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47화 (47/55)

Chapter 47. 다시 꿈틀거리는 제국의 야망

스카라무슈!

제국 내 최고의 검술을 가진 이들이 샹그릴라에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하나 같이 호크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자신의 생명은 도외시하고 호크를 노렸기에 그들의 목적은 분명 했다.

호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신성도시 샹그릴라를 파괴하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일을 벌일거라고는 더더욱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신에 대한 기도소리만이 들려야 할 샹그릴라였지만 오늘은 기도와 찬송가 대신 비명과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이지 중대가 적의 일반병사들을 막는 동안 호크는 스카라무슈들을 상대했다. 그들도 다른 병사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영악하게도 2인 1조를 이루어 호크를 압박했다. 30여명이 이룬 공격조는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적정한 시간차 공격과 틈을 주지 않는 수비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통해 얻은 검술로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함정이었다. 로베니아에서 상당한 준비를 했고 그것은 꽤나 훌륭하게 성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호크의 검에 쓰러지는 기사들의 수가 점점 줄기 시작했다. 호크를 빙 둘러싸고 순차적으로 빈틈을 노리며 공격하는 로베니아의 기사들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명예를 중요시 하도록 교육받은 자신들이 암수를 쓰고 다수의 인원으로 한 사람을 핍박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호크와 한 차례 검은 섞은 뒤에는 그런 생각을 던져 버렸다. 어느 누구든지 명예보다는 삶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호크의 검술이 뛰어나자 준비해온 합격진이 효과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였다니, 원정군의 패배가 우연이 아니었어. 어쩔 수 없이 결국 그걸 쓰는 수밖에 없겠어."

이번 작전의 책임자인 로베니아의 제라드 백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앙뜨네트 여제 모르게 진행한 작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작전의 결과가 어떠냐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질 평가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추궁을 받게 되더라도 작전의 결과가 실패냐 성공이냐에 따라서 나중에 결과가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누가 뭐라고 해도 반역으로 잡은 권력이었다. 비록 앙뜨네트 여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내정이 안정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죽은 선대 황제 루이 드 발렝 황제를 추종하고 있었다. 일련의 군사작전에서 실패를 할 경우 아주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작전을 실행하기에 앞서서 몽셀공작이 이점에 대해서 신신당부한 것도 같은 측면에서였다. 그렇기에 혁명세력의 중추이며 이제 로베니아 제국의 제일 기사인 제라드 백작이 직접 투입된 것이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이들은 샹그릴라까지 불태웠다. 그 이상을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제라드백작이 명령을 내리고 뒤로 빠져나갔다. 지휘관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최후의 수를 쓰려고 한다는 경고였다. 쉴새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호크는 백마를 타고 있는 금발의 사내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호크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검을 찔러오는 두 명의 스카라무슈 앞으로 앞구르기를 한 다음 일어서는 동시에 수평으로 검을 베었다. 무자르듯 강철 갑옷이 갈라지며 제국에서 행세깨나 했을 두 명의 기사를 베어버렸다.

"루크 소령!"

혼전 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루크 소령이 호크를 찾았다. 호크가 수신호를 보냈다.

[돌파!]

루크 소령은 호크의 명령을 즉시 이해하고 분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각개 돌파! 최대 전투를 회피하고 전투 지역에서 벗어나라는 명령이었다. 호각소리가 시끄럽게 주변을 소란스럽게 만들자 누군가 돌격 나팔을 불었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이지중대원들이 앞으로 내달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적들이 돌격해오자 긴장한 로베니아 병사들이 몸에 힘을 주고 무기를 쳐들었다. 잠시 후 이지중대와 로베니아 병사들이 합쳐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충돌음이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이지중대의 목적이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베니아 병사들을 그냥 스쳐지나갔다.

'어, 어!'

하며 어리둥절 하는 사이에 이지중대는 로베니아 병사들의 진영을 빠져나갔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쫓아라!"

당황한 기사들이 병사들을 닦달했지만 곧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라서 몸을 돌려야 했다. 스카라무슈의 합격진에 묶여 있어야 할 호크가 합격진을 빠져 나와 하늘 높이 뛰어 올랐다. 로베니아 병사들은 호크가 뛰어 오른 모습을 본것이 아니고 호크의 손에 들린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환하게 빛을 내뿜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빛이 하늘에서 자신들에게 쏘아지는 것이 마지막 광경이었다.

쿠콰카카카!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로베니아 진영이 초토화 되었다. 도무지 사람의 능력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은 힘이었다. 호크를 막지 못한 스카라무슈들은 심한 자괴감과 모멸감이 치를 떨었다. 어차피 이일에 목숨을 건 이상 이대로 순순히 물러난다면 제국의 기사로서의 생명은 끝이었다. 가문과 기사의 명예를 위해 살아남은 스카라무슈들이 온몸의 마나를 불태우며 호크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호크도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그들을 무시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야 했다. 이지중대의 안전을 위해 로베니아 병사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힌 호크는 한 번 더 확실하게 더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스카라무슈들이 내뿜는 기세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건만 들리는 소리는 폭음과 불꽃이 터지는 굉음이 주변을 울렸다. 호크의 걱정과 달리 호크의 마나소드에 이미 의지를 상실한 로베니아 병사들은 이지 중대를 쫓지 못했다. 생존자들은 그저 멍하니 호크와 스카라무슈들의 대결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휘관들이 모두 사라져 제대로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기에 길 잃은 양떼들처럼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이었다. 스카라무슈들의 무서운 공세를 한 차례 막아낸 호크는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엉망진창으로 버려진 로베니아 병사들과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스카라무슈! 어디에도 이들의 지휘관들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불안했다. 온 몸의 신경세포가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정신이 분산되자 호크의 검술도 어지러워졌다.

큭!

그 바람에 팔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지만 그 뿐이었다. 시큰한 상처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든 호크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 때 뭔가 강렬한 것이 뒤통수를 관통했다. 마치 독화살이 가슴에 꽂힌 느낌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호크의 몸이 급히 돌았다. 그런 호크의 눈에 로베니아 병사들과 다른 복장을 한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샹그릴라의 성벽위에 나타났다. 계속해서 호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이유는 바로 저들이었다. 호크도 반사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지만 뜻밖의 상황의 벌어졌다. 스카라무슈들이 몸을 던져서 호크를 막기 시작한 것이었다. 검을 버리고 호크를 향해 육탄공세를 퍼부었다. 최대한 공격을 했지만 목숨을 도외시한 무식한 공격에 결국 몸의 일부분을 내주고 말았다. 왼발을 붙들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카무슈들이 호크의 신체를 잡고 늘어졌다. 수십 명이 팔이며 다리 허리를 붙들어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이거 안놔~! 야 새끼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호크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이미 모종의 명령을 받고 온 듯 두 눈을 감고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려 호크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를 쓰고 빠져나오려는 호크의 눈에 성벽위에 있던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뭔가를 집어 던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호크의 입에서 외마디 욕설이 튀어나왔다.

번쩍!

지옥의 불길을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땅위에 떨어져 내렸다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화염의 괴물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는 듯이 대지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갔다. 대지위의 풀도 짐승들도 왜 자신들이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로베니아 병사들도 다만 이런 결과를 알고 있었는지 스카라무슈들은 제국이여 영원하라며 악을 썼다. 그러나 호크는 순순히 당해줄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아이를 살려야 했다. 가족이 생긴 지금 그의 생존본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힘껏 팔을 떨치자 죽어도 놓지 않을 것 같던 스카라무슈들이 떨어져 나갔다. 양손이 자유로워지자 호크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퍼져나갔다.

드드드드!

호크의 몸 주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나면서 발을 디디고 서있는 땅이 흔들렸다. 발과 허리를 잡고 있는 스카라무슈들이 튕겨져 나갔고 로베니아 병사들도 강한 돌풍에 눈을 가렸다.

"으아아아아아!"

듣는 이의 심연을 뒤흔드는 호크의 괴성이 코앞으로 다가온 화염 괴물과 맞닥뜨렸다. 괴물 대 괴물의 대결이었다. 화염 괴물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집어 삼키는 순간 호크의 블레이드에서도 폭풍이 몰아쳤다.

샹그릴리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언덕 위까지 충돌의 여파가 밀려왔다. 말들이 놀라서 흥분하자 진정시키기 바빴다. 미쳐 말을 달래주지 못한 사람들은 땅으로 떨어지기 까지 했다.

"이 정도였나? 이 정도였어?"

제라드백작이 치를 떨었다. 말고삐를 움켜쥔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왼손으로 덮었다. 말안장 고리에 양손을 올려놓고 힘을 주었다. 호크를 공격한 것은 로베니아 제국 내에서도 아는 이가 드문 고대 문명의 무기였다. 로베니아 제국의 시초가 되는 아크란 왕조시절 드래곤과의 전쟁 때 사용했을 뿐 그 이후 세상에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몽셀공작이 십수일을 고민 할 정도 사용하기를 꺼렸던 물건이었다.

제라드 백작은 솔직히 '파멸의 피'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저주의 마병기馬兵機를 사용하게 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준비한 병력과 스카라무슈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마병기 '파멸의 피'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낭패를 보는 쪽은 자신이었을거다. 스카라무슈 30명을 잃었지만 알렉스 호크를 잡은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확인해라!"

아무런 감정도 없는 제라드백작의 명령에 얼어붙어 있던 부하들이 미적거리며 움직였다. 다들 설마하니 저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이 있겠냐며, 고개를 저었지만 어쨌거나 상관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색창연한 고대의 신전들과 아름다운 정원들 그리고 기도소리가 가득했던 아름다운 신성도시 샹그릴라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잿더미! 말 그대로였다. 매캐한 연기와 숯 검뎅이들이 이곳이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제라드백작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검을 들고 숯이 된 시신들을 들춰보며 수색을 하고 있었다. 천으로 얼굴을 묶은 이들이 숨을 쉬기 어려운지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할! 그 폭발 속에 뭐가 남아 날 리가 .... 으헤엑!"

방금 숯더미 하나를 들쑤시던 기사가 귀신을 본 것처럼 기절초풍했다.

"저, 저...저기!"

엉덩방아를 찧은 채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갑작스런 소란에 기사들이 긴장하며 달려왔다.

들썩!

차차창!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눈앞에서 뭔가 움직이자 수십 명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건장한 기사들이 잿더미가 들썩였다고 검을 들고 겁에 질려 다가서는 꼬락서니가 참 가관이었다.

탁!

"쿨럭! 으...으!"

"괴, 괴물!"

"마, 말도 안돼!"

주춤주춤!

잿더미 속에서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일어난 사람을 보고 보두 경악했다. 피칠을 한 채 비틀거리며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손대면 쓰러질 것 같은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에게 뒤로 물러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비..비겁한 놈들! 네 놈들 다 죽었어."

털썩!

단단한 돌로 만든 건물조차 불에 녹아내렸건만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인 호크는 피로 온몸을 물들였지만 잿더미로 변한 다른 이들에 비하면 멀쩡한 거나 다름없었다. 기사들은 쓰러진 호크를 주위로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호크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경외심을 넘어선 두려움이 기사들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비켜서라! 쓸모없는 것들!"

제다르 백작이 기사들을 밀치며 나타났다.

스르릉~

검집에서 날카로운 검이 빠져나오면서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꿈틀거리며 일어서려고 애를 쓰는 핏덩어리를 바라보는 제라드 백작의 눈썹이 몹시 꿈틀거렸다.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든 손이 떨렸다.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닌 갈등의 떨림이었다. 호크를 죽일지 말지 제라드백작은 고민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죽이는 것이 당연했지만 국익을 위한다면 그를 살려서 데려가는 것이 옳았다. 가슴은 죽이라고 하고 머리는 살려두라고 하고 있었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후회할거라는 것을 알았다.

'후우~ 아직은 네 놈의 목숨이 끝날 때가 아닌 듯싶구나!'

결국 제라드의 검은 호크의 목을 치지 못했다. 힘을 잃고 내려온 검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뭐들 하는 거냐? 어서 데려가지 않고. 살려서 귀국한다. 서둘러!"

수하기사들이 엉거주춤 거리며 호크를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라드 백작이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보았다. 땀이 흥건했다. 기사들을 나무랐지만 솔직히 자신도 살아있는 호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고 솔직히 너무나 두려웠다. 제국이 반쪽 나고 병력의 대부분을 손실하고 나니 평소 같으면 얼굴도 내밀지 못할 알버스크 왕국 따위가 감히 로베니아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치욕스러웠다. 그 생각만 하면 호크의 목을 당자 베어버려야 했지만 지금은 로베니아 제국도 숨을 죽이고 기회를 기다려야 할 입장이었다. 지금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라면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할 것이다. 바로 케린버그와 레쎈 연합국이었다. 이제 그들을 견제한 유리한 카드가 수중에 들어왔으니 당분간 숨통을 트이게 되었다. 이제 이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호크를 되살려 최대한 로베니아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 내야만 했다. 호크를 치료하는 마법사가 진땀 흘리는 것을 바라본 레라드 백작은 서둘러야만 했다. 샹그릴라의 참사에 로베니아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황량하게 부는 바람만 남아있었다.

"소령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혹시 호크 장군님에게 변고라도 생긴 건 아닐까요?"

"닥쳐! 쓸데없는 입방정 떨지 말고 주변을 좀 더 수색해 봐!"

호크가 열어준 퇴로를 따라서 강을 건넜던 이지중대는 엄청난 폭발이 벌어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곳에 호크를 남겨두고 왔기에 사태가 진정되자 일부는 성자를 데리고 귀국하고 일부는 다시 샹그릴라로 되돌아와 호크의 무사여부를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되돌아 왔을 때 반겨준 것은 폐허가 된 샹그릴라였다. 온통 잿더미에 쓰러진 건물 잔해뿐 아무것도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이... 개자식들! 누가 로베니아의 개들이 아니랄까봐 이런 잔혹한 수를 쓰다니!"

루크 소령이 씹어뱉듯이 내던진 욕설은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수색을 위해 흩어졌던 대원들이 모두 모였지만 고개를 가로 젖는 이들 뿐이었다.

"소령님! 여길 보십시오!"

한 대원이 크게 소리를 지르자 우르르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대원 하나가 무릎을 꿇고 주변의 발자국과 바닥에 떨어진 액체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았다.

"퇫! 여기에 삼십 명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포션으로 치료하고 데리고 같습니다. 방향은 음, 저쪽입니다."

대원이 가리키는 곳은 로베니아쪽이었다.

"빌어먹을! 가자! 서둘러야해, 놈들을 따라잡자. 어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자 대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지중대의 지휘관인 루크소령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살아만 계십시오. 장군님! 저희들이 반드시 구해드리겠습니다.'

이지 중대원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말들이 달리는 속도가 엄청났다. 제라드 백작이 사라진 방향으로 이지중대원들이 바짝 뒤를 쫓아갔다.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얼굴을 가리는 망토를 입은 여자들이 앙뜨네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 같이 얼굴에 무서운 화장을 하고 손톱은 금속의 물체를 붙여 놓아서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들이었다.

앙뜨네트가 고개 짓을 하자 모두가 일어섰다. 유모에게 눈길을 주니 유모가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내보냈다. 잠시 후 실내에는 유모와 황제 그리고 여자들만 남았다.

"어서오세요, 여러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국의 여황제가 도대체 누구길래 경어를 써가면서 이들을 비밀리에 맞이하는 걸까 황제의 인사에 모두들 망토를 벗어 정체를 드러냈다. 놀랍게도 망토 안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황금으로 된 뱀모양의 장식이 아슬아슬하게 중요 신체 부위만 가리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그나마 몸의 일부를 가려주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민망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망토를 벗은 여인들을 보고 앙뜨네트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이제 고대의 비밀을 열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대의 소망을 위해, 주신 쥬(ju)의 그늘을 걷고 햇살아래 날아온 바람을 시간의 틈 속으로 흘러가게 하여 살아 숨 쉬게 하오리다."

알아듣기 힘든 말로 여왕에게 대답을 한 그녀들은 손을 교차하여 가슴위에 대고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신 미네르바의 딸이시여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은 고대의 문을 열 준비가 되었사옵니다."

충성을 선언하는 여자들의 정체는 바로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이었다. 어떻게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이 앙뜨네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지 도무지 이해가가지 않았다. 아크나무아의 무녀가 죽은 롯셀리니 추기경에게 맹세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어째서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또 앙뜨네트에게 여신 미네르보의 딸이라고 부르는지 혼란스러웠다. 로베니아 제국의 여황제 앙뜨네트가 그의 숙부인 몽셀공작의 바램과 달리 바람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아크나무아의 무녀들이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추자 앙뜨네트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숙부님 지아비를 죽음으로 내몰고 앉은 황제의 자리입니다. 숙부님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누가 그녀에게 저런 표정이 나올까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순간만은 고고하던 앙뜨네트는 사라지고 욕망에 불타는 여인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자의 음모가 모락모락 익어갈 때 제국의 위정자들은 급변하는 대륙의 정세에 적응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밤을 새우며 고심하고 있었다.

"몽셀 공작각하 이십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회의실이 부산스러워졌다. 다들 연이은 밤샘 회의로 까칠한 얼굴들이었지만 눈빛들만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동안 발렝황제의 탄압 때문에 오지에서 귀향 아닌 귀향 생활을 하던 귀족들이었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좋은 경치도 일 년이었다. 그들은 아직 젊었고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다시 빛이 찾아왔으니 하루 이틀이나 일주일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들은 일에 목말라 있었고 의욕에 불타올랐다. 수많은 의견과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고 갑을박론도 밤을 이어져 계속되었다. 일인 독주 체재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지만 많은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민주적인 의회 방식도 국가를 발전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몽셀공작은 그런 폐단과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을 중용했고 그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제국은 예전처럼 각 영지로 분할이 되었고 다시 권한을 위임받은 귀족들은 스스로 제국의 부활을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시민들도 초기에는 다소 당황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영주들이 예전과 달리 의욕적으로 일을 하자 우려했던 이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오지로 내몰려 귀향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 나름대로 많은 것을 배운 시간들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그 시간동안 성격이 더욱 비뚤어져 보상심리로 학정을 일삼으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몽셀공작이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런 기미만 보이면 몽셀공작은 제국의 마지막 남은 스카무슈기사단 불새 기사단을 보내 철저하게 응징했다. 특히나 남부의 옥토중 옥토인 르블랑 영지의 경우 본보기로 삼기 위해 학정과 폭정을 일삼던 영주와 영주일가를 도심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영주의 재산은 모두 영지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새로 부임한 젊은 영주는 당연히 선정을 베풀려 노력하였고 자신의 배를 불리기보다는 영지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스스로의 발전에 동기부여를 하는 동시에 수도에서 몽셀 공작은 한 손에는 검을 한 손에는 달콤한 빵을 든 채 제국의 재건에 힘을 썼다. 그 결과 제국의 발렝황제 때와 다른 발전이 눈부시기 이루어졌다. 다만 엄청난 손실을 가져온 병력만큼은 쉽게 복구가 어려웠다. 징병과 다산을 권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빨리 자라는 것도 아니었고 인구가 증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고대의 비밀 무기들을 모두 동원해서 국경선에 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력의 부족을 장비로 대신한 것이다. 전시적 효과는 커서 그 동안 감히 제국의 국경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간 큰 고양이들의 노림수를 단 번에 제거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불안한 것은 여전했다. 케린버그, 레센의 북부 연합군은 그야말로 두려운 존재였다. 군사력만 놓고 보면 로베니아는 북부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양쪽 다 큰 전쟁의 후유증을 달래기 위해 휴전 상태지만 양국가간에 쌓인 감정의 찌꺼기를 본다면 당장 내일 쳐들어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알버스크 왕국을 비롯한 3국 연합연대가 북부 연합군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있기에 북부 연합군도 무작정 로베니아를 노릴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폴렌시아 대륙은 일측즉발의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또 다시 언제라도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 위험요소를 안고 있었다. 회의의 개략적인 결과를 전해들은 몽셀 공작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제국의 안정되고 있다는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대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점점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 그나마 내정이 안정되고 있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 하겠군."

몽셀 공작이 한숨을 토해내며 탄식 아닌 탄식을 터뜨리자 새로이 중앙의 관리가 된 루베르백작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몽셀 공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공작각하! 사실 저희는 지금 대외적인 활동을 전혀 못하고 있다 보니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입니다."

루베르백작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의 근심이 담긴 우려의 목소리가 몽셀공작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예전에 로베니아제국이었다면 외교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국들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라서 능동적으로 대처를 해야만 했다. 비록 발렝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원하던 정치를 펼치게 되었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쇠락한 제국을 이끌고 이 험난한 격랑 속에서 로베니아호를 무사히 항구로 몰고 가야하는 선장 몽셀공작의 얼굴은 더 더욱 늙어보였다. 망망대해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 든 몽셀 공작은 주름진 얼굴을 두 손으로 쓸었다. 까칠한 피부의 느낌이 정신을 들게 만들었다. 충혈 된 두 눈이 회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귀족들에게 향했다. 하나하나 낯익은 얼굴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눈 속에서 꺼지지 않은 희망의 불길을 발견하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루베르 백작! 그리 말한 것을 보니 뭔가 생각해 둔 일이 있나 보구료."

몽셀공작이 자신의 의중을 쉽게 알아주자 황급히 머리를 숙인 루베르 백작이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주제넘게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을 받아 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백작의 의견은?"

매우 호기심어린 눈들이 루베르백작을 향했다.

"동맹입니다!"

"동맹?"

회의실 여기저기서 의문을 표시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란스러워진 회의실을 몽셀 공작이 손을 들어 가라앉혔다.

"말해보게!"

몽셀공작의 목소리가 변해서인지 조심스러워진 루베르 백작이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였다.

"알버스크 연맹과의 동맹을 말하는 겁니다."

루베르 백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의실 안은 노성이 터져 나왔다. 루베르 백작의 목을 치라는 욕설까지 튀어 나올 정도로 귀족들은 흥분했다. 세력이 쇠잔해 졌지만 그들에게는 대 제국 로베니아의 자존심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알버스크 연맹과의 동맹이란 말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자긍심마저 잃어버린다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절대로 루베르 백작의 말을 용납하지 않겠다며 거세게 반대 의견을 목소리 높여 외쳐댔다.

"조용! 조용히!"

몽셀 공작의 노성이 회의실 안으로 질타하자 금세 험악해진 분위기가 잠잠해 졌다.

"모두 조용히 하라! 루베르 백작도 이런 말을 하기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 기회는 주어야 할 것이다."

몽셀공작이 귀족들을 천천히 노려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자 더 이상 귀족들도 불평을 토해내지 못했다.

"루베르 백작 계속 말해보게!"

다행이 몽셀공작이 흥분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주자 루베르 백작의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인 다음 힘을 냈다.

"몽셀 공작 각하! 그리고 여러 귀족 여러분, 우리는 지금 건국 이래 최고의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허나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이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대륙을 차지 할 수 있습니다."

웅성 웅성!

동맹이라는 말에 흥분했던 귀족들은 루베르 백작이 뭘 잘 못 먹어서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며 비아냥 거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 한 몸 간수하기 힘든 로베니아가 대륙을 제패한다니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베르 백작은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지금 현재의 세력 구도입니다. 북부의 절반 이상은 케린버그 레쎈 연합국의 세력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알버스크 연맹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군소 왕국들이 알버스크 연맹으로 들어가고 있어서 계속해서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저희 로베니아 제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붉은 색으로 표시된 곳은 이전 저희 의 영토였지만 이제는 케린버그 레센연합국에게 빼앗긴 곳입니다."

귀족들은 지도에서 붉게 겹쳐서 칠해진 부분을 보며 분노했다. 이번 전쟁의 패배로 빼앗긴 영토였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저희는 아직 힘을 회복하는 중입니다. 이런 와중에 두 개의 적을 모두 상대하기란 벅찬 일이고 이런 사실을 우리는 부끄럽지만 인정해야만 합니다."

몇몇의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셀공작의 눈가도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치부를 들춰내는 것처럼 가슴을 할퀴었다. 귀족들의 굴욕보다 몽셀공작이 느끼는 분노는 더 대단한 것이었다. 성치 않은 치아들이 강하게 맞물리면서 으드득! 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년가까이 살아온 몽셀공작의 연륜으로도 작금의 현실은 그에게 험난했던 것이다. 깊은 호흡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털어낸 몽셀공작이 루베르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자네는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 하는가?"

지금까지의 모든 말은 다 사설에 불과했다. 바로 지금 이 대답을 위한 쓸데없는 말장난에 불과 했을지도 몰랐다. 모두의 시선이 루베르 백작에게 쏠렸다. 그런 그의 손이 천천히 지도위의 한 점을 가리켰다. 그 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숨 막히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몇몇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어 치우라고 고함을 쳤고 몇몇의 고위 귀족들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더미를 테이블 위로 집어 던졌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오로지 몽셀공작만이 루베르 백작이 가리킨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유는?"

가래 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에 몽셀공작도 루베르 백작의 의견이 상당히 충격이었던 걸로 보였다. 회의실의 대부분의 귀족들은 아마도 케린버그 레센 연합군과의 동맹을 생각했다. 굴욕적이고 치욕스럽지만 일단은 그들의 평화협정을 맺어 때를 기다리자고 루베르 백작이 의견을 제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한 두 번씩 해봤기에 동맹 제의는 당연하게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로베니아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국인 그들이라고 믿었지만 엉뚱하게도 루베르 백작은 알버스크 연맹을 택한 것이다. 비록 연맹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그 정도로 강한 세력은 아니었다. 지금 시점에서 왜 알버스크 연맹의 손을 잡자는 것인지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몽셀공작마저도 루베르 백작의 의중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자네 제국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이야기인가? 아예 같이 죽자고 이러는 건가?"

끝까지 참고 들어주던 몽셀공작마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루베르 백작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회의실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주먹이 깨져서 피가 흘러 내렸지만 루베르 백작은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분노와 울분이 섞인 눈으로 회의실 안에서 불평을 토해내던 귀족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왜? 왜?"

루베르 백작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다. 아니 온몸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슬픔과 분노가 회의실 안 전체를 흔들었다.

"안 된다는 겁니까? 왜, 자꾸만 고개를 숙이고 피하려고만 하죠? 비록 날개가 꺽였다고는 하지만 저희는 로베니아 제국입니다. 제국이라는 이름의 영광 까지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후일을 기약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후일을 기약하는 동안 그들도 후일을 준비합니다. 그래서는 끝이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알버스크와 어리석은 왕국들이 우리의 창과 방패가 되어 줄겁니다. 우리는 아니 로베니아는 다시 한 번 대륙을 제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그의 마음이 모두에게 전염되었는지 모두들 주먹을 쥔 손들이 부르르 떨렸다. 어린 귀족에서 듣는 호통에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제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루베르에게 다시 한 번 이 폴렌시아 대륙의 곳곳에 로베니아 제국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어찌하려하십니까? 꼬리를 말고 도망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알량한 목숨을 걸고 싸우시겠습니까!"

마지막 외침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로베니아의 심장을 관통했다. 늙은 몽셀공작이 벌떡 일어설 정도였다.

"루베르! 로베니아의 태양을 다시 뜨게 할 수 있는가?"

격동하는 몽셀공작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신 루베르,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로베니아를 다시 영광의 햇살아래 빛나게 하겠습니다."

피를 흘리는 루베르의 팔이 가슴을 두드렸다. 몽셀공작이 단상에서 내려와 루베르의 어깨를 두 손으로 힘껏 잡았다. 노쇠한 노인의 손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 어깨를 통해서 느껴졌다. 로베르 역시 신념에 불타는 눈길로 몽셀공작에게 화답했다.

"공작각하, 화급한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회의실을 지키던 기사가 급히 들어와 작은 두루마기를 건넸다. 두루마기를 펼쳐 읽어 내려가던 몽셀공작이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이 우리를 돕는 구나!"

두루마기를 건네받은 루베르 백작의 손이 떨렸다.

"자, 어떤가? 신의 손길이 우리를 돕고 있는 거 같지 않은가?"

"이제 저희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공작각하!"

루베르의 얼굴에 필승의 의지가 넘쳐나고 있었다. 루베르 백작의 손에서 떨어진 두루마기에는 단 한줄의 문구가 적혀있었다.

[알렉스 호크 신병 확보. 본국으로 귀환중!]

이제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선택뿐이었다. 지금 도착한 전문이 그들의 선택을 도와주었다.

"루베르 자네에게 제국의 주사위를 맡기지."

몽셀공작의 얼굴에는 더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제국이 다시 한 번 꿈을 꾸기 시작했다. 거대한 야망의 파도를 타기 시작한 로베니아호가 폴렌시아라는 대해를 향해 돛을 올렸다. 창문하나 없는 회의실 안에 바람이 불어 왔다가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