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43화 (43/55)

Chapter 43. 제국의 태양이 지다!

"발사!"

타다당탕!

몬스터의 힘줄로 만든 탄탄한 현들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화살과 바위며 불붙은 기름덩어리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그 뒤로 용맹한 병사들이 커다란 사다리를 들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공성탑 위에서는 마법사들의 마법이 성벽에서 힘겹게 방어하는 병사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이제 끝장입니다. 루이 남작님!"

"빌어먹을! 서쪽 성벽으로 철수해라!"

"그쪽도 이미 무너졌습니다. 남작님!"

검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반역도들에게 성을 내준다는 것이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총사대는 들어라! 더 이상 헛된 죽음을 하지 말고 투항하라! 공작님께서 투항하는 이들에게는 선처를 베푸실 것이다."

"닥쳐라! 이 반역자야!"

성벽 위에 올라와 마나를 가득 담은 음성을 울리던 제라드 백작에게 루이 남작이 분노를 터뜨렸다.

"오~ 이게 누구신가?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제국의 검 로이 남작 아니신가?"

"이 더러운 반역도! 신들이 용서하지 않을 실거다!"

루이 남작의 경멸에 찬 음성도 제라드 백작의 비웃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반역도라, 뭐! 그것도 좋겠지. 역사가 나중에 어떻게 평가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되어주지! 하지만 너희들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렸다. 어서 검을 버리고 투항해!"

갑자기 기색을 바꾼 제라드 백작의 살벌한 기운에 총사대 기사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루이 남작이 검에 마나를 끌어올리며 막아서자 기사들을 압박하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후후! 역시나 제국 제일의 스카라무슈라는 칭찬이 거짓이 아니었군."

"닥쳐라! 총사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제국의 황제 폐하이시다."

총사대를 살펴본 제라드 백작이 입맛을 다셨다.

"어쩔수 없군! 나도 이러기는 싫지만서도... 모두 처형해라!"

제라드 백작의 검이 앞으로 향하자 성벽을 올라온 병사들과 백작의 기사들이 투구 가리래를 내리고 총사대에게 달려갔다.

"발렝 황제 폐하 만세!"

이구동성으로 만세를 외친 총사대들이 죽음으로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기사도가 사라져가는 요즘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숭고한 기사도 정신이 마지막으로 불타올랐다.

마차가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불에 탄 성문으로 들어섰다.

마차가 멈춰 서자 제라드 백작이 말머리를 돌려 마차에 다가왔다.

마차의 창문 커튼이 열리며 몽셀 공작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떻게 되었나?"

"이제 이 성 안에 발렝 황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피를 뒤집어 쓴 제라드 백작의 확언에 몽셀 공작도 만족스러워 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바닥에 있던 천이 날아오르자 총사대와 근위대 기사들의 시신들이 드러났다.

그것을 본 몽셀 공작의 눈이 파리하게 떨려왔다.

"빌어먹을! 내 손으로 내 나라 병사들을 죽이다니 아무리 명분이 있다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야."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그래, 이제 시작인데 벌써 나약한 소리를 해서는 안 되겠지. 그럼 수고하게!"

몽셀 공작의 지팡이가 마차의 바닥을 두드리자 마차는 조심스럽게 성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서서 뭣들하고 있는 게야? 서둘러라! 곧 황후마마께서 오실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치워라! 핏자국은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제라드 백작의 말에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전투의 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룻밤사이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고 새로운 이가 들어선 황제의 궁은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흔적을 금세 지워갔다.

수도의 제국민들은 내일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될 것이지만, 지금은 고요함속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저녁놀이 붉게 물들이는 대지 위를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비록 그 몰골이 좋지 않았지만, 예사롭지 않은 기운들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후~ 이곳을 떠날 때 15만의 대군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겨우 열이라니, 기가 막히는 군!"

"황제폐하, 송구스럽사옵니다."

면목 없어 고개를 숙이는 근위기사를 보고 발렝 황제는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 성을 나타내는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가워야 할 집이요 돌아갈 고향이건만, 자신의 성을 바라보는 발렝 황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휴~ 집에 왔는데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줄은 몰랐어. 왠지 남의 집처럼 느껴진다."

"폐하! 그 어인 말씀이 이십니까? 행여 약한 마음 가지지 마시고 심신을 굳건히 하셔야 합니다."

"굳건히 해야지! 안타깝게 죽어간 병사들을 위해서라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해!"

발렝 황제의 눈에 힘이 들어가자 말들도 기운을 얻었는지 말발굽소리에 힘이 실렸다.

비록 초라한 귀향이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당당했다.

자신들이 성문에 도착했을 때, 당황하는 경비병들의 태도에 조금은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성 안에서 무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자신이 부인의 의해서.......

"이... 이 천한 것이! 감히 어디에 앉은 것이냐? 그 자리는 위대한 루이가문의 황족들만 앉을 수 있는 대 로베니아 제국의 황상이다.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손가락질 하는 것도 모자라 고래고래 욕설을 퍼 붓는 발렝 황제의 말에도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는 여인이 발렝 황제의 옥좌에 당당히 앉아 있었다.

"앙뜨네트! 입에 자물쇠라도 채웠나? 대답하지 못해!"

결국 화가 폭발한 발렝 황제의 노성에 그녀의 얼굴이 발렝 황제를 향했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었죠? 그때 당신은 멈췄어야 했어요."

발렝 황제는 십 수 년을 같이 살아온 자신의 아내가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졌다.

황제의 단상 위에서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앙뜨네트의 얼굴은 더 이상 그가 알던 황후가 아니었다.

아내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에 발렝 황제는 수치심을 느꼈다.

"난 제국의 황제다!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설사 신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위엄을 보이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랜드 홀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과 근위병들 하다못해 시종 마저 모두가 낯설었다.

이미 이곳은 그녀의 성이 되어버린 후였다.

그제야 그녀 곁에 서있는 몽셀 공작의 주름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젠장!'

황제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몽셀 공작이 만면에 미소를 띠자 황제는 배알이 뒤틀렸다.

"그래, 그래서 남편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겠다! 감히 반역을 꾀하겠다는 거냐?"

"반역이라니, 그 무슨 끔찍한 말씀이십니까? 그저 더 이상 통치가 불가능해지신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황후께서 로베니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는 거라고 생각하여 주십시오."

발렝 황제의 눈에서 마치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손이라도 갖다 대면 순식간에 불에 타버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누... 가... 누... 구를 대신한다고? 네 녀석의 그 가래 끓는 목소리는 정말 듣기에 역겹군! 근위 기사들은 뭘 하는 거냐? 저 반역도들을 체포하라!"

발렝 황제의 손이 몽셀 공작과 앙뜨네트 황후를 향했지만,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발렝 황제는 그 순간 실내에 찬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느꼈고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는 것도 알았다.

처음부터 함께 했던 수행기사들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아무런 감정 없이 지켜보던 발렝 황제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푸하하하하! 정말 우습게 되었어.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것뿐이다. 선황께서 그토록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어."

잠시 말을 쉰 발렝 황제가 앙뜨네트를 쳐다보고 냉소했다.

"후후후! 잘나신 마누라께서 그 자리에 앉아보시니 어떠신가? 엉덩이에 딱 들어맞나?"

"그만해요! 제발 그만해요!"

앙뜨네트카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소리쳤지만, 발렝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였다.

욕심을 버린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깟 알량한 목숨 따위야 황제로서 사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황제가 아닌 자신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황제가 아닌 삶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았다.

그러니 그의 입이 분위기를 살펴 조용하리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미친개처럼 날뛰며 욕설을 퍼부었고 점점 그 수위가 높아져 사람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었다.

결국 몽셀 공작의 손이 올라가자 근위기사들이 검을 꺼내들고 황제에게 접근했다.

황제의 기사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황제를 보호하려 했지만, 수적 열세가 너무 심했다.

몽셀 공작이 목숨을 보전하려면 검을 버리고 투항하라고 했지만, 이미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한 이들이었다.

앙뜨네트 황후의 비명소리를 시작으로 황제의 성에서 황제를 죽이기 위해 싸움이 벌어졌다.

지키려는 자의 의지와 죽이려는 자의 의지는 달랐고 덕분에 싸움은 처참하고 잔인했으며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렸다.

황제의 기사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하나둘 쓰러졌고 제라드 백작의 검이 황제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크흑! 제... 제라드 백작! 쿨럭! 선황께서 너 같은 놈과 함께 전장을 누비던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다니 오늘을 일을 아셨다면 그것을 부끄러워 하셨을 거다!"

가슴에 깊숙이 틀어박힌 제라드 백작의 검을 움켜진 발렝 황제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만큼 지독한 독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제라드 백작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측은한 표정이 되어 검을 황제의 가슴에서 뽑아냈다.

"편히 잠드소서! 한때 모시던 주인이시여, 선황께서는 아마도 당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실 겁니다."

황제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지자 앙뜨네트 황후가 뛰어내려왔다.

떨리는 손으로 황제를 끌어안은 앙뜨테트는 바람 빠진 가죽주머니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앙, 앙뜨네트... 나의... 아내여... 너도 조심해야 할 거야. 언젠가의 너의 등에 그 잘난 숙부가 검을 꽂을 테니, 항상 등 뒤를... 조, 조심해!"

피 묻은 손으로 황후의 얼굴을 매만지던 황제의 손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

황제를 부르는 앙뜨네트의 비명소리만이 피로 얼룩진 그랜드 홀을 울렸다.

15대가 이어온 루이 드 가문이 발렝 황제를 마지막으로 제국의 황제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발렌시아 대륙을 지배하던 한 축이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 * *

"얼굴이 말이 아니십니다. 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쉬다니요. 휴식은 저에게 사치스런 호사일 뿐입니다."

책상위에 쌓인 서류더미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던 머스탱 공작이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공작님이 서류와 씨름 하는 모습이 영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하하하!"

"죽을 맛입니다. 검을 들고 싸우는 거야 얼마든지 하겠지만, 이 건 정말 고문입니다. 고문!"

서류를 집어 던지며 의자에 몸을 던지는 공작을 보며 사이클론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엄살도 심하십니다."

"그나저나 웬일이십니까?"

사이클론이 머스탱 공작의 옆으로 다가가 웃옷을 들췄다.

"상처 좀 보려고 왔습니다. 어디 보자!"

머스탱 공작의 상처를 살피던 사이클론이 파란색 유리병을 꺼내서 어깨의 상처에 붓자 불에 달군 쇠를 물에 넣었을 때 나는 소리가 나며 하얀 연기가 나왔다.

"음~"

"아프십니까?"

머스탱 공작이 인상을 찌푸리자 사이클론이 놀라서 손을 멈추었다.

그러나 머스탱 공작이 손을 들어 괜찮다고 표시하자 사이클론은 병에 남은 포션을 남김없이 부었다.

포션 치료 때문인지 방 안 공기가 뜨거워졌다.

"후~ 뭔지 몰라도 꽤나 독하네요. 제가 잘 모르겠지만 꽤나 비싼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마구 쓰셔도 되나요?"

눈에 띄게 흐려진 상처를 보며 옷을 추스린 머스탱 공작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문지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리 귀하고 비싸다고 해도 머스탱 공작님만큼 귀하기나 하겠습니까?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지요."

"후후후! 역시나 멋진 분이십니다."

부관이 차를 내오자 두 사람은 찻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화두는 다름이 아니라 머스탱 공작이 놓친 로베니아 제국의 발렝 황제 이야기였다.

당시 황제의 근위대와 마법사들의 반격이 워낙에 거세서 머스탱 공작의 부대와 기사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공작마저 큰 부상을 당하고도 발렝 황제를 놓쳤기에 머스탱 공작의 분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표정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사이클론도 머스탱 공작의 표정을 읽었는지 애석함을 드러냈다.

"꽤나 서운하신가 봅니다."

"후~ 서운한 정도가 아닙니다. 제 손으로 제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게까지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이클론의 위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지 머스탱 공작의 얼굴은 침울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머스탱 공작은 어깨의 상처를 자신도 모르게 매만지며 침음성을 흘렸다.

눈앞에서 그때의 치열한 전투가 떠올랐다.

황제의 마법사들이 날리는 공격마법 속에 속절없이 쓰러지는 아군 병사들과 죽음을 불사하고 덤벼드는 악귀 같던 근위병들의 지독한 공격에 머스탱 공작은 몸서리쳤다.

불에 몸을 내던지는 불나방같이 머스탱 공작에게 몸을 던진 황제의 근위 기사들의 악착같은 공격에 그의 부관 뉴튼 기사단장도 크게 부상을 당하고 지금 몸져누워 있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며 무모한 공격이었다고 스스로 결론지었다.

그때 공작의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이 잔뜩 상기된 머스탱 공작의 행정 부관이 들이닥쳤다.

"이런 자네는 지금 내가 손님과 계시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도대체 이런 무례는 어디서 배운 건가?"

눈썹에 쌍심지를 돋운 공작의 호통에도 부관은 개의치 않은 듯이 공작에게 다가왔다.

"크, 큰일이 터졌습니다."

부관의 말에 혹여 제국이 다시 침공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싶어 머스탱 공작과 사이클론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러나 부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 하자 부관은 두루마기하나를 서둘러 머스탱 공작에게 건넸다.

"두 분 모두 가셔야 합니다. 이미 연락을 받은 장관님들과 국왕전하께서 도착해 계실지도 모릅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방안을 서둘러 빠져 나가자 테이블 위에는 주인 잃은 찻잔 두 개만이 방 안을 지켰다.

곧 전 대륙에 로베니아 제국의 변고가 전해졌다.

케린버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과 전쟁 중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

이것은 전 대륙에 일파만파 퍼져나가며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대륙의 모든 이들이 너무나 놀라운 이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피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케린버그와 레센 제국의 연합은 그들을 공항상태로 몰아가기 충분했다.

자고 일어나니 대륙의 판세가 변해버린 것이었다.

이제 제국은 또 하나의 패자를 받아 들여야만 했다.

케린버그와 레센의 연합군의 세력은 대륙의 북부지역뿐 아니라 샹그릴라를 중심으로 대륙의 중부지역인 리하나 강 이남지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이미 그 세력권에 들어가는 군소 왕국들은 연합국에 사신을 파견한 상태였고,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왕국들도 사신들을 파견하기 위해 분주했다.

모두 이 일련의 사태로 자신들이 얻게 될 득과 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특히나 이미 전쟁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던 알버스크 왕국은 벌써 부터 왕국 전체에 비상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사태가 왕국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그 어느 왕국보다 규모가 커다란 사신 일행이 케린버그를 향해서 떠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제 곧 로이든입니다. 테렌스 공작 저하!"

로크 남작이 조심스럽게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국경을 지나면서부터 테렌스 공작의 말수가 적어지며 표정이 좋지 않아서였다.

알버스크 왕국 사신 일행의 대표가 우울한 얼굴로 기분이 가라앉으니 일행 전체의 분위기도 가라앉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로이든이 가까워오자 로크 남작이 결국 공작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 생각보다 케린버그가 멀리 있지 않군!"

"네? 아~ 네, 그렇습니다."

황급히 머리를 조아린 로크 남작은 공작의 엉뚱한 말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국경을 넘으면서 케린버그의 군대를 자세히 보았나?"

공작의 질문에 로크 남작은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자신들을 검문하던 케린버그의 병사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나 겉모습 이외에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던 로크 남작은 공작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리를 긁적이는 로크 남작을 보고 테렌스 공작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알버스크 왕국은 지난 세월 동안 오로지 군사력 증강에 힘써왔어. 나름대로 강병을 소유했다고 자부해 왔는데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라는 것을 그들을 보고 깨달았네. 마치 세월을 앞서 가 있는 군대였어. 이보게, 로크 남작!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우리보다 훨씬 더!"

마지막 말을 할 때는 테렌스 공작의 얼굴에 비참함마저 느껴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앞서 뛰는 상대를 따라 잡을 수 없을 때 느끼는 자괴감이 로크 남작에게도 느껴지자 그의 얼굴도 곧 공작의 얼굴과 같은 표정이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이 침묵하자 사신 일행은 마치 장례행렬처럼 고요했다.

여기저기 아직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헤나스톤을 지날 때에는 테렌스 공작이 잠시 멈춰 서서 그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려보듯이 오랫동안 있기도 했다.

"로이든이 보입니다!"

길잡이의 커다란 고함소리에 일행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언덕을 넘어서자 로이든 성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오늘 따라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기 그지없다.

관도를 따라 이동하는 알버스크 왕국의 사신일행들은 여기저기서 복구 작업을 하는 케린버그 병사들을 보며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보았다.

"우와! 저, 저것 좀 봐!"

일행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은 기간테스였다.

금속의 거대한 거인이 돌을 나르는 모습은 사신일행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알버스크에서는 왕국 최대의 기밀이라서 왕국의 최고위층 몇몇 만이 아는 기간테스를 이곳에서 쉽게 대하자 테렌스 공작은 허탈하기까지 했다.

"허~ 뭐야? 숨길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 그 정도란 말이야?"

사신일행들은 웅장한 기간테스들의 모습에 넋을 잃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놀랄 일들은 앞으로도 많이 남아 있었다.

"멈추시오! 신분을 밝히시오!"

정문으로 들어서자 폴렌시아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사각형으로 감옥처럼 갇힌 형태의 장소로 들어온 사신 일행은 위압감을 느꼈다.

마법으로 증폭된 소리처럼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동안 우리에 갇힌 신세가 된 사신 일행은 벽에 난 구멍에서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기에 모두들 마른 침을 집어 삼켰다.

잠시 후 일행을 대표해 로크 남작이 열려진 문으로 들어갔다 나오자 앞을 막아섰던 벽이 서서히 움직였다.

돌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귀를 자극하며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들 중 몇몇은 로이든에 온 적이 있었지만, 이미 이곳은 그들이 예전에 알고 있던 로이든이 아니었다.

일단 첫 느낌은 군사도시였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낯선 복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는 풍경이었다.

거기에 더 충격적인 광경은 레센 제국의 병사들과 케린버그의 병사들이 마치 형제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알버스크 왕국의 사신 일행들에게 그런 장면들은 여기가 로이든인지 레센 제국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서자 낯설게 보이는 장비들과 건물들이 눈에 띄었고 도시의 길목마다 전투를 위한 병참호가 만들어져 있었다.

물론 알버스크 사람들은 처음 보는 시설이었고 발리스타처럼 생긴 것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소름 돋게 만드는 위압감으로 방문자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안내자를 따라서 몇 블록을 더 지나가자 성벽이 나타났다.

외벽과 달리 조금은 규모가 작게 느껴지는 성벽이었지만, 그 위에도 눈빛을 빛내고 있는 병사들이 성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서자 겨우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쟁에 승리한 탓인지 케린버그 주민들의 모습은 활기차 보였다.

도시는 생동감이 넘쳤고 골목마다 즐거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전형적인 승전국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알버스크 왕국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본 테렌스 공작은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흔들었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심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다시 금 군인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이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미리 파견되어 있던 트웨인 백작이었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공작님!"

"아니야. 고생은 자네가 정말 많았겠지."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던 두 사람은 주위의 눈을 의식하고서 서둘러 내성으로 들어갔다.

이제 케린버그의 내성에는 수많은 왕국들의 사신들과 정보꾼들이 모여 있는 대륙의 중심이었다.

괜한 말을 해서 주목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트웨인 백작의 안내로 알버스크 왕국의 숙소로 들어온 일행은 곧바로 트웨인 백작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정말 놀라워! 그 정도라니 믿기지가 않아."

"제 눈으로 본 건만 그런데 드러나지 않은 숨은 힘까지 포함시킨 다면 상상을 불허하는 전력입니다."

"아니야, 대륙에 제일이라고 할 수 있겠어. 물론 로베니아가 비록 패했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저력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단정 짓기는 뭐하지만. 케린버그 뒤에 레센이 있다면 가히 지금의 케린버그는 대륙 제일이다. 이제 왕국이 아니라 제국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게까지나......."

테렌스 공작의 말에 트웨인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시했고, 로크 남작은 반신반의 하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지금 로이든은 대륙의 거의 모든 왕국의 사절단이 파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에 이곳의 공기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풍문으로는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가 서거했다고 합니다."

"뭐라? 트웨인 백작이 그 말이 사실인가?"

테렌스 공작이 당황한 얼굴이 되자 트웨인 백작은 조금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전에 잡혀 있던 접견들이 모두 취소되고 성으로 오고가는 마차의 수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뭔가 큰 일이 벌어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혹, 로베니아 제국의 반격은 아닐까요?"

로크 남작의 추측에 백작은 아니라고 했고 테렌스 공작도 현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 피해를 입었다면 최소한 일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군사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 역시 발렝 황제에게 변고가 생겼다는데 무게를 두고 싶은데, 여기서 이상한 점은 왜 이제야 이 이런 소식이 전해진 걸까? 전쟁이 끝난 것이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만약에 발렝 황제가 전쟁 중 부상을 당했다거나 그랬다면 우리에게도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지 않았나?"

턱을 쓰다듬는 공작을 보며 트웨인 백작이 부연 설명을 했다.

"잘 보셨습니다. 공작님! 전쟁이 끝나고 발렝 황제는 그 어떤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곳의 분위기로 보아 발렝 황제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다거나 하는 정보도 전혀 없었던 터라 만약에 발렝 황제가 서거한 것이 맞다면......."

"반란이 일어났다는 뜻인가?"

대답대신 눈빛을 빛내는 트웨인 백작을 보며 테렌스 공작도 앓는 소리를 냈다.

로크 남작만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제국이 무너진다. 제국이!"

테렌스 공작이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두 눈이 번들거리며 범상치 않은 기도를 드러내자 트웨인 백작과 로이드 남작은 공작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크하하하! 로베니아라는 무적의 철옹성이 금이 가기 시작했어! 내가 죽기 전에 로베니아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던 테렌스 공작이 트웨인 백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백작! 찰스 국왕과 최대한 빨리 자리를 마련하도록 해라!"

갑작스럽게 변한 공작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자 어깨를 들어 보이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다였다.

두 사람으로서는 공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무사히 로이든에 도착한 걸로 만족하며 밤을 맞이했다.

* * *

모두가 잠이 드는 깊은 밤에도 찰스 국왕의 궁전은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틀림없습니까? 만약에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눈앞에서 부하들을 잃고 발렝 황제를 놓친 머스탱 공작은 발렝 황제의 죽음을 듣고 제일 많이 흥분했다.

그의 두 눈이 레센의 봄멜 공작의 얼굴에 꽂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봄멜 공작도 개운하지 않은 얼굴로 일어섰다.

"모두들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난감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제국 첩자들의 보고들이 모두 일치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첩자 중 하나가 그 장소에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누가 황제를?"

조용히 침묵하던 찰스 국왕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지 봄멜 공작에게 궁금함을 물었다.

잠시 눈을 찡그리던 봄멜 공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것이 앙뜨네트 황후와 그의 숙부인 몽셀 공작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가!"

"저런!"

봄멜 공작의 말에 삽시간에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모두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고, 심지어 말도 되지 않는다면 봄멜 공작의 정보가 엉터리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머스탱 공작이 일어서자 조용해졌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레센 제국의 첩보망이 허술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봄멜 공작님의 말씀처럼 이미 제국의 주인은 바뀌었다고 봐야 합니다. 저들도 뭔가 이유를 내세워서 황제의 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을 대륙에 알릴 테고 그 때 진위여부를 논해도 늦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정보란 것은 시기가 늦으면 그 효용가치가 없는 법이니 저희는 이제 새로운 대응태세를 확립하여 로베니아 제국의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머스탱 공작까지 나서자 모두들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게다가 머스탱 공작의 말처럼 연합군에게는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좋은 말이오. 이제 케린버그와 레센 연합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오. 물론 이것은 양국의 번영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공동의 적인 로베니아의 위협이 끝나는 날까지 두 나라는 피를 나눈 형제의 사이로서 지낼 것은 요한 황제 폐하와 약조를 하였소. 그러므로 우리는 밖으로는 대륙의 정세 변화와 로베니아 제국의 행보에 귀를 기울이는 동시에 안으로는 나라의 발전에 힘써야 할 것이오. 그래서 요한 황제와 나는 몇 가지 일에 대해서 서로 합의를 도출하였고 오늘 이 자리에서 발표를 하도록 하겠소."

사뭇 진지한 표정의 찰스 국왕을 모두가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요한 황제가 찰스 국왕에게 손을 들어보이자 찰스 국왕이 앞에 나서서 선언했다.

"케린버그와 레센은 피를 나눈 형제국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케린버그는 우리가 얼마 전에 복속한 세린디아를 레센 제국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회의실이 난장판이 될 정도로 소란스러워졌다.

세린디아를 점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데 그걸 고스란히 레센에게 넘기다니 수없이 많이 이들이 반대하고 나섰지만, 찰스 국왕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확고한 의지를 나타냈다.

요한 황제가 나서서 두 제왕이 구상한 원대한 계획을 이야기하자 소란스럽던 이들의 입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지며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이제껏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미래였고 핑크빛 청사진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모두들 흥분했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참지 못했다.

두 제왕의 선언이 끝나자 좌중의 모두 이들이 기립하여 뜨거운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는 한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중에는 레센과 케린버그의 귀족들이 한데 어울려 손을 맞잡고 이구동성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라도 보이려는 듯 두 손을 꼭 마주잡은 봄멜 공작과 머스탱 공작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마주했다.

"이제야 진정한 형제국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봄멜 공작님, 그러면 우리끼리도 형제의 인연을 맺는 것이 어떨까요?"

"머스탱 공작님!"

모처럼 의기투합한 두 공작을 보며 찰스국왕과 요한 황제는 그들의 원대한 꿈에 한 발 다가간 것 같아서 흐뭇했다.

회의가 끝나자 케린버그와 레센 양국의 연합국은 무척이나 바빠지기 시작했다.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한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일 년 내내 겨울만 있는 동토의 제국 레센에서 사람들이 넘어왔다.

따뜻하고 곡식이 풍부한 세린디아로 이주를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척박한 땅에서 힘들게 식량을 해결하던 케린버그 또한 리하나 강 유역을 손에 넣고 대규모 농업용지로 개량하기 시작했다.

많은 농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다.

산에서 힘들게 경작하던 농민들이 제일 먼저 듣고 달려왔다.

세제 감면이나 그런 혜택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가서 등록하면 자신의 땅이 된다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소작농들은 부푼 꿈을 안고 몰려들었고 금세 리하나 강 유역은 최고의 농경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오랜세월 홍수와 강의 범람 속에서 퇴적된 퇴적층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이모작도 능히 문제없어서 늘 식량 부족으로 겨울이면 먹을 것을 걱정하던 케린버그는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고 케린버그 전체 영토 크기와 맞먹는 리하나 강 유역 개발은 앞으로 케린버그가 식량 문제로 더 이상 마음고생할 일이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사이클론과 김재덕 과학부 장관의 노력으로 빨리 자라는 새로운 품종이 개발되었고, 농기구등의 개선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케린버그의 농업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과거 세린디아의 영토도 케린버그에게 인계받은 레센 제국이 빠르게 장악해갔다.

구 세린디아의 유민들은 그들의 뜻에 따라서 레센과 케린버그 양쪽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그들의 뜻에 따라서 이동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유민들이 케린버그에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케린버그가 새롭게 개발하고 있는 리하나 강 유역으로 편입되었다.

케린버그는 전쟁 이후 늘어난 영토의 관리와 국경관리를 위해 군대 양성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로베니아와의 전쟁에서 워낙에 많은 희생이 따랐던 터라 군대 증강은 필수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는 터라 나형석 장군의 명령에 의해 잉글햄의 모스크 산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훈련소를 로이든 인근으로 옮겨 대규모로 신설하였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기간병들 중에 부상으로 더 이상 전투에 참전하기 어려운 자들과 노회한 이들이 조교로 투입되어 신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신병 확보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거였다.

충분한 보수도 보수였지만, 케린버그가 로베니아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왕립군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꿈은 대단했다.

전쟁 후 짧은 휴가기간을 가진 병사들이 고향에 다녀온 것이 신병모집에 불을 붙인 계기가 되었다.

시골에서 그냥 저냥 살아오던 젊은이들이 제복을 입은 친구나 형들을 보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초기와 달리 여러 가지 면에서 여유를 가지게 된 나형석 장군은 현대적인 군대조직으로 케린버그 왕립군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경험은 조직을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경험 많은 장교를 많이 배출하게 되어 정상적인 군 편제를 가지게 되었고 현대의 사관학교와 비슷한 왕립사관 학교도 창설하게 되었다..

새로 생긴 왕립사관학교는 귀족들의 자녀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룰 정도였다.

그것은 찰스 국왕이 구상하는 새로운 나라에서 그저 무위도식하는 귀족들은 도태할 수밖에 없는 나라로 케린버그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왕 스스로 자리를 내놓고 하겠다는데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머스탱 공작마저 다음 대 공작 위는 세습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그의 아들 루크마저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자 왕국 내에서 불만 세력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만 했다.

새로운 체제를 따르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결정해야하자 별 능력 없이 그저 손에 쥔 부와 권력에 매달려 살아온 젊은 귀족들의 불만은 매우 거세게 일어났다.

노회한 귀족들이야 상관없었지만, 앞으로 영달을 누리려던 능력 없는 귀족들은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꽤 많은 수의 귀족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인근 왕국으로 이주를 했다.

다행인 점은 예상보다 적은 수가 빠져나갔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머스탱 공작의 아들이자 케린버그 왕립군 장교인 루크 소령의 교두 연설이 큰 몫을 했다.

수도 로이든에서 수많은 인파가 몰린 승전 기념식에서 많은 전쟁 영웅들의 대표로 나선 루크 소령의 제복 입은 모습은 나태한 삶을 살아온 젊은 귀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뭔가를 잊고 살아온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렇듯 찰스 국왕이 염원했던 시민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들이 왕국의 전역에 걸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찰스 국왕은 호크와 나형석 장군 그리고 김재덕 장관과 오랜 시간 대화를 가졌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그들의 근대문화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정체된 문화는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문명이 발전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그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찰스 국왕은 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케린버그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저 일반 백성에서 사람들은 시민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시민들이 곧 사회의 구성원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국가를 위한 의무와 권리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 필수요소로써 케린버그 전역에 교육기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정 수준의 교육을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적어도 나라에서 공고하는 포고문 정도는 읽고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법 이동 게이트가 전역에 설치되어 케린버그는 일일 생활권의 광역국가로 거듭났다.

군대는 서서히 조직을 정비해 나가며 제국에 뒤지지 않는 거대 국가로서 탈바꿈해 가고 있었다.

케린버그가 이렇게 마음 편하게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을 같이하는 혈맹 연합국인 레센 제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레센 제국이 세린디아의 영토에 자리를 잡는데 케린버그는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레센은 그런 케린버그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케린버그와 식량을 아끼지 않고 나눴고 제국의 병사들을 케린버그의 피해복구 작업에 아무런 조건없이 많은 인력을 제공하였다.

전후 복구를 통해 양국의 국민들과 병사들은 사심 없이 힘을 합쳐 새로운 나라 건설에 박차를 가한 결과, 레센 제국은 꿈에도 소원인 얼지 않는 땅을, 그리고 케린버그는 다른 곳에 눈치받지 않고 겨울내내 주린 배를 움켜쥐지도 않게 되었다. 케린버그 백성들은 더 이상 누나나 딸을 노예로 바치지 않게 되어 그 기쁨이 노래로 까지 만들어졌다. 하지만 히야신스가 가득핀 베를로리나의 평원에 도착한 레센의 요한 황제가 마차에서 뛰어 내려 어린아이 마냥 들판을 뒹굴었다는 소문에 비하면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모스크 산맥이 얼어붙기 전에 레센 제국은 세린디아 영토로 이전을 끝냈고 따뜻한 대지에 온 제국민들은 기쁨과 감동을 끌어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발전과 번영은 주변 왕국에게는 시샘과 질시의 대상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서 폴렌시아 대륙은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었다.

케린버그, 레센의 연합국이 제일 강한 세력으로 떠올랐고 비록 색은 바래지만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저력을 갖춘 로베니아 제국 그리고 알버스크 왕국을 필두로 조심스럽게 모인 스베인, 할란, 라크마이어 왕국 삼국 연합이 3강을 이루었다.

그렇게 세력구도가 확립되자 군소왕국들은 오히려 로베니아 제국이 패자로 군림할 때가 더 좋았다며 불안해했다.

세력 구도가 비슷해지면 전쟁이 벌어지기 쉬었고 더구나 이렇게 넓은 세력구도는 전쟁의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기에 괜한 불똥이 자국에 튈까 두려워 군소 왕국들은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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