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 샹그릴라여, 영원히!
"신성도시 샹그릴라에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아니래, 다들 쉬쉬 하고 있지만 그런다고 소문이 없어지나, 이미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눈치던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어."
"자네도 그 소문을 믿는 건가?"
"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다 뭔가 있으니까 그런 소문도 나고 도시 전체가 뒤숭숭한 거 아니겠냐고. 게다가 말이야, 평소라면 구경하기 힘들다는 성기사들이 대신전 근처에 쫙 깔렸다고 필시 무슨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 게 틀림없어, 암! 내가 장담하지!"
여인숙 주변에 몰려든 여행자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로 주변은 시장터처럼 소란스러웠다.
신성해야 할 신성도시 샹그릴라가 이렇게 된 것은 한 달 전부터였다.
갑자기 참배객을 받지 않더니 어제부터는 대신전이 있는 중심부로 외인들을 일체 들이지 않고 있었다.
평생 한 번의 참배를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몰려든 참배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로지 쥬(ju)에 대한 신앙으로 목숨을 걸고 험난한 여정을 마친 신도들에게 참배를 못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주 잔인한 처사였다.
평생 한 번의 순례를 위해 목숨을 건 이들에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죽으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샹그릴라는 말을 타고 가는 거리로 반나절의 거리를 갖고 있는 방사선 형태의 신성도시 국가였다.
주변으로는 방문객들과 그들을 위한 시설들, 즉 숙소나 식당, 기념품등을 파는 지역주민들과 신도들이 교리를 교육 받는 교육기관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심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쥬(ju)의 대신전 샹그릴라가 있었다.
원래는 대신전의 이름이 샹그릴라였지만 대신전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하나의 도시를 이루게 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도시 전체를 그냥 샹그릴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샹그릴라는 그 어떤 정치적 색을 입지 않고 오로지 쥬(ju)를 따르는 종교적 집단이었고, 대륙의 그 어떤 일에도 편을 들지 않았다.
그들이 외부로 나서는 일은 악의 세력이 이 땅에 나타나 사람들을 현혹하거나 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생겼을 때 신의 사자로서 쥬의 말씀을 이 땅에 펼칠 때뿐이었다.
당연히 대륙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는 샹그릴라의 신관들이 희생과 봉사와 사랑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하였다.
대륙의 모든 생명체들은 신관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하여 폴렌시아 대륙의 구할 이상이 쥬의 말씀을 따르게 되었고 대륙인들 누구도 샹그릴라의 신관들을 경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륙에 그 어느 나라에서도 샹그릴라를 핍박하지 못했으며 샹그릴라 또한 그 힘을 앞세워 이득을 취하지 않고 오직 공명정대하며 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자로서 그 맡은 바 소임을 다해왔다.
그러다 보니 샹그릴라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은 그 자긍심이 대단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샹그릴라에서 일할 수 있고 모든 것은 착하게 산 보답이라고들 이야기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로 성검 베르트니 성기사단 단장이었다.
그의 믿음은 대단한 거였다.
그는 대륙에 괴이한 사고가 날 때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자신의 믿음 하나만 가지고 영적인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반백의 노인이 된 자신을 발견한 베르트니는 슬펐다.
자신의 신앙이 위대한 신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교단에 바쳐온 그는 더 이상 쥬의 말씀이 전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샹그릴라에 대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
"베르트니, 일을 어렵게 만들었어! 어쩌자고 저 아이를 데리고 왔나?"
대주교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했다.
얼마나 고심이 많았는지 며칠 사이 크게 늙어버린 듯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대주교를 바라보는 베르트니의 얼굴에서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칼에 저 아이의 피를 묻히려 하였지만, 신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소. 그리고 저 아이도 신의 거짓을 알았으니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소. 이제 네 번째 낙인이 나타날 테고 저 아이는 쥬의 성자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고 샹그릴라는 더욱 그 이름을 떨치게 될 테니 대주교는 너무 심려 마시오."
"후~ 그렇게 비꼬지 않아도 내 지옥에 갈 준비는 진즉부터 하고 있으니 그러지 말게나. 결국 세상의 종말은 멈출 수 없단 말인가?"
대주교의 한숨소리가 넓은 대전 안을 크게 울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시선을 거두지 않던 베르트니는 대신전 주변으로 물샐틈없이 경비를 강화하고 있는 성기사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이제 곧 각성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금세 전 대륙으로 소문이 퍼져 나갈 테고, 아직까지 모르고 있던 왕국들도 최후의 예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인가?"
"글쎄요, 그 선택권을 가진 사람을 믿어보는 수밖에요."
베르트니는 호크를 생각하며 잠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엉뚱함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것이다.
그런 변화를 눈치 챈 대주교가 놀라움을 나타냈다.
"자네가 누군가를 생각하며 웃는 모습을 보다니 나를 놀라게 하는군. 하지만 인간이란 욕심으로 뭉쳐진 존재일세. 과연 세상을 손에 쥔 인간이 모두의 평화를 위해 손에 쥔 힘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모험을 말일세."
회의적인 대주교의 말에 베르트니는 신관들보다 호크가 더 믿음이 강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신관들이 오히려 더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세린디아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이후로 베르트니의 신성력이 오히려 대주교를 앞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관점이 바뀐 베르트니에게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지만, 사물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 시점이었다.
베르트니는 이제 어느 정로 인간의 오욕에서 초월하는 단계에 있었다.
종교를 믿는 이에게 시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샹그릴라 안에서만 지내온 신관들에 비해 수없이 많은 생과사의 전쟁터와 악귀들과의 다툼을 통해서 희노애락을 겪은 베르트니가 오히려 성직자로서의 각성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제야 베르트니 몸 주위로 은은하게 서광이 비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대주교의 눈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래, 그랬구나! 내가 어리석었단 뜻이구나! 내가 옛날의 관습에 얽매여 있는 동안, 그는 진정 신의 뜻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어. 결국 신의 뜻을 따른 다는 것은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을 샹그릴라의 신관들은 너무 편안한 안락 속에 길들어져 시간을 헛되이 하고 있었으니.......'
머리를 흔드는 대주교의 몸 주위로 붉은 노을이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근심만큼이나 붉은색 노을이 대주교의 방 안을 물들였다.
주교의 한숨소리가 샹그릴라 전체에 퍼져나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운명시계가 멈추고 폴렌시아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 다음부터 고위신관들은 모두 목숨을 건 폐관기도에 들어갔다.
그들 나름대로 어떻게든 세상을 구해보겠다는 뜻이었지만. 미르네보의 저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실하게 움직였다.
이제 신의 종말론은 사람의 어깨에 올려져 그 운명을 시험당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가혹하기 그지없는 시련이었다.
그리고 그 운명이 샹그릴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대주교와 베르트니 단장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성자 스톤의 일로 마음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인류의 운명을 손에 쥔 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려고 하고 있었다.
* * *
"선두, 제자리! 잠시 휴식한다!"
루크 소령의 명령에 이지 중대가 이동을 멈추고 자리를 찾아 휴식에 들어갔다.
산세가 모스크 산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험했다.
모스크 산맥에서 훈련을 해온 케린버그 군대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왕국의 군대였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늘 상 산악행군을 해온 터라 이지 중대는 어려움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험한 산세는 사람들의 이목에 띠지 않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험한 산속으로는 사냥꾼들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편안하게 이동하던 호크 일행은 스베인 왕국을 벗어나면서 또다시 뒤에 꼬리가 붙기 시작한 걸 알았다.
그것도 꽤 여러 무리가 뒤를 따르고 있어서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손님들이 꽤나 성가신데? 어쩐다?"
뒤를 따르는 이들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는지 호크는 인상을 굳히고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와이즈 산맥 밑에서 만났던 이들은 샤이탄이라는 예상 밖의 존재였지만, 지금 뒤를 따르는 이들은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리하나 요새까지 쫓아왔었던 무리들의 기운과 똑같았다.
와이즈 산에서 호크 일행의 꼬리를 놓치고 무척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호크 일행이 스베인 왕국을 벗어나 다시 시야에 들어오자 금세 뒤쫓아온 모양이었다.
"장군님! 고얀 평원을 넘으면 바로 샹그릴라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쫓아오는 불청객들을 어떻게 하겠냐는 뜻이었다. 이곳에서 처리하고 떠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평원을 오르다 공격당하면 오히려 이쪽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물어보는 말이었다.
호크도 그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마에 주름을 잡아가며 고심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호크는 우선 상대를 살피기로 결심하고 인원을 나누었다.
호크와 10여 명만 남고 나머지는 고얀 평원을 향해 계속해서 행군했다.
상대를 먼저 알아보고 나서 대적할 것인지 피할 것인지 판단하기로 하고 인원을 나눈 호크는 고얀 평원으로 가는 길목인 엘로리안 강 나루터 부근에서 매복했다.
고얀 평원으로 가기 위해서 강을 건너려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기 전에는 이곳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므로 추적자들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였다.
숨을 죽이고 반나절을 기다리자 흙먼지를 피우며 꽤 많은 수의 무리가 나루터를 찾았다.
하나같이 범상하지 않은 기운을 내뿜는 자들이었다.
일면 보기에도 험상궂은 얼굴을 가진 이들이 쫓는 이유가 호크 일행에게 좋은 뜻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100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루크와 이지 중대원들을 합친 수가 오십 명이 채 안되었다.
게다가 놈들 중에는 마법사들도 언뜻 언뜻 보이는 것 같았고, 하나같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룬 경험 많은 자들이었다.
자신들이 처리하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호크는 직접 부딪히기보다 녀석들의 발을 묶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너무 늦어 배가 뜰 수 없게 되자 추적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루 야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되자 추적자들은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추적자의 입장이라 마음이 편해서일까?
그들은 주변경계에 너무 허술했다.
자신들을 강 건너로 보내줄 나루터의 배들 사이로 검은색 인영들이 붙어 있는 것을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조그만 단도가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모두들 입에 날카로운 단검을 물고 헤엄쳐 나룻배의 바닥에 조용히 들러붙었다.
일체의 말은 없었다.
오로지 눈빛과 수신호로만 움직였고, 그 들의 단검은 조용히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구멍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강을 건너기 전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다.
임무를 완수한 검은 인영들이 나루터를 빠져나와 지정된 장소로 모였다.
이윽고 목적을 이루었는지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강 양쪽 편에 밧줄을 이어 놓았는지 줄을 잡아당기며 강 건너편으로 조용히 넘어갔다.
"후~ 모두 수고했어. 멍청한 놈들 경계를 소홀히 하다니 당해도 싸다."
물기를 털어낸 호크가 아주 만족했는지 표정이 좋았다.
아무런 희생 없이 작전이 성공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손써놓은 몇몇 배들은 출발하지도 못할 판이었다.
뚫어놓은 구멍이 천천히 물이 새서 놈들이 강 한복판에 왔을 때, 가라앉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호크는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육지 위로 끌어올린 뒤, 먼저 출발한 루크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서 고얀 평원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추적자들은 어둠을 자리삼아 잠들었다.
밤새 쉬지 않고 달린 호크와 부하들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발걸음 뿐이 아니라 호크의 숨소리도 가빠졌다.
앞쪽에서 무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함성 소리가 급박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추적자들이 미리 매복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호크는 뛰었다.
호크가 속도를 내자 급격히 뒤로 처진 10명의 병사들보다 빨리 소리의 진원지에 도달한 호크는 크게 당황했다.
루크와 40여 명의 이지 중대원들이 작은 분지에 갇혀서 힘겹게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전황을 파악한 호크는 아군에게 화살을 퍼붓고 있는 적 쿼렐 사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큭!
짧은 비명이 터져 나오며 화살 공세가 줄어들자 이지 중대원들이 맞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지 중대원들은 적의 원거리 공격이 없어지자 스패로우를 적을 향해 응사했다.
엄청난 관통력을 자랑하는 스패로우의 위력 앞에 기습공격을 했던 적들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마법사들이 나서려고 했지만, 이지 중대원들의 숨 쉴 틈 없는 파상 공격에 고개조차 내밀지 못하고 분통만 터트리고 있었다.
공격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보다 못한 적 진영에서 덩치 큰 사내들이 바위 위로 올라와 스패로우를 방패로 막아내며 활로를 찾았다.
화살로부터 공격에서 자유로워지자 적들도 움직임도 기민해졌다.
루크와 이지 중대는 낮은 분지에 갇혀 있는 상태였고 적들은 바위들이 산의 능선처럼 이루어진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모든 면에서 적들이 유리했다.
지형의 우위에서 오는 싸움의 열세가 곧 드러났다.
능선 위로 올라온 마법사들이 화염구를 만들어 내자 루크를 비롯해서 이지 중대원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자신들이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분지였다.
저 많은 화염구 중 하나라도 분지 안에 떨어지면 통닭신세가 될 판이었다.
크아악!
커헉!
"누, 누구냐?"
마법사들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자 이들 무리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화들짝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이! 누가 우리 애들 건드려도 좋다고 했어?"
호크의 건들거리는 음성에 중년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건방진 놈! 궁수!"
제법 멋들어지게 외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는 지휘관으로 아주 큰 실수를 했다.
분지를 공격할 때 자신의 궁수들이 명령도 없이 공격을 중지한 것을 확인하지 않는 탓에 그는 궁수들이 모두 호크의 검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 작은 실수가 호크와 이지 중대원들에게는 반격이 시발점이 되었고, 또한 자신들의 목표가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의뢰인을 원망해야 했다.
호크에게 전력을 돌려야 했지만, 중년의 사내는 호크에게 단지 부하 몇 명을 보냈고 모든 전력을 루크와 이지 중대원에게 보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 사내는 큰 후회를 해야만 했다.
뒤쪽에서 엄청난 기운을 느낀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호크의 검 위로 솟아난 푸른색 오러를 본 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소... 소드 마스터! 빌어먹을 자식! 우리를 속이다니......."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단지 그곳을 지나는 일행들을 공격해서 타격만 입히면 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한 암살단의 마스터 였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보수가 좋아서 꺼림칙했던 것이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스베인 왕국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던 암살조직 하나가 그날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후우~ 후우~ 빌어먹을 방심했어! 이봐, 루크, 피해 상황 보고해!"
암살단을 혼자 쓸어버리다시피 한 호크가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전장을 돌아보았다.
다행이 부하들이 별로 다치지 않아서 내심 안도한 호크는 그제야 뒤따라온 부하들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헉! 헉! 죄, 죄송합니다. 장군님이 너무 빠르셔서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헉헉거리는 중대원들을 보며 호크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이봐! 루크 소령!"
"네, 네 장군님!"
갑자기 사무적인 태도로 돌변한 호크를 불안하게 쳐다본 루크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늦게 달려와 숨을 헐떡이는 열 명이 더했다.
"소령, 아무래도 우리 훈련량이 좀 부족한 거 같지 않아?"
호크의 말은 크지 않았지만, 전장을 수습하던 모든 중대원들의 귀에도 들어왔다.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 그럴 리가요? 지금도 좀 과하다 싶다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로이든 주변으로 왕립군사 아카데미와 디안 계곡의 훈련소를 옮긴 이후로 나형석 장군은 핸들러 중령을 필두로 체계적인 근대적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게다가 김재덕 과학부 장관이 만들어낸 스케줄에 의해 굉장히 힘겨운 훈련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부푼 꿈을 안고 지원 입대했던 젊은이들 중에 중도 포기하는 이들이 많아서 훈련량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훈련병뿐 아니라 기간병사들에게도 똑같이 정해져 엄청난 양의 행군을 정규훈련에서 소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반 사병에서 고위 장교들까지 일체의 열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훈련량이 부족하다는 말이 최고 결정권이 있는 사람 중에 하나의 입에서 나오자 다들 마른침을 삼키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겨우 그 정도를 뛰고 이렇게 지친 모습이라니. 쯧쯧쯧, 돌아가면 행군훈련의 거리를 대폭 늘여야 할까 봐."
호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심지어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호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루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응? 이봐, 자네 얼굴이 왜 그래? 뭐, 유령이라도 본 표정이군!"
"아, 아닙니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크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려 준 호크가 바위 위로 올라가 겁에 질린 중대원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면 아예 침묵의 행군을 매주마다 할까?"
쿵! 쿵! 쿵!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숨을 헐떡이던 열 명의 병사들은 얼굴이 아예 파랗게 질렸다.
거친 숨소리가 사라진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동료들이 보내는 원망의 시선을 가득 받고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한결 같은 외침이 맴돌고 있었다.
'왜 우리냐고?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야!'
하지만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괜히 한소리 했다가는 동료들의 스패로우에서 화살들이 자신들에게 발사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에이, 뭐 그런다고 느린 걸음이 빨라지지는 않겠지?"
어둠속에서 비추는 한줄기 빛처럼 마지막 호크의 말에 모든 이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떤 일에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는 일도 드문 일이었다.
호크는 그것이 놀라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모든 악몽은 없던 일이 되었다.
호크를 따라 나섰던 열 명의 병사들은 한동안 몸살로 고생을 해야만 했다.
그 짧은 시간동안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는 동료들이 그들의 짐을 기꺼이 들어준 것으로도 모두가 공감할 정도였다.
결국 그런 우연곡절 끝에 그들은 무사히 고얀 평원을 넘어섰다.
안개 낀 고얀 평원을 넘어 온 그들의 눈에 하얀색 건물이 원형의 도형을 그려 보이며 고대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신의 도시 샹그릴라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검은 그림자들이 어둠속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주, 주교님 크, 큰일이 났습니다."
"허어, 이 무슨 소란이오. 경건해야 할 신관이 경거망동이라니 누가 볼까 두렵소!"
주교의 꾸지람에 호들갑을 떨며 들어오던 나이든 신관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정색하여 몸을 추스르고 주교에게 다가왔다.
"그, 그가 왔습니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신관을 보며 주교는 가뜩이나 복잡한 심경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깊은 신앙심을 가진 그로서도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여야만 했다.
"지금 저하고 장난 하자는 겁니까? 그가 누굽니까? 쥬께서 강림이라도 하셨다는 말입니까?"
주교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신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케, 케린버그의 호크 경이 찾아왔습니다."
"......."
주교실은 순간 정적을 맞이했다.
아니,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주교를 보고 있는 신관은 온몸의 피가 바짝 타들어가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주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주교를 애타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신관은 고위 신관 중에 원로였다.
그 말은 그도 미르네보의 예언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고, 지금 폴렌시아와 샹그릴라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지금 샹그릴라에 알렉스 호크가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대한지 잘 알고 있기에 어서 빨리 주교가 나서주기를 기다렸지만, 그가 보기에 주교는 자신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답답했다.
"그, 그가 왔다는 게 정말이오?"
"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어서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허~ 허~"
그저 허허거리기만 하는 주교를 답답하다는 듯이 재촉하는 신관에게 주교는 손을 흔들었다.
"이게 정말 그분의 뜻이란 말인가?"
대주교는 이마를 짚고 머리를 흔들었다.
모든 일이 점점 그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노회한 몸을 힘겹게 일으키자 안절부절 하던 신관이 반색을 했다.
"만나보시렵니까?"
"예, 만나야지요. 샹그릴라의 존망이 그에게 달려 있는데 가서 만나봐야죠. 아니 진즉에 우리가 솔직하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찾아갔어야 옳았겠죠."
누가 봐도 한탄하는 듯한 소리를 하는 주교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늙은 신관은 눈가에 습해지는 것을 얼른 소매로 훔쳤다.
순간, 연로한 대주교의 고뇌를 느꼈기에 그랬다.
모르는 이들에게 그는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존경받는 샹그릴라의 주교였지만, 실상은 하루, 하루 피 말리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운명의 시계가 움직이고 나서부터 대주교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어떻게 보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을 견뎌온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모든 것들은 오늘 그에게 닥친 만남보다 더 크지는 않았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미르네보의 예언을 실행하는 자!
절대로 마주 대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쥬의 비밀을 아는 자!
그런 사람 앞에 서면 발가벗진 심정이 될까 봐 그랬을까?
아니었다.
평생을 바쳐온 자신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 이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도 그 허울 좋은 껍데기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 그것을 신경 쓰는 자신의 추태 또한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손님들이 머무는 건물에 들어서자 경비를 서던 성기사들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예의를 표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대주교는 인사를 받지 않고 허둥지둥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어떤 방문 앞에 선 대주교는 잠시 몸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교의 얼굴이 진정된 듯하자 노신관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조금 탁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주교는 그것이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발을 들여 놓았다.
* * *
"놈이 샹그릴라로 들어갔습니다."
"좋아! 계획대로야. 백인장들을 불러 모아라! 시간이 됐어!"
"알겠습니다."
보고한 자가 사라지자 방 안에 있던 자들이 테이블로 모였다.
"괜히 돈만 들였습니다. 녀석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 듯하니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스베인 왕국에서 알아주는 암살단이라더니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나 봅니다."
"후후후! 아니야. 놈들은 충분히 돈값어치를 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저희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수하들로 보이는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굵직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껄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놈들은 몇 차례 습격을 이겨내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안심하고 있을 테니 녀석들은 충분히 돈값을 했단 말이다."
친절한 설명에 여기저기서 '아!' 하는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놈들은 오늘밤 충분히 방심하고 있을 것이다. 군인에게 방심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놈들에게 알려주어야지.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소드 마스터라는 것이 그냥 얻어진 이름이 아니니까, 놈은 내가 맡을 터이니 함부로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해라!"
사내의 진중한 명령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국 최고의 스카라무슈인 백작님에게 상대가 되겠사옵니까?"
"쉿!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입이 가벼운 수하의 말에 사내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절대로 우리의 흔적을 여기에 남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샹그릴라를 파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해! 적어도 지금은 말이야, 제국이 다시 힘을 찾게 될 때까지는 침묵해야만 한다. 알겠느냐?"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는 수하들을 보며 사내는 숙소의 커튼을 올리며 날이 저무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녁놀에 얼굴에 스며든 사내는 로베니아 제국의 새로운 실세 제라드 백작이었다.
고집스런 그의 성격을 말해주듯 그의 두터운 입술이 꽉 다물어진 채 저녁놀이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이제 사라지게 될 도시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담아 두려고 하는 사람 같았다.
창문 아래 여인숙 주변으로 갑자기 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몰려 들었다.
사위는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문을 닫는 가게들이 늘어가면서 도시는 어둠속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 * *
흔들리는 촛불 아래에 세 사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아 서로 대화를 가진 것이 잘되지 않았나 보다.
세 사람 모두 얼굴이 좋지 않았다.
대화란 타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세 사람의 얼굴을 보니 조금도 양보하거나, 합의하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지부진한 대화는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툭, 하고 끊어져버릴 것 같이 위태로워보였다.
"후!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호크가 먼저 입을 열자 남은 두 사람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지리한 대화의 연속에 지쳐버린 것이다.
"열 번이고 백번이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오! 그렇게 억지를 부린다고 들어줄 것 같았으면 이렇게 힘을 빼는 짓은 하지 않았을 거요? 모르겠소?"
대주교의 신경질이 듬뿍 담긴 말에도 호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더한 말도 참을 수 있었다.
아니, 대주교의 발바닥을 핥으라고 해도 할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캐더린과 자신의 분신이 아기의 생명이 달려 있기에 호크는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그럴 작정으로 여기에 왔던 것이다.
"그렇게 빡빡하게 굴지 말고 우리 좀 둥글게 살자고요.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네?"
거의 애걸복걸하는 형태가 되었지만, 호크가 무척이나 급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중년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도대체 자네가 억지 부리는 이유를 모르겠네, 왜 이러는 건가?"
중년인은 베르트니 성기사단장이었다.
이번에는 그도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적어도 이곳은 샹그릴라였고 베르트니와 대주교는 이곳에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마치 자신의 안방처럼 행동하는 호크의 태도에 어지간한 주교도 얼굴을 찡그렸지만, 베르트니 또한 화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미리 언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방문해서는 생떼를 쓰고 있으니 머스탱 공작과의 우정을 봐서 참고는 있지만, 그것도 점점 한계에 다가가고 있었다.
호크가 들이닥쳐서 한 요구는 샹그릴라의 성자 스톤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면서 이런 요구를 하는 호크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참다못한 베르트니가 성질을 냈다. 성기사라고 해도 그 성질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왜 이러는지 먼저 이유를 말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리자 호크도 더 이상 고집만 피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진짜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세상에, 망자의 저주라니! 그런 끔찍한 사술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오~ 쥬여, 벌하소서, 벌하소서. 간악한 마음을 벌하소서!"
대주교가 황급히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하자 베르트니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만 좀 해요! 그딴 것 아무래도 소용없으니까!"
베르트니가 버럭 소리 지르자 대주교가 찔금 하며 기도를 멈추었다.
"자네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지만, 우리도 우리 사정이란 것이 있네, 미안하지만 도울 수가 없네. 미안하네!"
냉정하게 거절하는 베르트니의 말에 호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가증스럽고 위선에 가득 찬 둘을 보며 호크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누가 보면 정말 눈을 뒤집어 까고 볼 일이었지만, 호크는 상관없었다.
캐더린과 아기를 살릴 수 있다면 그까짓 무릎이야 골백번도 더 굽히고 몇 천 번이라도 허리를 굽힐 수 있었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깨문 호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이렇게 빕니다. 제발!"
호크가 그럴수록 대주교와 베르트니의 입장만 난처해졌다.
그들은 절대로 성직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만 하고 있었기에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구하고 신성을 지켜야 할 자신들이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본인들만 알겠지만, 자신들도 이 샹그릴라를 지켜야만 했다.
스톤이 죽으면 미르네보의 예언이 완성되기에 절대로 내놓을 수 없었다.
이제 각성하여 샹그릴라의 성자로 추앙받는 그를 어떻게든 보호해야만 했다.
차라리 그가 각성하기 전에 죽였다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미 각성한 이상 어떻게든 마지막 예언만은 막아야 했다.
스톤이 각성했다는 말은 나머지 세 가지 예언이 실현되고 낙인들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뜻이었기에, 이제 폴렌시아의 마지막 희망은 스톤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렵게 찾아온 참배객들마저 돌려보내며 샹그릴라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지금 스톤을 달라고 하는 것은 쥬를 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무릎 끓고 있는 호크를 보며 난처해진 두 사람은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개의 낙인을 당신들에게 줄게요!"
애써 외면하며 방밖으로 빠져 나가려던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호크를 돌아보았다.
"지, 지금 뭐라고 했소? 무엇을 준다고?"
"그 망할, 미르네보의 네 가지 낙인 중 세 개를 준다고 했어요. 귀까지 먹은 거예요?"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호크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용을 아는 사람이 들으면 그야말로 세상이 발칵 뒤집힐 내용이었다.
대주교는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한 듯이 두리번거렸다.
이마에 땀을 훔치던 주교는 계속해서 기도문을 외우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세상에 당신이었다니? 예언을 완성시키는 사람이 당신이었어?"
대주교의 놀람은 정말 대단했다. 호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손이 무척이나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조금씩 떨리고 있는 충격이 온 몸으로 전달되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나 점차 이성을 찾은 대주교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샹그릴라로서는 기회였다.
위기 다음에 기회가 온다고 세 개의 낙인을 확보하고 호크가 스톤을 데리고 샹그릴라 밖으로 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성자 스톤은 네 번째 예언에 따라서 죽음을 맞이하며 낙인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마저 확보한다면 샹그릴라는 폴렌시아를 구하고 쥬의 마지막 힘을 얻어 대륙에 절대적인 종교로서 영원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대주교는 베르트니를 침착하게 불렀다.
주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베르트니는 주교의 속내를 알았고 부끄럽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깊은 한숨을 쉰 베르트니가 마지못해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베르트니가 쉽게 허락하자 대주교는 뛸 듯이 기뻤다.
그의 지위와 체면이 아니었다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소, 알렉스 호크 경. 그대의 이름과 명예를 믿고 당신 요구를 받아들이겠소."
짐짓 진중하게 말하는 대주교를 보며 호크는 어이가 없는지 비릿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대주교도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호크가 캐더린과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듯이 대주교 또한 샹그릴라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결심이 서자 대주교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일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호크를 데리고 금역으로 향했다.
대주교의 발걸음은 경쾌했고 호크와 베르트니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 대신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다른 시대의 다른 문명으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등 뒤에 메고 있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가볍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고대의 유물이 분명했다.
건강한 체격의 성기사들이 대주교와 베르트니 단장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대주교는 성큼 걸어 들어가 입구를 지키듯 서 있는 짐승 모양의 석상이 벌린 입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석상이 빛을 내는가 싶더니 건물의 석벽이 돌 긁는 소리를 내며 좌우로 벌어졌다.
벽 자체가 문이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졸고 있었던지 어린 신관 셋이 놀란 토끼 마냥 눈을 크게 벌떡 일어섰다.
대주교를 보고 당황한 꼬마신관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지만, 대주교는 평소와 달리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어보이며 꼬마 신관들에게 문을 열게 했다.
꼬마 신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얼른 작은 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구멍의 크기로 보아 어른들은 절대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크기였다.
꼬마 신관들이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또 다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벽이 먼지를 피우며 위로 올라갔다.
"으음!"
벽이 올라가고 실내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호크가 그토록 원하던 샹그릴라의 성자 스톤이 하얀색의 원반형 돌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얼핏 보면 죽은 사람 같았지만, 호크의 예민한 감각은 스톤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얀 돌침대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돌침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기운을 느낀 호크는 돌침대가 성자 스톤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파리한 스톤의 얼굴을 보니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답시고 위생병 완장을 차고 그 짧은 발로 전장을 돌아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전쟁이 싫다던 아이의 얼굴을 호크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스톤이 돌침대를 떠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테지만 호크는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키는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악마와 영혼을 파는 계약을 하는 심정이 아마도 지금 자신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라고 호크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려는가? 침대를 벗어나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을 텐데. 잉글햄까지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하네."
베르트니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느낀 것이 호크의 착각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호크도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품에서 황금빛 팔찌를 두 개를 꺼낸 호크는 그것을 스톤의 양 손목에 채웠다.
스톤의 양 손목에 채워진 황금팔찌는 주인을 만난 양 웅웅 소리를 내며 빛을 내뿜었다.
"사이클론님의 작품이겠군!"
호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클론이 호크가 떠나기 직전에 챙겨준 아이템이었다.
한 달 정도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여유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제 이들에게 미르네보의 낙인을 건네주면 거래는 성사되는 것이고, 서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었다.
마음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한 번만 두 눈 질끈 감기로 마음먹었기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따라 들어온 성기사들이 스톤을 옮기는 일을 도왔다.
대신전을 빠져 나오자 제법 많은 성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호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조심성이 많은 대주교가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호크의 변심을 걱정하여 베르트니 단장도 모르게 나름대로 준비를 한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을 어떻게 보고......."
호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커다란 불길이 하늘높이 치솟으며 요란한 함성과 함께 곳곳에서 무기들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게 무슨 소란인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자 대주교는 공항상태에 빠져 버렸다.
신성도시 샹그릴라에서 무력행사라니 당황하기는 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대처하지 못하고 다들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대주교는 기도할 때 빼고 이런 상황에서는 하등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검 베르트니 단장이 어느새 검을 꺼내어 높이 들었다.
"쥬의 이름을 더럽히는 악마의 무리를 처단하라!"
성검 베르트니의 외침에 어느새 성기사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성스런 빛을 뿜어댔다.
화염이 피어오르는 곳으로 성기사들은 용맹하게 달려갔다.
"자, 장군님!"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루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으로 보아 밖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호크는 금세 눈치 챘다.
"무슨 일이야?"
"후우~ 장군님, 미리 대기 하고 있던 놈들인가 봅니다.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하나같이 정규군사훈련을 받은 놈들입니다. 게다가 정문을 뚫고 있는 놈들은 검을 쓰는 폼이 기사들이 분명합니다."
"불길은 어떻게 된 건데?"
퉁명스런 호크의 질문에 루크는 이마에 땀을 닦아내며 재빠르게 보고했다.
"마법사들도 끼어 있습니다. 그것도 허접한 마법사들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대신전을 방어하는 외곽성벽이 날아갔습니다."
루크의 보고를 마저 들은 호크의 표정이 이상야릇해졌다.
밖에서는 피를 부르는 전투가 치열한데 호크는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불길이 치솟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딱!
생각이 정리됐는지 손가락을 튕긴 호크가 루크에게 단호한 어조로 명령했다.
"루크! 애들 집합시켜 조용히 이곳을 빠져 나간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루크 역시 간단명료하게 대답한 후, 통신기를 들었다.
성기사들이 전투를 위해 빠져나가서 중대원들은 금세 호크 주위로 몰려들었다.
"장군님! 밖의 사정이 더욱 나빠졌나 봅니다.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소대장 하나가 얼굴에 검은 숯 검뎅이를 묻히고 나타나 숨을 헐떡거렸다.
아마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다가 온 듯했다.
"수고했다. 저놈들의 목적이 뭐든지 간에 우리하고 상관없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뭐 영웅적인 싸움이나 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니 샹그릴라를 빠르게 벗어나 리하나 요새로 돌아간다. 루크, 길을 터라! 내가 지시한 대로 탈출로는 준비해 놨겠지?"
"네, 장군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힘 잘 쓰는 놈 둘에게 꼬마를 챙기라고 해라! 저 녀석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 거니까!"
이지 중대원 중 덩치가 큰 병사 둘이 스톤을 교대로 업었다.
등 뒤에서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꺼내든 호크가 맨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함성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이봐 호크 경!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나?"
"물건이 물건이라서 지금 당신이 그걸 지킬 만한 상태가 아닌 거 같은데,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찾아 오슈! 그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화장실 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지만, 대주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약속을 뒤집는 호크를 보며 기가 막히는지 몸을 덜덜 떨었다.
성기사들을 애타게 불러 보았지만, 모두들 위대한 성검 베르트니 단장을 따라서 나가고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리 보아둔 길로 중대원들이 사라지자 호크도 담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담을 넘기 전에 호크는 샹그릴라 대신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마지막 모습을 담아두려는 사람처럼 아주 경건해 보였다.
"안녕, 샹그릴라! 영원히 신의 은총을 받길 바래!"
말을 끝낸 호크의 몸은 담 밖으로 사라졌고 길길이 날뛰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대주교의 비명소리만 간간히 들려왔다.
그날 밤 겉모습을 위장한 로베니아 제국군들이 신성도시 샹그릴라를 처참하게 유린했다.
그들은 무슨 원한이 있는지 이 땅에 샹그릴라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이 철저하게 파괴했다.
제아무리 성검 베르트니라고 하더라도 5만이 넘는 군대를 어쩌지는 못했다.
무사히 샹그릴라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던 호크 일행도 뜻하지 않은 방해꾼들에게 발목을 잡히고 빠져나가지 못했다.
호크의 눈이 이지 중대의 앞길을 막아선 복면인들을 보며 심하게 찡그렸다.
"젠장! 어째 뭐하나 쉬운 일이 없냐?"
호크의 넋두리가 매캐한 연기를 타고 주변을 휘감아 돌았다.
앞을 가로막은 적들이 검을 달빛에 노출시키자 호크의 숨소리도 잦아들었다.
"중대! 돌격 앞으로!"
호크가 튀어나감과 동시에 이지 중대 병사들이 거센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적들도 기선을 뺏길세라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고 거리를 좁힌 두 무리는 중앙에서 불꽃을 튀기며 충돌했다.
그 속에서 상처 입은 맹수마냥 울음소리를 내며 검을 휘두르는 호크는 마귀나 다름없었다.
적은 잔인하게 짓밟았고 아군은 철저하게 보호했다.
배가 넘는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소드 마스터가 발휘하는 능력은 상상을 넘어섰다.
몇몇은 그 현람함에 정신을 빼앗겨 등 뒤에서 검을 맞고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스카라무슈! 스카라무슈!"
지휘관인듯 한 자가 다급히 소리치자 어디선가 날렵한 이들이 나타나 호크의 움직임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카카캉!
처음으로 호크의 검이 상대의 검에 막혀 공격을 펼치지 못하고 무위로 돌아가는 일이 생겼다.
똑같은 거리만큼 물러섰지만, 낭패한 얼굴이 된 쪽은 호크를 기습한 자였다.
손목을 다쳤는지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손목을 매만지는 모양새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호크는 다른 의미에서 화가 났다.
"스카라무슈? 그렇다면 네놈들은 로베니아 제국이란 말이야?"
겨우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차린 호크는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호크의 말을 들은 중대원들도 흥분했다.
로베니아라는 말을 들으면 평소보다 몇 배의 실력을 발휘하는 케린버그 병사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지 중대원들의 몸놀림이 갑자기 달라지자 비명소리가 많아지는 것은 로베니아 쪽이었다.
"이것들이 이제는 여기까지 쫓아와서 행패를 부려! 오냐, 네놈들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오늘 한번 죽어봐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호크의 등에서 하나 남았던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꺼내졌다.
두 개의 쌍검이 호크의 얼굴빛을 담아내자 일순간 싸움터가 조용해졌다.
그만큼 호크의 기세가 엄청났던 것이다.
양쪽 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위해 다시금 검이 움직였다.
이들의 목적이 샹그릴라고 생각했던 호크는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호크 자신을 말이다.
스카라무슈라고 불리는 검수들이 점점 불어나 호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동안 뒤를 추적하거나 공격하던 놈들은 이놈들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모든 일이 이 녀석들이 꾸민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호크가 이를 악물었다.
호크도 손바닥을 적시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아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싸움 중에서 가장 지루한 싸움일 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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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