 향해서 손을 움직이며 중얼거리자 벽을 향해 몸이 쓰러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핸들러가 조용히 달려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잡아서 소리가 나지 않게 했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싸이클론이 다시 한 번 방문에 손을 대고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방문에 대고 있는 손에서 빛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방안에 있던 남자들도 모두 기절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척이나 난감해졌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중에서 낯익은 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루크 소령!"

"우리 편이었네?"

"네, 일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핸들러를 보며 싸이클론도 떨떠름하게 웃고 말았다. 아까 복도에서 단검을 던지려 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얼굴을 쓸어내린 핸들러는 루크 소령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후려 쳤다.

"멍청한 자식!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면 표식을 해놔야 할 거 아냐!"

큰 실수를 할 뻔 했던 끔찍한 기억에 핸들러가 애꿎은 루크소령을 타박할 때 싸이클론이 때마침 이지 중대원들을 깨웠다.

"악!"

쿠당탕!

핸들러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루크소령이 바닥을 굴렀다. 마법에서 깨어난 이지 중대원들이 갑자기 일어난 소동에 깜짝 놀라 무기를 꺼내들었다가 급히 부동자세를 취했다.

"부대 차렷! 충성!"

불시에 기습을 당한 루크 소령은 검을 꺼내 들었다가 자신을 공격한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급히 거수경례를 올렸다.

"추, 충성!"

갑자기 마법에서 깨어난 이지 중대원들을 보고 놀라기는 핸들러도 마찬가지였다. 싸이클론이 그렇게 급히 이들을 깨울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흠, 흠! 멍청한 놈들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머쓱해진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되려 소리를 지르자 루크소령과 이지중대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상관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기에 핸들러의 질책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특히나 루크는 중대장으로서 큰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질책하고 있던 터라 핸들러가 이곳까지 와서 자신을 책망하자 더 큰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설마하니 핸들러 정도의 고위급 장교와 싸이클론 같은 대 마법사가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만큼 본국에서 이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루크 소령의 안색이 더욱 나빠지자 핸들러는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루크가 제멋대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버리는 통에 방안의 분위기가 아주 무거워졌다. 핸들러는 그저 자신이 루크의 얼굴을 때린 것을 무마하려고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한 것인데 엉뚱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흘러가자 난처해 졌다.

"제 책임입니다. 돌아가서 모든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루크가 고개를 숙이고 침통하게 이야기하자 중대원들도 모두 앞 다퉈 나섰다. 제 중대장이라고 감싸려고 나서는 통에 핸들러만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국 핸들러의 얼굴이 붉어지며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시끄러워! 이것들이 정말!"

"핸들러, 자네가 더 시끄러운데 이제 그만하고 방법을 강구해 보지."

"네, 싸이클론님!"

싸이클론에 정중히 대답을 하면서도 고개를 돌려 루크를 바라보면 입술을 움직였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그 때 눈빛이 하도 험악해서 모두가 움찔 거렸다. 기왕 악역이 된 김에 확실하게 마무리를 한 핸들러는 싸이클론이 자리 잡고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 호크 구출작전을 짜야 할 때였다. 창문 밖으로 제라드 백작의 저택이 들어왔다.

"성에서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별일이 뭐 있겠나. 그나저나 그 일은 확실하게 마무리 했겠지?"

"네, 백작님. 하지만 공작님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처리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만."

머리를 짧게 깍은 중년의 기사가 심히 곤란한 얼굴로 걱정을 하자 제라드 백작은 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걱정하지 말게 공작께서 아신다고 해도 별다른 일은 없을 걸세 사실 그런 괴물을 어디에 가둬 둘 수 있겠나. 금세 몸을 회복하고 나면 누가 그를 막겠는가? 자네가 막을 수 있나? 아니면 내가 막겠는가? 분하지만 제국내에서 그가 난동을 피우게 되면 겨우 안정되어가는 제국에 큰 피해만 주게 되.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참회의 방만큼 좋은 감옥이 어디 있겠나?"

깊은 한숨을 쉬며 뒷짐을 지고 방을 나서는 제라드 백작의 등이 무척이 외로워 보인다고 기사는 생각했다. 방문이 닫히며 어둠속에 홀로 남게 된 기사는 참회의 방에 갇힌 호크가 그곳에서 어떻게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 졌다.

"죽엇!"

콰직!

"헉! 후우~ 후우~"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는 머리카락이 잔뜩 들러붙어서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함께 털복숭이 괴물을 연상케 했다. 다만 그 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맑다는 것만 빼면 괴물이라고 불러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나무 넝쿨로 감싸고 있어서 숲속의 요정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못할 거 같았다. 좀 징그러운 요정이지만, 뭐 어쨌든 털복숭이 괴물이던지 징그러운 요정이던지 간에 그의 신경은 온통 숲속을 향해 있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가지 위에 올라서서 뭔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는 찰랑거리는 수풀이 바다처럼 물결을 만들어내며 흔들렸다. 바닷물에 낚시대를 드리운 어부처럼 눈빛을 빛내던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손에는 나무를 부러뜨려서 날카롭게 만든 나무창이 들려 있었다. 창끝에는 핏물이 진득하게 말아 붙어있었다. 창을 들고 있는 손과 팔에도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고오오~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끔찍한 기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뭇가지 위의 창을 들고 있는 털복숭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무와 하나가 된 듯이 있었다.

갑자기 수풀 숲에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무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수풀이 갈라지며 무언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무 밑까지 갈라지던 수풀이 갑자기 멈췄다. 그러나 털복숭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고기 튀어 오르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다렸다.

쿠웨에엑!

큰 나무가 흔들리게 괴성을 지르며 수풀 속에서 반은 물고기 반은 인간인 괴물들이 튀어 올라왔다. 털복숭이를 향해 뛰어 오르며 입을 벌리자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회전을 하고 있었다. 입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갈아 버릴 것 같았다. 괴물들에 둘러싸여 털복숭이가 보이지 않게 되자 털복숭이가 괴물들에게 잡아먹힌 것처럼 보였다.

"으아아아!"

괴물의 괴성이 지지 않을 만큼 박력 있는 함성과 함께 털복숭이의 나무창이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핏물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썼지만 닦아낼 틈이 없었다. 뒤를 이어서 더 많은 수의 괴물들이 뛰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와라!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내 살을 뜯어 먹지는 못할거다!"

이를 갈며 소리치는 털복숭이의 눈빛은 괴물들보다 더 무섭게 빛났다.

"나 호크라고 알겠어? 다시는 네 놈들에게 살을 뜯기지 않겠어! 내가 네 놈들의 살을 뜯어 먹어 주마!"

악을 써대며 나무창을 휘두르는 털복숭이의 정체가 바로 호크였다. 참회 방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는데 호크의 모습은 십 수 년을 이곳에서 지낸 몰골이었다. 얼굴을 뒤덮은 수염과 긴 장발의 머리는 그만두고라도 변해버린 목소리와 늙어버린 얼굴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괴물들과 싸우는 통에 넝쿨 옷이 찢어지자 나타난 상체는 끔찍한 상처들로 가득했다. 진하고 흐린 색으로 상처가 생긴 시간들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을 때보다 더 비참하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들썩이는 어깨가 보통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비록 괴물들을 상대했다지만 그의 능력으로 보아 이정도로 지치고 힘들어 하는 게 이상했다. 더 이상 수풀에서 괴물들이 나타나지 않자 겨우 엉덩이를 나뭇가지에 붙이고 한 숨을 돌렸다. 씩씩거리는 모양이 지치고 힘든 몸보다 더 성질이 나는 것 같았다.

"후우~ 후우~ 절대 안 죽어. 난 절대 못 죽어! 참회의 방? 엿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날 여기에 집어넣은 놈들이나 참회하라고 해! 이 방에서 나가는 날 모조리 참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몸 여기저기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 눈을 붙였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향해 이를 갈며 조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음냐! 캐더린 ..... 캐더린...."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는지 호크의 주름진 얼굴에 모처럼 행복한 표정이 떠올랐다.

창문을 통해서 꽃향기가 바람결에 묻어서 방안으로 들어오자 향기로운 단내가 가득히 퍼져 나간다. 그 냄새가 좋은지 작은 침대에서 잠을 자던 아이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낸다. 조금은 얼굴이 수척해진 여인이 잠옷 차림의 아이를 안아 들자 아이는 엄마를 알아보는지 그 작은 손으로 엄마의 얼굴을 만져보려 애를 쓴다. 그런 아기의 손에 얼굴을 맡긴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를 안고 창가의 테라스로 나가자 붉은 노을이 모자를 비추었다. 꺄르르 웃음소리에 엄마는 아기의 몸을 흔들어 주었다.

"아가, 너도 기도해 주렴 아빠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달라고. 정말이지 기적이 필요하단다."

엄마의 슬픈 마음을 느꼈는지 웃음을 터뜨렸던 아기가 갑자기 칭얼대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도 아기를 달래주지 않고 같이 슬픔을 터트렸다.

"얘야, 캐더린! 그러다 감기 걸리겠구나. 아직은 바람이 차다."

"아빠, 좋은 소식이라도?"

고개를 흔드는 하워드 백작을 보며 캐더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얘야!"

깜짝 놀란 하워드 백작이 달려와 캐더린과 아기를 안아들었다. 슬픔으로 고통 받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다지도 괴로울지 미처 몰랐던 하워드 백작은 그 사이 흰머리가 많이 늘어서 할아버지가 다 되었다. 근심어린 얼굴과 달리 그의 입은 희망을 이야기했다.

"캐더린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네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호크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네가 힘을 내야 그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아버지 하워드 백작의 말에 캐더린도 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죠? 아버지. 그 분은 분명히 돌아오실 거에요. 언제나처럼 활짝 웃으며 저 문을 열고 올게 틀림없어요."

용기를 되찾은 캐더린을 보며 화워드 백작도 억지로 웃어주었다. 절망 보다는 헛된 희망이라도 갖는 것이 지금의 캐더린에게는 도움이 될거라고 믿었다.

'싸이클론님, 제발 제 사위를 구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워드 백작의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사이 붉은 노을도 어둠에 먹혀 버리고 잉글햄에도 깊은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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